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민족박물관을 보기로
조흥윤 / 한양대 교수·인류학박사
머리말
우리 나라에서는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이라는 학문분야의 성격이 아직도 널리 인식되지 못한 형편인데 민족학(Vߦlkerkunde)의 것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민족학이 어떤 것인지 먼저 그 대상을 살피고 넘어가야 하겠다.
민족학은 諸민족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 연구대상이 같음으로 해서 '좁은 의미의 문화인류학'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학문분야는 문화의 특성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비교방법을 쓰거니와, 아울러 역사적 고찰을 그 특징으로 하는 점에서 문화인류학과 차이를 보인다. 이 용어는 독일어의 Vߧlkerkunde나 Ethnologie, 또는 영어의 ethnology를 한자(漢子) 개념으로 옮긴 것이다. 중국의 경우 Cai Yuanpei(蔡元培)가 1926년 《설민족학(說民族學)》이란 글에서 minzuxue(민족학)라는 용어를 제일 먼저 사용하였다. 그 전후해서 여러 다른 용어들, 예컨대 민종학(民種學), 인종학, 인류학, 인류 문화학 등이 쓰였으나 최근에 들어 민족학이 주로 통용되고 있다.
이러한 민족학 및 민족지학(民族誌學: Ethnographie: ethnography) 관계 유물을 수집 연구하고 또 민족학의 연구성과에 힘입어 전시를 마련함으로써 일반대중의 교육에 임하는 학술기관이 민족박물관(Museum fʛr Vߧlkerkunde)이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런 박물관의 형성과 기능을 살펴보려 한다. 나는 1976년 함부르크 민족박물관에 인연이 닿아 작년 귀국할 때까지 그 곳 동양학부의 연구원 및 객원으로 있으면서 보고 배운바 많다. 그래서 이 주제에서는 특히 그 박물관이 보기로 들어진다.
우리 나라는 최근 민족학(인류학)박물관을 설립하려는 의욕을 보이고 있고, 또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할 의의가 있는 터이니, 이 글이 그런 일에 참고되었으면 한다.
Ⅰ. 민족학박물관의 형성
민족학박물관의 전사(前史)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초의 골동품수집에서부터 살펴진다. 그 가운데는 다른 민족들의 토산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컨대 폰 작센(A. von Sachsen)의 수집 품에는 특히 이민족(異民族)들의 도구나 무기들이 들어 있었다. 종종 베를린 수집 품의 창시자로 불려지는 대선거제후(大選擧帝候)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idrich Wilhelm Ⅰ; 1713∼1740)도 특히 남 및 동아시아의 무기와 도구와 토산품들을 수집하였다.
그와 더불어 수집 품의 분류가 시도되었는데, 16세기에는 의사였던 폰 크뷔커베르크(S. von Quickerberg)가 다섯 범주로 나누었다. : 1. 역사적 사건들의 삽화 2.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작품 3. 자연산물 4. 모든 종류의 기구 5. 모든 종류의 회화. 마찬가지로 의사였던 마요르(Mayor)는 17세기에 자연과학적 유물과 미술사적 유물의 구분을 제시하여 주목을 끈다. 그밖에도 점차 유물의 재료나 용도, 그리고 경제형태의 차이에 따른 분류도 시도되었다.
이들 수집 품은 부유층이나 귀족이나 또는 거주가문(居主家門)들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사회적 상황이 아직도 전통신분제적이었으니 그 점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 그러나 바로 그 시대에 서유럽에서는 계몽주의와 이성주의의 정신적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학자들은 모든 자연계의 연구에 열을 올렸는데, 거기에는 갖가지 인간 종류만이 아니라 그 각각의 문화형태들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 가운데 특히 죠프레(L. -F. Jauffret)는 그런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한 인종의 개인 및 육체적 본보기로서의 인간을 연구해야 할 뿐 아니라 여러 인간집단들의 사회 및 문화에 대해서도 조사해야 한다. 그래서 언젠가 여러 민족들의 풍속습관(風俗習慣)에 관한 포괄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서는 먼 이국(異國)들에 관한 자세한 여행기(旅行記)가 있어야 하겠고 그밖에도 특히 역사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 못했기에 전혀 알려져 온 바 없는 고대민족들에 대하여 새로이 연구되어야 한다."
그러한 관점들로부터 민족지학적 박물관(ethnographical museum)들을 설립해야 한다는 요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들 박물관의 수집 및 연구대상으로는 역사를 갖지 않는, 유럽 밖의 모든 민족들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18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동물 또는 식물 박물관들의 연구활동에 의하여 자연과학의 연구는 상당한 지경에 진전하여 있었으나 문화면의 것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런 박물관의 설립으로 그 떨어진 바를 따라 잡으려 한 것이었다. 18세기 말경에는 이러한 정신적 조류의 영향아래 괴팅겐(Gߧttigen) 대학교에서 왕립아카데미 박물관(das kߧnigliche academische Museum)이 세워졌다. 그리고는 민족학에 관한 강의가 있었는데, 민족학의 수집유물이 그 강의시간에 실증적으로 제시되어졌다.
