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肖像(影幀. 彫像)에 대한 역사적 고찰
-140년 전에 조사 기록된 「조선 초상화 인명록」을 중심으로-
김민기 / 밝터 민속박물관장
1. 서론
개인에게 있어 얼굴이 중요하듯 역사에 있어서도 얼굴이란 매우 소중한 것이어서 그 민족이 만든 영정이나 조상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본받으려 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해서 우리 조상들이 누구의 초상을 그리고 만들었는가를 살펴 본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최근 나의 수립품을 정리하던중 140년 전에 조사 기록된 19세기초의 「조선 초상화 인명록」이 발견되어 전국 서원사우영당 등에 모셔진 초상인물의 상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86아시안게임」 및 「88올림픽」을 앞두고 초상대상 인물에 대한 연구논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차 영정이나 조상을 만들려는 당국이나 개인 및 단체에 다소라도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2. 초상의 정의
초상이란 사람의 용모 용태를 그린 화상 또는 조상이라고 국어사전에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상이나 신상과는 어떻게 다른가? 우상은 ⸁ 목석이나 쇠붙이로 만든 신불이나 사람의 형상 ⸂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는 신불의 상 ⸃ [기독교] 하나님에 대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신의 형상이나 개념 ⸄ 미신들의 대상이 되는 신 또는 신을 표현한 형상이라 하였고 신상은 신령의 화상이나 초상 곧 숭경의 대상으로서의 신의 형상을 조각 주물 회화로 나타낸 것이라 하였다.
서양 미술사에서는 그리이스 조각을 신상조가, 로마조각을 초상조각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신상의 대상인물은 신화의 주인공들이고 초상의 대상은 실존 인물이어서 초상쪽이 실물을 닮아야 하기 때문에 훨씬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실존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사후 수백년이 지나 아무도 그 얼굴을 기억할 수 없어 기록으로 고증하여 추정해서 그리거나 만들때는 그럴듯한 간접 모델이나 작가의 주변 인물을 닮게 될 수 밖에 없는데 여러 단체의 주문자가 각기 다른 작가에게 동일인의 초상을 부탁했을 경우에 한사람의 초상이 전혀 다른 인물로 각각 만들어 질 것이기 때문에 국가적인 인물을 제작할 때는 전문가로 구성된 심의기구에서 위촉하여 만들고 하나가 만들어지면 그 후의 것은 모두 이에 따라야 하는 규제가 필요하게 된다.
3. 초상제작의 목적
특정한 인물의 초상을 만들 때는 다음 몇 가지 목적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제사을 위한 초상」으로 사가나 왕실에서 가신 분의 명복을 빌고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인데 일정한 기간 동안은 조석으로 음식을 올리고 뒤에는 특정된 날에 경배를 드린다. 효도와 충성으로 연결되는 조상숭배의 이 풍속은 초상제작의 대표적 목적이라 하겠다.
「속삼강행실. 효자도」의 하우명편 복윤문편에는 양친 초상화가 걸린 사당앞에 제상을 차리고 절을 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는데 왕실에서는 선원전에 역대 왕과 왕비의 진영을 모셔놓고 생신때는 다례를 올렸으며 집안이나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앞에 고하고 도움을 빌기도 하였다. 특히 한 왕조의 시조 초상은 신상으로 우러러 모셔지고 받들어졌다.
둘째는 「권계적 초상」으로 직계 혈족에 의한 것 보다 대소 집단이나 국가적 단위에서 감계적이고 교화를 위해서 또는 고덕을 기리거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드는 초상이다. 고려조 창건시 죽으므오 진충보국한 신숭겸의 초상이나 정몽주의 초상, 이순신. 을지문덕의 초상도 이에 해당된다.
셋째는 「기념초상」인데 학교, 병원, 공원, 사적지 등에 설립자나 주인공이 되는 사람의 초상을 세우고 그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대학교의 설립자 동상이나 인천의 맥아더 동상 등이 이에 해당된다.
