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박물관의 필요성
김열규 / 서강대 교수
1. 잃어져 가는 것들
전통문화의 터밭인 농어촌 사회에서 전통문화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서울, 부산 등 이른바 기성 도시공간만이 아니고 전국의 시. 도. 면까지 도시화해 가고 있는 상황속에서 전통문화는 발판을 잃어가고 있다. 이십년 안팎에 겪은 격심한 문화변혁은 전통문화의 소실과 병행한 것이다.
이제 손주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옛이야기를 듣지 않고, 애들은 둘러앉아 수수께끼를 주고받지 않는다. 민요 가락은 베틀과 함께 기울었고, 각종 금기며 속신은 미신이란 딱지가 붙어 쫓겨난 지 오래다. 전통문화를 좁게 잡아 민속문화와 같은 뜻으로 쓴다면 지금은 분명히 민속문화의 철이 아니다. 일부 경연대회가 있고 향토문화제가 있지만, 생활현장에서 유리된 쇼로 화했거나, 반짝하고 나면 그만인 하루살이가 되고 말았다. 절로 노는 것이 아니고 일부러 놀자고 해서 놀거나, 놀아나고 해서 노는 놀이, 그런 것은 유사민속에 불과하다.
그런 것이 흥할수록 생활현장의 유기적 생명체인 민속문화의 상실은 더더욱 촉진되는 것이다
2. 현장에서의 원형보존
이런 현실앞에서 전통문화를 보존하자는 소리가 다급하게 울리게 된 것이다. 보존에는 둘이 있을 것이다. 채록보존과 현지에서의 원형보존이 있을 것이다. 전자에는 녹음, 녹화 그리고 기록이 있을 것이다. 지금 두 가지의 보존이 하나같이 시급하다.
먼저 후자의 경우부터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하지만 이미 현장의 원형보존이 불가능한 것들이 많다. 생활의 변화를 따라 자연적으로 사라져 간 것을 억지로 재생하자고 들어도 적어도 생활현장에서는 불가능하다. 도리 없이 전수자를 인위적으로 재생, 보존하는 수밖에 없어진다. 생활현장에서 유지된 하나의 유리된 하나의 추상이 보존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골동적 보존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나마 보존 않는 것보다 나은 것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런 뜻에서 오늘날의 생활의 맥락이 살아있는 경우는, 지금이라도 전통문화의 현장보존이 가능한 것이다. 가령, 공동의 모심기 같은 경우, 협동하는 (두레)의 전통이 <모심기 노래>의 가창은 어렵지 않게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생활맥락이 수용하는 한, 이같은 현장보존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골동문화 아닌, 혹은 박물관 속의 문화 아닌, 그러면서 공연장의 문화 아닌 살아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경연대회나 향토문화제가 치루어진다고 해서 생활현장의 산 문화가 보존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농어촌 사회의 주민들이 그들의 생활양식이며 세계관, 가치체계, 그리고 문화에 자신을 잃은 지 오래다. 잃기도 했지만 잃게 한 면도 없지 않다. 심각한 열등의식에 빠져 있다. 현지조사를 나갈 때마다 이 열등의식이 조사의 장애가 된다.
"그 까짓 미신", "그까짓 소용도 없는 것"들을 알아서 뭘하겠느냐고 조사에 잘 응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도시문화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갖게된 이 열등의식의 극복 없이는 전통문화가 생활현장에서 온전히 보존되기를 바라기는 힘들 것이다.
이같은 테두리의 보존이 야기될 적마다 조심할 일은 시대의 변화와 생활의 변화에 따라서 민족문화가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변이하는 것을 백안시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변화는 전통문화의 필연적인 속성이다.
현장의 민속문화가운데 흔들림이 크고 소멸의 속도가 빠른 것은 신앙이다. 생활이념 등, <민속이데올로기>라고도 부를 만한 것들이다. 거기에는 전통적인 가조숭앙, 속언, 미신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근원적으로 전통사회의 사고의 체계, 행동의 지표를 결정하고 그 세계관이며 가치관이라는 그물을 이루는 매듭이고 고가 된다. 이들은 민속공예 같은 유형물이나 민속예술 같은 공연성이 있는 것들에 비해 매우 미약하다. 민속공예나 민속예술은 상업성과 결합하여 대중사회에서 살아남는 적응력을 가지고 있다. 강화 화문석이나 담양 죽세공 같은 것이 그 좋은 본보기다. 심지어 워낙 민간신앙의 맥락 속에 간직되어 있었던 공예나 예술은 원맥락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별개로 살아남기도 하는 것이다. 모체의 사망에도 매이지 않고 생명을 지탱하는 태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가령, 신앙체계로서의 굿은 무너져도 굿거리의 외형은 그 춤장단만이 예술이란 이름으로 공연물로서 살아남아 있는 것도 이 보기에 속할 것이다. 물론 상업성이 껴들어 소비문화 아닌 대중문화라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현장에서의 전통문화 보존에 몇 가지 문제가 있게 됨을 알 수 있다. 첫째 사라져 가기 쉬운 정신문화부분은 이미 현장보존이 어렵도록 위협받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사회의 산업화 및 도시화에 밀려 사라질 것은 도리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이미 그 원형보존을 채록보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둘째 상업성과 대중성을 띠고 현장에 살아남아 있는 유형물을 원형과 구별짓는 일이 있어야 한다.
