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 전수실태조사 ② / 밀양백중놀이

활기차고 구성진 한판놀음






이보형 / 문화재전문위원

1. 머리말

지금은 농촌에 김매기가 없어진지 오래이지만 옛날에는 이것이 벼농사에서 가장 큰일이었다. 그래서 농사짓는 큰 마을에서는 김매기 철만 되면 두레를 짜서 김을 매었고 7월 백중을 전후해서 김매기가 끝나게 되면 농민들은 풍장을 치고 농신에 풍년을 빌며 하루를 즐기었는데 이러한 두레굿을 일컬어 「호미걸이」「대동굿」「꼼백이참놀이」「파접」「두레먹기」「술멕이」「질먹기」따위로 부른다.

농촌에 김매기가 없어지면서 농민들의 복제인 이 두레굿놀이는 없어지고 말았지만 한창지방의「꼼백이참놀이」는 「밀양백중놀이」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밀양지방에도 김매기는 없어졌고 두레를 짜는 일을 잊은 지도 오래이니 백중 무렵에 「꼼백이참놀이」를 놀 까닭은 없어졌지만 중요무형문화재 밀양 백중놀이 보유자들은 해마다 7월 백중 무렵에 마땅한 날을 택하여 놀고 있다. 금년에는 밀양읍 어북산 성터에 밀양백중놀이 전수소 건물이 마련되었고 그 낙성연을 겸하여 백중놀이를 크게 논다하니 조사자는 구경 겸 사진 촬영과 전수실태을 조사하고자 내려갔다.

조사자는 중요무형문화재 전수실태를 조사하는 김에 오늘날 중요무형문화재「밀양백중놀이」공연현장의 모습을 기록하되 옛날 밀양 꼼백이참놀이와 그리고 일반 굿과 비교하여 그 민속적인 뿌리를 밝혀 두고자 한다.

2. 두레와 두레굿

여러 일꾼들이 힘을 모아 큰일을 해내기 위하여 조직된 지역사회의 노동조직체를 우리말로 「두레」라 이르는데 두레를 조직하는 일을 두고 「두레 짠다」「두레난다」「두레 꾸민다」「두레 차린다」고 이르기도 하는바 고장에 따라서는 「대동차린다」「대동 선다」「질 짠다」고 이르기도 한다.

두레에는 일감에 따라서 벼논이나 조밭에 김을 매는 김매기두레, 목초나 퇴비를 마련하고자 풀을 베는 풀베기두레, 베 나는 실을 뽑거나 삼을 삼는 길삼두레 그 밖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가운데 두레굿을 크게 벌이는 것은 김매기두레이다.

김매기두레에「두레풍장」이라 하여 농악이 딸리는 것은 어느 고장에서나 널리 행하던 일이다. 근래의 두레풍장은 어느 광에서나 김매러 갈 때 치는 「길풍장」과 김매기가 끝나면 술먹고 노는「술멕이풍장」만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두레풍장이라는 것이 이런 것으로 알고 있는 이가 많으나 두레풍장은 본디 두레굿(대동굿)이라 이르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여러 의식이 딸리기 마련이다. 이런 의식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진도군 자산면 인지리 대동굿, 고양군 송포면 대화리 호미걸이, 밀양읍 꼼백이 참놀이, 정읍군 태인면 술멕이, 홍성군 결성면 형산리 두레먹기,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 파접, 강릉시 홍제동 질먹기와 같은 두레굿을 살펴보면 농신내리기, 들돌이, 농신굿, 판굿과 같은 절차가 있었던 흔적이 있어서 이것은 마치 별신굿, 당굿, 서낭굿과 같은 마을굿의 의식구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을굿에서 신대(신간)나 서낭기(신기)로 신을 내리고 마을굿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두레굿에서도 농기, 농철기, 대기, 용기, 용당기, 용둑기, 덕석기, 서낭기로 부르는 두렛기나 신대를 세워 풍악을 울리면서 농신을 내리고 나서 두레굿에 들어 간다.

