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전통문화예술의 기록보존 . 기록보존의 필요성

악보를 통한 국악의 기록보존




홍원기 / 인간문화재

1.

우리 배달 민족은 아득한 상고시대부터 선천적으로 가무주를 즐기고 멋과 흥이 많은 민족으로 이웃중국에서 부러워하여 기록된 문헌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국악은 문헌상에 기록된 것이 오랜 역사를 지녀오긴 하였지마는 조선조 세종조때 세종대왕께서 창안하신 정간보상에 가악·무악·기악의 악보가 기록된 이전-다시 말해서 부요-고구려-삼한-신라(가야국 포함)-고려국 등의 국악에 대한 기록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막연하고 신빙성이 없게 보이는 것이 많다 하겠다.

물론 그러한 사실은 우리나라 사람의 말을 중국의 한자를 빌어 썼고 인문이 조금 진보된 시대에는 이독문으로 표시하는데도 일로와 시간이 소요되었고 지역적으로 유통과정이 원활치 못하고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해도 국가의 재정관계로 위신상 궁내용으로 소극적인 제례·연례에 쓰일 정도로 유지하였으리라 믿으며 표기로 기록된 것이 있다해도 이웃 강대국의 침범이 잦은 상태에서 병화에 소실되었거나 산실되어 후세를 위해서 홍보적 계승적인 여건이 불가능하였기에 문헌상에 기록·보존이 용이치 않았을 것으로 추측을 하여 보는 바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종조 이후에 세종대왕이 창안하신 정문보가 국가에서도 용이하게 활용되어 작곡의 열을 올리게 된 것도 아니고 일조일석에 작곡이 속출된 것도 아닌 상태에서 세월은 흘러가고 민간에서는 재정적 뒷받침이 없는 환경에서 국악교육기관이 생길 수도 없는 바니 국악에 관한 기록은 더욱이 귀할 수밖에 없다 믿는다.

이조음악의 발전적인 요소로 정간보 출현은 남녀상열지사인 고려가요를 이조중종∼명종년간 간행으로 추측하는 시용향악보에 실려 오늘날에 와서 귀중한 세종·세조실록악보에 버금가는 고보로서 보존하게 되고 국문학계에서나 국악 연구가들에 기대한 자료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아닌데 작곡자의 이름이 없는 게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서양음악이 판을 치는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양악으로 채보작업을 해서 비교적 기록보존의 도움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씨 조선조에는 궁중의 연례·조회·국빈내조·문묘·종묘제례악 등의 양식과 악사교육을 맡는 아악서·전악서가 있어 두루 관장하여 기록과 관리를 맡아 오다 이조말년에는 장악원 그리고 일제시대에는 이왕직아악원,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문교부 산하 국립국악원으로 개칭되고 국가시책에 순응, 기록-보존-교육-해외공연으로 국위선양을 하고 있으나 국악발전에는 위정당국에서의 적극적인 배려와 육성지원, 국안인들로 하여금 연구와 활동을 하게끔 우대방법이 있어야 할 것으로 희망을 걸고 서를 대하는 바이다.

2.

국악의 기록을 기하고자하면 범위가 넓고 막연하고 지면의 약속도 있고 해서 세종실록악보에 대하여 기록거리가 많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악보 없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기사는 간단히 쓰고자 한다.

1. 거금 일사○○여년전 고구려 장수왕 때 중국 진나라 사람이 고구려에 보낸 칠현금을 개조한 왕산악(삼대악성)은 현금 명 연주가이며 백여곡 작곡하였으나 곡목도 전하지 않고 후계자 없는 것이 유감이다.

2. 거금 일사○○여년전 신라시대 가야국 가실왕이 당의 악기를 보고 개조, 십이현의 기야금을 제작, 악사 우륵명 연주가 심이곡 작곡.

작곡 : 하가나도 상가나도, 보기, 달기, 사물, 물혜,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적상기물(십이곡).

진흥왕12년(서기551년)삼월국원경(지금 충주) 어전주악(하림조, 눈죽조)신곡이곡, 총115곡.

3. 신라인 옥보고(현금명인) 지리산운산원서 신조 삼십곡(곡명생략).

현금계보 : 옥보고-속명득-귀금(삼곡작곡), ┌ 안장 ┌ 극상

│ └ 극종

└ 청장

※이상은 악보부전의 곡목과 작곡자만 기 하였음.

△이조세종실록 : 세종대왕 존위 33년간의 기사를 편찬한 163권중 권제136∼제147까지 세종실록악보만 수록.