넷째는 「祈福消災를 위한 초상」으로 복을 빌고 쟁앙을 쫓는 우상적 역할을 하는 초상인데 서울 서대문구 국사당(민속문화재 1호)에 모셔진 최영 장군, 이성계, 무학대사 등 무신도가 바로 이에 해당된다. 이들은 실존 인물이지만 신으로 승격되어 아귀나 잡신들을 물리칠 수 있는 큰 신으로 복을 주고 재앙을 쫓는 영험을 갖는다.
4. 한국초상의 역사
우리나라 초상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지 확실한 유물이나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대체로 삼국초에는 이미 실존인물의 초상에 대한 중국쪽의 기록이 나타나고 있어 이를 기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ⶀ 삼국시대 이전의 인물상
가장 옛됨을 오래 지니고 있는 장의 풍속에서 산 사람과 똑같은 목각 인물상을 만들어 죽은이의 무덤속에 넣었다는「후한서. 동이전. 옥저편」의「목각생여. 사자수 수위정」의 기록은 부모의 사후세계에 시종으로 딸려 보내는 것인데 이를 목노비라고도 한다. 중국은 물론 고대 이집트에도 이런 풍속이 있어 이를 Ushabti라 부르며 미이라 옆에 넣는다. 공자는 이 풍속이 순장을 불러왔다 (殉葬本由有作硅者 也)하여 옳지 못한 폐습이라 비난하였다. 처음에는 대강 만들다 나중에는 실물과 똑같게 조각하고 채색하기에 이르자 이렇게 비용을 들일 바에는 차라리 실제 노비를 직접 넣기에 이르지 않았나 추정되며 우리나라에서 순장의 폐습이 사라진 것은 신라 지증왕 때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고구려조」에도 10월 국중대회때 목조각인 목대신을 신좌에 모셔놓고 제례를 올렸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전래되어 내려오는 풍속으로 신상임을 알 수 있겠고 이 신상의 모습 또한 고구려인을 닮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주 아므로천에서 발굴된 토우 여인상은 4500년(탄소 14법 4520년 ⷪ 20년) 전 것으로 퉁그스족의 특징을 그대로 하고 있어 주목된다 하겠다.
■ 삼국시대의 초상
북사 고구려전에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과 그 어머니 하백녀의 목조각 기록이 보이는데 문헌상에 나타나는 실존 인물의 최초의 초상조각이다.
「경귀신. 다음사. 유신묘이소. 일일부여신. 각목작부인상. 일왈등신. 운시기시조부여신지자. 각치관사. 귀인수호. 감하백녀. 주몽운. 」
........귀신 두곳에 부여신의 아들 고주몽과 그이 어머니 부여신 하백녀를 목각으로 초상을 만들어 모시고 옆에 관사를 두어 돌보아 지켰다고 하였으니 시조신으로 소중히 모셔지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불교미술도 함께 들어와 불교조각의 영향을 받아 수준높은 고승들의 초상조각도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삼국유사권3 흥법3」에는 흥륜사 금당에 십성초상이 泥塑로 봉안되었는데 동쪽벽에는 아도, 수촉, 혜숙, 안사, 의상이 서쪽벽에는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상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초상은 무속적인 조상신의 초상과 비교조각의 영향을 받은 고승들의 초상이 고구려, 신라, 백제 모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백제의 아좌태자가 그린 일본 성덕태자의 초상으로 볼 때 초상화의 수준도 뛰어난 것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삼국의 임금이나 정치가 장군등의 초상이 전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부식이나 전쟁 등의 재해 탓도 있겠지만 「북사」의 기록처럼 귀신을 지극히 섬기던 우리의 전통도 한 이유라 생각된다. 한 왕조가 망하면 새 왕조는 전조의 초상을 모두 불태우거나 묻어 버렸는데 그러지 않고서는 과거를 역사속에 묻어버리는데 장애가 도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 고려의 초상
고려때에는 왕과 왕비 초상을 眞殿에 모셨고 나라에 일이 생기거나 지방으로 행차 할 때는 진전의 선왕 어진 앞에 문안 올리고 떠났다. 고려사에는 숙종 7년(AD1105)에 태조왕건 화상에 문안올린 기록외에 역대 임금이 선대왕과 왕비의 초상을 봉안하고 경배를 드린 여러 기록들이 보인다. 가진전, 오성전, 천수사, 아화사, 경령전, 영통사 등에 선대왕과 왕비초상을 봉안하고 극락왕생을 빌었으며 원종 11년에는 봉은사에 태조의 塑像을 봉안하였고 충열왕때는 글안병 침입으로 태조의 소조상을 강화로 피난 옮겨 모셨다고 한다.
