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원문화 ②

한국정원의 유형




윤국병 / 정원학회 상임이사

정원의 규모나 꾸밈새는 그것을 경영하는 자의 유형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면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정원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첫째는 궁원이라고 불리는 궁궐 안에 꾸며진 정원이고, 둘째는 중앙이나 지방의 관아에 꾸며졌던 소위 관원이다. 셋째는 민간의 정원인 사원, 그리고 넷째는 사원에 꾸며진 정원으로서 이것을 사찰정원이라고 한다.

1. 궁원

궁궐 안에 꾸며 놓은 정원을 궁원이라고 한다. 보통 궁궐 뒤쪽에 꾸며지기 때문에 흔히 후원 또는 북원이라고 부르나. 이것은 고대 중국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궁원은 우리나라 정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또한 화려하게 꾸며졌던 정원이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궁원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이 평양 을밀대 위 지금의 영명사 터에 꾸민 구제궁의 궁원이라고 한다. 그 곳에는 자연이 이루어 놓은 백운, 청운, 통한, 연구의 네게의 교량이 있었으며 대단히 경관이 좋았다고 하나 신빙성이 낮은 이야기다.

삼국시대와 신라의 궁원

다음은 서기 391년에 백제 진사왕이 하남위례성에 연못을 파고 가산을 꾸며 기화요초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자리는 확인된 바 없다. 그 뒤 백제는 공주로 도읍을 옮겨 동성왕 때(서기500년) 공산성속에 임류각을 중심으로한 궁원을 꾸미는데 그 유지가 년전에 발굴되었으며 객 앞에는 방지가 꾸며져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한편 고구려의 양원왕은 서기551년에 평양 동북방 대성산성 밑에 안학궁을 지어 후원을 꾸며 놓았다고 한다. 그 유지는 일정 말기까지 남아 있었으며 수목 사이에 앉혀진 정원석은 자연 그대로의 운치를 풍겨 일본의 조경학자는 이것을 일본정원이 한 원형으로 보고 있다.

이것과 흡사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부여의 궁남지이다. 궁남지는 백제무왕이 서기629년에 궁궐남쪽에 꾸몄던 이궁의 정원이다. 마래방죽이라고도 부르며 왕자 호동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1970년대 초엽에 현황대로 수경되었다.

신라의 공원으로는 경주의 안압지만이 알려져 있는데 유구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어서 년전에 중수 공개되었다. 자연 그대로의 곡지로서 못의 동안과 북안에는 무산십이봉을 상징하는 가산이 꾸며져 있고 물가에는 수많은 자연석이 보기 좋게 앉혀져 있다. 못 속에는 크고 작은 세 개의 섬이 있는데 이것은 고대 중국이 신선정원의 양식을 본뜬 것이다.

고려의 정원

고려의 정원은 그 유지가 전혀 남아있지 않는 듯하며 문헌에 의하면 건국초 궁월 동쪽에 큰 연못을 중심으로 하는 후원이 꾸며져 이것을 동지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연경궁 후원이 꾸며져 상춘정과 산호정을 중심으로 한 경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모단, 작양, 국화, 민혼(겹꽃해당화)등의 화초와 꽃나무가 심어졌다고 한다. 그 이외에도 모단꽃으로 이름 높았던 사누를 중심으로 한 어원이 있었으며 고려는 이러한 정원을 화원이라 부른 듯 하다.

16대 예종은 18대 의종과 함께 정원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궁궐안 서남쪽에 두 개의 화원을 꾸며 민가의 화초를 빼앗아 심는 한편 송나라로부터 많은 화초와 꽃나무를 들여옴으로써 내탕금을 탕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그는 궁궐 안에 청연각의 석가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것으로 보여진다.

의종은 청창궁의 북원에 석가산을 꾸미고 황금색 비단으로 벽을 바른 만수정을 짓는 한편 승마구기를 위한 광대한 격구장을 꾸며 놓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민가 50여채를 헐어내어 태평정을 꾸미는 한편 그 앞에 폭포를 떨어뜨리고는 그 경치를 즐기기 위한 자리로서 두 개의 돈태와 관란정을 꾸미기도 하였다.

이씨조선조의 궁원

조선조의 궁궐로는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을 비롯하여 광해군에 의해 꾸며졌던 경희궁, 그리고 선조 때 궁으로 삼게된 덕수궁 등 여러 궁이 있었으나 연희궁은 일정 때 헐리어 없어지고 말았다. 현존하는 가운데 가장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창덕궁의 비원이다.

