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原 三童 굿놀이
정병호 / 중앙대학교 교수
「삼동굿놀이」는 전라북도 남원군 보절면 괴양리에서 매년 백중날에 행한 놀이이다.
괴양리(槐陽里)의 백중(百中)놀이는 「기(旗)절받기」와 「합(合)굿」,「당산제(堂山祭)」, 「샘굿」,「삼동굿놀이」가 있으며 또 「마당 밟기」와 「판 굿」등을 하게 되는데 이 중에서 「삼동굿놀이」는 괴양리에서만 전승되고 있는 특유의 놀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지난 83년 8월 23일 백중날, 남원군 문화공보실장 이홍직씨와 보절면(拱節面)의 지성 이기승씨의 안내를 받아 삼동굿놀이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괴양리는 남원에서 동북방으로 12㎞ 지점에 위치하며 동으로 약산, 서로는 계룡산이 남북으로 뻗어있다.
계룡산은 그 형태가 닭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산밑에 장태봉과 회산천(回山川)이 만나는 곳에 대명당(大明堂)이 있어 삼정승이 난다고 전래되어 있다.
그리고 마을 앞산인 약산은 그 형태가 날이 길게 뻗어 있어 마치 지네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이 날(脈)을 진등 (蜈) 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날은 앞서 말한 계룡산의 닭과 명당 자리를 향하고 있으므로 풍수지리적인 해석으로는 이를 지네가 닭을 해치려고 공격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서 이 마을 사람들은 그 닭(씨)과 명당을 지키기 위해 일년에 한번씩 삼성(三姓)의 동자(닭의 알)로 하여금 지네를 밟아주는 풍속이 생겨났다 한다.
그러나 현대의 삼동굿놀이는 삼성의 동자가 행한 것이 아니라 괴양리 양촌 마을과 음촌 마을, 그리고 개신 마을 등 세 마을에서 선출된 삼동자가 음력 7월 15일(백중날) 마을 사람들이 전원 참가하는 가운데 지네를 밟아 마을의 무사와 풍년을 축원하는 이른바 공동체적 두레놀이(大同놀이)로 그 성격을 뚜렷이 하고있다.
그런데 「삼동굿놀이」에 나타난 형태를 보면 그 형식이 농악에서 행한 「무등타기」(삼동고리)와 「기와 밟기」(잡귀를 땅으로 묻어버린다는 뜻을 가진 놀이) 등과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삼동굿놀이는 근원이 축귀적(逐鬼的) 신앙성을 가졌으며 남자의 「농악」과 여자의 「강강술래」, 내지는 「기와 밟기」와 같은 놀이 등이 원류가 되어있다 할 수 있다.
「삼동」의 「삼」이라는 숫자는 단군신화인 「삼신(三神)」,「산신(山神)」 「세성(姓)밭이설(說)」(제주의 고(高), 부(夫), 양(梁) 등의 氏祖) 의「삼동」또는 세 마을의 「삼동(三洞)」또는 「삼동(三童)」, 농악의「삼동고리」(사람들이 三層이 되어 노는 놀이)등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이 마을에서 행한 「삼동굿놀이」는「매(埋)굿」을 비롯하여 한국적 전설과 설화, 풍수지리적 신앙체계를 근간으로 하여 이것들이 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습합되어 조화를 이루고 이 마을 나름대로 특이한 歌舞劇的 놀이가 된 것이다.
(1)
백중날을 며칠 앞두고 각 마을의 어른들은 삼동굿놀이에 참여할 건강하고 현명한 남아(男兒)를 선출하여 領住(회장)과 執事(총무)는 놀이의 준비와 시행방법 등을 상쇠(농악의 지휘자)와 의논하고 이것을 각 마을 농악단에 알린다.
백중날 아침 양촌, 음촌, 개신 등 세 개 마을 농악단은 각기 마을 앞 광장에 모여서 「판 굿」을 치고 있으면 큰 마을 양촌에서 나팔수가 나팔 신호를 3초간 분다. 그러면 양촌 마을에서는 용기(龍旗)와 영기(令旗)를 앞세우고, 음촌과 개신 마을에서는 농기(農旗)와 영기(令旗)를 앞세우는 가운데 동네 어른들과 농악단 그리고 부녀자들 순으로 「질굿」을 치면서 온 마을 사람들은 흥겹게 춤추면서 길놀이를 하고 양촌 마을에서 가까운 광장(삼거리)으로 모이게 된다.
