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40년 오늘의 문화예술 문학·時

시련을 이겨간 시의 잠재력




이형기(李炯基) / 시인·부산산업대 교수

좌우익의 소용돌이속에서

1945년의 8·15해방으로 우리의 민족사는 코페르닉스적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연한 귀결로서 우리는 해방의 그날부터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시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시가 겪은 그때의 변화는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거 없다. 왜냐하면 당시의 격렬했던 좌우투쟁은 시에 관한 논의조차도 모조리 좌우익이 벌인 정치투쟁의 일환으로 변질시켜 갔기 때문이다. 선재공격자는 좌익계였다. 시단의 다수파였던 그들은 '문학은 당과 인민에 복무해야 한다'는 테제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시를 정치에 팔지 않고 지킨 소수의 시인들이 있었다. 1946년에 상재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공저의 시집 《靑鹿集(청록집)》은 그들 소수파의 고독한 작업이 이룩해 낸 최초의 결실이다. 그리고 이 시집은 유치환의 《생명의 서》(1947), 서정주의 《歸蜀道(귀촉도)》(1948)와 더불어 한국 해방시사의 초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가 확립된 것은 48년의 정부수립으로 다수의 좌익계 시인들이 전향 또는 잠적하여 시단이 개편된 다음의 일이다. 그리하여 시단의 주역으로 부상한 그들의 세 시집 중 특히 《청록집》은 저자 3인의 자연에 대한 관심이 하나의 유파를 형성할 만큼 두드러진 것이었다는 점에서 시사상(詩史上) 큰 의의를 갖는다.

박목월의 경우에는 그 자연이 민요조의 가락을 타고 짙은 향토색을 드러낸다.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가듯이/가는 나그네"로 시작되는 <나그네>는 지금도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조지훈은 고전적 형식미를 추구하여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파르라니 깎은 머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두볼에 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라고 노래하는 그의 <승무>는 전아한 동양화를 방불케 한다.

박두진의 자연은 기독교적 메시아의식과 결부되어 독특한 관념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靑山道>)와 같은 구절에서 보다시피 거기에 격조높은 음악적 리듬을 도입하여 관념의 생경성을 극복하고 있다.

유치환의 시에는 《청록집》의 '자연'에 대비되는 '인간의지'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 작은 街路(가로) 네거리에/匪賊(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너의 죽어 律의 處斷(처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사악)이니라/질서를 保全하려면 人命도 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라는 <首>에서 보다시피 그의 시에는 서정이나 감각이나 음악이 아니라 철학적 잠언이 담겨져 있다.

해방전의 서정주는 밤중에 애기를 잡아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운 <문둥이>의 처절한 슬픔을 노래했던 시인이다. 그랬던 그가 <귀촉도>에선 "내 너를 찾아왔다. 臾娜(유나)/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내 혼자 종로를 걸어가면/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復活(부활)>라고 노래하고 있다. 어둠 속의 몸부림이 새로운 광명을 찾은 셈이다. 그리고 이 광명은 뒷날 그를 신라적 예지의 세계로 이끄는 길잡이가 된다.

이상 해방시사의 초기를 대표하는 3권의 시집을 살펴보았지만 실상 거기에 수록된 작품의 대부분은 해방후가 아니라 해방전의 쓰여진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두가지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첫째는 해방체험의 시적소화가 그 무렵엔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해방과 함께 곧 시단에 등장할 수 있는 신인이 일제말기의 암흑 속에선 전혀 길러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유는 여하간 이 두가지 사실은 우리의 해방 시사가 그다지 넓은 진폭을 갖고 출발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해방초기의 시단을 뒤돌아 볼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많은 시인들이 떠오른다.

해방전부터 활약해 온 김광섭(金珖燮),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신석초(申石艸), 김광균(金光均), 신석정(辛夕汀), 장만영(張萬榮), 김현승(金顯承), 김용호(金容浩), 김상옥(金相沃), 윤곤강(尹崑崗) 등과 또 해방후에 등장한 구상(具常), 정한모(鄭漢模), 조병화(趙炳華), 김춘수(金春洙), 김경린(金璟麟), 김수영(金洙映), 김윤성(金潤成), 이경순(李敬純), 한하운(韓何雲) 등이 그들이다.