19세기는 전체적으로 보아 민족학이 여러 연구기관으로 형성된 시기였다. 그러한 결성은 여러 방향으로 나타났으니 학회들이 창립되고, 학회 지들이 창간되었는가 하면 대학교에 그 전문학과가 생겨나고 민족학박물관이 건립되었다. 그것을 연대순으로 살펴보면 1837년에 페터스부르크(Petersburg), 1843년에 드레스덴(Dresden), 1848년에는 코펜하겐(Kopenhagen), 1868년에 베를린(Berlin), 그리고 1879년에는 함부르크(Hambrug)에 민족학박물관이 세워지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경에 민족학박물관이 이처럼 독립적인 학문기관으로 형성되기에 이르거니와, 그것은 정치, 경제 및 학문분야에서 서유럽 세력이 팽창한 결과임을 지나쳐 볼 수 없다. 거기다 다윈의 진화론(進化論)과 결부된 발전사관(發展史觀)이 이내 문화사에도 적용되어졌다. 그리하여 유럽인들은 인간의 문화란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형태로의 발전이며 여러 다른 문화들의 도움을 빌어 유럽의 제반 고등문화에 이르는 그 발전 과정이 복원되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족학박물관이 돌연히 형성된 것은 아니다. 대개 다음과 같은 세 형태의 경로를 거치면서 민족학박물관으로 점차 성립되어져 갔다. : 첫째, 개인 소장의 유물들이 그 소장자의 개인 및 가문의 명성이나 재정적 혜택을 염두에 둔 채 고향 시에 기증되어졌는데 퀼른(Kߧln)의 라우텐쉬트라우흐-외스트 박물관(das Rautenstrauch-Joest-Museum)이 그 보기에 해당한다. 다른 경우에서는 왕후가(王侯家)가 그 (王室) 소장품을 특별 소수 인에게 공개하고 후에는 일반대중에게도 보여주어 그것이 뒷날 민족학박물관의 모체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보기로 빈(Wien)의 프란트 1세(Franz Ⅰ.)는 그의 미술 및 토산물 소장 실들을 처음에는 학자나 학생이나 특권층에게 공개하였으며, 1876년 자연사박물관의 설립으로 그것은 다른 유물들과 함께 인류학-민족지학부(anthropologisch - enthnographische Abteilung)에 자리잡았다. 그 부서는 훗날 빈 민족학박물관으로 독립한다. 베를린이나 드레스텐의 민족학박물관도 같은 경로를 밝았다. 끝으로 박물관협회, 기타 미술, 고대 및 자연협회들이 재원부족, 유물보존공간의 문제 등으로 그 소장품을 시에 넘기고, 그것이 이후에 민족학박물관으로 발족하는 경우를 본다. 예컨대 함부르크, 브레멘(Bremen), 뤼벡(LüBECK), 라이프찌히(Leipzig), 프랑크푸르트(Frankfurt), 만하임(Manheim),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민족학박물관들이 그러하였다.
이들 민족학박물관들의 형성을 개관하건데 그 유물수집이 절정에 이르는 두 번의 중요한 시기가 두드러지게 보인다. : 18세기에는 포르스터 형제(G. Forster와 J. R. Forster), 쿡(J. Cook), 폰 아쉬(G. F. von Asch), 폰 비드(G. F. von Wied), 폰 나사우(M. von Nassau) 등의 대규모 조사여행을 통하여 숱한 민족학 유물이 수집되었다. 그리고 1870년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독일의 식민지를 통하여 동아프리카, 남태평양, 청도 등지에서 많은 유물들이 모아졌던 것이다.
Ⅱ.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의 역사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Hamburgisches Museum für Völkerkunde)은 그것이 하나의 독립된 박물관으로 발족하기 이전에 두 번의 전 단계를 거친다. 그 첫 단계인 1849∼1871년 사이에는 함부르크 시립도서관의 민족지 관계 수집 품이 그 기원이 되고 있다. 함부르크는 한자도시(Hansastadt)의 일원으로서 국제 무역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니, 당시 해외를 드나들던 시민들에 의한 기증품이 그 유물의 주종을 이루었다. 소장품의 관리는 함부르크의 자연과학협회가, 그리고 뒤에는 자연사박물관이 맡았다. 1867년에 645개 품목에 달하였고 이들은 대륙별로 나뉘어 일정한 날에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그 둘째 단계(1871∼1878년)는 민족학박물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그 민족지 관계 유물은 1871년 자연사박물관에서 분리되어져 문화사박물관(Culturgeschichtliches Museum)이라는 공식적인 이름을 받고, 또 보잘것없기는 하나 예산도 할당되었다. 한편 미술공예박물관(Museum für Kunst und Gewerbe)이 이미 개인 주도아래 열어 있었는데, 1877년에는 시가 그것을 인수하면서 문화사박물관의 미술공예 유물을 그곳으로 넘겼다. 이 두 박물관의 성격은 그런 만큼 겹치는 부분이 많아 그것을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절실하였다. 거기다 유물수가 크게 불어나자 전시와 보관도 큰 문제였다.
