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전통문화예술의 기록보존Ⅱ. 기록보존의 필요성

전통적인 조리기술의 기록보존




황혜성 / 인간문화재

무형문화재는 1964년12월부터 지정하기 시작하였고 그 종목은 76종에 달하고 있다. 큰 뜻이 있어 나라가 이 일에 착수한 것은 크게 잘 된 일이었다.

그 종목 가운데 가장 잘 알고 있는 본인 스스로 겪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38호에 대한 것을 중점적으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문화재보존법 시행령에서 분류한 것을 보면 ⸁ 연극 ⸂ 음악 ⸃ 무용 ⸄ 공예기술 ⸅ 기타로 되어 있다.

이중에 기타라는 항목은 앞에 어느 종목에도 들어가지는 않으나 이것은 전통적인 성격은 뚜렷하고 보존해야 된다는 의의는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속에 들어 간 무형문화재 38호의 종목의 이름이 "조선왕조궁중음식"이고 그 지정은 1970년 12월 24일 문화재위원회 본 회의에 상정하여 지정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지고 이어서 1971년 1월5일에 이 종목이 기능보유자는 한희순 상궁으로 지정을 하였다. 이 종목의 배경과 보유자의 신분은 확실하였으므로 "관중음식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이 바로 본인이었다. 물론 그 회의에 제출한 보고서는 틀림이 없었고 또 전수를 정확하게 해야 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1970년 그 당시에는 유일하게 전수되고 있는 장소가 창덕궁 낙선제 였고 조선왕조 마지막 황후이신 윤비의 저택에 4명의 상궁이 생존하고 있어 살림을 하고 있었다.

상궁들도 그때는 이미 거의 세상을 뜨고 고종대에 여관직으로 입관한 사람은 오직 한희순 상궁 (1889년 을축생)한사람 뿐이고 그밖에 순종의 황후 윤비의 결혼 당시 친정에서 따라서 입궁한 김상궁과 또 한사람, 결혼 이후에 낙선제로 입궁한 박상궁과 성상궁을 합하여 4명이 있었다. 본인이 궁중음식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1942년 9월 숙명여자전문학교 조교수로 임명 받은 해부터 시작하여 1969년 보고당시 까지 28년간 낙선제 소주방에서 한희순 주방상궁의 음식솜씨를 개인적으로 전수받고 있었다. 물론 일제말기에 혼자 뜻을 세워 배우기 시작하였고 계속하여 종전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설립 후 문화재관리국에서는 문화재위원회을 창설하고 문화재위원과 문화재 전문위원이 선출되고 본격적인 조사작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1964년 12월에는 무형문화재 1호가 지정되기 시작하여 5년만인 1969년에 38호로 지정을 받게 결정된 것이고 그 지정은 매우 신중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 당시의 조사자 자신은 28년간 자기나름대로 오직 혼자 전수 받는 것이었으나 전문요원으로 참여 이 종목을 지정받는데 공헌한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 애석하게도 한희순 상궁은 1972년 1월5일 별세까지 1년간의 기능보유자를 지냈다. 그 이후 전수받은 조리기술은 후계자도 충실히 보존하였고 38호로 지정받은 이후는 전수 목적으로 1971년 5월 15일에 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하여 기능전수를 사회화하는 데 첫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수, 전수의 방법이 확립한 것은 확립된 것은 아니었으나 지난날 궁중에서 전수하듯이 기술전달은 개인대 개인으로 하였으며 음식을 만드는 방법은 말로 설명하고 작업을 손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매일 반복하였다. 1972년 1월 5일 1대 기능보유자 별세 이후 1년여의 공백을 두고 2대 기능보유자를 지정하게 되어 영광스럽게도 본인이 스승의 기능 계승자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본인의 전수과정을 말씀 드린 이유는 2대 이후는 어떤 방법으로 전수해야 하느냐에 대하여 13년간 고심하고 있는 것을 공개하고 각계의 협력 충고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무형문화재의 여러 종목의 전수방안은 결코 같을 수는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 많은 분야의 기록보존이 이룩되고 진행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조선왕조 궁중음식"의 전수방법은 특수하고 또 한국의 식생활이 급격하게 서양화, 공업화되고 있는 가운데 홀로 서서 격랑에 시달리는 형상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잘 아는 것이고 누구나 다 만들 수 있다고 여기는 즉 용이하게 생각되는 것이 음식 만드는 법이다. 이 점이 바로 조리기술을 전수하는 어려운 점이 되고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어떻게 충실하게 계승하여 그 진가를 보전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유일한 전수자로 겨우 본인이 전수한 장학전수자 2명은 10년만에 이수자로 인정을 받았고 현재 장학생으로 2명을 발령해 주었고 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중이다.

