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문화의 참모습 11.

남존여비론의 허구




전완길 / 태평양박물관 관장

1.

우리나라 속담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단은 한국인의 장점가운데 예리한 판단력을 나타낸 듯하나 실은 단점을 들어내고 있다. 큰 인물이 될는지, 커서 어떤 구실을 할는지 어릴 적의 행동거지로 판단한다는 말이 얼마나 위험천만한가. 게다가 어릴 적의 행동거지를 예의 관찰하는 것도 아니고 한 두가지의 언행만으로 판단하기를 자랑삼았다. 이는 순간의 판다니 곧 고정 관념화하는 병폐다. 이러한 관습이 오늘날 학문의 연구에도 크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역사학, 민속학에서, 일본인들이 우리보다 먼저 착수한 분야이기에, 그들의 왜곡사관에 쉽게 오염되어 지금까지 치유도지 않고 잇다. 한가지 예를 들면 우리나라가 남존여비사회였다는 것이다.

2.

전통적 한국의 여성들은 자학적 요소에 너무 오랜 풍상에 길들어 있기에 그를 학대하는 모럴과 가족제도와 시어머니와 그리고 모든 남성상위시대의 굴레 속에서 담담하게 살아냈다. 여자의 세계를 곧잘 대립시키지만 여자들은 자기들만의 폐쇄적이고 독립된 세상을 만들어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남자들이 지배하는 집단 속에 끼여들어 그 지배에 방해가 되는 본능, 자유, 실존을 여지없이 짓눌리고 종속적인 위치에서 만족하고 살아야 했다.

비단 이 글만이 아니다. 옛 한국의 남녀를 논할 때는 으레 여자가 남자에 짓눌려 신음했다고 전제한다.

여성사나 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름도 없이 태어나 그늘에서 살다 간 여인들, 그들은 잊혀진 뒤안길에서 피었다 꺾이고 짓밟히고 설움 받던 꽃송이들이었다. 사랑에 목마른 내정의 여인들, 삼종의 굴레에 칠거의 짐을 지고 空閨에서 외로움을 먹고 산 규방의 여인들, 학대와 모멸, 속에서 노동으로 생활한 고달픈 서민의 연인들, 아름다운 노예, 기생이란 이름의 여인들, 청상, 소실이 라는 숙명의 여인들, 한결같이 초췌하고 애처로운 그들이었다.」

「남존여비나 일부다처주의의 악습이 제도적으로 상식화되어 버렸던 조선조의 특수 사회성 .......이조여성들은 남성우위의 이중, 삼중의 치고에 얽매어야 했던 것은 당연하다.」

「여인들의 생활상은 유교를 국시로 하고 모화사상을 사상적 근간으로 삼고, 삼강과 이륜을 행동의 강령으로 삼고, 남존여비를 사랑의 바탕으로 하였던 이조에 들면서부터 엄격한 규범적 치고 속으로 얽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생활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종과 비련의 생활고, 그리고 침묵이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고정관념의 예는 얼마든지 있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3.

이름도 없이 태어나 그늘에서 살다 간 여인들.

그들은 잊혀진 뒤안길에서 피었다 꺾이고 짓밟히고 설움받던 꽃송이들이었다. ......삼종의 도, 칠거의 법은 이조 여성들을 종속적인 지위로 얽매어 놓고 그들의 생애를 지배하던 봉건적 관념이었다. 이조 여성의 사회적 활동은 전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여성들의 사회적 법률적 행위는 반드시 그 남편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순종은 최고의 미덕이요, 정절은 그들의 생명이다. 여자는 오직 남편을 따르는 입장에서만 생존의 의미를 가지며, 지친이 아닌 이성과의 면단, 사교는 일체 용납되지 않으므로해서 더욱 그 부대적 입장을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조의 여성은 나이 7세가 되면 이미 이성과의 면담이 허용되지 않았다. 혼가를 전후해서도 그들의 궁굴한 생활은 변함이 없다. 규방에 칩거하여 외인의 출입을 차단하고 닥쳐올 슬픔을 꿈으로 키운다. 그들의 언동이 이 허용된 울타리를 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분벽사창의 아름다운 감옥에서 외로움을 씹는 저주받은 수인들이었다.

