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대상 문예작품의 윤리성
김문환 / 서울대 교수
필자에게 주어진 제목은 "청소년대상 문예작품의 교도성"으로서 이는 "교훈적 내용의 작품이 오늘날의 청소년들에게 어떤 호소력을 갖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요청하고 있다. "교훈"이나 "교도"가 다같이 "가르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이미 그 안에 청소년을 하나의 객체로 삼고 있는 태도가 함축되고 있기 때문에, 필자에게는 마음내키는 용어가 되지 못한다. 예술작품에 대한 정의는 사람에 따라 무한히 다양하지만 그것이 비록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것일지라도 "자유"를, 또는 "자율"을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우선 주어진 제목에 들어있는 "교도성"을 "윤리성"으로 바꾸어 보았다. 필자가 뜻하는 "윤리성"이란 "윤리의식" 이라는 개념과 교환 가능한 것으로서, 후에 좀 더 자세히 살피게 되는대로, 무엇보다 "사회적인 갈등들을 의식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의사소통과 연관된 능력들을 작용케 하는 능력"을 지칭한다. 하버마스에 따라 좀 더 풀어 말한다면, "성숙한 윤리의식이란 근본적으로 공공연한 폭력이나, 값싼 협상을 배제하면서 갈등적인 행동들을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렇게 본다면 "청소년대상 문예작품과의 만남을 통해 자각을 바탕으로 대화의 수단을 통해 상호소통을 목표로 하는 꾸준한 행동을 어떻게 하면 내면화할 수 있도록 돕겠느냐 ?"하는 문제의식과 상통한다.
필자의 이러한 이해는 그러나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지 않는다. 예컨대 1984년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청소년주제 문예창작공모에 입선한 작품들의 작가가 가진 "교도성"의 이해가 그렇다. 필자가 관심하고 있는 희곡분야에는 모두 세 편이 입선작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윤동주의 생애를 다룬 "하늘, 바람, 별이 되어"를 제외한 다른 두 작품은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문제의식에서나 작법에서 수준미달이다. 남이 공들여 써놓은 작품을 이렇게 함부로 말해놓고 그 근거를 밝히지 않는다면, 자칫 명예훼손으로 질타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에 직접 관여할 생각이 없으나, 우선 이야기의 단초를 마련하는 뜻에서 두 개의 작품, 즉 「동서기의 딸」과 「阿斯達의 三代」의 작가들이 스스로 작성한 요약 중 作意에서 몇 귀절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동서기의 딸」의 작가는 이렇게 썼다. "얼핏, 줄거리로 봐선, 세속적인 멜로드라마다. 허나, 극중,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속물근성에서, 빚어내는 갖가지 사건들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소극물(笑劇物)이다. 정순이라는, 한 착한 여공의 얘기를 빌어서, 오늘의 세태가 보여주는, 이 한판의 코메디물을, 청소년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함께, 웃고 즐기다가, 막이 내리면, 뭔가, 씁쓸한 뒷맛의 <숙제>를 안고 나가게 하겠다는 것" 이 작의의 전부다. 핵심은 결국 "뭔가, 씁쓸한 뒷맛의 <숙제>"인데, 작가 자신이 이 정도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작의에서 나온 작품이 어떻게 보는 이에게 감동을 주고 그의 윤리의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 "한 착한 여공"이라고 했으나, 이 "착한"의 의미는 고작 아마도 칭찬을 받기 위해 봉급날 부모에게 선물을 사오고 자기를 짝사랑하면서 구애하는 청년에게 "비켜 ! 왜이래 ? 난, 바쁘단 말야 !…(뿌리치고, 달아나며 !) 미치겠네, 아침마다 !"라는 거친 말을 쏟아놓는 것으로 표현될 뿐이다. 게다가 억지스럽게 설정된 부자집 친구가 여행가면서 맡기고 간 목걸이를 목에 걸고 다니다가 그로 인해 사건이라기 보단 평지풍파가 일자 "이 나쁜 기집애야 ! 네 아빠가, 널 데리고 가서, 사줬다는 그 목걸이… 난, 싫다는데두, 억지고 날 맡기더니… 이 나쁜 기집애야 ! 그 목걸이 땜에, 울 아빠가 죽는단 말야 !"하는 책임전가의 욕설을 "미친 듯이" 퍼붓는다. 말하자면 굳이 여공이어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 작품은 산업사회 속에서 청소년이 겪는 갈등과 거의 무관하고, 거기에 표현된 윤리의식이란 서두에서 말한 성숙성과는 거리가 멀다.
