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를 약속하는 화해의 마당
-밀양 백중놀이
강진옥 / 이화여대 강사
이 글은 필자가 조사에 참여했던 1981년 7월25일 밀양군 산외면 긴늪숲에서 벌어진 밀양백중놀이를 토대로 하고 현지 노인들과의 면접조사를 통해 얻어진 내용으로 보완하면서 가능한한 옛날에 연행되던 본래적인 놀이방법과 모습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밀양 백중놀이는 백중을 전후해서 시행되는 놀이이다. 음력 7월 보름쯤이면 세벌 논매기도 끝이 나게되므로 힘든 농사일은 거의 마친 셈이다. 이때부터 추수까지를 휴식의 기간으로 볼 수 있는데 힘든 농사일을 잠시 쉬게되는 그날을 기해서 머슴을 위로하는 잔치를 벌인다. 호미씻이 라고 하고, 「洗鋤宴」한자말 표기도 기록에 보이지만, 이 지방에서는 곰뱅이 먹는다고도 한다. 곰뱅이는 그날 제공되는 음식이름이라는 설명도 있으나, 현지 노인들에게 확인해봐도 정확한 말뜻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날 지주에 해당되는 주인집에서는 새옷과 푸짐한 음식을 장만하여 잔치를 벌이는데 그 규모는 큰 농가의 경우 농가 단위로 하고 작은 농가는 자연부락 단위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밀양에서는 고을단위로 하여 한자리에 같이 모여 놀이판을 벌였다고 한다. 이때 마련해준 새옷은 여름살이라고 하며 머슴들이 여름 동안 입는 옷이며, 이때 용돈을 넉넉히 주는 집도 있다.
놀이날의 택일방법은 백중을 전후하여 干支의 地支가 辰(용날)에 해당하는 날로 정하는데, 주인집에서는 이 날을 위한 준비를 당연한 것으로 해주었다고 한다. 놀이의 주요인물이 좌상, 무상, 수총각은 주로 대농가의 큰머슴, 상머슴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사람으로 선정된다. 이 과정에서 동격의 머슴이 나올 경우에는 씨름이나 들돌들기로 겨루거나 또는 두 가지 방법 모두를 통해서 결정한다. 들돌이란 둥글고 커다란 돌로서 쌀 1섬 정도의 무게인데 이것을 안아서 가슴위까지 들어올리는 것이다.
이들 머슴살이 하는 사람들은 한 마을에 정착하여 살지않고 대체로 거주지를 옮겨다녔기 때문에 이런 선정방법을 동원하여 매해 다른 인물을 뽑았다고 한다. 씨름은 정월 대보름날과
백중날, 힘자랑하는 놀이로서 행해졌지만 제관에게 유고가 있을 경우에는 씨름놀이에서 뽑는 경우도 있었다. 좌상은 농신제를 올리는 제관이 될 뿐아리나 그날의 놀이에서 최고의 인물로 받들어지게 되므로 대단히 영예스러운 역할이다.
이 놀이는 크게 보아 3가지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앞놀이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설단과 잡귀막이굿. 농신제를 올리고, 둘째 놀이마당에 해당되는 것으로 작두말놀이.양반춤.병신춤. 범부춤을 추고, 셋째가 신풀이 마당에 해당되는 오북춤. 북춤과 뒷놀음으로서 판굿으로 끝을 맺는다.
이 글은 필자가 조사에 참여했던 1981년 7월 25일 밀양군 산외면 긴늪숲에서 벌어진 밀양백중놀이를 토대로 하지만, 현지 노인들과의 면접조사를 통해서 얻어진 내용으로 보완하면서 가능한 한 옛날에 연행되던 본래적인 놀이방법과 모습을 중심으로 서술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날의 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뒤 발표회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전체놀이를 그 진행차례로 모두 담고는 있지만 제한된 시간내에서의 무대 공연을 의식한 편집과정 및 그에 따른 변모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이 놀이에 등장하는 놀이꾼은 모두 48명이며 이주 기능보유자는 하보경(1906년생. 양반춤. 범부춤. 북춤 보유), 김타업(1913생, 상쇠) 두 분이다.
1. 앞놀이
맨 먼저 설단을 하는데 이것은 놀이판의 모든 잡귀를 물리치고 깨끗한 놀이마당을 마련해서 놀이를 잘 진행할 수 있도록 비는 것이다. 먼저 황토를 땅에 넓게 뿌리는데 이것을 「금토 놓는다」고 하고 그 위에 황토로 단을 쌓고 잔디를 입혀 제단을 만든다.