이에 그 박물관 관계 인사의 진정, 언론계에서의 비판 그리고 시민대표단의 청원 등이 꼬리를 물자 끝내는 시 소속 건물에다 보다 넓은 공간을 얻게 되었고, 1878년 말에는 유급직원 2인과 유물구입예산이 배정되면서 박물관의 이름을 민족박물관(Museum für Völkerkunde)으로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이제는 박물관의 성격이 민족학 내지 민족지학 관계 유물의 수집과 전시에 전문화되어야 하고 그 명칭도 보다 독일 적인 것이어야 하겠다는 뜻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새로운 박물관의 명칭은 1879년 4월 규정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공표 되었고 무역상인 출신인 뤼더즈(C. W. Lüders: 재임 1879∼1896)가 그 첫 대표로 선임되었다.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의 역사는 그후 다음의 일곱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른다. : 1. 초기: 뤼더즈 아래서의 시작(1879∼1896) 2. 대표와 관장 사이의 과도기: 하겐(K. Hagen)의 재임기(1896∼1904) 3. 전성기: 틸레니우스(G. Thilenius) 재임 초반기(1904∼1918) 4. 실망기(失望期) : 두 세계대전 사이의 박물관 (1919∼1939) 5. 대손실기: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박물관(1939∼1945) 6. 전시 및 조사기: 터머(F. Termer) 아래의 전후 기간(1945∼1962) 7. 새 이념기: 박물관의 현대화의 길(1962∼ ).
박물관의 명칭을 확정지움으로써 시작된 제1기에는 아울러 민족학박물관의 사명이 제시된다. 민족학박물관은 "이민족들의 문화와 관련 관계된 도구, 판식(販飾), 무기 및 기타 물품의 수집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직원을 두게 됨에 따라 주 6일 개관이 가능해지고 관람객의 수는 줄곧 증가하였다.
이처럼 독립된 박물관이 되고 난 다음 그 본격적 유물 수집을 목적으로 취해진 조치는 크게 주목을 끈다. 1880년 박물관위원회는 "해외에 있는 우리 시민들에게"(An unsere Mitbürger im Auslande)라는 격문을 전세계에 띄운다. 거기에는 먼저 함부르크의 학문기관으로서 시민들이 크게 찾는 민족학박물관이 설립되었음이 밝혀 잇고 그것을 국제무역도시 함부르크에 걸맞은 학술기관으로 만들어야 하겠다고 강조되어 있다. 그에 따라 諸이민족의 풍속습관, 종교 및 사회생활, 그리고 예술과 공예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물품들의 증여를 촉구한다. 위원회는 그 민족들의 당시 문화에서 유래한 물품, 그것도 특히 유럽문화에 의한 영향이 있기 이전의 것들을 환영하고 있다. 그 격문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여하튼 각 대륙별 유물의 수는 매년 급증하였고, 박물관 측은 그 공간 사정에도 불구하고 유물을 꾸준히 사들였다. 그 결과 박물관의 내부공간이 터질 지경이 되고 각계각층의 비난이 시에 쏟아지자 1890년 박물관은 자연사박물관의 로비층을 차지할 수 있었다.
1896년 말 뤼더즈는 병으로 죽고 만다. 그는 거금을 박물관에 유증(遺贈)하고 그 이자를 유물구입에 쓰도록 하였다. 그가 대표로 선임 될 당시 1,834를 헤아리던 유물 수는 18년간 11,946으로 불어났고 박물관 도서관은 790권의 장서를 비치할 수 있었다.
제2기의 과도기는 박물관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대표의 자리를 비워둔 채 박물관 직원 하겐에 의해 이끌어졌다. 위원회는 이제 관장으로서 전문학자를 모셔야 하고 박물관 건물의 신축도 있어야 함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물 수를 늘리려는 의욕은 식지 않아 여러 독일 식민지로부터의 무더기 기증, 구매, 그리고 식민지 관계 인사들로부터의 유증이 줄을 이었다. 이 기간에 처음으로 박물관 후원인 들로부터 기부의 형식을 띤 재정지원이 있었음은 특기할 만 하다.
1904년 드디어 틸레니우스(G. Thikenius) 교수가 36세의 한창 나이로 관장직에 임명되고 함부르크 민족박물관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 그 전성기를 맞는다. 그를 추천한 베를린의 발다이어(Waldeyer) 교수는 "박물관이 대중을 위하여 존재하고 그 교육적인 면을 감당해야 함을 그는 잘 알고 있으므로 박물관을 크게 발전시킬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틸레니우스는 이내 박물관 신축과 유물수집의 확장이라는 두 가지 큰 계획을 움켜쥐었다. 박물관 신축 얘기는 벌써부터 거론되어 온 터였다. 그러나 그것이 새 관장과의 상의 아래 되어야 한다는 담당 관장의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거기에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로텐바움쇼세(Rothebaumchaussee)에 2,600㎥의 부지를 마련하고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여 그 공상에 착수한 것은 1907년, 틸레니우스는 그 건물설계와 관련하여 이미 그전에 건물의 외형이 뒷날 건물의 확장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할 것, 그리고 내부공간은 학문연구는 물론 방문객의 교육에 적합해야 함을 못박아 두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내부처리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국내외의 이름난 박물관들을 찾아 견학하였다. 공사가 끝날 무렵에도 그는 전시 기술의 연구를 목적으로 유럽의 큰 도시들을 순회하였다. 박물관이 완공된 것은 1912년, 다섯 해가 걸린 대공사였다. 내부공사는 그러고도 두 해가 지나서야 완결된다.
