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한 처용무의 圖譜化
김기수 / 인간문화재
우리나라에서 문화재보호법이 처음 공포된 것은 1962년 1월 10일에 법률 제961호로 발표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 1964년 12월7일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종묘제례악이 비로소 지정된 이래 오늘날까지 음악, 무용분류에서만도 음, 가, 무에 걸쳐 허다한 종목과 인원이 지정된바 있다. 나는 여기에 필자와 직접 관계있는 종묘제례악(1964. 12. 7 제1호 지정)과 처용무(1971. 2. 8. 제39호 지정)에 대해서 그 기록보존 자료와 전습교재 제작 등 현황실상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 현안 문제점도 곁들여 참고와 대응에 자하고 한다.
먼저 종묘제례악에 관해서 말한다면 필자는 집자로서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즉 집사란 제의의 진행 절차에 따라 연주하게 되는 악무 절도의 총지휘자인 까닭에 소임상의 중요성이 매우 어렵고 무거운 바 크나 그러나 여기서는 오히려 실기면에 치중해서 고찰함이 옳겠기에 악. 가. 무로 나누어 개괄적으로 논하려 한다.
종묘제례악은 궁정아악을 형성하는 범주내에서 크게 삼대유형으로 분류하게 되는 제례악과 안례악. 군례악중 가장 소중한 제례악의 하나로, 이씨조선 태조고황제 4년(1395)에 서울(한양) 현소재지에 축조된 종묘(역대제왕과 왕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에서 제향을 거행할 때 연주되는 악·가·무 로서 악명은 보태평과 정대업의 악무라고 하는 점을 알고 대하기 바라고 또 음악에 대한 개념상의 특징으로서는 기악과 성악과 무용이 각각 서로 분화되지 않고 하나로 종합적 일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외래적 현행 개념과 동양적 한국전통 제례식 개념과의 특이성이라는 전제를 이해하고 살피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되어 좋겠다.
그러면 기악으로 다뤄지는 현행 악기로는 편종, 편성, 방향 등 유율타악기와 박, 축, 어, 장고, 절고, 보고, 대금 등 무율타악기가 들고, 여기에 대금. 당필률. 태평소. 계금. 아쟁 등 관현악기(지난 한 때에는 중금. 당적. 현금. 가야금. 비파도 썼었음)들이 연주되며 또 악장이라고 하는 성악과 일무라고 일컫는 무용이 병행되어 큰 규모의 악무로 구성되었다.
이에 연주되는 악곡을 처음 초창기에는 아악(협의의 아악)도 쓰고 당악도 쓰고 일정하지 않게 쓰여 오다가 세종대오 17년(1435) 에 우리 고유의 향악과 고취악으로 마련된 정대업(소무, 마경, 독경, 선위, 요령, 혁정, 신정, 팽안, 지덕, 휴명, 순응, 청세, 화태, 진요, 숙제, 영관)과 보태평(희문, 계우, 의인, 형광, 보부, 융화, 승강, 창미, 정명, 대동, 역성)의 악무(1 핵 32정간보)로 조정 제례악에 아뢰던 것을 다시 세조대오 9년(1464)에 이를 보정하여 새로운 보태평(선종의 문덕을 영구한 희문, 기명, 귀인, 형희, 집녕, 융화, 현미, 용광, 정명, 대수, 역성, 진찬)과 정대업(조종의 무신을 찬미한 소무, 독경, 요정, 선위, 신정, 분웅, 순응, 용수, 청세, 혁정, 영관)의 악무(1 핵 16 정간보)를 신제하고 종묘제례악으로 전용하여 오다가 인조대왕 3년(1625)부터는 종광장이 대수장 앞에 첨가되면서 용광과 정명장이 합곡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서간 필자는 동기 악우들이 당시 함께 우리 스승들로부터 교습되어 다시 다음 제자들에게 계승시키기에 이른 과정을 일편하기로 한다.
