우리 전통문화의 참모습⑧

선비정신의 한계




전완길 / 태평양박물관장

1.

조선사회의 지배층을 형성했던 양반, 그 양반제도의 핵이었던 선비가 서열차대·재가금지·신분제고수 등의 병폐를 안고 있었지만 부정부패와 백성착취·당파분쟁, 나아가서는 조선왕조 패망과 주요인자로만 평가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전통문화와 전통사회의 주역으로서 지녔던 사상과 생활자세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그들의 실상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했었다.

그런데 필자가 조명한 그들의 독특한(?)사상과 생활자세는 이미 조선 중기에 이르러 제도적인 결함으로 붕괴하기 시작하였고 말기에는 양반제도의 붕괴와 아울러 선비사상의 쇠락이 현저해졌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고찰해보는 것도 전통사회 특질구명의 한 방법일 것이다.

2.

선비가 양명하려면 관리가 되어야 한다. 관리가 되면 자신의 양명은 물론 가문의 영화를 보장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손의 입신도 보장하게 된다. 그런데 관리가 되는 길은 한가지다. 과거에 합격해야 한다. 〔공신 또는 현직 당상관의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등용하는 음서가 있었고, 도 추천에 의하여 등용되는 예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과거에 합격하면 승진되었으므로 과거를 매우 중시하였다.〕

그러므로 과거를 위하여 25∼30년간 공부하는 예가 허다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오랫동안 준비 끝에 합격하였더라도 곧 관리가 되지 못하였다. 조선초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한정된 관직에 합격자가 점점 많아짐으로써 이를 소화하지 못해 문제가 야기된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으니 17세기말에 이미 곪고 있었다. 이익(1681∼1763)의 지적을 빌리면,

「과거를 보이는 것은 장차 등용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 제도에 자·오·묘·유 네 해로 무년을 삼아 문과에 33인, 생원과와 진사과에 각각1백명 씩이나 뽑는다. 입사와 치사를 대략 30년간 2천 3백 30명이 된다. 지금 내직은 병조의 소관을 제외하고 이조가 주망하는 것이 4백 자리가 못 되고, 외직도 이와 맞먹는데 무과·광음·비문·유품 등 3백 자리가 또 거기에 끼어 있으니 나머지가 5백여 자리에 불과하다. 이5백여 자리로 2천 3백명을 골고루 임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원·진사는 높은 벼슬아치와 연줄이 닿아야 벼슬을 얻고, 문과라도 돌보아 주는 이가 없으면 한 번 체직된 뒤에는 다시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생원·진사로 늙어 죽는 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도 목을 늘이고 침을 흘리면서 말단자리라도 얻으려고 기대하며 분수를 잃는다. 간혹 입사하는 자도 뇌물을 바치거나 아첨하여 선비의 도리를 잃고 행정에 임하여선 남의 청탁을 어기지 못한다. …무과의 부정이 더욱 극심하다. 무사들이 너무 많아서 세도가에 청탁하지 않으면 벼슬을 얻지 못한다. 이 때문에 전형을 관장하는 집에는 청탁군들이 날마다 몰려들어서 경쟁하기까지 한다. 청렴과 체면을 손상시켜 벼슬을 얻으니 군대를 다스리고 나라에 충성하겠는가?

청탁이 청탁을 낳고, 뇌물이 뇌물을 부르며, 한 번 오염된 청렴이나 정심은 계속 오염되기 마련이어서 양반관료제의 붕괴를 가져온다. 양반관료제의 붕괴는 선비정신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익의 이런 지적이 있기 전에 이미 과거제가 부패되고 있었다.

「과거로 선비를 뽑는 데도 모두 사정을 써서 고관과 응시자가 서로 통하여 혹 남의 글을 빌어다가 쓰고서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고, 벼슬을 얻고 나면 대성과 관각을 자기의 소유물 같이 알며, 계급을 초월하고 순서를 건너 뛰었어도 남이 말하지 않고, 누가 물을라치면 이는 누구의 문하에서 나와 무슨 일을 관장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예고가 나면 시험제목이 이미 알려져서 합격자 명단을 써붙이기도 전에 합격여부가 가려진다. 그래서 최근에는 과거 보려는 선비가 공부를 폐지하고 오로지 사람 교제에만 힘쓰며 이런 풍토를 싫어하는 선비는 숨어 살기로 작정하였다.