광장에 모이게 되면 음촌과 개신 마을의 농기들은 양촌 마을의 큰 기(용기)에 정중히 절(큰 기를 향해 기 끝을 밑으로 숙여 절을 하는 행용을 한다)을 세 번을 하며, 마을 사람들도 같이 절을 한다. 그러면 큰 기는 기 방울을 울리며 좌우전후로 기를 흔들고 답례를 하며 양촌 마을 대표는 선사품으로 깃봉으로 사용한 장목(꿩털)을 두 마을 농기에 주고 의리를 다짐한다. 이 때 사람들은 함성을 올려 협화(協和)의 정을 나누고 이어서 양촌 마을 농악단의 상쇠가 지휘하여 삼개(三個)마을 농악이 합동하는 이른바 「합(合)굿」을 하여 당산을 향해 행진을 하게 된다.
(2)
농악단과 괴양리 三個마을 사람들은 양촌 마을 당산(괴하나무)으로 모여 유교식으로 당산제를 지낸다.
농악단은 당산 주변을 돌다가 당산을 향해 서고 제주(祭主)와 축관(祝官)(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 등 네 사람에 의해 제사를 지내게 된다.
제관은 분향제배하고 강신초헌(降神初獻)을 올리고 축문을 독축한다.
축문낭독이 끝나면 일제히 제배를 하고 제사를 마친다. 그리고 「대포수(大砲手)」(농악단의 배역)는 「고시레」를 하며 농악단은 쇠를 울려 신나게 「판굿」을 한 바탕 치고 이어서 큰 기에 술상을 차려 술을 대접하며 풍년을 축원한 다음 모두 음복하고 堂山祭가 끝난다.
(3)
당산제를 끝마치고 농악단은 영기를 앞세우고 양촌 마을의 공동 샘으로 행진한다. 우물에 당도하면 늦은 삼채가락을 치다가 자진모리로 몰아치면서 굿 가락을 멈춘다. 농악단은 샘 주변에 서서 일제히 「아따 그물 맛있다. 꿀떡꿀떡 마시고 아들 낳고 딸 낳고 미역국에 밥 먹자」하고 소리치며 다시 삼채굿으로 돌리고 자진모리로 한 바탕 신나게 몰아치고 샘굿을 끝마친다.
(4)
샘굿을 하는 동안 팔자가 좋은 어른이 마을 대밭에 가서 삼동굿놀이에 쓰이는 이른바 신(神)대를 베로 간다. 어른은 튼튼한 대나무 네 그루를 선정하고 대를 베기 전에 간단한 축문을 읽어 내린다. 「오늘 이 나무가 꼭 필요해서 베어가니 자손만대에 복을 많이 주시고 용서하시오」.
이렇게 축문을 읊으면서 산신께 고하고 대나무를 벤다. 그리하여 그 신대를 마을회관 앞 광장으로 운반하여 한 줄로 신대를 세우고 거기에 금줄(不煖을 없애고 아이를 잘 낳게 해달라고 숯, 木花, 고추 등을 달아맨다)을 치고 놀이판을 신성공간으로 만들어 이른바 명당을 상징한다.
농악단은 동서 양편으로 갈라서서 풍류가락을 치며한 마을에서 두 사람씩 선출된 노부들은 상(정화수, 쌀, 미역)을 가지고 입장한다.
금줄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분리하여 한쪽은 부녀들의 비손받이가 위치하고 한쪽은 꽃받이(어린 동자를 받아주는 중동과 동모(童母) 그리고 닭 등의 배역)가 위치하여 비손과 서로 대면하고 삼동굿놀이가 진행된다.
비손들은 손을 비비고 절을 하면서 자기마을 동자의 순산을 기원하는 축문을 읊는다.