1931년 우리가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제1학년 2학기 때 였다. 그때의 교재악보은 세종악보, 세조악보, 대악후보, 속악원보 등 제악기와는 달리 정간보 아닌 다만 종서의 필명 문자악보였다. 주로 타악기보로서 이를 구음(성악)으로 먼저 배우고 그리고 편종으로 그 타법에서 악곡타주까지 구음에 맞추어 익힌 다음, 이어서 편성, 방향, 절기, 박, 대금 등 각 악기를 보태평 희문곡에서부터 정대업 영관장까지 완전히 암보연주가 가능하도록 각자 반복훈련하는 노력이 쌓아져야만 했다.
다음으로 제2학년 제1학기에는 전원에게 당필률을 불게 하여 보태평, 정대업의 전곡을 익히게 하고 이때에는 구음대신 각 타악기를 돌려가며 당되리와 맞추어 익혀가되 이것은 보통악과에서 전학생이 필수과목을 이수케 하는 교육과정의 일 단계였으니 보이지 않는 노력이 기우려져야 비로소 다음 과정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제3학년 제1학기에 가서 전공악기가 선택된다. 이때 선택된 악기에 따라 대금(겸 중금)과 계금 (겸 아쟁) 전공차비는 또다시 전공악기로의 재지도를 받게 되어 본격적으로 전체 합악이 악기의 이뤄질 수 있게 되자 주 일. 이사식, 합주훈련을 통하여 전문적 고도의 실력이 배양되어가는 것이다.
당시 지도담당교사에는 주로 아악사와 악악수장 직에 있던 대가급 선생이었으니 함화진악사를 비롯하여 명호진악사수장 (제 1기). 김덕규("), 박창균(")과 장인제 (제 2기) 등 여러 선생이 수고하였고 전공과에 넘어가서는 당피리는 김덕규선생, 중금은 박창균, 대금은 김천용, 계금. 아쟁에 김천흥 선생이 각각 담당했었다.
악장은 다른 여러 종류의 제례악에서 모두 가사만이 기록으로 전하고 있을 뿐 그 율조나 창법은 거의 멸실된 상태에 있어 이 바닥에 유감만을 남기고 있는 중 오직 이 보태평과 정대업의 악장만이 건전하게 전습되어 오는 까닭에 새삼 그 귀중성과 가치성이 높이 연구 인정되고 있고 따라서 다른 성악곡과는 판이한 특수성이나 고유한 음악성이 함께 평가되어 새 자랑으로 굳어 가고 있다.
보태평과 정대업의 악장은 원래 세종대왕이 친히 찬제하신 악장가사를 세조 8년에 최항에게 명하여 신제케 한 가사(한시)로 불려오다가 대한제국 고종년간에 보태평은 보태화로 정대업은 형만년으로 악명이 고정되면서 시가의 부분적 자구수정이 가하여져서 우리는 그대로 익히고 불려오다가 최근에 이르러 다시 원시대로 환원하여 창화케 되었다. 예컨대 기명 초구가 어황성목인데 어유아조로 수정되었던 것을 도로 어황성목으로 환원하고 귀인장에서 천유현도 작선융복으로 고쳐 부르던 것을 도로 황이상제 구민지모 원시 대로 환언하였다는 말이다.
악장 창제는 기악선율 골격에 얹어진 특출한 시김새와 표현법에 의하여 매우 장엄하고도 신비스러운 영감적 아취를 더하게 하는바 크고 그 창법이나 율조는 역대로 전승되어 오는 본조에 기하여 1930년 대 즉 우리가 아악생 제3학년 때부터 주 1시간씩 3년에 걸쳐 이왕직아악부 아악사 추사 이수경 은사의 전창으로 지도된 바로, 어느 때부터 분립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악장율조의 변용이 박자상 나타나서 기악과의 교창이 불가능하게 되어 악장은 악장대로 따로 불리고 전수될 뿐 종묘제형시에는 도창으로 악장을 부르지 못하고 이를 대신해서 각 악곡마다 구음으로 대행하는 이변이 장기간 속행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악장가창의 정백부분만을 조정함으로써 숙명적 과정의 현안인 기악과의 화창을 원활히 해결하도록 1950년대에 다시 매만져 고쳐 엮음으로써 상실되었던 악장구실의 본능적 기능회복을 재연시킬 수 있도록 되었다. 한 보기를 귀인곡 여섯째 마디에서 들어 보기로 한다.
