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의 선구자②

홍난파 / 울밑에 선 봉선화야




윤후명 / 작가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우리나라 사람치고「봉선화」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노래는 김형준이라는 이의 작사에 난파가 곡을 붙인 것으로, 일본 제국주의 아래 버림받은 겨레의 모습을 「울밑에 선 봉선화」로 나타내어 애상 띤 가락에 담은 노래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애창하며 스스로의 처량한 모습에 눈물지었다. 이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를 지었을 때의 난파의 나이는 우리 나이로 스물네살이었다.

난파의 본 이름은 홍영후로서 우리나라의 첫 번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자로 손꼽힌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뜻을 두고 의욕적인 활동을 벌인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공연한 것도 그였고, 창작곡을 발표하는 대음악제를 연 것도 그였다. 그는 우리나라에서의 서양음악의 역사에 길이 남을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는 아깝게도 마흔네살 밖에 못살았다.

난파는 1898년 4월 10일에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 농사꾼이던 홍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생가의 터는 지금은 물론 남의 손에 넘어갔는데 그 자리에는 1971년에 미망인 이대형이 세운 유허비가 그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활초리는 난파가 태어난 곳일 따름이었다. 그가 두살 때에 그의 집안은 서해안의 바닷가가 내려다 보이는 그 갯마을을 떠나서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서울에 온 난파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문물에 접하며 자랐다. 그의 형 홍석후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다니면서 개화에 눈을 떠서 어린 난파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난파가 YMCA 중학부에 다닐 무렵이었다. 그 무렵 탑골공원 곧 오늘의 파고다 공원에서는 목요일만 되면 경성악대의 브라스 밴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독일사람 에케르트가 창설한 구한국군악대가 그 뒤에 경성악대로 발전하여 매주 야외공연을 했던 것이다. 난파 소년은 넋이 빠졌다. 그 음율은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었다. 몇 번 야외공연을 본 난파 소년은 음악을 하고 싶은 열망에 빠졌다. 여러 악기 가운데서 특별히 소년의 마음을 끈 악기는 바이올린이었다.

「바이올린을 사주세요.」

집에 온 소년은 집안 사람들을 졸라댔다.

「바이올린 이라니? 양깽깽이말이냐?」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깽깽이 따위는 예로부터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만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은 소년의 뜻을 갸륵하게 여겼다.

그 무렵 진고개에 가면 일본사람들이 오르간이나 바이올린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값이 매우 비쌌다. 소년은 형에게 매달렸다. 새로운 문물을 동경하고 있던 형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드디어 어린 동생에게 바이올린 값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소년은 배울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마침 1913년 8월 27일 해일신보에 「조선 정악 전습소」의 학생 모집광고가 났다. 「조선악」과 「서양악」의 각 과에 보결생을 모집하는데 지원자는 9월 2일까지 「청원이 가함」이라는 내용이었다. 광고를 본 소년은 진고개에서 산 바이올린을 들고 전습소로 가서 서양악부 주임교사를 맡고 있던 김인식을 찾아갔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서 왔어요.」

이로부터 소년은 부지런히 바이올린을 켜서 가장 초보 단계에서 공부하는 책인 「호만」제1권을 석달반 만에 떼었다. 지금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지만 그런 초보 실력으로 그는 12월 23일 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크리스마스 축하회에 독주회를 갖기에 이르렀다. 난파는 나중에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돌이켜보고 있다.

「반주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고 그보다도 반주라는 것이 있는 줄을 알았을 리도 없었다. 음악 공부 넉달만에 독주를 했다는 것이 지금 사람들의 귀에는 곧이 들리지 않겠지만 그 당시에는 이것을 음악으로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현금이라는 혹은 양깽깽이라는 일종의 신기한 악기를 구경시키는데 그쳤던 것인 만큼 이(E)선과 에이(A)선의 양현으로 연주한 갤럽의 한 곡조가 청중의 갈채를 환기시켰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조선정악전습소를 졸업한 그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유료 공개음악회를 여는 등 활동을 폈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1918년의 일이었다. 우이노음악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의 말에 따르면, 비로소 정규의 음악교육을 받게 되었고 가끔 열리는 교내, 교외의 연주회에 드나들면서 음악 연주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인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 땅에 돌아와 아끼던 바이올린을 저당 잡힌 돈을 경비로 해서 독립선언서를 돌리기도 했다고 한다.

삼일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그는 음악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간다청년회관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에서는 그는 세 번의 앙코르 박수를 받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이 내가 음악 공부를 시작한 뒤로 무대다운 무대를 처음 밟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 그날 밤이 감격이야말로 지금껏 잊을 수 없다. 솔직히 고백하면 이 연주회에서 얼마나 큰 용기와 자부심을 얻었는지 모른다.」

스물네살이 되었다. 그는 경성 악우회를 조직하여 주간으로 있으면서 첫 번째 창작집 「처녀혼」을 펴냈다. 이 「처녀혼」의 앞머리에 「애수」라는 곡명을 붙인 멜로디가 실려 있었다. 바로 이것이 김형준의 작사와 어울려 「봉선화」가 된 것이었다.

