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 전수실태조사 ⑧

진도씻김굿




이보형 / 문화재전문위원

1. 머리말

굿이 우리 基層文化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 때 굿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을 꺼려하여서 1980년 진도씻김굿이 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기 전에는 강릉단오제니 은산 별신제(別神祭)니 한장군(韓將軍)놀이니 하여「제」나 「놀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지정되고 있었다.

1980년에 진도씻김굿이 제주칠머리당굿과 한 무렵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로는 굿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분야인가 아닌가하는 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웃음거리가 될 만큼 우리 전통문화를 보는 눈도 많이 변하였다고 하겠다. 이제는 여러 가지 굿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있으나 뿌리가 되는 민속문화 환경이 망가지고 있고 굿의 기예를 배우려는 학도(學徒)가 드무니 이것이 굿의 전승에 큰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 진도씻김굿도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조사자는 진도씻김굿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조사에 참가하였고 그밖에 여러 가지 민속조사에서 진도씻김굿을 조사한 바 있다. 또 1983년 2월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음영(音映)자료기록반이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서 벌렸던 진도씻김굿의 현장녹화 작업을 감수한 바 있고 1983년 7월에 문화재관리국 중요무형문화재 사진촬영반이 진도읍 노인당에서 벌렸던 진도씻김굿의 사진촬영 작업을 감수한 바 있어 그때마다 진도씻김굿의 전수 실태를 조사하였고 1984년 11월에는 다시 보유자와 전수생을 직접 만나서 다시 전수 실태를 조사하였다.

지금까지 진도씻김굿의 음악(音樂)·춤 ·의식(儀式)에 관한 것은 더러 보고된 바 있으나 그 연혁과 전수 실태에 관하여 보고된 적이 없다. 조사자는 그 동안에 조사하였던 중요무형문화재 제70호 진도씻김굿의 沿革과 傳授 實態에 관하여 적고 傳承에 따른 문제점을 따져보고자 한다.

2. 진도씻김굿의 沿革

굿에는 집안이 넉넉하고 평안하기를 비는 집 굿(가제(家祭))과 죽은 이의 넋이 저승에 잘 건너가기를 비는 넋 굿(위령제(慰靈祭))과 마을이 넉넉하고 평안하기를 비는 마을 굿(부락제(部落祭))이 있는 바 진도씻김굿은 넋 굿에 속한다. 넋 굿은 고장에 따라 진오귀, 진오귀 새남, 오구굿, 오구 새남, 시왕, 수왕굿, 다리 굿, 망묵, 씻김굿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조상의 넋이 이승에서 떠돌지 않고 저승에 잘 건너가 평안히 지내기를 비는 뜻은 어느 고장이나 한가지이니 넋 굿의 본질은 다름이 없다 하겠다.

진도씻김굿 즉 진도지방의 넋 굿이 언제부터 비롯되었느냐고 따지는 것은 뜻 없는 일이다. 다만 진도라는 고장에서 씻김굿이 보다 흔히 행하여졌고 또 진도씻김굿의 소리와 춤이 다른 고장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이야기가 된다. 진도는 섬이니 뱃사람들이 많았고 따라서 수사자(水死者)가 많았을 것이니 수사자의 넋을 천도하는 씻김굿이 보다 많이 행하여졌을 것이다. 진도사람들은 시 짓고, 그림 그리고, 글씨 쓰고, 춤추고, 소리하는 데 재주가 뛰어나 많은 명인이 나왔던 것처럼 굿을 하는 이들도 역시 소리와 춤에 뛰어나 씻김굿을 보다 잘 가꾸어 올 수 있었다고 하겠다.

씻김굿의 명인들이 예로부터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나 지금 이름이 전하여지는 이는 많지 않다. 중요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의 보유자 박병천에 의하면 그의 사대조 되는 어른이 박달영이고 그는 진도 읍내 살았는데 아들 종홍과 종기 형제를 두었으며 모두 젓대 명인으로 키웠다 한다. 그 무렵 진도군 조도에 함부천이라는 한학도 잘 하고 또 침술에도 능하며 무가(巫歌) 및 여러 악기에 능한 이가 있어 딸에게 무가의 사설을 정리하여 잘 지도하였다 한다. 함선천이 유식하여 진도 읍내를 출입하다가 박달영과 아들 종홍의 인물됨과 학습의 기량을 보고 종홍을 사위로 삼았는데 종홍에게 시집 온 함씨가 친정 아버지 함부천의 지도를 받아 굿 문서를 많이 알고 있어 뛰어난 무당이 되었다 한다. 박종홍은 대금에 뛰어났으나 5남매를 남기고 작고하였는데 부인 함씨가 첫딸 박선내와 둘째 며느리 김소심에게 굿 문서를 많이 지도하여 무당으로 키웠다 한다. 박종홍의 둘째 아들 범준은 김소심과 혼인하여 지산면 인지리로 분가하였는데 대금을 하였으나 일찍 작고하였고 아들 병수와 병천을 두었으나 큰아들은 일찍 작고하였고 둘째 아들 병천이 모친 김소심과 고모 박선내와 그밖에 여러 명인들에게 굿 학습을 하여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었다.

박달영은 임준면(臨准面) 삼막(三幕)으로 이사한 뒤 둘째 아들 종기를 얻었는데 종기는 젓대 散調를 처음 짜서 젓대의 최고 명인으로 꼽히며 서울에 올라와 조선성락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서 연주활동을 하였다. 박종기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 만준이 피리의 명인으로 꼽히었다. 그의 부인 한삼주 또한 큰무당으로 이름이 있어 근래에까지 진도씻김굿 발표공연에 참가한 적이 있다.