옆 예시와 같이 조정전과 후는 이박의 상직을 낳고 있어 조화를 잃었다.
일무는 원래 집단적 군무형태이다. 대형은 8열 8행의 64인 입일무도 쓰고 6열6행의 36인 육일무도 썼으니 고종성제시대에 입일무를 행하다가 왜정기간중에는 육일무로 축소 거행되던 것이 광복과 더불어 팔일무로 환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묘 일무에는 문무와 무무가 있으니 문무는 보태평악무로 좌수보회에 좌수병습으로 영신과 존번례 그리고 초헌례에 추가되고 무가는 정대업 악무로 전대례목검에 후사례목창으로 아헌레와 경헌례에 추어진다. (전에는 궁시도 썼었으나 현 불용).
당악원의 악원이 많을 때는 4. 5백에서 7. 8백을 헤아렸으니 종묘대제에도 영영적 등가악(당상악)이니 당하 간가악 승무와 정전의 등가악과 간가악 및 승무가 기악도 대편성으로 풍족한 차비 안배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국운의 혼란과 악정의 회미로 악원의 이산이 번다하고 더욱 말기에 이르러서는 각급 악사의 멸축. 해산 등으로 악정편제에 대변이를 자아냈으니 가장 축소된 편성으로나마 기악차이는 등가와 간가를 오르내리며 겸하는 군색을 면하지 못했고 승무 또한 정원무사로는 도저히 담당할 수 없어서 임시로 고립무원을 채용하게 되니 본연의 승무 동작이야 어찌 바라긴들 했으랴. 막불득기한 궁여지책으로 맞지도않는 전, 좌, 우 삼방배형식의 약식 무작이 등장하게 되어 일그러진 모습인 채 1940년 중반까지 답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승무는 승무대로 따로 전습되어 왔으니 전래하는 동작을 중심하여 1930년대에 당시 이왕직아악부 제 4대 아악사장 괴정 김녕제 은사가 시용악보에 준거하여 재정비하고 두봉 이병성 아악수장이 실기지도에 임하여 우리는 아악생 제3학년 제1학기부터 주1시간씩 3년에 걸쳐 전곡을 전수받아 오늘에 이르는 이가 곧 현행되는 승무 춤사위로서 시용악진와 불일한 점도 간혹 지적되는 바 없지도 않으나 이를 원형으로 삼아 1950년대에 승무 승무략보로 총정리하여 국악사양성소, 국악고등학교, 무형문화재전수회관 등에서 교재로 채택 교습에 전용하고 있다. 승부 또한 우리나라만에 고유하게 전승되어 오는 유일하고도 대표스런 문화유산임을 보람있게 일깨우고 있다.
다음은 처용무에 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처용무의 연원을 멀리 신라국 제 49대 헌강왕 5년 (879)에 있었던 학성 개운포 사화에 연유해서 1천1백 여년전에 창무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장황한 설화는 여기서 논할 바 아니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동해용왕의 아들로 칭하는 처용의 정체가 무엇이든 하여간 신라서울 경주에서 궁중악사로 기인됐던 처용악사가 그 가무예능에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관대하고 후덕한 높은 품성에 감복한 후세 무척들이 그를 칭송흠모한 나머지 평소에 그가 관중연례에서 즐겨 추었던 무용을 빙적모방하여 안무하니 처음에는 1인처용무를 추다가 뒤에 오방처용무로 수행 환대하고 처용의 외양 용모를 본떠 가면을 만들어 쓰고서 관중연례와 난례시에 반드시 추어 왔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이조에 이르러서는 세조년간에 윤준에 명하여 처용가사를 개선하고 봉황영이라 이른 다음 조정의 정악 악무로 삼아 무중왕으로 예우되면서 오늘에 이르른 매우 호방하고도 유려한 남무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때 상발무 또는 풍두무라는 별칭도 있었던 이 처용무는 궁중에서도 제왕들의 환호를 얻어 친히 애무하던 임금까지 있었던가 하면, 향도에도 널리 알려진바 있어 경주지방에는 지금도 비록 변양된 인상은 짙으나마 전하여 추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악학쾌범의 시용향악정제도의와 처용관맥도설 그리고 국립국악원 소장 무도흘기 등에 그 무작절도와 창가 의상 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좋은 문헌자료로 보존되어 있고 역대로 전악 강취성같은 명무대가로 많았으나 그러나 구한말의 악원 실상이 극도로 어러지워 원형마저 흔들리는 위기를 면치 못했다.