「아사달의 삼대」의 작가는 구월산 유격대에 참전했던 상이용사 림장로와 그의 "대견한" 아들 딸을 아사달의 정신으로 교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퇴폐풍습"에 빠진 고종사촌 남매와 그의 무리들을 선도하도록 하고 있다. 아사달의 정신이란, 작가에 의한다면, "弘益人間精神,滅惡精神, 自主獨立精神, 勤儉精神, 滅共精神"을 말하는데, 림장로의 자녀들인 의학도 림통일 남매와 "심기일전"한 경식 남매는 "어제도 오늘 이 시각에도 아사달의 정신을 되새기면서 한걸음 한걸음 남북통일의 기초를 다지는데 정진하고 있다." 림장로의 딸은 집안청소를 하면서도 「아 ! 대한민국」을 부르게 되어 있다.
이 작품이 입선에까지 이른 경위에 대해서 필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예술을 빙자한 설교 내지 훈계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내건 공모의 목적과 방침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공모의 목적과 방침은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청소년주제의 문예작품과 청소년이 용이하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을 공급하며, 건전한 독서생활의 확산을 통한 청소년의 정서함양은 물론 투철한 민족관 및 역사의식을 지닌 새로운 청소년상을 정립하기 위함"이 그 목적이요, 이에 따라 "청소년의 민족의식, 역사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건전한 생활을 소재로 한 창작품을 공모"한 것이다. 동어반복이지만 그래서 작품내용은 "청소년의 민족의식, 역사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내용"과 "청소년의 건전한 생활을 소재로 한 내용"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제약이라면 제약 안에서도 작가는 물론 「하늘, 바람, 별이 되어」같은 수준작을 쓸 수 있다. 당선작으로 뽑아도 과히 빠지지 않을 이 작품에서 작가는 청년 윤동주의 생애를 그의 시작품을 곁들여가며 담담한 필체로 그려가고 있다. 지나치게 섬약하게 그려진 흠이 없는 것은 아니나, 민족과 시를 사랑하는 청년이 식민지 상황에서 겪어야 했던 갈등이 비교적 다양한 표현양식을 통해 제시되면서 우리로 하여금 자유·평화·인간애 등의 원리를 내성(內省)케 한다.
이 세 작품에 내재해 있는, 아니 거기서 추출해볼 수 있는 윤리의식의 수준은 각각 다르다. 우리는 이들의 차이를 현대적인 학문성과에 비추어 설명할 수 있다고 보기에 이하에서 이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발달 심리학의 여러 분야 중 특히 윤리의식의 성숙 정도에 관한 이론에서 굴지의 업적을 남기고 있는 미국 하바드대학의 교육사회심리학 교수인 로렌스 콜벅(Lawrence Kohlberg)은 윤리의식의 성숙단계를 6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이는 다시 3개의 수준으로 묶여지기도 한다.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콜벅은 연구의 첫 단계로서 10세부터 28세까지의 미국남자 50명을 추출하여, 18년에 걸쳐 매 3년마다 그들과 인터뷰한 결과를 정리하여 6개의 도덕발달 단계를 추출하였다. ① 물론 오랜기간동안 실험대상자를 연구해본 결과 4단계와 5단계 사이에 과도적 단계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도 했지만, ② 그의 이론을 거론할 때는 대개 6단계를 이야기하므로 여기에서는 그 6단계를 간략히 소개하고 이를 우리의 논의와 결부시켜 보도록 한다.