비원은 원래 창덕 창경 두 궁의 후원으로 꾸며진 것으로 총면적 6만2천 평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정원이다. 이 정원은 자연 그대로의 기복을 가진 활엽수의 숲 속 곳곳에 연못을 파고 정자와 누각 그리고 당을 그 주변에 앉혀 놓았다. 연못의 꾸밈새는 우리나라 고유의 방지를 따르고 있다.

비원은 크게 나누어 부용지와 주합루를 중심으로 한 공산과 애연지와 연경당 공간, 그리고 반도지와 반월지에 의해 구성되는 공간 및 비원 최북단의 옥유천 공간의 네 개의 공간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복궁의 후원은 지금 청와대가 들어앉아 있는 자리로서 옛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큰 방지 속에 2층 누각이 자리하고 있는 경회루어원이다. 이 곳은 원래 외국사신의 접대와 군신의 연회장소로 꾸며진 자리로서 말하자면 사대부저택의 사랑채에 딸린 정원과 같은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경회루 동쪽 바로 옆에 아차산이라는 이름을 가지 화계가 남아 있다. 이곳은 왕비가 거처하던 교태전의 뒷뜰이다. 삼단으로 꾸며진 화계 위에는 갖가지 꽃나무와 반송이 심어졌으며 그 사이 사이에는 경취를 돋우기 위한 괴석과 소형의 석연지가 놓여 있다. 또한 화계의 중문 전에는 교태전의 굴뚝이 앉아있는데 그 꾸밈새가 건축물과 같기 때문에 연가라 불리우며 하나의 장식물구실을 하고 있다.

향원정의 우아한 그림자를 비치며 여름철에는 연꽃향기가 그윽한 향원지는 고종 5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 새로이 꾸며진 연못으로서 그 북쪽에 지워졌던 건청궁에 딸린 정원이다. 또한 그 동쪽에 위치한 작은 언덕은 이전에 사슴을 사육하던 곳으로서 록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덕수궁의 경우에는 구한말 양식건물인 석조전이 지어지고 그와 어울리는 양식정원이 꾸며지는 바람에 전통적인 정원은 거의 자취를 감추어, 볼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다.

이궁의 정원과 외원

고대의 이궁정원으로는 위에 소개했던 백제의 궁남지외에 경주 남산 서록의 포석정 유적이 있다. 이곳은 고대의 연중행사의 하나인 이곳은 고대의 연중행사의 하나인 계유에 부수되었던 계음이 놀이로 탈바꿈한 소위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자리이다. 중국의 사례를 감안할 때 포어형의 수로는 포석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자 속에 꾸며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서경과 남경, 즉 지금의 평양과 서울에 이궁이 꾸며져 있었다. 의종은 그 이외에도 신하의 저택 가운데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진 것을 빼앗아 이궁으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조에는 세종때 선왕을 위해 태산이궁과 풍양궁, 연희궁의 세 이궁을 꾸몄으나 현재 유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태산이궁은 잠실로 쓰여 왔으며 현재는 연희궁의 주택가로 변해 버렸다.

이 이외에도 도성 근교의 경승지에 왕이 스스로를 위해 꾸며 놓은 궁원이 있다. 말하자면 자연의 경관을 즐기는 한편 놀이를 위해 꾸며 놓은 정원이다. 이것을 소위 외원이라고 한다. 백제의 무왕이 즐겨 찾던 백마강가의 대왕포가 그 시초인 듯 하다. 대왕포는 지금의 고난사 터로서 그림과도 같이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고려의 의종은 개성 동쪽 판적요 앞을 흐르는 사천을 가로막아 호수를 꾸미는 한편 물가에 만춘정, 옥간종, 영덕정 등의 많은 정당을 지어 자주 이 곳을 찾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남대문 밖 호암에 연복정을 짓고, 대흥산성 남문밖 남지에 중미정을 지어 나라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폐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2. 관원

고대에 있어서는 어떠했는지 그 실정을 알 수 없으나 고려말부터 조선조에는 관에서 꾸며 경영해 나가던 정원이 있었다. 소위 관아의 정원인데 중앙관청인 육조는 물론 지방관아에 이르기까지 각기 정원이 꾸며져 있던 것이다. 조선조의 육조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지금의 세종로 좌우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호조의 건물 배치를 그린 호조전도가 전해지고 있다. 이에 의하면 호조 본아 건물 뒤쪽에 크고 작은 두 개의 방지를 중심으로 그 옆에 정자와 당이 앉혀진 간소한 정원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주위는 회랑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골목길로부터 바로 정원으로 드나들 수 있는 대문도 마련되어 있다. 지당 주위에는 능수버들이나 왕버들이 심어지고 물 속에는 연꽃이 피어나 제법 즐길 만한 운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정원은 호조뿐만 아니라 각 조마다 꾸며져 있었다고 한다.

