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문화의 참모습 ⑨

선비사상의 정체성




전완길 / 태평양박물관장

조선사회의 지배층을 형성했던 양반계층의 정체는 곧 조선왕조의 정체와 몰락을 가져왔다. 선비사상과 그들의 생활관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부정하기 어려운 내재 요인이 적지 않다.

과연 그러한 요인들은 무엇일까.

1.

조선왕조는 이소사대를 국책으로 삼았었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혹은 슬기로운 외교정책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러한 국책을 전통사회의 주역들이 어떻게 해석했느냐가 문제된다.

「해동의 고려가 대대로 중국을 섬기어 신하노릇을 하여 왔는데, 우리 선왕 때에 와서는 천명을 받들어 성조(명)에 귀부하였고, 사왕께서는 선왕의 뜻을 이어 받아 조공 바치기를 더욱 조심하였다. …우리 임금의 하늘을 두려워하고 큰 나라를 섬기는 정신이 더욱 상달하게 되어 위아래의 사이에 성의가 서로 미더워지고 먼 데와 가까운 데가 화합하게 되어, 만세토록 변함없게 됨이 오늘로부터 시작할 것이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1

「우리나라가 해외에 있어 궁벽하고 험조하다. 그러나 기자가 봉받은 곳이요 공자가 살고 싶어한 곳으로, 예속과 문물이 중화에 비견되며 두려워하여 큰 나라를 섬기며 대대로 신하로 순종함을 힘써 왔으므로, 삼가 성명(명태조)이 처음 일어남을 만나 제일 먼저 귀부하였고, 우리 노왕(이태조)이 군사를 일으켜 반적을 토벌하여 더욱 충성으로 복종하니,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왕이 됨을 허락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게 하였다.…」

1·2는 모두 권근(1352∼1409)의 글인 바, 1은 서기 1385년에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명사신 단공우에게 부친 것이고, 2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조선관리 이직에게 부친 것이다.

조선의 사대는 외교상 실보다 득이 많아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군을 불러다가 왜병을 격퇴하였고, 조선왕실의 안전판 구실을 하였다. 그리고 권근의 이 글은 모두 사신에게 부친 것으로서 다분히 작위적이나, 려말선초의 뛰어난 학자이자 조선의 개국원종공신이 되어 화산군에 봉군 되기까지 한 그의 글과 자세가 귀감이 되다시피 하여 선비들은 으레 존화를 들먹거리게 되었다. 더욱이 그는 태종의 말대로라면 「국가의 진보요, 유림의 사범」으로서, 조선초기의 외교표전과 경세문장을 도맡았었으므로 영향력이 자못 컸다(필자 주 : 그렇다고 해서 그 때문에 모화사상이 비롯되었다는 의미가 아님).

심지어 대한제국시대에 자주를 선언한 고종이 황제를 일컫자 당시 공조판서였던 최익현이 예대로 즉 중국식으로 의복과 전장을 복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대군주란 칭호는 이적의 칭호를 답습하는 것이므로 우리 임금에게 시행할 수 없다」고 상소하고 홀로 주상전하라 고집하기도 하였다.

중국은 중화, 조선을 소중화라 한 사대방침이 외교·정치측면에서 득을 본 점이 없지 않지만 사상측면에서는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친 게 사실이다. 현상윤이 지적하였듯이 모든 문화현상과 문물을 중국에 견주고 중국보다 모자라고 작은 양 오인하여왔다.

「춘향전」에서 그런 예를 본다.

「저라산 약아계에 서시가 종출하고, 군산만학부형문에 왕소군이 생장하고, 쌍각산이 수려하여 녹주가 생겼으며 금강활이마미수에 설도 환출하였더니 호남좌도 남원부는 동으로 지리산 서으로 적성강의 산수정기 어리어서 춘향이가 생겼구나…사또 자제 도령님이 연광은 이팔인데 얼굴은 관옥이요, 풍체는 두목지라. 이청련의 문장이요, 왕우군의 필법이라… 사세를 생각하면 가봄직도 하다마는 갔다가 꽉 붙들려 부부되자 한다면 여자의 종신대사 경솔히 하겠느냐. 한나라 탁문군은 사마상여 문장·풍체 본 연후에 좇아갔고, 당 시절 홍불기는 이위공의 영웅기상 본 연후에 찾아갔으니, 도령님의 생긴 의표 방자 말만 믿겠느냐.」

비단 춘향전만이 아니다. 문인이건 정치가건 말과 글에서 중국의 정치제도를 비롯하여 강산·인물을 비유하였다. 미인이라 하면 서시·포사·양귀비·왕소군이요, 산이라 하면 태산·화산·숭산·항산·형산, 강은 양자강·회수·제수·황하 등 5대 명산과 4대강을 일컫고 우리나라의 강산과 미인을 반듯이 여기에 견주었다. 문장이 뛰어나건 솜씨가 빼어나건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견주어야만 인정하고 인정받았었다.

