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전수실태 조사 3.

양주 소놀이굿




이보형 / 문화재 전문위원

1. 머리말

楊洲 소놀이굿은 重要無形文化財 第70號로 지정되어 無形文化財 發表公演과 民俗藝術競演大會에 자주 出演하였고 또 李杜鉉 敎授와 崔吉城 敎授를 비롯하여 몇몇 학자들이 現地調査를 마치고 報告書와 이것을 다룬 논문이 나왔기 때문에 지금 새삼스럽게 楊洲소놀이굿에 관한 調査가 부질없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필자는 금년 초에 문예진흥원에서 실시한 양주소놀이굿 VTR錄畵作業의 現場指導를 하였고 여름에는 文化財管理局에서 실시한 양주소놀이굿 寫眞撮影 현장지도를 한 바 있었다. 기왕 녹화하는 김에 좀 더 생생한 民俗的인 생명이 담긴 작품을 낼 요량으로 실제로 재수굿(安宅굿)을 시키었고 여기에서 소놀이굿이 공연되도록 주선해 보았다.

다른 많은 민속놀이들이 그렇듯이 양주 소놀이굿도 액을 막고 복을 불러들인다든가 住民들 스스로 흥겨워 즐겨 논다든가 하는 본디 가졌던 民俗的인 機能이 상실되어버린 이 마당에 어쩌면 이런 실제굿에서 벌어지는 소놀이굿도 보기 어려울 것으로 봐서 現場調査記錄을 자세히 꾸며 두었다. 이런 기록을 그냥 死藏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차에 83년 9월 초순 양주소놀이굿 전수실태조사를 하게 되어 이에 대한 글을 쓰게 되니 이 기회에 그때 조사해둔 것을 정리하여 함께 발표하고자 한다.

2. 마을굿과 소놀이굿

사자놀이, 거북놀이 같은 짐승의 탈을 쓰고 노는 놀이가 흔히 마을굿에서 노는 것이지만 양주 소놀이굿은 집굿인 재주굿의 제석거리에서 놀기 때문에 소놀이굿은 사자놀이나 거북놀이와 기능이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黃海道나 忠淸道 소놀이굿이 마을굿에도 보이고 또 京畿道 廣州지방 대동굿에서 소놀이굿도 마을굿에서 벌이는 것으로 봐서 소놀이굿도 본디 마을굿에서 놀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소놀이굿도 사자놀이나 거북놀이와 같은 기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마을굿에는 굿패들이 서낭대에 서낭을 받은 다음 風樂을 올리며 마을 집집에 돌고 액을 막고 복을 비는 집돌이(돌돌이)儀式이 딸리는 경우가 많은데 사자놀이나 거북놀이도 같은 집돌이 의식에 쓰여 그 連行節次나 機能이 같은 것으로 봐서, 나는 사자놀이나 거북놀이에서 사자나 거북이 모두 서낭대(神대, 神竿)의 분화형태로 보고 싶다. 소놀이굿에서 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마을굿의 집돌이에 굿패들이 서낭을 모시고 들고 다니는 서낭대 또는 서낭기를 보면 江陵端午祭의 서낭대와 같이 산나무 가지에 베와 쌀과 돈을 달은 것이 있고, 河回 別神굿놀이의 서낭대와 같이 긴 장대에 방울이 달린 것이 있고, 창령군 영산문호장굿의 서낭대와 같이 대나무 장대 끝에 오색 베를 기처럼 달고 흰 베로 아랫도리를 감은 것이 있고, 恩山別神祭의 神旗와 같이 긴 대나무 장대 끝에 꿩장목으로 깃봉을 달고 그 밑에 큰 깃폭을 달고 깃대에 흰 무명으로 베레줄을 달은 것이 있다. 이것들은 겉모습이 다를지라도 기능은 전혀 같고 또 비슷한 모습을 서로 맞추어 보면 前者에서 後者로 차츰 겉모습이 바뀌어 간 것을 알 수 있다.

서낭기(神旗)의 기폭에는 恩山別神祭의 신기와 같이 「恩山別神大旗」라 하여 旗名을 쓰기도 하지면 德源 赤田洞祭와 같이 「山川城隍之神位」라 하여 위패를 쓰고 있기도 하고 靑松 眞寶里 神旗에서와 같이 神像이 그려져 있는 것이 있기도 하며 서울 明德堂 서낭기와 같이 龍을 그린 것이 있는가 하면 제주도 큰 굿에 쓰이느 기매의 「큰대」와 같이 기폭에 그리지 않고 용태를 직접 만들어 단 것도 있다. 기폭에 그려진 내용은 같지만 겉모습은 모두 다르게 되어 있는데 비슷한 것을 맞추어가다 보면 후자와 전자는 같은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서낭대(신대 : 신간)와 서낭(신기)는 같은 것이고 서낭대의 생목기와 같은 원모습이 용상이나 인상을 그리는 경우도 있으므로 용형을 만들어 달 수도 있다면 나아가서 호형이나 인형또는 거북이, 주지와 같은 형상을 대에 달아 신대로 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고 이것들을 대에 달지 않고 물형을 만들어 들고 다니거나 탈을 만들어서 쓰고다니며 신대의 기능을 갖게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신대의 경우와 같이 非具象的인 모습일 때와 달리 神대가 具象的인 형태를 가질 때에는 具象化된 神像이 주는 실물의 기능에 따라 신화적인 演戱를 유발시키는 동기가 될 수 있다. 濟州 立春굿을 예로 들어 따져보면 木牛는 쟁기를 따르게 했고 쟁기가 있으니 쟁기를 끄는 화자를 따르게 했고 농부가 밭을 가니 오곡을 뿌리는 難者가 딸리기 마련이고 오곡이 자라니 이를 쪼는 色鳥가 딸리기 마련이며 색조는 또 獵夫를 불러들이게 마련이다.

