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원문화 3.

전통주택의 특색과 공간구성




윤국병 / 정원학회 상임이사

중세이전의 주택의 꾸밈새의 대해서는 그 유구가 남아 잇는 것이 없으므로 오직 문헌과 기타의 간접적인 자료를 가지고 고찰할 밖에 별 도리가 없으나 이씨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많은 고가들이 남아 있어서 그 꾸밈새와 특색과 공간구성을 직접 살펴볼 수가 있다.

주택에는 그 시대의 모든 것이 융화되어 있다.

이것은 그 시대의 모든 인문적 및 자연적 환경이 주택의 꾸밈새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기 대문인 것이다. 조선시대의 수많은 고가들에 나타난 환경적 요인을 살펴보면 자연적 환경보다는 인문적 환경요인의 영향이 월등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요인은 정치, 사회제도와 유교 그리고 풍수지리설의 세가지로 나누어 놓을 수가 있다.

1. 정치 사회제도

이씨조선시대의 상류주택 규모는 일찍부터 법전에 의해 신분에 따르는 규제를 받아왔다. 1469년에 제정된 경국대전과 1865년에 공포되었던 대전회통에는 다 같이 주택간수를 아래의 추리로 제한하고 있다.

大君 60間, 君.公主 50間, 翁主.宗親.2品以上 40間, 3品 以下 30間, 庶民 10間

그 이외에도 양장과 행장 그리고 주고를 신분에 따라 차이를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간객척수 제한은 초기에는 법대로 준수되었으나 종친들의 세도가 심해지면서 문란해지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후세에 접어들면서는 양반계층의 경제적 몰락과 더불어 서민들이 양반층의 주택을 본뜨는 경향이 생겨난다.

이러한 간각척수 규제의 문란은 결과적으로 궁궐건축을 제외한 일반 민가에서는 99간까지 허용된다는 민간전승을 낳게 한다. 99간 허영설은 실록이나 대전에 기록된 것은 없으며 순전히 구전에 의해서 만이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척수제한은 암암리에 한국 주택의 규모를 왜소하게 하는 작용을 했으며 또한 대부분의 주택이 획일적인 꾸밈새를 가지는 주 용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주택에는 대청마루가 꾸며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후관계를 감안할 때 대청마루는 그리 큰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서민주택에서는 퇴마루 형식 또는 다용도로 한 간 정도를 꾸미며 남쪼 지방으로 가면서 다소 넓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상류주택에서는 대청마루 중심이 보편화되어 있다. 이것은 양반계급들이 권력기관에 참여하면서 얻은 궁중생활의 경험이 건축양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서 궁궐의 침전건축이 정사에도 쓸 수 있도록 대청 중심으로 꾸며진 평면구성이 사가에까지 연장된 것으로 해석된다.

뿐만 아니라 상류계급이 그 지역사회에서 행한 역할, 즉 사호적적 중심세력의 본거지로서 또는 사교에에 필요한 처소로서 그 주택이 쓰였기 때문에 대청마루 중심의 평면형이 채택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유교의 영향

이씨조선시대가 되면서 조정에서는 고려 시대의 숭불정책에 의해 드러났던 제반 폐단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숭유배불정책을 펴 나간다.

그 결과 사람의 모든 행동은 유교 교리의 규제를 받게 되었으며 생활풍습은 그 모두가 유교정신을 기반으로 삼았다. 따라서 주택의 꾸밈새 또한 유교정신에 입각한 생활풍습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학을 생활의 유일한 신조로 삼았던 선비들의 고고한 생활태도는 때로는 세속적 영화를 헌신작처럼 생각하여 소박검소하게 물욕을 초월한 환경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권력과 지도층으로서의 위세를 체면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이와는 정반대로 호화스러운 주택을 관위하였다.