현황은 이와 같으며 궁중에서 전수받은 두 주방상궁은 별세 그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사람이 2대이고 3대로 이어주기까지 시일을 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여기 전수를 위하여 또 전수를 정확하게 사회화하는 방법이 곧 기록보존의 필요성일 것이다.

재래의 기술전달은 머리와 손, 말로서 1대 1로 가능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수받고자하는 측이 20세기 현대사회에서 양육되고 교육을 받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관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의 교육방법을 기초로 삼아야 할 것이고 기술은 단지 기술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사회교육의 일환으로 고유문화를 민족 누구나가 정확하게 지식으로 다듬고 또 그 기능을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이 닦아야 뜻이 크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문화는 한국사람의 것이고 그 가운데 식생활문화도 매우 큰 분야이며 모든 문화 발생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 그 중요함을 크게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사회변천으로 음식에 대한 철학 의례도 변하고 있는 가운데 그 형태가 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현실은 한국사람 모두가 몸소 매일 체험하고 있다. 음식의 맛도 조리법도, 접대법도, 서명도 모두 새로운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것은 전수 교육과 무관할 수가 없다.

종래는 가정에서 주부가 조리기술자로 자처하며 살았고 딸들이 자연스럽게 전수하던 것이고 궁중에서만은 상궁들이 각 부문의 기술자로 양성된 것이므로 약간의 차이점은 있다. 궁중생활은 윤비의 서거로 이미 끝나고 조리사격인 주방상궁도 한 사람도 생존하고 있지는 않다. 조리기술의 전수를 위한 자료도 현대화해야 하는 방안을 여러 가지 실험해 보고 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술은 전달하기 위하여 문자로 글을 써서 저작물을 만들 일, 둘째, 조리기술을 자세히 정확하게 녹음할 일. 셋째, 조리기술을 자료와 조리법을 빠짐 없이 기록할 일. 넷째, 궁중음식의 경우는 조리기술, 기능으로 제작된 음식의 모습을 실물로 보고 맛을 보고 사람의 미각 속에 확실히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시식하는 일이다. 이 중에서 다른 종목과 전연 다른 점이 넷째 먹어 보는 일이다.

눈으로 읽고 보고 듣고하는 모든 자료가 잘 다듬어지는 것은 전수의 교재로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 단계는 만든 유형의 작품을 영구 보존할 수가 없으므로 그 작품을 혀로 감상 평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첫째 둘째 셋째는 다른 무형문화재 기록보존법과 똑같이 제작하여 수반적으로 완성할 것이 간절히 요망된다. 특수한 이 방안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 기능을 발휘하여 만든 궁중음식을 뜻이 있는 자리에서 시식하고 여러 사람의 입으로 감지해야할 것을 제창하고 그와 같은 목적달성을 위한 사회적인 기구가 설립되어야 할 것 같다. 현재 전수방법은 소수의 전수자에게 기술전달을 하고 전수교육을 위한 자료도 일인의 자력으로 매우 노력하고 있으나 한계가 있으니 이는 예행적인 선에 그치는 것이다. 국가의 문화재보존책의 큰 선에 올려 놓아지는 것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세 가지는 현재 가지고 있는 방법을 모두 도입하면 가능한 것으로 확신하고 협력을 동원한다면 이룩될 수 있는 일이다. 넷째 조항인 시식을 하는 일. 이것은 마지막 궁중음식을 제작하던 창덕궁 낙선제 안에 설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윤비의 수라상을 조제하던 소주방은 본채와는 떨어져 일제 때 새로 건축한 벽돌집으로 현재도 그대로 서 있고 창고도 그 서편 마당에 빈 채로 남아 있다. 문화재 관리국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현재 덕혜옹주의 살림이나 이방자 여사의 살림은 이미 궁중법도를 지킬 수 없는 사정이고 현재 낙선제의 건물만이 유지되고 있고 조선시대의 궁중문화는 생각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최근 방자 여사를 대접할 목적으로 낙선당에서 거행된 어떤 잔치에서 명목은 결혼기념일 행사라 하였으나 대주가 없는 결혼잔치 회혼례는 있을 수 없고 또 그 형식을 재현한다 하였으나 궁중법도에 없는 것을 출연한 셈이다. 물론 방자 여사의 사사로운 연석이었지만 운현궁 박 여사도, 이 씨의 친척들이 일당에 모였던 것으로 안다. 본인보다도 더 정확한 잔치를 차리는 줄 알고 참관을 하였으나 기대에 어긋났다.