「거 사바세계 전라도 남원군 보절면 삼괴정리 일여인이 금당(今堂) 생산지경이 오니 복유 산신제왕님은 여천지(與天地)로 합기덕(合氣德)하시와 여일월(與日月)로 합기광명(合氣光明)하시고 여성조(與聖祖) 선영(先靈)으로 합기수복(合氣壽福)하사 감히 순산시켜 주시옵소서」 한다. 이어서 남자들 세 사람(중동받이)이 스크럼을 짜고 그 위로 산모 역(一人)을 하는 남자가 올라가 동자를 어깨위로 올린다. 이렇게 다섯 사람이 3층이 되어 한 조가 되어 노는데 이러한 편성은 양촌과 음촌 그리고 개신 등 세 마을의 사람들이 각각 조를 구성하여 놀기 때문에 삼동굿놀이라 한다. 그런데 삼동굿놀이는 다음과 같은 절차로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출산과장(出産科場)>
산모 역은 애기를 왼쪽 오른쪽으로 한바퀴 돌리고(이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애기가 노는 행용이다) 이어서 애기를 분만하는 행용을 하기 위해서 사타구니 사이로 애기를 빼 올리므로 애기의 순산을 나타낸다.
농악단은 흥겨운 풍류굿과 자진삼채를 치면서 「야아 -」하고 일제히 함성을 올린다.
<성장과장(成長科場)>
산모 역은 애기의 성장과정을 정성과 사랑으로 상징하기 위해서 젖먹이의 시늉을 하고 이어서 산모 역은 애기의 발을 잡고 등뒤로 넘기면 뒤에 있는 보조원(닭)이 애기를 잡아 일으켜 산모의 어깨위로 올려주는데 이것은 애기가 고난을 극복하여 성장한다는 뜻이 된다.
<입신출세과장(立身出世科場)>
애기들은 손에 쥔 물건을 힘차게 던져버림으로써 厄을 풀고 登科했음을 표현한다. 그러면 농악단은 부드러운 풍류 중에서 자진 삼채, 짝드림 가락으로 들어간다. 상쇠와 부쇠의 쇠가락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두둥 깽깽 두둥 깽깽」하면서 점차 빠른 가락으로 변하고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환성이 울리면서 애기들이 자라서 입신출세하는 상징적 놀이가 시작된다. 즉 산모 역들은 삼동들을 양손으로 들어 머리위로 올리고 좌우로 흔들면서 장하다고 자랑이나 하듯 기쁨의 표현을 하고 이어서 한 애기는 武官이 된다는 뜻으로 군모를 쓰고 한 애기는 과거에 及第하였다는 표시로 꽃을 단 사모관대 모자를 쓰며, 또 한 사람의 동자는 文官이 된다는 뜻으로 갓을 쓰게 된다. 그러면 농악가락이 빠르고 요란한 가운데 환성을 올리면서 삼동굿놀이의 굿판은 난장판을 이루면서 한 바탕 춤판이 벌어진다.
<지네밟기>
삼동굿놀이의 입신출세과장이 끝나고 잠시 난장판을 이루고 춤판이 벌어질 때 세 마을에서 동원된 부녀자들은 한 줄로 서서 앞으로 엎드리고 앞사람의 허리를 쥐어 길게 연결되어 마치 지네가 기어가는 것처럼 S자형으로 걸어서 놀이판을 여기저기 휘젓고 거친 걸음으로 다닌다.
그런데 이러한 행용은 지네가 명당을 침범하는 행위임으로 삼동들(건강한 장원아이)은 이를 격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마을의 무사와 번영을 위해서 지네를 밟아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자들은 과거에 급제한 애기를 선두로 하여 문관, 무관 순으로 뒤편에 있는 부녀자의 등으로 올라가 양쪽에서 보좌한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한발한발 착실하게 부녀자들(지네)의 등을 밟으면서 앞으로 나간다. 그런데 양쪽에서 보좌해준 사람들은 머리에 닭 벼슬 모양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빨강 옷차림으로 머리를 씌웠는데 이는 지네와는 상극인 닭을 상징하는 것이다.
매김소리
삼괴정리 우리동민 지네 밟기를 힘을 쓰세
(후렴)
얼럴럴 지네 밟세 일심으로 지네 밟세
매김소리
삼강오륜 예의촌은 삼괴정이 이아닌가
(후렴)
얼럴럴 지네 밟세 일심으로 지네 밟세
매김소리
삼태화백 계룡산에 영계욕진 대명당은
(후렴)
얼럴럴 지네 밟세 일심으로 지네 밟세
매김소리
삼정승이 나온다고 자고 지금 전해왔네
(후렴)
얼럴럴 지네 밟세 일심으로 지네 밟세
매김소리
삼생구수 저 지네가 삼백육순 욕침하니
(후렴)
얼럴럴 지네 밟세 일심으로 지네 밟세
매김소리
삼동굿을 마련하여 삼동으로 밟아내니
(후렴)
얼럴럴 지네 밟세 일심으로 지네 밟세
매김소리
삼십삼천 도솔천명 저 지네를 반복 시켜
(후렴)
얼럴럴 지네 밟세 일심으로 지네 밟세
매김소리
삼재팔란 세 가지 재앙을 물리치고 삼괴정이가 부흥한다.
