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40년 오늘의 문화예술 미술·韓國畵

전통적 산수화를 벗어나 리얼리즘 세계를 구축해 온 40년




오광수(吳光洙) / 미술평론가

일본화풍의 탈피와 한국화의 방향모색

해방직후 한국화단에 가장 큰 이슈로 등장한 일본화 탈피는 서양화쪽에 보다는 한국화쪽에 더욱 절실성을 띠었다. <鮮展> 동양화부가 거의 일본화위주로 지속되어 온 바, 이에 참가해 온 대부분의 동양화가들이 하루 아침에 그들의 스타일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鮮展>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김은호(金殷鎬), 이상범(李象範), 김기창(金基昶) 등이 해방후 미술협회 결성이나 국전 창설에서 제외되고 있는건, 이들을 선전(鮮展)의 적극적인 협조자로 본 것이지 이들의 스타일만이 일본화풍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산수화 계열에까지도 일본 남화의 영향이 잠식되었던 현상을 떠올려 보면, 어느 특정작가들만을 특별히 일본화풍으로 매도할 수 있는 입장은 되지 못한다. 사실 그럼에도 채색위주의 동양화가 계속 일본화로 오해되고 있었다는 것은 그 나름의 요인도 없지 않으나 넓은 시각으로 볼 때 일본화의 잔재가 채색 기법에만 있었다고는 단정할 수가 없다.

일본적 잔재를 극복하기 위한 상대적 명제는 한국적인 것의 추구였는데, 과연 한국적인 것이 어떤 것인가 할 때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심각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김기창이 당시 한 미술잡지 《造形藝術》에 기고한 글 가운데, "해방 기분으로 가뜩이나 어리뻥뻥한 모호한 제작태도를 지닌 우리들이 <조선적·조선적>하기만 하고 날뛴다면 자신을 더욱 방황의 구렁텅이에 몰아놓게 될 것이요…"하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 짤막한 문맥속에서 우리는 당시 동양화단이 겪고 있던 심각한 혼란상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터무니없이 <조선적>이란 것이 얼마나 남발되었을까 대안없는 구호들이 얼마나 뻔뻔스럽게 활개를 쳤을까. 김기창이 같은 글 속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먼저 화안(畵眼)의 양성, 즉 그림을 바로 인식할 줄 아는 교양을 쌓지 않고는 아무리 한국적인 것, 민족적인 것을 외쳐봤자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다.

46년에 창설된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은 일본화풍의 탈피와 한국화의 방향모색이란 이념을 표방한, 해방 후 최초로 등장한 한국화 그룹이었다. 이들의 작업이 과연 얼마만큼 이념에 따른 것이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인 작품들이 남아 있지 않아 언급할 수 없으나, 이념에 의한 그룹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적극적인 한국화 모색의 시금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룹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들의 분포를 보면 以堂문하, 海岡문하, 靑田문하로 나눌 수 있는데, 대개가 선전(鮮展) 후반기에 등장한 신예들이었다. 자기 양식이 틀에 박혀버린 중견 기성작가들보다 모색기에 있었던 신진들이 한국적인 것의 탐색을 서둘렀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현상으로 간주된다.

진정한 한국적인 색채, 민족적인 정신의 탐구는 작가 개개인의 과제일 뿐 아니라 신진양성에도 주요한 목표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46년에 창설된 서울대 예술대 미술과는 이러한 과제를 교육의 주요지침으로 해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떠오려 보게 한다. 당시 한국화 분야의 지도교수엔 김용준(金瑢俊), 노수현(盧壽鉉), 장우성(張遇聖)이 들어 있었는데, 김용준과 장우성이 추진해 나간 문인화의 현대적 해석은 이 학교의 정신적인 맥을 형성하는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수묵이 지니는 고담한 분위기와 간결한 묵선과 암시적인 대상파악 등 문인화의 양식적 특성을 원용하면서 현실대상으로 그 모티브를 확대해 간 조형성은 고유한 회화정신을 현대적 양식 속에 구현하려는 방법의 진전이라고 할 만하다.

1회 國展에서 특선(국무총리상)한 서세현(徐世鉉)의 <꽃장수>, 2회 박노수(朴魯壽)의 <청상무(淸想賦)>(국무총리상), 장운상(張雲祥)의 <새벽길>(특선) 등 서울미대 초기 졸업생들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조형의 방법적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다.

최초로 해외전 실현

50년 한국동란을 치르고 난 후, 한국화 계열엔, 해방후 40년대 후반의 혼란을 어느 정도 극복한 정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방후 세대의 작가들이 배출되면서 한국화의 방향모색이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인상도 엿볼 수 있었다.