1. 세종실록권제136

①아악보 서

②아악보 목록

조회악 황종궁일∼이십육, 제사악 황종궁일∼십이 ―별궁보로

2. 세종실록권제136

제사(문묘악) 황종궁이하 십일궁



위 황종궁 악보야말로 중국 원나라 임우란 사람의 작곡으로 공자님 문묘제례악에 쓰인 악곡이며 유구한 원시적인 음악을 감상하는 듯 한 음 한 음 동안을 띠면서 지극히 단조로운 음계를 가진 태고연적인 음악이며 현재도 일년에 한번(재정관계로)정도 명륜동 성균관 대학교 울안 대성전과 그 앞뜰에서 팔일무와 곁들여 진행하는데 첫 번째 들려오는 종성보이다.

3. 세종실록권제138

정대업지무악보(15곡)

보태평치무악보(11곡)

세종조에 작곡된 것이나 세종조 때에 비로소 주악하였다(악보 생략)

4. 세종실록권제139

발상지무악보(11곡) (악보생략)

5. 세종실록권제 14○

여민악보…용비어천가(한시) 수장∼사장급졸장

치화평보상…용가(초∼졸장)

6. 세종실록권제141

치화평보중…용가(초∼졸장)

7. 세종실록 권제142

치화평보하상용가(초∼42장)

8. 세종실록 권제143

치화평보하중용가(43∼84장)

9. 세종실록 권제144

치화평보하하용가(85∼졸장)

10. 세종실록 권제145

취풍형보 용가(초∼62)상

취풍형보 용가(63∼졸장)하

11. 세종실록권제146

봉황음1∼3

만전춘 우 동

12. 세종실록권제147

사직악장

전폐 응종궁

작헌 〃

철변두 〃

종묘악장

나창 내종궁

전폐 〃

익조(제1실) 〃

도조(제2실) 〃

목조(제3실) 〃

태조(제4장) 〃

공정왕(제5실) 〃

태종(제6실) 〃

음 복 〃

철변두 〃

목조영녕전 〃

풍운뢰우산천성황악장 (생략)

선풍악장 ( 〃 )

선잠악장 ( 〃 )

우사악장 ( 〃 )

문선왕석전악장

전폐 남녀궁

왕위작헌 〃

연국공 〃

성국공 〃

근국공 〃

추국공 〃

철변두 〃

독제악장 정동방곡

문소전악장 (생략)

이상으로 세종실록에 기록된 국악보는 확인되고 아울러 세종대왕의 거룩하신 업적이야 만방에 음악사상 빛나는바 필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찬탄하며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세조실록악보를 들여다 볼 적에 느끼는 것은 세종악보가 32정간인데 비하여 세조악보는 16정간이며 중국에서 들여와 쓰이던 필자(문자)보가 아니고 낯설은 궁상하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제 아악보에 율자보 세가지 보를 비교해서 알 수 있도록 별첨 악보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세조악보에 실린 곡은 현행 종묘제례악에 쓰이는 종경보 그대로 임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 그 궁상하보를 첨부함으로 세조대왕의 독창적인 16정간에 표기한 것을 제시하는 바이다.

3.

32정간에 기록된 세종악보(가악, 무악, 기악)의 일부를 제시한 율자보와 16정간(세조대왕이 창안한 궁상하보)에 기록된 세조악보의 일부를 제시한 악보,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난 악보(금함자보에 나타난 육보와 여러 부호로 이루어진 합자) 등의 양상은 세종악보의 음의 장단격인 32정간이 소멸하고 3∙2∙3∙3∙2∙3 소위 육대공의 16정간으로 통일되어 표기한 것이 드러나고 있다.

악보로의 체재는 다 일색으로 같지 않지만 첫줄(일행)에 율보 또는 궁상하보로 표시, 2행에는 장고문자부호(쌍 요 고 편), 3행에는 박(자) 표시, 4행(5행)에는 가사를 적은 것이 대부분인 인상이라 보는 바이다.


율자(음의 고저)보, 공척보는 중국에서 들어온 악보이나 우리나라 국악보에는 지금도 주요 골자로 쓰이고 궁상하보가 세조이후 오랫동안 계속은 되었으나 이조말기에 들어서서는 외면당하고 율자보가 연면히 쓰이며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보겠다.

하여간 인지가 발달되고 악보상 기록도 개량하여 부족한 것을 보완한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1백년전 이왕직아악부의 함화진 아악사장의 부친되시는 함재운 국악사장께서 새로운 신보법을 창안하고 이왕직아악부(현 국립국악고등학교) 양성생에게 교재용으로 율보(고저) 장단 강약(장고 표기) 그리고 각 악기의 연주상 필요한 각자 부호를 첨부하여 악곡적으로 해설하고 공자의 문묘제계악보, 이조 역대왕의 종묘제례악보, 연례악보, 각 성악보, 각 악기의 연주보 등이 정비되어 마침내 기록보존이 확고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또한 앞으로도 자세히 채보를 연구하는 분이 나타나 과거의 악보를 재검토한다면 더욱 정밀히 보완되어 빈틈없는 악보가 될 것을 기대하면서 결론을 맺고자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