마을굿에서는 신대나 신기로 신을 받고 굿패들이 신대를 들고 풍악을 울리면서 마을을 누비는 집돌이(들돌이)가 딸리는 경우가 많은데 두레굿에서도 농사순방이라 하여 들돌이가 있는 수가 있으며 두레패들이 농기를 앞세우고 길풍장을 치며 들을 누비는 것도 본디 들돌이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는 마을서낭(洞神)을 모시고 굿하는 경우가 흔한 것이지만 두레굿에는 농신을 모시고 굿하는 것이 퇴화되어 버린 고장이 매우 많아서 이것을 보고 두레굿에 굿의식이 없는 것으로 아는 이가 많으나 진도 대동굿, 대화리 호미걸이, 밀양 꼼백이 암놀이에서 볼 수 있듯이 두레굿에 농신굿 의식이 남아 있는 고장도 더러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마을굿에도 굿의 끝에 판놀음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두레굿에는 어느 경우나 판굿이 벌어지는바 기절받기, 두렛기 놀음, 갖가지 풍물놀음, 농사풀이, 농실들의 춤놀음 따위가 벌어진다. 오늘날 두레굿은 이런 판굿놀음만 남아 있는 고장이 많다.

3. 밀양 꼼백이참놀이

밀양지방에서는 두레굿을「꼼백이참놀이」,「꼼백이참먹기」또는「꼼백이먹기」라 이른다. 밀양에서 두레굿을 꼼백이참놀이 또는 꼼백이참먹기라 이르는 내력을 말해주는 이는 드물다. 밀양백중놀이 지정조사보고서에는 꼼백이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도 있다.

「꼼백이참이란 것은 밀양지방의 방언인데 밀을 그냥 통째로 갈아 팥으로 눈을 박아 찐 떡과 밀에 다가 콩을 섞어 볶은 것과 그밖에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일하는 머슴들에게 점심참, 저녁참으로 주는 음식을 말한다. 이 꼼백이참은 자주 얻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귀한 것으로서 머슴날에는 반드시 이 음식이 나오게 되어 있으므로 꼼백이참을 먹으면서 논다는 데서 꼼백이참놀이란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두레굿을「두레먹기」「질먹기」「술멕이」라 이르는 고장이 있는 것으로 봐서 꼼백이참먹기도 그런 뜻으로 볼 수 있겠으나 지정조사보고서에는 분명치 않은 점이 있을 것 같아서 조사자의 생각을 덧붙이고자 한다.

꼼백이참이란 본디 어떤 특정한 음식을 두고 이르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주는데서 곱백이로 많이 주거나 맛백이로 질을 좋게 주는 것의 반대로 양도 적고 질도 떨어지는 것을 꼼백이라 이르는 고장이 있으므로 꼼백이참이란 정식이 아닌 부식이나 소식 따위를 이르는 말에는 나온 것일 것이다.

정식이 아닌 음식을 꼼백이라 이르는 것은 버금으로 처지는 지위나 계층을 곰뱅이쇠 또는 꼼뱅이라 이르는 것과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두레패에서 반품잡이 성년들이 온품잡이 성년으로 인정받으면 두레패 어른들에게 내는 진사술을 꼼뱅이술이라 이르고 이런 잔치를 꼼뱅이먹기라 이르는 고장이 있으니 밀양에서 두레굿을 꼼뱅이참놀이라 이르는 것도 곱백이나 맛백이가 아닌 꼼배이참을 먹는다든가 반품잡이 꼼뱅이들이 내는 술을 먹는다든가는 하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밀양지방에서 꼼백이참먹기나 꼼백이참놀이라 이르는 두레굿은 여름철 김매기가 끝나고 지지로 용날을 따져서 논다고 한다. 철이 빠르면 6월 유두 무렵에 걸리고 철이 늦으면 백중 무렵에 걸린다고 한다. 이 고장에서 두레굿을 용날로 정하여 노는 것은 두레굿을 용신굿이라 이르고 이 굿의 신대를 용신대라 일러서 용신을 농신으로 보는 신앙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