神像은 人像이나 龍像이나 龜像이나 虎像이나 獅子像이나 牛像으로 그것은 신의 다면성에 따라 얼마든지 변신하여 여러 모습으로 구상화 되겠으나 일단 구상화되면 신상이 주는 의미는 고정된다고 하겠다. 우상이 되면 경작을 하여 풍년을 연출하지만 호상이나 獅子像으로 구상화되면 맹렬히 투쟁하여 주지 춤의 경우와 같이 잡귀를 붸는 쪼긍로 연행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눈에 풍요를 낳는 것으로 비쳐진 마을굿의 우상을, 풍요를 비는 집굿인 재수굿에 불러들이것으로 보인다. 다른 고장 소놀이굿이 마을굿에서도 연행되어 온 것으로 봐서 양주 소놀이굿도 그 뿌리는 마을굿에서 놀던 소놀이에 있다고 보고 싶다.

3. 양주 재수굿

양주 재수굿은 1983년 1월24일, 25일 양일간에 걸쳐 경기도 양주군 맥석면 방성리 446에 사는 김인기씨택에서 했다. 김인기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0호 양주소놀이굿 보유자이다. 문예진흥원에서 양주소놀이굿을 VTR로 녹화하기 위하여 보유자와 이수자 및 전수생들이 양주 소놀이굿을 공연하도록 하였던 바 그 때 김인기씨가 자기집 단골무당을 불러 재수굿을 제대로 벌인 것이다.

金仁起 氏宅 단골무당은 梁達順(여 49 甲戌)으로 京畿道 坡州에서 출생했고 지금은 양주군 백석면 오산리에 살고 있다. 어려서 6. 25통에 부모를 여의고 19세에 파주에서 印氏와 결혼했으나 이윽고 無病을 앓아 27세에는 드디어 시집으로부터 소박을 맞았다 한다 4.5년 앓다가 밤낮으로 기도하는 중에 죽은 부모를 상봉하기도 하고 신령님도 보이고 하다가 제정신을 잃어, 27세때에는 3개월간 淸凉里 腦病院에 입원하였다가 3개월 뒤에 병원을 탈출 하였다 한다. 병원에서 탈출하여 정신없이 가서 무덤밑에서 방울, 부채, 점상, 작두 등 무구를 캐어 치마폭에 담고 내려오는데 이웃사람들이 4개월 전에 죽은 유명한 洪氏무당의 집으로 인도하였다 한다. 巫具를 치마에 안고 홍씨집에 갔더니 홍씨 아들 며느리들이 맞아들였다 한다. 양달순은 죽은 홍씨를 신어머니로 삼고 홍씨 장자와 3년간 같이 살았다하며 학습은 귀동냥으로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助巫 朴英男(여 62 辛酉)은 서울 삼청동에서 출생했고 21세때 양주로 시집와서 지금도 양주군 백석면 방성리 고능말에 살고 있다. 고모가 전래 이어세 집에서 무당이 있었다. 37세 때 신이 내리고 꿈에 선몽하고 몸이 아프고 하여 유명한 무당홍씨에게 배웠다 한다. 홍씨는 지금 살았으면 80세쯤 된다고 한다.

助巫 김점동(여 60)은 양주군 회천면 토양리에서 낳았고 친정어머니가 무당이었다 한다. 지금은 의정부시 4동에 산다. 16세때 회천면 울정리로 시집을 갔으나 37세 때 운천으로 이사를 갔고 앉은뱅이 병이 걸려 병원에 1개월간 입원을 한 적이 있었고 45세 때 신이 내려 친정 어머니 고씨가 내림굿을 하고 작고 했다 한다. 원 신어머니에게 3년간 학습했고 유명한 무당 홍씨 밑에서도 배웠다고 한다. 그동안 동두천 만신들과 함께 일을 하였고 의정부로 이사와서는 의정부 만신들과 일한다고 한다. 세무당들의 출신지 학습지 및 활동지를 보면 모두 경기도 양주군과 그 인접지역인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이번 벌인 재수굿도 양주지방 무속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굿을 벌이기 전에 주무 양달순에게 물으니 먼저 마당에서 30여분가 행추물림으로 도당상산, 군웅, 신장, 신장대감을 놀고 쉰 다음 30분간 부정을 치는데 초가망과 같이 논다고 했다. 다음에는 30여분간 본향과 조상을 놀고 쉬고 나서 1시간가량 상산거리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잠깐 쉬었다가 30분간 안당불사와 칠성불사를 같이 놀고 나서 1시간 가량 제석을 놀고 이어서 3시간 정도 소놀이를 논다고 하였다. 쉬고 나서 2.30분간 성주를 놀고 쉬었다가 1시간가량 창부를 놀고 쉬었다가 20여분간 걸림을 놀고 쉬었다가 20연분간 지신을 놀고 쉬었다가 20여분간 지신업을 놀고 끝에 1시간 가량 매인(뒤전)을 논다고 말하였다. 실제 굿에서 본 것은 다음과 같았다.

맨 먼저 행추물림을 했다. 바깥마당에 행추물림상 겸 부정상을 차려 놓았다. 상에는 떡 두 그릇, 과일 두 접시, 과자 두부 무나물 각각 한 그릇씩 차렸다. 굿상 한편에는 韓紙로 접은 「서낭길지」를 올려 놓았다. 서낭길지는 종이를 모가 나게 긴 세모꼴로 세 번 접어 가위로 밑변을 원추형으로 자르고 끝을 돌려 내고 펴서 은행나무 잎모양으로 만든 것 이었다.