대중성이나 상업성은 현대사회의 지배적 내지 주류적인 특성이다. 그런 속성이 적었던 혹은 없었던 전통사회에 있어서처럼 민속성을 상업성 및 대중성에서 확연하게 가름짓기는 오늘날에는 힘들 것이다.
민속성 자체 속에 상업성 및 대중성이 껴들어 있다고 보아야 하겠으나, 그렇다고 오늘날의 변화된 양상을 원형과 뒤섞을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원형보존이 필요한 것은 대중성과 상업성이 껴들기 이전 상태대로 현장에서 보존하여야겠으나 그것이 불가능 할 때는 특별한 전문적 전수자를 통해 인공적으로라도 보존하는 길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특수한 전문적 전수자에 의해 보존된 문화는 그만큼 생활현장에서 되어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생활현장의 보존이 없는 인간문화재의 지정에는 원형보전이라는 차원에서 보아 한계가 있다는 것도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문화재 지정이 가치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인간문화재 지정으로 곧 원형보존의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아는 안이한 사고 방식을 경계하자는 것 뿐이다.
3. 채록보존
이제 채록보존에 관해 생각해 볼 차례다. 이 보존은 생활현장에서의 보존에 대해 훨씬 문제가 간단하다. 사람과 기재를 동원해서 녹화, 녹음을 하고 또 기록을 하여 보관만 하면 일단은 성공한 듯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이같이 용이한 듯이 보이는 곳에 함정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방면 보존에 실제로 많은 함정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함정의 극복을 위해 이제 몇 가지 문제점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 조사, 기록을 위한 전문가를 길러야 한다. 전문적인 "안목과 과학적인 식견이 없는 조사와 모집은 불완전한 자료를 결과로서 남기게 될 뿐만 아니라 원자료나 그 자료가 간직되어 있는 현장을 파손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민속학과 인류학 분야에서 정규훈련을 마친 사람이거나 그와 같은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시급히 확보해야 할 것이다. 어느 경우, 어느 영역에서나 마찬가지로 아마튜어리즘은 청산되야 할 것이다. 전통문화자료는 민족사에 길이 전해질 실화들인 만큼 그 청산은 더욱 절실한 것이다.
둘째 모집 보존될 대상의 선정을 체계화 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엄선된 대상 목록의 작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 우선 전통문화를 총 망라하여 범주의 대소를 따라 잘 분류된 목록이 필요하다.
가령, 구술전승이면
얘기
노래
속언
민중의 문 수수께끼
속담
욕지거리
와 같은 분류표가 있을 수 있고, 신앙의 경우라면,
불교
도교
상교
무의(굿)
무속 무가
무조식
성무절차
와 같은 분류표를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목록은 가안에 불과하나 어떻든 그것들을 보기로 한 분류목록은 있어야 할 것이다. 일단 목록이 꾸며지면 분류의 체계 및 상하법주에 따른 번호를 붙여 두어야 할 것이다. 가령 신앙이 대항목 Ⅱ라면 불교가 「Ⅱ-1」,도교가「Ⅱ-2」, 유교가「Ⅱ-3」, 그리고 무속이 「Ⅱ-4」가 될 것이고 따라서 무의(굿)는「Ⅱ-4-i」이 될 것이다. 컴퓨터처리를 위해서는 모집대상들만 체계적으로 기록화하는데 그치지 말고 지역번호, 조사자번호, 조사일자번호 등도 미리 결정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목록작성에서 유념해서 할 것은 우선 그 동안의 전통문화의 보존이 대규모의 문화재이거나 인기있는 문화재 등에 편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파행적인 조사, 보존은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 문화재의 값을 오늘날의 대중적 인기로 가름해서는 안 된다. 대중 상대의 흥행이 될만한 것을 골라 보존하려다가 문화재 그 자체를 그르친 사례가 드물지 않다. 현대의 소비문화의 취향에 맞게 전통문화를 변형수용하는 것과 보존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데도 양자 사이에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 마저 등한시한 전통문화재가 적지 않다. 가령 민속문화재의 경우, 그것도 구술전승의 경우 서민적담과 민요 등에 관심이 집중되고 미신이나 수수께끼 등은 소홀하게 다루어져 왔다.