지방관아의 정원은 관제사나 목사, 도호부사, 군수, 현감 등의 직책을 맡았던 이들에 의해 꾸며진 것이다. 여기에는 성격을 달리한 두 가지의 정원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그 하나는 지방관아의 공청 건물인 객사와 동헌 사이에 꾸며진 정원이다.

객사는 읍성 안 가장 핵심되는 곳에 지어진다.

그 이유는 객사라는 것이 궁실 건물에 속하기 때문이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궐비를 모시기 위해 지어지는 건물이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하여 그 좌우에 지붕을 한 단 낮은 익사를 지어 어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관원들의 여각으로 써 왔다. 또한 객사는 외국사신이 한성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머무는 자리의 구실도 하였다.

객사는 이와 같이 공해건물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건물이므로 일반적으로 남향으로 지어지며 지방관장은 객사에 머물지 못하고 그 옆에 동헌이라 불리는 한 건물을 지어 그곳에서 행정을 주관하였던 것이다. 동헌 맞은 편에는 서헌이 자리한다. 이렇게 여러 건물이 자리를 정하면 궁실인 객사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그 동서에 아담한 누각을 짓기 마련이다. 경주 객사의 동서에 지어졌던 빈현루와 의풍루가 그 한 예이다. 사정에 따라서는 동쪽에만 누각 또는 정자를 앉히는 경우도 있었던 듯하며 고려 말엽에 지어진 수원도호부의 운금루와 조선조 세종 때 이천도호부의 객사 옆에 꾸며졌던 애연정 등이 그 한 예라 하겠다.

애연정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객사와 동헌 사이에 꾸며졌던 정원에는 예외 없이 연못이 꾸며졌다. 물 속에는 연꽃이 심어지고 그 주위에는 꽃나무도 가꾸어져 어명을 받들어 내려오는 중앙의 관원들을 접대하고 위로하는 자리로써 요긴하게 쓰였던 것이다. 지금도 강변 언덕 위에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밀양의 영남루도 객사 동편에 지어졌던 누각의 하나이다.

지방관아에서는 객사 주변의 정원 이외에 관내의 경관이 수려한 곳을 골라 자연을 관상하며 시를 지어 읊는 풍류를 즐기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누마루나 정자만을 지어 놓은 것이기는 하나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하나인 별야나 향거의 정원의 꾸밈새와 견주어 볼 때 이것도 하나의 정원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즉 고려 중엽으로터 조선조 말엽까지 성행했던 별야정원이나 향거정원은 자연경관 속에 최소한의 필요한 시설, 예컨대 경관을 즐기기 위한 자리인 정자와 규모 작은 지당을 꾸며 정원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자연으로의 복귀를 예찬하는 노장사상의 영향을 입어 영풍월하는 은사적 자세를 높이 쳤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원의 예로서는 울산 태화변에 세워졌던 태화루, 영해 해구의 봉송정, 강화 이섭정 등을 들 수 있다.

3. 사원

민간의 정원을 사원이라 부른다. 신라시대에는 사절유택 이라는 놀이가 있었다. 이 놀이는 귀족들이 철 따라 계절감이 넘치는 정원을 차례로 찾아 즐기는 놀이다. 봄에는 동야택, 여름철에는 곡양택, 가을이면 구지택, 겨울에는 가이택이라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거기 참가했던 정원의 수효가 자그마치 삼십오택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삼십오택의 정원이 어떤 모습으로 꾸며져 있었는지 설명해 줄 만한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저택들이 서라벌 도성을 둘러싸는 교외에 위치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바위 좋고 물이 좋은 부곡을 한 군데씩 차지하여 꾸며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절유택의 풍습을 담은 사원은 후세에 이르러 경원과 별야정원 그리고 향거정원의 세 가지 형식으로 세분되어 나간다.

경원

서울 도성안에 꾸며진 사원을 경원이라고 한다. 경원이라는 말은 고려 말엽으로부터 선현들의 문집 속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꾸미는 일이 성행되는 것은 주로 조선조로 접어 들어서부터이다.