하필이면 낙선당에서 서투른 이 잔치 형식이 왜 상연되었을까. 물론 문화재관리국하고는 무관하고 사사로운 일이었으나 테레비의 드라마 셋트와 같은 잘못을 왜 하였나.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 규모의 대소가 아니고 모형이 틀린 것이었다. 무형문화재 38호와도 물론 무관한 것이다. 이날 많은 사람이 참석 견학하여 테레비, 잡지에 사진으로 사회에 알려지고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여기 문제는 한국 사람이 옛 궁중풍속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 기대가 있었다는 점은 매우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잔치의 형식은 전통적인 법을 잘 지키지 못하였다. 세상만사가 다 달라지는데 어찌 다소의 변형은 감수해야 할 것도 잘 알고 있다. 여기 지적될 일은 잔치의 고배상의 음식 자체가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고이는 음식을 담는 평접시가 백자(방자 여사의 작품)요 제작한 제기접시(다리가 달린 그릇)위에 올려져서 고배상에 설찬 일이다.

한국의 예법이 조선시대에 다듬어 진 시점에서 보면 이승과 저승에 간 혼귀을 모시는 음식의 차림법이 크게 다르게 규범으로 정해진 것을 여러가지 서적과 발기에서 밝힐 수가 있다. 어찌 산사람이 제상의 격식으로 받을 수 있겠는가 방자여사는 한국 문화에 젖은 분은 아닌 것은 확실하나 궁중에서 살림을 하고 있는 한 조선왕조의 법도는 지켜야 하는 것으로 안다. 이는 최근에 발표된 일이라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어 오를 수밖에 없다.

이는 무엇인지 문화재 전승 계승에서 겪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문제는 차치하고 소주방을 다시 복구하여 여기서 다시 전수를 하고 또 낙선제 안에서 음식을 하여 맛을 익히는 장소로 하고 싶을 뿐이다. 나라에 임금님이 계실 때는 영빈관도 경영하던 일은 기록에 남아 있다. 여기서 발표된 조선왕조의 궁중음식을 다시 다듬어 한국의 전통적인 음식의 거울을 삼는 것은 현재 한국의 놓여 있는 상황에서 매우 시급한 일이라 생각한다. 식품의 질도 차차 변하여 가는 것도 감수해야 하지만 최대의 노력으로 조사기능을 전수해 나가고 연재 한국의 식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공헌을 해야 할 사명이 있을 것이다.

또 여러 가지 종류의 기록보존법을 제구하고 더하여 음식을 실제 먹고 기록하는 방법도 특별히 연구해야 할 것이다. 경복궁, 덕수궁 안에 있는 전각은 모두 실물 지정을 받고 있어 사용이 불가능함도 잘 알고 있다. 다른 방법는 지금 문화재보호협회에서 관리하고 있는 한국의 집과 같은 규모의 것을 현대사회의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운영될 곳이 필요하다. 국립극장의 무대과 같은 성격을 지녀야 할 것이다. 한국사람이 자기의 전통적인 맛을 다시 찾는 길이 한국 문화를 다시 한번 빛내는 길이 되는 것으로 믿고 있다. 몇 사람의 전수자로는 역부족이므로 전수하는 과정도 크게 넓혀서 전수교육을 전문조리사를 지망하는 사람에게 실시한다면 국가에 공헌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무형문화재도 국민생활에 실질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목표도 세워야할 것이다. 위대한 문화진흥책으로 전통교육을 습득으로 실제하고 기능자의 양성을 위하여 교육자료을 정리하는 것이 급한 일이다. 조선왕조궁중음식은 특성을 가진 분야로서의 전수방법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