박달영, 함부천과 같은 무렵에 진도에 어떤 명인이 또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박종기 보다 조금 뒤에 활동한 몇몇 명인들의 이름이 전해진다고 한다. 보유자 朴秉千과 崔桂萬에 의하여 피리와 젓대 名人 朴成國, 가야금名人 蔡孟仁, 피리 名人 金海千이 있었고, 그밖에 韓雲龍, 李太權, 蔡斗仁, 蔡成仁, 朴京俊, 朴南俊과 같은 樂士들이 있었다 한다. 선굿의 명인으로 朴先禮와 같은 무렵에 蔡桂萬의 어머니 金石硯이 있었다 한다.

1979년에 진도씻김굿을 지정 조사할 당시에는 鄭淑子, 朴秉千, 韓三舟, 姜漢洙, 蔡桂萬, 朴昌集, 金貴鳳, 金大禮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박병천, 채계만, 김대례가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고 뒤에 김귀봉이 악사로 인정을 받았다.

근래에는 진도 현지에서도 굿 의식을 행하는 일이 드물고 또 점쟁이류의 간단한 의식으로 대체되고 있어 보유자들의 어려움을 안기 우고 있다. 따라서 보유자들이 대폭 줄고 있다.

3. 악기 ·음악·춤

진도씻김굿에 쓰이는 악기는 본디 징, 장고, 피리, 젓대, 해금이었으며 여기에 북과 가야금이 딸리기도 하였던 것 같고 해방 후에 아쟁을 편입 시켰다. 지금은 징, 북, 장고, 피리, 아쟁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으며 간혹 가야금을 끼기도 하는데 젓대와 해금은 잽이가 없어서 쓰지를 못하고 있다.

경기도 남부, 충청도 서부, 전라도, 경상도 서남부에 이르는 이른바 시나위 권 무악에서는 징, 장고, 피리, 젓대, 해금으로 악기 편성이 되는 것이나 경상도 서남부, 전라도 남부와 같이 남해안 지역에서는 여기에 북이 끼이는 수가 많다. 한국음악에 장고보다 북이 먼저 쓰였고 또 삼현육각에서도 북이 쓰였던 것으로 봐서 진도씻김굿을 비롯하여 남해안 지방의 굿에 북이 쓰이는 것은 옛 악기 편성의 잔재라 할 수 있다.

가야금은 흔히 무악에서 쓰이지 않는 것이지만 전라도에서는 간혹 무악에 가야금을 끼이기도 한다. 가야금으로 시나위를 연주하던 것은 오래되었고 또 삼현삼죽(三絃三竹)에 가야금이 편성되었으므로 진도무악에 가야금이 쓰이는 것은 벗어난 일은 아니다.

아쟁은 본디 당악기(唐樂器)이어서 鄕樂에 쓰이지 않던 것이었으나 조선시대 후기에 향악에도 아쟁이 쓰였고 또 일제 때에 시나위 연주에 아쟁이 쓰인 뒤로 아쟁은 산조 및 시나위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해금이 연주가 까다롭고 음량이 작은데 견주어 아쟁은 연주도 간편하고 음량도 크기 때문에 지금은 전라도 굿에서 아쟁이 더러 쓰이고 있다.

진도씻김굿에 쓰이는 장단에는 진양 흘림 대학놀이 살풀이(떵떵이) 구정놀이(자진모리) 무장구장단과 같은 장단이 주로 쓰이며 이 밖에 중모리, 중중모리, 삼장개비 선부리 미음조시와 같은 장단이 쓰이기도 한다. 㬈㬑㬉

진양은 판소리나 산조와 같은 음악에서는 흔히 쓰이는 장단이지만 무악의 경우에는 전라남도에서만 쓰인다. 무가에서 쓰이는 진양은 판소리나 산조의 경우와 같이 3분박 느린 6박자(8분의 18박자)이나 판소리와 산조처럼 맺고 푸는 것을 가려서 치지 않고 6박자의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흘림은 2분박 좀 빠른 4박자(8분의 4박자)이며 이런 장단은 전라남도에서 널리 쓰이는데 이것을 안땅 동살풀이 살풀이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보유자 박병천에 의하면 흘림장단과 농악장단을 비교하여 흘림장단이 좀 빨라지면 동살풀이가 되고 좀더 빨라지면 오방진 굿이 된다고 말한다.

대학놀이는 3분박과 2분박이 3+2+3+2로 구성된 절름거리는 박자(8분의 10박자)로 이런 장단을 판소리와 산조에서는 엇모리라 한고 전라북도, 충청남도에서는 신임이라 하고, 동해안 지방에서는 자삼이라 하는데 전라남도에서는 흔히 대왕놀이 또는 대황놀이, 대놀이라 부른다. 보유자 박병천은 이 장단이 배우기가 어려워 이것을 배우면서 서당에서 소학, 대학을 마치는 것 같다고 하여 대학놀이라 부른다고 하였으나 알 수 없다.

살풀이와 떵떵이는 3분박 보통 빠른 4박자 (8분의12박자)이며 진도에서는 이것을 살풀이라 하고 좀 더 빠르면 떵떵이라 하는데 전라북도 살풀이보다 빠르고 전라북도의 느린 덩덕궁이와 같다.