이렇게 소중히 다루어지던 초상이 고려가 망하자 대부분 불태우거나 땅에 묻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9년에 고려태조의 영정 3점과 행병정 2점, 6공거정 6점, 鑄像 한 점을 왕건 태조능 옆에 묻었으며 세종 10년(AD1428년) 멀리 천안, 문의, 나주, 광주 등에 있던 태조주상과 및 광주에 있던 혜종의 소상까지 각 그 능옆에 묻어버리게 하였다.
우리나라 역대 임금중 가장 존경받는 세종대왕이 이러했으니 초상보존의 어려움이 어떻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세종원년 5월에 왕건태조의 진상초상을 평양으로 떬겼는데 서북면의 반인들이 왕건 사모하길 부모 받들 듯하여 이 초상화를 모시고 산속으로 달아나 다시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세종도 나라의 새기틀을 잡는데 백성들이 이러하다면「고려의 귀신이 붙은 초상」(?)을 그냥 놔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 중에도 극히 작은 예외가 있었으니 고려개국 공신 신숭겸. 강영필, 복지채의 주상이다. 정몽주를 죽이고 나서 만고의 충신으로 받들어 조선조에 충신이 많이 나오길 바라듯 이들도 같은 대접을 받아 19세기초까지 평산의 구봉서원에 모셔지고 있다.
고려 후기로 와서 특기할 일은 몽고의 침략과 함께 원나라의 초상화 수법이 도입되는 것이며 뒷날 조선조의 초상화 수법을 확립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고려사열전 안향 편에는 안향이 충열왕을 따라 연경에 갔다가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가져왔으며 다시 박사 김문정을 보내어 명유 명현초상 72폭을 비롯 제기, 악기, 경서 등을 가져왔다고 한다. 당시 몽고는 전 세계의 지배국으로서 원세조 치하에 종교자유가 보장되고 문물이 활발히 교류되어 고려왕실에는 원나라 출신 화가까지 와있어 안유가 죽은지 12년째 되는 충숙왕 5년(AD1318)에 왕은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이것이 현 국보111호로 순흥 소수서원에 봉안되어 있다. 국보110호 이제현의 초상과 더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조선조의 초상
개인의 사당, 마을의 향교, 묘, 왕실, 사찰 등을 제외하고 「서원. 사우. 영당」있던 것만 해도 19세기 초에 1012점이 있었는데 남한에 현존되어 있는 것은 80여점 밖에 되지 않으며 당대의 일급 왕실 화사들이 그렸던 역대 와과 왕비의 진영은 창덕궁의 선원전에 간직되다가 6.25때 부산 피난지에서 화재로 불태우고 말았다.
문헌에 나타난 초상기록을 살펴보면 태종 11년에(태종실록 권21 p.18) 개국공신 초상화가 태조 초상과 함께 장생전에 봉안되었으며 세종25(AD1443년)에는 태조의 소년시절 모습을 그린 것은 평양과 개성에 만년의 모습은 전주와 함흥에 봉안되었다. 지금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유일한 태조 초상화는 이때 그려진 것으로 보이며 숙종 15년(AD1688년) 환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임금의 진영은 서원전외에도 묘에 봉안 되엇으며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경우에 따라 사찰에도 봉안 되었다.