박물관의 신축 외에 틸레니우스에 시급하였던 것은 유물수의 증가였다. 그것도 가능한 한 지역별로 완벽한 유물 군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 비용을 위해서는 원래의 예산외에 각계로부터의 기부금 모금, 은행대부 등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다. 유물수집의 방법에는 구입이나 기증이나 발굴을 통한 것이 있었으나,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연구 및 수집여행을 위촉하거나 직접 그것을 편성하여 파견한 그의 적극적 태도였다. 그 가운데 프로베니우스(L. Frobenius)가 박물관과 계약을 맺고 1905∼1907년, 1910∼1911년 및 1915∼1917년의 아프리카 연구여행으로부터 3만 점에 가까운 유물을 수집한 것이 두드러진다. 1907, 1908, 1911년에는 톰스크(Tomsk)의 독일계 무역상사로부터 약 800점에 달하는 시베리아의 고고학 관계 유물을 사들였는데 미누신스크(Minussinsk) 지역의 청동기들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박물관의 최대 업적이자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이 그 이름을 일약 세계에 떨치게 된 것은 남태평양탐험대(Südsee-Expedition)의 파견이었다. 관장으로 취임한 그 이듬해 틸레니우스는 이 계획을 담당 관장에게 올리고 그 실행을 끈질기게 고집하여 1908년 드디어 탐험대를 떠나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각계 전문분야의 학자들과 전문요원들로 구성된 이 탐험대는 2년에 걸쳐 미크로네시아와 멜라네시아 일대를 조사하고 1만 8천에 가까운 유물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틸레니우스의 이 같은 조직력과 열성의 덕에 1904년에 2만 남짓하던 유물수는 1915년 십만 오천 가까이 헤아리게 되었다. 1935년 그것은 십칠만오천을 넘는다. 이들 수집 품은 인류학의 일반적인 연구대상인 이른바 원시민족들 뿐 아니라 모든 대륙의 고등문화권에서도 유래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는 심지어 유럽 민족들의 문화재도 포함되어져 있다.
1919년에서 1939년에 이르는 제 4기는 박물관으로 서 실망기였다. 지난 전성기 말경에 있었던 1차 세계대전으로 이미 많은 인원을 잃어버렸고, 이어 들어 닥친 경제공황으로 활동이 위축되었으며, 종내는 제3제국의 등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레니우스는 보아스(Franz. Boas)와 상의하여 1930년 제24차 국제 아메리카 학자 대회를 함부르크에 유치, 개최하였다. 그러나 나치당의 집권으로 국내 사정은 점차 어두워 가고 문화면에도 간섭이 심해졌다. 1935년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던, 유대인 제의(祭儀)도구의 소규모 전시가 혹독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틸레니우스는 같은 해 말 끝내 관장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터머(F. Termer)가 그의 뒤를 이어서 1962년까지 박물관을 끌어나갔다.
이 기간 동안 틸레니우스와 터머, 그리고 제5기인 대손실기에는 터머가 그 어려운 시절을 슬기롭게 대처해 나갔다. 그들은 결코 나치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민족학박물관인이자 학자로서의 길을 늠름히 걸어갔던 것이다. 나치의 대두에서 독일의 패망에 이르는 동안 박물관 식구들을 옹호, 보호하고, 유물구입을 중단하기는커녕 사람들을 세계의 곳곳으로 보내어 적극적으로 유물을 수집하게 한 일 등에서 그들의 자세가 잘 드러난다. 특히 전쟁이 격렬해지자 직원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적시에 소장 유물들을 여러 곳에 소개시킨 터머의 공적은 작지 않다. 그러했지만 폭격과 그 환란통에 약 7만 점의 귀중한 유물이 파손되었으니 박물관의 아픔은 몹시 컸다.
종전(終戰)이 되자 박물관은 이내 "아랍 민족들과 그 문화"라는 주제의 특별전시회를 연다. 박물관의 복구를 위한 많은 일이 있었건만 대중을 위해 거기 있는 박물관의 임무가 한시도 소홀히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이후 박물관은 그 재건에 주력하여 각 부서별 상설전시장을 새로 꾸미는 한편 유물수집과 연구활동에 힘을 쏟는다. 그리고 최근에 해당하는 그 마지막 기에는 박물관의 편제를 거듭 가다듬고 새로운 이념을 세워 박물관을 현대화하려는 노력이 경주된다. 박물관의 관장은 틸레니우스 이래 함부르크 대학교의 민족학과 교수직을 겸하여 왔는데 피셔(H. Fischer) 관장이 1970년 끝내 이 둘을 분리시키고 관장은 오로지 박물관에 전념하게 만든 것은 그의 노력의 일환이었다.