김매기가 끝날 무렵이면 용날을 택하여 날자를 정하고 좌상 무상 수총각으로 두레패의 임원을 정하고 큰머슴을 둔 대농가와 그해 경사난 집에게 술과 안주를 내도록 부탁한다. 두레 노는 날이 되면 마을 농민들은 풍물을 갖추고 놀이터로 모여든다. 큰 마을에는 해마다 노는 장소가 정해져 내려 오는데 밀양읍 내일동에서는 어북산 성터자리에서 놀았고 내이동에서는 진장마을 냇가 버드나무 숲에서 놀았고, 삼문동에서는 영남루 앞 물 건너 대밭머리에서 많이 놀았다 한다.

게줄다리기로 유명한 감내(상감리)에서는 장승백이 사당 앞에서 놀았다 한다.

11시 쯤에 놀이판 한편에 세워 놓은 용신대에 용신제를 지낸다. 용신대는 미리 만들어 둔다. 저릅대(삼대)3백 60개를 모아 위 아래로 네군데를 끈으로 묶고 이것을 땅 위에 세운다. 윗쪽에는 왼새끼를 굵게 꼬아 만든「용줄」을 여러가닥 다는데 그 용줄은 정월 초하루부터 엇 요날가지 날자를 세어 그 수효대로 만들어 달았다고 한다.(조사보고서에는 1년 12개월의 수대로 12개를 달았다고 보고되고 있다). 용줄에는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복주머니를 매단다. 복주머니는 색색 헝겊으로 만들어 다는데 그 안에는 풍년들어 달라고 오곡을 넣기도 하고 재수 있으라고 지패나 동전으로 돈도 넣고 또「나락 농사 잘 되게 해주시요」「금년 시월 삼십일에 아들 시험에 합격시켜 주시기를 소원합니다」「군대 간 아들 복동이 무사하기를 기원합니다」하는 따위 축원문을 적어 넣기도 한다. 꼭대기에는 오곡 이삭을 깃봉과 같이 꽂는다. 동서남북 사방에는 말뚝을 박고 색색 무명으로 만든 오방신장줄을 매어 용신대의 꼭대기에 붓줄매듯 매어 두되 동에는 청제장군이라하여 푸른 줄을, 서에는 백제장군이라하여 흰줄을, 남에는 적제장군이라하여 붉은줄을, 북에는 흑제장군이라하여 검은줄을 매어 달고 중앙에는 황제장군이라하여 노란줄로 용신대를 감아 내려 갔다 한다. 먼저 어림굿을 쳐서 잡귀를 물리치고 용신앞에 제물을 차리고 두레패들이 꽹과리 징 북 장구로 풍물을 치며 용신대 앞에 삼배하고 북을 크게 세 번 치고 나서 제관으로 뽑힌 이 마을 농가 세사람 가운데 하나가 소리조로 축원하고 나서 세 제관이 삼배한다. 술을 한 바가지 떠서「고시내」하고 사방에 뿌리고 나서 음복한다. 이때 구경꾼들에게는 밀볶기를 나누어준다.

마을 대농가들이 각각 내오는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먹은 농부들은 판놀음으로 들어 간다. 머슴을 부리는 집에서는 머슴에게 새로 베옷 한 벌씩 지어주고 짚신도 사주어 치장을 시켜 내보내는데 머슴들이 호사하고 음식을 마음껏 포식하며 즐거이 놀기 때문에 이날을「머슴날」이라 이르기도 한다. 술이 거나한 농부들은 씨름판도 벌이고 돌돌도 들고 풍물가락에 춤판 벌이고 소리판도 벌이며 즐기는데 판놀음이 절정에 이르면 풍물을 치며 집돌이를 한다.

들돌 들기는 장정들이 들어 올리기 힘겨운 크고 작은 돌들을 마당에 내놓고 힘겨루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힘쓰는 실력을 가름하여 소년 꼴머슴이 어른으로 꼽혀 중머슴이 되기 때문에 청소년들의 힘자랑이 대단했던 것 같다.

