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40년 오늘의 문화 예술 문학·小說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소설문학 40년




정한숙(鄭漢淑) / 소설가·고려대 교수

우리 소설문학의 현주소

지나간 40년 동안 우리는 광복의 영광과 분단의 비참이 어우러진 사잇길에서 방황해왔다. 광복의 영광이란 다만 해방직후에 느꼈던 기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생국이니 후진국이니 하는 세계의 모멸을 받으면서도 애써 견디고 땀 흘려서 나라의 살림을 그래도 이만한 정도로 키워온 과정을 일컬음이며, 분단의 비참이란 다만 6·25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이 갈수록 분단이 심화되고, 대립이 격화됨으로써 야기되는 모든 혼란과 불안을 일컬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 체제를 확립하였고, 이제 그 위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지적하는 것을 보는데, 그 것은 원칙적으로 타당한 말이지만, 나는 우리가 세워야 할 자본주의는 공들이고 절약하는 자본주의이고, 우리가 이룩해야 할 민주주의는 실속있고 조용한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해방 이후 40년을 보내면서 내가 가장 섭섭하게 여기는 현상은 이 나라에 섬세한 삶의 결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안정되고 세련된 삶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고 모두가 거칠고 소란하다. 이렇게 된 원인은 정치와 경제에 국민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원칙이 없었다는 데 있겠지만, 국민들의 생활 태도도 좀더 가라앉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난 40년 동안에 우리나라가 이룩한 업적 중에서 경제의 발전에 못지 않게 성장한 것은 소설문학의 전개가 아닌가 한다. 소설이란 작가가 원고지를 잡고 혼자 쓰는 것이므로 작가를 세상의 비생산적 소비풍조에 젖을래야 젖을 수 없으며, 그러면서도 소설에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게 마련이므로 작가는 일상생활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보다 더 깊이 있게 현실을 묘사할 수 있다. 우리의 전자제품이나 자동차가 세계무대에서 경쟁하려면 아직도 좀더 기다려야 할 듯하나, 우리의 소설은 현재 세계의 어느 곳에 내놓아도 별로 손색이 없는 단계에 와 있다.

문학효용론에 대한 좌우세력의 대립

尙虛의 《解放前後》를 통하여 우리는 광복 당시의 문단사정을 회상할 수 있다. 일본이 미워서 시골에 내려가 있으면서도 이 소설의 주인공 玄은 간혹 戰時報國會(전시보국회)에 나가고 하면서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아 서울에 와 보니 임정(臨政)이 환국하기도 전에 좌익문인단 책들이 서 있다. 회의와 주저를 반복하다가 玄은 뚜렷한 결단도 없이 좌익단체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체험한 당시의 문단사정도 대체로 그러했다. 이 작품에 비교해 볼 때 버림받은 하층민의 고통을 그리고 있는 황순원의 <별과 같이 살다>는 지식인의 현학적 정치운동과는 무관한 민족 현실을 드러내 준다. 청루에서 청루로 팔려다니던 곰녀가 만주로부터 돌아온 사람들을 구호하는 護民團(호민단)에 들어가 일하려고 결심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침착하게 묘사되어 있는 이 소설에서 우리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외세에 놀아난 패거리 싸움과 민족의 생존이 아무런 관계도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해방 직후의 문단은 왜 작품을 쓰느냐, 무엇을 쓰느냐의 문학효용론에 대한 좌우세력의 갑론을박에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기가 지나 1948년 정부수립을 계기로 문단이 정비되어, 《藝術朝鮮》《文學精神》《海東公論》《白民》《文藝》 등의 잡지가 나오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순문예지인 《문예》의 의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1948년 8월에 모윤숙, 김동리, 홍구범, 조인현 등이 주동이 되어 펴낸 이 문예지는 해방 이후의 혼란된 문단을 口號체제에서 창작체제로 전환하는 계기를 조성했고, 문단의 무질서를 청산하고 엄정한 문단적 권위를 형성하였으며, 역량있는 신인들을 추천하여 데뷔시켰던 것이다.

이 무렵에 전쟁이 일어났다. 국토의 대부분이 유린 파괴당하고 민족 전체가 수난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 전쟁으로 인해 이 땅은 강대국의 무기시험장이 되었고, 일본의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북의 남침이 가져온 결과는 바로 이것이었다. 조국을 파괴하고 다른 나라들을 잘 살게 해준 이 전쟁에 휘말려 우리는 꼭 3년을 시달렸다.