자진모리와 구정놀이는 3분박 빠른 4박자 (8분의12박자)이며 이것은 떵떵이를 빨리 모는 것이다. 이 장단은 본디 구정놀이라 하였으나 근래에는 판소리와 산조를 따라 자진모리라는 말을 많이 쓴다.

굿거리와 중중모리는 3분박 좀 느린 4박자 (8분에 12박자)이며 춤이나 삼현육각을 붙여서 노래할 때에는 굿거리라 하며 자진염불과 같이 장절무가에 쓰일 때에는 판소리와 산조의 장단 명칭에 따라 중중모리라 부르기도 한다.

상장개비 장단은 3분박 보통 빠른 5박자 (8분의 15박자)인데 이런 장단은 다른 지방에서 보기 힘들다. 경기도 남부 무무(巫舞)의 반주음악으로 쓰이는 반설음 장단과 비슷한 데가 있다. 진도에서도 매우 드물게 쓰이는 것으로 근래에는 약하는 수도 있다.

중모리 장단은 판소리나 산조에서와 같이 2분박 보통 빠른 12박자(4분의 12박자)이나 때에 따라서는 3분박 보통 빠른 12박자(8분의 36박자)로 치기도 한다. 진도씻김굿에서는 다른 고장의 무가의 경우와 같이 흔히 장절무가에만 쓰인다.

무장구 장단은 일정한 박자가 없이 연타하는 불규칙박자이며 이것을 다른 고장에서는 외장구 장단이라고도 한다. 무장구란 뜻은 작은 굿에서 자배기에 물을 떠놓고 쪽받을 엎어 띄우고 치는 장단을 물장구장단이란 뜻으로 무장구라 하는데 이 물장구의 장단이 이와 같다.

선불이 장단은 진도에서 드물게 쓰이는 것으로 박자는 자진중중모리나 느린 자진모리에 맞으나 느린 자진모리 세 장단이 리듬주기가 된다.

마음조시는 독립된 장단이 아니고 한 장단에서 다음 장단으로 넘어가는 경과 적인 리듬악구를 말하는데 이 악구가 정하여져 있으나 번거롭기 때문에 쓰이지 않은 수가 많다.

진도씻김굿에 쓰이는 무가의 선율은 대부분 육자백이 토리이다. 다만 천근 치는 소리의 선율은 보렴선율에 가깝고 성주풀이나 삼현육각 굿거리를 구음으로 부를 경우에는 남도굿거리와 같이 판소리의 평조선율에 가깝다.

진도씻김굿에서 추는 춤은 지전이나 넋전을 들고 추는 춤이 대부분이며 이 밖에도 신 칼 들고 추는 춤, 정주를 들고 추는 춤, 복개를 들고 추는 춤이 있는데 흔히 각 거리의 끝에 신을 놀리는 춤이 많으며 바람막이라 하여 양손을 벌리고 춘다던가 좌우치기라 하여 양손을 교대로 흔든다 거나 태극무늬와 같이 벌린다던가 다듬이 질 하듯 양손을 교대로 흔든다든가 양손을 아래에서 위로 쳐 올려 뿌린다던가 양팔을 앞으로 뻗고 가위질하듯 겹쳐 흔드는 사위 등을 쓴다.

4. 의식 절차

진도지방에서 죽은 이의 넋을 저승으로 천도하는 굿에는 용신굿, 용왕굿, 곽머리씻김, 소상씻김, 대상씻김, 날바디씻김, 영화씻김, 저승혼사 굿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용신굿은 물에 빠져 죽은 이의 넋을 건져 저승으로 천도하는 굿으로 혼 굿 또는 넋 건지기라고 부르며 용왕굿은 뱃사람들의 풍요를 비는 풍어제이나 진도지방에서는 풍어제를 하는 김에 바다에 떠도는 모든 영혼들의 넋을 천도하여 뱃길을 안전하게 하도록 하는 의식이 딸린다. 곽머리씻김은 초상만 3일 안에 하는 씻김을 말하며 소상씻김, 대상씻김, 영화씻김에 비하여 죽은 자리가 마르기 전에 한다하여 진씻김이라고 부른다. 곽머리란 관의 머리에서 하는 굿이란 뜻이다.

소상씻김은 소상 때 하는 씻김이며 대상씻김은 대상 때 즉 탈상하며 씻김이며, 날받이씻김은 집안에 죽은 이의 넋으로 말미암아 탈이 났을 때 날을 받아서 하는 씻김이며, 영화씻김은 집안에 과거급제를 하였다던가 그밖에 즉 경사가 있어 조상 은덕을 생각하고 모든 조상에게 하는 경사스러운 씻김굿이다. 저승 혼사 굿은 미혼 남녀의 넋을 불러서 혼인을 시키고 넋을 저승으로 천도하는 씻김굿이다. 이 밖에도 초분을 이장할 때나 조상의 비석을 세울 때에도 씻김굿을 하는 수가 있다 한다.

죽은 이의 넋을 씻겨 저승에 천도하는 굿을 흔히 씻김굿이라 하지만 그밖에 마당에서 한다고 해서 「마당 생기」또는 「뜰 생기」라 하고 밤에 한다 하여 「야락」이라 부르기도 한다. 㬈㬒㬉

진도지방씻김굿은 밤에 하는 것이 원칙이다. 넋 건지기는 죽은 장소에 가까운 바닷가에서 하며 용왕굿 또한 바닷가에서 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씻김굿은 집 마당에 굿상을 차리고 하는 것이 원칙이다. 마당에는 조상상을 차리고 옆에는 마실리상이라 하여 죽은 이의 친구들의 넋을 위한 상을 차리고 조상상 앞에는 조그만 액상을 차린다.