춤판은 복춤, 병신춤 따위가 흔히 벌어졌고 춤꾼들이 끼게 되면 양반춤 범부춤 따위를 추는 수가 있었다 한다. 소리판은 민요나 시속잡가를 부르는 것이지만 흥이 나면 모정자소리나 얼사영과 같은 농요 부르고 칭칭이소리(쾌지나 칭칭)를 합창하기도 했다 한다.

집돌이는 두레패들이 풍물을 치며 마을을 돌고 대가댁 집집이 들려 술버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집돌이에는 상머슴과 중머슴을 소에 태우고 일산을 세우고 풍물을 잽히고 거드럭거리며 마을을 누비는 것이 장관이었다 한다. 상머슴과 중머슴이 도롱이를 거구로 입고 얼굴에 검정을 칠하고 삿갓을 거꾸로 쓰고 소를 타고 춤을 추며 거드럭거리고 곁에는 장대에 삿갓을 바쳐 일산이라고 들고 호위해 나간다. 소가 없을 때는 작두말이나 괘이말을 탄다. 작두말이란 작대기로 만든 말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지게를 뉘어 네사람이 가마 매듯 어깨에 매고 사람을 태우는 것인며 괭이말은 괭이 둘을 네사람이 어깨에 매고 사람을 태우는 것이다.

꼼백이참놀이가 끝나면 용신대를 풀어 저릅대를 각 농가에 나누어준다. 각 농가에서는 저마다 이 저릅대를 가져다가 논에 꽂아 둔다. 농부들은 용신대로 쓴 저릅대(삼대)를 논에 꽂아두어 제비가 앉게 하는데 제비가 앉으면 똥을 누어 논에 거름도 되고 해충도 잡아먹고 하여 농사가 잘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제비는 익조이니 익조가 앉으면 풍년이 든다고 말하기도 한다. 조사자가 보기에는 신대에 썼던 저릅대를 꽂으므로써 농신의 가호로 풍년을 이루려는 신앙에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 주목되고 있다.

지금은 두레패의 꼼백이참놀여가 없어진지 오래이므로 논에 저름대를 꽂는 민속도 볼 수 없으며 꼼백이참놀이를 이은 밀양백중놀이에서도 신대를 해체하지 않기 때문에 저릅대를 논에 꽂는 일이 없다.

4. 밀양백중놀이

밀양에서는 꼼백이참놀이 밖에도 정월에 서낭굿당산밟기 지신밝기 집태우기 횃불놀이와 같은 놀이가 있어서 풍물을 치고 춤판을 벌였으며 봄철에 화류놀이 여름철에 물놀이가 벌어져 신명 좋은 놀이꾼들이 흥겨운 놀이판을 자주 벌여 왔다 한다. 이 놀이판에서 솜씨 좋은 유명한 놀이꾼들이 많이 나왔는데 1900년대에는 김성숙, 김학문, 김기일, 하성옥, 김기익, 김극서, 김한기 등이 유명하였고 1930년대에는 박원실, 심선택, 한인시, 하보경, 최성식, 김타업 등이 유명한 놀이꾼으로 꼽히었다 한다. 이들 가운데에는 양반 출신도 있고 아전 출신도 있고 특히 부북면 진노리에 있었다는 불당골의 사당패의 놀음을 이어 받은 이들도 있었고 부고면 점골 영산 지이다리 광대패들이 놀음을 이어 받은 이들도 있었다한다.