이렇게 개탄한 신?(1566∼1628)은 매관매직의 사실까지도 밝히고 있다.

「무관과 음관의 크고 작은 벼슬자리 임명이, 망에 올리는 것과 점고를 받는 것까지 모두 뇌물을 쓰게 되는데 시중의 장사치들이 가령 무슨 벼슬을 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먼저 은 얼마를 내서 그 벼슬의 고하와 좋고 나쁨을 따져 값을 흥정하고 한쪽으로는 인사관리에게 은을 바쳐 망에 올리도록 하고 한쪽으로는 관인에 은을 바쳐 점고 받는 길을 튼다. 뇌물이 다 들어가고 나면 그는 앉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즉 병사나 수사를 하고싶은 자는 병사나 수사가 되고 목사·부사가 되고 싶은 자는 목사·부사가 되며 군·현·진·보에 이르기까지 값을 주고서 사지 못하는 벼슬이 없다. 이리하여 장사꾼과 그 사람이 상의해서 부임하면 그 사람은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내어 낮과 밤으로 모아 가지고 뇌물로 쓴 값에 갑절을 갚으니 1백냥을 쓴 자는 2백 냥을 얻고 2백 냥을 쓴 자는 4백 냥을 얻는다. 만일 벼슬을 얻은 자가 갚기 전에 파면당하거나 죽으면 장사꾼이 곧바로 그의 집에 가서 받기 때문에 집과 논밭·종까지 모두 팔아서 갚는 일도 있다. 이정표가 바로 그런 예이다. 무뢰배였던 그는 임해군과 대군을 죽일 당시 협력한 일로 병사가 되었는데, 장사꾼을 시켜 은 수백 냥을 바치고 선제사에 올랐다. 그러나 임지에 닿자마자 악질에 걸려 죽었는데 손해보게 된 장사꾼이 분이 나서 전수 본가까지 찾아가 받아냈다 한다.

전 국토를 초토화하다시피 한 임진왜란(1592∼1598) 때 이미 조정에서 국가재정궁핍을 핑계로 매관매직까지 까지 하였는데 이처럼 한번 붕괴된 기강이 선비의 체질로서는 회복하기 어려웠고 게다가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한정된 관직에 해마다 증가하는 관리 희망자를 처리하지 못해 관료의 기강이 더욱 해이됨으로써 선비정신이 차츰 빛을 잃게 되었다.

3.

선비가 이상으로 삼은 사상과 생활자세가 취약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상적인 도덕국가를 지향한 생활율이 태평성대엔 걸맞지만 개인이나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대처하기 어려운 체질이었다.

서거정의 「太平閑話滑箏傳」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시골 사람이 넓은 들판에다 흙을 높이 쌓고는 그 위에 새 그물을 둘러치고 초둑이라 불렀다. 한 조관이 고좌 원으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행정에 어두워서 하루 종일 앉아 있기만 하였다. 마치 허수아비처럼.

한 백성이 여러번 송사를 올렸으나 처리하지 못하므로 원통한 나머지 원을 노려보면서 「마치 초둑같구나. 어느 때나 입을 열는지」하자 곁에서 한 사람이 웃으며 「그럼 원님과 초둑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나」라고 대꾸했다. 「초둑은 그 위에 그물이 있어 가끔 새가 걸리지만 원님은 아무런 일도 않고 우두커니 앉아 계시니 초둑만도 못하다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껄껄 웃으며, 「그게 무슨 말인가. 원님도 술사발은 들 줄 안단 말일게」하니 모두 배꼽을 쥐고 웃었다.

그는 또 이런 이야기도 소개하였다.

어떤 조관이 고을 원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위가 몹시 나빠서 음식을 들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다과와 주병만은 쉬지 않고 먹었다. 그는 성격이 매우 부지런하였지만 매우 서툴러서 비록 하루 종일 일을 보면서도 문서는 하나도 결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고을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그를 평했다. 「우리 사또는 능하지 못하면서 능한 것이 음식이요, 무엇을 부지런히 하여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이 바로 공사로다.」

그도 그럴 것이 관리란 사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송사를 다루기도 하므로 분별력이 뚜렷한가, 재덕이 우수한가, 용렬한가를 가름해야 하나 과거는 오직 문가가 아름다운 것만 시험하니까.

그래서 명신이 고을 원으로서는 낙제감이기도 하였다.