큰굿의 경우에는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이지만 먼저 집안의 조상이나 여러 신들에게 굿하는 연유를 아뢰는 안땅 굿을 먼저 하게 되는데 만일 그날이 부엌 신 즉 조왕신이 드는 날이면 무당이 부뚜막에 차린 굿상에서 징을 앞에 놓고 혼자 앉아 무장구 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무가를 부르는 순서를 먼저 한다. 안땅은 대청이나 큰방에 중상을 차리고 굿상 앞에 무당이 징을 앞에 놓고 앉아서 손수 치며 흘림장단에 육자백이 장단에 무가를 부르고 잽이들은 저마다 장고 피리 젓대 등 갖가지 악기를 쳐서 반주하는데 타악기 잽이들은 바라지라 하여 구음이나 또는 어떤 사설로 무가의 선율에 대선율을 부른다. 무당은 상장개비 장단에 노래를 부르고 살풀이장단이나 흘림장단으로 다시 몰아 가기도 한다. 㬈㬓㬉

안땅 다음에는 흔히 초가망석으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만일 물에 빠져 죽은 이나 밖에서 험하게 죽는 이나 객사한 이의 넋을 천도하는 경우에는 여기에 넋을 모셔오는 순서가 딸린다.

물에 죽은 이의 넋을 천도하는 경우에는 먼저 죽은 장소에 가까운 곳에서 넋을 건져 오는데 이것을 용신굿 또는 혼 굿 또는 넋 건지기라 부른다.

죽은 장소에 가까운 물가에 제상을 차리고 신대를 세우고 길 배를 느려 놓고 그 끝에 넋을 보시기에 넣어 달아 물 속에 놓고 식구 중에 신대를 잡히우고 무당이 서서 흘림장단으로 무가를 부르고 잽이들은 둘러앉거나 서서 반주를 한다. 신대에 신이 내리면 집으로 모셔온다.

객사자의 경우에는 초저녁에 대문 밖에 제상을 차리고 길 배를 느려 놓고 유족이 나아가 죽은 이의 넋이 집에 들어오도록 말을 하고 무당이 축원하고 넋을 모셔들인다.

객사한 넋이 아니면 안땅 다음에 바로 초가망석으로 들어가고 객사한 영혼의 넋을 맞이하여 초가망석으로 들어온다. 초가망석은 죽은 이의 넋을 불러들이고 또 살아 생전에 친구였던 죽은 이의 넋을 불러들여 안치는 굿이다.

무당은 흰 치마 저고리에 흰 장삼을 걸치고 홍띠를 띠고 흰 고깔을 쓴 차림으로 손에 지전과 신대를 들고서 무가를 부르고 잽이들은 징, 장고, 북, 피리, 젓대, 해금 등 갖가지 악기를 들고 둘러앉아 무가를 반주한다. 옛날에는 선부리 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부르고 진양으로 넘어갔다 하나 지금은 흔히 진양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시작한다. 무당은 진양으로 부르다가 흘림장단으로 넘기고 삼장개비 장단으로 넘겼다가 살풀이 장단으로 넘겨 무가를 부르다가 떵떵이 살풀이장단으로 지전 춤과 신대 춤을 춘다.

초가망석으로 죽은 이의 넋을 불러 자리에 앉힌 다음에는 신을 쳐 올리는 순서에 들어간다. 먼저 무당이 넋전을 손에 들고 흘림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무가를 부른 다음 살풀이장단으로 무가를 부르다가 살풀이장단에 쳐 올리는 춤을 추는데 이 춤은 신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춤으로 양팔을 아래에서 위로 뿌려 쳐 올리는 동작을 여러 차례 계속한다.

신을 쳐 올려 감동시킨 뒤에는 두신(痘神)으로 알려진 손님마마를 모시고 또 죽은 이의 굿에 찾아온 손님 신을 모시는 손님 굿으로 넘어간다. 무당이 흰 치마 저고리 차림으로 장고를 세워 놓고 서서 한 손에 채를 들고「기명조시」라 하여 손수 장고 한쪽 가죽을 치며 혼자서 무장구 장단으로 무가를 부르다가 일어서서 양손에 넋전을 들고 잽이들의 살풀이장단에 무가들을 부르다가 춤을 춘다.

손님 굿 다음에는 제석 굿으로 넘어가는데 곽머리씻김 즉 진씻김에는 제석 굿을 하지 않는다. 무당은 흰 치마 저고리를 입고 흰 장삼(소매 접은 두루마기)을 걸치고 홍띠를 가사처럼 두르고 흰 고깔을 머리에 쓰고 손에 지전을 들고 서서 진양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무가를 매기면 잽이들은 여러 악기로 반주를 하며 뒷소리를 받는다. 무가는 떵떵이 살풀이로 넘어가는데 제석 님이 내려오는 내력을 노래한다. 무당은 대왕놀이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제석의 옷차림을 그리는 중 타령을 부르고 나서 살풀이 구정놀이 등 여러 장단으로 지전 춤을 추고 나서 지전을 놓고 정주를 들고 춤을 추다가 정주를 놓고 복개 춤 또는 복 춤이라 하여 놋씻기 뚜껑을 들고 바라춤과 같이 춤을 춘 다음 굿상 앞에서 잽이를 향하여 앉아 「앉은조달」이라 하여 제석의 내력과 잽이와 말로 주고받는다. 무당은 앉은조달과 제석 님의 내력을 말하고 이어서 역시 앉은조달로 산세풀이를 하고 나서 집안의 복을 비는 여러 가지 노래를 하는데 이 순서가 매우 길다.

