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40년 오늘의 문화예술 미술·彫刻

한국 현대조각 40년의 궤적




김인환(金仁煥) / 미술평론가·조선대 교수

전통조각의 단절과 근대조각의 이식

1. 전통조각의 단절

돌이켜 보면 한국 조각의 역사는 멀리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또한 조각의 興盛期를 맞았던 시기도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였다. 주로 불상조각이 주류를 이루면서 석굴암의 석조불상 같은 전무후무한 걸작품을 남겨놓았다. 고도의 세련된 기법과 감각을 살리면서 불교적인 禪味와 信心을 구현했던 불상조각도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시대의 침체기를 맞는다. 조선왕조의 몰락과 일제 식민통치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조소 분야도 국운과의 흥망성쇠를 같이하면서 전통의 단절이라는 아픔을 겪는다.

고대 및 중세에 있어서의 미술의 변천이 東西를 막론하고 거의 특정 종교와 제휴하여 발전되어 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조각품 모두가 불교를 원천으로 하고 그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브론즈, 혹은 石材에 의해서 일찍부터 뛰어난 조각예술의 창의력을 발휘해 왔다. 한때, 조각부문은 회화나 건축분야보다 더 뛰어난 발전을 이룩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선인들의 유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앞선 조각기술이 일본에까지 보급되고 영향을 미쳤던 점은 저네들이 국보로 높이 떠받들고 아끼는 京都 廣隆寺 소장 목조불상<半迦思惟像>으로도 증명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한 때의 영화는 그것으로 終章을 내리고 쇠퇴일로에 들어선 조각의 전통은 조선조 말을 고비로 일단 단절의 비운을 맞는다. 그 이유는 고려 이후의 천기(賤技)사상과 수요의 격감에 의한 때문이다. 조각가 자신들이 그에 대한 자각을 느끼고 조소예술을 희생시키려는 노력도 없었다. 또 그러한 풍토가 조성될 겨를도 갖춰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근대조각의 역사는 어느 의미에서 일체가 '없음'(無)으로 돌아간 零地點에서 새로이 시작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2. 김복진(金復鎭)의 등장과 선전(鮮展) 조각부

정관(井觀) 김복진(金復鎭)(1901∼1941)을 근대 조각의 첫 효시로 본다. 그에 의해서 처음으로 서구식 조소기법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工匠이 아닌 '조각가'로서의 예우가 갖춰진 조각가가 탄생한 것도 그로부터이다. 조각 예술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도 그의 이후부터이다.

김복진은 1919∼1924년 사이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그곳의 제국 미술전에 작품 <나상(裸像)>을 출품하여 입선되었다. 동경미술학교는 한국 근대미술의 형성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의 미술교육기관이다. 도입기의 서양화는 물론이거니와 조각분야의 선구적 입장에 섰던 미술인들이 거의 동경미술학교 출신들이다. 서양화분야의 고희동(高羲東)·김관호(金觀鎬)·김찬영(金瓚永)·이종우(李鍾禹) 등을 위시한 화가들이, 그리고 조각 분야의 김복진이 이 학교 출신이다.

동경미술학교는 이른바 '아카데미즘'(官畵派)을 근간으로 한 작풍이 지배적인 미술학교로서 당시 일본화단은 물론 한국 화단에 있어서도 이 작풍이 미술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다. 자연대상의 사실적인 형태묘사라는 엄격한 수련과정을 거친 이들 미술가들은 국내에서는 1922년에 발족된 조선총독부 주관의《조선미술전람회》(선전(鮮展))를 발판으로 데뷔하고 그 기구의 주축세력을 형성한 작가군들이기도 하다.

일제 식민통치시대 전반에 걸친 조각사의 흐름을 조감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선전(鮮展)》일 따름이었다. 1922∼1944년 사이에 열렸던 이 전람회의 <조각부>(1925년 제4회전 때 처음으로 설치)가 사실상 당시 조각활동의 本據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선전에 출품된 조각의 경향을 개관하건데 조각의 주 소재는 조소예술의 초보적 단계에 불과한 頭像 정도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고 재료도 거의 점토나 석고에 의존되었던 것 같다. 차츰 목재, 석재 등이 등장하고 제16회전에 김복진은 누드작품이 출품된 이후로는 소재선택에 있어서도 다양한 변화가 모색되어지기 시작한다. 근대 조각의 여명은 그야말로 습작기의 조각으로 일관되고 있다.