ㅑ 대체 여성도 사람이었던가. 조선조시대. 결정적으로 여성은 묶어놓은 것이 정절사상이다. 여아 7세면 벌써 내외법을 적용시키는가 하면, 가문과의 약속으로 약혼만 해놓고도 상대가 죽으면 마당과부라 하여 15. 6세의 꽃같은 소녀에게도 일생수절이라는 멍에가 씌워졌으니.....

ㅑ 사대부 집안의 여성들은 유교적인 도덕관념과 이른바 내외법이 의해 그 행동범위가 크게 제약받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물질적인 생활 자체는 평민층에 비하여 나았으며, 집안에서도 어느 정도의 대우는 받고 지냈었다. 그러나 행동의 자유는 박탈당하여 집안 깊숙이 들어앉아 있을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ㅑ 신분이 높을수록 여자는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요. 만일 부득이 나가는 일이 있어도 簾帽나 나올이나 蔽面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서야 하며 비록 친족들 사이라 할지라도 남자와의 면담이 일체 금지되어 잇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조 여인들은 남성만을 위한 윤리적 제약 속에 이중 삼중으로 얽매였으니, 어렸을 때는 남녀칠세부동석으로 현실생활로부터 속원되고, 「아들은 가르치되 딸은 가르치지 않는」것이 부부생활의 합리적인 이치라 하여 여자들에게 배움의 길을 막아 무지를 강요했고, 차츰 자라면서 삼종의 틀에 가두는가 하면 이러다가 자라서 결혼할 때부터 여자는 벌써 제약을 받는 것이니 소위 오부귀에서 우선 고배를 마셔야 한다. 즉 여자에게 다섯가지 흠이 있으면 처로 맞지 말라는 것으로「국가나 임금에게 모반한 집안의 딸을 취하지 말며」「난을 일으킨 집의 딸을 취하지 말며」「선조에 나쁜 병자가 있었을 때 취하지 말며」「아버지상을 입고 있는 사람의 맏딸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상의 경우에는 여자에게 무슨 흠이 있단 말이겠는가. 여자가 이런 제약이 없이설사 결혼을 한다손 치드라도 제2의 난관에 부딪치는 것이니, 그것은 아무리 부부간에 금술이 좋더라도 시부모가 못마땅하게 여기면 쫓겨가야 하는 율법이다.

이 위에 다시 칠거지악이란 형틀을 씌워 자칫 잘못하면 쫓겨나가기 일쑤였다. 이 칠거지악만 하더라도 출가한 부녀가 無子, 淫佚, 不事舅姑, 多言, 焩盜, 妬忌, 惡疾이 있을 때 쫓겨나야 하는 것이니 이중에서 간음 외에는 이혼 조건이 될 수 없는 억울한 속박인 것이다. 그러다가 자녀를 낳고 한 가정의 중견 주부가 된 연후에야 비로소 여성을 위한 척한 三不去의 법을 만들어 소위 이조 사대부들은 생색을 냈으나 이 삼불거라는 것도, 「부모의 삼년상을 같이 치렀거나」(與更三年喪)「먼저 빈폐하다가 후에 부귀해지거나」(前貧賤後富貴),「여자가 그 돌아갈 곳이 없거나」(有所取無所歸) 할 때는 쫓지 못하는 것이라 했지만 사실상 주부가 이만큼 되었으면(연령상으로나 지위에 있어서) 불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쫓을 권리가 생긱 것이므로 아무 실효없는 여성을 보호하는 규범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선 맨먼저 우리나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논한(?) 湖岩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조선여성의 지위로 말하면 옛날 희랍 아테네의 부인처럼 아내된 이가 남편으로 더불어 침상을 같이하되 식탁을 같이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남편에 대한 아내는 일종 주종의 관계 위에 서서 편무적 복종을 하게 되었다. 주식을 여투고 의복을 만들고 자녀를 산육하는 것이 그네의 최대 본무로 인정하여, 남성된 이는 이것을 요구할 뿐이었으므로 여성교육도 전혀 가정을 표준하여 그 어머니의 손으로 말미암아 시행하게 되는 바 각자의 개성과 또는 가풍을 따라 얼마즘 특색이 없는 것은 아니로되 요컨대 이 몇 가지 범위 밖에 벗어나지 못하였고 교육의 정신은 어디까지든지 순종으로써 여성의 미덕을 삼았음은 남존여비한 사회의 일반적으로 보는 교육상태이지만 <以順爲正妾婦之道>라는 유교류의 여성교육으로서는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그네들은 부인의 삼종지도로서 이른바 친정에 있을 때는 아버지를 쫓고 출가한 뒤에는 남편을 쫓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이 잇으면 아들을 쫓을 것을 고조하여 철두철미 호주에 순종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여성을 구속함에 삼종지도로써 함이 오히려 부족하여 다시 칠거지악이란 것을 가지고 여성을 몇겹으로 결박하였지만 사실에 있어서 칠거지악중의 간통외에는 이혼조건에 적용된 일이 적었었다.