그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글을 쓰는 데도 남다른 소양이 있어서 1923년에는 장편소설「폭풍우 지난 뒤」를 써내기도 했다.

그가 우리나라에서 바이올린 곡을 작곡한 첫 번째 작곡가가 된 것은 1925년의 일이었다. 가을에 그는 서울 YMCA회관에서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는데 그때 손수 작곡한 「애수의 조선」「로만스」「동양풍의 무곡」같은 바이올린 곡을 선보였다. 반주를 맡은이는 뒷날의 이름난 피아니스트 김원복으로 조카며느리였다. 이처럼 그는 음악에 관계되는 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일구어 놓은 일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의 첫 번째 음악잡지인 「음악계」를 창간한 것도 그런 것이었다. 이 잡지는 동아일보의 보도대로 「서대문집에 있는 홍영후가 경영하는 연악회에서는 이번에 새로이 기관지 음악잡지를 창간하여 발행하였는데 조선에 있어서 순전한 음악잡지로서는 처음일 뿐 아니라 신작 악보, 논문, 평전, 명작 가극 개관, 명곡 로망스 등 내용이 자못 풍부하더라」는 잡지였다.

1926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동경국립고등음악원에 들어가 졸업할 때까지 3년동안 다녔다. 이어서 돌아와 중앙 보육학교 교수가 되었고 여기서 서둘러 손을 댄 것이 노래가 없는 이녘의 어린이들을 위해 「조선 동요 백곡집」을 펴내는 것이었다. 1929년에 상권이 그리고 한참 뒤인 1935년에 하권이 나옴으로써 완결을 본 이 백곡집은 어린이들에게 실로 푸짐한 선물이었다.

1931년에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 자리에 낮은 그는 이듬해 2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석달동안 시카고의 쉘우드 음악대학에서 연구하고 돌아오기도 했으며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강사로 나갔다. 이 무렵 낙랑구락부 안에 바이올린 연구회를 두어 새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큰 힘을 기울였다.

난파는 일찍이 열여덟살에 결혼을 했었다. 그러나 맏딸 숙임을 낳은 뒤에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그는 혼자 살기로 결심하고 오로지 음악에만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서른일곱살이 되었을 때, 그의 독신주의는 깨어지고 말았다. 셋째 조카인 홍성유 부부가 발벗고 나서서 뒤늦게 맞선을 보게끔 되었던 것이다. 상대방 남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맞선을 본 처녀 이대형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난파의 음악회에도 가 보았음은 물론이고 음악으로 뛰어난 난파를 존경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앞에 나와 있는 남자가 바로 난파가 아닌가. 그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세살, 난파와는 열네살이나 차이가 졌다.

두 사람은 서대문구 홍파동에 보금자리를 꾸몄다. 난파는 워낙 나이차이가 많이 지는 신부를 극진히 위해주며 음악에도 보다 열성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35년에 「조선가요 작곡집」을 펴냈는데, 윤석중이 작사한「달마중」「퐁당퐁당」「낮에 나온 반달」이나 이원수가 작사한 「고향의 봄」이나 이은상이 작사한「성불사의 밤」「금강에 살으리랏다」「옛 동산에 올라」같은 아름다운 곡들이 모두 여기에 실린 것들이었다. 이들 가곡들은 오늘에서도 가장 많이 불리는 우리 가곡에 든다. 특히 시조에 처음으로 서양식의 곡을 붙여 현대화한 업적은 크게 평가받고 있다. 「조선가요 작곡집」은 우리의 노래가 없던 이 땅에 우리의 노래를 깃들게 한 획기적인 일이었다.

1936년에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의 책임자로 옮겨 앉은 그는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관현악단을 조직했다. 이 경성방송 관현악단은 매주 한번씩 연주회를 가졌는데, 난파가 지휘를 했고 피아노는 이흥렬이, 제일바이올린은 김생려가, 클라리넷은 오화섭이 맡았다.

이듬해에 성서 트리오를 조직했을 때는 난파가 바이올린을, 이흥렬이 피아노를, 김태연이 첼로를 맡기도 했다.

난파의 성격은 퍽 치밀하고도 내성적이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유머로 곧잘 상대방을 웃기기도 했다. 이런 성격을 아내 이대형은「재치가 있고 무척 양순한 성격」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나비 넥타이에 파나마모자, 그리고 단장은 든 「모던신사」의 모습이었다.

그는 오로지 음악밖에 모르던 고결한 예술가였다. 그런 그에게도 뜻하지 않은 고난이 닥쳐오고 있었으니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이 그것이었다. 이 무렵에 그는, 민족의 힘을 기를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인 흥사단의 부탁을 받고 단가 곧 흥사단의 노래를 작곡했었다. 이것이 저들의 꼬투리가 된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안창호, 이광수 같은 이들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붙잡혀 가기에 이르렀다. 그는 모진 고생을 했다. 백일만에 집으로 돌아온 그의 몸은 퉁퉁 부은 채로 말이 아니었다.