(후렴)
얼럴럴 지네 밟세 일심으로 지네 밟세
지네의 隊列은 기고만장한 기세가 점점 약화되는 가운데 삼동들이 지네 앞에 도달하면 농악단의 四物가락이 울려 퍼지고 마을 사람들은 난장판이 되어 즐겁게 춤추고 삼동굿놀이 전 과장이 끝난다.
(5)
삼동굿놀이가 끝나면 그 해에 농사를 잘 지은 집이나 삼동으로 뽑힌 집안에서는 농악단을 초청하여 백중날의 하루를 즐겁게 지내는 행사를 한다.
농사를 잘 지은 사람(농사장원)을 사다리 가마에 태우고 호강을 시켜주는 가운데 농악을 하고 이 집에서는 닭을 잡아 뼈죽을 만들어 주는 동시에 술과 안주를 내놓고 후하게 대접한다.
음식을 먹고 나면 농악단은 정월에 하는 「마당 밟기」를 간략하게 쳐서 답례한다.
농악단은 「대포수」(농악의 배역)가 인도하여 「조리중」과 「각시」 등이 부엌 안으로 들어간다. 주인은 상을 소복이 부어 놓고 거기에 촛불을 밝혀 놓는다. 이리하여 솥뚜껑을 엎어놓고 굿을 친다. 「상쇠」는 쇠소리를 끊고 「대포수」는 「오장신장에 합다리굿 잡귀잡신 몰아내자」라고 외친다. 그리고 나서 자진삼채 가락을 치면서 장독대에 둘러서서 신나게 굿을 치고 농악단은 우물가에 가서 자진삼채 가락을 치며 쇠를 멈춘 다음「아따 그물 맛있다. 꿀떡꿀떡 마시고 아들 낳고 딸 낳고 미역국에 밥 먹자」라고 외친다.
이어서 곡식을 담아 놓은 광으로 가서 「쥐 잡자 쥐 잡자 노적늘에 쥐 잡자 앞노적 뒤노적 내우간에 접노적」이라고 크게 외치며 풍년을 기약하고 마당으로 나와 농악단의 예술적 기량을 보이는 이른바 「판굿」을 하게 된다.
판굿은 먼저 「7채굿」을 친 다음 「호호굿」「풍류굿」「노래굿」「영산잰지래기」「고리진굿」「품앗이 굿」그리고 「구정놀이」(個人놀이)로서 상쇠의 「부포놀이」와 법구잽이들이 하는 「소고춤」「설장고춤」등 점점 놀이판이 열기가 더해지면서 연로한 남녀가 참여하는 가운데 온 마을 사람들의 춤판이 벌어져 난장판을 이룬다.
(6)
삼동굿놀이는 1982년도 保存會(會長 金成凡씨)가 발족되었고 이어서 后援會(會長 金允喆씨)도 결성이 되었으며 삼동굿놀이를 후세에게도 계승하기 위해서 고절국민학교에 농악부를 신설하고 이들로 하여금 전수 받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삼동굿놀이가 지금까지 소멸하지 않고 매년 백중놀이로 이어온 까닭은 놀이가 신앙적 체계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도 있지만 놀이 자체가 흥겹고 재미가 있으며 또한 문화적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삼동굿놀이는 세 마을에서 각각 한 사람씩 선출한 동자를 앞세우고 協和하여 노는 두레洞祭(大同洞祭)라는 점.
둘째 삼동굿놀이에는 아이들을 立身出世시키기까지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는 점.
셋째 삼동굿놀이와 병행하여 시행되는 堂祭는 이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는 점.
넷째 삼동굿놀이는 마을의 번영을 위해 一心團結하여 逐鬼한다는 정신이 밝혀 있다는 점 등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