그리하여 정조는 순종과 아울러 여성이 가지지 않아서는 아니될 쌍개의 계보이었었다. 이런 관념이 표시되는 곳에 소녀의 이름을 順子 貞子를 붙여서 짓는 것이 상례이었었다.... 일부다처와 삼종지도는 남존여비한 사회에 부수하여 다니는 풍습으로서 전자와 후자 사이에 얼핏 보면 하등의 관계가 없는 듯하지만는 자세히 살피면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니, 축첩의 폐는 오직 삼종지도와 같은 편무적 복종을 여성에게 강요하여 그네의 인격을 무시하는곳에만 비로소 볼 수 잇음이다. 이같이 여성이 가장에게 절대복정하는 제도아래서는 여성이 원칙으로 재산을 상속하지 못하는 것이니, 조선여성이 재산상속권을 가지지 못한 것도 조금도 감히 여길 바 아니다.

부부가 공동노작하여 축적한 재산이나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이른바 지참금까지도 그 남편의 소유로 돌아가고 말며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의 처분에 일임하게 되고 만다. 그러다가 필경 그 남편이 죽은 뒤에 이르러는 아들이 있으면 그 아들이 그 재산을 상속함은 말도 할 것 없지마는 아들이 없을 때는 남편의 친족의 남성을 양자로 삼아 그에게 재산을 상속케 할지언정 혼자된 여성에게는 재산상속을 허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과부는 그 양자에게 기생생활을 하게 되다가 만일 그 양자가 불초하여 재산을 탕지할 경우에는 그 과부는 한지에 발을 벗고 나서게 되는 실례가 얼마든지 있으므로, 여성이된 때문에 자기가 근로하여 모은 재산을 가지고도 자기 일신의 생활보장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 어찌 불평한 제도가 아니랴......

결국 이들 주장을 요약하면 우리나라는 전형적인 남존여비사회로서 여자가 음지에서 노예처럼 천대받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실증은 무엇인가.

여자는 이름도 없었으며, 경제권이 없었으며, 재산 상속도 받지 못했고 내외법. 삼종지도, 칠거지악으로 억압당하고 외출할 때는 나올따위로 폐면하였다.

과연 그럴까?

4.

필자는 이미 몇 차례 문화사에 대한 오해, 특히 여성생활문화에 대하여 곡해가 적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즉 너울은 멋쟁이의 장신구였으며, 숭명관습에서 여자의 이름 부르길 꺼린 것이지 결코 여자의 이름이 없지 않았으며 여성이 전적으로 경제권을 위임받았고, 부부가 예와 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므로 필자는 본고에서 재산상속권, 내외. 삼종지도, 칠거지악에 대한 오해를 구명하려 한다.

5.

고려 우왕 때(서기 1384년) 전개성윤 홍수노의 아내가 석기로 인하여 목판으로 홍수로를 쳐서 허리가 부러져 죽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아내를 잡아다가 국문하자 옥중에서 죽는다.

또 김약선의 딸이 고려 고종의 태자비(후에 원종비)였는데 김의 아내는 궁중을 출입할 때 왕비와 같은 차림을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샀다. 뿐아니라 남편인 김약선이 최이 부중의 낭자들과 망월루에서 놀아난 사실을 알고 친정아버지인 최이에게 달려가 「집을 떠나 비구니가 되겠나이다」하소연하였다. 이 말을 들은 최이가 김약선과 놀아난 여자를 귀양보내고 망월루를 헐었다. 더욱이 그는 종과 간통한 사실을 남편이 알자 미리 최이에게 엉뚱한 고자질을 한 까닭에 최이가 김약선을 죽였다. 훗날 딸의 고자질이 허무맹랑한 줄 안 최이가 딸을 종신토록 상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환선길은 장군으로서 고려 태조를 도와 공을 여러차례 세운 까닭에 태조로부터 신임을 얻고 경호대장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당신은 재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사졸이 복종하고 큰 공을 여러번 세웠지만 정권은 다른 사람에게 가 있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소」라고 부추기어 반역하려다가 실패하고 죽임을 당했다.