미신은 욕지거리, 속담, 수수께끼와 함께 이른바<민중의 문>또는 <민속의 지혜>를 이루면서 민간종교의 기틀이 되고 민간사고의 단위가 되고 있어 그 모집, 보존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재미가 없고 흥미거리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는 이 <민중의 문>을 언제까지나 모른 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목록작성에 있어 또 달리 관념해야 할 점은 소멸속도의 지속을 감안하여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는 것에 대한 보존을 서둘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보존에는 원형의 실연보존만이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기록보존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가령 스포츠와 각종 새로운 상업적인 놀이기구의 보편화, 그 밖에 레저용품의 대중화로 급속히 사라져 가고 민속놀이, 아동놀이 등도 화급히 기록 보존해야 할 대상들이다. 전국에 대규모의 수몰지구가 몇 곳 생겨남에 따라 인위적으로 사라지게 된 자연촌락의 경우 그 전통문화마저 마을과 함께 운명을 함께 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 중 어느 지역에서 시행된 문화재 발굴 및 보존 사업에 고고학적 대상과 역사적 유적만이 포함되고 민속문화가 빠진 것은 천억의 일부이라고 않을 수 없다.
셋째 모집과 정리가 정밀하고 과학화되어야 한다. 현재로는 전통문화 내지 민속문화의 조사모집은 주로 대학의 방학기간 동안의 과외활동으로 치루어지고 있고 일부 학술기관과 문화기관에 의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활동의 주류 내지 상당한 몫이 전자에 의해 차지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문학의 활동은 단기간에 지속성없이 치루어 진다. 조사요인인 학생이 해마다 바뀌고 지역이며 대상도 동요하고 있다. 소낙비처럼 스쳐가는 조사로 수집이라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따라서 조사결과며 보존하고 있는 자료에도 불안을 느끼게 된다.
대학 이외의 기관에서 행하는 조사, 보존활동도 한 둘의 예외를 빼고는 산발적이고 즉흥적이다. 조사된 자료며 보존된 자료가 불안하기는 대학의 경우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무엇보다 장기적이고 일관된 계획 하에 조사, 모집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조사방법이 쇄신되어야 하고 모집, 보존방법에도 새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조사대상인 정보제공자와 문화재가 엄선되어야 한다. 떠돌이에게서 마을의 전설을 수집할 수는 없다.
그리고 수집된 자료와 정보에 신뢰성을 부여해야 한다. 채록에 관한 정보, 정보제공인에 관한 정보, 그리고 정보 자체에 관한 정보 등, 직접적인 정보나 자료 못지 않게 주변 정보가 중요한데도 적지 않은 채록보고서가 이 부분을 소홀히 다루고 있다.
언제 누가 어떤 상황, 조건 속에서 누구에게서, 어떤 유래를 지닌 정보를 어떤 방법으로 채록했는가를 반듯이 밝혀야 하고 그럼으로써, 정보를 에워싼 생활현장과 동시에 채록 현장이 채록보고서에 최대한으로 반영되게 하여야 한다. 정보뿐인 벌거숭이 보고서, 그리고 이차정보를 수록한 간접 보고서 등은 자취를 감추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중고교, 교지에 학생들이 제 고향 전설, 민요라고 소개해 놓은 것을 그대로 옮겨서 보고서에 편입시키는 등의 일마저 과거에는 있었던 것이다.
4. 있어야 할 대책
위에서 굵직한 문제점만 열거해 보았다. 전통문화 내지 민속문화의 소실되어가는 속도가 빠르고 그나마 그 모집과 보존에 문제가 한둘이 아니라면, 반듯이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앞에서 들어 보인 세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모집, 보존 사업을 진행시킬 기관이 필요하다. 고고자료와 미술품을 위한 박물관이 있듯이, 민속문화재를 위한 기구가 있어야 한다. 현재 민속박물관을 강화하여 민속기구 등 물질자료의 모집, 전시에서 한 계단 높여서 일절의 민속자료를 조사수집하고 보존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녹화와 카드, 그리고 동판 디스크를 포함한 녹음자료가 망라된 대규모의<아카이브>박물관이 있어야 할 것이다. 거기서 각 지방 전설의 녹음을 직접들을 수 있고, 각 지방의 놀이를 비디오로 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복사, 배포하는 사업도 겸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 기구로 하여금 현재 각 대학과 일부 학술문화기관에서 전하고 있는 조사, 모집을 지원케 하면서, 중복과 소비가 없는 전국적 규모에 걸친 일관성을 지키게 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지금 까지 각 대학이며 기관에서 수집, 보존하고 있는 자료까지를 망라한 <아카이브>의 <캐터로그>를 작성하고 그것들을 <인덱스> 화하는 작업도 집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전통문화의 총람이라고도 할 방대한 <인덱스>집이 간행되어야 할 것이다.
전통문화는 민족문화의 기층이다. 그것은 총체적인 민족문화의 틀을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가름한 거푸집 구실을 다하였고 지금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문화내지 민속문화의 모집, 보존이 엉성한 채로 내버려져 있다는 것은 과거의 이해에도 태만하고 무관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아가 우리들 자신을 위한 미래의 청사진 작성에도 충실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한국사 인식과 교육이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있는 요즘 이다. 왕조 중심의 기록된 역사만이 역사가 아니다. 고고자와 미술사료에 의해서만 문화가 기술될 것도 아니다. 전통문화에 대한 고려도 역사인식이 강조될 때, 당연히 더불어 강조되어야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