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문화의 참모습 10.

조선조 지배층의 정쟁

- 붕당의 근인과 원인




전완길 / 태평양박물관 관장

1.

조선 선비들의 공과를 논할 때 가장 커다란 과실이 당쟁이라 지적되어 왔다. 조선 선비들의 당쟁이야말로 조선을 패망케 한 결정적 요인이었으며 그들의 이러한 작용은 단결력이 약하며 내부분열만 일삼는 한국 민족성의 발로라고 지탄받았다.

조선조 선비들의 당쟁은 그토록 지탄받을 만한 과실이었으며 습관성 분열증상인가.

2.

우리보다 먼저 일인들이 한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데, 당쟁론도 그러하다. 정리의 선, 후가 문제일까만 동기의 순수성 여부는 검토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에 오래 머물러 우리 문화를 잘아는 독일인 에카르트의 말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즉 그는 한국인 민족성의 결함은 일제가 정책적으로 조장시켜 온 것이라고 말하고 탄압 혹은 회유의 양면적인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한국인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민족적인 유대를 단절 내지 분열시켰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 일인 학자들의 단쟁론이 어떻기에 문제인가.

德富蘇蜂은 조선을「당쟁의 나라」(조선역)라 단정했고, 삼품창영은「조선사관설」에서, 조선은 자고로 독립국이 아니고 사대주의 나라라 하면서 조선역사는 피비린내나는 피침략의 전쟁 기간과 조선인끼리 간계와 음모로써 서로 죽이는 당파의 사움의 시대로 점철되며, 민족성이 나빠서 그러한 당쟁을 되풀이하였고 단결심이 없어서 독립할 자격이 없다하였다. 靑柳朋黨도「조선 사천년사」에서 선비들이 붕당지어 정권탈취에만 골몰하였지 이상과 신념이 없어 끝내 국가를 망멸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하였다. 또 조선인은 일본인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논자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위계음모로써 정적을 중상하고, 한번 잡은 정권은 반드시 이를 잃지 않으려고 소름이 솟는 참혹한 학살을 자행하며, 상대방에 대해서는 그 여류에 이루기까지 일률로 주서해 버리고 첩노복이라 하더라도 용서치 않는다.」(세정계편 조선총서)

일인들은 이러한 주장의 결론으로, 당쟁으로 점철된 역사를 가졌고, 피비린내나는 당쟁사의 전개가 민족성에서 유래하며 분열 항쟁은 전래하는 특징적인 습속이라 하였다. 특히 청유남명은「이조의 운은 거하였으나 일한이 병합하여 조선인은 익익발전」한다 하였다.

이들의 왜곡된 사관이야말로 에카르트의 말마따나 민족적인 유대를 단절 내지 분열시키는 책동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이러한 당쟁론을 부정할만한 학문적 연구가 뒷받침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개정된 경향이 짙다.

「조선사는 일면으로 보면 거의 내분의 연속이다. 그 가장 현저한 것만을 들지라도 60년에 뻗은 신라왕위의 쟁과 1백년에 뻗은 고려 무신의 난과 3백년에 뻗은 붕당 화와 같은 것은 각 시대 내분의 중심 골자를 지은 자로서, 이를 빌미삼아 일어난 대소파란은 직접 간접으로 삼왕조의 붕괴를 촉진한 것이다. 우리는 이들의 내분을 통하여 거기 반영된 각 시대의 특수상과 아울러 그것이 적국외우을 잊어버린 승평의 세에 있어 외쟁이 내분으로 전수하게 된 공통적 이유를 발견하려니와 … 이조의 사부가 근엄상려하여 국사에 익취하던 것이 동서당쟁이 생긴 뒤로는 그네의 심목중에 오직 당재 이외에는 국가도 사회도 없었으니 이조가 또한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문일평, 사안으로 본 조선>

「군자소인의 구별을 엄격히 하는 것은 주관적으로 자성을 하는 데는 매우 필요하고 좋은 사상이나, 이것을 객관적으로 사회에 처하는 데는 대단히 유해한 일이다. 그러므로 유학사상이 행하여지는 나라와 시대에는 사류들 사이에 서로 청류라 탁류라 구분하여 배제를 일삼는 기풍이 생기게 되어 반드시 필연적으로 붕당의 싸움이 있었나니, 저 동한 당송명의 나라와 시대가 그것이다. 조선도 그 열에 빠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본즉 이조의 혹독한 당쟁의 책임을 유학사상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현상윤, 조선유학사>