무당 梁達順은 활옷을 입고 손에 부채 방울을 들고 행추물림상 앞에 서 있고 조무 박영남은 장고를 앞에 놓고 굿상 옆에 앉아 있다. 조무 김점동이 바라를 들고 앉아있고 그 옆에는 樂士 高熙貞이 호적을 들고 앉아 있다. 고희정은 호적 해금 및 피리악사이며 양주소놀이굿 악사보유자로 본문 保有者와 傳受生 조에 나온다. 먼저 무당이 굿거리장단에 사방으로 발을 떼어 잠깐 추었다. 고희정은 胡笛을 불고 조무들은 장단을 쳤다. 춤을 추고 나서 만수받이를 했다. 만수받이 무가는 좀 빠른 장단이나 허튼타령장단에 맞으며 선율은 경토리이었다. 주좌가 한 장단의 좌가를 메기고 나서 방울을 흔들면 조좌는 장고를 치며 한 장단을 그대로 받았다. 이렇게 만수받이를 잠깐하고 나서 춤을 추었는데 굿거리장단으로 시작하여 덩덕궁장단으로 몰아 갔다. 고희정은 좌가의 반주에 해금을 켰고 춤의 반주에는 호관을 불었다. 무당은 당악 장단에 모듬춤을 추며 신내림을 했다. 손에 서낭길지를 들고 추었다. 다시 굿거리 장단에 춤을 추며 술을 들어 사방에 뿌리고 춤을 추다가 공수를 준다. 이때 무당은 말 한마디하고 나서 방울을 흔들고 장고 잽이는 장고 굿거리 장단을 치며 공수에 바라지하고 그빡의 악기는 쉬었다. 다시 당악춤 추고 공수주기를 여러번 반복했다. 주인댁이 무당 옆에 서서 손을 비비고 굽신거리며 무당의 공수에 응하고 있었다. 무당은 부채 방울 서낭길지를 든채 굿거리장단 타령무가를 부르며 복을 가득 담아 며느리에게 퍼주는 시늉을 했다 무당은 공수를 주인굿상에서 음식을 조금 떼어서 사방에 던지며 수부치고 나서 공수 주고 북어를 들고 당악장단에 춤을 잠깐 추고 북어 든채로 공수를 주고 이렇게 춤과 공수를 반복하다가 춤추며 쾌자를 벗어 주인댁에게 주고 술잔을 들고 공수주고 수비친다. 장고를 몰아쳐 무당이 행추물림을 마치면 주무와 조무가 악사들은 일어서서 느린 굿거리 장단을 치며 집안으로 열지어 들어간다. 무당과 악사들은 집안으로 들어와 주인댁 대청마루에 차린 굿상에 절을 한다. 행추물림이란 이 도당에 신사드리니 본향에서 받으시라고 사드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인댁 대청마루에는 왼편에서부터 조상상과 장군님산상, 불사상 이렇게 큰상을 세 개 차려놨다. 조상상에는 안에 큰 떡시루가 4개 놓여 있고 각 시루마다 우끼를 덮었다. 가운데 줄에는 빈대떡, 두부, 잔3개, 제육접시가 있고 바깥줄에는 과일과 과자 접시들이 늘어있다. 가운데에 촛불을 켜놓았다. 조상상 밖에는 터주시루와 군웅대감시루가 놓여 있다. 장군산상에는 안줄에 산시루라 하여 백설기 시루가 있고 「성주시루」라 하여 큰 떡시루가 놓여 있고 시루 안에는 대주 밥그릇에 백미를 가득 담고 대주 수저를 꽂고 무명실타래를 두 개 걸쳐 놓고 술잔을 2개 놓고 무나물을 한 그릇 놓고 양편에 북어 두 마리를 꽂아 놓았다 성주시루 오른편에는 「삼산거리떡」이라 하여 밥그릇 3개에 각각 떡을 얹어 놓았다. 가운데줄에는 빈대떡, 튀김, 술잔 3개, 두부, 무채, 제육, 튀각, 대신덕 접시가 놓여 있다. 바깥줄에는 과일과 과자 접시가 놓여 있고 바깥쪽 상끝에는 대산칼 소지종이 산종이 까망종이를 郸어 놓았다. 불사상에는 안쪽줄 왼편부터 명실시루, 불사시루, 제석시루가 각각 백설기로 놓여 있는데 명실시루에는 밥그릇에 쌀을 담아 郸어 놓았고 제석시루에는 고깔을 조그맣게 접어 얹어 놓고 두부접시가 놓여있고 한편에는 제석부채가 놓여 있다. 가운데줄에는 왼편에서부터 튀가, 빈대떡, 무나물, 두부, 과자 접시가 놓여 있고 바깥줄에는 과일과 좌자 접시가 놓여 있고 바깥줄에는 과일과 과자 접시들이 늘어서 있다. 제석상 오른편 마루에는 마부시루라 하여 큰 떡시루가 놓여 있는데 북어 한 마리와 제육접시가 얹어 있다. 안마당에는 부정상이 차려져 있다. 떡 접시 2개, 술잔 1개 두부접시, 무나물접시 과일접시 과자접시가 얹어 있다.

본굿은 앉은부정이라 하여 앉은 청배부터 한다.

부정청배는 골고루 청해들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무당이 평복으로 장고를 앞에 놓고 굿청에 비껴 앉고 바라치는 무당과 피리잽이가 옆에 둘러 앉아 있다. 먼저 느린굿거리장단을 청배삼현과 같이 잠깐 연주하다가 무당이 장고를 손수 치며 엇모리형 부정장단(청배장단)에 경토리로 청배무가를 길게 부른다. 무당이 청배무가를 부를 동안에는 다른 악기의 반주는 없다. 무당은 청배무가를 그치고「덩-, 다다, 궁다, 궁-」하고 당악장단을 치고 피리잽이는 당악을 분다. 무당이 도드리장단을 치면 피리잽이는 반염불을 치고 기대(조무)는 잿물 그릇과 청수 그릇을 들고 굿상 앞에 가서 사방에 두르고 밖에 내버린다. 그동안에 음악은 도드리장단에 반염 불치고 허튼타령을 거쳐 당악으로 넘어 간다. 무당은 당악을 그치고 부정노래가락을 부르고 피리잽이는 수성질하며 기대는 소지종이에 불을 붙여 굿청사방에 두르고 나서 공중들고 태운다. 무당과 잽이는 잠깐 당악을 치다가 공락으로 반염불로 시작하여 당악으로 잠깐 몰고 나아간다. 무당은 앉아서 장고를 치며 노래가락을 부르는 가운데 기대는 청수 3그릇을 새로 각 굿상에 올렸고 주인내외는 굿상에 절하였다.

불사맞이는 바로 이어서 들어갔는데 또한 무당은 양달순이 맡았고 장고는 박영남이 잡았고 피리는 고희정이 잡았고 바라는 김점동이 쳤다. 무당은 홍치마를 입었고 흰장삼을 입고 가사(홍띠)를 걸치고 남띠를 허리에 매었고 머리에 고깔을 쓰고 손에 흰 부채와 방울을 들었다. 무당은 굿상 앞에 서서 방울을 흔들며 굿거리장단에 사방으로 발을 띠며 춤을 추었고 이어서 방울을 장단 사이로 흔들며 길게 만수받이를 장고잽이와 주고 받았고 이어서 굿거리 춤을 추다 당악장단으로 잠깐 몰고 공수를 준다. 바라잽이가 나와서 간간히 바라를 치며 공수를 받았다. 무당은 공수를 마치고 부채와 방울을 놓고 오방기를 손에 들고 휘저으며 허튼타령장단에 「호-홋어-」하고 소리 지르며 춤을 추었다. 무당은 다시 공수를 주고 안주인이 공수를 받았다. 무당은 굿거리장단에 오방기를 들고 발림춤을 추며 불사신장타령좌가를 불렀다. 무당은 오방기를 놓고 장삼을 벗고 고깔을 벗고 부채와 방울 들고 당악장단에 불사 대감춤을 추었고 공수와 춤을 반복하며 불사를 놀았다.