제석 굿에서 집안의 복을 비는 노래는 무당이 일어나서 늦은 중모리와 굿거리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지경닫기 소리를 잽이들과 매기고 받고 나서 떵떵이 살풀이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집 짓는 내력과 입춘 붙이는 내력을 노래로 부르고 자진모리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벼슬 굿이라 하여 자손들이 번창하는 축원을 하고 정주를 치며 자진엇모리장단으로 성주경을 읽고 동살풀이 장단으로 도량경을 읽은 다음 늦은 중모리장단과 중중모리장단으로 노적 청하는 노래를 매기고 받은 다음 중중모리장단으로 업 청하는 노래를 부르고 대왕놀이장단으로 군웅놀이 무가를 부르고 떵떵이 살풀이장단으로 액풀이 무가를 부른 다음 춤을 추고 마친다.

제석 굿을 마치고 조상상과 마실리상에 첨잔을 하여 드리고 조상굿을 하여 보내 드리는데 죽은 이는 남아서 넋을 씻기어야 하기 때문에 죽은 이의 상에는 첨잔을 하지 않는다. 조상굿은 조상의 넋을 위로하여 보내 드리는 굿으로 굿거리와 떵떵이 살풀이로 소리하고 춤을 춘다. 여기까지는 집 굿에 해당하는 것이며 다음 고풀이부터가 씻김굿에만 있는 절차이다.

고풀이에는 먼저 고를 매어 놓는다. 긴 무명베에 고라 하여 여러 개의 매듭을 차례로 매어 놓고 그 한끝을 집의 상기둥 꼭대기에 매거나 조무에게 잡히우고 한끝을 무당이 한 손으로 잡고 또 한 손에 넋전을 들고 서서 진양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이 세상에 맺혔던 한을 풀고 저승으로 잘 가라는 무가를 부르다가 무가는 중모리로 넘어가 염불을 부르고 흘림장단으로 넘긴 다음 떵떵이 살풀이로 소리를 한 다음 춤을 춘다. 이 때에 고를 흔들어 차례차례 풀어나간다. 이것은 이승에 살며 맺힌 한을 푸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고를 푼 다음에는 죽은 이의 넋을 깨끗하게 씻는 순서인데 넋을 씻는다 하여 이 순서를 씻금이라 부르기도 하고 물을 뿌려 씻는다고 하여 이슬털이라고도 한다. 먼저 영돈말이라 하여 자리 위에 죽은 이의 옷을 펴놓고 자리를 말아 일곱 매듭으로 묶고 볏짚 위에 세워 놓는다. 자리 위에 행기 그릇이라 하여 넋 식기를 얹어 놓고 죽은 이의 머리를 상징하여 누룩 한 덩이를 얹어 놓고 솥뚜껑을 덮는데 성인의 경우에는 무쇠 솥뚜껑을 덮지만 처녀 총각의 경우에는 바지를 덮는다. 무당은 흰 치마 저고리 차림으로 양손에 신 칼을 들고 서서 대왕놀이장단에 육자백이 목으로 소리를 하고 잽이들은 여러 악기로 시나위를 친다. 무가는 흘림장단으로 넘어가는데 신 칼로 솥뚜껑을 치며 소리한다. 무당은 계속 소리하며 빗자루로 쑥물과 향물과 맑은 물(청계수)을 차례로 찍어 자리와 솥뚜껑을 씻고 나서 밖에다 불을 피워 연기를 내며 흘림장단으로 소리하고 자리를 풀고 넋 식기를 연다. 죽은 이의 옷을 들고 흘림장단으로 소리를 하며 불에 넘기운다. 이것을 부넘기라 한다. 이때에 오구풀이라 하여 흘림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극락의 문을 열어달라는 축원을 한다는 구정놀이로 소리를 하다가 춤을 춘다.

이어서 왕풀이 또는 십왕풀이라 하여 육갑으로 십왕의 내력을 말하고 죽은 이의 넋을 천도해 줄 것을 축원한다. 마음조시 장단으로 춤을 추고 나서 동갑풀이라 하여 흘림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이승에서 사귀었던 동갑들의 넋을 축원한다. 마음조시로 춤을 춘 다음 약풀이라 하여 흘림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이승에서 그 좋은 많은 약을 써보지 못하고 죽은 한을 푸는 내력을 소리로 한다. 굿거리장단으로 춤을 추고 마친다.

이어서 넋 올리기에 들어간다. 유가족을 굿상 앞에 세워놓고 유가족의 머리에 넋이라 하여 죽은 이의 모습을 오려 지방과 함께 병풍에 붙였던 것을 떼어 유족의 머리에 올려놓고 무당이 넋전을 들고 흘림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소리를 한 다음 춤을 추고 말로 축원을 하며 넋전으로 유족의 머리에 있는 넋을 찍어 올리고 나서 떵떵이 살풀이로 춤을 춘다.

다음은 희설이라 하여 무당이 흰 치마 저고리 바람에 징을 앞에 놓고 앉아서 무장구 장단을 치며 기명조시라 하며 혼자 육갑풀이를 한다. 이 때에 주인이 망자의 말을 듣고 싶으면 신 잘 내리는 이에게 손 대를 잡혀 징을 치며 축원을 하며 신이 내리도록 하여 망자의 말을 듣는다. 망자의 상에 잔을 올리고 첨잔을 하고 나서 마치고 길 닦음으로 들어간다.