함부르크의 민족학박물관의 긴 역사를 우리는 위에서 대충 살펴보았거니와, 거기에 하나의 일관된 진지한 노력이 있어 온 것이 뚜렷이 보인다. 뤼더즈, 틸레티우스, 터머 같은 이들은 민족학박물관의 중대한 사명을 분명히 인식하고서 모두 반평생을 박물관에 바쳐 가며 각 문화권의 유물을 수집하였고 그 전시에 마음을 썩혔다. 그것이 바로 한자 시 함부르크의 시민의 교육을 위한 것이고 함부르크의 문화를 높이는 길이며 학문에 기여하는 일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일을 위해서 전문학자의 양성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래서 틸레니우스, 터머 등은 함부르크 대학교의 민족학과를 함께 이끌어 가면서 훌륭한 민족학자들을 많이 키웠다. 같은 박물관의 역대 관장들이 거의 그들의 제자인 것은 그 사정을 잘 보여준다.
Ⅲ.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의 구성
박물관의 직원들은 스스로를 학자(Wissenschaftler)와 비학자로 크게 가른다. 박물관 안에서의 이 같은 막연한 구분은 다분히 감정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여하튼 학자라고 하면 학문연구에 종사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으로는 관장을 위시하여 각부의 부장, 볼론테르(Volontär)라 불리는 유급견습직원, 그리고 학생들로 충당되는 보조연구원(Hilfskraft)을 들 수 있다. 그밖에 무직학자들이 해마다 몇 명씩 계약되어 그 기간동안 연구에 종사하고, 드물게나마 객원(Visiting scholar)이 연구목적으로 박물관에 머문다.
현재의 학술 부서는 1. 미대륙 학부(Abt. Amerika), 2. 아프리카 학부(Abt. Afrika), 3.동양학부(Abt. Süd-und Ostasien), 4. 유라시아 학부 (Abt. Eurasien), 5. 남태평양 학부 (Abt. Südsee), 6. 박물관교육 학부(Abt. Museumpädagogik)의 여섯으로 되어 있다. 민족학 내지 인류학박물관에서 부서를 이처럼 대륙별로 나누는 것은 보통이다. 그중 박물관교육학부는 좀 별다른 것으로서 1979년 민족학을 전공하고 교육학을 부전공한 켈름(A. Kelm) 박사가 들어오면서 생겼다. 이 학부는 이곳에만 신설된 것이 아니고 함부르크의 다른 5개 박물관에도 같은 때에 두어졌는데, 그것은 박물관의 교육적인 면이 크게 강조된 결과였다. 그러나 그 주제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고 벌써 20년대에 왕성히 논의되었던 것이고 보면 단지 그 전통의 실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들 6개 학부 가운데 동양학부와 유라시아 학부와는 그 경계가 자못 애매 모호하게 보여질 수 있다. 전자의 독일어 이름을 정확히 옮기면 남 및 동아시아 학부이고, 중국, 한국, 일본 세 나라와 동남아시아의 모든 나라, 그리고 인도와 스리랑카까지를 그 연구대상지역으로 넣고 있다. 거기다 네팔과 티벳이 포함된다. 그 둘을 중국과 인도문화의 큰 영향권으로 보기 때문이다. 한편 유라시아 학부는 이들을 제외한 아시아 전역, 즉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및 중근동(中近東), 그리고 유럽을 총괄한다.