이것은 부정을 가시는 의미라고 하며 여기에는 상주는 물론이고 가축이 새끼를 낳거나 죽은 일이 있는 집안의 사람도 접근할 수 없다는 엄격한 금기가 있다. 설단이 끝난 후 그 위에 농신대를 세운다.
농신대는 껍질을 벗겨낸 삼대 30개씩을 한묶음으로 하여 그 12개를 함께 묶는데 전체의 수는 3백60개가 된다. 굵기는 짚단 만하고 길이는 보통 사람의 키보다 조금 큰데 새끼로서 가로로 네 번을 묶었으며 용새끼라고 불리는 꼰 새끼가 윗부분에서부터 묶여 길게 땅에 드리웠고 오색 천으로 묶여있다.
여기 30개, 12묶음, 3백60개란 수자는 각각 1달, 12개월, 1년을 뜻하고 4번은 4계절을 뜻한다고 한다. 용새끼의 수는 해마다 달라지는데, 그해의 책력을 보고 정월 초하루로부터 용날이 든 날수를 헤아려서 그에 해당하는 숫자만큼 새끼를 매어 단다.
용은 비를 주관하는 동물로서 용신으로 숭앙되는데 용의 수가 많으면 물이 흔하고 수가 적으면 물이 귀하다 하여 농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므로 농경 지역에서는 이 용신을 매우 위한다. 용의 수는 타지 12개 중 반에 해당하는 6개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상이면 많은 것이고 이하는 적다고 한다. 81년 신유년은 3일째 되는 날에 용날이 들었으므로 3개를 달았다. 용새끼의 교체는 정월보름에 영남루에 있는 단군 진영을 모시는 천진궁에 가서 백중놀이 전 회원이 참가하여 치성을 드린 후 년운을 맞도록 갈아 단다고 한다.
오색천은 5개의 다른 빛깔의 천인데 그 각각의 방향이 농신대를 감고 있는 황색(黃-中央), 네 귀퉁이를 묶어 이은 청색(靑-東), 적색(赤-南), 백색(白-西), 흑색(黑-北)으로서 오방을 뜻하고 있는데, 오방신이 호위해 준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농신대 꼭대기에는 오곡-피, 기장, 수수, 콩, 팥을 열매가 달린 줄기채 꺾은 것을 전부 한꺼번에 꽂았다고 하는데, 이는 오곡이 잘 되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한다. 현재는 오곡 전부를 구하기 어려워서 수숫대만을 꽂아둔다. 이날 놀이판에서의 농신대는 이 설명과 다소 다르다. 크기와 굵기가 처음의 2배 이상이 되면서 가로 묶기도 4번에서 9번으로 되고 용새끼도 꼰새끼 대신 동아줄을 사용했는데 이런 변모는 대회 (민속경연대회)를 의식하여 큰 무대에서 연행될 경우의 시각적 효과를 고려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변모된 농신대를 계속 쓴다면 농신대에 담겨졌던 본래적인 의미들은 퇴색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점은 무대화에 따른 민속예술 변모의 한 문제로서 지적될 수 있다.
이 과정의 시작은 나발을 길게 서너번 불면서 풍물을 울리면 모두 나와서 어울린다. 이때 꽹가리, 징, 북, 사장구 등의 악기가 동원된다. 풍물가락이 바뀌면 농신대를 에워싸고 몇 바퀴 돈다. 다음 둥글게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돌아 감는데 장단도 빠를 가락으로 바뀐다. 이것이 오방신장을 일으켜 잡귀를 막는다는 의미를 지닌 잡귀막이 굿이다.
이 다음 게줄다리기를 한다. 이것은 원래 백중놀이에 포함되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이날 놀이판에서 행해진 것이므로 간단히 소개하겠다. 굵은 새끼로 만들어진 커다란 타이어 모양의 게의 몸통 부분에 여러 개의 새끼들이 달려있고 줄을 다리는 사람은 끝이 둥그렇게 묶여진 새끼 끝을 목에 걸고 양편에서 각각 땅바닥을 기어가는데 이 모습은 게가 다리들을 활짝 편 형상이다. 이 줄다리기는 몸 전체를 동원하여 당기는 방법의 격렬함 때문에 대단한 흥분을 주며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젊은이들이 중심이 된다.