이들 놀이꾼들이 밀양의 갖가지 놀음에서 솜씨를 보였고 이런 놀음이 본디 민속적 제 기능을 잃어버린 뒤에도 때때로 놀이판을 벌여 왔기 때문에 이들이 보유하고 있던 북춤, 병신춤, 양반춤, 범부춤, 풍물놀음 따위가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밀양문화원장으로 있었던 김동선씨, 교육계에 있었던 이강석씨 등 이 지방 유지들이 이 놀이꾼들의 기예를 전승시키도록 하고 또 세상에 널리 소개하고자 하여 여러 차례 공연과 방송출연, 민속경연대회 출연을 주선하여 왔다. 이들의 놀이는 처음에「들놀이」로 소개되었고 그 뒤에는 「병신굿놀이」「칠월백중제」등으로 소개되었다가 198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조사에서 밀양 백중놀이로 이름을 굳히었다. 지금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는 밀양지방에서 놀던「꼼백이참놀이」의 놀음을 이어 받은 것이지만 그동안 여러 차례 공개공연식으로 공연되면서 재구성된 것도 사실이다. 본디 하루 종일 놀던 것을 30-60분으로 공연시간을 단축시키고 소리판과 춤판을 확대시키고 용신제와 같은 의식을 줄인 것을 볼 수 있다.

1983년 8월 20일에 공연된 밀양백중놀이는 다음과 같이 놀고 있다.

놀이판 한편에 놀이꾼들이 모여서서「덩덩덩 …」하고 쇠가락을 치는데 이것을 모임굿 또는 얼음굿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본디 놀이꾼들이 놀기 앞서 쇠를 쳐서 잡귀를 쫓아 놀이판을 정화시켜 놀음이 뜻대로 되도록하려는 것으로 굿에서 주당백이나 농악에서 얼임굿에서와 같이 다른 놀이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다. 놀이패들은 모임굿을 마치고 나서 자진덧배기가락을 치며 열지어 놀이마당으로 나온다. 현재 밀양백중놀이 놀이패의 열 짓는 순서는 농기(용정기), 나팔, 설쇠(상쇠), 부쇠, 종쇠, 끝쇠, 수정, 부징, 종징, 끝징, 설북(수북), 부북. 종부, 중북, 끝북, 설장고, 부장고, 종장고로 풍물잽이가 앞장서고 그밖에 놀이꾼들이 뒤따라 놀이판으로 들어온다. 상쇠는 중요무형문화재 밀양 백중놀이 보유자 김타업이 맡았다.

놀이판 한켠에는 이미 용신대(농신대, 농신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 제물, 우장(도롱이) 2개, 삿갓 4개, 일산대로 쓸 막대기 2개, 작두말 타기에 쓸 모조 지게 2개, 사장고(사기로 만든 장고)3개, 뭇장고(물장고)4개가 마련되어 있다.

놀이패들은 자진덧배기가락을 「갠-지, 갠-지, 갠-지, 개갱-, 개갱-,. 갠-지, 갠-지 개갱- 」하고 자진모리형으로 치며 들어와서 오른편으로 한바퀴 돈 다음 들당산가락을「갠-지, 갠지, 갠-지 , 갠-지」하고 자진모리형으로 치며 오른편으로 감아서 돌아가다도 쇠가락에 맞추어 제자리에서 용신대를 향하여 서서 당산굿가락을 「갠-지, 갠-지, 개갱-, 갱-개」하고 휘몰아치며 신을 내리는데 이것을 「난혼막이」라 이르고 있다. 밀양놀이패들은 이것을 일러「신장을 깨벤다」고 하여 웅혼을 막기 위하여 신을 깨운다는 뜻이라 말하고 있다.

놀이패들은 용신대에 둘러 서서 쇠가락을「덩덩덩덩 ……」하고 어림굿가락을 치며 삼각하고 자진덧배기가락을 치며 왼편으로 풀어서 나오는데 이 시가락을 날당산이라 이른다.

웅혼막이와 신내림을 마친 놀이패들은 자진덧배기가락을 치며 마당 한 복판으로 나와서 오른편으로 둥글게 늘어서서 소리판을 벌인다. 풍물잽이는 한편에 일렬횡대로 늘어서고 소리꾼들은 둥글게 늘어서 먼저 모심는 시늉을 하며 모노래를 부른다.

「한강수에다 모를 심어 모찌기가 난감하네」

하고 선소리꾼이 메기면

「하늘에다 목화를 심어 목화 다기가 난감하네」

하고 놀이꾼들이 받는다. 모심기소리는 느린 세마치 장단에도 맞고 3분박 중모리장단으로 쳐도 맞는다.