콜벅은 도덕 판단의 단계를 크게 세 개의 수준, 즉 각 수준을 다시 두 단계씩 세분한다. 인습이전 수준, 인습수준, 인습이후 수준으로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습 이전 수준
이 수준에서 어린이는 선과 악, 또는 옳고 그름에 대한 문화적 규범과 표지에 반응을 나타내긴 하지만, 이러한 규범에 대하여 신체적이거나 쾌락적인 활동의 결과(처벌, 보상, 호의의 교환 등)로써 또는 규범과 표지를 선언하는 신체적 권력자의 힘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 수준은 둘로 나뉜다.
1단계: 처벌과 복종지향, 행동에 대한 물리적 결과가 그 행동이 사람에게 주는 의미나 가치와는 상관없이 그 행동의 선악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처벌을 회피하기 위함과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은 처벌과 권위에 의한 기본적 도덕질서를 존경한다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가치 있게 여겨진다.
이 단계의 어린이들은 벌받는 일이 무서워서 반응을 나타내는데. 이것이 어른들에게는 자주 말을 잘 듣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 단계의 어린이들은 예컨대 "윗사람을 존경하라"는 규범이 왜 좋은지 그 이유를 묻지도 않고 단지 순종할 따름이다. 이렇게 본다면 악당은 망한다는 대부분의 우화나 동화의 교육적 가치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같은 이야기는 규칙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그 규칙을 어길 경우 이에 따르는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지적해 줌으로써 어린이의 윤리의식을 이 단계에 고착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2단계: 도구적 상대주의 정향. 올바른 행동은 개인의 필요들을 충족시켜 주며 때로 타인의 필요도 채워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관계는 시장에서의 관계와 같다. 공평, 상호성, 평등한 분배 등의 요소가 있지만, 이것들은 항상 신체적이며 실용적인 차원에서 해석된다. 상호성도 "네가 내 등을 긁어 주었으니가 나도 너의 등을 긁어줄게" 등의 정도이지 결코 충성이라든지 감사, 정의의 문제로 해석되지 않는다.
이제 아동의 선에 대한 동기는 처벌로 인한 두려움으로부터 상에 대한 희망으로 바뀌게 된다. 예컨대 여러 소년들이 나타나 노인을 조롱할 때 한 소년이 나타나 그 소년들에게 달려들어 싸움 끝에 그들에게 두들겨 맞게 되지만 가까스로 그들을 쫓아 버리게 되고, 조롱 받던 노인이 갑자기 굉장히 돈이 많은 사람으로 판명되어 이 "착한" 소년에게 사탕과 맛있는 것을 아주 많이 사주며 그 애와 불쌍한 애 엄마는 노인의 저택에서 살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이 단계의 어린이들은 즐긴다.
2단계는 선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개념을 갖게 되고 사회 내지 인간관계에 대해 보다 더 적절한 관점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아직, 이기주의적 요소가 뒤섞여 있다. 2단계를 그렇기 때문에 쾌락주의적이라고 부르게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컨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라는 금언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그보다는 인습이전의 구체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시각으로부터 집단의 가치, 집단의 실제, 규칙에 대한 인지적 인식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이 수준에서는 행동이 자신에 대한 결과에 상관없이 집단의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시켰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바뀐다. 이 수준을 콜벅은 인습 수준이라 부른다.
인습수준
이 수준에서는 개인의 가족과 집단, 그리고 국가의 기대를 유지하는 것이 즉각적이며 명백한 결과와 상관없이 가치 있게 지각된다. 이러한 태도는 개개인의 기대와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사회질서를 충실히 지키는 태도 즉, 질서를 잘 지키고 지지하며 옳다고 인정하는 태도이자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나 집단과 동일시하는 태도이다. 이 단계도 둘로 나뉜다.
3단계: "착한 소년, 훌륭한 소녀" 지향의 상호관계의 일치(interpersonal concordance). 선한 행동이란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도움을 주며, 또한 그들에게 칭찬을 받는 행동을 뜻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면서" 취하는 행동의 전형에 영합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단계에서 행동은 동기에 의해서 판단될 대가 많다. 즉 동기가 선하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성을 띠게 된다.