따라서 현행되고 있는 처용무는 1920년대 초기에 당시 당례원에서 김녕제 아악사가 중심이 되고 함화진, 이수경 아악수장이 합세노력하여 전래하는 법통과 제문헌을 삼배상고하며 새로이 복원 안무하고 정립함으로써 아악사의 아악수들로 하여금 이수케 하니 위기의 단절을 극복하고 오늘에 계승되어 오는 것이다.
필자는 1930년대 중반 아악생 제 4학년시절 법무과정에서 동료들과 처용무를 수업하고 연마하던 중 그이듬 해에는 마침 영친왕 이은 전하 내외분의 일시 귀국으로 아악부 내임의 기회에 일 소당에서 아악과 처용무의 특별감상회가 열리자 필자는 북방흑처용을 연무하는 영광을 입은 바 이때 중무는 이병성 2기생이었고, 동청은 박창진 삼기생, 남홍은 김이룡 삼기생, 서백은 김봉완 삼기생이었다.
뒤이어 수차에 걸친 부민관무대 아악연주회에서 처용무 연목에는 반드시 출연했고 광복 이후 국립국악원 발표공연에 중무를 계속 맡았으며 1957년부터는 처용무보를 작성 담당하여 국립국악원 부설 국립사 양성소생들에게 교수임무를 띠었다.
이들 이수자들이 현재로는 중견적 무사급에 임하고 있으며 국립국악원 또는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조교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들 종묘제례악과 처용무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다른 여러 종목들과 다름없이 다함께 그 전통적 순수성이나 음악, 무용으로서의 예술적 우수성이 국내외에 높이 평가되어 그 영구적 기록 보존과 아울러 그의 보급 발전을 획책하는 자세가 제고되어 그 방안의 일환으로 문화재관리국, 국립영화제작소. UNESCO문화부, 한국문화재보존협회 등등 관계당국에서 수차에 걸쳐 녹음, 녹화, 음반, 영화제작 등 많은 기록보존물을 생산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한편 예능보유자들로서 후계자양성을 위한 교재작성이나 기타 연구물 저작에도 게을리 아니하여 많은 편저물을 각 분야에서 작출하였음도 엄연한 사실로서 그중 종묘제례악과 처용무에 관한 교재만도
·1958년 3월 악장과 일무 논저
·1966년 8월 종묘일무(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공저
·1971년 5월 보태평 정대업의 악장과 일무 편저
·1973년 7월 보태평 정대업 총합보(한국음악제11집 )편저
·1980년 8월 종묘제례악 회보 및 각악기보(국악전집 제8집 )편저
외 다수가 있어 완벽단계에까지는 채 못이른다 하더라도 꽤 갖추어진 자료구실을 하리라고 생각되나 일무무보의 도보화 작업이 아쉬운 상태를 아직도 면치 못했다고 보겠고 또 처용무에 있어서는
·1957년 4월 처용무보 등간
·1969년 11월 처용무 공저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외 수편의 연구물이 있다고는 하나 그러나 보존과 보급을 지향한 보다 완벽한 기록물의 편찬이 소망스럽다.
한마디로 매듭 짓자면 처용무의 역사적 고변과 그 변천과정을 밝히고 무작보제를 위한 상세한 무작도설 및 반주장단과 함께 반주음악의 명확한 대비 도보화가 시급하게 제작되어야 비로소 이바닥 기록보존과 계승발전의 본의를 첩경으로 인도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