조선조에 와서 가장 특기할 일은 서원의 등장과 함께 초상화 수요의 급격한 증가를 들 수 있다. 고려조의 초상화 수요가 왕실과 사찰에 있었다면 조선조는 서원과 사우 영당으로 주류가 옮겨졌고 지금 전하는 초상화들도 여기에 봉안되었던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최초의 서원기록은 세종2년(AD1420)에 함종현 사람이 서원을 私置해서 학생을 가르쳤으며 생원 칭호를 내렸다 한다. 그러나 공식적인 서원의 등장은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3년(중종38년) 에 순흥 백운동에 안유의 사묘를 세우고 사원을 만들어 초상을 모시니 소사서원이다.
조선조의 초상화풍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지는데 기법과 양식이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다. 전기의 것으 평면적으로 입체감 없는 묘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1759년에 그려진 황연혹 이항복상은 휘염처리로 약간의 입체감을 주기는 하나 1638년까지 생존했던 장유상은 평면 처리로 묘사되었고 1676년에 그려진 허목상과 1683년에 그려진 한시각작 송시열상 1710년 윤두서의 추화인 심득경상에는 입체감이 나타나는 음영 묘삭, 1719년 김진여가 그린 초상화들부터는 뚜렷한 입체 표현의 묘사를 보여준다.
초상화에서 전후기 구분은 1700년 전후기 기점이 되며 이것은 숙종 때의 청나라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북경의 잦은 내왕으로 중국에 유입된 서양화풍이 초상화 제작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제현의 초상화에서 보이는 안면의 입체적표현 방법은 이때 와서야 초상화단의 대세를 바꾸어 놓기에 이른 셈이다. 그러나 선비사회와는 별도로 불화나 무화에서는 전통적인 평면화법을 고수하면서 초상제작이 계속되었다.
5. 한국초상의 대상인물
한국초상의 대상인물은 개국시조 단군으로부터 각 왕조의 시조와 역대 왕과 왕후, 개국공신 및 공신, 재상, 큰선비, 국난 극복에 앞장섯던 장수는 물론 나라를 위해 목숨받친 일개 학생까지도 그 대상이 되었다.
사가에서 부모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그려지는 것이나 확가 자신에 의해서 그려지는 자화상은 제외하고 국가적 존경도와 직결되는 초상을 주로해서 오늘에 되살려 쓸 필요가 있는 것을 대상으로 ,<표1>-<표6>의 자료에 의한다.
ⶀ 璿源殿(眞殿)의 초상
선원전에 봉안된 御眞은 왕과 왕비 및 追崇된 사후 왕과 왕비들이지만 지금 남한에 전해지는 것은 이성계의 초상 뿐이다. 오늘날 다시 제작할 필요가 있거나 이미 제작된 것으로는 단군시조, 삼국의 개국시조, 고려태조 등을 들 수 있겠다. 고려사난 조선왕조실록의 많은 기록들이 태조초상을 특히 중요시하고 많이 만들었던데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부국강병의 상징 공개토대왕, 금속활자시대의 고려고종, 한글과 측우기의 세종대왕 등 국력신장이나 문화 창달에 뚜렷한 실적이 있는 왕들로 후세에 귀감이 될 수 있는 분에 한해야 할 것이다.
ⶀ공신각의 초상
<표4>에 있는 공신과 영조 때 까지의 공신은 총597명으로 아래와 같다.