경원에도 두 가지 성격의 것이 있다. 그 하나는 도성 안의 수석이 좋은 곳에 펼쳐지는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려 최소한의 인공적인 시설, 예를 들어 정자와 오솔길 등을 곁들여 놓은 정원이다. 중종때 영의정 자리에 있던 남장이 북악산 밑 대은암에 꾸민 부용정의 정원, 윤희굉이 남산 동북 기슭에 조성한 쌍이문순정원, 회현동 뒤 골짜기에 위치하여 남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열아홉굽 폭포를 중심으로 한 금석위의 재산누정원 등이 그 좋은 예가 된다.

그 모두가 계속의 형국부터 더듬어 굴곡이 좋은 한 대목을 골라 거기에 간소한 모정을 꾸며 놓고 수석을 손질하는 정도로써 정원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정원은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유자의 자손들이 흥망성쇠와 무관심, 그리고 도시의 팽창 등으로 말미암아 점차적으로 그 자취를 감추어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 자리마저도 찾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또 하나의 경원은 비교적 지형이 평탄한 방내에 자리 잡은 사대부저택의 정원이다. 이 경우에는 풍수설이 가리키는 바에 따라 택지를 정했기 때문에 안채 뒤에 나지막한 언덕이 자리하는 것이 기본형이 된다.

헐벗은 언덕을 그대로 방치할 때에는 비 올 때마다 토사의 유출현상이 일어나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우리 조상이 생각해 낸 것이 언덕을 계단장으로 다듬어 놓은 방법이다. 전통적인 건물배치양식에 따라 안채 앞은 행랑채와 담장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나무를 심어 가꿀만한 여유가 없다. 그러나 안채 뒤 언덕이 자리한 곳은 비교적 넓고 햇빛과 바람이 잘 닿는다는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장치석을 앉혀 계단을 꾸며 꽃나무 가꾸는 자리로 삼았으며 운치를 돋우기 위해 괴석과 작은 석연지를 곁들임으로서 이 자리는 하나의 정원 구실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꾸밈새의 자리를 화계라 하며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남녀의 구별이 엄했던 조선조에는 이 자리가 아녀자를 위한 정원 구실을 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사대부저택에서는 대문 밖에 바깥마당을 꾸미는 풍습이 있었다. 대문 밖 좌측에는 작은 방지가 꾸며진다. 이 방지는 원래 택지 안에서 흘러 나오는 배수를 처리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던 시설물이다. 그러나 물이 있고 보면 물가에 두 서너 그루의 버드나무와 괴목을 심어 운치를 찾게 되고 그러다 보면 간소한 모정도 곁들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 자연적으로 이 자리가 또 하나의 정원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사랑채는 바깥 손님이 드나드는 자리이므로 일반적으로 아담한 정원이 꾸며지는데 자리가 협소할 때에는 장치석을 쌓아 꾸민 화단에 항간에서 길 한 것으로 치는 석류나무나 모단을 심어 가꾸며 물을 곁들이기 위해 석연지도 놓인다.

별야와 향거의 정원

별야는 오늘날의 별장에 해당하는 낱말로서 때로는 별업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씨조선조의 별야는 그 모두가 세상의 이목을 피하여 번거로움 없이 지내고저 하는 소위 피세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피세는 반항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말려들지 않으려는 회피였으며 별야는 그러한 정치적 동기와 아울러 속진을 피하고저 하는 한거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이에 대해 행거는 중앙의 정치무대에 멀어졌을 뿐 반드시 피세하려는 뜻은 아니다. 피세란 결국 인간세상의 번거루움을 피하여 자연을 벗삼아 지내자는 뜻이니 따라서 별야는 수석의 아름다움과 환경의 조용함을 찾게 마련이다.

향거의 풍습은 고려 중기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의종 말기에 대두한 최씨 일문의 무인정권에 의해 귀족정치가 붕괴된 후 새로운 관료층이 등장한다. 그들은 학문적인 교양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의 실무에도 능한 사대부, 곧 학자적 관료들이었다. 이러한 학자적 관료인 사대부는 무인정권이 타도된 뒤로 더욱더 정계로의 활발한 진출을 하였다.

사대부들은 지방의 향리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다. 그들은 향리에 규모 작은 농장을 가진 중소지주거나 또는 농사를 자영하는 자들이었다. 이렇게 토착한 기반을 가진 향리 출신의 사대부들은 비록 중앙의 정치무대로 진출하였다 하더라도 때로는 물러나서 향리에서의 전원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이것이 소위 향거생활이다.