이 단계에서 어린이들은 말하자면 "역할분담"(roll-take)이나 "감정이입"(Empathy)의 능력에서 큰 변화를 일으킨다. 이 능력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마음과 위치에 자신을 놓을 수 있는 능력이므로, 여기에서 변화를 일으켰다함은 곧 이기주의의 한계성과 불만족성을 인식하고 집단협동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2단계의 이기주의적 사고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2단계에서 3단계로 바뀌면서 전에 즐거움을 가져다주던 보다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보상 대신에 "다른 사람의 칭찬"이라는 상대적으로 덜 구체적인 형태의 즐거움이 들어선다. 즉, 신체적 즐거움을 얻으려던 노력이 자신의 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써 생기는 심리적 즐거움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바뀌는 것 같다.
이렇게 해서 3단계에 있는 어린이들은 2단계 때 보다 사회에 대해 보다 폭넓은 시야를 가지며 규칙과 역할의 목적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보다 우월하다. 이 단계에서는 집단은 하나의 당연한 실체이며 집단의 규칙은 개인 각자가 전체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하는 미리 정해진 역할을 규정하는 규칙이다. 선하다는 것은 그러기에 자신의 위치에 잘 적응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기에 집단을 위해 큰 일을 한 영웅을 열렬히 숭상한다.
여기에도 그 나름의 문제가 있다. 그들의 이상은 천진난만하며, 판에 박은 형태를 띄운다. 따라서 어떤 행동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세워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될 때 당황하고 만다. 더구나 자신의 역할을 적당히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 이러한 곤란은 배가된다. 나아가 여기에서 말하는 집단과의 일체감이 반드시 가족이나 교회, 또는 국가와의 일체감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또래 집단과의 일체감이 그 예인데, 3단계의 어린이 또는 청소년이 가정이나 학교, 또는 사회가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학교나 가정에서 얻지 못하는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집단과 친화감을 느끼고 이에 가담할 수 있다. 그 경우 어른들은 이를 무조건 위험시하는데, 궁극적으로 볼 때, 그것이 어느 집단이든 만일 청소년이 이 단계에 고착된다면 윤리적으로 결코 성숙한 단계라고 볼 수는 없다. 물론 우리는 아동이 가족, 학급, 건전한 소속집단과 일체감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인류라는 보다 큰 집단으로 확장되도록 자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 단계에 속한 이들은 역할의 갈등을 일으키며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에 따라 살지 않으며, 사회란 목표와 가치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여러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렇게 갈등의 해결을 모색하면서 4단계로 이행한다.
4단계: 법과 질서 지향. 이 단계에서는 청소년들이 권위, 고정된 규칙, 사회질서 유지에 적응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옳은 행동이란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권위를 존경하고 주어진 사회질서를 그 질서 자체를 위해 유지하는 일이다,
이 단계에서는 추상적 능력이 더욱 발달하여 자기를 단순히 특수집단의 한 구성원으로만 보지 않으며, "사회의 일반구성원"으로 생각하게 된다. 즉, 집단에 대한 충성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개인적 관계, 좋은 동기도 충분치 못한 것으로 느껴진다. 오로지 누구든지 법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이 단계에서는 따라서 법을 어기는 사람에게 동정은 하지만 이 동정은 규칙과 권위를 엄격하게 고수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질서를 지켜야겠다는 관심 때문에 무시되는 경향이다. 