한국인의 약점으로 가장 자주 지적되는 분쟁성향도 바로 이 종적생리 때문이다. (부사장, 부회장, 부국장 등 부의 약체성이 한국처럼 심한 나라가 없음은 이 상향구조가 강인하다는 반증이기도 한다)

어느 단체나 정당의 리더가 죽거나 약체이거나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못하여 신망이 없으면 이 종적 유대력이 약화되고 섹티즘에 빠진다. 곧 다른 서열체제의 소분화를 시도한다. 사색당쟁의 천문학적인 분열과정을 엄밀히 따져보면 …」(이규태, 한국인의 의식구조)

이밖에도 당쟁이 조선 패망의 원인이며, 분열의 증거라는 표현을 말과 글에서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한편, 당쟁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인의 약점이 단결력의 박약이라고 이광수와 최남선도 지적하였다.

「진실로 갑오(갑오개혁)이래로 3인 이상의 단결된 동지가 3개년 이상을 그냥 그 단결을 유지한 것을 듣지 못합니다. 그 원인이 어디있나 허위 나태 무신 사회의 결핍에 있습니다. 피차에 허위되니 피차에 믿지 못하니 단결이 안됩니다. 단체생활의 제일요건은 진실로 서로 믿는 것인데 거짓말쟁이 속임군들끼리 모이면 무슨 단결이 되겠습니까. 둘째, 단체랄 일하고자 만든 것인데 밤낮 공론과 공상으로만 일을 삼으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셋째, 신의가 없어 피차에 작정된 것을 지킬 줄을 모르고 단체에 대하여 의리를 안 돌아보고 서로 미쁨이 없으면 무슨 단결이 되겠습니까. 조선은 조선의 교우사 단체사를 귀류한 악덕이외다」(민족개혁론)

「역사를 통하여 조선인의 민족성을 살필진대 그 장처라 할 것은 낙천적이요, 결백성이요, 내로내빕하고 견인특구하고 무용선투함 등이요. 그 단처라 할 것은 형식을 과중함이요. 조직력, 단합심, 수속성이 약함이요. 용렬하지 못함. 바락스럭지 못함이요. 퇴영, 고식함 등을 들 수 있읍니다.」(조선상식 문답)

「조선인은 장구한 역사과정에 있어서 인으로 또 국민으로의 여러 가지 결점을 현로하였다. 우선 사회로 의집성과 민족으로 결속력이 부족하여 내로 실력을 향상함에와 외로 적충을 탄핵함에 단합적 압력을 발휘하는 능율이 심히 박약하고 일변 공적인 양심 즉 용기가 매우 결핍함은 아무 것보다 큰 국민적 저능의 표증이다. 조선의 역사는 7분이 내분의 기록이요 그중에는 여, 선의 말조와 같이 내쟁의 여파가 외란의 기인을 짓는 추악한 책장도 2, 3분을 점하는데 이는 물론 그 비국민적 본정의 폭로로 볼 것이다.」<역사를 통하여서 보는 조선인>

이광수와 최남선의 한국인 성격론을 확실한 전거이 논급이 아니라 계몽적인 다분한 일종의 웅변이다. 그렇지만 같은 맥락이다.

이상 내외국인의 견해를 간추리면 조선조 전통사회의 주역인 선비들이 사화와 당쟁을 일으켰고 그결과 조선이 패망하였으며, 분열을 일으키고 단합하지 못하는 민족성을 낳았다.

이러한 견해는 타당한 것인가 아니면, 얼마나 모순된 논리인가?

3.