또한 유교는 가부장적인 가족제도, 조상숭배, 관혼상제의 예교와 의식중점생활, 철저한 계급이식저 사고방식 등을 낳게 했으며 이러한 것이 주거생활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이씨조선시대의 사회기본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가족이 었고 도한 대가족제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대가족제도는 여러 세대가 같은 주택에 사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자연적으로 주택에 꾸밈새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큰 사랑, 작은 사랑의 칭호나 대방마님, 별당아씨 등의 용어는 그 모두가 대가족제도에 의한 주택 공간의 복잡성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삼강오륜에서 말하는 장유유서는 가족 가운데서 장남을 부권승계자로 중요한 위치에 있게 한 그로 인해서 한 주택 내에 있어서 장남을 위한 공간을 중히 여겨 장남이 관위에 오르게 되면 원래있던 사랑 옆에 또 하나의 사랑을 꾸며 이것을 작은 사랑이라 불렀던 것이다.

유교가 미친 영향의 또 하나는 주택 건축에 곁들여진 가조의 제도이다. 가묘는 고려말 정몽주가 향교를 신설하여 주자가례에 따라 사서의 구별 없이 가묘를 세우게 한데서 비롯되며 가인 등 주택의 규모가 협소할 때에는 제실로서도 가한 것으로 하였다.

점차적으로 가묘제가 일반화함에 따라 중인계급이상에선는 주택내에 별동으로 사당을 지어 조상의 신위를 모시게 되엇으며 이로 인하여 이씨조선시대의 주택에는 사당이라는 제사공간이 생겨나 주택공간 구성에 한가지 특색을 더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유교는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전통주택의 꾸밈새에 갖가지 영향을 미쳤으나 그런 중에서도 가족생활의 중심이 되는 부부생활은 유교사상의 특수성에 따라 기이한 환경 속에 처해 있었다.

고려말 안서의 남존여비 사상이 들어오면서부터 남녀유별을 내세워 여인들을 규방에 유폐하고 삼종지례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한국사」에는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유교는 종순을 귀녀의 최고의 미덕으로 삼고 정절을 부녀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기어 부부관계는 부자, 군신관계에 필적한 것으로 생각하여 삼종의 교의가 강조되고 여필종부의 우고한 관념에 따라 요는 부를 가장이라고 불렀다. 또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이른바 내외라고 하여 거가하여서도 지친이 아니면 남성과의 면접회화를 피하고 부녀의 사교는 악덕시 되었으며 본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류의 부자연한 유교의 가르침을 전수한 주습이 있었 …」다고 했다.

그리하여 외간남자는 함부로 부녀에게 접근하는 것을 부덕으로 여겼고 여자는 중문 밖 출입을 금했으며 꼭 출입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너울로 얼굴을 가리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풍습은 주택건축에 있어서도 가능한 한 안채와 사랑채를 별동으로 지어 남녀를 격리시켰고 사정이 어려울 때에는 안방과 사랑방을 두었으며 화장실 또한 내측과 외측을 마련해야 하는 것으로 되었었다. 심지어는 태종이 부부 별침을 명한 사례가 있다하여 중, 상류주택에서는 사랑채에 침방을 두어 가장은 이 곳에 기거했으며 서민주택에서는 사랑방에서 취침하는 풍습마저 생겨났다.

강한 계급의식은 종의 신분을 가진 자와 한 울안에 기거함을 허용치 않아 이들 노비의 처소를 중문밖 대문 양가에 길게 꾸며 이것을 행랑채되고 불렀다. 이리하여 대문과 중문 사이에는 하나의 폐쇄된 공간이 생겨났으며 이 공간을 행랑마당 또는 문정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상당한 규모의 상류주택에서는 주노나 자녀의 거처로서 별당을 두는 예가 많다. 이 별당건축은 사랑채의 연장으로 가장의 다목적, 용도에 쓰이는 일이 적지 않다. 말하자면 접객, 독서, 사색, 한유, 관상 등의 목적이 있었으므로 그 터는 항상 이에 맞는 경승지를 택했으며 인공운당와 화수류의 식재 등으로 즐길 만한 환경을 꾸미기도 하였다. 별당건물은 이러한 주택 내에서의 생활기능도 중요하지마는 그 지역사회 속에서는 공동대화의 장소로서 또는 사회적, 문화적 중심으로서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별당건물은 그 당시의 건축기술의 정수를 기울여 지어 놓았던 것으로서 한국건축의 정취와 세부기법의 정교함이 아낌없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3. 풍수지리설의 영향