유호인이 한 고을을 빌어 노모를 편안하게 봉양하고자 하였으나 성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마다 혈성으로 원하므로 의성고을을 제수하면서 비밀리에 감사에게 나의 벗이니 잘 돌보아 주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얼마후 감사가 그의 업무성적을 고과했는데 최하위인 하지하였다. 임금이 노하여「내가 일찍이 명한 바도 있는데 어째서 호인을 꼴찌로 했는가」하니 감사의 대답은 「나라가 수재를 둔 것은 일신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백성을 사랑하고 사물의 법칙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호인이 음풍농월하여 관사를 다스리지 않았으니 하지하가 마땅합니다」고 대답하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관은 충의를 지키고 문가에 뛰어나면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원은 충의와 문가만으로는 안 된다.

같은 맥락으로, 청렴관리를 재평가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판중추 조오가 합천 수령이 되었을 때 여름에 농어가 많이 쌓여서 썩는 일이 있어도 자기 집에는 조금도 맛보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청렴에 탄복하였다. 그의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예조정랑 재직시 양식과 땔나무를 이어가지 못하였는데 동료가 쌀 3말을 주어도 받지 않았다.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 집에 물러 나와서도 집이 비어 달아 놓은 돌종과 같았으나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요구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청렴하고 독실한 군자였다.

한편, 안당은 평생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고 녹봉이외에는 저축한 것이 없어서 좌의정에 이르렀어도 청렴하고 검소하기로 이름 높았다. 부인의 상사에 조처할 길이 없어서 남에게서 꾸고 빌려서 상례를 치르니 여러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성품이 강직해 일찍이 호서안찰사가 되어 나갈 때 「말고삐 잡으면서 천하를 맑히겠다던 옛사람의 일을 내가 어찌 감당하랴. 다만 충의를 가지고 내 한 몸을 꾀하지 않겠다」고 시를 지은 일이 있다.

조오와 안당뿐만 아니라 조선의 그 많은 청백리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고관들인데 그토록 끼니를 걱정할 만큼 녹봉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일품인 좌의정의 녹봉을 보면, 봄에 중미 4석 현미 12석 육도미 1석 황두 12석 명주 2필 정포4필 저화 10장, 여름에 중미 3석 현미 12석 밀 5석 명주 1필 정포 4필이고, 가을에 중미 4석 현미 12석 육도미 1석 밀 5석 명주 1필 정포 4필이며, 겨울엔 중미 3석 현미 12석 황두11석 명주 2필 정포 3필을 받았다. 그리고 정오품인 예조정랑은 봄 중미2석 현미 5석 육도미1석 황두 6석 명주 1필 정포 3필 저화 4장, 여름에 중미 1석 현미 6석 밀 2석 정포 3필을, 가을엔 중미 2석 현미 5석 밀 2석 정포 3필을, 가을엔 중미 2석 현미 5석 육도미 1석 밀 3석 정포 3필이고, 겨울엔 중미 1석 현미 5석 황두 5석 정포 2필을 받았는데(이는 1439년 제정인 바 임진왜란 후 약간 감봉되었음) 이 정도의 급료를 받고서도 끼니를 걱정하고, 유관의 집이 비가 새고 맹사성이 방치장이 부들 자리뿐이었다면 지나친 과장이거나 치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의명분과 충의만 강조할 뿐,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고, 왜란이 종식된 후 황폐화된 국토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지 못해 정치·경제적으로는 물론 사상적으로도 혼란기에 접어 들고 말았다. 말하자면 선비의 사상과 생활자세는 태평성대를 현상유지 시키기에 적합하다. 조선 역사상 학자·문인이나 많지 경륜가가 아주 드문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이러한 취약성이 선비사상의 개화를 저해하였던 것이라 믿는다. 아마 지위와 재산을 동시에 확보했던 홍윤성이나 김안국이 유관만큼 칭송되지 않더라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더라면 조선 지배층의 경제관이 달라지고 조선의 경제사정이 달라졌겠지만 선비의 인생관으로는 그럴 수 없었으므로 선비사상이 한계를 지니게 된다.

