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40년 오늘의 문화예술 미술·洋畵

다양한 미술운동의 전개와 더불어 발전해 온 서양화




이일(李逸) / 미술평론가·홍익대 교수

이데올로기의 충돌과 상극으로 혼잡을 거듭하다.

1945년 8·15해방을 맞이한 후의 한국 미술의 새로운 정립의 시도는 실질적으로는 1949년, 즉 대한민국 정부 수립 1년 후에 창립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약칭 국전)과 더불어 비롯된다.

그렇다고 해방 직후의 우리나라 미술계가 무풍지대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조국 광복과 함께 미술에 있어서의 지상 과제인 <민족미술>의 이념을 둘러싸고 미술계는 오히려 미술 외적인 이데올로기의 충돌과 상극으로 혼잡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국전은 그 혼잡을 극복하고 진정한 <우리나라 미술의 발전·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출범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국전은 81년에 그 명맥을 다하기까지 4반세기를 넘는 연륜을 쌓아 가며 이 나라 미술의 발자취와 함께 숱한 부침을 겪어 왔다. 이 자리에서 국전의 공과를 새삼스럽게 문제삼을 계제는 못되나, 국전이 우리나라 40년 미술사의 하나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국전은 우니 나라 미술 발전의 매개체적인 역할은 담당하면서, 비록 그 어떤 선도적인 주류를 형성하지는 못했으나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이 나라 미술계의 하나의 結集本로서의 기능을 다 했다는 말이다.

한편 국전 설립을 2년 앞둔 47년 8월에 <진정한 민족 예술의 건설>을 표방하여 <조선미술문화협회>가 발족했으며 이 협회는 '48년까지 3회에 걸친 협회전을 꾸밀 수가 있었다. 참고로 당시의 창립회원 중의 몇 사람의 이름을 들면 다음과 같다. 김인승·남관·박영선·손응성·이규상·이봉상·이인성·임완규·조병덕·한홍택 등….

그리고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손응성 등 다섯 서양화가들에 의한 <制作洋畵協會>가 창립되었으나 이 역시 좌우익의 이념적 갈등으로 제1회전으로 막을 내린 단명의 것이었다.

제30회를 마지막으로 국전, 막을 내린다.

제1회 국전은 1949년 11월, 당시의 경복궁미술관(현재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달에 걸쳐 개최되었다. 미술계는 말할 것도 없이 일반 문화인의 비상한 관심과 주목 속에 개막된 이 국전 최초의 대통령상은 서양화 부분에서 유경채의 <廢林地 근방>이 차지했다.

그러나 제2회 국전이 개최된 것은 6·25전쟁을 거쳐 휴전이 성립되고,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53년 11월에야 막을 열 수가 있었다. 비참한 동족상잔의 흔적도 채 가시지 않은 서울에서 4년만에 개최된 국전에서 대통령 수상작은 역시 서양화 부분의 이준의 <만추(晩秋)>였다. 그리고 이 해의 국전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는 6·25전쟁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 적지 않았던 사실이며 또한 국가적인 역경 속에서도 미술가들의 예술의욕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기념할만한 전람회였다.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은 많았으나, 그 중에서도 주요 작품을 들자면 김흥수의 <침략자>, 이종무의 <폐허의 충무로 부근>, 도상봉의 <폐허>, 황염수의 <잔적>, 이수덕의 <혈서> 등이다.

제3회 국전에서도 영예의 대통령상은 서양화 부분에서 박상옥의 <휴일>이 차지함으로써 서양화부분은 제1회부터 3차례에 걸쳐 내리 국전 최고상을 받은 셈이다.