동란이 발발하자, 문단은 전시체제로 바뀌어 文總(문총)은 문총救國隊(구국대)를 결성하고 국방부 정훈국과 협력하여 작가들을 군의 政訓(정훈) 및 선전활동에 참여하게 하였다. 《문예》가 전시판(戰時版)을 내고 종군작가단이 《전선문학(戰線文學》을 내는 등 이 시기의 문학은 모두 전쟁에서 취재된 것들이었다. 이 당시 6·25전란을 작품화한 대표적 소설은 김동리의 <密茶苑時代> 와 <與南撤收>이다. 절박한 정황을 리얼하게 표출시키고 있는 이 작품들에는 분노와 원한이 아니라 깊은 회의와 허무가 짙게 배어 있다. 가족과 재산을 잃고 고향을 빼앗긴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낀 심정도 아마 구체적으로 집어 낼 수 없는 암담한 절망, 그것 이외에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사나?"하는 한탄이 무시로 튀어나오던 시절이었다.

해방의 혼란과 사변의 비극을 딛고

서울 수복 이후 1954년 예술원이 발족되어, 해방의 혼란과 사변의 비극을 딛고 우리 문학은 다시 새 출발의 신호를 울리게 되었다. 《문예》와 《문학예술》의 뒤를 이어 趙演鉉(조연현)과 吳永壽(오영수)가 주도한 《현대문학》은 1955년 1월에 창간되어 오늘날까지 무려 창간 30년의 최장수 기록을 세우고 있다. 자유문학가협회의 기관지였던 《자유문학》과 더불어 《현대문학》은 50년대 후반의 作壇(작단)을 지탱해 온 획기적인 문예지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독자에게 가장 사랑을 받은 작품은 鄭飛石(정비석)의 <자유부인>이었으나 우리 문단의 폭은 그 무렵에 이와 같은 건전한 대중소설을 소화해 낼만큼 넓지 못하였다. 당시에 문단의 관심을 획득한 것은 김성한, 장용학, 손창섭의 작품들이었다. 이 세 작가는 모두 그때까지 우리 소설의 주류로 여겨져 왔던 이상허, 이효석, 김동리, 황순원, 허윤석 등의 아름다운 분위기 소설을 부정하고 현실의 어두움을 분석하거나 고백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이것이 시대의 상황과 어울리어 비평가들의 눈에 새롭게 비쳤던 듯하다. 비판과 풍자의 지성에 기반을 둔 김성한의 소설이나, 상식을 제거하고도 남아있는 최후의 실존적 의미에 토대한 장용학의 소설이나 불안하고 절망적인 삶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심리적 자기 반성에 근거한 손창섭의 소설은 어떻게 보면 각각 그 시대의 속임없는 거울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성한의 지적인 분석은 <바비도>를 제외하면 거의 다 지나치게 건조하여 극적인 상황을 조작해 낸 흔적인 엿보이고 장용학의 실존적 해석은 그것의 관념성을 회피하기 위하여 작가가 의도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肉慾的 場面이 오히려 통속성을 드러내는 약점이 엿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50년대 전반기의 작품으로 오래 기억될 수 있는 것은 역시 손창섭의 소설이 아닌가 한다. 1953년 《문예》에 발표한 <공휴일>이후 <비오는 날> <血書> <被害者> <未解決의 章> <剩餘人間> <落書族> <神의 戱作> 등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50년대의 불안한 상황을 등장인물의 심리적 상황에 투영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20세기 후반기는 미국과 소련에 의한 세계분할정책이 일정한 틀로 고착되어 가는 시대로 특징지어 진다. 50년대의 한국, 1960년대의 월남, 1970년대의 아프카니스탄에서 보듯이 이러한 양분체제는 안정이라기보다는 국부적 파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대립체제이지만, 이러한 세계체제 안에서 이데올로기는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응고된 규범으로 작용한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주어진 규범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으로 제시한 데에 선우휘의 <불꽃>과 오상원의 <謀反>이 던진 충격적 효과가 있었다. 정치를 외면하고 작은 私人으로 살고자 한 高賢의 착한 심성을 보존할 수 없게 하는 공산주의의 폭력을 묘사함으로써 선우휘는 진정한 도덕적 선택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를 형상화하였고, 권력정치의 한 복판에서 암살과 폭력을 통하여 이념의 순수성을 지키려던 민이 평범한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사랑하는 것이 사람다운 삶의 길임을 깨닫는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오상원은 사회의 최소기준으로서 폭력의 부정이라는 도덕적 원칙을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작가에 오영수(吳永壽), 이범선(李範宣), 하근찬(河瑾璨)이 있다. 이들의 특색을 하나로 묶는다면 그것은 서정의 산문화라는 개념 아래 묶여질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인간은 기쁨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어두운 세상을 어둡게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능사가 아닌 것이다. 제재를 전후의 폐허에서 구하면서도 이들이 가장 앞세운 것은 인간의 문제였다. 시대의 어두움과 내면의 절망을 이들은 인간 본래의 온기로 극복하였다. 그것은 문학예술의 본질과도 상통하는 일이었다. 오영수는 정형적인 단편작가로서 한국인의 서정을 작품의 중요한 본질로 하여 서민층의 애환을 다루어 호평을 샀다. 그의 작품은 시류에 말려들지 않고 언제나 수채화적인 수법으로 인간의 사랑과 미움을 다루었다. <明暗>에서는 군대 감방안의 비리와 인정이 눈물겨운 인정으로 다루어져 잇고 <화산댁이>에는 신구세대 간의 인정의 갈등이 리얼하게 묘파되어 있다. <후조(侯鳥)>와 <갯마을>에 표출된 사랑의 휴머니즘 또한 매우 보람있는 문학적 성과라 할 만하다. 이범선의 <오발탄>은 전후의 암담한 현실을 부각시키면서 선량한 주인공이 겪는 고통과 인간성의 좌절을 그려 문제작이 된 것인데 전후의 인간군의 기념사진과 같은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그러나 <달팽이> <학마을 사람들> 같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는 현실비판이나 역사의식의 밑바닥으로 독특한 서정적 휴머니즘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근찬은 전원의 풍경묘사나 익살에 머물렀던 통념적 농촌 소설관을 불식하고 새로운 의식으로 수난의 인간상을 부각시켰다. 짓밟히는 세대의 비극을 그리면서도 항상 서정적인 태도로 작품을 썼기 때문에 하근찬은 간결하고 개성적인 문체를 획득할 수 있었다. <흰 종이 수염>과 <夜壺(야호)> 같은 작품은 오래 기억될 만한 소설들이다.