즉, 법에 대한 의무가 친구나 집단에 대한 의무에 선행하는 단계로서, 3단계에서는 사람들에 대해 애착심을 가지며, 동기를 귀중히 여기며, 강력한 충성심을 나타내며, 이 충성심 때문에 잘못을 눈감아 주는 경향이 있는 반면, 4단계에서는 법칙은 곧 사회질서와 개개인의 권리를 궁극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오도된 충성심과 좋은 의도가 사회질서를 위협하게 되면 그것은 눈감아 줄 수 없으며,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이 4단계만 해도 상당히 고도한 차원이며, 대다수의 성인들도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참고하고 있는 더스카와 휠런은 "법에 대한 이 같은 유의 존경심에는 이기주의가 없다. 보상에 대한 기대도 없고, 오직 자신의 임무를 계속 수행코자 하는 기대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집단의 인정 같은 것도 도외시된다."고 하면서, 이 4단계의 진정한 영웅은 "주변에서 아무리 비난을 해도 법을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부연한다. 이러한 설명은 자칫 오해되기 쉽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 있다고 자칭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이기주의를 집단적 이기주의에 침윤시켜 표면적으로는 이기주의를 초극하고 법과 질서에 충실한 듯 하지만, 실상 이러한 법과 질서의 준수를 개인적 이기주의의 보장을 위한 교묘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위의 두 사람도 콜벅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법이나 질서, 또는 규범을 판정할 기준을 요청하는 다음 단계들을 인정하고, 이를 설명한다. 즉, 수용되어 온 전통과 사회 전체의 기준이 문제가 된다. 이처럼 규범을 판정할 원리에 대한 인식과 연관된 차원을 콜벅은 인습이후 수준이라 일컫는다.
인습이후 수준
이 수준에서는 일정한 타당성을 갖고 적응시킬 수 있는 도덕적 가치와 원리에 대해 그 원리를 따르는 집단이나 개인의 권위, 개개인이 집단에 대해 나름대로 갖고 있는 일체감 등과 관계없이 그 정의를 내리려는 노력이 명백하게 엿보인다. 이 수준도 사회계약법적 지향을 갖는 5단계와 보편적인 윤리적 원리 지향을 갖는 6단계로 나뉜다. 지면 관계상 줄여 말한다면, 5단계에서는 법적인 관점이 여전히 강조되기는 하지만, 4단계인 법과 질서의 단계에서와 같이 법과 질서를 엄격하게 유지하고자 했던 것보다는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생각해낸 결과에 따라 법률을 바꿀 수도 있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법적인 영역을 벗어난 자유로운 합의와 계약이 의무적인 구속여건이 된다. 이는 예컨대 미국정부와 헌법이 표방하는 "공식적" 도덕성이기도 하다.
6단계는 정의와 인권의 상호성과 개개인들로서의 인류의 존엄을 존경하는 보편적 원리로 대표되는데, 정당성에 대한 정의가 10계명과 같이 구체적인 도덕규칙이 아니라 논리적인 이해와 보편성과 일관성에 호소하는 본인 스스로 택한 원리에 일치해서 양심에 따라 결정된다.
요컨대 이 인습이후 수준에서는 무엇보다도 자율성이 특징을 이룬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동안 어떤 권위가 시키는 일만을 단지 두려워하기 때문에(1단계), 또는 즐거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에(2단계), 또는 자신이 속한 단체가 원하기 때문에(3단계), 또는 하나의 법이기 때문에(4단계) 해왔다면, 그에게서는 아직 자율성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원리적인 수준의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며, 자신이 속한 집단과 대립하게 될 때는 다른 사람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이에 혼자 맞서며, 양심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그 집단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자율성이 개방성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상으로 우리는 소략하나마 한마디로 윤리니, 도덕이니 하지만 그 안에 여러 단계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콜벅의 이론 자체에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지 않으며, 이에 동조하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예컨대 하버마스는 "규범을 정당화하는 원리는 더 이상 단자론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바의 일반화의 원리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콜벅의 마지막 단계인 양심 지향의 6단계를 넘어선 7단계, 곧 규범적으로 정당한 주장들을 추론적으로 재사고 하는데 있어서 공통적으로 수반되는 바의 절차를 중시하는 단계를 설정하고 있으나, 이는 윤리학의 전문영역에 속하므로 이 자리는 논의하기에 적합하지가 않다. 