홍윤성이 과거에 급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세조의 정난을 도와서 세조로부터 은총을 입고 많은 상을 받아서 재산을 모으기에 힘쓴 결과 수만냥의 돈을 모으고 쌀은 돈보다 갑절이나 되었다. 향노들이 물건을 사서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 그치지 않았고 짐을 실은 말들이 길을 막았으며 문 밖에 벌여 서 있는 자가 만 명이나 되었다. 크고 화려한 집을 짓고 못가에 빌딩을 세웠는데 세조가 친히 「경해」하는 두 글자를 써서 하사했다. 이름난 선비와 명사들을 불러모아 날마다 잔치를 여는데 음식이 풍부해서 옛날 자증의 만전짜리 음식도 이보다 나을 수 없었다. 음악소리가 밤낮 끊어지지 않았는데 모인 손님들은 주인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모두 술을 많이 마시고는 쓰러져, 떠메서 집으로 데려가곤 하였다. 광대와 기생들에게 주는 행하도 날마다 수천 냥씩 나갔는데 이렇게 부귀를 누린 지 20여년에 이름과 위세가 더욱 빛났다.

한편 찬성 김안국과 그의 아우 삼판 김정국은 모두 유림의 수장으로서 김안국은 이천으로 물러가서 살고 김정국은 고양으로 물러가서 살다가 19년 후에 다시 등용되었다.

어느 날 김정국이 이천에 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푸른 콩도 삶고 이를 따다가 김안국에게 주면 김안국이 이를 모두 받고 그 내력을 낱낱이 책에 적어 두었다. 이것을 본 김정국이 낯을 찌푸리며 「형님은 왜 이런 물건을 받으시고 또 무엇하러 책에 기록하십니까」고 물었다. 그러나 김안국은 「사람이 정성으로 주는 물건을 내가 어찌 물리친단 말이냐. 또 이것을 책에 기록하지 않는다면 이를 잊고 말것이니 어찌 남의 은혜를 저버린단 말이냐」하였다.

그들이 시골에 살 때 김정국은 간결하고 검소하고 담백해서 나물밥으로 겨우 끼니를 이었지만, 김안국은 전원을 가꾸고 곡식을 저장했다가 이것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또 누이중에 과부가 된 자들을 모두 데려다가 살리고, 안팎가에 모두 제사를 올리며 서제를 열어 놓고 학도들을 맞이하며, 향음례와 향회에도 모두 참석하였다.

그가 조정으로 돌아오자 집을 지을 일이 있어서 와공과 함께 값을 계산하고 있는데 어떤 재상이 오자 인사를 마치고 곧 다시 와공와 함께 토목의 가격과 역군의 값, 또 공장이들의 품값과 운반 삯이 얼마인가를 따진다. 이것이 끝나기도 전에 재상이 작별하고 돌아갔다. 옆에서 보고 있던 친척이 「재상이 왔는데 그와는 인사말도 하지 않고 딴 일만 보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고 건네니「내가 이렇게 한 것은 내몸을 위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온 나라에 통용되는 예를 만들기 위해서다. 만일 내가 와공에게 속임을 당한다면 나라안의 과부나 가난한 선비들이 장차 기와를 사쓸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일하는 중에 재상이 왔으니 어쩔 수 없지 않았는가」고 김안국이 대답하였다.

홍윤성이나 김안국이야말로 훌륭한 경륜가들이었음에도 그들을 칭송할 수 없었던 선비사상이 취약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4.

앞에서 살핀 문제는 제도적인 결함과 사상 자체의 취약성이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보여지는 관습이 선비의 기개를 오므라들게 하였다.

옛날에 새로 문과에 등과한 사람을 제재한 것은 호사의 기를 꺾고 상하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규칙에 따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바치는 물품이 물고기면 용이라 하고, 닭이면 봉이라 하였으며 술은 청주이면 성이라 하며 탁주이면 현이라 하여 그 수량도 한이 없었다.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허참이라 하고 10여일 지나 구관과 동석하는 것을 면신이라 하였는데 매우 엄격하였다. 성균관·예문관·승문관·교서관 뿐만 아니라 충의아·내금아 등 제아의 군사와 이전의 복례들도 새로 배속된 사람을 괴롭혀서 여러 가지 귀미를 억지로 바치게 하는데 한이 없어 조금이라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한 달이 지나도 동좌를 불허하고 연회를 베풀게 하되 만약 기악이 없으면 간접으로라도 책임을 추궁하는 일이 끝이 없다.