이 다음의 씨름대회는 동부와 서부가 나우어 각각 선수를 내어 겨루는데, 매 씨름판에서 승부가 결정될 때마다 풍물을 울리고 그 장단에 맞춰 모두 흥겹게 춤을 춘다. 힘을 겨루다가 양편의 우열이 가름나지 않을 때는 들돌을 들어 결정한다. 이날 여기에서 좌상과 무상이 정해지자 풍물을 울리고 흥겹게 어울려 덧뵈기 춤을 추다가 원을 그리며 돈다.
곧 나발장부가 나발을 들고 나와서 모심기 노래를 선소리로 매기면 나머지 놀이꾼들은 받으면서 일제히 모심는 동작을 반복한다. 이때 불리는 모심기 노래는 다음과 같다. (선소리는 김상룡(1916년생)씨가 맡음)
(선소리) 한강수에 모를 부어
모쩌내기 낭감하네
(받는소리) 하늘에다 모화를 심어
목화따기 낭감하네
(선소리) 물길일랑 처정청 흩어놓고
주인내 양반 어디로 갔노
(받는소리) 문어야 대전복 손에들고/첩으야 집에 놀러갔나
(선소리) 밀양아 삼랑아 국노높은/가락왕의 유람터요
(받는소리) 칠보야 단장 곱게하고/와의 행차 구경가세
(선소리) 석양은 펄펄 재를 넘고/내 갈길이 천리로다
(받는소리) 앞굴 가자고 구비를 치고/님은 집고 낙누하네 (말로) 잘한다 이후후후~
모심기 노래가 끝난 뒤 다시 장단 맞춰 덧뵈기춤을 춘다. 이어 논매기 노래가 시작되면 모두 땅에 드리듯 앉아서 논매는 동작을 한다. 소리는 다음과 같다. (소리꾼, 신의근씨 (1916생))
어화친구 벗님내요/이내말쌈 들어보소/오뉴월 삼복더부/ 에헤 불겉이도 더운날에/ 밭도 메고 논도메니/ 에헤 땀이난다 땀이 난다/ 구슬겉은 땀이 난다/ 배는 고파 등에 붙고/ 목은 말라 불이 탄다/ 열심히 농사지어/ 에헤 부모봉천하연 후에/ 나라충성 하여보소/ 얼씨구 /에헤 잊지마소 잊지마소/ 신농씨를 잊지마소/ 신농씨가 아니면은/ 에헤 어느 누가 농사법을 내어 줄고/ 부디부디 신농씨를 잊지말고 살아보세/ (말로)얼씨구 잘한다 금년에 풍년이 진다. 잘한다.
이 뒤에 나발이 길게 나오는데, 논매기가 다 되었으므로 참 가져오라는 신호라고 한다. 빠른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중 삿갓 거꾸로 쓴 좌상이 등장한다. 거꾸로 쓴 삿갓은 관을 상징한다고 한다. 좌상. 무상. 수총각 등 제관 3사람과 참가자 전원이 농신대 앞으로 늘어선다. 북을 담마치로 3번 울리면 강신했다고 하여 꿇어앉아 농신대를 향하여 큰절을 두 번 한다. 이때 제상에는 돼지머리, 밀개떡, 북어, 수박, 참외, 탁주를 담은 동이채로 놓여있다. 절을 한 후에 농신제 축원이라고도 하는 고사소리를 한다.
하늘위에 상제님/ 천상천하 용왕님/ 바람기 순조롭고/멸구잡충 없이하여/ 금년농사 잘도 하여/ 대풍작을 이루어서/ 천듸착한 어진 백성/ 걱정일랑 들어주소/ 앞 뜰에 농신님/ 뒷 뜰에 농신님/ 들쥐도 막아주고 / 참새떼도 막아주고/ 회기점도 막아주소 / 모든 병초 막아주소 / 잘 살게 하옵소서(일어나 다시 꿇어 엎드려 절하면서 큰소리로) 아- 용신님께 비나이다(다시 일어나 절하면서)
아-금년농사 잘되게 비나이다.(다시 일어나 절하며)
소출이 많이 되게 비나이다.(다시 일어나 절한뒤 말로) 「머슴들 올 농사에 고생이 많았다. 인자 농신제도 마쳤으미 이 숱한 술과 음식 노놔먹고 즐겁게 잘 놀아라, 고리새 잘하고-」
좌상이 이렇게 말하고는 고시래한후 술을 먼저 바가지 채로 마신 뒤 놀이꾼들과 술과 음식을 나눠 마시면서 술맛이 좋은 것 보니 금년에 대풍년이 지겠다고 한다. 마을사람들도 모두 음복을 한다 수총각은 고사소리 끝난 뒤 엇다 고시레, 총각신세 못면할 바엔 농신이고 놋이고 나는 떡이나 먹을래 한다.