이들 부장 아래에는 대개 1∼2 명의 보조연구원이 있고, 또 1977년이래 시의 일자리 공급조처들(Arbeitsbeschaffungsma Bnahmen: Abm)의 일환으로 직업 없는 학자들이 계약에 따라(반년에서 일년까지) 각 부서에 한 명 정도 배치되어 온다. 이들은 그 소속 부서에서 유물의 목록표 작성, 전시준비 등의 일을 한다. 박물관은 그밖에 볼론테르(Volontär) 제도를 두고 젊은 민족학자를 1명 공개 채용하여 박물관학을 견습시킨다. 계약기간은 대개 1년 단위이며 박물관의 사정에 따라 일손이 달리는 부서를 도와가며 연구한다. 그리고 이따금씩 외국의 학자들이 장기 또는 단기로 연구 차 박물관에 머무는 경우가 있지만 객원 제도를 두지 않았었는데, 나의 처우문제로 회의를 거쳐 1982년에야 처음 공식적으로 Visiting scholar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들 연구에 종사하는 이를 위하여 박물관은 도서관을 마련해 두고 있다. 민족학이 워낙 세계의 전 민족들을 그 연구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그 기본문헌만 하더라도 양이 엄청나게 많다. 인류학사에 있어 온 주요 연구조사단들의 보고서랑, 민족학과 그 인접학문분야의 문헌이랑, 그런 관계의 학술지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 거기다 온 세계의 민족학 관계 도서목록이 빠짐없이 보내져 오기에 각 부서의 연구자들은 꽤 넉넉히 잡혀 있는 도서 예산안에서 사서(司書)를 통해 주문만 하면 최근의 연구성과와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
도서관에 소속되어 있으나 방을 따로 가지고 있는 1개의 문고(文庫)와 1개의 자료 센터는 특기할 만하다. 요한 크루제(Johann Kruse) 문고는 그가 평생을 헥세(Hexe: witch: 마녀 ? ) 망상(妄想) 퇴치를 위해 싸우면서 모았던 문헌자료를 1978년 박물관에 기증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자료 센터란 동양 학부에 속하여 있는 한국 신흥종교자료 센터(Dokumentation- szentrum der Neuen Religionen Korea)를 이른다. 이것은 동양부장 프루너(G. Pruner)가 1975/76년에 폭스바겐(Volkswagen) 재단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한국에서 신흥종교에 관한 현지조사를 하면서 모았던 것들이다. 문헌자료의 총 점수는 현재 수천을 헤아린다.
도서관이 유물의 목록표 작성과 전시, 연구에, 그리고 학생들과 일반인을 위한 전문도서관으로서 이용되는 반면, 디자인실과 사진실은 주로 전시와 출판의 일을 돕는다. 이전에는 유물 카탈로그의 뒷면에다 그 유물을 소재로 그려두었으나 얼마 전부터는 사진을 찍어 부착한다.
이들과는 달리 작업실은 전시 일은 물론 박물관의 모든 작업을 감당한다. 작업실에는 목공반, 전기반, 섬유반, 금속반 등이 있고 각기 전문기술자들이 그 해당작업을 수행한다. 특히 각 반마다 보존처리 내지 복원전문가(Restaurator)가 있어 그런 일을 필요로 하는 유물들을 다룬다. 최근에는 작업장에 습도 조정실과 소독실을 갖추어 유물처리에 과학적 방법을 적용한다. 작업실은 또한 1명씩을 각 학술 부서에 배정하여 그 부서의 유물창고 관리를 책임 지운다. 전기반은 박물관 내의 전기에 관한 모든 일을 담당하고 전시준비 때 그 조명문제를 처리하지만, 그밖에 영화상영 등의 일도 함께 한다.
작업실과 관련하여 한 가지 언급되어야 할 것은 그 동안 그들이 박물관 안에서 그들의 비중을 크게 신장시켜온 일이다. 박물관의 계획, 운영, 실무 등은 종래 관장과 각 부장들이 전행 (專行)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전시의 경우 거의 모든 것을 그 해당 부장이 결정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작업실의 각분야 직원들은 그것을 따르기만 하였다. 그러나 부장이라 해서 그런 작업의 각 분야에 모두 정통할 수도 없거니와, 작업실 직원들은 한편 점차 연구를 통하여 스스로를 깊고, 넓게 다듬어 나갔다. 그리고 조직을 통해 그들의 주장을 차츰 관철시켜, 이제는 전시를 준비할 때 그들 분야에 관한 한 그들은 전문적이고 독창적인 안목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 이외에 박물관에 없어서 어나될 요원으로 전시실 감시인(監視人)과 청소부들이 있다. 단체 관람객, 특히 학급단 위의 방문객은 박물관교육 학부에 의해 임시 고용된 학생들이 그 안내를 맡는다. 그리고 이 모든 직원들 및 박물관 전체의 행정을 행정부가 담당한다. 회계업무와 박물관 양서들의 발행, 판매, 관리도 이 부의 소관이다. 이밖에 수년 전부터 그 동안 모인 많은 필름 및 사진자료들을 정리하여 연구와 교육면에 쓰려고 하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이제 전시장의 짜임새를 살펴보자. 각 학술 부서는 하나의 커다란 방을 전시장으로 배당 받아 있다. 전시의 주제와 내용에 따라서는 한 부서의 전시를 위해 여러 개의 방을 이어 쓰기도 한다. 이런 것은 상설 전시장이 되고 여러 해 동안 바꾸지 않는다. 반면 특별 전시장이 있어 각 학부가 돌아가며 특별 전시회를 개최한다. 대개 석 달에서 여섯 달 정도 끌어간다. 전시장 외에도 방문객들의 교육을 위한 크고 작은 강연실이 있다. 큰 강연실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고 영화상영시설을 갖추어 있는 반면, 작은 강연실들은 소규모의 일반 강연에 쓰인다. 그밖에 박물관 현관 안쪽과 2층에 있는 널찍한 로비에서는 소규모의 연예공연과 파티가 가끔씩 펼쳐진다.