50년대 전반을 통해 가장 괄목할만한 한국화의 새로운 시도는 김기창의 의욕적인 화면에서 먼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환도하면서 발표한 일련의 시정풍경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에서 그는 대상을 대담하게 요약하고 구성적 밀도를 가한 변모를 보여주면서 한국화가 지니고 있는 선묘의 힘과 여백의 조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해 주었다. 뒤이어 박래현(朴崍賢)도 유사한 구성작품을 시도해 보임으로서 한동안 이들 부부화가가 펼쳐보인 조형의 탐구는, 앞서 문인화 정신의 현대적 해석과는 또 다른 고유한 회화정신의 현대적 방법의 천착을 이룩한 것이었다. 김기창의 <타작마당>, <노점A>, <노점B>, <복덕방> 등 50년대 초의 일련의 작품과, 박래현의 <노점>(1956년 국전 대통령상), <새벽길>(같은해 大韓美協展 대통령상) 등의 작품은 50년대 한국화의 한 독특한 방법론을 엿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57년에 발족한 <백양회(白陽會)>도 한국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자는 이념하에 결속된 중견작가들의 모임으로 개별적으로 이미 독자적인 방법을 전개지켜 왔던 작가들이다. 창립에 모인 회원은 김기창, 이성태(李性台), 이남호(李南鎬), 장덕(張德), 박래현, 허건(許楗), 김영기(金永基), 김정현(金正炫), 천경자(千鏡子) 등 9명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조중현(趙重顯), 김화경(金華慶), 성재휴(成在烋), 박봉수(朴奉洙)가 가담하였다.

<白陽會>는 서울전뿐 아니라 지방전도 열면서 한국화 계열에 자극을 주었으며, 나아가 최초로 해외전(대만, 홍콩, 일본 등지)도 실현하여 한국화의 중흥에 의욕을 보였다. <백양회>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한국화의 새로운 방향 설정에 남다른 정열을 보여준 이응노(李應魯)의 경우도 50년대 한국화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주로 중견, 신진들에 의해 추진된 한국화의 새로운 창조적 열의에 비해 중진이나 노대가의 경우 전통적인 묵법에 안주한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한결같이 심화시켜 온 몇몇 중진, 대가의 경우, 한국화의 실험에서 일어나는 전통적 방법의 탈각과 대차되면서 균형을 유지해 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상범(李象範), 하관식(下寬植)의 무르익어가는 자기 양식의 완성은 실험이란 차원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한국화의 정신과 양식을 살찌운 것이었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70년대에 들어오면서 활기있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한국화의 모범을 이들의 양식적 완성 속에서 찾을 수 있었던 데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70년대에 갑자기 붐을 형성하기에 이른 40대 작가군에 의한 사경산수의 대두도 그 모범을 이상의 몇몇 중진 대가들에게 찾을 수 있다.

구상과 비구상으로 이분화되다

한국화의 전통적 회화양식으로 보기 전에 먼저 회화란 입장, 그것도 현대회화로서의 존재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비단 신진작가들에 의해서만 아니라 일부 기성작가들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천경자의 경우는 이미 50년대 초에서부터 채색위주의 독특한 회화공간을 확대해 왔는데, 회화가 회화일 수 있는 근간을 형성해 주었다. <白陽會>를 탈퇴하고 한동안 서양화 그룹인 모던아트협회에 가담한 그의 태도에서도 이런 주장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권영우, 안상길, 안동숙, 박생광 등의 경우도 대체로 전통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조형세계를 일구어 가고 있는 점에서 이미 동양화란 양식적 굴레를 벗어난 것이라 할 만하다.

신진들에 의한 일련의 그룹운동에서도 이같은 이념적 편린을 확인할 수 있다. 60년에 창립된 묵림회(墨林會)(서세옥(徐世鈺), 민경갑(閔庚甲), 남궁훈(南宮勳), 전영화(全榮華), 정탁영(鄭晫永), 안동숙(安東淑), 신영상(辛永常) 등)는 고루한 묵법에서 탈피, 대담한 재질실험을 내세우면서 점차 내용상에서도 대상을 탈각시킨 비정형의 화면을 추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묵림회>의 이같은 작업은 당시 파상높게 밀어닥친 서양화의 비구상 운동, 즉 액션페인팅계의 뜨거운 표현이념에 공감한 일종의 시대의식의 견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화가 일정의 모티브, 그것도 교과서적인 대상을 반복하거나, 그러한 범주를 벗어났다고 해도 현실적 풍경에 그친 것이 고작이었는데, <묵림회>의 墨痕과 墨象에 의한 추상적 화면경영은 일시에 전통적 굴레를 벗어버린 것이 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을 허황되고 무의미한 작업으로 비평한 일부 견해도 있었으나 새로운 창조를 위해 낡은 양식은 파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 위에서 보면, 양식의 해체야말로 새로운 양식의 모색의 첫 단계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 대담한 양식해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양식의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씨앗은 돋아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의아스럽게 보인다. 말하자면 창조적 발판의 구축으로서의 해체가 아니라 일종의 실험을 위한 실험이란 안이한 사고의 한 결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구어 버릴 수 없게 한다.