전란의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명맥은 이어지고

정부수립을 계기로 개편된 시단이 차츰 틀을 잡아갈 때 우리 민족은 역사상 일찍이 유례가 없었던 비극에 휩쓸렸다. 50년에 터진 6·25동란이 그것이다. 국토가 거의 초토화된 그 동란의 와중에서 시인들도 피난길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그리고 피난지에 있어서의 그들은 혹독한 생활난에 쫓겨 시를 돌볼 겨를이 없었고, 또 간혹 시를 쓴다고 해도 발표지면 찾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이처럼 암담한 상황 속에서 그러나 한국시는 어려운 대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동란 전에는 순조롭게 발간되다가 임시 수도 부산에서 부정기적으로 간행되었던 《文藝》지는 그 무렵 가장 큰 비중을 갖는 문단의 종합 발표기관이었다.

동란 직전에 이원섭(李元燮), 이동주(李東柱), 송욱(宋稶), 전봉건(全鳳健), 이형기(李炯基) 등 신인을 배출한 이《문예》는 동란 중에도 한성기(韓性祺), 박양균(朴暘均), 천상병(千祥炳), 이수복(李壽福) 등 여러 신인을 시단에 소개했다. 그리고 신동집(申瞳集), 김구용(金丘庸), 김요섭(金燿燮), 장호(章湖), 김남조(金南祚), 홍윤숙(洪允淑), 이인석(李仁石), 김종문(金宗文) 등은 이들보다 등단시기가 빨랐고, 또한 그 등단의 길도 달랐지만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역시 이 무렵에 펴나간 신인들이다. 동란의 그 참화 속에서도 시단에 이처럼 많은 새얼굴이 등장했다는 것은 한국의 시적 잠재력이 그만큼 컸음을 뜻하고 있다. 게다가 또 6·25동란은 한국시의 영역을 다양화시키는 전화위복적 작용도 했다. 모더니즘을 표방한 《後半期》동인회의 출현과 일부 시인들의 대담한 상황의식의 표출은 그에 따른 소득의 큰 두몫이다.

동란전의 한국 해방시사는 전통적인 서정주의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 이 계열의 시는 정서의 순화, 언어 조탁, 예술성의 제고 등에 있어서 높이 평가해야 할 공을 세웠지만 동시에 한국시를 전통적 서정주의 그 자체의 좁은 계곡 속에서만 맴돌게 했다는 과오도 저질렀다. 여기서 과감하게 반기를 든 것이 《후반기》 동인회와 상황파 시인들이다.

김경린(金璟麟), 박인환(朴寅煥), 김규동(金奎東), 조향(趙鄕) 등이 그룹을 이룬 후반기 동인들은 시의 바탕을 현대의 도시문명에 두고 주지적 감각적 기법으로 그것을 다루었다. 이들의 모더니즘은 30년대의 片石村으로 연결될 수 있는 논리적 계보를 갖는 것이지만 또 그것과는 구별되는 일면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편석촌이 밝고 건강한 '도전의 시'를 내세운데 반해 이들은 짙은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폐쇄(閉鎖)된 대학의 庭園은/지금은 墓地/繪畵와 理性의 뒤에 오는 것/술취한 水夫의 팔목에 끼어/波濤처럼 밀려드는/不安한 最後의 會話"라고 마무리지어진 박인환의 <最後의 會話>는 그러한 불안감과 위기의식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전통적 서정주의에 반기를 든 또 하나의 세력인 상황파의 주요 시인으로는 유치환(柳致環), 구상(具常), 박남수(朴南秀), 전봉건(全鳳健), 송욱(宋泚), 신동문(辛東門) 등이 있다. 이들 중 유치환은 동란 중에 낸 시집 《步兵과 더불어》의 그 제목이 가리키는 바 그대로 직접 일선에 종군하여 그 종군 체험에서 우러난 뛰어난 전쟁시편들을 남겼고 구상은 강렬한 민족의식과 조국애를 바탕으로 뜨거운 심정을 읊었다. "祖國아, 沈淸이 마냥 불쌍하기만 한 너로구나/詩人이 너의 이름을 부를 양이면 목이 멘다"는 구상(具常)의 이 <祖國>의 한 구절엔 그러한 뜨거움이 넘치고 있다. 그리고 1·4후퇴 때 평양에서 남하한 박남수는 시라기보다는 차라리 산문의 르포와 같은 문체로 전쟁의 참혹성을 냉정하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시를 오래 쓰지 않고 50년대 후반부터 이미지즘 쪽으로 기울어져 간다.