⸁ 태조 개국공신 방원 등 39명
⸂ 정종조공신 의안대군 등 18명
⸃ 태종조공신 이행 등 38명
⸄ 단종조공신 정인비 등 36명
⸅ 세조조공신 계양군 등 41명
⸆ 예종조공신 신숙주 등 38명
⸇ 성종조공신 신숙주 등 75명
⸈ 중종조공신 박원종 등 107(-22)명
⸉ 선조조공신(1차) 윤근수 등 19명
(2차) 박충간 등 22명
(3차) 이항복 등 86명
(4차) 이순신 등 18명
(5차) 홍가신 등 5명
⑩ 인조조공신 (1차) 김 영 등 5명
(2차) 장 면 등 32명
(3차) 홍 유 등 6명
(4차) 허 적 등 11명
(5차) 구인규 등 5명
⑪ 숙종조공신 김석위 등 9명
⑫ 영조조공신 오명항 등 9명
공신서훈에 오르면 공신전을 받게 되고 자손에게 세습되어 그 명예로움을 오래 누리게 되어 있으나 국민적 존경도와는 일치되지 않는다 <표1>과 비교해 볼 때 신숙주같은 인물은 3차에 걸쳐 공신서훈에 올랐으나 단 한곳의 서원이나 사자 경단에 초상이 걸리지 못했다. 선조임금이 내린 왜란후의 공신표차에서도 이린신, 권표, 원균이 1등 동격으로 되어 있어 원균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가 크게 잘못 되엇든지 이순신의 성웅화를 위한 악역으로 지나치게 격하 되었든지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삼등공신에 들어있는 동의보감 저자인 허준같은 이는 오늘의 훌륭한 초상 대상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ⶀ 문묘의 초상
문묘란 공자의 시호인 문선왕을 모신 묘를 지칭하여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공자묘에 우리나라 큰 선비로 모셔진다는 것은 최대의 영광이며 국가적 국민적 존경의 표상이 되었다.
<표3>에 나타난 18명의 선비는 모두 초상의 대상 인물로 삼아 마땅한 분들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씩 결함도 있고 기대 만큼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점이 없지 않지만 이만한 큰선비를 조상으로 가졌다는 것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표1>에 나타나 있는 전국의 초상 수는 평균 8.5곳이어서 높은 존경도를 나타내나 설총은 1곳이요 송시열은 22곳이어서 큰 차이를 보여준다.
이런 존경도나 공자묘를 바라보는 일반 서민들의 생각은 선비들과 일치했을까?
중국과 조선조가 외교적인 주종관계(내정불간섭)로 묶여지고 종교적으로 중국유교의 신도가 되어 신앙적 조국으로 명나라를 섬긴 결과 멸망한 명나라를 위해서 겨를 힘도 생각지 않고 청나라와 싸워 큰 치욕을 당한 전후사정을 별도로 나라의 진로를 바르게 이끌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며 산대놀이 잠상중에 공자를 넣어 양반사회를 조롱하고 모욕한 서민들의 참뜻을 큰선비들에 대한 존경과 함께 섞어 생각해 본다.
ⶀ 조선조 명현록의 초상
조선조의 선비들중 존경의 대상으로 초상을 만들만한 분을 선정하는데 있어 그들이 훈구파냐 절의파냐 사림냐, 청담파냐, 또 그들의 현실참여의 태도와 상황을 거시적 안목으로 어떻게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라 생각된다. 특히 사생당쟁에 본의든 아니든 참여한 인물의 평가는 더더욱 그러기 쉽다.
눈을 돌려 세계사의 흐름을 보자. 서구열강이 아시아를 침략하고 식민통치를 하는 기본적 수법이 내부분열을 격발시켜 서로 싸우도록 해서 지배했으며 영국의 인도지배 방식도 그 한 예일 것이다. 힌두교, 회교, 불교 등 여러 요인을 활용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된 것도 그 예의 하나로 볼 것이다.