길 닦기는 먼저 긴 길 베를 서른 세자 늘리되 큰 방문에서 대문 쪽으로 늘리어 양쪽을 잡게 하고 베 위에 행기 마자옷 반야용선 넋전 등을 얹어 놓고 무당이 장삼에 가사를 걸치고 고깔을 쓰고 길 베 옆에 서서 행기와 용선을 이리 저리 옮기며 진양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염불소리를 매기고 받는데 염불소리는 진양장단에서 중모리장단으로 다시 중중모리장단에 넘기고 청근풀이를 하고 하적 소리를 한다.

하적이란 죽은 이가 하직하여 저승으로 간다는 뜻이다. 걸게 할 때에는 늦은 중모리장단에 하다가 중중모리장단에 넘긴다. 제화 친다고 하여 노래와 삼현으로 제화소리(지화자 소리)를 부르고 중중모리로 천근 치고 살풀이장단으로 중복풀이라 하여 매달 걸리는 복을 풀어 주고 동살풀이로 소리한 다음 베를 걷고 베를 양손에 들고서 떵떵이 살풀이로 춤을 춘다.

맨 끝은 종천맥이라 하여 미처 못 떠난 여러 신을 보내고 아직 얻어먹지 못한 잡신들을 먹여보내고 사자 맥이라 하여 사자에게 죽은 이의 인도를 부탁하는 굿이다. 문 쪽에 모닥불을 피우고 작은 상을 차려 놓고 징으로 무장구 장단에 육자백이 토리로 축원을 한 다음 큰그릇에 음식을 담아서 밖에 버린다. 이 때에 망자의 옷 넋 반아용선 신대 등 여러 기물을 모닥불에 태운다.

5. 보유자와 전수생

중요무형문화재 제70호 진도씻김굿의 보유자 박병천의 증조부 되는 박달영과 그 무렵에 활동한 함부천의 연대는 잘 모르나 박달영의 둘째 아들 종기가 1880년 생으로 105세가 되니 박달영은 지금 살았으면105여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박달영은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내에서 태어났다. 읍내에서 장남 종홍을 낳았고 상처한 뒤에 진도군 임준면 삼막리로 이사하여 후처의 몸에서 종기를 두었다한다. 그의 아들 종홍과 종기가 모두 대령(大笭)의 명인이었던 것으로 봐서 그도 젓대와 피리의 명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부천은 박달영과 같은 무렵에 태어나 진도군 조도에서 살았는데 피리, 젓대, 장고, 징과 같은 악기는 물론이고 한학에도 유식하였고 특히 침술에 뛰어나 신침으로 이름이 났다 한다. 그는 유식하여 무가사설을 정리하였고 그의 딸에게 무가 문서를 많이 전수하여 딸이 진도로 시집와서 대무(大巫)가 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박종홍는 박달영의 맏아들로 진도 읍내에서 태어났고 함부천의 딸 함씨와 결혼하여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로 이사하였다. 젓대를 하였으나 일찍 작고하였다 한다. 지금 살았으면 120여세쯤 된다고 한다.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범준과 맏딸 박선내가 뒤에 명인으로 꼽히었다.

박종기는 1880년 생이며 진도군 임준면 삼막리에서 박달영의 이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가 병으로 위독하게 되니 허벅지 살을 베어 먹여 살리었다 하여 뒤에 효자로 이름이 났고 그는 이때 상처가 심하여 평생 한쪽 발을 약간 절었다 한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3년간 시묘(侍墓)를 살았는데 이때 젓대를 열심히 불어 신접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大笭散調를 처음 짰고 서울에 올라와 朝鮮聲樂硏究會에 참가하였고 전국을 순회하였으며 음반을 취입한 바 있다. 역대 대령산조 명인 가운데 첫손을 꼽는다. 1947년에 지방공연 중에 작고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젓대 명인 韓周煥이 나왔고 아들 萬俊도 피리 명인으로 꼽히었다.

함씨는 진도군 조도에서 함부천의 딸로 태어났고 풍채가 좋고 기상이 활달한데다가 아버지 함부천에게 무(巫)학습을 하여 무가의 문서를 많이 알아 장차 진도의 선굿의 명인이 되었다. 진도 박종홍에게 시집와서 며느리 김소심과 딸 박선내를 선굿의 명인으로 키웠다. 지금 살았으면 120여세쯤 된다고 한다.

채두인은 박종홍보다 조금 후배이며 진도 읍내 교동리에 살았다 한다. 신청(神廳)선생을 하였고 판소리 명창이며 장고, 징에도 뛰어났다 한다. 사사(師事)관계는 모른다고 한다. 지금 살았으면 98세쯤 된다고 한다.

채맹인은 채두인의 아우이며 세살 아래라 한다. 진도 읍내 교동리에서 살았으며 누구에게 배웠는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가야금, 풍류 산조 병창의 뛰어난 명인으로 알려졌다 한다. 대구에 가서 가야금 사범으로 활약하였다 하며 69세로 작고했다 한다. 지금 살았으면 96세가 된다고 한다.

김해천은 진도 읍내에서 살았으며 피리에 뛰어났다한다. 피리, 삼현, 풍류뿐 아니라 시나위에 특히 뛰어나 서울에 올라와서 여성국극단(女性國劇團) 반주악사로 수행하였다한다. 호적(胡笛) 시나위의 명인 방태진과 시나위 합주하면 그렇게 기막힌 음락이 나왔다고 한다. 그는 박종기 조금 후배로 지금 살았으면 90여세가 된다고 한다.