한국 현대조각 40년의 궤적(軌跡)

1. 激動期의 조각

결국 김복진을 출발점으로 하여 전개되기 시작한 한국 근대조각사의 전반은 서양식 조각기법의 답습과 정착이라는 방향으로 점철될 뿐이다. 첫 단계에서는 인물 두상이나 흉상을 통한 초보적 기술 습득에 그친 형편이었고 점진적으로 선명한 구상적 형태의 사실조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한 바탕에서 맞이한 8·15광복과 더불어 당연히 조각계의 흐름에도 방향전환이 있어야 했다.

8·15해방에서 6·25동란까지는 사상적 이데올로기의 분쟁과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에 말려 일체의 문화활동이 침체되어 있던 시기이다.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무려 10여개 미술단체의 난립을 보았으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미술활동은 정지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1946년 3월에 결성된 <조선조각가협회>가 당시로서는 유일한 조각단체였으나 창작활동은 미진한 형편이었다. 이들 단체 등을 통하여 조각가로서 활동한 이는 김경승(金景承)·김종영(金鍾暎)·김정수(金丁秀)·윤승욱(尹承旭)·윤효중(尹孝重)·이국전(李國銓)·조규봉(曺圭奉) 등 주로 일본 동경에서 조각을 배우고 돌아온 사람들이다.

미술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이 창립되고 미술학부 내에 조소과가 설치되었다. (1946년 9월). 이어 <조선미술원>이 개설되었다. (1947년 10월). 私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화여자대학교에 미술과가 창설되고(1946년 9월), 홍익대학이 설립되어(1949년 6월) 미술과를 설치하였고 1956년에는 미술학부 내에 조각과를 두었다.

윤승욱·김종영 등이 봉직하였던 서울대학교 조소과와 윤효중·김경승 등이 봉직한 홍익대학교 조각과는 향후 한국 조각계의 2대 산맥으로 많은 조각인구를 배출해 내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근준 교수의 다음 기술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

이때부터 우리 조각계에는 교육에 있어 소위 <美大>(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소위 <弘大>(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각과)의 두 성격이, 작가활동에 있어 <미대파>(서울대 미대 조소과 교수 및 졸업생)와 <홍대파>(홍대 조각과 교수 및 졸업생)의 분립이, 작품경향에 있어 <미대파>의 <아카데미즘>과 <홍대파>의 <아방가르드>의 대립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런 두 갈래 성격의 분립, 대립을 주축으로한 우리 조각계의 역학적 공존관계 여하에 따라 한국 현대조각의 한 해는 조용하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출범을 보았다. 또 같은 해에 대한 미술협회와 서울특별시가 공동 주최한 대한미술협회전이 열리고 이들 전람회의 조각부를 통해서 신인조각 가의 등장을 보게 된다. 국전의 심사원은 김경승·윤승욱·이국전 등이 담당하였고 김종영·윤효중은 추천작가로서 참가하였다. 이 첫 국전과 대한미협전을 통해서 한용진(韓鏞進)·백문기(白文基)·김세중(金世中)·김만술(金萬述)·유한원(劉漢元)·최만린(崔滿麟)·윤영자(尹英子)·박일훈(朴日薰)·성락인(成樂寅)·박승구(朴承堪)·박철준(朴哲俊)·장기은(張基殷)·전상범(田相範)·김교홍(金敎洪) 등의 면면이 보인다.

6·25의 비극적인 내전으로 국토는 폐허화되었고 문화활동은 일시 마비되었다. 이국전 등 좌익계 조각가들은 월북하고 윤승욱 등은 被拉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그런가 하면 국군과 국제연합의 진격과 대한미협에서 분리되어 나와 별도로 조직된 한국미술협회의 한국미협전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생작품전과 홍익대학미술전 역시 미술학도들의 중요한 발표장이 되어 왔다. 이들 전시회를 통하여 등단한 조각가들이 해방 후 10여년간의 조각계를 장식하는데 그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백문기·김세중·최만린·윤영자·박철준·장기은·전상범·김영학·김영중·송영수·배형식·전뢰진·김정숙·최기원·최의순·김찬식·오순일·홍정희·남상교·최종태·성락인·강은엽·박상규·김윤신·박영희·유경복·김창희·오종욱·김정식·홍도순·김동희·유한원·심봉섭·서정주·한용진·김치환·정정희·김기조·최일단·조제현.