술과 안주를 먹고는 저절로 흥에 겨워 여러 민요를 부르면서 어울려 논다. 이 음복하는 중에 발원을 한다. 동네사람 모두 나름대로 염원하는 뜻을 복주머니에 넣는데, 주머니 속에는 돈이나 곡식을 발원문과 함께 넣어서 농신대에 빌고 매달은 뒤 절을 한다. 소원의 내용은 농사일에 관한 것 뿐아니라 집안의 평안, 자식의 과거, 아들 낳기 등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모든 문제에 관한 소원을 기원하는 것으로, 농업만 주고나하는 신격으로서보다 민간신앙적 성격의 신으로서 마을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놀이마당
음복과 발원이 끝나면 술과 음식을 먹었으니 좌상 작두말 놀이나 한번 하입시다하고 작두말놀이가 시작된다.
소와 작두말이 들어오고 삿갓과 우장을 거꾸로 업은 좌상, 무상이 소와 작두 말에 올라탄다. 옛날에는 둘다 소를 탓다고 하는데 요즘은 작두말로 대신한다고 한다. 이날은 소와 작두말을 함께 등장 시켰다. 작두말은 지게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가운데 짚자리에 좌상. 무상을 태우고 네사람이 메고 다닌다. 일산을 든 수총각이 좌. 무상을 호위하면서 따르고 거꾸로 입은 삿갓과 우장은 도포와 관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원님의 행차를 나타내며 이때 무상은 좌상 뒤에서 나발을 불면서 가는데 이 소리는 좌상이 나가니 길을 비키라는 뜻이라 한다.
옛날에는 이런 행차가 마을 안의 대농가를 찾아다니면서 술을 얻어 마시고는 동구밖까지 가서 놀다 오기도 했다는데 그때에는 풍물잽이들도 풍물을 치면서 함께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놀이마당만을 돌다가 내린다. 좌상과 무상은 농사장원으로서 이날의 최고의 인물이므로 원님행차를 하는 것이라는데 농민다운 소도구들이 소박하면서도 재미있어 눈길을 끈다.
이 놀이가 끝나면 춤판이 시작된다.
밀양백중놀이에서 예술성을 강하게 보이는 것이 춤들이다.
이 춤들은 반상의 차별이 심했던 밀양비장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향토성이 강한 것들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상민들의 양반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아닌 춤으로 형상화되어 보다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머슴들의 발랄하고 활기에 찬 모습들도 춤 전체에서 드러나고 있다.
밀양의 춤은 도듬채와 두루거리, 염풍채, 이 지방 특유의 배김새 사위 등이 서로 어우러져 전체 춤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도듬채는 춤을 이루기 전 한 자리에 서서 어깨춤을 추며 동작이 갖춰질 수 있도록 춤새를 다듬는 것으로 준비과정에 해당되고 두루거리는 허튼춤에 해당되며, 염풍채는 한바퀴 뛰어 콱 찌어서 내려앉는 듯이 배기고, 왼발은 앞으로 굽히고 오른발은 뒤로 비스듬히 눕혀 한 손은 가슴에 대고 다른 손은 등뒤에 댄 채 고개를 전후 좌우로 까딱까딱 흔드는 것이다.
이 춤들은 차례로 설명하기로 한다.
양반춤은 의관을 정제하고 부채를 들고 나와 춘다. 타지역의 한량무가 방안에서 추는 것으로 섬세하고 예쁜 것에 비해 밀양의 양반춤은 들판에서 마음껏 활달하게 추어지는 것이 특색이다. 발놀림 폭은 좁은 대신 양팔의 활개는 크며 정지한 상태에서는 여러 박자를 같은 방향의 손과 발을 함께 움직인다. 이 양반춤은 머슴들끼리 노는 놀이판에 양반이 끼여들어 머슴들을 물리치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춤을 즐기고 있다는 상황이 배경으로 깔려있어서 양반의 모습을 더욱 당당하면서도 거만하게 나타낸다. 이 양반은 물론 머슴들 중에서 가장한 것으로 양반을 놀리기 위한 것이다. 양반이 춤을 추고 있을 때 머슴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등장하여 갖가지 병신춤을 추면서 양반을 놀리자 양반은 뒤로 물러난다. 난쟁이. 중풍쟁이, 배불뚝이, 꼬부랑할미, 떨떨이, 문둥이, 꼽추, 히줄래기, 봉사, 절름발이 등 10여명이 각각 해당역할의 특징을 춤으로 보여준다. 병신춤판은 매우 익살스럽고도 흥겨운 분위기를 이루는데 앞의 양반춤과의 대조 때문에 더욱 효과적이다. 이때 복장은 평복 차림을 한다.