조선 사대부의 사대국책은 사상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문학에 있어서는 비유법을 발달시켰지만 심성과 산업은 왜소해지기만 했다. 아니, 사대 그것이 바로 조선 전통사회의 정체성을 내재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표준을 설정하고 그 기준을 능가하려 하지 않고 그 표준에 도달하려고만 노력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능가하는 수도 있었겠지만 인정받지 못하므로 언제나 소중화로서만 만족하였다. 이는 반복될 경우, 진취적이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안주하는 심성을 잉태시킨다.

또한 선비들은 중국의 문물에 매우 정통하였다. 무릉도원이 어떻다든지, 태산이 어떻게 생겼다는 따위의 고사를 말과 글에 인용해야만 유능한 지식인으로 행세할 수 있었던 탓이겠지만 극소수만이 중국에 다녀왔으면서도 정통했다는 사실은 관념적인 지식의 흡수에 주력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관념적인 지식의 흡수에 주력했다는 증거다. 따라서 관념적인 지식의 과장은 모든 사물을 관념적으로 관찰하는 습성에 배태시켜, 또 하나의 정체성을 내재하게 되었다. 보지도 않고 아는 척, 아니 아는 자세는 과학을 경시한 탓도 있지만 관성이 그렇기에 당시 사회에서 과학이 개화할 수 없는 요인을 지녔던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문제되는 정체성이 있다. 문장가 영웅이 있다한들 중국의 그것에 견줄 뿐이므로 조선에는 명인이 없었고, 명인 뿐만 아니라 능가하는 아무 것도 없다는 위축감이 누적된 상황에서 자신감이 생겨날 리 없다. 그래서 남는 것은 자기멸시와 모멸감 뿐이다.

한마디로 웅지를 품어볼 수조차 없었던 지배층의 정체성이 조선의 정체를 가져왔다.

이들 문제는 전통사회의 정체성으로 당대에만 내재했던 게 아니라 오늘날에도 흔적이 역연하다.

십수년전 일이지만 어느 신문에서 자랑할 것은 오직 푸른 하늘 뿐이라고 했는가 하면, 유관순은 한국의 잔다크, 이순신은 한국의 넬슨 등 「한국판…」을 예사로 한다. 유아식·아이스크림·비스킷·옷 따위 광고에서 외국의 선진기술을 도입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문학평론과 학술논문에서 외국인의 문구를 많이 인용하는 버릇도 마찬가지다. 화가나 음악가 역시 외국에서의 전시경력·입상경력이 있어야 으시대고 인정하는 요즘의 관습은 조선 선비들의 관습과 비슷하다. 따라서 걸핏하면 엽전타령이고, 장보고·김유신·을지문덕을 졸장부로 보거나 아예 무시한다. 족보를 구시대의 잔재로 여기더니 외국인이 연구한다니까 매스컴에서 법석을 떨었다. 오염된 비하감이 중병이기 때문이다.

2.

운명론 역시 선비 개인은 물론 전통사회, 그리고 조선왕조를 정체시킨 커다란 인자였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학을 도입한 이수광(1563∼1628)이 「지봉유설」에 이런 일화를 소개하였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죽자 비졸들이 저승으로 데려갔다. 염라대왕이 명부를 들여다보다가 「이 사람은 죽을 사람이 아니니 돌려보내라」하고, 「너는 잘못되어 여기 왔다. 소원이 있으면 들어주마」하였다. 「산과 물이 뛰어난 경치 좋은 곳에서 풍족하게 일생 동안 살 수 있다면 다른 소원이 없겠습니다」그러자 염라대왕이 웃으며 「네 말대로 될 거라면 내가 먼저 하지 네게 주겠나. 벼슬자리는 얻을 수 있어도 이것은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수광은 이어, 「이 일로 미루어본다면 귀는 벼슬보다도 귀한 것으로서 귀신도 맘대로 못하는 것인데 더구나 사람의 힘으로 애쓴다고 얻을 수가 있겠는가」하였다.