선율은 역시 경상도 강원도민요에서 흔히 보이는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다.

모심기소리를 마치면 놀이패들은 일어서서 늦은 덧배기가락을「갠-지, 갠-지, 갱개개갱, 갠-지」하고 살풀이 장단 비슷하게 치며 오른편으로 한바퀴돌고 다시 둥글게 늘어서서 엎디어 김매는 시늉을 하며 김매기소리를 메기고 받는다. 밀양김매기 소리는「어산용」「얼싸용」이라는 목가를 부른다.

「지리 동산에 갈가마구야 병자년 숭년(흉년)에 콩기름 갱국

열 아홉 그릇 묵고 뒷들 논에 새 보러 가서 메디기 뒷다리에 채여 죽은 영감요」

하고 선소리꾼이 에기면 여러 놀이패들은 김을 매며

「이 후후후」

하고 뒷소리를 일제히 받는다. 이 소리를 자유리듬으로 느릿느릿 길게 부르는데 선율은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어 매우 처량하게 들린다.

놀이패들은 소리판을 마치고 농신제를 지낸다.

용신대에 제물을 차려 놓고 자진덧배기 가락을 치며 용신대 있는 데로 가서 널리 들러 선다. 신굿가락이라 이르는 가락을「갠지, 갠-지, 갠-지, 갠-지」하고 볶는타령 한배로 시작하여 빨리 몰아가다가 쇠가락을 마치고 북잽이가 북을「쿵. 쿵,. 쿵,. 」하고 세 번을 치면 농신축문 읽는 이가 축문을 소리조로

「하늘위에 상제님, 천상천하 용왕님, 바람기 순조롭고 멸구 잡충 없이하여 금년 농사 잘도 해서 착하고 어진 백성 걱정일랑 덜어주고 총각신세 면케하소. 웃논에 용신님, 아랫논에 옹신님, 날짐승도 막아주고 둘쥐도 막아주고 회지점도 막아주고 모개점도 막아주소」

축문 읊기를 마치면 독농가로 뽑힌 제관 3인이 신대 앞에서 3배 하는데 놀이패들이 함께 절한다.

수총각이 바가지에 술 떠서「엇다고시네」하고 소리치며 삽에 뿌리고「농신이고 ○이고 총각신세 못면할 바에야 엇다 나는 떡이나 먹을래요」하고 재담하고 좌상이 나서서「금년 농사 짓느라고 수고들 많았다. 농신제도 마치었으니 푸짐한 음식 많이 갈라먹고 잘 놀아라」하고 말하면 놀이꾼들은 음식을 나누어 먹고 구경꾼에게 밀볶기를 나누어 준다.

음복을 마치면 무상이 일어서서 「오늘 음식과 떡을 푸짐하게 먹었으니 좌상 작두말놀이나 합시다」하고 소리친다. 상쇠가 덧배기가락을 「갠-지, 갠-지, 갠지갱, 갱-개, 개갱-, 갠-지, 갠지갱, 갱-개」하고 쇠가락을 치고 놀이꾼들은 허튼춤을 추며 오른편으로 도는데 좌상과 무상을 작두말에 태우고 삿갓을 막대리고 받쳐 일산같이 들고 나온다. 좌상과 무상은 도롱이를 거꾸로 걸치고 삿갓을 거꾸로 쓰고 작두말 위에서 춤을 춘다. 조상 구실은 김상용이 맡아 해냈다.

작두말은 태우고 놀이마당을 몇바퀴 돌고 나면 놀이꾼들은 춤판을 벌인다. 상쇠가 덧배기가락을 치면 놀이배들은 사방으로 갈라 서고 풍물패들은 제각기 맡은 곳에서 풍물을 친다. 한편에서는 꽹과리 징 장고를 치고 또 한편에서는 부잽이 다섯이「5북」이라 하여 북을 치고 한편에서는 사장고리하려 옹기로 만든 장고를 치고 그 옆에서는 옹기그릇에 물을 담고 바가지를 엎어 띄워 만든 무장고를 친다. 춤군 하나가 도포에 정자관을 쓰고 나와 양반춤을 춘다. 먼저 덧배기장단에 양팔을 엇사위로 쫙펴고 어깨를 으쓱으쓱 추슬이며 한발을 들고 우쭐거리며 춤을 추다가 자진 덧배기장단에 활달한 춤을 춘다. 양반춤은 중요무형문화재 밀양 백중놀이 보유자 하보경 노인이 추었다.