또 고려초의 이흔암 역시 아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아내의 부질없는 말 한마디가 화근이 었다. 즉 그의 아내 환씨가 측간에서「내 남편의 일이 성공하지 못하면 나에게 화가 미치리라」한 말을 태조의 정탐군이 빌미삼아 옥에 내렸고 그는 저자에서 참수당했으며 집안이 풍지박사되었다.

고려의 패망원인은 무엇인가?

역성혁명의 명분을 찾으려는 이성계와 지배층에 의하여 과정된 감이 없지 않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고려 왕들과 관리들의 방탕과 사치, 왕실의 무질서로 인하여 치도가 확립되지 못한 탓이라고 믿었다.

치도는 망상의 확립에서 얻어지며, 강상의 확립은 가정에서 얻어진다는 유교의 생활이념이 조선지배층인 양반들에게 깊숙이 인식되었고 실제로 생활철학이자 지배철학이 되었다. 따라서 수신과 제가가 강조되었으며, 그것의 일차적인 책임과 의무가 주부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유교의 기본성격이다. 그러므로 홍수로, 김약선, 환선길, 이혼암가의 패망은 자초했을 뿐 아니라 국가적인 우환이었다. 더욱이 박유가 당한 수모는 조선 관리들의 입장에서 볼 때 큰 불상사였으며 여자가 다스려지지 못한 탓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지배층이 유교를 생활이념으로 삼아 확산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여자들은 여전히 거세었고, 수신제가에 실패한 소란이 여전하였다.

중종 12년(서기1517) 12월에 제주 목사 정건이 직을 버리고 자수하였는데, 그 까닭은 관비와 통정한 사실을 알고 아내가 투기하자 구타하다가 죽게한 이유였다. 결국 그는 관비와의 통정에서 빌미였지만 아내의 투기 때문에 패가한 것이다.

이어, 이보다 더 끔직한 사건이 일어났다. 즉 군자감 판관 신수린이 여비와 통정한 사실을 안 그의 아내가 질투 끝에 여비를 때리고 돌로 입술과 이를 쳐서 죽이고는 여비의 시체를 남편에게 억지로 보인 것이다. 신수린의 아내는 여비를 살해한 죄와 남편을 능멸한 죄로 양반 부녀이면서도 의금부에 갇혔고 그의 남편은 가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하여 파직당했다.

그런데 신수린 아내의 행동은 신수린 일가의 패가로 끝나지 않고 친정마저 패가시키기에 이르렀다.

「신수린의 아내는 정승 성희안의 누이동생이다. 신수린이 훈적에 기록되고 벼슬을 얻게 된 것이 희안의 도움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의 아내는 항상 남편에게 교만했고, 가사가 상도에 어긋나고 이치에 거슬리는 이리 상당히 많았다. 신수린의 아내는 원래 성질이 포악하고 투가기 심했는데, 희안의 어머니는 종실의 딸이었는바 역시 투기가 심했다. 그래서 모녀의 투기가 보통 사람보다 지나치므로 당시 사람들이 투기 잘부리는 집안이라고 빈정댔다.

비록 사건이 지금에야 일어났으나 오래전부터 그럴 기미가 있었다.

이는 종종실록에 실린 사관의 논평으로서, 성희안가는 이 일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불명예를 당한 것이다.

판관 홍태손의 아내 신씨도 자신의 불행은 물론 행씨가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었다.

홍태손이 나이 50여세에 이르러 신씨와 결혼하였는데 전처, 후처에게서 아들이 없자 대를 이으려고 했다. 더욱이 그는 얼굴이 아주 못생긴 남자였다.