박성국은 김해천과 같은 연배이며 진도 읍내에서 살았고 피리와 대금을 잘 하여 김해천보다 솜씨가 나았다는 평을 받았으나 지방에 묻혀 살았기 때문에 다른 고장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70여세쯤에 작고하였다 한다.

채성인은 채맹인의 아우이며 진도 읍내 교동리에서 살았고 장고를 잘 쳤고 북과 징에도 능했다 한다. 지금 살았으면 85세쯤 되며 30여 년 전에 작고했다 한다.

박경준은 박범준의 집안의 형이 되는 이로 진도 읍내 남동리에서 살았고 지금 살았으면 92세가 되는데, 15년 전에 작고했다 한다. 판소리를 잘 하였고 장고, 북, 징을 잘 쳤으며 가야금도 했다고 한다.

박범준은 박종홍의 둘째 아들이며 보유자 박병천의 아버지이다. 대금을 잘 하였으나 일찍 작고하였다 한다. 진도 읍내에서 살다가 지산면 인지리로 분가하였는데 그의 부인 김소심 또한 선굿의 명인으로 손꼽히었다 한다. 지금 살았으면 89세가 되며 54세로 작고하였다 한다.

한운룡은 진도 읍내 교동리에서 살았고 피리, 삼현과 시나위에 뛰어났고 장고, 북, 징에도 능하였고 소리도 좀 하였다 한다. 지금 살았으면 82세가 되며 10여 년 전에 작고하였다 한다.

김소심은 박범준의 부인이며 보유자 박병천의 어머니이다. 진도 김해천 집안에서 태어나 진도에 살았던 박범준과 결혼하여 지산면 인지리로 분가하여 살았다. 시어머니 되는 함씨에게 무가와 문서를 많이 배워 선굿의 명인으로 이름이 났고 자부 정숙자에게 무가 문서를 많이 가르쳤다 한다. 지금 살았으면 88세가 되며 작년에 87세로 작고하였다.

박선내는 박종홍의 맏딸이며 보유자 박병천의 고모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함씨에게 무가 문서를 많이 배웠던 바 진도에서 소리 잘하고 무가 문서 많이 알고 인물 좋은 선굿의 명인으로 널리 이름이 났었다. 1969년 문화재관리국의 전라남도 민속종합조사에서 그의 씻김굿이 현장 조사되어 한국민속종합조사 전남편에 보고된 바 있다. 작년에 96세로 작고하였다 .김석연은 채계만의 어머니이며 진도에서 살았으며 선굿을 하였고 올해 살았으면 99세가 된다고 한다.

이태권은 진도 읍내에서 살았는데 피리를 잘했으나 40여세로 요절하였다 한다. 지금 살았으면 70여세가 될 것이라 한다.

박만준은 박종기의 둘째 아들이며 진도군 임준면 삼막리에서 살다가 상만리에서 살았다. 아버지에게서 대금을 배워 잘 했었으나 일제 때 보국대로 일인들에게 끌려가 매를 맞아 폐가 상한 뒤로 고향에 돌아와 대금을 불수가 없어 피리로 바꾸어 피리 삼현과 시나위를 잘 불었다. 진도씻김굿 서울 발표공연 때에 반주악사로 참석한 적이 있으나 6년 전에 작고하여 보유자로 인정을 못 받고 말았다.

박남준은 박만준의 육촌 동생으로 진도 읍내에서 살았으며 장고를 잘 쳤고 피리, 가야금도 하였다고 한다.

한삼주은 박만준의 부인이다. 진도군 임준면 남도리에서 1917년에 태어나 19세 때 삼막리에 살던 동갑인 박만준에게 출가하여 살다가 상망리로 와서 살았다. 친정 어머니 김씨에게서 巫學習을 하여 선굿의 문서를 잘 아는 명인으로 꼽히었으나 지금은 고령으로 연행이 어렵게 되었다. 진도씻김굿의 지정조사 때에 보유자 명단에 올랐었으나 고령이어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지금은 은퇴하고 있다.

강한수는 경오생으로 호적은 1928년 생이다. 진도군 의신면 곽지리 345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임준면 연동리 301에서 산다. 12세 때부터 피리, 장구, 징 등을 배워 무의식의 악사로 일하고 있다. 진도씻김굿 지정조사 때 피리 보유자로 보고되었으나 아직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