양반춤의 끝판에 이르면 여러 춤꾼들이 나와 갖가지 병신춤을 추며 양반을 희롱하는 시늉을 하면 양반은 쫓기듯 퇴장한다. 남은 춤꾼들은 자진덧배기 가락에 난쟁이, 중풍쟁이, 배불둑이, 떨떨이, 문둥이, 꼽추, 히줄래기, 봉사, 절름발이 등 갖가지 병신짓을 흉내내며 익살스럽게 허튼춤을 춘다. 병신춤은 권재업, 이경제 등 밀양 춤꾼들이 추었다.

병신춤을 추던 춤꾼들이 나가면 춤꾼 하나가 바지 저고리에 맨머리 차림(상투에 망건만 쓴것)으로 한족 무릎에 끈을 메고 나오자 자진덧배기가락에 활개춤으로 힘차게 뛰어 놀이판을 돌다가 장고잽이 앞에 서서 앞다리를 약간 구부리고 한 손을 가슴에, 다른 손을 등에 대고 몸을 앞뒤로 움직이며 고개놀림과 어깨놀림을 하며 범부춤을 춘다. 이 범부춤 또한 하보경 노인이 추었다.

범부춤에 이어서 북춤이 벌어진다. 먼저 북잽이 혼자 나와 북춤을 춘다. 북춤 또한 하보경이 놀았다. 먼저 느진덧배기 가락에 북을 치는데 한 장단을 첫박에 북을 치고 북채를 숙여들고 팔을 들어 춤을 추고 둘째박에는 채로 통을 엇박으로 치며 무릎 춤을 추었다. 이윽고 자진덧배기가락으로 넘어가 활달하게 허튼춤을 추다가 마친다. 이어서 북잽이 다섯이 바지저고리 차림에 테머리를 질끈 동이고 어깨에 북을 메어 앞에 바쳐들고 나와서 오복 춤을 춘다. 상쇠의 자진덧배기가락에 북잽이들이 한 줄로 들어와서 놀이마당 가운데 나와 둥글게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오복춤을 춘다. 먼저「북울림」이라 하여 「덩--, 덩-더, 당-다, 당--」하고 휘모리 한배로 북가락을 몰아가다가 느진덧배기가락으로 북을 치고 이윽고 자진덧배기가락으로 북을 치다가 막판에는「북백임」이라 하여 「당-당, -당-, 당-당, ---, 딱-딱, 딱-딱, ---, 다당-, 다당-, 당-따, 당--

하고 북가락을 박는데 이렇게 박을 때마다 끝에는 일제히 껑충 뛴다. 북백임을 세차례하고 나면 오북놀이는 끝난다.

북잽이가 제자리로 나가면 상쇠는 자진덧배기가락을 치고 놀이꾼들은 화동마당을 논다. 이것은 뒷풀이로 놀이꾼과 구경꾼이 함께 어울려 허튼춤을 추며 마당을 오른편으로 감아 돌며 신나게 놀고 판을 막는 것이다.

이번 놀음에는 부산 진주 마산 등지에서 놀이꾼들이 구경을 왔고 서울과 부산에서 무용가들이 연구차 구경을 와서 이 놀음의 뒷풀이인 화동마당에 서 놀이꾼에 끼어 함께 춤을 추며 놀아 이 놀이판이 한결 푸짐하게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5. 보유자와 전수생

1980년에 낸 무형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 제138호에는 기능보유자로 하보경, 김상용, 김타업, 이강제, 정상중, 권재업이 조사되었으나 밀양 백중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하보경이 홀로 양반춤, 범부춤의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이 큰 놀이를 하보경이 홀로 전수하기 어렵다고 봐서 1982년에는 김타업이 상쇠 보유자로 인정되었고 또 김상용을 일반악사로 인정하였다.

