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40년 오늘의 문화예술 문학·時調

전통기법의 창조적 변용으로 독자적 시 세계를 구축한 시조문학




김제현(金濟鉉) / 시조시인·장안전문대 교수

해방 전후의 시조 상황

3·1운동 이후 일제는 수습책의 일환으로 문화정책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을 서두르고 있던 그들은 급기야 조선어 말살 정책을 펴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동아와 조선일보가 폐간되고《문장》지도 폐간되었다. 우리의 언론과 출판 및 문필활동은 완전히 암흑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개화기부터 불리워지기 시작했던 신시조의 애국적 열정과 망국의 설움도 더는 노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시조 혁신의 주역이었던 이병기도 투옥되었다. 그의 <홍원저조>는 "묵직한 철책문이 덜그럭 닫히는고나"로 시작된 25수의 시조로서 함흥 감옥에서 씌여진 작품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해방을 맞았다. 비록 타율적인 힘에 의하여 맞게 된 해방이라고 하더라도 8·15해방은 민족 역사의 소생이었으며 時調史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시인들은 오랜 칩거에서 풀려나와 갊아두었던 붓을 손질하고 해방된 감격을 노래하였다. 그러나 좌우익의 심한 대립과 갈등으로 사회는 혼란하였으며 무정부상태가 계속되었고 마침내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해방의 감격도 순간에 그치고 말았다.

그 후 1948년 민족진영에 의해 정부가 수립되고, 위세를 떨치던 좌익 문학단체도 정비되었다. 그러나 6·25까지도 문학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非詩的 시기였다. 따라서 시조도 침체와 답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 하였다.

이 시기, 시조를 이끌어간 시인들은 이병기, 이은상, 조운, 이호우, 김상옥, 장하보 등이었다. 특히 이호우, 김상옥, 장하보는 1939∼1940년에 걸쳐 《문장》지 추천을 받았으나 활동할 수 없었던 유복자들로서 그들의 역할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해방전의 암흑기와 6·25까지의 공백기를 메꾸고 1950년대로 이어 주는 과도기적, 교량적 역할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호우는 가람과 노산을 수용하며 자연이나 예술지상주의의 베일에 숨지 않고 가열한 시정신과 생의 의지로 관념적 낭만주의를 개척하며 시조의 음률형식을 자유시적 기능으로 살려 나갔다. 그리고 김상옥은 시조의 형식안에서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과 개성을 꾸준히 천착해 보였다. 이때 《초적》(1947)의 간행은 시조의 형식미학을 확인해 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두 시인의 영향은 이후의 시조에 계속 미쳐졌다. 그러나 장하보의 섬세한 언어조탁과 정확한 언어 구사의 성실한 작시 태도도 간과할 수 없으며 이영도의 등장은 해방 후 첫 신인이라는 의미 이상으로 그는 그 이전의 여류시인―김오남, 장정심, 오신혜―들이 미치지 못한 여성 특유의 맑고 경건한 계시주의와 전래적 기다림의 사념을 분재해 내는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해방전에 씌여진 작품들이 이 무렵 햇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조주현의 《조운시조집》, 정인보의《담원시조집》, 이병기의《가람시조집》(중판), 양상경의 《출범》, 정훈의 《미들령》, 이희승의《박꽃》등이 간행되어 시조의 활성과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조운시조집》은 당시 일급 시인들도 어깨를 같이 할 수 없다는 찬사를 받을 만큼 삼장형식에 시상을 펼치는 시재가 뛰어났으며 특히 3행이나 6행의 배행(配行)에 묶이지 않고 호흡이나 의미 단위에 따라 배행한 기사형식은 시조의 첫 시도로서 가람시조가 보인 언어 감각과 아울러 시조 혁신 의지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해방 공간에는 신시조, 혁신시조, 현대시조들이 공존하고 있었고 그것은 타분야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시기적 한 특징이기도 하였다. <우정록> <양주동작>은 각 시인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육당의 '박달나무', 담원의 '인절미떡', '난초'가 가람인가? '봄구름', '무명옷', '암고란'은 누구누구? 여러 <疜> 다 갖은 노산을 '늠실바다'라 하리라.

