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REFLECTIONS ON KOREAN CULTURE
THOMAS R. LOPEZ, Ph. D.
Visiting Exchange Professor
Comparative Studies in Education and American Studies The University of Toledo.
한국문화에 대한 고찰
방문국 문화에 대하여 개인의 반응을 보임에 있어 우리는 상당한 조심성을 보여야 한다. 첫인상이란 종종 빗나가기 일쑤이고, 한국인의 생활에 별로 접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미약한 근거를 가지고 "한국문화" 혹은 "한국사회"를 일반화시키려는 시도는 많은 우를 범한다. 더구나 한국말은커녕 한글조차 읽지 못하는 경우엔 한층 심각한 일이 된다.
대학에서 행해지는 모든 비교연구 목적중의 하나는 학문적인 탐구에 의한 방법론과 가치에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또 분석적으로 문화상호간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연구중인 문화권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해야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필수적이다. 동시에 한국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첫인상을 갖게 마련이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맞부딪치는 상황들 속에서 여러 가지 느낌을 갖게된다. 이러한 경험과 생각은 한 이방인이 겪은 일이나 본 것들은 물론, 관찰자인 자신까지도 들어내 보이게 된다. 본 논의의 의도는 한국문화의 몇 가지 측면에 대하여 개인적인 느낌과 생각을 간추려 보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결론이나 사실을 기대하기보다는 가설 혹은 하나의 공론 정도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나의 최대 관심은 이 글을 통해 더욱 많은 토론과 사고를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의 인상에 대한 집착
문화란 말이 어떤 유용한 의미를 가졌다면 그것은 인간들이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이며 특정한 인간집단이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이라 하겠다. 내가 한국의 대학강단에 섰을 때의 경험을 한가지를 말하겠다. 한국의 문화나 사회 (가족생활·교육적 관행 또는 사회적 기대 등)에 대해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은 이상적이며 형식적인 답변으로 응해온다. 이것은 교수들에게 예의상 정답을 제출하고자하는 학생들의 태도를 넘어서는 정도라고 보았다.
그들의 이와 같은 반응은 보다 크고 넓게 퍼져있는 한국인의 자기나라 인상에 대한 집착의 일부일 것이다. 한국인들에겐 특히 지식엘리트들에겐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우호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중요한(지나치게 중요한)일인 듯 보인다. 만일 인간 개발의 원칙들이 국가발전에 적용된다고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은 고작 해봐야 한계가 있는 것이고 제 스스로를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몇 해전 몇몇 사람들이, 외국인이 자주 여행 다니는 도로 연변의 시골풍경을 그 외국인들의 눈에 가장 이상적인 농촌풍경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시골의 초가지붕을 개량하게 한 것도, 제도화된 노이로제의 한 케이스다. 다행히도 이 정책은 그후 한층 더 예술적이고 분별 있는 생각으로 대체되었다.
다가오는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은 대회 주최국으로써 이미지 구축에 주력을 둘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꾸밈없는) 있는 그대로의 한국사람들이 국제적으로 손색없는 탁월한 솜씨로 대회를 운영할 것이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지 정부기관 등에서 외형적으로 잘 보이게 하기 위하여 꾸미거나 "아름다운 한국상"을 그려내는 따위의 궁리는 불필요한 것이고 어느 경우에나 효과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권위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전망
누구든 한국에 와 보면 이내 한국사회가 본질적으로 권위주의를 유지하는 사회임을 알게 된다. 유교적 원리가 일상생활의 모든 면의 실질적인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유교적인 원리들이 사회적 안정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론 이들이 추진력에 있어서는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임도 명백한 사실이다.
사회의 유기체계가 수직관계를 이루는 것은 서구사회의 상대적 수평관계와 대조적이다. 신분에 대한 정중한 그리고 지나치게 까다로운 행동규범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지루함을 주며 미국인의 판단으로 한국인의 신분 차이가 근거 없고 독단적인 것으로 보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많은 한국인들은, 특히 대학 캠퍼스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한다. 토마스 제퍼슨이나 죤 듀이 같은 미국의 이론가들이 말했듯이 민주사회 질서를 위한 문화적 필요조건 혹은 충분조건은 무엇인가 미국정치사회를 닮기라도 한 것이 여기서 발전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하단 말인가-만일 변화가 필요하다면 말이다.