또 김안노(1481∼1553)도, 「천지 만물은 일정한 운수가 없지 않으나 지혜나 계략으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의 힘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이 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니 스스로 끝까지 밀고 나아가서 궁진함이 없는 것 역시 이치다. 옛말에 운명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다 하였고, 운명 아닌 것이 없으니 순순히 그 정당한 것을 따르는 것이다 하였으니, 진실로 일정한 운명이 있다」고 밝혔다.

성현도 운명론자였다.

「첨지 최세원은 경사에 밝았으나 나이 마흔이 지나도록 급제하지 못하다가 세조가 즉위하고 덕종이 세자가 될 때 급제하였다. 덕종이 일찍 승하하는 바람에 전례대로 승진되어 당상관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끝으로 군직으로 밀려났다. 그러자 스스로 상서하여 덕종을 돕고 그로부터 많은 사랑을 입었다고 밝혔지만 성종이 끝내 박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최세원이 원한을 품고 죽었다」하고, 이어 「이로 미루어보면 때를 만나고 못 만남, 벼슬을 얻고 못 얻음이 모두 천운이라 하겠다」고 덧붙였다.

왕중에도 운명론자가 있었다.

세조가 일찍이 하급관리 모를 못마땅하게 여겨 여러 해가 지나도록 승진시키지 않았다. 어느날 내전에서 잔치가 열렸는데 재상들이 모두 대궐 위로 올라 와 있었다. 임금이 우연히 돌아다보니 바로 그 하급관리가 금띠를 두르고 올라 와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잔치가 끝난 다음 그의 승진 내력을 조사라 하고 이조에 명령했다. 얼마후 보고를 받아 보니 적법한 절차를 거쳐 승진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세조가 「사람이 귀하게 되고 천하게 되는 것은 역시 운명이니 임금인들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로구나」하였다.

이조에서 벼슬을 제수할 때에는 반듯이 세 사람의 후보자를 추천하여 의진하는 법인데 세조는 가끔 붓에 먹물을 많이 적시오, 3인 이름 위에 뿌려서 그 먹물이 떨어진 곳을 좇아서 점찍어 사람을 뽑기도 하고, 혹은 궁인 가운데 글자 모르는 자로 하여금 점찍게 하여 뽑아내고는 이것도 역시 운명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신앙이 되다시피 한 운명론… 사람에게 마다 운명이 정해져 있으며, 그 운명은 임금이나 염라대왕도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자연의 섭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 운명론은 체념과 인내, 즉 은근과 끈기를 잉태시켰지만 그러기까지엔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경험했을 것인가. 또한 운명을 초월하거나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현실을 순응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도약을 설계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실에 만족하고 현상유지가 가장 바람직한 희망이었다. 그러니 개인이나 국가가 발전할 수 있었겠는가. 발전커녕 국가의 운명론을 사용하게 되었다. 예부터 가난하고 외침을 자주 받는다는 것이다. 고구려시대를 제외하곤 대륙을 경영할 야심일랑 품어보지 않았으며, 부국이 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도 않았다.

운명론, 그것은 현실에 순응하는 지혜였다. 그러나 개인, 국가의 정체를 기정사실화하는 사고였다.

운명은 불가항력인가? 결코 불가항력이라고 순응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운명의 개척이 매우 소극적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새로 이사가서 거꾸로 자면 부자 된다」「정월 보름에 발을 세 번 씻으면 일년동안 재수가 좋다」「노끈과 새끼를 동시에 얻으면 부자 된다」「조리를 방안에 걸어 두면 복이 들어온다」「말편자를 많이 주으면 부자 된다」는 속신을 믿어 정월 보름에 발을 세 번 씻고, 조리를 방안에 걸고 말편자를 줍고, 이사간 날 거꾸로 잤다.

그러나 이나마도 능동적으로 개척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운명을 미리 알아내기에 열중했다. 즉 「아궁이 불이 잘 안 들다가 잘 들면 부자 된다」「섣달 그믐날 도둑이 들면 부자 된다」「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먼저 남자 특히 키 큰 남자가 들어오면 그 해에 재수가 좋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실은 이러한 속신이 운명을 예고한 게 아니라 자위꺼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인들은 소극적이었다.