본향은 이어서 들어갔는데 대신할머니와 조상굿을 함께 논다고 하였다. 무당은 박영남이 내었고 장고는 양달순이 잡았고 바라는 김점동이 잡았고 피리는 고희정이 불었다. 무당은 홍치마를 입고(남치마를 입어도 된다고 한다)「대신할머니 몽두리」라 하여 누른 몽두리를 여러개 입고 녹색에 홍소매 달린 섭수를 입은 채로 굿당 앞에 따로 차린 「본향산신상」앞에 서있다. 본향산신상은 가운데 돼지머리를 놓았고 과일접시 2개, 술잔3개를 올려놓고 향로와 촛대와 오방기를 올려 놓았고 상 곁에는 말(斗)에 쌀을 가뜩 담아 놓았다. 무당은 집이들의 굿거리 반주로 신칼을 거꾸로 들고 굿청을 두르고 나서 홍천익을 입고 머리에 빗갓(朱笠)을 쓰고 손에 방울과 부채를 들고 춤을 잠깐 추다가 사방에 절을 하고 몸을 흔들어 신을 내리니 잽이들이 당악을 친다. 무당은 당악장단에 띠고 몸을 흔들며 춤추고 신을 내리다가 굿거리 장단에 잠깐 춤을 추고 부채와 방울을 놓고 삼지창과 장군칼을 양손에 갈라 쥐고 춤을 추다가 당악 춤을 잠깐 추고 나서 삼지창과 장군칼을 든채 공수를 주었다. 안주인이 공수를 받았다.

허튼타령으로 춤을 추고 다시 공수를 주고 자진허튼타령장단에 오방기를 들고 춤을 추다가 오방기를 놓고 홍천익과 빗갓을 벗고 남쾌자를 두 개 껴 입고 남전대를 띠고 머리에 전등을 쓰고 부채를 펴 양손에 들고 안주인에게 복 퍼주는 시늉을 한다. 늦은 타령형으로 치는 거상장단에 오방기와 장군칼을 들고 춤을 추면 주인이 돈을 준다. 무당은 삼지창과 장군칼을 쌀 담긴 말에 꽂고 양손으로 오방기를 들고 주인에게 복 주는 시늉을 하고 당악장단에 모듬춤을 추다가 공수를 주고 다시 당악춤을 추며 쾌자와 전립을 벗어 주인에게 주고 몽두리 차림으로 타령장단에 춤을 추다가 「산 맞어 모셔 놓는다」하여 신장칼을 본향상에 놓고 세워 사슬을 서고 나서 돼지머리를 삼지창에 꿰어 세워 북어를 얹어 사슬을 선다. 사슬이 서면 조무가 청수 그릇으로 사슬 선 위를 두르고 무당은 사슬을 쓰러뜨려 치우고 당악장단에 잠깐 춤추고 양손에 본향 종이를 들고 공수를 주고 양손에 든 본향종이를 놓고 부채와 방울을 들고 당악장단에 춤을 추고 주인과 장자에게 잔주고 또 잔을 들고 축원하다 땅에 뿌리고 당악춤을 추다가 바로 조상굿으로 들어가 공수를 주고 몽두리를 벗고 섭수를 입고 부채 방울을 들고 당악장단에 춤을 추고나서 공수를 준다. 이때 조무는 본향상을 치우고 돼지머리는 작은상 위에 올려 놓는다. 무당은 당악춤과 공수를 여러번 번갈라 하다가 노래가락 무가를 부르고 당악장단에 춤을 추다가 섭수와 홍치마를 벗고 춤추고 사방에 절하고 마친다.

산거리에서 무당은 김점동이 맡아 했고 장고는 김봉순이 쳤고 (김봉순은 전수생으로 다음 전수생조에 나온다) 바라는 박영남이 쳤고 피리는 고희정이 불었다. 굿당 앞에는 상에 떡시루를 얹고, 북어 한 마리를 얹어 놓고, 술잔을 놓고 대감상을 차려 놓았다. 무당은 남치마를 입고 신장동달이를 입고 남쾌자를 걸치고 남천익을 입고 홍띠를 띠고 맨머리 차림으로 양손에 빗갓을 바쳐 들고 서서 거상장단에 사방으로 발띠며 거상춤을 추었다. 업디어 절하고 머리에 빗갓을 쓰고 양손에 삼지창과 신장칼을 들고 춤을 추다 당악장단에 모듬춤을 추고 춤을 그치고 삼지창과 장군칼로 옆구리를 찍고 서서 공수를 주고 나서 당악춤 추고 공수를 준다. 잽이들이 허튼가락(허튼타령)을 연주하면 무당은 천익을 벗고 별상의대라 하여 갑옷을 입고 전립을 머리에 쓰고 손에 한손에 삼지창을 들고 한 손에 부채를 들고 춤춘다. 당악춤과 공수를 잠깐 잠깐 여러번 반복하고 끝에는 당악장단에 춤을 추며 부채와 갑옷자락을 잡고 주인에게 복주는 시늉을 하고 잽이가 허튼타령을 연주하면 무당은 신장칼을 상위에 세워사슬을 선다. 또 사발을 땅에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삼지창에 작은 시루를 꽂아 세워 사슬을 세우고 사슬 선채로 무당은 노래가락을 부른다. 무당은 사슬을 치우고 당악장단에 춤을 추고 허튼타령 장단에 달아 놓고 삼지창에 돼지머리를 꽂아 사슬을 세운다 산거리(상산거리)하고 조금 쉬었다가 신장대감 본향대감, 마두대감을 논다 했다. 무당은 양달순이 맡았고 장고는 박영남이 잡았고 바라는 김점동이 쳤고 피리는 고희정이 불었다.