전원생활을 즐긴다는 것은 바로 자연을 벗삼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자연을 벗삼는 자리로서 정원을 꾸미게 된다. 학문적 소양을 높은 사대부들이 자연을 즐기기 위해 꾸며 놓은 정원은 자연과 혼연일치된 소위 무위자연적인 임천의 형태를 보였다. 퇴계 이황이 도산에 정사를 꾸며 후진을 양성한 것은 바로 향거생활이며 그 때 즐기던 도산구곡의 맑은 물과 바위 그리고 울창한 숲은 바로 향거정원이었던 것이다. 송강 정철의 성산우거 또한 그 예의 하나라 하겠다.

우리나라는 지질 관계로 암석이 노출된 곳이 많아 어디를 가나 수석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산골짜기를 찾아 들면 기암절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전개되는 곳이 적지 않다. 세상의 이목을 피하여 번거로움 없이 지내려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곳이 더할 나위 없는 보금자리가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곳을 찾아 알맞는 자리에 작은 초당을 꾸며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수려한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모정을 지어 주위에 좋아하는 꽃나무 한 두 그루라도 심어 놓으면 그것으로써 별야생활은 부족됨이 없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보면 별야의 정원과 향거의 정원은 별로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전국의 수석이 아름다운 곳에서는 이씨조선시대에 꾸며 놓았던 수많은 정자와 당집을 보게 된다. 이러한 건물은 무위자연을 본분으로 하는 별야정원이나 향거정원 속에 꾸며졌던 것들로써 그 수효는 천 군데를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사찰정원

우리나라에서는 선문구산을 비롯한 모든 사찰이 심산유곡에 자리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으로 되고 있다. 수석이 아름다운 깊고 깊은 산 속이기 때문에 경내 전체가 온통 정원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따로 정원을 꾸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찰을 찾아보면 현존하는 정원, 또는 정원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주의 불국사이다. 이 곳에는 대웅전으로 통하는 자하문 앞에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고 안양문 앞에는 칠보교와 연화교가 자리하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칠보교 아래에는 구품연지라는 큰 연못이 있어서 서쪽 어귀에서 바라보면 네 개의 돌다리가 반쯤 물에 잠긴 듯이 보이는 사이로 범경루의 그림자가 못에 비추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수년 전에 실시되었던 불국사 정화공사에 앞서서 행해졌던 발굴조사에 의해 구품연지의 유구가 발견되어 전해지는 말이 사실이었음이 확인 되었다.

그 이외에 신라왕실과 관계가 깊었던 황룡사나 분황사, 사천왕사 등에도 이러한 꾸밈새의 정원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아직 유구가 발견된 것이 없다. 그러나 사적기에 굴산이니 기화요초니 하는 따위의 어휘가 눈에 띄는 것을 보면 이 시대에는 그런대로 사원양식이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가야산 해인사 산문 앞에 남아있는 경지나 통도사의 극락보전 옆에 꾸며진 구룡신지, 그리고 대흥사의 산문앞 숲 속에 자리한 건지 등도 사원을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었던 못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크게 신앙되었었다. 그러므로 개경 주변에는 수많은 사찰이 지어졌으나 그 가운데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 잡은 몇몇 사찰은 왕의 놀이터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내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것으로 이름 높았던 자하동 골짜기의 안화사이다. 예종과 인종 그리고 의종이 이 곳을 자주 찾았으며 놀이를 위한 전각과 정자를 즐비하게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돈태를 쌓아 기화요초를 심어 가꾸므로써 화려해지기는 했으나 수려하고 운치 있었던 경관은 속된 것으로 변해 버린 듯하다.

한편 선의 진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선도장으로서의 사찰정원이 꾸며진다. 이것은 무위자연의 자세를 바라봄으로써 마음의 청명을 닦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험한 산길을 꾸며 이것을 오르내림을 선적인 사색의 방편으로 삼아 선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각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선정원으로는 강원도 춘성군 소재 청평사의 문수암정원의 그것은 한층 더 자연스럽고 세련되어 있으며 이보다 약 250년 뒤에 꾸며진 것으로 전해져 있는 일본 경도 서방사의 고산수정원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찰에서는 다도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 왔기 때문에 다도를 위한 간소한 정원이 꾸며지기도 했다. 정다산과 친교가 있었던 초의대사가 간소한 초정과 작은 방지로 꾸며놓았던 해남 대흥사의 일기암이 그 한 예가 된다. 일기암은 최근 다도와 우리 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이들의 손에 의해 옛 모습대로 복원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