이러한 특성과 경향들이 후대의 시조에 수용·환원되면서 현대시조의 발전이 도모된 것이다.

전후의 개화

현대시조에 있어서 195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미 해방 전야부터 잉태되어 있던 비극의 씨앗이 해방된 지 5년만에 6·25의 전란을 일으킨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일제치하의 고통과는 다른 것이었으며 더욱 비참하였다.

국토는 초토가 되고 국민은 심한 불안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6·25의 가혹한 시련과 참담한 현실은 시조의 새로운 변신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 당시의 시조는 전장의 포화 속에 사라져 간 이름모를 병사들의 급박하고 애통한 가슴에나 있었는지 모른다. 전후의 비참한 양상도 마찬가지였다.

노산의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고지가 바로 저긴데>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이루어졌으며 선도적인 것이었다.

시조가 점잖음의 문학으로만 있을 수 없는 것이며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최성연의 <핏자국>은 현실을 직시한 성실한 체험의 진실한 표현이었다. 전쟁의 체험은 점차 시화(詩)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성연이 새로운 소재, 새로운 표현법을 보이며 강한 주제의식으로 시초를 썼다면, 박재삼의 <강물에서>는 전통적 시정신으로 한국적 서정세계를 재현하며 구술적 어법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정소파가 청징한 시상으로 청의무봉한 서정세계를 보여 주었다면, 장순하는 지적 바탕위에서 명확한 언어구사를, 최승범은 고전적 풍격과 감각적 표현이 각각 특징이었다. 그리고 역사적 현실은 마침내 송선영에 이르러 현실 서사의 시적 승화가 이루어지고 현대시조의 한 영역이 개척되었다.

사르르 눈감으면 흰 고지가 저기인데

쓸쓸히 산화 해간 백조여 너 지금 어디?

피어린 지도를 안고 혈서쓰던 정열이여.

<설야> 중에서

<설야>와 <휴전선>은 "우리의 불행한 시대가 낳은 심각한 작품"으로서 문학이 인생의 표현이며 시대의 반영이라 할 때, 이 시조는 시대적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내적 성숙과 발전이 진행되는 동안 학계 일각에서는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른바 제2의 시조 논쟁이었다. 제1의 논쟁은 1920년대 카프 문학파와 국민문학파의 논쟁이었다. 육당의 <백팔번뇌>로 비롯된 이 논쟁은 결과적으로 시조가 민족문학의 정통으로서 전통시의 위치와 기반을 확립시킨 시조부흥론이었다면 1950년대 중반 제2의 논쟁은 시조형식의 현대문학적 기능에 대한 회의론과 긍정론의 대립이었다. 학자간의 논란은 문단적 관심사로 확대되었고 창작 실제상의 문제와 시조시의 실상은 긍정론의 이론적 뒷받침이 됨으로써 일단락이 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제3의 논쟁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때 시조 창작을 겸한 당대의 이론가였던 이태극의 시조에 대한 이론적 확립은 이후의 시조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따라서 시조 시인들은 자신의 문학적 성취뿐만 아니라 시조의 현대시적 가능성을 구현해야 한다는 내외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호우의 《이호우 시조집》, 이영도의 《청저집》, 정소파의 《산창일기》, 최성연의 《은어》와 같은 성숙된 시조집이 나옴으로써 시조단은 왕성한 의욕과 무한한 가능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성과들 시조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이호우의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아려 눈을 감네.

<개화>는 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현대시조의 대명사로서 전통시의 금자탑을 세운 것이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조는 195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개화기를 맞는다.