무당은 홍치마를 둘렀고 푸른 바탕에 붉은 소매가 달린 신장등달이를 입고 그위에 감군복을 입고 홍띠를 띠고 한손에 오방기를 들었고 또 한손에는 부채를 들었다. 무당은 느진굿거리형 거상장단에 사방을 밟으며 춤을 추다가 당악장단으로 몰아 춤춘다. 잽이들이 타령을 치면 무당은 공수를 주고 안주인은 공수를 받는다.

무당은 오방기를 들고 춤추며 굿거리 장단에 경토리로 타령무가를 부르고 안주인에게 복주는 시늉을 하고 안주인은 받는 시늉을 했다. 무당은 공수를 주고 오방기를 들고 춤추고 부채와 명태를 들고 춤추고 공수를 주고 굿거리 장단에 경토리로 타령무가를 부르고 공수를 주고 당악장단에 춤을 추며 주인에게 복잔을 주고 나서 굿거리장단에 타령좌가를 부르면 구경꾼들에게 명잔과 복잔을 팔고 나서 당악장단에 부채와 북어를 들고 춤을 추고 공수를 주고 당악장단에 춤추며 남띠를 풀어 들고 춤추다가 굿상에 절하고 마친다.

제석굿을 안방에서 한다해서 안당제석이라 했다. 안방에는 백설기떡시루, 쌀말, 청수, 쌀그릇, 통밤접시, 대추접시로 제석상을 차려 놓았다. 쌀말에는 쌀을 가득 담고 식기에 쌀을 담아 수저 꽂고 실타래 얹어서 말 위에 얹어 놓고 쌀그릇에는 초를 여러개 꽂아 불을 켜 놓았다. 무당은 양달순이 내고 장고는 박영남이 잡았으며 바라는 김점동이 치고 피리는 고희정이 불었다. 무당은 흰장삼을 입고 가사를 걸치고 흰부채와 방울을 들고 대청마루에 차린 굿장 앞에서 타령으로 치는 거상장단에 사방을 돌아 밟으며 춤을 추고 당악장단으로 모아 춤추며 신을 내리고 부채와 방울을 놓고 타령 장단에 춤을 추다가 다시 부채 방울을 들고 만수받이 좌가를 부르고 굿거리장단에 춤을 추다가 부채와 방울을 놓고 바라를 들고 치며 허튼타령장단에 춤을 추다가 안방에 차린 안당제석상에 가서 춤을 추다가 가끔 바라를 치며 타령장단을 달아 놓고 말위에 서서 공수를 주고 낼와서 당악장단에 춤을 추고 다시 공수를 주고 굿거리 장단에 타령무가를 부른다. 제석상에 놓았던 통밤을 들고 소리하다가 안주인 치마에 담아주고 제석상에 놓았던 밤과 대추를 바라에 담아서 들고 구경꾼 사이로 다니며「바라를 사오 바라를 사오」하고 소리하며 나누어 주고 돈을 받는데 바라를 판다고 한다. 무당은 당악장단에 춤추며 바라를 놓고 고깔을 벗고 부채 방울을 들고 춤추다가 부채로 머리를 가리고 공수를 주고 당악춤과 공수를 여러번 되풀이한 다음 노래 가락을 부르고 당악춤을 추고 마친다. 이때 소놀이 굿이 딸리나 다음장에 기술하겠다.

성주는 창부와 함께 논다고 하였다. 큰굿상 앞에 성주상을 따로 차렸다. 한상에는 큰 떡시루를 얹어 놓고 그 위에 주인 식기에 쌀을 가득 담고 촛불을 꽂아 놓고 실을 郸어 놓고 술잔 2개를 얹어 놓았으며 시루 곁에는 그릇에 돼지머리를 담아 놓았다.

성주상 왼편 곁에는 상위에 성주말이라 하여 말에 쌀을 가득 담고 잎달린 솔가지에 종이를 접어 만든 성주대를 꽂았다. 무당은 박영남이 맡았고 장고는 양달순이 잡았으며 바라는 김정동이 잡았고 피리는 김병옥이 불었고 해금은 고희정이 켰다. 김병옥(남 53)은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 사는 이로 늦게 도착하였다. 무당은 홍천익을 입고 갓을 쓰고 손에 부채와 성주종이를 들었다. 무당은 닷모리형 장단으로 무가를 잠깐 부르고 타령형으로 거상장단에 춤을 추다가 당악장단에 춤추고 성주상 앞에 앉아 성주대를 잡고 신을 받고 떨며 일어나서 굿청과 방안 곳곳을 둘러댄다. 무당은 굿거리장단에 신대를 들고 사방을 딛으며 춤을 추고 당악장단에 신대를 쌀말에 다시 꽂고 남쾌자를 들고 춤추고 안주인에게 주고 백장삼을 들고 춤을 추다 안주인에게 주고 징을 들고 치며 춤을 추었다. 이때가 창부로 넘어갔다고 말한다. 무당은 계속 당악장단에 춤을 추며 징을 놓고 양손에 전립을 받쳐들고 춤추다가 갓 위에 전립을 쓰고 술잔을 들고 춤추다가 밖에 나가 땅에 붓는다. 무당은 전립과 쾌자를 벗고 춤을 추다가 안주인에게 주고 삼지창과 부채를 들고 춤을 추다가 음악없이 공수를 준다.

무당은 창부원삼을 입고 굿거리장단에 경토리로 창부타령을 부르며 삼지창에 돼지머리를 꿰어 사슬을 서고 나서, 일어서서 성주신대를 들고 성주노래가락을 부른다. 성주대에 달은 종이를 燒紙하고 나서 성주상에 있던 쌀그릇을 들고 대들보를 향하여 성주에게 쌀을 뿌리고 부채와 북어를 들고 허튼타령으로 춤을 추다가 당악장단에 춤을 추고 공수를 준 다음 손에 부채와 북어를 들고 굿거리장단에 창부타령을 부르고 무당이 당악장단에 북어를 들고 춤을 추면 주인이 북어 입에 돈을 끼워준다. 무당은 북어를 들고 춤을 추다가 주인에게 던져주고 창부옷과 홍치마를 벗어 들고 춤추다가 안주인에게 주고 절하면 잽이들이 음악을 멈춘다. 무당은 악기반주 없이 축원하며 소지한다.