1950년에 몇몇 조각가에 의해 개인전이 열려지고 있다. 김찬식(1954년)·김만숙(1957년)·김영학(1958년)·김종영(1959년) 등의 개인전이 그것이다. 이 50년대만 하더라도 회화분야에 비해 조각분야는 양적으로 크게 열세에 놓여있던 시기였으며 제반 여건이 따르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인전을 엶에 있어서는 상당한 고난과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전진과 후퇴에 따라 사상 유례없는 민족의 대이동으로 북한지역의 미술인들이 대거 남하하면서 미술계의 판도도 많이 바뀌어진다. 1953년 정부의 還都와 함께 제2회 국전이 열리고 미술활동도 정상적인 궤도를 찾기 시작한다.

초창기의 국전은 미술대학생들의 경합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대한미술협회 산하의 대한미협전

2. 기념동상 조성 붐

전쟁의 혼란이 걷히고 그 여진(餘塵)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한 50년대 초부터 갑자기 일기 시작한 이른바 '동상붐'은 전국 도처에 각종 기념조각 및 장식조각을 조성하는 양상을 빚어냈다. 1951년 윤효중의 <李忠武公像(이충무공상)> (진해)건립을 시발점으로 한 초기의 동상제작에 관여했던 조각가로는 윤효중·김만술·김경승·김세중·김찬식·차근호(車根鎬)㐀등이 있다. 기념조각 및 장식조각의 조성붐은 5·16혁명 이후까지 이월되어 김영중·김정숙·김종영·최기원 등 많은 조각가가 여기 참여하고 있다.

3. 抽象조각의 擡頭

국전은 한 때 그 완고한 보수성과 심사에 얽힌 온갖 비리 때문에 매스컴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적어도 조각분야에서는 국전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었다. 조각분야의 통로가 극히 한정되어 있음에 비추어 신인등용문으로서의 국전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술의 전 분야가운데 국전 조각부가 비교적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었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50년대 말부터 밀어닥치기 시작한 새로운 외래사조의 물결에 자극받아 조각계에도 혁신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에 앞서 1951년에 이미 윤효중이 유네스코회의 참석차 유럽여행을 통하여 서구의 현대미술을 직접 접촉할 기회를 가진 바 있었고, 1953년에는 김종영이 런던에서 열린 <정치인을 위한 모뉴멘트> 국제전에 출품하여 입상하는 동작은 기틀이나마 갖춰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소재면에서 인물 위주의 구상조각으로 일관되던 국전에 새 바람이 불어 추상조각이 진출하고 실험적인 경향의 작품이 등장하고 있다.

국전과 대립되는 재야전(在野展)의 성격을 갖추고 첨예한 전위적 미학을 표방하는 미술가들이 대거 참여한 <현대미술가 초대전>(조선일보사 주최)이 발족되어 제1회전을 연 것이 1957년이었다. 당시 구미화단을 풍미하던 추상표현주의가 이입됨에 따라 전위미술의 양상이 표면화되기 시작하고 그 열기는 조각분야에도 파급되었다. 현대미술가초대전은 조각분야도 수용하여 제3회전을 맞는데 제3회전 조각부에 초대된 조각가의 면모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59년-경향)

강태성·김교홍·윤효중·김영학·이정구·박철준·백문기·배형식·유한원·전뢰진·전상범·최기원·김종영·김영중·윤영자·김찬식·김세중·송영수·정정희·장기은·차근호·김정숙·최만린·민복진·김경승.

국전은 내외로부터의 도전과 압력 때문에 자체체질개선에 부심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미술운동의 와중에서 제일 먼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문호를 개방한 분야가 국전 조각부일 것이다. 한편 조각가들 자신이 단체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뒤늦게나마 그룹형성에 들어갔다. 1963년 결성된 <原形會>로서 처음으로 단합된 이념의 기치가 올려진다. 이 그룹의 창립회원은 김영중·김영학·김찬식·이운식·전상범·최기원 등이며 후에 박종배·오종욱·이승택·이종각·박철준·강태성·조성묵 등의 작가들이 추가된다. 같은 해에 <駱友會>의 결성도 보았는데 이 그룹은 서울미대 조소과 동문전의 성격이 짙다.

1968년 <현대공간회>의 창립전이 열렸다. 이 그룹의 창립회원은 고영수·오종욱·이정갑·최종태·최충웅·최병삼·주해준 등이며 역시 전 회원의 분포는 서울미대 조소과 출신으로 되어 있다. 윗 年輩보다 아래인 세대들로 구성된 <제3조형회>는 1969년에 발족되었다. 창립회원은 심문섭·안성복·전준·김세경·손필영·오세원·장도수·장정남·한기옥 등이다. 같은 해에 홍익대 조각과 출신 30대 조각가들로서 <한국현대조각회>가 결성되었다. 창립회원은 김찬식·최기원·박종배·이승택·박석원 등이다. <靑銅會>가 창립된 것도 69년이다.