신인인 전봉건과 신동문, 송욱은 모두 동란중에 직접 군대생활을 했던 시인이다. 따라서 그들의 시에는 군인으로서 겪은 전쟁체험이 생생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중 송욱은 특히 압운과 패러디를 추구하고 또 市井俗語를 대담하게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론의 개척으로 주목을 끌었다.

한편 김춘수, 조병화, 김구용은 독자적 개성으로 전통적 서정파의 시학을 거부한다. 김춘수의 경우는 그 독자성이 존재자의 존재추구에 역점을 두었고, 조병화의 경우는 도시인의 애수를, 김구용의 경우는 강렬한 자아의식을 작품화함으로써 각각 전통적 서정파에 맞섰다.

김종삼(金宗三), 김요섭, 김광림(金光林), 성찬경(成贊慶), 문덕수(文德守)는 이들과 비교적 가까운 자리에 있는 50년대의 시인이다. 각기 뉘앙스의 차이는 있어도 범박하게 주지적 심상파라고 볼 수 있는 이들은 감정의 자연발생적 유로를 거부하고 언어의 지적 조작을 통해 시를 구성해 나간다는 방법론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적을 받으면서도 전통적 서정파 역시 그들 나름의 세계를 지켜갔다. <上里果園> <無等을 보며> 등 서정주의 일련의 작품은 그들이 거둔 작업성과의 정상부에 자리한다. 그리고 이 계열의 신인으로서는 박재삼(朴在森), 황금찬(黃錦燦), 고은(高銀), 구자운(具滋雲), 김관식(金冠植), 박용래(朴龍來), 박성용(朴成龍), 박희정(朴喜珽) 등이 있다. "나를 하염없이 눈물나게 하는, 풀잎 촉 트는 것, 햇병아리 뜰에 노는 것, 아지랑이 하늘 오르는 것들은 호리만치라도 저승을 생각하랴"라고 노래한 박재삼의 <天衣無縫>은 이 계열의 신인들이 그 무렵 공통의 기반으로 삼았던 바 자연에 대한 신뢰와 예찬의 좋은 보기가 된다.

발표무대의 확장으로 많은 신인 배출

막이 오르자마자 전쟁이 터졌던 50년대는 그 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에서 저물어 갔다. 전쟁 상처의 회복은 곧 사회의 안정을 뜻한다. 출판계도 약간 활기를 되찾아 시단은 제법 많은 발표무대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발표무대의 확장은 신인의 진출을 촉진케 되어 50년대 후반에는 많은 신인이 등장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60년대에는 계속 확산되어 나갔다. 그리고 이 두그룹, 즉 50년대 후반출신과 60년대 출신의 신인들은 그 등단시기에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한 시기가 60년대였기 때문에 굳이 세대가름을 하지 않고 함께 몰아 그냥 60년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60년대를 특징짓는 역사적 사건은 4·19의거와 5·16군사혁명이다. 이 두가지 사건의 전자는 이상주의를 냉혹한 현실이 도로 뒤엎어 버렸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60년대의 시인들은 출발 당초부터 이상주의의 좌절에 의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5·16이후의 사태는 사회구조의 산업화를 지향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위화감의 파급효과가 또한 60년대 시인들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 갈등의 소산인 정신적 고통이 60년대의 시에 있어 중요한 주제의 하나로 될 것은 어렵잖게 내다볼 수 있는 일이다. 이 경우 그 정신적 고통은 인간의 내면세계에 어떤 상처가 생겼음을 뜻한다. 따라서 그 고통을 시의 주제로 다루려면 시인은 눈길을 자신의 내면세계로 쏟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논리를 사실의 차원에서 뒷받침하듯 60년대에는 미상불 내면세계의 응시, 탐구가 시의 한 특징으로 부상되었다. 그 작업을 집단적으로 수행해 나간 것은 김규태(金圭泰), 이승훈(李昇薰), 이유경(李裕憬), 이건청(李健淸), 이수익(李秀翼), 김종해(金鍾海), 오세영(吳世榮), 박의상(朴義祥) 등이 모인 《현대시》동인회다.