단지 제 아무리 훌륭한 지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상을 지향하면서도 정당한 합의적 절차를 거친 것이 아니면 이데올로기화 할 위험이 농후하다는 것이 이 7단계를 설정하려는 의도의 배후에서 작용한다는 정도만 이야기해 두기로 한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보이는 선한 삶의 이상은 칸트에서 보는 단순한 도덕적 자유가 아니라 "도덕적인 동시에 정치적 자유"인 것이며, 정당성의 영역은 "사적 개인으로서의 모든 인간"이 아니라 "가공적인 세계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모든 사람"인 것이다. ③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자. 우리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예술작품의 윤리성을 논의하는 그 근본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 만일 그것이 청소년으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성숙한 존재로 이끌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항상 낡은 정체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토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④ 이를 위해서는 우선 대상층의 의식수준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통계적으로 보아 5살까지는 이른바 윤리의식의 영점지대에 속하고, 인습이전 수준은 대개 10세까지, 인습수준은 대개 13세까지, 인습이후 수준은 대개 25세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략적인 영역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⑤ 우리의 경우 문화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특히 인습수준 기간이 서구문화권보다 긴 것으로 생각되나 통계적인 자료가 없어 단언하긴 어렵다. 서구에서도 많은 성인들의 윤리의식이 기껏해야 4단계에 머물고 있거나 그보다 낮은 단계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이미 제시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윤리의식을 여러 단계로 구분해보는 것이 각자가 자신의 의식이 어느 단계에 처해 있는가를 인색케 함으로써 다음 단계로 향상하도록 촉구하기 위함임을 강조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라나는 세대로 하여금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단계와 접촉할 수 있게 함으로써 현실에 안주하거나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적인 갈등을 객관화하고 나아가 그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촉진할 수 있게 하려는데 이러한 논의의 진정한 목표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2단계에 속한 자기중심주의자는 처벌의 두려움을 기초로 하는 1단계에 추론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들을 위한 충성을 고려하도록 자극되어야 한다. 실제로 대개의 인간은 환경이 이를 허용하는 한 자신의 단계보다 하나 더 높은 단계에 이끌리는 성향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한 갈등을 경험하는 상황을 설정하여,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추론구조가 너무 제한되어 있어서 갈등을 통해 나타나도록 의도된 새로운 시각을 포용하지 못함을 자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연시간이 긴 작품보다는 소규모집단이 간단히 응용할 수 있는 사례를 공모하는 것이 더 필요할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콜벅이 발견한대로 인지적 자극을 일으키는 성공적인 방법은 보다 높은 사고 단계로 학생을 노출시키고 학생의 사고 수준에 인지적 갈등을 유발하도록 고안된 "토론"이 행해지는 도덕교육 그룹의 창출이기 때문이다. 역할놀이(role-playing)의 유효성이 자주 언급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역할놀이는 청소년들이 자기자신 이외에 타인의 관점을 통해 사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역할놀이나 토론을 위한 딜레머들이 진정한 도덕적 갈등, 즉 생명과 소유권, 법, 양심, 진리, 권위와 같은 상황에서 인간의 복지와 정의를 내포하는 문제들이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절바름, 정중함, 교실 내의 질서 등에 대한 질문은 일반적으로 도덕적 갈등을 일으키는 바탕을 수반하지 않는다고 전문가들은 충고한다.