풍수지리설에는 미신적 요소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으나 근본원리는 자연지세와 환경을 잘 분석 활용함으로써 인간의 복리를 도모하고자 하는데에 있으며 그것이 지향하는 내용은 대략 아래의 세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인간이 거주하여 오래 전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하여 자연환경의 지리적 조건을 살피는 입지계획적인 내용.

둘째는 어떤 곳에 집을 앉힐 것인가 하는 문제를 자연과의 조화로 해결 짓는 택지계획적인 내용.

셋째는 건강한 생활과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집을 어떻게 짓고 주위 환경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를 논하는 주택계획적인 내용.

자연환경의 지리적 조건

李重煥의「擇里志」卜居總論에「大抵 卜居之地 地理爲上 生利次之 次則人心 次則山水 四者缺一 非樂土地」라 했다. 이것은 장차 집을 지어 자손대대로 전하고자 한다면 우선 지리를 살펴야 한다는 것으로서 자연환경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킨 말이다.

한국은 전형적인 산악국으로서 입지를 논하는데 있어서는 우선 산세를 살필 필요가 있다. 산세를 살핌에 있어서는 용이 펼쳐졌는지 또는 오며졌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한다. 龍이라는 것은 땅의 기복을 뜻하는 말로서 주로 산의 흐름을 가리키며 용이 펼쳐진 곳을 주거지로 정하는 것이 옳다고 되어 있다. 그 형세는 조종에 해당되는 산맥의 제일 높은 산이 다락집이 치솟아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 제일이라 했다. 또한 산의 형상은 보는 사람에게 맑고 아름다운 감정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하며 기상이 흘러 온화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고 한다.

다음은 물에 관한 문제이다. 물이 흘러 모여 나가는 어귀를 수구라고 하는데 수구는 지형상 그 지역과 외부지역을 연결하는 통로 구실을 하게 된다.

수구를 논한다는 것은 경작할 수 있고 방어하는데 편리한 천연적 요새지를 취하고자 하는데 있지마는 물의 흐름이란 지형의 변화에 연유되는 것이므로 장풍득수를 고려한 자연환경을 찾기 위한 한 방법이 되기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구가 엉성하고 넓게 열려 있는 곳에는 비롯 좋은 밭이 만이랑이나 되고 집이 백간을 넘어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고 풍수지리설은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은 수구가 꼭 닫힌 듯 하고 그 안에 들판이 펼쳐져 있는 자리를 최상의 주거지로 생각했으며 또한 수구에 둥그런 흙더미로 된 산이 있을때에는 만산을 대적할 수 잇다하여 이것을 나성토라 불렀다.

광대한 들판의 경우에는 수구가 굳게 닫힌 곳을 찾기가 어려우며 이러한 경우에는 반드시 거슬러 흘러드는 역수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큰 냇물이나 큰 강이 역으로 흘러드는 것은 결코 좋지 못하며 작은 역수도 활을 쏘듯이 직선적으로 흘려 드는 것보다 곡류를 이루면서 길고 멀게 흘러 들어야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수로와 산맥이 조화를 이룰수 있는 곳이 좋다는 말로 해석되며 여기에서 우리는 생리와 자연의 조화를 추구한 우리 조상들의 예지의 일면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들판은 넓을수록 주거지로서의 가치가 높은데 주위의 지형 지세로 보아 긴속하게 갖추어지고 수로와 항로가 모두 통할 수 있어야 재물이 그곳에서 나오고 모여질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산중에서는 들이 펼쳐진 곳이라야 하늘빛이 막히지 아니하고 수기도 멀리 통하여 좋으며 높은 산과 험한 골자기를 쏟아 내리는 급류는 비록 경치는 아름다워 별야나 사찰을 짓는 것은 마땅할지 모르지만 오래 살 곳이 못된다고 보고 있다. 요컨대 사람이 살수 있는 곳은 들이 펼쳐진 곳으로 습하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며 햇빛을 오래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택지의 선정조건

