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의 현장

장승과 기러기가 지켜주는 마을

―엄미리 산신제를 중심으로




황루시 / 이화여대 강사

부릅뜬 눈이 험상궂으나 그래도 친근한 귀면의 장승은 장신, 수살, 벅수, 우석목 등 다양한 이름을 갖고 아직까지 전국의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민간신앙물이다. 흔히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으로 남녀 한 쌍을 만들어 동네 입구에 세우는 이 장승의 기원은 정확치는 않으나 적어도 신라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장승의 기능은 외부로부터 흉액을 막는 지역수호신, 마을경계표시, 그리고 이웃마을과의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 등으로 알려져 있고 사찰입구에 세워지기도 한다.

대개 장승과 함께 세워져있는 솟대는 「별읍」「소도」 등의 기록과 관련되는 것으로 그 원형이 더욱 깊으며 성역사상을 보여준다.

이처럼 장승과 솟대는 마을을 지키고 신성시 여기려는 고대로부터의 의식을 보여주는 신앙불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이해를 깊이 하려면 구체적 종교의례와 관련시켜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장승과 솟대는 부락제(또는 굿)기간 동안 새로이 만들어 세워지고 고사도 지낸다. 나무장승은 10년을 넘기기 어렵고 솟대는 한해를 못 가므로 1년 또는 2∼3년마다 지내는 부락제 때마다 새롭게 깎아 세우는 것이다.

이제 장승과 솟대를 중심으로 부락제를 지내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엄미리의 「산신제」를 살펴봄으로써 살아있는 민속, 마을주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신앙대상물로서 장승과 솟대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마을개관

엄미리는 남한산성 쪽으로 가는 큰길가 엄고개에서 양쪽으로 갈라져있는 두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본고에서 다룰 산신제를 지내는 곳은 엄고개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 있는 새마을(신촌), 미랴월, 벽수(벅수) 3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50여호 남짓 되는 작은 마을이다. 예전에는 그냥 미랴동이라고 불러왔는데 일제시대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엄미리로 묶여졌으나 산신제만은 지금까지 건너편 마을과 따로따로 지냄으로써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새마을에는 안동 김씨, 벽수골에는 황주이씨, 그리고 미랴월에는 곡부공씨가 중심이 되어 이 세 성이 오래전부터 살아왔다고 하나 현재는 절반정도가 각성받이들이다. 생업은 모두 농사로 그 외에는 서울에 사는 자식들이 부쳐주는 돈 뿐이라고 한다. 이곳은 경치가 좋아 7∼8년 전부터 여름이면 유흥지로 변하는데 장사꾼 중에 본토박이는 하나도 없다. 그들은 한여름만 들어와 살면서 장사를 한다.

큰길 입구에 있는 마을이 새마을이다. 큰길에서부터 2백여미터쯤 올라가면 장승들이 서 있는 장승백이가 되는데 길가에는 천하대장군들이, 오른쪽으로 개울을 건너 산등성이는 지하대장군들이 있다. 지하대장군은 암장승이기 때문에 내외를 하여 길가를 피하여 안쪽에 있다고 한다. 다시 길을 따라 5백미터 가량 가면 미랴월인데 여기에도 역시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의 장승백이가 있다. 오른쪽으로 제사를 지내는 산을 넘으면 벽수골인데 그곳에는 장승이 없다.

■부락제의 실제진행

∙명칭 : 「산신제」

∙장소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엄미리

∙일시 : 1982년 2월 25일 (음2월 2일)

이곳에서는 매 2년마다 음력 2월이며 장승과 솟대를 만들어 고사를 지내고 밤에 산신제를 지낸다. 2월 초하루에 택일을 하는데 부정이 드는 것을 막기 위해 보통 2일, 3일을 넘기지 않으며 이때 마을에 해산이나 초상이 나면 연기된다. 생(産)三死七이라고 산부정은 3일, 죽은 부정은 7일 이상이 지나야 산신제를 지낼 수 있어 보름 경에 한 적도 있다고 한다. 택일을 할 때는 생기복덕을 가려 당주와 화주를 각각 1명씩 뽑는다. 역시 부정이 드는 것을 최대로 막기 위해 가능한 식구가 단촐한 집의 가장을 뽑는데 이 해에는 공재흥(52)씨가 당주, 박홍교(67)씨가 화주를 맡았다. 이 마을에서는 공대섭(73)씨가 지난 20년 동안 택일을 맡아왔는데 그는 서당한문을 배워 책력을 볼 줄 아는 노인으로 동네아이들의 이름도 지어주고 혼례택일도 해주지만 전문가는 아니다.

날짜가 확정되면 기독교인을 빼고 추렴을 하여 제삿날 새벽 화주가 장을 보아온다. 혹시 부정탈까봐 당주는 산시제 때까지 집밖을 못나오게 하므로 산신제 지낼 제물은 당주집으로 보내고 화주집은 장승제 지낼 제물과 장승, 기러기(솟대) 등을 만드는 동네사람들의 점심을 준비한다.