한국미술이 본격적으로 국제동향에 눈을 돌리고 국제전에 진출할 터전을 얻은 시기도 60년대였다. <상 파울로 비엔나레>, <파리 비엔나레> 등 유수한 국제 현대미술전에 한국 조각가의 작품이 출품되면서 활기찬 조각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보수와 혁신' '전통과 개혁'이라는 상반된 양식이 갈등을 노정시킨 60년대에 등단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조각가로서는 대체로 다음 여러 사람을 열거할 수 있다.

강태성·권달술·고영수·김광우·변유복·김윤신·홍성문·이운식·김봉구·김수현·김창희(당진)·김청정·김행신·김혜원·남철·유종민·민복진·박병욱·박석원·박종배·박종선·박충흠·신석필·심문섭·엄태정·윤미자·이길종·이승택·이정갑·이종각·장상만·정관모·정은기·조국정·조성묵·오세운·조승환·주해준·진송자·안성복·최병상·최종태·최충웅·박양선·손필영·이정자·한인성·한창조·황교영.

이들 외에도 주로 해외에서 수학했거나 활동하다가 국내활동을 재개한 권진규(權鎭圭)·문신(文信) 등은 세대적으로 윗 세대에 속한다. 한편으로는 이들 '윗 세대'의 몇 조각가가 속속 타계하기도 하는데 차근호를 필두로, 1967년에는 윤효중이, 1970년에는 송영수가, 1973년에는 권진규가 그 비극적인 생애를 마친다.

4. 추상조각에서 환경조각으로 변신

1969년에는 <현대공간회>가 첫 야외전을 펼쳐 보임으로서 한국 현대조각사에 새로운 장을 마련하였다. 현대조각이 '조각의 추상화' 즉 추상조각에서 새로이 '환경조각'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우리 조각계에도 어김없이 받아들인 한 예라 하겠다. 재료매재(材料媒材)의 가능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회화라는 평면개념의 제약을 넘어서서 '오브제'에의 길을 열어놓았고, 조각의 환경적 지침―현대 테크놀로지에 의한 환경화는 각종 입체구성을 통해 미술의 각 분야를 망라하여 종합하는 종합예술의 경지에까지 도달케 했다. '프라이머리 스트럭쳐'(기본구조 조각)는 그 일환으로 해석되어진다. 회화에서의 '미니멀 아트'와 함께 이 경향은 1970년대의 조각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오브제예술'이 등장됨으로 하여 회화와 조각의 한계를 구분짓기 어렵게 만든 대신에 그 양자를 일원화시킨 것이 '프라이머리 스트럭쳐'일 것이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하이퍼리얼리즘'의 영향으로 보이는 극사실(極寫實)의 묘사적 조각이 나타나기도 한다.

조각활동이 그 어느 시기보다 활성화되기 시작한 1970년대에는 많은 조각단체의 소장(消長)을 목격할 수 있다. 1970년대에는 <한국현대조각연립전>이 열렸고, 1972년에는 <현대조각초대전>이 있었다. 1973년의 국립현대미술관 이전개관 및 상설전시실 개관기념전과 1974년의 미술회관 개관기념 <전국조각가초대전>, <한국현대조각대전(국립현대미술관 주최)> 등도 기념할만한 전시였다.

1971년에는 홍익대 출신 조각가들의 모임인 <홍익조각회>가 출범하였다. 부산에서는 <공간회전>이 열렸다. 1974년에 창립된 <한국미술청년작가회>가 조각계에 공헌한 바는 크다. 동문모임으로는 성신여대 출신 조각가들의 그룹인 <성신조각회>(74년 창립), 동국대학 출신들의 <동악회(東岳會)>(1977년 창립), 이화여대 출신들의 <이상전(梨像展)>(1980년 창립), 서울예고 출신들의 <예림(欩林) 조각회>(78년 창립)가 결성된 바 있다.

여류조각가들을 망라한 <한국여류조각회>가 결성된 것은 1974년이며 그 이래 이 단체는 몇 차례 해외전도 가졌다. 구상계열 조각가들로 구성된 <한국조각회>가 1977년에 창립되었고 같은 해 <토형회(土形會)>(대전), <시형회(視形會)>가 창립되었다. 1978년에는 <후기(后期) 조각회>,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서 1981년에 서울미대 조소과 동문들의 모임인 <서울조각회>가 결성되고, <M·T조각회>(1982년), <젊은 조각가회>(1982년), <마루조각회>(1982년)가 각각 창립되었다. 지방의 조각단체로는 <충남조각회>(대전, 1974년 창립), <경북조각회>(대구, 1980년), <남도조각회>(광주, 1981년) 등의 창립이 있었다.