텃주는 대뜰에서 한다. 대뜰에 걸립상과 터주시루를 차린다. 걸립상에는 돼지머리를 그릇에 담고 위에 북어를 얹어 놓았다. 그 옆에는 넓은 그릇에 떡을 켜켜로 쌓아담아 놓고 맨위에는 술잔을 얹어 놓는다. 상에는 그 밖에 무나물 접시와 술잔이 또하나 있다. 걸립상의 왼편에는 「터주시루」라 하여 큰떡시루를 놓았다. 떡 위에 우끼를 덮고 그 위에 북어를 얹어 놓았다.

안마당 가운데는 지신상이 차려져 있다. 상에 떡시루를 얹고 무나물 접시와 술잔과 북어 한 마리가 놓여있다. 무당은 양달순이 맡았고 장고는 박영남이 쳤고 바라는 김점동이 쳤으며 피리는 김병옥이 불었고 해금은 고희정이 켰다. 무당은 남쾌자를 걸치고 맨머리로 양손에 부채와 방울을 갈라 쥐고 대뜰에 서서 장단마다 방울을 흔들며 자진굿거리장단에 만수받이를 하고 굿거리장단에 만수받이를 하고 굿거리장단에 춤을 추고 돼지머리를 들고 당악장단에 춤을 추고 이것을 놓고 명태를 들고 추다가 장고로 타령장단 달아 놓고 공수를 주고 굿거리장단에 경토리로 터주타령무가를 부르고 나서 북어와 부채를 들고 타령장단 달아 놓고 공수를 주고 당악장단에 안주인에게 명태와 부채로 복을 퍼주는 시늉을 하고 터주상 앞에와서 터주상에 있는 북어를 들고 춤을 춘다고 공수를 주고 당악춤을 추고 공수주고 터주상의 떡시루를 들고 당악장단에 춤을 추다가 안주인에게 주고 부채와 북어를 들고 춤을 춘다.

메인은 뒷전을 가리킨다. 양주지방 재수굿의 메인(뒤전)에는 군웅을 모시고 본향대감을 모시고 타령을 하고 서낭을 모시고 혼신 부리고 공수로 마친다고 말하고 있다. 메인에서 무당은 양달순이 맡아 했고 장고는 박영남이 쳤고 바라는 김점동이 쳤고 호적과 해금은 고희정이 연주하였다. 바깥마당에는 메인상(뒤전상)이 차려져 있다. 굿상에는 안쪽에 떡 접시 2개, 촛대2개, 술잔4개, 무나물, 제육, 두부, 과일 접시가 놓여 있고 굿상 오른편에는 밥 국 여러 나물접시로 차린 밥상이 있고 조상 왼편에는 술동이가 놓여 있다. 그 주변에는 쪽박 조소금 따위를 준비해 놓았다. 무당은 남쾌자를 입고 부채와 칼과 신칼을 손에 들고 맨머리 바람으로 굿상 앞에 서서 굿거리장단에 사방을 돌아 밟으며 춤을 추다가 만수받이를 하고 부채와 칼과 북어를 들고 춤을 추다가 칼과 북어를 밖으로 향하여 던지고 나서 공수를 주고 나서 부채와 북어를 들고 서서 메인 타령무가를 부르고 다시 공수를 주고 칼 신칼 북어를 들고 당악장단에 춤을 추고 주인을 굿상 바깥쪽에 앉혀 놓고 매우 빠른 당악장단에 춤추며 주인 머리에 쪽박을 씌우고 베를 들고 털다가 베를 찢어서 등에 얹어주고 북어에 색헝겊을 감고 이것을 칼과 함께 들고 주인 머리 위로 휘젓고 그릇에 조를 담아 주인 머리에 뿌리고 다시 칼로 주인 머리 주위를 휘젓고 칼을 바깥쪽 땅에 던지고 술잔을 들어 뿌리고 국그릇도 들고 뿌리고 소금도 집어 던진다. 무당은 안주인을 칼을 들려 세워 놓고 공수를 주고 밤접시를 들고 당악장단에 춤을 추고 밤접시를 든채 공수를 주고 당악장단에 춤을 추고 춤을 그치고 장님 재담도 하고 총각 재담도 하고 쪽박에 북어를 담고 칼을 들고 당악장단에 춤을 추고 춤을 그치고 장님 재담도 하고 총각 재담도 하고 쪽박에 북어를 담고 칼을 들고 당악장단에 춤을 추고 공수를 주고 당악춤을 추고 공수 주고 나서 당악장단을 매우 빨리 몰아서 달아 놓고 무당은 안주인 앉혀놓고 베를 흔들고 칼과 북어를 밖에 던지고 나서 칼을 주워 들고 안주인을 둘러 가시고 다시 바깥으로 던지고 다시 칼을 집어 들고 메인상의 제물을 바깥쪽으로 던지고 소금을 뿌리른데 장고 치던 조좌는 장고를 치며 축원하고 무당은 모닥불을 피어 놓고 베 헝겊을 불살랐다.

4. 양주 소놀이굿

양주군에서는 백석면과 그 이웃 면에서 대가댁에 큰 신사굿(재수굿)을 하게 되면 「소놀이굿」을 흔히 시키었다 하면 진오귀굿에서는 안했다 한다. 이 고장에서는 흔히 음력 10월 상달에 하고 간혹 동짓달에 하는 수도 있기 때문에 소놀이굿도 10월 상달에 주로 하였다 한다. 양주소놀이굿은 「소놀이굿」「소굿」「쇠굿」「마부타령」으로 불렀다 하며 재수굿에서 제석굿에 이어서 소놀이를 놀았다 한다.

대가댁에서 재수굿을 크게 하면 되면 목청 좋고 소리 잘하고 소리문서 잘 외우는 소놀이 원마부와 곁마부놀이꾼을 사온다고 한다. 마부들은 신명이 좋아서 놀아보자고 하는 것이니 무슨 큰 행하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술대접이나 잘 받고 그날 품삯정도나 주면 된다고 했다. 나머지 놀이꾼들은 그 마을 사람들로 충당한다고 한다. 그 마을에서 재수굿을 크게 벌이려는 이가 있어 소놀이굿을 하고 싶다는 뜻을 비치면 굿과 때를 같이하여 소놀음을 준비하는 데 우선 소탈과 송아지탈 둘을 만든다.