전수생은 1981년부터 매년 몇 명씩 인정하였던 바 1981년에는 차기준, 박동영, 설원수, 차기석이 인정되었고 1982년에는 하용부, 김오규가 인정되었고 1983년에 강두태이 인정되었다.

하보경은 병오년생으로 호적은 1906년 8월24일생으로 되었다. 지금 밀양읍 내일동 49-18에서 산다.

천성적으로 놀이꾼 자질이 타고 난 이로 특히 춤에 뛰어난 솜씨가 있어 젊어서부터 꼼백이참놀이, 들놀이, 씨름판 따위 놀이판엣 솜씨를 자랑해 왔고 밀양읍내에서 첫손 꼽는 춤꾼의 하나이다. 198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밀양백중놀이 보유자로 인정되었고 여러 차례 공연에 참가하면서 그의 독특한 춤솜씨가 알려져서 서울 명무전과 무형민속무공연에 출연한 바 있다. 이번 공연에서도 많은 구경꾼들이 그이 춤가락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북춤, 양반춤, 범부춤을 전수하고 있다.

김타업은 제축생이며 호적은 1913년 10월4일로 되어 있고 지금 밀양읍 가곡동 197-21에 산다. 중학교를 나와 교육에 종사한 적이 있는데 놀이에 재질이 있고 쇠를 잘 쳐서 많은 놀이에서 쇠를 쳤다. 1982년에 중요무형문화재 밀양백중놀이 상쇠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고 지금은 밀양백중놀이 상쇠로 공연을 이끌고 있고 전수생들에게 쇠가락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쇠가락은 덧배기가락을 부드럽고 구성지게 잘 치는 것으로 평이 나 있다.

김상용은 1916년생이고 지금 밀양읍 내이동 421에 살고 있다. 젊어서부터 농업을 일으켜 넉넉히 살고 있지만 놀이판에서 놀기를 즐겨 북춤, 병신춤을 추고 모정자소리, 얼사용 등 농요도 잘 부른다.

1983년에 밀양백중놀이 일반악사로 인정되었다. 밀양백중놀이에서 나팔수, 좌상, 농요 설소리꾼, 병신춤 등 갖가지 놀음을 맡고 있고 또 지도력이 있어 밀양백중놀이의 진행을 이끌어 가고 있다. 전수생들에게는 춤과 농요을 가르치고 잇다.

전수생은 농사를 짓는 이도 있고 자동차를 모는 이도 있고 하여 생업에 바빠서 놀이에 참여할 겨를이 없는 이들이나 스스로 놀이가 좋아서 배우는 이들이 많다.

밀양읍 어북리 성터에 밀양백중놀이 전수소가 있다. 산중턱을 깎아서 1백20평 가량되는 놀이마당을 마련하였고 그 한편에는 오간팔작으로 목조 기와 집을 크게 지었고 다른 한편에는 검은 벽돌로 40여평 전수회관 사무실이 들어서 있다. 매주 첫째 셋째 일요일에 전수생들이 모여 종일 춤이며 쇠가락을 익히고 있으나 생업에 쫓기는 전수생들이라 여기에 전념할 수 없는 것이 어려운 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밀양백중놀이는 이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밀양에서는 정기공연 외에도 밀양 아랑제 등 밀양색 문화행사에 나가 공연할 뿐만 아니라 용인민속촌을 비롯하여 서울 부산 마산 등지에 초청공연을 하는 등 많은 공연을 하고 있다. 따라서 놀이꾼들은 스스로 즐겨 노는 놀이꾼에서 공연을 위한 놀이꾼으로 변하고 있고 놀이 또한 본디 민속적인 의식과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떻든 밀양백중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이 놀이는 전승이 길이 열리어 가장 활기차고 구성진 놀음이라는 평을 받는 우수한 놀이를 자주 볼 수 있어 퍽 다행한 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