앞서 피셔 관장 당시(60년대) 박물관장과 함부르크 대학교 민족학과(Seminar für Völkerkunde)교수직의 분리가 이루어진 것을 언급하였거니와, 그 분리 이후에도 민족학과는 박물관의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의 부장들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 민족학과의 시간강사 노릇을 하고, 또 민족학과의 교수들은 박물관의 협조 아래 그 수집 유물을 강의용으로 사용하거나 학생들에게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민족학과도 자체 내에 꽤 훌륭한 도서실을 갖추어 있다.) 서로 긴밀한 관련을 가진다.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구성을 이야기할 때 후원회(Föderkreis)를 결코 빠뜨릴 수 없다. 이 후원회는 함부르크의 저명인사와 실업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들 박물관이 가진 중요성을 잘 알기에 유물수집, 연구계획, 출판 등을 재정 지원하여 준다. 서독의 경우 개인이나 영리단체의 이 같은 재정지원은 특별상의 혜택을 받기 때문에 후원회는 그런 일에 인색하지 않다. 1979년 박물관이 그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였을 때 근 백 명에 이르는 그 후원회의 회원은 세계적인 이 박물관의 모습과 그들 자신의 도움을 여간 대견스럽게 느끼지 않았다.
Ⅳ. 민족학박물관의 임무
민족학박물관은 민족학(Völkerkunde)의 연구성과를 일반대중에게 전달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틸레니우스는 이미 이 점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스스로를 의식적으로 민족박물관(Völkemuseum)이라 하지 않고 민족학박물관(Museum für Völkerkunde)이라 이름한다. 단순히 異민족들에만 관한 것은 전혀 아니다. 민족학은 오늘날(글쓴이 주: 30년대 중반) 하나의 뚜렷한 학문분야이다. 그리고 그 박물관은 그런 학문적인 수집품을 위해 필요한 것이니, 이 학문분양의 연구성과를 제것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흔히들 그러하듯이 이 같은 목적이 민족학박물관에서 밝히 인식되지 못하고, 오히려 잊혀져서 그 방향을 달리한 예가 흔하였다. 그리하여 박물관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는 인식, 그에 따라 박물관과 사회와의 거리감, 그리고 민족학박물관과 민족학 사이의 연관성의 결여가 증대하여 갔다. 이러한 현상과 경향에 주목하여 그것을 학계에다 교묘하게 문제화시킨 이는 피셔 교수이다. 그는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의 관장직에 있는 동안 그 변질되어 있는 민족학박물관의 기능을 두루 충분히 파악한 다음 그 자리에서 물러난 1971년 끝내 한 편 논문으로 이 문제에 불을 당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 불티는 이내 민족학계와 민족학박물관 들로 옮겨지고 그 문제는 이후 10년을 넘게 진지하게 연구, 논의되어 온다.
민족학박물관의 전통적 임무범주는 다음의 세 가지로 파악되어졌었다. : a. 수집 및 문고(文庫)화(수집 및 보관) b. 연구 c. 교육 및 공개. 이것은 박물관 업무 수행의 과정에 따른 그 임무 순서의 나열이 되기도 하지만 그 세 임무범주의 중요성에 따른 우선 순위를 드러내기도 한다.
수집이 민족학박물관의 기능 가운데 최 우위를 차지한 것은 벌써 19세기 이래의 경향이다. 19세기와 20세기초에 민족학박물관들은 대규모 유물수집여행에 재정지원을 하였고, 또 직접 그런 것들을 편성하여 보내었다. 그 목적이란 첫째,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을 주제나 지역별로 보충하여 가능한 한 완벽하게 갖추고자 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문화변동을 겪고 있는 유럽 이외의 민족들의 문화재가 유럽의 영향을 받아 변모되어 버리기 전에 그들을 구하려고 하였다. 요컨대 '구출작전' 이었다. 그밖에 박물관들의 명예경쟁이 그 방대한 수집 욕의 한 요소가 되었음을 지나쳐 볼 수 없다. 그렇게 하여 모아진 원주민들의 이른바 '고유한 유물들'은 그들 문화를 정적 상태로 보여줄 뿐, 문화적 구조 안에서의 다양한 상응관계와 변동과정들이 고려되지 못한다.