4회 이후의 서양화 부분 수상작가는 다음과 같다. 변종하의 <포플러>(4회 부통령상), 임직순의 <좌상>(6회 대통령상), 장리석의 <그늘의 노인>(7회 대통령상)

'60년은 4·19학생 의거와 함께 새로운 가치관과 행동의식이 각계에 파급되면서 국전에까지 그 여파가 미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추천·초대작가급 작가 20여명이 4·19정신을 내세워 국전개혁을 요구하며 참가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에 이은 '61년의 5·16혁명과 함께 국전 운영제도의 개혁이 단행되었고 10회에서 국전사상 처음으로 추상회화에게 국가최고회의 의장상(종전의 국무총리상)이 주어졌다. (김형대 작<還元B>)

이와 같은 국전에서의 추상회화의 부상은 이 해에 단행된 국전의 개혁, 다시 말해서 서양화 부분에 한하여 작품 경향을 3과(구상·반추상·추상)로 분리하여 심사에도 그것을 고려한 데서 온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62년의 11회부터 16회까지는 다시 事實편향의 보수적인 국전의 성격이 되살아났으며 추상회화가 최고상을 받기는 17회(68년)에 이르러서이다. (이승조, <核 F-90>)그리고 연이어 다음해에도 추상작품인 박길웅의 <흔적·白 F-15>가 영예의 최고상을 수상했다.

국전은 그 동안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국전의 체질 개선을 위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그 권위주의적 독단과 폐쇄성은 쉬이 치유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74년에는 보다 적극적인 <재야> 작가들의 수용을 위해 문호를 개방했고 새로 주로 비구상 계열의 재야 작가들을 추천작가로 영입했다. '74년 국전에서는 박서보·윤형근·정영렬·조용익·하인두·하종혁·전성우(수락거부)가 일차적으로 그리고 '75년에는 제2차로 정점식·윤명로·김종학 등이 추가 영입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갖가지 개선책에도 불구하고, 또 국전이 우리나라 서양화단에서 차지했단 막중한 비중에도 불구하고 국전은 1981년 제30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은 국전이 하나의 <관전>으로서 지닐 수밖에 없었던 원천적인 한계와 새로 밀어닥치는 미술의 새로운 물결과의 갈등에서 빚어진 숙명적인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전시대가 개막되다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처럼 국전의 발자취에 준해 더듬어 볼 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한계가 따른다. 바꾸어 말해서 한국에 있어서의 진정한 현대미술이 어떤 의미에서는 국전 권외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상 이 나라의 미술발전의 참된 동력이 되고 <산 미술>의 태동이 열기 있게 펼쳐진 것은 국전이라고 하는 관제의 체제에서가 아니라, 항상 기존의 위계에 도전하는 <앵데팡당>들, 즉 패기에 찬 반인습의 자유의 추구자들에 의해서인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의 미술 운동의 발자취는 국전의 그것이 아니라, 8·15해방 이래 때로는 거의 독자적으로 또는 소집단의 형식으로 시도된 일련의 새로운 조형적 시도의 예에서 그 뿌리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이른바 <모더니즘>운동이 그것이며, 예컨대 김환기·남관·유영국·이규상·정규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한 새로운 조형 언어의 탐구 내지는 전통적 사실주의의 지양이라는 과제는 대대의 경우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것일 경우에도 산발적이요 또 단명으로 그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하나의 미술 이념으로서 정립되지 못하고 따라서 하나의 커다란 동향으로 부각되는 것은 '50년대 말경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이른바 <앵포르멜> 운동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전위 미술의 집단적 태동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 신문사가 주최한 우리나라 최초의 초대전인 조선일보 주최의 <현대작가 초대전>이 창설이다. (제1회 초대작가, 김경, 김병기, 김훈, 김흥수, 나병재, 문우식, 변영주, 변희천, 이세득, 정규, 이양로, 정준용, 정창섭, 조병현, 천병근, 최영림, 한봉덕, 황규백) 이렇게 하여 처음으로 국전에 대항 할 수 있는 민간 주도의 (재야전)이 문을 연 것이다.

그리고 이와 때를 거의 같이하여 같은 해인 '57년에 신조형파 그룹과 <모던아트협회>그리고 젊은 추상회화 세력으로서 현대미술가협회가 창립되었고 '60년에는 <60년 미술협>, '62년에는 <현대미협>과 <60년대 미협>의 통합체인 <악뛰엘>의 창립을 봄으로써 전위미술의 터전이 다져지는 것이다.