아침 9시쯤 동네어른과 청년 등 남자들만 10여명이 미랴월 장승백이에 모였다. 10시나 되어서 장승목을 고르러 청년들이 산으로 올라간다. 깎아놓으면 붉어지기 때문에 물오리나무가 많이 쓰이는데 남녀 2개씩 모두 4개의 장승을 만들어야 하므로 제법 큰 나무를 고른다.

적당히 곧은 나무를 골라 지르고 한 발 남짓되는 길이로 네토막을 낸다. 장승목 앞에서의 의례는 전혀 없다.

미랴월 장승백이로 운반해온 나무를 까뀌와 자귀로 다듬기 시작한다. 한 옆에 불을 놓고 막걸리를 데워 마시면서 일을 한다. 서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특정한 지휘자가 없이 협동하는데 먼저 형태를 만들고 황토를 바르고 먹으로 얼굴을 그린 후 띠로 천하대장군의 수염을 단다. 몸통부분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고 각각 쓰고 천하대장군 밑에는 다시 수원70리 이천70리라고 거리 표시를 한다.

솟대는 가늘고 긴 나무 끝에 새모양을 깎아 만드는데 이를 기러기라고 부른다. 역시 4개를 만든다. 중간에 점심을 먹고 장승과 솟대가 완성된 시간이 2시 50분이었다.

장승백이의 돌들을 정리하고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세우는데 둘이 눈을 맞추어야 한다면서 세우는 방향에 신경을 썼다. 장승의 오른쪽에 기러기를 세운다. 장승백이에 기러기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으나 지난10여년간 세운 장승들이 너덧개씩 비스듬히 서있다.

3시 40분에 화주집에서 재물을 내왔다. 먼저 천하대장군앞에 재물을 진설하는데 귀에 북어를 꽂은 백설기시루, 포, 무나물, 간장, 두부, 곶감, 밤, 대추, 술잔으로 간략했다. 분향재배는 화주만 하고 뒤에서 동네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참견을 한다. 고사가 끝나면 북어를 기러기몸에 백지로 묶어바친다. 시루와 상을 지하여장군이 있는 것으로 옮겨 분향재배의 간략한 고사를 지낸 후 모두 음복한다.

4시 25분경, 장승과 솟대 그리고 화주 집에서 다시 차려내온 제물을 새마을장승백이로 운반하여 장승 둘을 세웠다. 이때는 사람들이 50여명이 넘게 모여들어 더욱 시끄럽고 흥겨운 분위기가 되었다. 역시 먼저 화주 혼자 분향 재배하는데 방구를 뀌지말라는 등 장난을 걸고 이어서 장승에 특별히 돈을 낸 동네 아주머니에게도 절을 시켰고 아이들도 와서 절을 하게 했다. 지하여장군 장승고사가 끝나자 사람들이 와 상에 달려들어 음식을 모두 집어간다. 웃음과 농담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고사떡으로 한동안 음복을 한 후 장승고사는 모두 끝냈다.

조사자 일행은 화주집에서 저녁을 먹고 산제사 할 때까지 기다렸다. 전에는 자정에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데 산에 올라온 시간이 8시였다. 당은 특별한 표시가 없는 산 정상의 평평한 지역으로 미리 천막을 쳐놓았고 앞에는 큰불을 놓아 추위도 막고 온 마을에 산제사 지내는 시간을 알리기도 했다. 이불을 보고 각 집에서는 「맞은 시루」를 쪄서 개인적으로 정성을 들인다.

산제사에 참가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로 당주, 화주, 축관 그리고 집사일을 볼 화주의 아들뿐이었다. 당주의 부인이 제물과 제주를 운반해왔다. 제주는 택일이 끝난 1일 오후에 담근 막걸리로 작은 단지 위에 솔잎을 덮고 백지로 봉했다. 제사직전에 술을 걸러 주전자에 담았다.

천막 안에는 산정상을 향해 병풍을 치고 오른쪽에 시루, 상위에는 촛대 2, 메구그룻, 튀각, 대구포, 육포, 무나물, 북어, 팔각두부, 탕구그룻(어탕, 육탕, 소탕), 대추, 곶감, 밤, 식혜, 술잔 3개 등이 놓였다. 메에 숟가락을 꼽고 떡시루의 뚜껑을 벗긴 후 제사를 지낸다. 먼저 당주만 분향 재배하고 헌작한 후 축관이 축을 읽었다. 축이 끝난후 모든 제관들이 함께 재배했다.