적극성이 전혀 없지야 않다. 그렇지만 적극성은 운명의 타개나 개척에 나타나지 않고, 운명을 미리 알려는 노력으로 표현된다. 염라대왕이나 임금도 어쩌지 못하는 운명, 그러나 정해진 운명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점쟁이다. 그래서 여염 사대부가에서는 물론 궁중에서도 점술이 성행했다.

박학했던 정동유(1744∼1808장악원정)도 「사람의 운명을 말하는 방술에 사람이 처음 출생할 때의 칠정의 차사로써 그 사람의 행운과 불운을 점치는 것은 본래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점술이 성업인 까닭은 전통사회의 생활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3.

한국인의 협동심은 유별나다. 그런데 남다른 협동심은 조선시대만의 특징이 아니고 유대가 매우 오래며, 선비들만의 독점이 아니라 상·하민 모두에게서 보인 공통현상이었다.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두레가 생활관습이 되었다든지, 조선시대엔 행정구역내에 노처녀가 있으면 고을 수령의 고과가 하고였고 주민들이 패덕하다고 지탄받았으므로 관비로라도 혼구를 장만하여 성혼시켰다. 혼인이나 회갑·장례 따위엔 으레히 이웃주민들이 술 한병 국수 한 묶음이라도 돕는 관행을 지켜왔지 않은가.

한국인들이 협동과 단체의식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엿볼 만한 전설이 있다.

옛날 제주도 표선면 토산리 광산 김택에 당팟당장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몸체가 보통 사람의 두배나 되며 막걸리를 한꺼번에 한 동이나 마시고 밥은 한말이나 먹는 장사였다. 그는 목수일을 하면서 농사도 지었는데 어느 해에 연로한 부모를 위하여 관을 미리 짜 놓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손수 짠 관으로 장사지냈다. 그랬더니 동네 어른들이 야단이었다. 자기가 목수일망정 관을 혼자 짰으니 저런 고약한 놈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엔 상사가 나면 관을 짜준 목수에게 삼년상에 돼지 뒷다리 하나와 떡 한 채롱 가져가고 묏자리 봐준 지관에게 돼지 앞다리 하나와 떡 한채롱 주는 게 관례였다(이를 공정 서른다고 부른다). 어른들은 그가 마을의 관례를 깨뜨렸다 하여 벌주기로 하였다. 벌은 당팟당장네 집에 큰 일이 났을 때 일체 도와주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팟당장이 집을 짓게 되었다. 당시엔 집을 지을 때 마을 사람들이 사흘 동안 노력을 제공했다. 하루는 소를 몰고 나가 산의 나무를 날라다 주고, 이틀째는 흙칠을 해주고, 사흘째엔 울타리를 쌓아주었었다. 당팟당장이 한라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놓고 내려와 소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아무도 소를 빌려지 않았다. 그러자 손수 져 날랐다. 그러다가 길이 좁아 이웃집을 허물어뜨리는 피해를 주었다. 그가 힘이 장사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굴복하여 벌을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그 때문에 마을의 관례가 깨졌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여럿이 모여 살고 일을 하더라도 여럿이 해야만 마음이 편하다. 한국에 장기간 체류했기에 한국을 잘 안 제임스 게일이 한국인의 이러한 관습을 추출해냈다.

「조선의 주민들은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산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서구에서는 어떤 집이든 간에 넓은 지역에 따로 서 있듯이 사람마다 독자적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모두 공동작업을 행하고, 가옥들이 한 곳에 모여서 작든 크든 마을의 형태를 이룬다. 결국 서양인들의 위대한 힘은 긴장 상태와 분리 상태 같은 것에 의해서 형성된 원심적인 것이고, 반대로 동양에서는 생활이 모두 구심적이어서 중심으로 쏠리고 있고 위축 상태와 제한 상태가 그 특징이다. 일꾼을 예로 들면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한다. 그의 친구를 함께 고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주 쉬운 일조차 절망에 찬 시선으로 대한다.」