공만선이 지은 산림경제에「인지유복축지계자 불하솔미지거 약이치전작포재화종수지후 불존역거 엽이지야측주비공력다여 기불가차야재 부선번택기풍 기지장번 면배지안은 이위영구지도 자록복거지방위제일」라는 글귀가 보인다. 그 내용은 집터를 경솔하게 잡아 밭을 일구고 꽃과 나무를 심고난 다음 살만한 자리가 못되어 그 땅을 버리게 된다면 어찌 아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선 풍기가 모이고 간직됨을 살펴서 앞뒤의 지세가 안은함을 택해야만 오래 살 터가 된다는 것이다. 여하튼 풍수설에서는 택지의 선정조건으로서 토성과 사격그리고 수응의 세가기를 들고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토성 집터는 윤택한 양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건조하고 윤택하지 못한 곳은 나쁘며 옛날에 길이 나 있었던 땅이나 논이였던 땅은 피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땅은 지리적인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택지로 쓸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택지를 선정할 때에는 땅의 높고 낮음을 보아야 하면 평탄한 땅을 양토라 하고 후고전저를 보토라 하여 둘 다 좋은 택지가 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서고동저를 노토라 하여 역시 쓸 만한 땅으로 치나 전고후저인 초토와 사면고중앙저인 수토는 피해야 하는 땅으로 쳤다.

토색은 산골이나 물가를 가릴 것 없이 사토로서 맑고 깨끗한 사백지가 배수도 잘 되어 최상지로 꼽았다. 다음은 누렇고 윤기있는 모래흙을 쳤으며 붉은 찰흙이나 검은 진흙 또는 짙푸른 빛의 진흙은 죽은 흙으로서 그러한 땅에서 나는 우물 물에는 반드시 장기가 있으므로 이러한 곳은 좋은 택지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흙이 직접, 간접으로 사람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택지를 선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砂格 砂라 하는 것은 택지에서 바라보는 주위의 산의 형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옛 사람들은 주의의 산세가 그 택지에서 자라나는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가 수려하고 동그스럼하게 단정하면 과거에 급제하고 동남 또는 서남 쪽에 붓을 꽂은 듯이 보이는 봉우기가 있으면 문귀이고, 갑옷을 입은 군사가 모여있는 듯이 보이면 무귀하며, 봉우리가 비뚤어지고 이즈러져 있으면 도적이 난다고 하였다.

** 水應 물이 없는 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되며 산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그 까닭은 물이 있으므로 해서 생성하는 묘를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큰 물가에 부유한 집과 번창하는 마을이 많으며 택지의 동쪽에 바다로 향해 흐르는 강이 있는 자리를 높히 쳤다. 또한 물이 유유히 흐르면서 바다나 호수처럼 펼쳐져 택지를 감사주는 듯한 형국을 귀객이라 하여 가장 좋은 것으로 꼽았다.