「보리밥이나 한 그릇 주구려.」

그리고는 차려내기가 바쁘게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그만큼 굶주렸던 것이다. 이때 그는 이미 병을 얻고 있었다.

이런 일을 겪었으나 그의 음악에의 열정은 더욱 불타오르기만 했다. 그는 다시 경성방송 관현악단의 일을 보며 1937년 6월 8일과 9일의 이틀 동안에 걸쳐 제1회「전조선 창작곡 발표 대음악제」를 개최했다. 큰 행사였다. 서울장안이 온통 축제분위기에 들떴고 사람들은 너도 나도 지금의 시민회관 별관인 부민관으로 몰려들었다. 여기서 난파는 관현악곡, 즉흥곡, 동양풍의 무곡, 연가곡, 이은상이 작사한「나그네의 마음」같은 여러 곡들을 스스로 지휘하는 경성방송 관현악단의 연주로 조연했다. 성공이었다. 청중들은 환호했고 신문기자들은 플래시를 요란하게 터트렸다.

객석에 앉아 있는 이대형의 마음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막이 내리자 난파는 누구보다도 먼저 아내에게 다가왔다.

「잘했소?」

그는 아내의 소감을 물었다.

「아주 잘 했어요.」

아내는 감격에 겨울 따름이었다. 옥고를 치르고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음악에 정진하는 그가 새삼스럽게 존경스러웠다.

「당신이 뒤에서 보디 더 잘 되던걸.」

난파는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이 음악제에서 난파가 지휘한 관현악단은 40명의 단원으로 짜여져 있었다. 음악제가 큰 성공을 거두고 난 뒤에 그는 더욱 욕심이 생겨 이 관현악단을 곱절 늘려 80명의 단원으로 짜여 본격적인 관현악단으로 만드는 게 꿈이었다.

「그렇게 된다면야 죽어도 소원이 없겠는데…」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음악가로서의 이 당연하고도 소박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흥사단 노래로 잡혀 들어가서 해친 건강이 날로 나빠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41년이 되었다. 몸이 눈에 띄게 안 좋아진 그는 체조라도 해볼 양으로 아침마다 마당가에 섰다. 하지만 이것도 무리였는지 그는 그만 늑막염에 걸리고 말았다. 늑막염만으로는 그리 대단한 병은 아니었다. 그러나 병은 또 다른 병을 불러와서 뇌막염으로 발전했고 마침내 그는 지금은 위생병원이 되어 있는 청량리의 경성요양원에 입원하는 몸이 되었다.

「운명교향곡을 들려줘요.」

병석에 누운 그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자주 틀어 달라고 조르다시피 했다. 한창 일할 나이에 못 다한 꿈을 비장한 음악 속에 잊으려는 몸부림이었을까. 그는 이미 그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눈을 감고「운명교향곡」을 듣는 그는 아내에게 예수를 믿을 것까지 당부하면서 하나하나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었다.

「죽으면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을 해주오.」

죽음을 앞둔 그는 안타깝게 말했다. 지휘할 때 입은 그 연미복을 세상을 하직하면서 입고 가고 싶었던 것이다. 40명의 단원을 갑절로 늘려 지휘해 봤으면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고 했던 그였다. 그러니까 저 세상에서나마 그 꿈을 이루어보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었을 것이다.

병세가 조금도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자 병원에서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종용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집으로 옮기고 가료를 계속했으나, 그의 「운명교향곡」은 이미 마지막 마디에 접어들어, 8월 30일 아침 열한시에 그는 끝내 눈을 감고야 말았다.

그는 유언에 따라 화장을 했다. 그러나 소원하던 대로 연미복은 입혀지지 못하고 관속에 그냥 넣어진 채였다. 짧고 안타까운 일생이었다. 그리고 이제 갓 서른의 나이에 홀로 된 미망인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충격을 준 일이었다. 미망인은 난파의 모습이 떠올라 그와 함께 홍파동 집을 팔고 떠났는데 그 뒤 난파가 작곡한 노래를 듣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1966년은 난파가 간 지 25년이 지난 해였다. 이해를 맞아 새싹회에서는 그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수원의 팔달산 기슭에 「난파 노래비」를 세웠다. 수원은 그가 태어난 활초리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경기도의 도청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 노래비에는 이원수가 작사하고 난파가 곡을 붙인「고향의 봄」이 새겨졌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1968년에는 그가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남산의 옛 중앙방송국 앞뜰에 동상에 세워졌다. 그리고 난파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해마다 난파가 세상을 떠난 날을 기억하면서 기념 음악제를 열고 있으며, 그 해에 괄목할 만한 활동을 벌인 음악가에게 난파상을 수여하는 일도 하고 있다.

난파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서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더 일해야 할 나이에 우리 곁은 떠났다.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