감찰은 옛날 전중시어직인데 그중에서 급이 높은 자가 방주가 된다. 상하 관원이 함께 내방에 들어가 정좌하며 외방은 배직한 순위에 따라 앉는 순서를 성한다. 그중에서 수석인 사람을 자방주라 하고, 새로 들어온 사람을 신귀라 하여 여러 방법으로 욕보인다. 방가운데서 서까래만한 나무를 신귀로 하여금 들게 하는데 이를 체홀이라 하며 만일 들지 못하면 신귀는 무릎을 내놓는다. 선배가 이를 때리되 윗사람부터 아랫사람까지 차례로 이어진다. 또 신귀로 하여금 물고기 잡기 놀이를 하는데, 신귀가 연못에 들어가 사모로 물을 퍼내어 옷이 모두 더러워진다. 또 거미잡기 놀이도 하는데 신귀가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질러 두손이 옻칠한 듯 검어지면 씻게 하고 그 물을 신귀에게 마시라 하니 토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신귀로 하여금 두꺼운 백지로 자소함을 만들어 날마다 선배 집에 넣게 하고도 수시로 신귀의 집에 몰려가 신귀가 사모를 거꾸로 쓰고 나와 맞이하게 하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선배에게 마다 여자 한 사람씩 안겨주는 안침을 강요한다. 술이 거나하면 상태별곡을 노래한다. 대관이 제좌하는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리에 앉도록 허락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 청에 나가면 상관인 제리가 함께 뜰 안으로 걸어 들어가 뵙는데 예가 끝나기도 전에 밤에 숙직한 선배들이 방안에서 목침을 가지고 큰소리를 지르며 치므로 신귀가 재빨리 달아나야지 지체하다가는 흠씬 얻어 맞는다. 이런 풍습의 유래가 오랜데 폐가 많아 성종이 엄금하였으나 없어지지 않았다.

예문관이 더욱 심하였다. 새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배직하여 연석을 베푸는 것을 허참이라 하고 50일 지나 연석 배푸는 것을 중일연이라 하였다. 늘 연석의 성찬을 신래자에게 부담시키는데 그의 집에서 장만하거나 다른 곳에서 준비해오되 어두어서야 음식을 내왔다. 춘추관과 그밖의 여러 겸관을 청하여 연석을 베풀었다가 밤중에 손님이 흩어지면 다시 선배를 맞아다가 연회를 열되 다시 성찬을 내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상관장은 곡좌하고 봉교 이하는 모든 선배와 더불어 기생 하나를 끼고, 상관장은 좌우에 기생을 앉히는 좌우보처를 행하였다. 아랫사람부터 위로 차례로 잔을 부어 돌리고 차례대로 일어나 춤추되 혼자 추면 벌주를 먹였다. 새벽이 되어 상관장이 주석에서 일어나면 모든 사람이 박수하고 춤추면서 한림별곡을 부르니, 맑은 노래와 매미 울음소리 같은 그 틈에 개구리 들끓는 소리를 섞어 시끄럽게 놀다가 날이 새어야 헤어졌다.

이러한 관습은 과장이 아니라 기록된대로 사실이었으니 이율곡이 처음 등제하였을 때 승문원에서 선진에게 부공하였다 하여 파직된 일이 있다. 그런데 더욱 기이한 것은 이 소식을 듣고 이퇴계가 이율곡을 나무란 일이다. 즉 그는 「신래자 희롱은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줄을 알고 그 길로 들어갔으니 이군인들 홀로 모면할 수 있겠는가? 이군의 일은 무슨 연유로 그런 것이니 모르겠지만 후진가운데에서 기?을 숭상하는 이가 있어 선진을 능멸하고 그 지시를 듣지 않는다면 보고 듣기에 해괴할 뿐만 아니라 의리상 온당한 일이 되지 못한다」하였다.

퇴계의 말인즉 선배에게 공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현이 지적하였듯이 신진 등과자의 호기를 꺾고, 기존질서를 지키며, 분위기에 잘 적응토록 하기 위해서 가혹하달만큼 엄격한 「신래학침」을 한 것인데 이「신래학침」이야말로 현상유지를 종용하는 의식인 것이다. 새로운 논리나 발전을 막았던 것이다.

기개를 말살시키기 위하여 학침을 자행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는 유명한 정치가가 드물다. 영웅이나 혁명가가 탄생할 수 없었다. 이율곡, 이퇴계, 조남명같은 이가 있지만 그들은 잠시 벼슬을 했을 뿐 행정가가 아니며 학자다.

스스로 발전을 막고 현상유지에 급급했던 선비, 그러니 선비정신이 개화하거나 길이 선양되지 못하고 위축될 가능성만 간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