박경용은 시조의 음률에 충실하면서 능숙한 솜씨로 전통적이며 풍아한 멋을 보였으며, 정완영은 <애모>가 주슷이 언어가 제자리를 찾음으로써 결구되는 외적 완결성과 더불어 동양의 유·불·선에 깊이 혼효되어 있는 시상의 유현성과 관조적 세계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한편, 전쟁시인처럼 보이는 이근배의 고향은 조국이었다. <산하일기>의 오열과 지향은 이에서 비롯되면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자유 정신은 <패랭이 꽃>의 세계에 잘 나타나 있으며 상실된 것, 약한 것, 슬픈 것에서 촉발되는 정서가 율감으로써 삶의 내면에 닿고 있다. 시조가 정형시이면서 자유시임을 증명해 주었다. 김제현은 "시조의 형식을 오히려 산문적 호흡으로 이끄는 독자적인 시조로 이목을 끌었다. <도라지꽃>, <밤> 등의 작품은 그런 면에서 잊혀질 수 없는 작품들이다." 이상범은 병영의 체험소재를 시화했으며 이우종, 유성규, 배병창, 이우출, 김준 등의 시인들이 일상적 서정과 무구(無垢)한 정서, 그리고 분단의식 등 안정된 형자 속에 각각 서정적 특성을 보였다.

1955년 《현대문학》이 창간되고 동아일보 현상문예(시조)가 부활되었다. 《문장》지도 추천제도 이후, 사회적 공인제도에 의해 신인이 배출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각 신문의 신문문예현상모집에 시조가 부활된 것은 60년 전후였으며 《현대문학》의 추천은 3명 정도였다. 관문도 좁고 늦게 열렸으며 발표 지면도 한정되어 있었다.

1960년 《시조문학》의 창간은 발표 지면을 확보해 주었으며 1960년대 시조 중흥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어 이병기 회장의 한국시조작가협회(한국시조시인협회 전신)가 창립되었다.

격동기의 시조와 시인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한국전쟁의 상흔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연대 초두부터 4·19와 5·16의 역사적 격랑을 겪은 1960년대는 그 후기에 이르면서 물질주의의 팽배와 사회적 모순으로 가치관의 혼란이 야기되고 정신적 황폐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시조의 경향도 현실과의 대응에서 새로운 반응을 보였다. 물론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군의 시인들에 의해 시조의 전래적 작시법에 대한 반성과 현대 시론적 접근 방법의 모색이었다.

서벌은 낭만적인 순수 서정을 보였으나 연가적 발성법을 지양하고 개인적 체험을 전체적 체험으로 확대하는 시법을 체득하고 있었다. <낚시심서> 등 내연된 시상의 경장과 언어의 섬세한 정련은 그의 한 특색이었으며 대상과의 만남은 불교적 사상과 연류되어 있다. 이에 비해 박재두는 향토의식과 단절의식을 공유하면서 이 양면의식의 공시적인 표현의 일환으로 음률을 재구성해보는 시도를 하였다. 종결어(미)를 서술어의 자리에 명사로 대치함으로써 시상의 응축적 표현을 보이면서도 사념에 빠지지 않는 것은 단절의식에 향토의식이 포괄되어 서정화 되었기 때문이다. 조오현의 불교적 사상이 침윤된 시상의 깊이도 시조단에 심도를 더해 주었으며 김월준의 상황 수용과 반문 그리고 일상적 소재의 시화 능력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벌과 박재두가 중심이 된 《율》은 황희영과 김해성이 중심인 《청자》와 마찬가지로 시인들로만 구성된 본격적인 동인지였다. 두 동인지 활동은 전국에 산재해 있던 동인활동의 활성제 역할을 하였다. 기존의 동인지 활동과 새로운 동인 활동이 전개되면서 시조는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시조의 전국시대가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현대시조의 새로운 혁신은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그 시도는 부분적이었으며 미온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시조가 본질적으로 전통시로서 운문미학이기 때문이다.

윤금초의 연작시조 <내재율>은 한국적인 사념이 정치하게 표현되고 있으며 예민한 감각이 포착한 한국적인 소재와 토속적인 언어의 어울림은 서민의식의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설시조의 시정신과 맥락을 같이 한다. 더구나 <내재율>의 표제가 암시하는 바는 시조의 음률이 내재율이라는 자각을 시사한 점이었다. 시조의 음률형식은 처음부터 규격화된 외형률이 아니었으며 민족의 심상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호흡인 것이다. 시조의 형식을 定型詩(정형시)이면서 整形詩(정형시)라 함은 이를 일컫는 것이다. 그가 <독감>이후 철저한 현실의식과 분방한 상상력을 표출하려고 할 때 단시조의 형식적 구속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강한 주제의식은 고식적인 형식논리를 거부하면서 발견한 것이 장시조였으며 서민의식의 현실적 감응은 장시조의 역동적 기능으로 표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시간적으로 구분할 때, 현대시조의 출발은 사설시조의 비중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1906년 <국풍4수>는 단시조 1수와 장시조 3수였다. 육당의 시조에 대한 인식과 부흥의 의지는 물론 민족문학의 발견과 전승이었다. 그리고 장시조의 인식과 자유시의 추구는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선행작업이 장시조일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학(시)은 장시조가 자유시의 선험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서구시의 방법론에 기울어져 민족시론의 정립에 소홀해왔고 장시조에의 관심도 미미하였다. 다만, 이병기, 조운, 김상옥, 장순하, 서벌, 김제현 등에 의해 실험적 단계를 거쳤을 뿐이다.