<묵림회>가 해체되고 67년 그 후속 모임이라고 할 만한 <한국화회(韓國畵會)>(송영방(宋榮邦), 신영상(辛永常), 이규선(李奎鮮), 임송의(林頌義), 장상선(張相宣), 정탁영(鄭晫永), 홍정희(洪貞姬) 등)가 창립되었지만 이미 이념적 색채는 찾을 수 없고, 단순한 동문전 같은 친목전으로 명맥되고 있을 뿐이다. 60년대 초반에 결성된 <靑土會>나 <신수회(新樹會)>(김동수(金東洙), 나부영(羅富榮), 박원서(朴元緖), 조평휘(趙平彙), 오태학(吳泰鶴), 문은희(文銀姬), 홍석창(洪石蒼) 등) 등도 뚜렷한 이념에 의한 것이 아니고 친목이나 동문전의 성격을 띠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묵림회> 이후 한국화단에는 서양화단과 같은 이분된 양식의 분파가 자리잡기 시작했는데 이른바 구상과 비구상이 그것이다. 구상과 비구상은 국전(國展)의 기구에까지 침투하여 동양화의 구상부, 비구상부가 갈리게까지 되었다. 國展의 비구상부 중심작가로는 서세옥, 권영우, 신영상, 안동숙, 이규선, 전영화, 정탁영, 송영방, 김원세, 심경자, 오태학, 이영수, 이종상 등을 들 수가 있다.

신예작가들로 구성된 <시공회(時空會)>(홍석창, 이경수(李炅洙), 변상봉(卞相奉), 송형근(宋亨根), 홍용선(洪勇善), 정하경(鄭夏景)) <현대차원전(現代次元展)>(이설자(李雪子), 성창경, 박선희(朴宣姬) 등)은 <묵림회> 이후의 비구상계열 그룹으로, 그리고 그룹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비구상을 시도하는 신예들이 늘어났다. 김철성(金徹性), 서기원(徐基元), 이석구(李錫九), 송수연(宋秀璉), 전래식(全來植) 등은 그 대표적인 예로 꼽을 만하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다

7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화 계열에 눈에 띄는 현상은 노대가들을 중심으로 한 회고전 형식이 부쩍 많아졌다는 점과 아울러 미술작품의 상품화가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71년 서울신문사가 주최한 바 있는 <6대가 초대전>(허백련(許百鍊), 김은호(金殷鎬),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 변관식(卞寬植), 박승무(朴勝武))이 계기가 되어 이후 잇달아 유사한 노대가전들이 꾸며졌고, 이들 개별적인 회고전이 동아일보사의 지속적인 사업으로 열림으로써 자기 양식을 확립한 작가들에 대한 재평가작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평가작업은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맞이한 화상시대의 전개와 관계를 가지면서 일종의 한국화 붐의 인상을 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6대가들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걸쳐 차례로 타계함으로써 한국화단의 구조는 점차 해방 후 배출된 세대중심으로 교체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한결 다양하고 풍부한 국면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7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미술의 상품화에 더욱 기름을 붓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에 곁들여 여러 가지 부작용도 빚어졌다. 무엇보다 작품의 양상과 이에 부연된 질적 저하가 심각한 문제로서 대두되기도 했다. 상품화에 타협한 안이한 작가태도가 의식을 병들게 하였고 그것은 한국화의 방향에 암적 요인으로서 지금껏 잠재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70년대에 부상된 실경산수에 대한 재인식은 전통적인 소재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자각과 아울러 리얼리즘 정신의 재확인으로 평가될만하다. 특히 실경산수가 해방 후 등장한 40대 작가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추구되었다는 것은 주요한 시대적 의미를 지닌다. 이영찬(李永燦), 이열모(李烈模), 임송의(林頌義), 정탁영(鄭晫永), 송영방(宋榮邦), 하태?(河泰?), 이정신(李正信), 이원좌(李元佐), 박대성(朴大成), 이일종(李日鍾) 등의 활동이 이 경향에서 특히 주목을 끌었다.