개인전 활동으로는 1970년에 강태성·조제현·안성복·이석창·정관모·1971년에 신석필·김정숙·송영수(유작전)·박종배(在美)·이승택·정관모·권진규·김만술·1972년에 전상범·엄태정· 심문섭·변유복·정관모·강태성·최기원·1973년에 최효주·이미순·정관모·최만린·1974년에 박석원·권진규(추모전)·이미순·주영도·최병상·1975년에 최종태·김종영·전뢰진·김봉구· 1976년에 오종욱·이종혁·정관모·최종태·유종민(야외전)·천명자·전준·김윤식·강대철·197 7년에 박찬갑·박기옥·김청정·장식·정관모·전상범·금누리·박석원·김대열·백철수·박충흠 ·최효주·유영교·양복인·심문섭·계낙영·김광우·최덕교·허난숙·정은기·박영희·김경승· 연제동·주영도·이정자·손경자·최태화·최종태·1978년에 김정숙·박찬갑·오형태·유영교· 박기옥·김정희·노재승·홍성문·김기호·김동호·윤석구·석종수·강태성(야외전)·심문섭· 김창희·백철수·정관모·이보림·김경옥·김찬식·최태화, 1979년에 엄태정·강태성·최만린· 윤영자·유종민·이영학·조영자·최효주·박기옥·박찬갑·박석원·강대철·주영도·강은엽· 전국광·연제동·김윤신·문신 등의 전시가 있었다.

5.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주요작가들

1980년대에 와서는 80년에 엄태정·강태성·김효숙·김종영·한창조·신석필·문혜자·전뢰진·김영원·천명자·유영교·박일순·조국정·최승훈·황태갑·최명룡·정관모·박석원·유영교· 윤자·홍성경·전준·김청정·남철·김미소·유종민·심문섭·백철수·이갑렬·김혜원·김정희, 81년에는 황순례·이갑렬·최종태·당진 김창희·정관모·문신·주영도·박종배·강태성·박윤자·오세원·심정수·정교원·황교영·강희덕·한창조·이정자·노재승·한진섭·박부찬·정은기·강관욱·박석원·변유복·김수현·김창곤·문혜자·한인성, 1982년에는 문성희·박종태·강대철·김기호·최태화·이일호·최인수·오광섭·이종애·임송자·심문섭·이상갑·김경옥·금누리·정춘자·이승택·전남길·박기옥·송기석·이영해, 1983년에는 심영철·조국정·김정재·이형우·김종호·전혁림·강희덕·김방희·강대철·강태성·박찬갑·오귀원·김미소·김정숙·문혜자·노재승·최효주·양희태·박철준·고정수·남윤·전국광·김인화·박윤자·김정희·최은주· 김찬식·김인경·유영교·이점원·김송희·이승택·문신·이영학·김창세·심미섭·고정수·이건용·이재건, 1984년에는 주예경·심부섭·연재권·백윤기·황영숙·한영진·정현도·윤석원·이일호·전뢰진·이종각·김동호·이영학·김진성·민복진·진송자·강대철·김병화·김호룡·심춘자·박부찬·이필언·이성옥·전민숙·한진섭·이정자·박충흠·김찬식·임동락·이춘만·박일순·정현도·김효숙 등이 개인전을 가졌다.

이상의 각종 발표전을 통하여 조명해 볼 수 있는 1970년대 및 1980년대 초에 등단하여 활동한 주요 작가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박영희·조성묵·김익수·박찬갑·백현옥·박기옥·이기주·오세원·최창배·김기호·고정수· 이영길·전준·김경옥·유산호·주영도·연제동·김영욱·고경숙·노재승·김정명·문예자·강관욱·김인겸·김효숙·유영교·박종선·전국광·최인수·황순례·윤경원·이상갑·최남진·김경화·양복인·최효주·강대철·김종호·김동호·양화선·김영원·윤석구·이보림·이일호·석종수· 정태수·최태화·계낙영·황태갑·최덕교·김범열·금누리·김광규·김광진·김영욱·김정희· 김철수·박병영·박일순·백철수·엄성화·이길종·이상무·이양자·이영학·전남길·정기수· 조영자·천명자·허란숙·홍순모·장식·김인화·이춘만·심부섭·이미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