'하늘에는 내 마음의 시체가 흐른다'는 이승훈의 <遺稿(유고)Ⅰ>, 자신을 한 마리 개에 비유한 이건청의 연작시 <황인종의 개>, "깊이를 모를 어둠의 층계를 밟고/멀리서 누가 올라오고 있다"는 김종해의 <자살>, "연기에 그슬린 달과 이마에서 떨어지는 별/상심한 두견새는 굴뚝에서 울었다"는 오세영의 <잃어버린 사내> 등은 모두가 아픈 내면 세계의 그 상처를 보여준다.

《현대시》동인이 아닌 시인들도 역시 비슷한 경향을 띠고 있다. "귀뚜라미의 귀가 보여/완전히 망가지 여름이지/《그런 넌》/다들 망가질 때 망가지지 않는 놈은 망가진 놈 뿐야"라고 기술된 황동규의 <돌을 주제로 한 다섯 번째의 흔들림>이 드러내고 있는 '망가짐의 의식'은 곧 내면세계의 상처를 뜻하는 것이다. 정현종(鄭玄宗), 김영태(金榮泰), 정진규(鄭鎭圭), 마종기(馬鍾基), 이탄(李炭), 신중신(愼重信) 등도 크게 보면 같은 계열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60년대의 그 시대적 갈등을 내면의식의 차원이 아닌 도덕적 차원에서 극복코자 노력한 일군의 시인들도 있다. 도덕은 복수 인간 사이의 행동규범인 만큼 이들의 시에는 자연 사회성이 강하게 반영된다. 해방 직후의 모더니스트 김수영이 선두에 섰고 60년대의 신동엽(申東曄), 신경림(申庚林), 이성부(李盛夫), 김석규(金晳圭), 조태일(趙泰一) 등이 그 뒤를 에워싼 이들은 그 강한 사회성 때문에 참여파라고 불린다. "새벽 山이 밀린다/죽지 하나 찢겨진 채/피 흘리는 몸들이 밀린다/밀리고 밀려서/다시 버티는 山을 이룬다"는 이성부의 시 <불도저>에는 그러한 참여파 시인들의 도덕적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어느 시대에나 다 그러하듯 60년대에도 전통적 서정시는 그대로 살아서 전세대의 맥을 이어 갔다. 이성교(李姓敎), 강우식(姜禹植), 박제천(朴堤千), 허영자(許英子), 김여정(金汝貞), 김후란(金后蘭), 유안진(柳岸津) 등이 그들이다. 그 중에서 허영자의 "내가 배고플 때/배고픔 잊으라고/얼굴위에 속눈썹에 목덜미께에/간지럼 먹여 마구 웃기고"라 이어지는 시 <겨울햇빛>은 언어, 그 정서, 그 구성이 모두 서정주나 박재삼의 시와 짙은 혈연성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소우식은 4행시란 새로운 양식을 확립하고 그 속에 허무의식이 깃든 질펀한 색정의 세계를 삼아 전세대 전통파의 계승이 아닌 독자성을 살렸고, 또 김여정은 풍부한 상상력과 다양한 이미지로 전통파 시의 표현을 보다 살찌게 했다. 그리고 박제천이 노장(老莊)철학을 바탕으로 슐리얼리즘적 기법을 활달하게 구사하여 이 계열의 시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도 주목에 값한다.