반대로 물이 택지 옆을 급류를 이루어 흐른든가, 바로 쭉 빠져 나가는 것 또는 거슬러 빠져 나가는 것은 좋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물서리도 청명하게 맑아야 사람의 마음을 씻어 주고 처절하고 슬픈 듯한 소리가 들려 오는 곳은 좋지 못한 곳이라하여 택지로 삼을 것을 피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택지의 선정에 있어서는 주위의 경관이 수려하고 단정하여야 하며 흙이 맑고 윤기있는 한편 배수가 잘 되는 후고전저의 땅으로서 앞에 호수와 같은 넓은 수면을 안되 물매가 완만하여 범람할 염려가 없는 땅을 최상으로 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가장 무리가 없으며 자연과의 조화를 구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자세라는 관점에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물소리까지도 고려에 넣었다는 것은 정신적 생활의 추구가 인격의 도야에 있어서 큰 구실을 한다는 것을 감안한 것이라 하겠다.

주택의 꾸밈새에 대한 고려

주택을 짓는데 있어서는 사방이 사상의 형국을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사상이라 하는 것은 하늘의 사신이 지상에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 「현무수두, 주성약무, 청룡사정, 백호존정」이 그것이다.

좌청룡 우백호의 이치에 따라 주택 동변에 유수가 있으면 청용이 갖추어진 것이 되고 서쪽에 대로가 있으면 백호가 되며 앞에 오지가 있으면 주성, 뒤에 구릉이 있으면 현무가 되어 완전히 사상이 갖추어진 형국이 된다. 그러므로 평지에서는 이러한 형국이 갖추어진 주택을 가지는 것을 최고 이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형국을 갖추는 경우 전통주택에는 각기 생김새를 달리한 두가지 정원이 필수적으로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 하나는 남에 해당하는 주성의 오지로서 대문 밖에 꾸며지는 방지가 그것이다. 물이 있고 보면 나무를 심어 운치를 구하가고 함이 사람의 심정이요 경관이 아름다워지고 보면 그것을 즐기기 위한 간소한 아정의 하나라도 있으면 하는 욕망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바깥마당 일명 외정이다. 또 하나는 북인 현무의 언덕이다. 집 뒤에 경사가 있으면 비 내릴 때마다 토사가 유출하는 현상이 생겨나므로 우리 조상들은 이 자리를 계단과 같은 모양으로 다듬어 이 문제를 해결 지었다. 그러고 보면 이 자리는 양지바르고 바람이 잘 닿아 꽃나무나 초화를 심어 가꾸기에 알맞는 자리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리하여 생겨난 것이 다른 나라의 정원에서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후정의 화단인 것이다.

** 造屋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는 동쪽이 차고 서쪽이 허해서는 안되고 동쪽이나 서쪽으로 치우쳐서 지어도 안된다고 했다. 말하자면 택지 중앙에 균형이 잡히도록 지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다분히 유교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건물의 평면구성은 일, 월, 구, 길 등의 생김새를 좋아했고 공, 호 등의 생김새를 나쁜 것으로 쳤다. 이것은 문자의 길흉관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서 일과 월은 하늘에 있는 형상을 지상에 둠으로 좋고, 구는 먹을 복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길은 길선문자의 대표격이라는 점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 강은 부수고 만듬을 뜻하는 문자의 형상이므로 오래 지속될 수 없고 호는 죽음을 뜻하는 문자와 같은 형상이므로 이것을 피했던 것이다.

건물의 간수는 홀수로 하여야 한다는 관념이 철저하였다. 이것은 역의 수리에 의한 음양관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서 홀수는 장이고 짝수는 음이기 때문에 생자는 양수를 취해야 한다는 이치에서 생겨난 것이다.

입면구성에 있어서도 건물이 높으면 양기가 왕성하여 너무 밝고, 낮으면 음기가 왕성해서 어두워좋지 못하다 하였다. 더욱더 혼은 양이고 백은 음이니 지나치게 밝고 어두움이 인간의 혼백을 상하게 하여 질병의 원인이 되므로 집이 필요이상으로 높거나 낮음을 피하고 중용의 방향으로 흘렀다.

또한 집을 짓는데 있어서 호화스럽게 하지 말것이며 검소하게 짓되 초라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면에서 중국의 건축이 화려하고 웅장하며 일본의 것이 단순하고 섬세한데 비하여 한국건축에서는 청초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찾아 볼 수 있다.