병신춤은 소작농이나 머슴들이 일하다 쉬는 참에 논두렁 위에서 병신흉내를 내며 양반을 놀리면서 놀았는데, 이것이 연유가 되어 이런 놀이가 생긴 것이라고도 한다. 힘든 농사일의 피로와 삶의 시름을 지주층인 양반들을 모욕하고 풍자하며 한바탕 웃는 동안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고 다시금 농사일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특이한 악기로서 사장구와 물장구가 등장한다. 사장구는 작은 자배기 두 개를 가지고 양옆아가리에 가죽을 붙여 장구처럼 만들 것이고, 물장구는 자배기에다 물을 반쯤 부어 바가지를 엎어놓고 두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분위기가 고조되자 뒤에 물러 서있던 양반이 흥에 겨워서 의관을 벗고 양복차림으로 나타나 말한 춤새로 범부춤을 추면서 신나게 논다.
범부춤의 복장은 상투머리에 망건을 쓰고 흰 바지저고리를 입으며 왼쪽 바지가랑이 위에 웃대님을 맨다. 가락은 양산도 가락으로 3박장단이다. 춤은 활달하고 야성적이며 놀이판을 원을 그리듯 힘차게 뛰어다니며 활개춤을 추다가 배김새 사위를 많이 보인다. 이 춤은 앉아서 추기도 하는데, 장단을 향해서 앉아 좌우로 뛰는 것을 옆치기, 장단을 옆에 두고 앉아 좌우로 뛰는 것을 야불딱지라고 하여 이 동작 모두가 범부춤에 더욱 활기와 발랄함을 주고 있다.
3. 신풀이 마당
북잽이들 다섯명이 큰북을 메고 나와서 오북놀이를 시작하면 주변에 있던 놀이 참가자들도 모두 일어나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서 함께 즐기며 노는 분위기로 이끌어 간다. 오북놀이의 오는 오행, 오방, 오환, 오복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숫자로서, 실제 이 놀이에도 풍년과 오복을 비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춤의 구성 또한 오방으로 중앙에 한사람 서고 동서남북 4방에서 북을 치다가 다섯 사람이 중심으로 들어와 원형으로 돌아가고 다시 원밖으로 각각 따로 돌아나가는 등 개인놀이를 보이기도 하는데 힘차고 멋있는 북가락이 연주된다.
북울림이라하여 북만 울려 흥을 일으키다가 나중에 모든 악기장단이 따르며 매우 고조된 흥겨운 분위기에서 끝난다.(이상의 춤은 정병호, 박진주, 밀양백중놀이, 문화재관리국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보고서, 1980 참조할 것). 이어 하보경씨의 북춤이 있는데, 북의 특성과 사람의 동작을 조화시켜 흥겨우면서도 절도가 있고, 동작은 크고 단순하면서도 율동적인 것으로 혼자 추다가 상쇠의 장단에 맞추어서 끝난다.
춤이 끝나면 나발장부가 뒷면서 마당 중앙으로 들어오고 물장구를 제외한 모든 악기들을 울리면서 악사들도 따라 들어와서 모두 어울려 돌아간다. 구경하던 마을사람들도 함께 뛰어들어가 판굿 장단에 맞쳐 대동의 순간에 들어간다. 여러 놀이과정에서 점차 높여진 흥은 남녀노소 구별 없는 일체의 화해의 장으로서의 춤판을 이루고 모두 장단에 맞춰 즉흥적이고 개성적인 춤을 쓰러질 때까지 추면서 남은 나머지의 신명마저 모두 풀어버리는 것이다.
이 놀이는 머슴 중심으로 벌어지는 놀이이기 때문에 일하는 계층의 힘과 농민으로서의 자부심이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번져 나오고 있다. 힘겹고 서러운 그들의 현실적 삶과 그곳에서 쌓인 응어리들이 이런 놀이에서의 건강한 웃음과 몸짓으로 승화될 때 삶은 또다시 새로운 화해의 마당으로 열리고, 새로워진 그들 자신들의 맞이할 가을처럼 풍요한 결실이 약속되리란 믿음도 가능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