이들 일군의 집단적인 움직임 가운데서 특히 첨예화된 의식과 함께 추상미술의 모험에 과감히 뛰어든 작가들은 당시 일군의 20대의 젊은 세대로서 그 구체적인 표명은 1957년 5월 1일부터 USIS화랑에서 열린 제1회 현대미술가협회전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 협회는 곧 내부의 분열로 같은 해 화신화랑에서 열린 제2회전을 끝으로 회원 일부가 탈락했다. 그리고 이 미술협회는 '60년에 발족한 <60년대 미술협회>와 '62년에 통합되어 새로 <악뛰엘>그룹을 형성했으나, 이 그룹도 '64년의 제2전을 마지막으로 해산되었다.

조선일보사 주최의 <현대작가 초대전>은 우리나라 현대미술 전반에 걸쳐서의 커다란 촉진제 구실을 하며 12회를 거듭하고 1968년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중단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 초대전 자체가 12회를 거듭하는 동안 그 역시 <체제화>라는 경화 현상을 노정하게 되었고 그 제도 아래서 더 이상 새롭게 등장하는 미술풍토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또 한편으로는 일종의 세대 교체의 현상으로 풀이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앵포르멜 세대>에 이은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천기의 초대작가전에도 60년대 후반기부터 추상에 있어서의 새로운 경향, 즉 기하학적 추상 및 색면파라 불리워질 수 있는 추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는 거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변화의 징조를 앞당겨 결정적인 형태로 집약되어 표명된 것이 '63년에 결성된 <오리진>그룹의 결성이다. (창립 회원전 출품 작가, 권영우·김수익·서승원·최명영·최창홍·이상락·신기옥·이승조) 그리고 그룹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앵포르멜 이후>를 내세운 보다 기본적인 조형 질서의 정립에 있었던 것이다.

위에 든 일련의 추상회화의 강력한 주도적 흐름과 병행하여, 전통적인 아카데미 사실주의를 배격하면서 보다 건실한 구상회화를 표방하는 움직임을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마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67년에 발족된 <창작 미술협회>일 것이다. (창립 회원, 유경채·고화흠·이봉상·박창돈·박항섭·최영립·황유엽·이준·장리석)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 이 협회는 그 동안 구상·비구상을 포함한 신선한 감각의 정충적인 회화 경향을 견지하며 폭넓은 수용력을 보였으며 그 창립회원 중에서 일부는 따로 1967년에 <구상전> 그룹을 창설, 오히려 향토적인 구상 세계를 추구해 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일보사의 현대작가전을 효시로 하는 신문사 주최의 이른바 <민전>은 그 바톤이 1970년에 창설되고 곧 중단되어 버린 한국일보 주최의 <한국미술대상전>에 이어지고 그 후 '78년에 들어서면서 이른 <민전 시대>개막을 알리는 <중앙미술대상전>(중앙일보주최) <동아미술제>(동아일보 주최) 다시 문을 연 <한국미술대상전>을 맞이하게 된다.

<민전 시대>,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 신호와 함께 서양 화단의 움직임에도 커다란 변모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70년대를 거의 풍미하다 시피했던 미니멀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새로운 구상>에로의 전환이다. <동아미술제>는 처음부터 <새로운 형상성>이라는 명제를 내세워 그와 같은 움직임에 선도적 역할을 하기를 시도했고 <중앙미술대상전> 역시 미니멀적·개념적 방향에서 전람회의 성격을 규정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모처럼 만에 되살아 난 <한국미술대상전>은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서 그 새로운 전개를 시도했으나 역시 2회로 그치고 말았다.

민전의 등장과 함께 그 반대 현상으로 국전은 상대적으로 약화됨과 동시에 그 자체 모순의 딜레마를 극복하지 못해 국전 주관 기구를 문예진흥원에 이양한다는 명목 아래 실질적으로 30회를 끝으로 그 긴 역사의 막을 내렸다.