그 민족학 내지 민족지학의 유물들은 이제 그런 민족들의 '역사적 기본자료'로서 연구에 쓰인다. 유물연구에는 물론 그 유물이 중심이 되지만, 현지조사 보고서나 녹음테이프, 사진자료, 필름 및 관계참고 문헌이 함께 동원된다. 그리고 이들의 분석을 통해 어떤 단위 민족의 물질 및 정신문화와 사회경제적 제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고자 한다. 수집된 유물을 그러나 한 민족의 물질화 된 문화소유물의 부분과 조각에 지나지 않고 그 시간의 폭이 그리 깊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박물관민족학자(Museumethnologie)와 대학교민족학자(Universit- ätsethnologe)가 서로 협조하여 연구에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㬓㬙㬉
교육 및 공개의 기능이란 수집된 유물의 전시와 강연희를 통하여 관객대중을 교육하는 일을 이른다. 그러나 진화론에 입각한 유럽 문명의 우월감과 다른 문화들의 과소평가가 민족학박물관에도 다소 작용하여 온 터이니 객관적이고 공정한 대중교육은 아예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박물관의 대중교육은 그리하여 그 본래의 뜻에서 상당히 빗나가고 말았다. 롬멜(A. Lommel)이 이르기를 "유물은 그 미적인 작용을 통하여 관객의 이해를 북돋워준다."고 하였는데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
이에 반하여 피셔는 특별한 수집 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중시해야 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하며, 특히 어떤 민족들에 대한 대중의 선입관이나 무지를 제거할 것을 강조한다. 하름스(Harms) 같은 이는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외국인을 관용하도록 방문객들을 교육하고 그 외국인들도 교육할 뿐 아니라 대중들이 제 3세계 사람들과 형제가 되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족학박물관의 세 임무에 관하여 대략 살펴보았거니와, 한 무리의 박물관민족학자들(Vossen, Ganslmayr, Heintze, Lohse, Rammow 등)은 그것이 전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이들에 의하면 수집 기능이 종래 과대 평가되었으며, 이제는 교육의 기능이 그것을 뒷받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분히 피셔의 관점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민족학박물관은 다른 가치체계를 이해하고, 아직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및 특권 없는 이들과의 유대를 이루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수집과 문고화의 일이 우선 그 교육적 임무에 관련하여 목적을 가지고 수행되어야 한다. 박물관은 또한 예산과 연구원의 확충에 의해 진지한 연구기관으로 탈바꿈되어져 대중교육을 위한 연구의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정작 그 교육과 공개의 기능 면에서는 방문객의 관심과 반응을 경험적으로 확인하고, 그것을 전시의 주제선택, 내용, 방법 등의 십분 참작하고, 기타 강연, 출판, 영화상영 등의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대중교육을 위한 오늘날의 민족학박물관이 되어야하겠다는 것이다.
뒷글
종래 민족학박물관은 미상불 학술 및 문화기관으로서 그것이 가진 중요성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였다. 유물수집에 급급하고 문화에 대한 연구는 피상적인 데 머물렀다. 전시의 경우도 대중의 바램을 고려함이 없이 멋진 주제 아래 회귀 품이나 값진 물건들을 늘어놓은 정도이었다. 그리하여 최근 그런 태도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었던 것이다. 그런 움직임이 외치는 구호, 즉 민족박물관이 대중의 다른 문화에 대한 (유럽의 경우 그것은 유럽 내지 인종 중심주의적인) 선입관이나 편견을 제거하고 또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을 실로 고맙고 마땅한 일이다.
대중교육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수집과 연구의 기능 또한 그 나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류문화의 유산이 수집되어 보존된다는 기능은 막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유물을 주로 한 학술연구는 꼭 전시의 목적이 아니라 해도 늘 진행되어야 한다. 요컨대 그 세 기능은 각기 고르게 제대로 발휘되어야 박물관이 그 소임을 다하게 된다.
박물관 개혁론자들의 주장은 물론 몇 가지 지나쳐 볼 수 없는 배경을 가진다 : 각 문화의 전통유물은 이제 거의 동이 나버렸다. 세계의 그런 사회들이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두 주권국가로 등장하여 저들 제 1, 제 2 세계와 대등한 자세를 취하고 보니 종래의 유럽 중심적 사고방식은 더 이상 존속될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것은 아울러 민족학 내지 민족학박물관의 앞으로의 나아갈 길과도 직결된 문제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박물관의 기능이 대중교육을 위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런 주장은 감정적이고 과격하다. 오히려 원주민사회의 개미(改美)화 내지 산업화 현상은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
저 과격한 주장은 그밖에 대중의 박물관에 대한 무관심을 꽤나 마음 아프게 느끼고 있는데 그것은 비단 박물관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산업화가 고도로 진행되어 있고 사회민주주의로 줄달음치는 마당에서는 개인이란 이기적이 되고 바빠진다. 거기다 대중매체가 온 사회를 지배하게 되니 사람들은 둔감하고 무력해진다. 따라서 현대인의 무감각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 형편인 만큼 박물관이 대중교육의 기관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을 자극시키고 또 끌어들일 매력을 가꾸지 않으면 아니 된다. 말하자면 새로운 박물관 경영학이 수립되어야 한다.
유럽의 어느 철인(哲人)은 우리를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사람'으로 비유하였다. 우리의 인식이 서 있는 바탕을 이르는 말이다. 선각들이 쌓아올린 그 커다란 인식의 탑 위에 우리는 늘 서게 되는 것이다. 민족학박물관은 그 출발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반면 인간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았다. 그 박물관은 다른 사회의 문화를 대중에게 보여주어 제 것과 비교시켜서는 교육의 큰 몫을 감당할 수 있는 학술기관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어서 그러한 박물관이 세워져서 그런 임무가 수행되었으면 한다. 그럴 때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우리의 위치를 잘 알라 저쪽 박물관들의 공과(功過)와 장단점을 십분 참작함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