조선 사대부의 생활윤리를 기록한 「사소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굶주리는 집이 있으면 돈이나 곡식으로 돕고, 아픈 집이 있으면 약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경사나 애사를 당했으면 물질로도 돕고 인력으로도 도우며 만일 물질이나 인력이 없을 경우에는 몸소 가서 보살펴 주고 혹은 서신으로 열심히 위로하거나 경하해야 하고, 먼데 사람 보듯이 무관하게 보고만 있으면 안 된다. …누가 와서 구걸할 때에는 먼저 멸시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불쌍히 여겨 도와주어야 하고 만약 도와줄 물건이 없거든 부드러운 말씨로 타일러서 보내야 한다.」

그래서 조선은 거지가 없는 나라였다. 거지없는 나라, 그것은 모든 백성이 부유한 때문이 아니라 쌀 한 톨이라도 나눠먹는 인정과 협동심 때문이었다.

1884년 7월에 입국하여 초대주한공사를 지내는 등 21년간이나 조선에 머물렀던 미국인 알렌은 조선에서 거지를 발견하지 못한 사실에 매우 경악하였다. 중국에도 머물렀던 알렌은 많은 거지떼를 목격하였는데 그 거지들이 조합까지 결성하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주민들은 거지조합에 정기적으로 금품을 희사하여 거지들로부터 시달림을 모면하며, 도둑들까지 조합을 만들어 주민을 들볶지만 조선에는 이러한 조합커녕 거지가 하나도 없다 하였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 사대부 집안의 풍경이 그 해답이다.

「조선 사람들은 비교적 낯선 사람들도 초대한다. 언젠가 나는 한국인 친구집에서 아침 식사를 대접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많은 밥상을 운반하는 것을 보고 한 단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나에게 한 방을 보여주는데 그 방안에 사람들이 가득히 앉아 있었고 그들 앞에는 각자가 밥상을 하나씩 놓고 있었다. 친구의 설명에 의하면 그들은 시골에서 서울로 볼일이 있어서 온 사람들로서 그 중에는 약간 안면이 있다는 구실로 찾아와 머물면서 식사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관습은 조선의 부자들에게 부담이 된다. 그리고 누구나 번창하면 이전에는 본 적도 없는 친척들이 함께 끼어 살러오고 심지어는 친구들까지도 데리고 온다고 한다.」

그렇다. 한국인들은 역시 사실이 그러함을 배우면서 성장했고 또 협동을 강조하면서 살았었다. 고을에서는 향약의 준수를 거의 해마다 다짐했고, 특히 선비들은 향음주례를 반복하며 우정과 의리를 다짐했다.

그 결과 소위 「문인」끼리의 맹약을 지켰는데 이는 출세했을 경우 불우한 동문을 돕는 것이다. 남남끼리도 이러하거늘 이웃사촌, 동향인끼리도 그러하였으며 더욱이 친척끼리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남을 도왔으니까 도움을 받기가 당연했다.

이러한 관행은 경제측면에서 커다란 부담이 될 뿐아니라 행동측면에서도 적잖은 짐이 된다. 한편 도움을 주는 이나 받는 이는 언제나 갚고 갚아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을 안게된다. 갚고 갚아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은 곧 의타심일 수도 있다.

친척·친구·이웃의 누군가가 도와주리라는 기대에서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자위가 가능했다. 굶는 상황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면 살기 위해서 어떤 수단이라도 강구하여 동냥이라도 나섰겠지만, 그럴 때 누구라도 도와주리라는 기대에서 나태해진다. 그러므로 끼니를 잇지 못하더라도 끼니를 걱정하지 않고 책만 읽거나 유유자적할 수 있었다.

물론 협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요소가 더 많다. 그렇지만 협동이 장기간 너무 강조되다 보니까 의타심과 나태를 낳았고, 그러한 성향은 부의 축적이나 개인의 전진을 정지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거지가 없었던 반면 거부도 드물었던 까닭이 나눠 먹는 협동 탓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선비의 정심이 쇄락해진 조선중기부터 관리의 부패가 만연해진 까닭이 협동과 의리강조의 부작용으로서 돕고 돕는 악순환이 거듭되었기 때문이다.

사대와 운명론, 그리고 협동심은 선비정신의 구조적 취약성으로서 선비정신과 선비문화의 공적을 좀먹는 독소구실을 하였다. 이 정도의 독소는 이미 여러 차례 서술한 바와 같이 고결한 선비정신이 해소시킬 수 있었고, 또 해소되어야 마땅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지나치게 철학적인 선비사상의 한계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