한편 <민전 시대>의 개막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미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접근에 대한 시도가 활발하게 태동하기 시작하며 그 첫 집단적인 표명이 바로 <현실과 발언>, 그룹의 발족일 것이다. (1980년) 이 창립전은 미술회관에서 열릴 계획이었으나 표현이나 내용상에 있어서의 과격한 <발언> 때문에 취소되어 동년 겨울에 동산방 화랑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전시회 취소는 아마도 모처럼 만에 나타난 미술 활동에 대한 官의 개입의 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미술운동의 다양화

위에서 잠깐 부분적으로 언급을 했으나, 국전과 민전이라는 하나의 기구(機構)로서의 대규모 전람회와 병행하여 우리나라 미술 40년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크고 작은 각종의 그룹 활동이다.

해방 직후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 혼란기에 있어서는 어떤 구체적인 미술 이념을 선명하게 내세운 그룹 형태의 전시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열거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조선미술협회>(1945년), <미술가 동맹>(1946), <신사실파>(1947), <제작양화협회>(1947년). 그리고 50년대에 들어서서의 <창작미술협회>(1957년) <모던 아트협회>(1957) <신조형파> 등.

위의 든 그룹들의 부침이 5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 미술 운동의 어떤 의미에서는 산발적이자 지속성이 없는 미술의 흐름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60년대는 거의 추상표현주의 시대라고 할만큼 앵포르멜 경향이 이 시기의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급기야 이에 대한 반동이 역시 집단적인 형대로 1967년경에 강력하게 대두하는 것이다.

그 첫 표명은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 연립전은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세 그룹에 의해 구성된 전시회였으며 그 세 그룹은 <無同人> <오리진> <新展同人>이었다. 그 중 <오리진>은 이른바 4·19세대에 속하는 화가들로 구성된 그룹으로서 앵포르멜 세대를 직접 잇는 세대를 대표하는 그룹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화가들은 1차적으로 反추상표현주의라는공통된 기반위에 평면적인 기하학주의 경향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 경향과 병행하여 보다 복합적이고 다원화된 요인을 포괄적으로 묶은 <'68年展>이 탄생하여 이들과 함께 명실공히 70년대 미술의 서장이 예고된 셈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흐름을 보다 집약적인 형태로 결속하고 거시적으로 70년대 미술의 비전을 제시하려는 시도에서 태어난 것이 1969년에 창설된 <한국아방가르드협회>(약칭 AG)이다. 여기에는 또한 미술평론가의 적극적인 이니시어티브가 크게 작용하여 협회지로서 <A·G>誌를 간행함과 함께 (4호까지 발간) 3차례에 걸친 협회전을 통해 70년대 미술의 다원화된 미술경향을 수렵하려고 했다.

5년만에 해체된 AG그룹의 뒤를 이어 그 후속으로 S·T그룹('71년) <에프프리>('72년) <新體制>(1970년) <構造>(1974년) 등이 태어나며 이 젊은 세대에 의한 미술 경향의 확산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룹과는 성질이 다르나 1975년에 창설된 <서울현대미술제>는 그 미술제의 성격이 각 주요 도시에로 확산되면서 70년대 미술의 하나의 촉진제 구실을 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빼어놓을 수 없는 그 보다 앞서 '72년에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앵데팡당전>이며 이 무심사·無賞의 자유 출품 형식의 이 전람회는 새로운 미술실험의 창구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단의 양상은 상당한 변모를 겪는다. 그것은 일단 미술 운동의 다양화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나 실제로는 두 가지의 커다란 줄기로 종잡을 수 있는 현상으로 보여진다. 즉 70년대의 주류를 이루어 온 모더니즘 내지는 형식주의 미학의 연장선상에 선 흐름과 그것을 거부하고 나선 素材主義 경향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두 흐름은 자칫 양극화의 양상을 보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 두 경향의 보다 이론적인 미학의 전개가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주요 과제의 하나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