그래서 신씨의 일가중에서「꽃다운 나이에 얼굴이 추악하고 늙은 이와 배필이 되면 어떻게 동거할 수 있겠는가」고 조롱한 이가 있었다. 결혼한 뒤 6-7년이 지나도록 남편과 동침하지 않고, 남편더러「너는 추악한 얼굴에 나이도 늙고 기력도 없는데 무얼 믿고 혼인하여 나를 초췌하게 만드는가. 빨리 죽어버려가」는 욕을 서슴치 않았다. 그의 성품은 본래 사납고 포악했는데 목사 신조의의 딸이자 윤필고의 외손녀였다.

고려시대에도 그러하였지만 조선시대에 가문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훌륭한 부모에게서 훌륭한 자손이 나온다는 이유도 잇지만 수신제가를 못한 사람은 치국불능 곧 관리될 자격이 없는 자로 판정받았다. 아내의 부덕도 부덕이지만 시집간 딸의 행실이 바르지 못함으로써 가운이 곤두박질해서야 될 일인가. 그러므로 딸교육에 열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열녀로서 가려지면 그것은 친부로서 더 할 나위없는 영광이자 자랑꺼리였다.

이런 이유에서 송시열 같은 거유가 시집가는 딸에게 계녀서를 지어 주면서 신신당부해 마지 않았던 것이고, 여타 집안에서도 다투어 계녀에 열성이었다. 계녀의 내용이야 당연히 현실을 넘어선 이상론이게 마련이다. 일상사를 예로 들어 남편과 시부모, 이웃과의 원만한 관계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작자미상의 「경부록」을 보더라고 계녀의 이유를 알게 된다.

...... 어질인자 집을 삼고 오를의자 길을 닦아 있거들랑 인에 있고 가거들랑 의로 가소 심신일랑 예에 섰고 사물일랑 지로 하여 懸心行事 修身하면 이 내몸에 허물일까...... 날로날로 하는 일이 가지가지 도리있네 부모자식 유친하고 인군신하 유의하고 남편아내 유별하고 어른아해 유서하고 벗과 벗이 유신쿠나 이런 일이 오륜이니 사람들아 오륜아소 이 오륜을 알으시면 사람될시 분명하고 오륜을 몰라서는 금수될시 분명하다 달리는 저 짐승아 네 아비를 알손가 저 짐승의 거동보소 무군무친 저뿐이랴......

부생모육 그은혜는 여자인들 모를손가

내칙편을 외어두소 성현교훈 아닐런가

부창부수 강습하소 출가한후 긴하리니

어른보고 공경함은 조심착실 내게있네

일용간에 신실하면 착하올사 남편네야

일어일어 하온일이 규중의도 깨치리라.

「김대기훈민가」에 의하면 부녀의 바른 행실이 행복의 원천이라 규정하였다.

........ 부모를 잘섬기면 착한 자식 낳느니라 오른일만 가려하면 재액이 물러가고 복은 비록 못얻으나 화는 자연 면하리라 일신이 평안하면 천금이 가소롭다 부모를 천대하면 악한 자식 낳느니라 사람의 큰 죄악이 불효에서 또있는가 행실없는 저 사람은 숫돌 같이 닳아간다 어디하여 죄를 지어 자손에게 전할소냐.......

그러고보면, 가정의 화평을 얼마나 중시 하였으며 제가와 수신을 위하여 온갖 심형을 기우렸던 사실을 알겠다. 남존여비사상이나, 아내를 경멸하는 입장에서 삼종지도, 내외, 칠거지악이 강요되지 않았던 것이다.

6.

그러면 이러한 이유에서 강조된 생활윤리가 각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잇으며 실제로 적용되었느냐가 문제다.

먼저 칠거지악에 대해서 살펴보자.

흔히 「조선시대에 칠거지악이 남성에게는 해당하지 않고, 여성에게만 해당시킨 지극히 불평등한 일방적인 규정」이었다고 말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오해다. 절도, 음행, 악질은 남자에게도 적용된 이혼사유였고, 더욱이 어느 나라에서도 대부분 적용되었었다. 남자는 단순히 이혼에 그치지 않고, 양반은 관직에서 쫓겨나는 동시에 신분이 격하되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간파문까지 가문으로부터 당하고 이밖에도 더 많은 사회적 제약을 받았다.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가 없다는 효관에서 불순부모는 상상할 수 없었고 만일 부모에게 불순하면 엄벌로 다스려졌다. 무자 역시 불효죄목의 하나였다. 또 구설, 석기 역시 남자로선 기초적인 생활금기의 하나였다.