장시조는 윤금초에 의해 본격적인 작업이 이루어졌고 1970년대의 한 경향으로 시조의 표면에 나서게 되었다.

현대시조의 문예학적 시각에서 형식의 다변화와 형식 속에 변혁을 꾀하면서 많은 시인들이 개성을 보였다.

유제하의 <변조>는 외부세계의 수동적 표현을 거부하고 자아의 내면적 생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신표현주의 시작법을 보여주었으며, 강인한은 참신한 감성으로 새로운 서정의 세계를 열어 주었다. 김정휴가 불교의 선을 시화했다면, 진복희의 <부재>는 있음과 없음을 동일선상에서 인식하고 있으며 이은방은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였다.

70년대의 시조 양상

한국 현대사상, 70년대는 기대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으나 많은 모순과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유신체제를 둘러 싼 정치적 논란과 사회적 불신풍조, 그리고 급격한 경제성장에 따른 황금만능 풍조는 정신적 황무지를 이루었다.

4·19와 5·16을 예민한 감성으로 포착한 당대의 시인들은 이러한 정신적 상황에 놓인 것이다. 따라서 시인들은 절망하고, 실존적 삶의 어려움에 부딪치면서 내면의 어두운 영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한분순은 이미지의 섬세한 조각으로 자유시와 동질감을 갖는 형식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옥적>과 <목숨> 등의 시편에는 벌써 서정이 음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조화 있게 구조한 이우걸의 <새벽 종소리>는 여명의 기대적 상황으로 묘사되고 있다. 진실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선량한 지성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열리지 않는 문밖에 시인은 언제까지나 공복의 종소리만 듣고 있는 것이다.

70년대의 여러 징후 가운데 박시교는 허무의식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 리리시즘의 진폭을 보였다. 그것이 시인의 체질적인 고독과 인식상황이며 삶의 실체라 하더라도 한국인의 보편적 의식체계이며, 우리는 식민지시대에서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에로 쫓겼고 6·25는 이를 심화시켰다. 그리고 현실은 이의 진동을 일으킨 것이다. 리얼리티를 획득함으로써 더욱 공감을 얻고 있는 <바람집·2>은 얼마 후 발표된 이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갈대가 갈대끼리 몸비비는 언덕에 서면

세상은 더 없이 크고 공허한 바람집 한 채.

갈꽃만 헛말처럼 날리는 바람집 한 채

갈대여, 네 가난한 생각 하나로는

이 아득한 우주를 지킬 수가 없다.

망연히 그저 섰을 뿐

헛말만 흩뿌릴 뿐

<바람집1·3>

당대의 문학은 산문정신과 어둠의 단어로 특징 지워진다.

유재영의 <무변기>는 자연의 신비성보다는 현대와 그 문명에 절망하고 인간적 번민과 몸부림으로써 현실의 많은 문제들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고향 상실의 현대 폐쇄적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과거의 소재와 추억의 언어들인 것이다.

이상 시인들이 한결같이 보여주고 있는 첨예한 의식과 지적 작업은 역으로 서정화되고 새로운 호흡은 전통적 가락보다는 내재율적 음률구성의 구문형식이었다. 시조형식의 분절적 의미 단위가 3장이라는 형식 개념이다. 이러한 신념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 김상옥의 《3행시 65편》이었다.