이들보다는 좀더 다양한 실험을 해보노라고는 했으나 필자의 작가의식 또한 대체로 이들과 계보를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고가(古家)> <이어도> <끊어진 다리> 등의 작품은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것에 파괴되지 않는 긍정적 인간상을 모색해 본 작품이고, <猫眼猫心(묘안묘심)> <닭장管理(관리)> 등은 현대인의 방황하는 심리 묘사에 역점을 둔 작품이고 <田黃堂印譜記(전황당인보기)> <백자도예 崔述(최술)> <거문고 산조> 등은 시대의 모순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전통예인의 정성과 헌신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처용랑> <禮成江曲(예성강곡)>과 같이 역사에서 제재를 취하거나,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해석한 작품들에서도 필자 나름으로는 서정성과 현실의식을 융합해 보고자 하였다.

전광용과 유주현은 현실의 모순을 문제삼되 작품 안에 작가가 개입하지 않고 객관적 거리를 냉정하게 유지한 작가가 개입하지 않고 객관적 거리를 냉정하게 유지한 작가이다. 전광용은 데뷔작품 <흑산도>에서부터 치밀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사실주의적 방법을 적용해 왔다. 사투리 하나라도 정확하게 기술하려는 노력과 냉정한 객관성 속에 숨어 있는 긍정적 인간상의 탐구가 이 작가의 특색이다. <꺼삐딴 리>에 나타난 주견없는 인간상이나 <射手(사수)>에 보이는 우정의 갈등도 풍자인지 연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객관적 묘사로 제시되어 있다. 그가 학계의 중진으로 학문적인 작업에 몰두하면서 발표가 적어진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어쩌면 그것은 그가 객관묘사에 지나치게 공을 들이다가 그의 데뷔작품에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는 긍정적 인간상, 즉 북술의 참다운 사랑과 기다림을 소홀히 하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유주현은 <장씨일가>에 서처럼 세도 당당한 가문의 위선과 상호불신을 그릴 때나 <삐에로>에서처럼 정치적 인기의 허위와 부조리를 그릴 때나 항상 가볍게 빈정거리는 태도로 작품 바깥에 머물러 있다. 현실의 비리를 극화하는 솜씨는 뛰어나면서도 해결이 보이지 않는 어두움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폭넓은 역사적 전망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역사적 제재를 다루면서도 본격적인 역사소설로 나아가지 못하고 《조선총독부》와 같은 실록물로 그치고 만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감각적인 묘사로 주목을 끈 박용구(朴容九), 전후의 상황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의 애수를 다룬 이봉구(李鳳九), 기계문명을 비판한 김광식(金光植), 사회구조의 병폐를 탁월한 현실감각으로 묘파한 박연희(朴淵喜), 전후세대의 방황과 허무를 그린 추시도 이 시기의 작가에 해당한다. 섬세한 필치로 애정의 갈등을 묘사한 손소희(孫素熙), 현대인의 생태를 낭만적인 심리추적과 함께 보여주는 한무숙, 뛰어난 언어감각으로 구김살 없는 삶의 모습을 극화하는 강신재, 지성적인 분석적인 수법으로 현대인의 심리를 파헤치는 한말숙(韓末淑), 개인의 사생활에서 시작하여 한국의 근대사 전체로 시야를 확대한 박경리(朴景利) 등은 박화성(朴花城), 최정희(崔貞熙), 임옥인(林玉仁)의 뒤를 이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한 이 시기의 여류작가들이다.

한국소설의 현황을 알 수 있는 이정표적 작품 속출