실경산수를 중심으로 한 리얼리즘 정신과 한국 고유한 정서의 회복은 한국화의 방향모색에 하나의 방법적 통로를 예시해 준 것이었는데, 80년대로 접어들면서 급기야 형성되기 시작한 수묵화 운동도 그 하나의 방법적 확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8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현대수묵화대전>을 계기로 85년에 이르기까지 수 차례에 걸쳐 꼬리를 이운 <오늘의 수묵화>, <수묵의 현상>, <묵삼전>, <먹 그리고 점, 선>, <한국화 오늘의 상황> 등 일련의 열기는 80년대 전반을 수묵화 운동 시대로 특징짓게 만들었다. 특히 이 운동은 송수남, 홍석창 등 홍대중심의 출신들에 의해 추진된 바, 수묵을 통해 고유한 회화정신의 회복을 내세운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수는 거의 50명을 넘어서는 집단적인 세력을 보여주고 있다. 박인현(朴仁鉉), 이철양(李喆良), 신산옥(申山沃), 박태서(朴台緖), 임효(林涍), 김식(金植), 홍형주(洪笘珠), 신정주(申晶珠) 등이 수묵화 운동을 통해 두각을 나타낸 신예들이다.

이와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수묵운동의 커다란 테두리에서 보아 80년대 들어와 주목을 끈 수묵계열의 그룹으로서는 <三人行>(김아영(金雅瑛), 강남미(康南美), 최윤정)과 <일연회(一硯會)>(황창배(黃昌培), 오용길(吳龍吉), 한풍열(韓豊烈) 등) 그리고 개인으로는 이종상(李鍾祥), 이윤희(李允姬), 정태진(鄭泰辰), 정종해(鄭鍾海), 정치환(鄭致煥), 이청(李請), 이철주(李徹周), 이양원(李良元), 김춘옥(金春玉) 등의 활동이 공감대 위에 서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 고유의 정서회복과 양식이 확립되어야

시대를 따른 일련 새로운 시도와 운동과는 달리 전통적 소재와 기법을 고수하는 화맥도 해방 이후 꾸준히 잔존되어 오고 있다. 특히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남화의 맥은 그 주요한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주로 허백련(許百鍊), 허건(許楗) 등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로 조방원(趙邦元), 김명제(金明濟), 김옥진(金玉振), 김형수(金亨洙), 신영복(辛永卜), 이상재(李常宰), 문장호(文章浩), 이옥성(李沃城), 이창주(李昌柱), 곽남배(郭楠培) 등이 광주를 중심권으로 한 호남 남화산수의 전통을 이끌고 있다.

출발 당시에는 여러 경향의 작가들이 혼류하고 있었으나 점차 회수를 거듭함에 따라 남화 위주의 작가들 중심이 된 그룹으로 <靑土會>(박노수(朴魯壽), 이영찬(李永燦), 박세원(朴世元), 김옥진(金玉振), 이재호(李在鎬), 이열모(李烈模), 이건걸(李建傑), 오석환(吳錫煥), 이상재(李常宰), 이인실(李仁實) 등)을 들 수 있다.

어떤 경향이나 유파를 의식하지 않은 순수한 친목위주나 동문들의 모임도 해방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라면 이미 든 서울미대 출신의 <한국화회> 홍대출신의 <新樹會><創造會> 중대출신의 <創林會>(김원, 안황규, 유남식, 우희춘, 김정묵) 등을 꼽을 수 있다. 84년에 결성된 <가락지전>은 여류들만의 모임(이인실(李仁實), 심경자(沈敬子), 원문자(元文子), 이숙자(李淑子), 주민숙(朱敏淑))으로 어떤 특정 이념을 내세운 것은 아니다.

80년대 수묵화운동과 상대적으로 채색에 대한 인식도 점고되고 있다. 이미 70년대에 만들어진 <春秋會>는 채색위주의 작가들 모임이다. 개별적으로는 정은영(鄭恩泳), 유지원(柳智元), 이숙자(李淑子) 등의 활동이 돋보이고, 최근에 나온 신예로는 곽정명(郭正明), 서정태(徐政泰), 김천영(金天榮) 등이 있다.

해방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한국화의 커다란 흐름은 채색과 전통적 산수화에서 점차 수묵중심과 현실적 대상을 모티브로 한 리얼리즘의 확대로 진전되어 온 것을 엿볼 수 있다. 일본적 색채의 탈피란 명분이 자연 채색화의 위축을 초래하였고, 전통적 묵법과 고식적 내용에서 벗어나고자 한 일련의 자각증세가 문인화 정신의 탐구, 사경산수의 재인식을 거쳐 80년대에 와선 수묵화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한국화를 지역적 특수성을 벗어난 보편적인 회화양식으로 이끌어가야 한다는 주장과, 한국화의 정신을 고유한 회화의 방법적 발전 속에서 추구하려는 견해가 커다란 맥을 형성하면서 한국화의 재창조란 명분에 입각해 있다. 해방 후 한국화 분야로 남아날 수 있는 존재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에 부딪쳐 왔다는 점이고, 이 점은 앞으로도 겪어야 할 심각한 문제임에 다름 아니다. 한국 고유한 정서의 회복과 양식의 확립은 비단 한국화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문화전반에 걸친 문제이겠으나 그것이 더욱 절실한 현실적 요구로 나타나는 것은 조형양식에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