우리가 사색당쟁을 열심히 하는 동안 중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동북방의 국경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으며(주역에는 동북방을 조심하고 가지마라는 경구가 여러 곳에 나옴)북방의 위협을 대처하는데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필자는 수년전 남한산성 부근에 있는 「안골」이라는 마을에 갔다가 그곳의 주산맥이 끊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생각되어 동네의 고노에게 물어보니 구전되어 내려오는 말에 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이가 그곳에 들렸다가 산세를 보고 큰 인물이 날 곳이라며 그렇게 되면 명나라에 후환이 된다하여 부하 군졸을 시켜 주산의 맥을 잘랐다고 한다. 이것은 하잘것 없는 미신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뿌리깊은 우리의 신앙을 간파하고 이를 활용한 것이며 여기서 명나라 지도층의 조선을 대하던 태도와 앞을 내다보는 그들의 마음속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을의 수호신이며 이정표가 되었던 돌장승중 임진왜란 직후부터 17세기 사이에 백제의 옛땅인 호남지방에 만들어 세운 것만 장승의 앞가슴에 「당장군 주장군」이라 새겨 세워 논 것도 이러한 안목에서 본다면 실제로 그 장승을 세운 사람은 누구이든 중국의 국가이익에 크게 공헌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남이장군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것도 큰 인물이 조선에 나서는 안 된다는 원격조정의 한 사건일 따름인 것이다. 이제 눈을 밖으로 돌리고 스스로를 우리 안에 가두어 조상을 사색당쟁이나 하든 몹쓸 인간으로 매도하지 말아야 하겠다.
사냥꾼의 우리에 갇혀 서로 으르렁 거리며 싸우는 표범도 거기서 빠져 나오기만 하면 각기 자기 영역에서 뛰게되니까 말이다.
<표5>의 중종조의 5현, 선조조의 2현, 세조조의 사육신. 생육신. 숙종조의 3신, 인조조의 삼학사, 경종조의 4대신, 중종조의 8현 그들 모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명현들이요, 정의의 사나이들이다. 어찌 그들의 초상을 만드는데 인색할 수 있겠는가?
■ 조선초상화 인명록과 그 존경도
조선초상화 인명록에는 아동국선원계록, 문묘배형록, 태묘배형록, 황각록, 문형록에 이어 함경도와 강원도가 빠진 전국 각도서원사우영당록(<표1>은 이를 보기 쉽게 배열할 것)이 있어 당시의 영정인물 상황을 알 수 있게 한다.
맨 처음에 나오는 개성의 송양서원 정몽주는 포은집 권4에 이곳으로 초상을 의안 했다는 기록과 소수서원 영정도 일치된다. 김포 우계서원에는 우계 성연의 초상은 없고 「중봉. 조헌」의 기록만 있어 어떤 사정으로 조사 당시 조헌초상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필사본은 선원계록에 순종, 익종(추경)다음 헌종(1834-1849)을 주상전하로 기록하고 왕후 김씨의 승하 (1843년 계인년)까지 기록하고 있어 이 조사가 1843-1849년 사이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황각록에는 순종(1801-1834)조까지 문형록에는 정조(1777-1800)조까지만 나와 있어 기록대상인물이 1834년 이전으로 국한되나<표1>의 하한년대는 <표2>에서 보는 바와 같이 17세기말(현석 박세변 1632-1695)이어서 사후 150년 이상의 인물들만 초상으로 모셔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인물평가에 세월을 두고 신중을 기했음을 알 수 있다.
<표1>에 따라 초상수로 순위를 정해 보았더니 <표2>가 되었다. 이에 의하면 1위는 송시열(22곳), 2위 이퇴계(17곳), 3위 조광조, 이율곡 (14곳)이었다. 송시열과 조광조는 그 인물됨을 재조명해 볼 필요를 느낀다. 공자묘에 큰선비로 모셔지고 이런 정도 초상화가 그려졌다면 국민적 존경으로 추앙되어 마땅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송시열의 북벌 위한 노력, 조광조의 이상정치에의 정열을 그들이 당쟁에 관계되었다 하여 묻어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려조의 인물로는 이색(6), 정몽주(5), 이존오(4), 개국공신 신숭겸(3), 강감찬, 최충, 안유, 문익점, 이제현 등이 있고 삼국시대 인물로는 최치원, 을지문덕, 계백, 김유신, 설총, 성충, 흥수, 을파소 등도 보인다.