어떤 경향을 뚜렷이 하지는 않았지만 김남환의 인생론적 사유를 거쳐 나온 서정과 정해송, 정해원, 조병기의 감각과 시론적 이론에 선 시조들은 70년대의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 외에도 김영교, 정시운, 여지랑, 허경만, 허일, 전원범 등과 김광수를 비롯한 <신서정> 동인들의 착실한 정진도 눈에 띄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장시조의 본격화 경향이다. 이 것은 서민의식의 고양된 현상을 의미하며, 풍자와 해학적 수법은 국문학상 장시조로부터 비롯되었다.

서벌과 윤금초의 장시조는 그 성질을 달리한다. 그러나 적극적인 관심과 성과가 70년대의 시인들에 의해 본격화된 것이다. 앞의 시인들과 그 궤를 달리하고 있는 김상묵의 작품들은 장시조의 정통으로서 시인의 철저한 비평의식과 치열한 시정신이 내연된 표현미학이었다.

《토사》의 첫 장

내 예서 십년은 절어 살아도

서울은 아직도 멀고 가파른 데다.

일곱살쩍 여덟살쩍 그런 시절,

배꼽털이 유독 굵던 개건너 황뭐시나 목청크던 아무개가

괭이 걸음으로 슬금슬금 몰래 뒤로 다가와서는

느닷없이 싸잡아 번쩍 쳐들던 아픈 귀랑,

그 알불알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보이늬?>하고 늘어지게 묻는 말에 얼른 <뵈유!>해도 한참을 뜸들여 찡하니 내려주던 그 <서울 귀경>은 그만큼 귓등 얼얼하고 콧마루 시큼한 눈물 속에서도

빙긋이 와 물리는 웃음같은 게 밑가슴에 은근슬쩍 고소하더니

이날, 내 아예 여기, 처자식, 몰고와서 솥 걸고 머리 뉘는 세월 뒤로는 그러리라고, 정작 입이 아프도록 줄창 웃어보아도 웬일로 웬일로 노상 얼얼한 속은 그 내력 모를 혼돈과 함께 떠나질 않고,

정말로 해가 뜨고 진 건지, 거짓말 같은 나날.

하루 하루가 그저 뻐근하게 고달프고 황황스럽다.

서울은, 남헌티 귀잽힌 채루나

잠간 슬쩍 그짓말루 볼 때만 찬란한덴가붜

(서울 귀경)

<서울 귀경>의 사설은 알레고리다. 입심도 좋지만 은유의 상징이 어렵지 않게 제 몫을 암시해 주고 있다. 관념적 (논리적) 언어가 끼어들 수 없는 우리말을 오히려 주석을 달아야 할 정도이다. 읽기조차 힘든 말투와 못생긴 글씨의 육필시집 《토사》속에 한국의 현대사와 민족사가 같이 숨쉬고 있으며 우리말로만 교육되고 훈련된 이들의 시편에서 시어로서 국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1970년대 시조의 한 검토일 뿐, 시인의 경향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시인들은 무한한 가능성과 도시에 가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는 늘 남아있는 것이다.

마무리·기타

이상 해방 40년의 시조를 조감해 볼 때, 신속하고 다양한 발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통적인 기법과 서정세계 질과 양적인 면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만 나름대로의 틀 속에 자신들의 세계를 놓고자 하는 의도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 혹은 변용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미학을 추구하든지 간에 양자는 대립적 입장에 놓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 관계에서 현대시조의 발전에 다같이 기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시조가 현대시론의 접근에서 한국시를 구현하고자 할 때 시론의 빈곤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서구시로의 방법론만으로는 한국시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문학론으로서의 시조론의 대두와, 많은 그리고 깊이 있는 연구와 비평의 참여는 시조 발전의 기폭제가 되리라 믿는다.

무릇 학문이 그렇듯이 문학도 서로의 상보적인 기능이 발휘됨으로써 전체 문학의 바람직한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볼 때, 시조에의 비평적 접근은 작게는 시조평론이며 크게는 순수한 한국 문학론의 정립에 기여하는 일이 될 것이다.

끝으로 객관적인 기술을 위해 《현대시 평설》(정한모 김채홍편), 《현대시조의 쟁점》(이우걸저), 《광복30년 문학전집》(정음사)를 많이 참조하였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