개인의 장단점 가려내듯 민족성을 시비의 대상으로 삼아도 좋은가? 일찍이 이유섭이 이를 부정하였는데 조지훈도 동감을 표시하였다. 즉, 민족성은 그 형성의 요소를 해명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들을 시비하는 것 곧 가치론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민족성은 그 주체인 민족과 마찬가지로 가치형성의 주체이긴 하지만 가치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들로 말미암아 형성된 문화, 즉 그문화가 낳은 문물이요, 그 민족이나 그 민족성 자체는 아니다. 민족과 민족성은 그 문화형성의 주체자로서의 책임은 질지언정 가치평가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민족성은 그가 형성한 문화나 문물에 대하여 비난과 칭찬을 받을 수는 있지만 숙명적으로 비난과 칭호를 받을 민족과 민족성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한국문화사서설)

그렇지만 작금의 우리네 현실을 보면 자주 민족성의 장단점을 논하고 있으며 가장 두드러진 단점의 하나로, 분열을 든다. 그런데 고유섭이나 조지훈의 논리를 접어두더라도, 사색당쟁이 특수 계층 즉 조선 지배층의 특수한 상화에서 일어난 것이지 민중 전체의 습성이 아니므로 사화, 당쟁을 분열의 전거로 내세우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견해이다. 더욱이 조선지배층의 당쟁 기간을 보면 180년에 지나지 않으며 사색으로 나뉜 것은 불과 71년간이다. 이를 마치 조선조 5백년간 줄곧 당쟁으로 지샌 것처럼 말하는 것도 잘못이려니와, 지배층이 일정기간 분쟁한 것을 5천년간 모든 민중이 분열했던 듯 과장하는 것 역시 크게 잘못된 일이다.

분열의 예를 조선 선비들의 당쟁에 한하지 않고 문일평의 주장대로 신라 60년 고려 1백년을 합하더라도 350년 남짓하여 5천년 역사에 비추면 아주 짧고, 더욱이 치자들의 정쟁이었지 민중 전체의 혼란이 아니였다.

즉 민족성과 당쟁을 연관지으는 것은 언더도단이며 또한 민족성을 논할 때 선비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돌리는 것도 어부성설이다. 복합요인인 민족성에 선비정신이 일익을 지탱하고 있다면 모르지만-.

4.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보자.

조선의 사색과 같은 정쟁이야 어느나라, 어느 시대에겐 존재한느 정치현상이었다.

이건창이 <당의통략>에서 중국 역대 왕조의 명당과 정쟁을 수없이 나열하였지만 장황하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그리피스와 윤태림의 소론만 인용하기로 한다.

그리피스는<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조선왕조의 당쟁과 같은 예를「영국의 정치보다는 프랑스의 정치에서 더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하였고,「스코틀랜드나 이탈리아처럼 끝없는 소요로 …」또「조선의 가까운 이웃인 명치유신 이전의 일본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남용과 관료적 정실을 겪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왜 우리만 당쟁을 경험한 양 말하는 것일까. 자조, 자비의 한을 윤태림이 들추어냈다.

「파벌과 당파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도 있는 것이다. 토쿠가와시대의 일본, 북송시대의 중국, 30년 전쟁시대의 유럽은 그 극단의 예이다. 같은 사실, 우리보다 더한 사실이 남의 나라 역사에도 있지만, 그것을 모른 SCP하고 한국의 것만을 우리 자신의 욕하고 있다. 독일의 30년 전쟁은 구교와 신교가 서로 갈라져 각기 외국의 힘에 등대고 30년에 걸쳐 외국 군대의 발굽아래 국토를 짓밟히고 말았으니, 독일 역사상 큰 비극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증거로 하여, 독일 민족은 당파성을 타고난 사대주의적 민족이라고 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또 일본에는 죠오슈우 벌이니 사쓰마 벌이니 하는 것이 그 뿌리를 뽑지 못하고 영향을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 학벌, 재벌, 재간은 그들이 아직도 씻지 못하는 병폐의 하나이다. 그러나, 일본인을 가리켜 파벌심, 사대주의 사사이 농후한 민족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한국인>

다시 말하면 조선조 선비들의 당쟁이 지나치게 과장, 곡해되고 있는데, 덮어두어도 무난한 정재인 것이고, 굳이 해석하자면 정당의 기원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5.

분쟁은 왜, 어떻게 발생했는가.

이건창 자신이 당인(소론)이긴 하지만 비교적 사과를 객관화한 <당의통략>에 다음과 같이 발생계기가 논쟁되어 있다.