이호철(李浩哲), 최인훈(崔仁勳), 서기원(徐基源), 이문희(李文熙), 박경수(朴敬洙), 오유권(吳有權) 등의 작가는 한국소설의 현황을 알 수 있는 이정표 구실을 한다. 이호철은 분단시대의 문제의식으로 소시민의 살림살이를 비판적으로 형상화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의 특색은 그것보다는 의미있는 사건을 반복하는 구성방법에 있다. <破製口(파제구)>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대화가 반복기법을 원용하고 있으며, <닳아지는 살들>도 반복되는 분위기의 도입으로 성공하고 있다. 최인훈은 지적인 문제의식을 지니고 탐구하는 자세로 작품을 쓰는 작가이다. 그에게도 역시 분단상황은 우리 시대의 근본문제로 인식되는 것인데, 그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생활양식의 파탄을 묘사하는 데 최인훈은 알뜰하게 공을 들이고 있다. 간혹 <서유기>처럼 실험의식이 지나치게 노출되는 흠이 있으나.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건실한 구성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서기원은 초기의 전후파적 터치를 벗어나면서 민족사의 저변을 발굴·전개하는 바람직한 방면으로 작품을 전환하였다. 그것은 민족사의 비극적 측면에 대한 검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민족의 정신사를 추적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사금파리의 무덤>은 아름다운 문체로 한일문제를 다루었는데 어느 면에서 보면 유미적인 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이문희는 화려하고 유창한 문체로 버림받은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묘사하였다. <黑麥>은 보리밭의 깜부기 같이 쓸모 없는 아웃사이더들의 세계를 파노라마처럼 제시함으로써 그들이 잃었던 인간성을 자각하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나간 작품이다. 박경수는 전통적인 한을 표출하면서 힘없는 서민이 겪는 좌절을 규명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凍土>에서 그는 빈곤에 연유하는 증오와 편견과 좌절을 극적으로 묘파하였고, <흔들리는 山河>에서 그는 스토리 텔러로서의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다. 오유권의 작품은 하나같이 농촌을 배경으로 호남방언을 구사하는 어리석고 착한 인간의 삶을 다룬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정공법에 의존하는 장점과 도식적인 구성에 의존하는 단점을 함께 지니고 있는 작가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나오는 풍부한 토속적인 어휘와 향토적인 풍물묘사는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등단하여 필자의 기억에 남아 있는 작품을 쓴 작가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최소한 다음의 작가들을 이름만이라도 언급하지 않는다면 공정한 개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강석근(姜錫根), 곽학송(郭鶴松), 구인환(丘仁煥), 구혜영(具暳瑛), 권희근(權喜根), 김동립(金東立), 김문수(金文洙), 김성일(金成一), 김송(金松), 김영희(金寧姬), 김용운(金龍雲), 김원일(金源一), 김이연(金異然), 남정현(南廷賢), 민병삼(閔丙三), 박상륭(朴常隆), 박순녀(朴順女), 박태순(朴泰洵), 방영웅(方榮雄), 백시종(白始宗), 백용운(白龍雲), 백연무(白演斌), 서근배(徐槿培), 손장순(孫章純), 송기동(宋基東), 송기숙(宋基淑), 송병수(宋炳洙), 송상옥(宋相玉), 송숙영(宋肅英), 송원희(宋媛熙), 승지행(昇志行), 신상웅(辛相雄), 신석상(辛錫祥), 안영(安泳), 안장환(安章煥), 오인문(吳仁文), 오찬식(吳贊植), 유금호(兪金浩), 유승휴(柳承畦), 유우희(柳祐熙), 윤정규(尹正奎), 이동희(李東熙), 이문구(李文求), 이병구(李丙求), 이병주(李炳注), 이석봉(李石奉), 이정호(李貞浩), 이제하(李祭夏), 이채우(李採雨), 전병순(田柄淳), 정구창(鄭求昌), 정병우(鄭炳禹), 정린영(鄭麟永), 최미나(崔美娜), 최일남(崔一男), 최현식(崔玄植), 한남철(韓南哲), 한문영(韓文影).