산신제가 행해지는 동안 분위기는 매우 엄숙했고 말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 불문율이었다. 이어서 마을주민들을 위한 소지가 올려졌다. 처음에는 부정소지를 올리고 이어 산소지를 올렸다. 내용은 극히 간략한데 예로 부정소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부정소지올시다. 오늘 그저 임술년 초이튿날 산제사를 지내는데 진부정 마른부정 그저 다 젖혀주시고 산할아버지 산할머니 많이 흠향하시고 이 동네를 무사태평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당주와 당주부인, 화주와 화주부인을 위한 소지를 올린 후 산제사 비용을 낸 각 집의 명단을 놓고 개인소지를 올려준다. 제일 먼저 93살 노인 김창식씨집 소지를 올려주고 82세된 이정환씨집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보아 돈을 많이 낸 것과는 상관없이 연령별로 진행하는 것 같았다. 50여호의 소지를 모두 올리는 것으로 엄미리의 산신제는 모두 끝났다. 이튿날 「중기닦음」이라고 하여 추렴한 돈과 산신제에 쓴 비용을 계산하는 모임을 갖는다고 하는데 조사하지 못했다.

■奄尾里 산신제의 의미

엄미리의 「산신제」는 장승 솟대 그리고 산신제가 결합된 동제로서 조선조에 들어와 유교식으로 바뀐 한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산신제는 산을 의지하고 사는 인근의 마을 사람들이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벌이는 부락제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에는 어느 마을에서나 이러한 의례를 행해왔으며 최근 볼 수 있는 형태는 무당이 중심이 되는 별신굿(동해안지역), 도당굿(경기도), 부군당굿(서울), 농악대 중심의 당산굿(전라도)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산신제 장승제 탑신제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우는 유교식 부락제가 있다. 유교식 부락제에서는 동네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여 춤과 노래로 흥청거리며 떠들썩하게 노는 굿과는 달리 먹고 마시고 놀지 않는다. 단지 엄선된 제관 몇 사람만이 참여한 가운데 한밤중에 조용히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족하는 것이다.

유교식 동제는 조선조에 와서 정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부락굿을 대신하여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엄격히 유교식만을 따르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의 동제를 잘 살펴보면 그 속에는 이전의 굿의 풍습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엄미리 산신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낮에 치루어지는 장승고사의 의례는 유교적이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굿에 가까웠다. 노골적이고 상스런 재담 속에 지내지는 고사, 먹고 마시면서 윷판을 벌이는 것, 고사가 끝나자마자 상위의 음식을 달려들어 먹어치우는 것 등 극히 자유분방하게 진행되어서 엄숙한 유교식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화랭이들이 와서 줄도 타고 크게 놀았다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동네 축제적인 성격을 띠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마을에는 예부터 무당이 없었다고 하는데 한강이남 지역임으로 무속권으로 볼 때에는 세습무에 속한다. 세습무가 주재하는 경기도 당굿에도 「돌돌이」라고 하여 마을 사방에 장승을 세워놓고 그 앞에서 무가출신의 남자인 화랭이들이 고사를 지내는 것이 있다. 과거 도당굿을 크게 하는 마을에는 난장이 서고 광대가 와서 줄도 탓다는 얘기를 흔히 듣는데 이것은 엄미리 경우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엄미리 주민들은 화랭이가 곧 광대라고 여기고 있는데 이는 화랭이 출신에서 광대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확실한 변화과정을 단언할 수는 없으나 엄미리의 경우 세습무가 마을 굿을 해오다가 유교가 들어와 제사로 대치되면서 무당들이 밀려나고 광대놀음은 좀 더 유지되다가 그나마 사회변동으로 축소, 소멸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부락굿의 기능은 마을이 합심하여 마을 전체의 행복과 자신의 그것을 일치시킴으로써 소속감과 긍지를 갖게 하는데 있다. 엄미리 산신제는 유교식과 민속 고유의 것이 혼재해 있는데 지역수호신적 성격이 강한 장승과 성역사상, 천신사상 등의 흔적을 지닌 솟대를 위한 고사를 지낼 때에 마을전체의 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음복과 놀이가 벌어지는 것은 엄미리 주민들의 감정적 일치감을 경험케하는 요소가 된다고 보여진다.

선정된 제관 몇 사람만이 참여하는 산신제를 지낼 때 각각 집에서 「맞은시루」를 쪄서 고사를 올림으로써 함께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또한 각 가정의 소지를 올려주는 것 역시 마을의 단합을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산신제」가 모두 끝난 후 비용을 계산하고 맞춰보는 「중기닦음」은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현실적인 제문제들을 의논할 수 있는 장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엄미리의 산신제는 전체적으로 유교식을 표방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고 있어 본래 마을굿이 지니는 지역사회의 통합과 결속기능을 잃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부락제의 맥락 안에서 장승과 기러기가 만들어지고 고사를 받는 구체적 신앙물이 되기 때문에 이 둘은 단순하고 추상적인 지역수호신으로서가 아니라 상징적 존재로서 마을주민들의 일상적 삶 속에서 믿음과 긍지를 주며 살아 있으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