더욱이 칠거지악이 여자에게 적용된 불평등 제약이라 하더라도 이 때문에 이혼한 예는 아주 드물다.

반대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느 주부가 칠거지악에 한 가지라도 해당하지 않는다면 그는 완인에 가까워 나무랄 데가 없으며 원만한 가정을 운영해 나갈 것이다.「내정의 말이 나가지 않고 외부의 말이 들어가지 않도록」남녀(부부)가 모두 말을 삼갔던 것이지 남자는 떠벌이, 여자는 벙어리로 살았던 게 아니다. 따라서 칠거지악은 도덕국가를 지향한 조선지배층이 권장사항이었지 여성을 속박한 굴레가 아니었던 것은 여자가 일방적으로 쫓겨난 예도 없으며 만일 칠거지악에 해당되더라도 삼불거로써 방패막이 삼았던 예로도 알 수 있다.

시부모를 위하여 3년상을 마친 경우, 결혼당시 가난했다가 부귀해진 경우, 이혼했을 때 돌아갈 곳이 없을 경우엔(삼불거)이혼이 불가능하였다. 오히려 엽첩가는 박행자라 하여 지탄받았다.

7.

내외에 대하여도 오해가 깊다.

남녀칠세부동석, 불공식등구로 내외의 폐를 말하나 이러한 내외율은 필자가 이미 지적 했듯이 한 사람만이 앉을 만한 자리에 동석하지 말라는 것이며 한그릇에서 남녀가 함께 식사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설사 그러한 의마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내외율은 여자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적용된 것이므로 결코 여성을 속박한 굴레가 아니다. 오히려 버나드 비숍이 말했듯이 내외법은 여성을 보호하는 생활율이었다.

「한 귀부인 불이 나 타죽은 일이 있었다. 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보고 한 용감한 남자가 뛰어들어가 이 부인을 안아들고 나오려했다. 물론 이 남자는 남녀가 서로 접촉해서는 안된다는 관습이 터부를 깨뜨린 것이 되었고, 이 극한 상황에서 이 귀부인은 끌어안기는 것은 필사적으로 항거하였다. 결국 이 귀부인은 생명을 죽이고 모럴을 구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법률도 내구 속가지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모반죄가 아닌 이상, 남편이 아내의 내방에 숨어 있으면 포졸들은 그 불가침의 내방에 들어갈 수가 없기에 체포가 유예된다. 자기집 지붕을 고칠 일이 있으면 먼저 이웃집에가서 「오늘 지붕에 올르 일이 있습니다. 잘못 댁의 마님이나 따님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오니 미리 사과드리옵니다」고 사과를 해놓지 않으면 안된다.

남녀 일곱 살이면 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결혼하기 바로 전야까지 아버지와 형제 이외에 외간 남자와 얼굴을 맞대서는 안된다. 결혼후에도 얼굴을 맞댈 수 있는 남자란 남편과 남편의 근친에 국한한다.

아무리 천한 신분이라도 남자틈에 끼어든다는 법은 없다. 나의 오랜 한국 여행 도중에 여섯 살 이상의 아가씨를 보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일 가운데 하나였다.

비숍의 말대로 내외율은 법률보다도 엄격하게 지켜진 여성보호율이었다. 그것을 신수린의 아내를 처벌하지 말자는 어전논란으로도 증명된다. 중종은 간음죄외엔 부녀를 하옥시킬 수 없다는 법조문을 들어 반대하는 여러 대신을 물리치고 성씨를 결국 하옥시켰지만-(종중실록 31권 참조)

이를 보더라도 내외가 여성억압의 멍에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러한 내외는 왜 그토록 강조되었을까? 내외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보다 조선사회에서 더 강조된 것은 지상의 도덕국가를 지향한 선비들이 廉潔癖을 숭상한 나머지 貞男, 貞女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8.

조선시대에는 남자의 할 일과 여자의 할 일을 엄격히 구분, 상호불간섭주의를 견지한 결과 여자에게 경제권을 완전히 일임하였고, 법률상 재산을 균분상속 하였다.