1960년대 초를 전후하여 중요한 일간지에서 다루어가며 장편소설 현상모집을 하였다. 1958년 한국일보 장편현상모집을 하였다. 1958년 한국일보 장편현상모집에 <비극은 없다>로 당선한 홍성유가 이러한 부움을 타고 등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또한 1961년 경향신문에 <인간에의 길>로 당선한 김의정, 같은 해 한국일보에 <잃은 자와 찾은 자>가 당선된 김용성, 1963년 동아일보에 <속솔이뜸의 댕이>로 당성된 이규희, 1966년 동아일보에 <D데이의 병촌>이 당선된 홍성원 등도 모두 무게 있는 장편소설로 첫 선을 보였다. 일간지의 장편소설 현상모집을 통하여 등단한 작가 가운데 가장 왕성하게 발표를 해내는 작가가 홍성원이다. 신문연재 소설을 쓰면서 틈틈이 단편을 발표하는 그의 소설이 서사문학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는 뚝심 있는 작가이다. 전쟁소설에서 출발하여 현대사회의 병리고발에 이르는 그의 작품세계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공고해져서 《世代》에 연재되었던 <육이오>는 박경리의 <토지>에 필적할만한 역작이다.

작품경향의 다양화

유현중(劉賢鍾), 강용준(姜龍俊), 정을병(鄭乙炳), 김승옥(金承鈺), 이청준(李淸俊) 등의 작가에 이르면 개인화의 양상이 극도로 다양해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유현종은 서민의 의지에 초점을 두고 사회악의 이면을 파헤치려고 하며, 강용준은 관념이나 사상의 노예가 아닌 땅을 딛고 사는 현실의 인간을 다루면서 극한 사왕에 놓인 인간이 그 조건을 극복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과정을 묘사하며, 정을병은 고발문학의 입장을 공공연하게 내세우고 사회의 暗面을 폭로한다. 문체의 개성적인 효과를 잘 살린 것으로 평판을 얻은 김승옥은 인간의 내면을 섬세한 필치로 포착하여, 소설은 일관된 스토리를 담아야 한다는 재래의 인식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문체의 독특한 미학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으며, 이청준은 추리소설적인 플롯과 격자소설의 형식을 결합하여 개인과 사회의 대립 속에서 개인이 겪는 내적 붕괴의 과정을 다루었다.

해방 40년의 소설사의 마지막 장은 박완서(朴婉緖), 서정인(徐廷仁), 서종택(徐宗澤), 송하춘(宋河春), 오정희(吳貞熙), 오탁번(吳鐸藩), 조세희(趙世熙), 최인호(崔人浩), 최창학(崔昌學), 황석영(黃晳暎) 등의 작가들로 메꾸어진다. 이들 중에는 황석영처럼 대표작을 내놓은 작가도 있고 아직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치고 있는 작가들도 있으나, 우리 소설사의 장래가 이들에 달려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이 땅에 남아있는 한 소설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소설사의 마지막 장은 있을 수 없다. 목숨을 들어 소설을 쓰겠다고 하는 젊은 학생들이 나날이 늘어가는 것을 보고 있는 나는 우리 소설사의 미래를 낙관하여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