선조 초년에 영상 이준경이 죽을 때 유합을 올려「요즘 사람이 모두 큰 소리로 붕당을 맺고 있사오니 이것이 나중에는 반드시 나라의 큰 고질이 될 것입니다」하였다. 이것은 당시 이이가 도학과 재주로 재야선비의 영유노릇을 해서 임금이 높이 여기고 아꼈는데, 이준경이 뜻은 이이의 무리를 지목할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이이는 글을 올려,「조정이 맑고 밝은데 무슨 붕당이 있겠습니까? 대개 사람이 죽을 때에는 말이 착하다는데 이제 이준경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악하군요」하였다.

이때 강문관, 사헌부, 사련원 등 삼사에서 이준경의 벼슬을 추거하자고 말했으나, 유성용만은 홀로 이 말에 참여하지 않고 「대군이 죽을 때 올린 말에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물리치는 것은 모르지만 죄를 주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은가? 」하였다.

또 좌상 홍유 등도 삼사의 말을 반대해서「이준경이 생전에 공덕이 있었으니 죄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하여 잠잠해졌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몇 년 후 이준경의 말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명종이 윤원형을 볽아내고 이결을 등용했는데 이량의 맏누이는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어머니였다.

그때 왕후의 동생 유의훈은 아직 나이가 어려 이량은 양난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러나 심의겸이 장성하여 벼슬에 오르자 이량의 빈란을 미워한 나머지 임금에게 은밀히 죄를 아뢰어 귀양보내고 선비들과 널리 교제하여 어질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때 전랑 (이조 정랑) 오건이 김효원을 천거해서 자기의 벼슬자리를 대신하게 하려 하였으나 심의겸이 이를 방해했다. 김효원은 청렴 결백하고 곤궁을 달갑게 여기는 선비로서 후배들이 모두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젊었을 적에 윤원형에게서 처가살이하는 이율민과 매우 의좋게 지내소, 어떤 때는 덮고 잘 이부자리까지 가지고 가기도 하였다.

어느 날 심의겸이 공사로 윤원형의 집에 갔다가 이런 광경을 보았는데, 오건이 그를 천거합자 심의겸은「효원이란 별 사람이 아니고 원형집 내객인데 그 사람을 천거하다니-」하고 배척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김계휘가 손을 내두르면서 「그런 말은 아예 입밖에 내지 마시오. 그거야 소년시절의 일 아니오?」하였다.

그후 마침내 김효원이 이조 정랑이 되어, 명사들과 두루 사귀어 자기를 돕게 하니 명성이 차츰 높아졌다. 이때 심의겸의 아우 충겸이 정랑이 될만하다고 천거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김효원이「이조의 벼슬이 어찌 외척집 물건이냐?」하여 막고, 또 심의겸을 공격하여「이 사람은 우악해서 쓸모가 없다」고 쳤다. 그때 인순왕후는 벌써 멸한 뒤라, 심의겸은 궁중으로부터의 후원도 잃고 또한 선비들이 심의겸이 잘난 것이 없다고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디자 심의겸을 두둔하던 사람들마저 미워하게 되니, 김효원이 전날의 앙갚음을 한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한편 박순이 좌상으로 있었는데 대련 허엽이 사소한 일을 가지고 자신을 자고하자 하므로 박순은 이 말을 듣고 자퇴하였다. 이로부터 당론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김효원의 의견에 동조하던 사람은 김우현, 유성용, 허엽, 이산해, 이규, 정유길, 정지행들로서 이들은 동인이라고 불렀으니, 김효원이 서울 동쪽인 건천동에 산 까닭이었다.

또 심의겸에게 동조하던 사람은 박순, 김계휘, 정철, 윤두수, 구사맹, 홍성민, 신응시 들로서 이들을 서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심자겸이 서울 서쪽 정릉방에 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형성된 당파가 곧 분당, 합당 즉 난합집산을 거듭하였는데 그 경위를 추적해 보기로 하자.