■ 최근 남녀고등학교 초상 및 존경도
1983년 서울에 있는 남녀고등학교 2개교를 대상으로 초상화 게시현황을 조사했더니 <표6>과 같은 통계를 얻을 수 있었다. 남자 45개 학급과 여자 39개 학급 총84개 학급중 초상화가 없는 반은 10학급이었고 게시된 학급은 74개 반이었다.
인물별 순위는 1위 이순신(10), 2위 세종대왕, 유관순(각8), 3위는 김구, 신사임당(각6), 4위 이율곡(5), 5위 손병희, 안창호, 안중근 (각3) 순 이었다.
이순신이 단연 1위인 것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통치의 영향이 크게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2위의 유관순, 3위의 김구, 신사임당도 크게 주목을 끈다.
외국인으로는 슈베르트(2반), 아인쉬타인, 퀴리 부인, 슈만, 차이코프스키(각1반) 등이다.
조선조의 초상화는 인물이 먼저고 초상이 나중에 만들어진데 비해 현재 고등학교에 게시된 초상화는 상품화된 것 중에서 골라 사야하기 때문에 사기는 쉬우나 선택의 폭이 제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외국인 초상은 주자, 공자, 제갈량, 이여송, 백이, 숙제 등이었으나 오늘날은 서양의 과학자와 음악가가 걸리고 있어 서구식 교육을 받고 있는 현실의 반영으로 보이며 민족교육을 위한 영역별 인물 발굴 조치가 있어야 함도 지적되어야 하겠다.
6. 결론
이상에서 검토한 결과 앞으로 만들 초상 대상 인물의 선정은 대상 인물이 사후 일정기간을 지나야 한다는 점이며 한시대의 정책적 편의에 의해서나 지역적 역사적 편견에 사로잡힘이 없이 나라의 내일을 이끌어갈 후세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표본적 인물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또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무명의 어린 학생이라 해도 외침에 항거하여 목숨을 바친 경우도 초상의 대상이 됨은 임진왜란 때(의성 충렬사)의 학생 하계광, 최산량, 이인민 등이 그 예요, 유관순 또한 귀감이 될 것이다. 훌륭한 학벌과 높은 지위에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시정잡배의 신분이라도 마음만 바로 먹고 용기를 갖는다면 누구나 가능한 것임을 알게 하여야겠다.
앞으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물은 정치나 군사뿐만 아니라 과학, 공업, 무역 기타 각 분야에 걸친 다종다기한 인재인데 이 방면의 선인들은 발굴하여 초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겠다. 「퀴리 부인」보다는 「화약의 최무선」이「슈바이처」보다는 「동의보감의 허준」의 초상을 걸어야 하겠다.
또 초상이 세워질 장소는 그의 출생지, 활동지, 기타 연고가 있는 곳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충무로에 충무공이 없고 을지로에 을지문덕 장군이 없으며 세종로에 세종대왕이 없음은 편의에 따라 즉흥적으로 세운 것으로 볼 수밖에 없고 어린 소녀로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손에 갈갈이 사지를 찢겨 무참하게 죽은 유관순 동상은 하필이면 호텔, 체육관, 음악당 등이 운집해 있는 장충단 공원에 세워 젊은 남녀들의 데이트를 구경하도록 해야 하는가 말이다. 산사람도 그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거늘 민족의 사표가 되는 인물의 동상을 구경거리로 만든다면 교육적 효과는 저하될 것이고 그럴 바에야 현대 조각을 그곳에 세워야 할 것이다.
또 초상화나 동상은 경제적 이유를 앞세워 조잡하고 허술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순위를 정해 순차적으로 충실한 초상이 나오도록 해야 하겠다.
몇 백년이 지난 훗날에도 후손들에게 하자 없이 물려줄 수 있는 인물과 작품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명예가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실증으로 보여주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