청초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건축의 외모는 그것을 둘러 싸는 외부공간, 즉 정원의 꾸밈새에도 영향을 주어 우리 나라의 정원수법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으며 꾸밈이 없는 소박하고 자연 그대로의 생김새를 중히 여기고 있다. 따라서 정원수도 진귀한 희귀종과 같은 것은 쓰이지 않으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와 과실 등이 즐겨 심어졌고 가지다듬기와 같은 손질도 가하지 않은 채 자라나는 데로 방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처하는 방은 소박하고 청결하게 꾸며야 하며 너무 화려하게 하면 물건을 탐욕하는 근원이 된다고 하였다. 또한 거실의 좌향은 남향이 제일이고 동향이 다음이요, 그 다음은 북향이며 서향은 좋지 못한 것으로 쳤다. 이것은 실내구성과 좌향이 인간의 건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데에서 생겨난 말인데 이러한 논리는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대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대문은 반드시 집의 좌향에 맞추어 방위를 정해야 함은 물론이요 양쪽 두 개의 문짝이 크고 작음이 없이 꼭 같아야 하고, 대문이 다른 집의 그것과 마주한다든지 집과 대문이 맞트이는 것을싫어 했다. 뿐만 아니라 부엌 아궁이나 측간이 대문을 마주 해서도 않되었다.

* 조경 집을 지어 길을 내고 우물을 파며 나무를 심는데 있어서도 음양오행의 상생상극에 맞추고 풍수와 방위의 고려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만선의 산림경제와 서유걸의 임원십육지를 보면 이에 대한 것이 많이 적혀있다. 그 가운데 주가 되는 것을 요약해 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우선 길을 내는데 있어서는 집을 향해 곧장 들어오는 것보다 둘러 들어오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겼다. 또한 집을 한 가움데에 두고 물이 흐르는 반대쪽으로 길을 내야 한다고 했다. 집 뒤 언덕에 십자형으로 교차하는 길이 있거나 앞 쪽에 정자형의 길이 있는 것 또는 집주의 사방에 길이 있는 것은 좋지 않는 것을 여겼다.

우물의 위치에 대해서는 당 앞이나 대문 옆 또는 부엌 주위를 피하도록 했고 우물과 부엌을 마주 보게 해서도 안된다고 해 놓았다.

나무를 심는데 있어서도 집 앞에 석류나무를 심는 것이 좋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정심, 즉 안채의 마당 한가운데에 큰 나무를 심는 것을 한곤이라 하여 가장 싫어 했다. 이것은 그 형상이 한자 또는 곤자가 됨을 피하고자 한 것으로 보이나 실질적인 면으로 보아도 건물로 둘러 싸인 좁은 들에 큰 나무를 심을 때에는 햇빛과 바람이 가리워져 주거환경이 극단적으로 불량해져서 건강을 해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또한 대문가에는 버드나무를 심지 말아야 하고 우물가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안되며 중문가에 괴목(회화나무 또는 느티나무)이 있으면 삼세가 부귀해지는 것으로 믿었다. 우물가에 복숭아 나무를 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복숭아나무에는 진딧물이 많이 끼므로 우물물이 더러워지는 것을 염려한 조치로 보이며 중문가의 괴목은 중국의 고사에 근거를 둔 것이라 하겠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파초에 관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방문앞에 파초를 즐겨 심고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위치를 피해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 점이다. 또한 집 주위에 사상의 형국이 갖추어져 있지 않을 때에는 나무를 심어 이것을 대신할 수 있으며 동쪽에서는 복숭아나무와 버들을, 남쪽에는 매화나무와 대추나무를 심을 것이며, 서쪽에는 치자나무와 느릅나무를 심고 북쪽에는 벚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으면 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여기에는 오행설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