동서분당이 생긴 초기에는 대체로 동인이 득세하여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이황, 조식의 내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익와 성휘의 계통이 많아서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서인 정철의 건제의사건을 전후하여 동인 중에는 서인에 대한 강경파와 온화파로 갈리어 남인과 북인의 대립이 생겼다. 이 남북인의 분열도 학파로 보면 이황의 문인과 조식의 문인간의 대립이었다. 임진왜란후 세력이 강해진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졌으며, 광해군대에는 그를 추대한 대북이 정권을 전담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야에 있던 서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폐하고 인조를 옹립하였다. 인조반정이후 오랬동안 서인이 정권을 담당하게 되는데 분열이 복잡해지더니 효종 때문에 송시열이 등용되면서 서인의 각 분파가 통일되었다. 그동안 남인은 오래 야에 있으면서, 집권할 기회를 노리던 차, 효종의 상을 당하여 모후 조대비의 복상문제를 트집 잡았다. 즉 서인 송시열의 기년설(일주년)에 대하여 남인 윤휴 등은 3년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서인의 설이 채택되어 정권의 변동이 없었지만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의 상에, 역시 조대비의 복에 관하여 서인은 대공설,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였는데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천하가 되었다. 이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해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온건파로 갈리어 청남, 탁남이라고 불리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전횡함이 심하여 집권한 지 몇 년만에 쫓겨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다. 송시열의 위시한 서인이 재등용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서인사이에 또 분열이 생겨 송시열의 중심한 노론과 윤중을 중심한 소론으로 갈렸다. 그러던 중 1689년 장희빈에게서 난 왕자 균 세자책봉문제를 둘러싸고 이에 반대하는 서인이 물러나고 송시열이 패사당하였다. 다시 남인이 등용되었다. 그러나 1694년에는 이릉 뉘우친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었다. 이후 줄곧 서인의 세상이었으나 노, 소간의 싸움이 치열하였다. 경종초에는 세자(영조) 책봉문제로 신임사화가 일어나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이 집권하여왔으나,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의 참변을 몸소 목격한 그는 노, 소 양파의 조정에 힘을 기울여 탕평책을 견지하였으며, 정조 또한 전왕의 시책을 계승하여 탕평에 주력하였으므로 당쟁이 크게 완화되면서 권세는 대체로 노론에서 쥐고 있었다. 그후 순조. 헌종, 철종의 3대에는 외척이 권세를 잡았으나 이전과 같은 참극은 없었고 고종의 등극후에는 대원군의 파당타파와 문호개방, 인재등요 시책등으로 인하여 파당관념이 점차 쇠퇴하여갔다.<국사대사전>

이상이 당쟁의 전모다.

6.

당쟁의 발생이나 경과를 보면 원인은 개인감정, 상복, 세자책봉 등 하찮은 문제들일 뿐이다. 과연 당쟁의 원인은 이러한 문제들 뿐이며, 싸움을 위한 싸움의 반복인가.

김용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쟁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말하는 이가 많다. 전랑(이조정랑. 인사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음)의 권한이 너무 커서 이 요직을 에워싼 싸움이 당쟁의 불씨가 된다고 하는가 하면, 주자학의 특성인 청벽주의. 엄숙주의에 따라 명분의리를 내세워 남의 부정을 가려내는데 준엄하여, 융합의 기가 없는 까닭이라는 주장도 있고 삼사의 언론의 자유가 남용.악용되어 당쟁의 전위로서 당벌의 도구로 화하여 당쟁을 격하시켰다고도 하나, 이 모든 것은 당쟁을 조장한 부수적 요인이지 근본원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어서 밝힌 그의 견해는,.

선비란 주자학도를 가리킨다. 주자학은 당시에 있어서 하나의 혁신사상이었다. 그들은 유교적인 이상에 불타, 현상에 대한 혁신을 뜻하고 부패한 기성세력인 중앙귀족에 대하여 공격을 시작하였으며, 보수귀족들은 왕을 이용 조정하여 각가지 구실로 신진사류들을 탄압하자, 이에 선비들은 주자학적 이상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었던 것이다. 각 사화의 개개의 원인, 구체적인 사정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그것은 신구 세력의 대립이요, 보수 대 진보의 투쟁이었으나 사류들이 내건 이념과 주장은 뚜렷하였다. 오랜 야당생활 끝에 정권은 선비들에게 돌아왔다. 문벌귀족의 과도한 권세에 불안을 느낀 왕은 왕권 신장을 위하여 주자학파와 손잡게 되었다. 그러나 왕년의 선비들이 모두 득지한 것은 아니고 그중 일부만이 요로에 올랐으니, 주자학파 내부에 벼슬을 에워싼 대립반목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제 정쟁은 이념으로부터 순전한 감투싸움으로 변질되었다. <한국사의 탐구>

한편 이건창은 여덟가지 근인과 원인을 지적하였다.