보유자로 인정된 박병천은 계유생으로 호적은 1933년 11월 18일생이다.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173에서 박범준과 김소심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지금도 이곳에 호적을 두고 있다. 7세 때 김봉태 상쇠가 이끌던 인지리 농악단으로 들어가 무동(舞童)을 하였으며 11세 때에는 조태홍에게 조리중 춤, 굿거리 춤 등 춤을 배웠다 한다. 지산 국민학교를 나오고 목포상업학교를 다닐 때 목포에 있던 국악학원을 찾아다니며 朴寶我, 朴花, 朴眞玉, 梁玉眞과 같은 국악인 밑에서 장고도 치고 춤도 배웠다 한다. 6·25 후에는 목포상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에서 춤을 배우다가 고향에 돌아와서 모친 김소심에게 무가 사설을 배웠다 한다. 20여세 때에는 李太弘, 韓雲龍에게 무악에 쓰이는 장구장단을 배우고 박만준에게 징을 배우고 박선내에게 무가를 배웠다한다. 같은 무렵에 해남에 살던 이학길과 채백규에게 농악장구를 배웠고 해남에 장구 뺑뺑질을 잘 하여 「노랑 박구」라는 별명이 붙었던 장고 명인 황암에게 농악장구, 소고놀이를 배우는 한편 들당산, 날당산, 판 굿, 연신 굿, 풍장(배풍장), 길군악, 노박 굿 등 신청농악의 여러 절차를 공부하였다 한다. 또 양태옥에게 북 놀이(쌍 북)를 배웠다 한다. 1971년에는 진도들노래를 구성하여 제12회 전국민속경진대회에 출연하여 국무총리 상을 받았고 1978년에는 진도만가(輓歌)를 구성하여 제19회 전국민속경진대회에 출연하여 문공부장관상을 받았다. 그리고 진도씻김굿을 구성하여 서울에서 여러 차례 발표공연을 가졌다. 198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근래에는 국립무용단의 지전 춤, 고풀이를 안무(按舞)하였고 또 진도씻김굿을 이끌고 구라파 6개국 순방을 하였다. 지금은「한국의 집」의 가무단 악장으로 일하고 있다.

보유자 채계만은 을묘 생이며 금년 나이 70세이다. 호적은 1915년 5월 16일로 되어 있다. 진도군 진도읍 성동리 43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이곳에서 산다. 진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8세 때 진도 읍내에서 채두인에게 장고 장단을 배웠고 22세 때에는 진도에서 2년간 채맹인에게 가야금 산조를 진양에서 휘모리까지 기초학습을 하였다 한다. 그 뒤 굿 현장에서 꽹과리, 징, 장구를 익히다가 39세 때에는 삼성여성국극단 햇님 등 창극단체를 수행하며 반주음악으로 아쟁을 연주하였는데 아쟁은 그 동안에 견학하여 자습한 것이라 한다. 박선례, 김석연 등 여러 선굿 명인들을 수행하며 가야금 또는 아쟁을 연주하였다. 198l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그 동안에 피리를 익혀 피리 시나위도 할 수 있다 한다. 박병원을 전수생으로 두고 아쟁, 가야금 등 기악을 가르치고 있다.

보유자 김대례는 여자로 신미 생이고 지금 나이 55세이며 호적은 1935년 4월 21일로 되어 있다. 본명은 대심(大心)이라 한다. 진도군 임준면 상망리에서 태어났고 19세 때 한삼주의 동생이며 임해면 상망리에 살던 한찬용과 혼인하고 백동리로 이사하여 지금도 이곳에 산다. 어려서부터 친정 아버지 김영찬(지금 살았으면 85세)과 박종기 딸인 친정어머니 김소심(지금 살았으면 82세)에게 굿 학습을 하였고 시집온 뒤로는 올케되는 한삼주에게서 신굿을 익혔고 26세 때부터 선굿을 하기 시작했다. 성량이 크고 목 구성이 좋아서 진도씻김굿의 서울발표공연에서 돋보였다. 198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의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고 이완순을 전수생으로 두고 있다.

악사 김귀봉은 계유 생으로 올해 나이 53세이다. 호적은 1934년 생으로 되어 있다. 진도군 임준면 봉상리 888(송정리)에서 태어나 지금도 이곳에서 살고 있다. 19세 때 박만준에게 장고 및 징을 배워 그 뒤 선굿의 반주악사로 수행하였고 진도씻김굿 각종 발표공연에 수행하였으며 198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악사로 인정받았다. 5년 전부터 피리 시나위를 익히고 있다 한다.

전수생 이완순은 여자이며 일명 귀자라 하며 계미 생이고 올해 나이 43세이다. 호적은 1945년 생으로 되어 있다. 진도군 지산면 보존리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고금면 오일시리에서 살고 있다. 어려서 친정 어머니에게서 굿 학습을 하였고 22세 때부터 김귀태에게 30대부터는 박병천, 김귀봉에게 무악을 지도 받았다. 198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전수생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미 굿 학습을 익히었기 때문에 진도씻김굿의 각종 공연에서 김대례와 함께 선굿을 맡고 있다.

전수생 박병원은 을유 생이며 지금 나이 40세이다. 호적은 1945년 6월 6일생으로 되어 있다. 진도군 의신면 송정리에서 태어났고 6세 때 진도 읍내 성동리 40-2로 이사와서 지금도 이곳에서 살고 있다. 17세 때부터 진도에서 박남준에게 장고를 배우기 시작하여 26세부터 굿판에서 실습을 하였다. 198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의 전수생으로 인정되었고 채규만에게 아쟁을 배우고 있다.

진도씻김굿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지금은 실제 굿 의식을 하는 일이 드물고 드물게 하는 굿도 간단한 약식이거나 아니면 점쟁이가 속경(續經)쟁이와 싸구려 의식으로 대신하는 일이 있어 전통적인 세습무(世襲巫)들이 제대로 의식을 행할 기회가 적어 생활이 점점 어렵게 되고 따라서 이것을 배우려는 학도가 없어 전수생을 구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굿 학습은 현장교육이 꼭 필요한 것인데 큰굿이 드무니 전수생들은 현장교육이 큰 문제로 남고 있다. 앞으로 진도씻김굿의 굿 의식이 제대로 공연하도록 하는 일을 어떻게 하느냐 또 젊은이로 하여금 이것을 배우도록 하는 학습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키느냐 하는 시책이 진도씻김굿의 전승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니 모두 지혜 있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