소머리는 고무래로 만든다. 고무래의 머리를 짚으로 가지런히 싸서 가는 새끼로 몇군데 단단히 묶고 양쪽에 나온 짚을 작두로 자른 다음 여기에 귀와 혀와 뿔과 코뚜레를 단다. 귀와 혀는 짚으로 짚심 삼듯 삼되 신총 없이 신창만 삼어 혀모양으로 만들어 달며 뿔은 짚을 여나무개 추리어 절반 꺾어 굵은 새끼를 꼬듯하여 한뼘 길이로 만들어 달고 코뚜레른 향나무 또는 노간주나무 가는 가지를 둥글게 휘어 매어 단다. 귀, 혀, 뿔, 코뚜레를 달면 창호지에 풀을 묻여 귀, 혀, 뿔, 코두레를 빼고 나머지 부분을 모두 발라 짚이 보이지 않게 한다. 창호지가 마르면 먹으로 소눈을 그리고 싸리껍질과 깊으로 굴레를 만들어 코뚜레에 매어 씌우고 굴레에 풍경를 여러개 단다. 코뚜레 위에는 관자를 달어 코등을 덮어 버리 뒤쪽 굴레에 매는데 관자는 가죽을 잘라 만들고 관자에는 짐승털을 각색으로 물감드려 만든 솔상모를 세 개 단다. 굴레와 코뚜레에는 고삐를 다는데 실제 소의 고삐는 밧줄을 쓰지만 소놀이에서 고삐는 무명을 쓴다. 소의 목부분에는 길이 한뼘반쯤 짚을 엮어 단다. 송아지 머리는 어미소 머리와 같이 만들되 코뚜레 뿔 관자 방울 고삐를 달지 않고 귀와 굴레만 단다.

소꼬리는 길이 반발쯤 되는 가벼운 막대기 끝에 짚과 지미털이라는 풀잎으로 댕기 따듯 세가닥으로 길이 반발쯤 따서 끝을 매고 길이 두뼘쯤 끝을 자연상태로 내놓아 꼬리 털과 같이 보이게 만든다.

몸체는 멍석으로 만든다. 멍석을 길이로 절반 접어 밑은 두고 양 옆을 두치 간격으로 가는 새끼로 묶되 앞에는 소의 목이 들어 가게끔 한뼘쯤 남기고 매는데 요새는 앞가슴에 너비 한뼘 길이 네뼘쯤 되게 멍석 엮듯 엮어서 이것을 앞에 대고 매며 뒤쪽에는 위에 한치쯤 남겨 꼬리자루가 들어 가게 하고 두치마다 가는 새끼로 맨다. 놀이꾼들은 바지 저고리 차림으로 하되 짚을 청올치노끈으로 엮은 짚 행전을 세로 한뼘 넘게 가로 두뼘 되게 만들어 다리에 찬다.

어미소에는 놀이꾼 넷이 들어가 노는데 앞쪽부터 소머리, 앞통, 뒤통, 꼬리라 부른다. 소머리 놀이꾼은 고무래 자루를 양손에 들고 이리저리 돌리며 놀되 소머리를 앞으로 숙이면 고무래 자루 끝이 양다리 사이로 들어 가도록 잡는다. 꼬리 놀이꾼은 꼬리를 만들어 단 막대기를 오른손으로 잡고 이것을 어깨에 매고 뒤로하여 이리 저리 돌리며 흔든다.

송아지 탈에는 머리 꼬리 두 놀이꾼이 들어가 논다.

놀이꾼들이 소탈 및 풍물을 준비하고 이웃집 사랑방에 모여 있으며 11시에서 한시 사이에 굿하는 집에서 사람이 와서 소놀이 할 때가 되었다고 알려 주는데 흔히 1시쯤에 소놀이가 벌어진다고 한다.

굿하는 집에서는 안당제석이 끝나면 소놀릴 차비를 하는데 제석상(불사상으로 대신함)을 안마당 쪽으로 차리고 무당은 제석거리 차림대로 흰 장삼에 가사를 띠고 흰 고깔을 쓰고 손에 부채와 방울을 들고 마당쪽을 향하여 서고 잽이들도 안마당쪽으로 향하여 앉아 굿거리를 친다. 창고 옆에는 말에 곡식을 가득 담아 북어 한 마리를 꽂아 놓았다. 통보를 받은 소놀이꾼들은 삼채가락을 치며 열지어서 느긋하게 굿하는 집으로 온다. 굿하는 집에서는 무당들이 굿거리를 걸게 치고 있는데 송아지는 미리 뛰어와서 굿하는 집 안마당에 들어와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장난하다가 뛰어 나간다.

이윽고 놀이패들이 굿하는 집에 당도한다. 상쇠장고잽이 북잽이 징잽이 제금(바라)잽이들이 풍물을 치며 앞장서고 원마부와 곁마부가 남쾌자에 전립을 쓰고 홍띠를 매고 손에 부채를 들고 춤추며 따르고 큰소가 고삐를 잽이고 덩실거리며 따라온다.