⸁ 도학을 너무 존중하였다. ⸂ 명의를 너무 엄하게 여겼다. ⸃ 문사가 지나치게 번거로왔다. ⸄ 형옥이 지나치게 조밀하다. ⸅ 대각이 너무 준엄하였다. ⸆ 관식이 너무 맑았다. ⸇ 벌열이 너무 성했다. ⸈ 승평의 세월이 너무 오래였다. 본래 승평의 세월이 오래 흐르고 보면 이것은 국가의 복인 동시에 화근이기도 하다. 맹자는 국가가 한가하고 국방에 태만하면 망하는 길이라 하였다. 승평의 세월이 오래되자 사대부의 정신과 심술들이 쓸데가 없이 되자 붕당의 의논이 시작되어 …<당의통략>

이들 각 소론이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개인감정, 상복, 세자책봉 등의 문제는 표면적인 이유이자 구실일 뿐이라는 결론을 추출하게 한다.

그러면 확실한 내면적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지만, 선비사상의 특정(본지에서 여러차례 필자가 논하엿음)에서 도출해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비타협적인 자기완성으 자세, 소단위의 협동과 단체의식, 신의 중시와 결벽성, 불의를 외면하지 못하는 정의감등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쟁이 민족성의 발로가 아니며, 분열을 일삼는 심성의 표출이 아니라는 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외부자극 없이 형성된 선비사상의 특질이 내부로부터 신진들에 의하여 도전받자 과도기적 혼란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싶은데, 이익이 지적하였듯이 인제등용 방법을 개혁하지 못한 제도적 결함이 가세하지 않았나 믿어진다.

7.

이런 가설에 이익의 「붕당론」이 깊은 의미를 준다.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그 싸움은 이해에서 생기니 이해가 절실하수록 심각해진다. 가령 열 사람이 모두 굶고 잇는데 한 상의 밥을 함께 먹게 되었다고 하자. 먹기 전에 반드시 싸움이 일어날 것이며, 왜 싸우느냐고 하면 손을 쳤다거니, 말이나 태도가 건방졌다거니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르는 사람은 말이나 동작에서 비롯하였다고 생각하나 문제는 밥에 있다. 만일 여러 사람에게 각기 상을 차려 주면 의좋게 먹을 것이다. 요는 배고픈 사람이 많으나 밥은 한그릇 밖에 없어 문제가 되며, 여기에서 싸움이 갖가지 구실과 더불어 그치지 않는다.

붕당도 이와 무엇이 다르랴?

붕당의 시초를 따지면 한 사람의 잘잘못과 한 사건의 경중에 불과하였다. 마음에 그르게 여기고 입으로 나무라도 그저 적은 털끝만한 일이었다. 그것이 차츰 안으로는 핏발이 서로핍박하고, 밖으로는 소리를 질러 성낸다. 어째서 붕당이 생기는가? 그것은 과거를 너무 자주 보아 많은 사람을 급제시켰기 때문이요. 인사원칙이 없이 정실로 진퇴를 결정지었기 때문이다. 과거외에도 조상덕에 관직에 임명되는 예보 등이 있어, 벼슬 희망자는 무한히 많은데 벼슬자리가 적어 문제였다. 이러니 궁여지책으로 사람을 빈번하게 바꾸어 번갈아 벼슬을 하게 하였고 그결과 좌천된 사람이나 파직된 사람이 불만과 원한을 품게 된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열 사람이 벼슬자리 하나를 같이 하여도 모자랄 판이어서 벌열이 성한 집과 문장이 훌륭한 집에서도 매미 배처럼, 거북이 창자처럼 굶주리면서 홍만남 어루만지며 탄식하는 자가 부지기수이니 자연 붕당이 갈리게 된다. 무릇 이권 하나에 사람이 둘이면 당이 둘이되고, 이권 하나에 사람이 넷이면 당은 넷이 된다 사람이 많을수록 더욱 갈리게 되니, 설사 한당에만 정권을 맡긴다 해도 그것이 쇠나 돌이 아닌 이상 다시 어떤 계기에 3분5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세를 올리게 되면 과거를 통해 정실로써 많은 사람을 뽑을 것이니, 이것이 당파의 심는 다는 것이며 현우을 가리지 않고 요직에 들어 세력을 확대한다. 그鱁遁데 정해진 관직은 정승 셋 판서 여섯이요. 기타 청화스러운 벼슬도 한정되어 있으니 얼마 안가서 벼슬자리가 모자라게 될 것이며 당내에 새로운 내분이 생긴다. 일단 붕당이 갈리면 당인의 눈에는 자파의 이익만이 있고 민생은 생각할 여유가 없으며 당파를 위하여 격렬하게 싸우다 죽는 자를 명절로 치고, 공정한 입장을 취하려는 자는 못났다고 하니 분쟁이 더욱 치열해가는 것이다.