산업사회라는 거대한 알라존에 맞서

60년대의 경제개발 우선정책이 그 나름의 성과를 거두어 70년대에는 사회의 산업화가 어느 정도 기틀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 사회는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룩해 오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우리는 또한 그 산업화의 달갑잖은 부작용을 피부로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부작용은 한 마디로 물질주의 풍조의 팽배라고 요약될 수 있다. 정신문화의 상대적 경시는 이 경우의 불가피한 귀결이다. 시는 그러한 정신문화의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는 만큼 사회적 소외와 고립의 심화를 면할 수 없게 된다. 시가 이처럼 궁지에 몰리는 산업사회의 문화는 오락을 제공하는 상품으로 전락해 갈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보다 먼저 산업화를 이룩한 다른 나라에서도 그대로 겪었던, 말하자면 산업화의 일반적 폐단이다. 이 일반적 폐단 외에 우리의 산업화는 우리만이 겪어야 할 새로운 고통을 추가시켰다. 그것은 소득배분의 불균형에 따르는 고통이다. 성장목표의 달성에만 집착한 나머지 소득의 배분문제를 소홀히 했던 우리의 성급한 산업화 촉진이 그 원인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소득의 총량은 분명히 현저한 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는데도, 그 소득이 일부 계층에만 편중 소유되어 빈부격차의 확대와 상대적 빈곤감의 심화현상이 초래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선 그 구성원의 일체감이 유지될 수 없다. 일체감 대신 위화감이 조장되어 불신풍조가 퍼져 나가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시를 소외·고립시키는 방향으로 흘렀던 70년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도 시인들의 창작의욕은 결코 쇠퇴하지 않았고 또 신인들도 60년보다 많은 수가 시단에 진출했다. 이 70년대의 신인들 중에는 60년대 후반에 등단하여 70년대에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벌인 시인들이 포함된다.

사회의 산업화가 도시형 문화를 낳는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겉보기는 화려한 그 도시형 문화 속에서 인간은 그 개별성을 지키지 못하고 왜소하게 규격되어 간다. 일군의 70년대 시인들에게는 이러한 모순과 그에 따른 아픔이 시의 기본주제로 되어 있다.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자각을 선행조건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주제의 소화를 위해 구사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는 아이러니이다. 오규원(吳圭原), 김광규(金光圭), 이성복(李晟馥), 이하석(李河石), 이윤택(李潤澤) 등은 바로 그 아이러니의 날카로움을 들고 산업사회라는 거대한 알라존(alazon)에 맞선다. "이 世上은 나의 自由 투성입니다. 사랑이란 말을 팔아서 공순이의 옷을 벗기는 自由, 시대라는 말을 팔아서 여대생의 옷을 벗기는 自由, 꿈을 팔아서 편안을 사는 自由"라고 이어나가는 오규원의 <이시대의 純粹詩>나 "우리는 결국 동포로 태어나/더러는 우리를 다스리는 관리가 되었고/개처럼 충실한 월급장이가 되었고/꽁치를 사들고 가는 아주머니가 되었고/더러는 우리 손으로 지은 감옥에 갇혔다."는 김광규의 <늦깎이>는 그 좋은 예가 된다.

그리고 이들의 그러한 아이러니의 구사는 산문적 진술의 대담한 도입으로 시의 그 전통적 형태를 파괴하고 있다. 주목에 값하는 현상이다.

이들과는 달리 감태준, 장석주, 조정권, 이태수, 김용범, 정호승 등은 산업사회의 도시문명 속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된 인간, 즉 뿌리뽑힌 소시민의 고통과 절망을 때로는 자기비하적 어조로, 또 때로는 격렬한 어조로 작품화하고 있다. 무허가 판자집의 철거를 소재로 한 감태준의 <몸바뀐 사람들>의 한 구절을 빌면 "다시 몸 한채로 집이 된 사람"이 그들이다. 장석주는 그러한 자신을 '밥 한그릇에 매달려 있는 목숨'<밥>이라고 절망적으로 자탄하고 있다.

김준태, 김창원, 정희성 등은 산업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 갈등을 사회적 의식으로 대응, 극복하려 한 70년대 시인들이다. 이 경우의 사회적 의식은 개인보다 집단을 우위에 두는 의식인데 그 집단은 흔히 민중이라고 불리는 피해자, 즉 소외계층을 뜻한다. 따라서 그 시적 계보가 전세대의 참여파로 이어지는 이들은 그러나 적극적인 행동의 의지를 노래하기보다도 피해자인 민중의 한의 표출에 역점을 두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巫歌는 한의 표출에 매우 어울리는 양식이다. 강은교와 고정희는 민중시의 계열에 세울 수 없는 여류지만 그러한 무가의 가락을 현대화해서 인간의 근원적인 한을 호소력있게 형상화한 시인이다.