「재산 상속에 있어서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다. 이것은 동양의 다른 나라 즉 중국이나 일본에 비교해보면 더욱 잘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재산상속은 조선왕조의 근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상세한 규정이 있다. 그런데 재산상속에 대한<경국대전>의 기본정신은 자녀균분상속 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자와 여자에게 균분하여 재산을 상속하게 하였던 것으로 이러한 제도는 우리나라만의 특유한 제도였다. 가령 일본의 경우는 장자단독상독제였으며, 중국의 경우는 균분상속제이긴 하였으나, 여자는 참여할 수 없는 남자만의 균분상속이었던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자녀균분상속은 고려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여 그래도 실시하소 있었다.

9.

삼종지도 역시 오해되고 있는데 의미의 규명 및 사례를 고찰해야 마땅하지만 다음과 같은 견해의 대용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믿는다.

「유교적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는 여성들의 종순이 미덕으로 선전되고 장려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무조건 종순만이 행하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종순해야 될 경우에는 종순하고, 그러지 않을 때에는 이를 시정하거나 그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현대사회라고 해서, 여성의 종순이 반드시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를 의미하고 잇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라시대에서도 여성들의 삼종지의를 맹목적으로 고수하고 잇지 않았다는 예를 찾아볼 수가 있다. 즉 김유신장군의 아들 원술이 당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김유신에게 버림을 받고 숨어살다가 아버지가 별세한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그의 어머니도 자기 아들을 만나주지 않았다.」<삼국사기>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부인에게는 삼종지의가 있다. 이제 이미 과부가 되었으니, 마땅히 아들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술과 같은 놈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아들 구실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 에미가 될 수 있으리요)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에 이르르면, 삼종지의는 전시대에 비하여 보다 강화되지만 여성들은 맹목적으로 종순에만 그치지 않고, 때로는 남편을 타이르며 이끌어가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지혜와 총명을 발휘하여 가문을 재앙에서 구해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가정의 질서를 솔선하여 바로 잡아 화목한 분위기를 만듬으로써 주위의 칭찬과 존경을 받거나, 자녀들의 교육을 엄하게 하여 훌륭한 성과를 거둔 사례도 적지 않게 볼 수 잇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씨조선사회에서도 모범적인 여성으로서 추앙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씨조선의 여성이 라고 해서 삼종지의에 그대로 묶여 있지만은 않았으며, 또 그것이 지상의 미덕이요, 행동규범으로 간주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10.

이상의 고찰에서 내외, 삼종지도. 칠거지악 따위가 행동규범으로 권장되었지, 통념대로, 그리고 예시한 주장대로 여성을 경멸하거나 구속하기 위한 굴레가 아님을 알겠다. 그것은 이러한 제규범이 부모들에 의하여 권장되었을 뿐 어떠한 규약이나 제재가 없었던 사실로도 명백해진다. 이미 「상류사회의 부부예절」(본지 '82. 5)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한국인들은 근엄하면서도 엄숙한 가정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또한 부부가 대등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남편이 봉순을 받았거나 고관일 때 부인도 상응한 품위를 받았던 사실 역시 남존여비가 아니라 남존여존이었음을 증명한다.

남녀동등, 그것은 일반 가정에서나 왕이 반드시 준수해야 할 천리였으니 그것과 아울러 유지하지 못하면 재앙이 닥친다는 것이다. 중종 때 어느 관리의 직련에도 그러한 관념의 흔적이 있다.

「근래에 일식, 우박, 지진과 같은 재변은 모두 음기가 성해서 일어난 것이니 이는 반드시 인사가 미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내전에서 생기는 은밀한 일은 어찌 외간에서 알겠습니까? 옛날에는 궁중과 부중간에 간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정인군자가 좌우에서 모시면 저절로 사벽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내간에서 일이 생기더라도 모두 규정했기 때문에 혹 잘못이 있게 되면 즉시 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안팎이 갈라져 내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외간에서는 상감께서 특별히 총애하는 일이 있지 않나 의심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총애가 있게 되면 내전에서는 눈치를 살피고 시기하게 마련입니다. 예부터 마음의 잘못으로 곤란해진 일이 많았습니다. 嫡妾間에 혹 총애하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 조짐으로 재변이 일어나니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예시한 바와 같은 오해가 생겨난 것인지도 고찰해야 하나 지면관계로 생략한다.

역사에 대한 오해가 이것 하나만이 아니지만 이러한 曲眼으로는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가 곤난하다.

중첩된 오해의 장벽을 하나씩 허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