이렇게 진단한 이익은 대책까지 제시하는데, 「과거의 회수를 줄이고 벼슬길을 엄격히 제한하고 분명한 노과로 무능한 자를 도태시키고 승진을 신중히 하며 적재적소 배치하되 장기간 유입시키고 이가 나오는 구명을 막아서 민심이 안정되도록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죽인다 하더라도 금지되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곽우록, 붕당론>

이익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모르는 사람은 당쟁이 개인감정이 상복등 하찮은 일로 민족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나 근인은 인사제도의 문란, 원인은 선비사상의 특질에 있었던 것이다.

8.

그런데 당쟁이 조선 패망의 원인이 아니라 조선 왕조를 지속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김용덕의 "당쟁효용론"<한국사의 탐구소장>이 바로 그것이다.

당파싸움 때문에 이조가 망하였다고 한다. 천부당한 말이다. 오히려 당쟁 때문에 이씨왕조가 오래 지속되었다고 할 것이다. 당쟁은 물론 우리 정치사의 오점이요. 허다한 비극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당쟁에도 적극적, 유효적 의의가 잇었다.

「당쟁이란 감투싸움이요. 정권 다툼이다」그런데 백중하는 두 세력이 싸울 때 각기 상대방에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고 조심하였으므로 부정, 부패가 크게 견제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쟁시대에는 정게라는 무대에 선 정치인들은 당쟁의 귀추에 따라 처참한 고배를 마시었지만, 덕택으로 백성들은 비교적 편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쟁의 형세는 당쟁의 영웅 송시열의 출현으로 숙종대를 절정으로 노론의 우세로 낙착되었다. 사색당파라고 하지만 노론의 당중세대는 영조대에 이르러 결정적 형세였다.

왕권에 의한 노론에 대한 저항 즉 각파의 연립정권이란 탕평책도 무력하였다. 노론에 이미 왕권이란 귀찮은 존재였다. 왕권을 위한 기수 정조는 노론에 의하여 독살된 듯하며 나이어린 순조는 무력하였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확고한 기반을 잡았다. 세도정치란 노론 일당에 의한 독재정치를 말한다.

세도를 확정한 노론 일당은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자피일색으로 요직을 독점하여 부패, 부정이 급속도로 만연하였다. 이른바 세도정치 아래 극도에 달한 삼정의 문란이 그것이다. 이제는 규탄을 받을 염려도 없으니 매관매직이 성행하였고 따라서 지방관은 짧은 임기내에 평새 먹고 살 것을 마련하려고 드는 도둑으로 화하였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필사적 반항을 기도하엿다.

그것이 세도정치 아래 연속부절하였다. 민란이다. 당쟁의 황금시대에는 민란이란 없었다. 그리고 보면 당쟁의 효용으로 백성들은 비교적 나은 생활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시대 , 어느 국가에서나 존재하는 현상인 지배층의 정쟁이 유달리 우리나라에서만 과장되고 민족성에 가지 비화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물론 조선조의 지배층이었던 선비들의 과오를 전면 부정하기 어려우나, 근인과 원인을 분석하지 못한 까닭에 우리는 기려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가리고 못하고 중증 비하병에 전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