이제 우리는 앞에서 예거한 두 작품이 왜 문제거리가 되는지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각각 불쾌의 극소화나 쾌의 극대화를 은연중 옹호하거나, 인습적으로 통용되는 일차 내지 이차적 집단의 구체적 도덕성을 이상으로 삼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아무런 갈등이나 반성의 계기를 허용하지 않은 채 "정답을 통한 빠른 해결"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지면이 다했고, 이 글은 어디까지나 토의유발을 위한 발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필자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삼가하려고 하지만,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작품 공모가 개연적으로나마 연령층을 고려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각각의 작품은 이를 감상하는 청소년이 그것을 통해 도덕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적용할 수 있는 사고능력의 함양을 도와주고, 자신의 현재 수준이 부적합하다는 것을 깨달아 좀 더 적합한 구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답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제시해야 한다는 기준을 설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도덕발달은 인지구조의 기본적 변형을 수반하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고 단계적이며 점진적인 과정이며, 어떤 구체적 문제에 대한 한 개인의 관점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추론 방식을 변형시켜 전에는 고려하지 않았던 판단의 근거를 포함하도록 개인의 시각을 확대시키는 것임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끝으로 이러한 일종의 학습은 결코 현재처럼 주지주의적 교육만을 교육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상황에서는 결코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첨언코자 한다. 예술을 통한 교육은 어디까지나 정의적인 교육이고, 태도변화를 위한 실천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이는 단순히 학교에서의 정규교육과정으로 충족될 수가 없다. 흔히 문제가정에서 문제아가 생긴다고 하지만 문제사회가 더 큰 해악을 미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상은 "청년의 해"라고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여하간에 "청소년의 해"를 맞아 갑자기 청소년을 문제시하고 이들을 위한 여러 대책을 마련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기성세대가 과연 청소년들과 떳떳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가를 반성해 보는 일도 그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절실히 요청된다고 본다. 발달 또는 성숙이란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 과정의 결과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환경의 특질은 개인의 성장속도와 개인이 획득하는 발달수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註>
①콜벅의 이론에 대한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우리말 자료는 다음과 같다. 로널드 더스카·마릴린 휠런 공저, (삐아제-콜벅 道德發達入門/서울, 정경사,1984), 원제 : Moral Development : A Guide to Piaget and Kohlberg(1975)본문의 콜벅 소개는 이 책의 제2장 콜벅의 도덕발달론을 주관으로 요약한 것이다.
②이 과도기적 단계의 특징은 회의, 상대주의, 그리고 냉소적인 이기주의로 이야기되는데, 크게 보아 대학생들의 의식상태와 상통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즉 사회가 온통 속임수와 위선으로 가득찬 것으로 보이는 반면, 자신은 사회가 알고 있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러나 인습 수준에서 배운 오랜 전통과 가치관과 신념으로부터 소외당한 사람이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취하게 되는 최초의 모험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註①의 저자들은 이것이 그들 새로운 단계의 도덕발달 수준으로 이끌어 가려 하는 反 자기중심적 경향에 대한 하나의 적극적 긍정이라고 보았다. 허버마스가 프로이드 이론에서 끌어들인 "위기"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지만, 상론은 피한다.
③참조 Jurgen Habermas, Zekonstruktion des Hist-orischen Materialismus. (Frankfurt am Main, 2 Aufl. 1976). pp.63∼91. 필자는 이와 관계된 기초적인 논의를 다음 글에서 다룬 바 있다. 예술과 윤리의식 : 철학적 미학의 역사적 주류를 재구성하기 위한 유형학적 시도, 美學 제9집, (한국미학회, 1983). 특히 pp.35∼48을 참조할 것.
④註①의 책 제Ⅵ장은 도덕발달이론의 실제적 적용을 위해 제안하고 있는데 참고할 만하다. 작품구상을 위해서는 부록으로 실려 있는 삐아제의 도덕적 판단의 실례나 콜벅의 도덕적 판단 상황을 위한 설문도 도움이 될 것이다.
⑤콜벅은 대부분의 소년들이 1단계와 2단계의 추론에 머물고 13세에 이르러서야 3단계와 4단계 추론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에 따르면 대체로는 16세와 20세 사이에서 4단계의 과정을 통과하는 4½단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설명되나, 이러한 연령 설정 역시 어디까지나 개연적이다. 콜벅은 또한 교사들을 위한 연령단계지침서를 작성했는데 이에 의하면 10세에서 14세에 이르는 대다수 소년 소녀들은 1단계와 2단계, 14세에서 16세에 이르는 대상은 3단계와 4단계 수준에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Rainer Dߧberz와 Gerturd Nunner-Winkler의 Adoleszenzkries und Identitatsbildung(Franlfurt am Main, 1975)를 참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