집 주위에는 구경꾼들이 백철치듯 한다. 원마부 곁마부는 대문밖에 기다리고 있고 놀이꾼들은 소를 끌고 안마당에 들어와 집안에 대고 인사하고 나가고 만신이 만수받이를 잠깐 부른다. 이때 송아지가 다시 들어와 한바퀴 돌고 나가면 만신이 「소장수」하고 밖을 향하여 큰소리로 부른다. 이 소리를 듣고 대문에 기다리고 있던 원마부가 「야 소장수가 워냐 소장수 서방님이라고 해라」하면 무당이 「소장수 서방님」하고 부르면 원마부가 놀이꾼과 함께 들어오며 「그 누라서 날 찾나」하고 굿거리장단에 경토리로 「날찾아타령」을 부른다. 이 소리의 선율은 창부타령과 똑같다. 이소리의 사설은 판소리 수궁가에도 보이고 경기남부 대동굿의 뒷전에도 보이나 토리가 다르게 되어 있다. 이렇게 원마부는 무당과 재담을 주고 받으며 갖가지 소리를 부르는데 음악은 한결같이 굿거리장단에 경토리로 창부타령과 같은 곡조이다. 김인기가 부른 것은 각색 마부를 들먹이는 「창부타령」마부가 충청도 내포에서 온갖 곳을 거쳐 들어 왔다는 「마부 노정기」영도사 절을 비롯하여 온갖 절을 주서 섬기는 「절타령」,주인맥명당 산세와 가장집물을 들먹이는 「명당풀이」, 온갖 빛깔을 들먹이는 「빛타령」, 온같 뿔과 발음이 비슷한 불까지 주서 섬기는 「뿔타령」, 귀자 붙은 말을 주서섬기는 「귀자타령」, 고리눈이라하여「고리」자 붙은 말과 눈자 붙은 말을 주서섬기는 「눈타령」,온갖 코를 들먹이느 「코타령」,입 그리고 입과 발음이 비슷한 잎을 들먹이는 「입타령」,혀와 발음이 비슷한 온갖 쇠(鐵)를 들먹이는 「혀타령」, 이(齒)와 그리고 그 비스한 발음을 들먹이는 「이빨타령」, 온갖 다리(足)와 그 비슷한 발음인 다리(橋)를 들먹이는 「다리타령」, 발굽과 굽자가 붙는 말을 주서섬기는 「꼬리타령」, 굴레의 온갖 치장을 그리는 「굴레치장」, 온갖 질마의 치장을 그리는 「질마치장」, 온갖 마부의 치장을 주서 섬기는 「마부치장」, 천자문을 차례로 풀이하는「천자풀이」, 마부 마누라의 온갖 치장을 주서 섬기는 「마부마누라 치장」, 온갖 벼와 조와 콩 그 밖에 온갖 곡식의 종자를 주서 섬기는 「종자타령」, 말뚝에 쓰이는 갖가지 나무를 들먹이는 「나무타령」, 성주하는 내력과 온갖 가장집물을 주서 섬기는 「성주풀이」를 부른다.

양주 소놀이 조사보고서 에는 이밖에도 「과거풀이」「축원덕담」「살풀이」가 있으나 김인기는 부르지 않고 있다. 그에게 물으니 문서에는 있으나 자기는 부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소놀이굿의 타령의 내용은 소의 각부분 치장에 관한 것과 주인집의 덕담이다. 끝에는 소를 파는 재담이 따른다.

5. 보유자와 전수생

한국가면극에 보면 양주에 사는 소놀이굿 보유로 우용진 고관성 오복삼 조만봉 전춘성이 보이고 있으나 이들은 이미 작고하였다. 우용진 고관성 오복삼 전춘성이 모두 팽수천에게 배웠고 조만봉이 우용진에게 배웠다하고 현재 보유자 김인기도 우용진에게 배웠다 하니 양주 소놀이굿은 모두 팽수천에게서 울어 나온 것이라 하겠다.

김인기에 의하면 양주에서도 백석면이 소놀이를 세게 했는데 옛날에는 백석면 만성리 고능말에 살았던 정육남과 방성 4리 살았던 우덕민이 마부노릇을 잘 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지금 살았으면 모두 90여세쯤 되었을 것이라 한다. 이들의 뒤를 이어 백석면 오산리 단촌에 살던 우용진(1904년생, 작고)이 원마부를 했고 우용진 제자이며 경적면 주납리 능안말 살았던 조만봉(1909년생, 작고)이 곁마부로 놀다가 우용진이 죽은 뒤에는 조만봉이 원마부 노릇을 했고 김인기가 곁마부를 했는데 조만봉이 죽은 뒤로는 김인기 혼자 남아서 곁마부도 없이 놀다가 세월이 흘러 소굿놀이도 시들어져 그동안 않고 뚝 떼었다하며 양주소놀이굿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김인기가 보유자로 인정되면서 소리와 재담을 다시 찾아서 놀고 있다고 한다.

양주소놀이굿은 1980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김인기가 보유자로 인정되었고 고희정이 악사로 인정되었다. 보유자 김인기는 1914년생으로 백석면 방성리에 살며 10대에 우용진에게 소놀이굿을 배웠고 우용진 조만봉 등 선배들을 따라다니면서 소놀음을 놀았다 한다. 1980년에 보유자로 인정된 뒤에 윤향순, 김남강, 신성남, 어윤관을 전수생으로 기르고 있다.

악사 고희정은 1921년생으로 양주군 남면에 살며 농사를 짓고 있다. 17세때 김완선에게 피리를 배웠는데 당시에 배운 것이 창부타령, 도드리, 굿거리 등 삼현육각을 배웠다 한다. 20여년 전에 양주별산대놀이 악사 전수생이 되었으나 1980년에 양주 소놀이 악사로 인정되었다.

어윤관은 1980년에 「날 찾아타령」에서부터 「꼬리타령」까지 배웠고 1983년에 전수생이 된 뒤에는 마부타령까지 배웠다 한다. 지금 곁마부 노릇을 하고 있다.

김봉순(여 1936년)은 35세때부터 조만봉과 김인기에게 소놀음의 무당 노릇을 배웠다. 37세때 조만봉, 김인기와 함께 청주에서 벌였던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연하여 무당 노릇을 한 뒤에 지금까지 소놀이굿 공연에 무당 노릇을 하고 있다. 1982년에 전수생으로 인정되었다.

김남강(남 1957년)은 김인기의 아들이며 어려서부터 아버지 김인기에게 소놀음을 배워 지금 다리타령까지 배웠다 한다. 1981년에 전수생으로 인정되었으며 지금 공연에는 송아지 노릇을 한다.

신성남(남 1956년)은 1981년부터 김인기에게 소놀음을 배워 귀타령까지 배웠고 1982년에 전수생이 된 뒤에 꼬리타령까지 배웠다 한다. 지금 소놀음에서 소머리노릇을 하고 있다.

윤향순(여 1957)은 양주별산대놀이 전수생으로 있다가 1982년 양주소놀이굿 전수생이 된 뒤부터 만신 노릇을 배우고 있다.

양주소놀이굿은 본디 갖고 있던 기능은 잃었을지라도 1년에 한번씩 벌이는 발표공연과 중요무형문화재 마당종목 발표공연과 같은 민속공연에 출연함으로 해서 그런대로 전승의 길이 열리고 있으나 아직 전수자가 없어서 보유자가 유고시에는 전승이 어려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