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록보존 작업
장사훈 / 서울대 교수
자기 전공에 관여되는 자료를 모아 분류 정리하고 이를 잘 간직하는 일은 학문의 길을 닦는 첫걸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자료를 모으는 데에 눈이 뜬 것은 20세 전후의 일이다.
그 당시에 메모하여 둔 노트 몇 권과 채보한 악보들이 아직도 간직되고 있다.
1936년 무렵부터 6, 7년동안에 본격적으로 수집한 자료와 채보된 악보는 30년이 지난 뒤로부터 나의 학문에 크게 도움을 주었으며, 1939년 무렵에 채보한 임기준 전창 시조채보는 1973년에, 하규일. 임기준 전창 12가사는 1980년에 각각 출판되었으며, 하규일 전창의 가곡 중 남창과 여창 악보는 현재 출판 준비중에 있다.
그러니까, 이들 악보는 40년이 지나서야 햇빛을 보게 되는 셈이다.
1936년부터 1943년까지 수집 정리하여 제본까지 하여 보관하던 자료는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 악보 5권
세조실록 악보 2권
대악후보 7권
속악원보 5권
해산아조 1권
위씨악기원 1권
시조악보(채보) 3권
가사악보(채보) 2권
가곡 남창곡 1권
가곡 여창곡 1권
거문고보 1권
가야고보 1권
피리보 1권
대금보 1권
해금보 1권
아악곡 총보 5권
이상과 같이 제본한 악보만도 근 40여권에 이르렀으며, 이밖에도 아악곡 전반에 걸쳐 오선보로 채보한 총보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이 많은 자료와 다른 책들은 6.25동란 때 방 구들 곁에 감추어 두었었는데, 수복하여 돌아와 보니, 비로 쓸어낸 듯이 깨끗이 없어져 있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이 책들은 아현동 고개로 굴러 나왔고, 그 일부의 책이 시내 모대학원 국문과 교수의 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1935년부터 1939년 사이에 가곡의 거장 하규일 님에게서 직접 채보한 가곡 남창 및 서창 악보와 시조와 가사 제 1집, 가사와 시조의 명창 임기준 님으로부터 채보한 시조악보 제2집과 가사 악보 제2집은 남에 빌려 주었던 것이 요행히도 남아 있게 되었다.
이 중에서 나만이 가지고 있는 임기준 전창의 시조 악보는 1973년에 시조음악론에 수록하여 출판하였고, 가사는 1980년대에 출판하였고, 남녀창도 지금 출판을 위하여 준비중에 있다.
귀한 것은 책만이 아니다.
현재 필자가 간직하고 있는 것 중에는 1920년대에 이왕가에서 당시 귀빈을 위한 연회 때 연주되던 프로그램이 있고, 1932년 10월부터 이왕직아악부 악사들의 기술 향상을 위하여 매월 1회 정기적으로 이습회라는 이름으로 연주회를 가졌는데, 만 10년 동안의 프로그램이 한 장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1959년에 신설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의 정기 연주회 및 졸업생들의 졸업연주회 프로그램도 한 장 빠짐없이 현재까지 스크랩북에 잘 정리되어 있다.
프로그램쯤이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마는 이러한 프로그램에 의하여 음악의 변천사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1936년 무렵에 원고지에 메모하여 둔 김진환의 장고보, 하규일님의 가곡 창법에 관한 비망, 제 4대 김영제 아악사장에게 조사하여 둔 궁중정재무 창가법의 규칙 등은 다시없는 귀한 자료로서 뒷날 논문을 쓰는데 크게 활용된 바 있다.
그런, 학문에 눈이 뜨인 본격적인 국악관개 문화자료의 정리는 해방 이듬해부터라고 하겠다.
문교부 편수국에 봉직하면서 틈틈이 자료를 모으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46년에서 1947년 봄까지 고전을 섭렵하여 발췌한 국악사료를 제본한 것 중에서 지금 보존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 조선사지군사료, 삼국사기, 선화봉사, 고려도경, 일본서기
⸂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동문선
⸃ 연자실기록, 연산집, 파한집, 보한집, 익제집, 시언각비, 동인시화
⸄ 경국대전, 대전속록, 대전회통
6.25동란은 이러한 작업을 중단시켰고, 수복 후에 다시 계속되었는데, 1954년부터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서 국악 관개문헌의 발췌 작업이 시작되었다.
관개 자료를 찾아내어 카드에 올리는 일은 참으로 힘겨웠다.
이 작업은 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완결된 것으로 기억된다.
이와 같은 문헌자료의 정리는 나의 학문적인 기초를 튼튼히 하여 주었고, 시야를 넓히는 데에 큰 구실을 하였다고 믿는다.
경부고속도로를 완성한 뒤로는 전국적인 도로정비가 손쉬워지듯이 조선왕조실록의 자료정리의 완결은 경부고속도로의 완성과 비유될 것 같다.
1977년부터 국악대사전을 집필하는 한편 국악문화자료집성의 발간을 준비하게된 것은 오랜 세월을 두고 꾸준히 자료를 모아온 덕이다.
이 두 책은 현재 출판사에 넘어가 교정 중에 있다.
국악대사전은 출전을 밝혀 정확하고 책임있는 집필을 꾀하였고, 국악문헌자료집성은 후학들에게 또다시 필자와 같은 고생스러운 길을 조금이라도 단축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요새 젊은 학도들 중에는 자료 베끼는 일을 기피하고, 마치 그러한 일은 시간 낭비의 귀찮은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베끼다가 깨닫고, 발견하게 되어 쓴 논문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한 체험에서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고된 작업을 직접 행하는 일은 스스로를 계발시키는 길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