한편 70년대에도 전통적 서정파는 여전히 그 맥을 잇는 신인을 배출하고 있다. 나태주(羅泰柱), 송수권(宋秀權), 임홍재(任洪宰), 이성선(李聖善), 이준관(李準冠)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는 이 계열의 시인들은 미상불 전통파답게 마음의 고향으로서의 자연과 향수어린 토속적 풍물을 릴리칼하게 노래하고 있다. 산업화된 사회의 도시문명적 시각에서 보면 이미 추억의 저녁 노을에 물들어 소멸되어 가고 있다 할밖에 없는 이러한 대상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정신의 밑바닥엔 산업화를 거부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릴리시즘도 그것을 일종의 전원적 목가라곤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앙금을 지니게 된다.

기성시의 미학에 과감히 도전

70년대의 산업화 추세는 오늘 현재의 80년대 중반까지 계속 힘을 뻗치고 있다. 그러나 80년대에 새로 나온 시인들이 70년대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답습은커녕 오히려 그들은 70년대와 또 그에 선행하는 기성시의 미학에 과감한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한 도전에 의해 초래된 쉽게 눈에 띄는 현상의 하나는 전통적인 시의 형태를 파괴한 그것이다. 박남철(朴南喆)의 시는 그 단적인 예가 된다. 그는 행가름이 없는 산문체를 즐겨 쓸 뿐 아니라 때로는 활자를 거꾸로 박기도 하고 또 때로는 문장 전체의 활자를 끝에서부터 거슬러 읽어야만 뜻이 통하게끔 배열하기도 하는 것이다. 70년대의 오규원 등이 시 형태의 파괴를 시도한 바 있음은 앞에서 이미 본 바와 같다. 그러나 80년대의 박남철의 실험은 그보다 훨씬 과격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동료들은 시속에 심지어 신문기사의 스크랩 조각과 만화까지 그대로 옮겨 앉히는 파격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그들의 의식 속엔 장난기가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장난기를 불성실의 동의어로 보아서는 안되나. 오히려 그것은 파괴의 대상인 기성의 시형태에 대한 신랄한 조소를 뜻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소하는 그들의 그 형태적 실험이 성공을 거둔다는 보장은 없다.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고 나면 당사자들조차 그것을 한때의 멋적은 해프닝으로 돌려버릴지 모르나.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왕도가 없는 시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려면 치열한 실험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사실만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형태적 실험외에 80년대의 시인들은 또 감상의 물기를 거의 완전히 떨쳐 버린 드라이한 시선으로 대상을 파악 표출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시가 보여주는 세계는 유별난 초경험의 공간이 아니라 따분한 일상의 공간이다.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자83. 4. 1∼지83. 5. 31"이라고 짧게 두줄로 되어 있는 황지우의 <벽>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이 벽의 벽보를 그냥 단순한 공고문으로만 보아 넘길 수는 없다. 그 벽 저쪽에 있는 완강한 현실, 시대의 그 어둠을 그것은 예각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을 자신의 감정으로 물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라이하게 조명함으로써 그는 대상의 본질을 보다 리얼하게 부각시킨다. 정도의 차이는 있기는 하지만 이 드라이한 묘사방법은 여류 김혜순의 시에서도 찾아질 수 있다. "신문을 읽는다. 가끔/도시락을 신문지에 싸들고 가서/밥 한술 먹고, 세줄 읽고/또 한술 먹고 세줄 잊어 먹는다"는 그녀의 <신문>이 그런 예의 하나가 된다.

여기까지 써놓고 문득 뒤돌아보니 해방 직후의 주역 시인들과 80년대의 시인들 사이엔 어느덧 40년의 시간적 격차가 가로놓여 있음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80년대 시인들의 시에서 《청록집》이나 《귀촉도》나 《생명의 서》의 영향의 자취를 찾아낸다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도 안타까워 할 일이 아니다. 거리가 아무리 멀다해도 그들의 시는 모두가 한국시의 영역 안에 공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거리감은 해방 40년 동안에 한국시가 그만큼 다양해졌고 풍성해졌다는 증거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시의 오늘의 위상을 그런 눈으로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든 해방 40년의 역사는 결코 순탄한 과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험난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시는 이처럼 다양하고 풍성한 내포를 갖게 되었으니 우리는 그를 통해 한국시의 발전의 잠재력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시련이 크면 그것을 극복했을 때의 기쁨도 커진다. 그리고 그러한 기쁨은 또 내일의 시련을 극복케 하는 힘을 키워준다. 해방 40년의 한국시사는 바로 그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