김모라는 대학원생에게 다소 수사학적인 질문을 해보았다. 한국문화에서 보아온 권위주의적 가치기준과 관행에 직면한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물었더니 그 학생은 단호한 어조로 장애가 엄청나겠지만 민주주의는 꼭 이룩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학생은 미국이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통하여 노예제도와 인종차별문제를 풀 수 있었다면 한국도 역시 반드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유교적 윤리 속에는 한국의 민주발전에 더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혼란은 민주주의에 분명한 저주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고도로 발달한 상호의존의 인간관계가 민주주의의 정치질서의 초석인 사회계약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에선 노인들은 누구나 존경과 특권을 권리로서 누리고 있다. 미국의 초라한 노인들의 곤경을 감안할 때, 한국의 우위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미국의 청소년(을 중심으로 한) 문화라는 것이 '사이비' 문화라고 일컬어지는 것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생각은 현재의 한국, 특히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서의 기독교 역할이 크다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의 기독교계에서 선교사업과 전도 사업에 매우 편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신분(교육계를 포함하여) 젊은이들과 기독교와의 깊은 상호관계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교인의 수효이상으로 큰 사회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젊은이들 사이엔 '근대화'와 기독교 '교육'과 기독교도로서의 아이러니 사이에 논란의 여지를 지닌 문화등식이 있는 듯 보인다. 한편 개신교들이 미국에서 보다 교리 상으로 더욱 보수적이다. 예를 들면 미국의 장로교는 일반적으로 진보적이고 개신교의 주류로 인정되고, 한국의 장로교는 가장 큰 단일 기독교 종파이나, 두 조직사이의 사회적 종교적인 쟁점에서 신학적 교리적 견해, 태도, 가치를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롭다.
한국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의식에 대한 뚜렷한 요구와 욕구는 종교적 의식 행사에서도 곧 눈에 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로마 카톨릭보다 개신교가 상대적으로 강한 면을 보여준다. 만일 카톨릭 선교사들이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전략과 결단이 달랐었다는 카톨릭자체의 신비주의와 의식의 힘을 갖고 개신교보다 더욱 강하게 한국 대중과 조화될 수 있었을 것이며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종교적으로 관대한 국민으로 보인다. 어느 한 종교를 갖든지 또 다른 종교를 믿든지 또는 전혀 아무 교도 믿지 않든지 간에 어느 정도 자유로와(특히 남성의 경우) 보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종교에 그리 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러한 의견을 한국인 동료들에게 말하자 그는 곧 동의했으나 '기독교인들만의 예외입니다'고 덧붙였다. 수세기 동안 한국인들은 한반도에 전해진 종교적 전통을 받는 입장이었다. (만일 유교와 불교의 경귀 등이 교리 적인 신앙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전통이 한국에서 한국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토착적인 전통으로 형성하는데 한국인들은 비상한 재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한국에도 끌어들였다. 무당들이나 유학자들 또는 불교 승려와는 다르게 기독교의 사제와 목사들은 유일무이하고 진정한 종교가 이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믿음이란 극히 보수적인 입장에서 지지자들은 모두 개종해야 할 것을 강요했다. 전래 초기부터 그랬듯이 절대적인 의지는 정치적인 논쟁과 서로 죽이고 죽는 언쟁에서 나타날 것이다. 한편 기독교인들이 이렇듯 막강한 영향력과 정치적 파워를 가지는 것을 보고 비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은 수수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매우 관심이 간다.
한국의 현대문화는 농업사회의 특징을 많이 띠고 있다.
인간주의 즉 특혜를 주거나 「바로 그곳」의 「바로 그 사람」(연줄을 의미함)을 앎으로써 초래되는 인간적인 의리의 체계가 성공적으로 도시에 이식되어 서구사회의 비인간적인 인간관계보다는 도시생활을 훨씬 더 친근감 있고 더 안전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거대한 대도시에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조그만 마을에 있는 듯이 물리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서구인들은 한국의 택시운전사가 롯데호텔과 같이 유명하지도 않은 어떤 건물의 위치를 잘 알고 있다는데 놀란다. 이와 같은 일이 얼마나 오랫동안 가능할 것인가.
심지어 홍보용 소책자들도 서울을 과거와 현재의 혼합물로서 묘사하고 있다. 누구도 그 이상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이 전쟁이후로 겪은 변화들은 엄청난 것이며 이런 변화들의 충격을 안정을 잃지 않고 흡수하여 왔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한다. 그러나 한국은 사랑스런 국민의 국가일 뿐만 아니라 강력한 외세와 대립해오면서 유구한 역사를 지킨 생존의 국가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한국문화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외향적으로 변화하거나 또는 자기의 고유한 한국적 핵은 보유하면서 피상적으로 변화하는 능력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외국인들이 한국에 있어서 급격한 서구화와 현대화를 보고 경탄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사실들일 것이다.
나의 비평문은 한국 문화와 생활에 대한 공식적인 표현의 인상을 나누지 않고서는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 민속촌은 비원이 아름다운 것과 같이 매우 즐겁고 유익한 곳이다.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의 표현은 이 이방인과 가족들의 마음에 소중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국립극장을 매우 좋아한다. 소장품들이 제한되어 있어도 국립박물관은 기대되는 곳이며 매력적인 전시로 교육적인 효과를 준다. 한국의 문학과 시의 대부분은 서울의 버스만큼이나 외국인들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어 감에 따라 곧 시정될 것이다. 전통미술은 우아함과 아름다움으로 대부분의 외국인들에게서 좋은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땅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비교될 것은 없다. 특히 존엄성 기풍을 지니고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해 가는 보통사람들의 아름다움에 비할 것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