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40년 오늘의 문화예술 미술·建築

이식과 분단의 건축 40년

- 과도기에서 도약기로 전환을




김정동 / 건축가·목원대 교수

한국 건축의 현주소

자율적이었든 타율적이었든 한국현대건축은 이제 40여년의 연륜을 갖게 되었다.

1945년은 정치·사회·문화의 모든 면에서 새로운 기점이 되었으며, 그때로부터 시작됐던 '건축 제1세대'의 역할도 이제는 거의 끝나가고 있다.

해방은 그들에게 '과도기적'임무를 부여했으며, 상징적 1세대로서 각 분야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해방 40년이라는 새로운 맥락으로 건축사를 분절시켜 보면 우리의 시대는 아직도 '과도건축기'의 한 연장선에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실제로 대륙세와 해양세의 건축이식현상이 도처에 범람하고 있고, 더구나 이해 강대국에 의한 남북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땅덩어리 크지 않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도는 이두가지 큰 요소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영향력은 숙명적이기까지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건축에서 대륙세와 해양세는 순서없이 들이닥쳤으며, 남과 북으로 나뉜 분단의 결과는 모든 것을 차단시켜 버렸다.

이 현실은 장차 '한국적 지역주의'를 오히려 강화시켜 주는 요체가 될 것이며, 특히 제3세계로서의 존립 의지로까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지역주의(Region alism)가 건축에 나타나는 부분은 사회적, 역사적 유산(Social and historical heritage)과 철학적 이상(philosophic ideals)등이다.

지리적, 기후적 근사성으로의 극동3국, 즉 우리나라 그리고 중국, 일본에 이 요소들이 과거에 밀접하게 나타났으며 '전통 건축'이라는 유산으로 오늘에까지 남겨져 있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국제화 혹은 태평양 시대화 되더라도 이 역사적 유산과 이상은 변화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 40년간을 개관해 본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자생을 위한 태동이 일기 시작

해방이 되자마자 자생을 위한 태동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 시도는 <조선공업기술연맹>의 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8월 17일 서울 종로 YMCA건너편에 있던 기독교서회 빌딩에서 발족한 이 연맹은 산하에 8개 부서를 두었는데 건축부가 이에 포함되어 있다.

이어 9월 1일, <조선건축기술단>이 결성되었는데 순수 건축 단체로는 첫 번째 모임으로 기록되어질 것이다. 건축을 기술로만 보는 시각을 가진 이 단체는 점진적으로 발전 <한국건축학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방 후의 시급한 주택 문제를 다루기 위해 '조선주택영단'이 일제하의 골간을 그대로 유지한 채 업무를 시작했으며 <국민주택설계도안> 공모를 하기도 했다.

이 공모에서 김희춘, 이희태 등의 건축가가 그 의욕의 단면을 보여 주었다.

≪朝鮮建築≫의 창간 <1947. 3. 20>은 이 시대의 기록을 남긴다는 의미 이상으로 값진 일이다.

현상 설계의 본격적 기원이 될 <서울만물전> 설계 공모에는 김태식, 강명구 등이 면모를 나타냈다.(1947. 10. 2)

이 시기에 건축 분야에서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정부 조직에 건축 정책 기구를 두고자 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의 실시에 의한 대화의 통로를 잇는 것과 정부 수립에 의한 자체적 진용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주택 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처였다.<조선건축기술협회>는 서울 종로 기독교 청년회 강당에서 가진 경연회에서 당시 국내 주택 문제의 긴박성에 대한 대중의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앞장서기도 했다.(1948. 7. 8)

국전에 건축부가 신설되다

생존만큼 중요한 문제가 달리 없던 이 시기는 한국 건축에 있어 치명적 손실만을 주었다. 6·25의 동족상잔, 이에 따른 파괴와 상실은 모든 것을 텅빈 無間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시대를 표현해 주는 글 3가지를 다시 추려 본다.

●…. 종로 네거리에 사람은 하나 없고 불탄 집들만 우뚝 우뚝 남았구나.

무너진 벽돌 무더기

나는 차마 못지날레….

(鷺山시선집, 1958)

이 글은 1953년 휴전 협정이 이뤄지고 서울로 환도했을 때의 폐허된 현장을 그리고 있다.

또한 어느 신문의 전재민 생활 묘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 집 없이 헤매이는 전재민들은 한강 다리밑과 막다른 골목 안에서 거적만을 의지하고 있다. 이뿐이랴, 삭풍은 나무 끝에 우는 서릿발 찬 세모를 앞둔 이들 전재민은 시골, 서울로 일터와 집을 찾아 나그네의 고달픈 그날 그날을 억지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이러한 사정을 급조로라도 대처해야만 했다.

●…. 모든 전재민 중 가옥 파상으로 겨울에 얼어죽게 될 동포들과 다같이 살아야 되겠으므로… 동사지경에 빠진 동포들을 살게 하기에는 거처할 처소가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1950. 10. 8 이승만대통령공포문).

이때 주택 사정을 일견해 보면 그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즉, 움막, 판자집, 칸막이 長屋, 흙벽돌집, 후생주택, 월동용 간이주택, 시범주택, 재건주택, 細民주택, 부흥주택, 국민주택, 희망주택… 등이 있다.

이제 희망을 갖고자 하는 싹은 움트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기 때문이다.

1954년 國展에 건축부가 신설되고 홍익대학에 건축미술과가 생겨났다. 기술일변도로 휩쓸리던 건축에 새로운 예술의 분위기가 접목되는 상징적 기대감을 준 계기가 이뤄졌다.

대한건축학회는 1955년 국전 건축부 출품작을 이례로 선정하게 되는데 그 작품은 이 시기의 한 표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구시청, 서울만물전, 남대문예배당, 국군충혼탑, 주택, 공군본부청사, 이화여자대학 강당, 이화여자중·고교 강당, 서울특별시의 사상, 우남회관 등 10점)

1957년 한국건축작가협회의 결성은 건축계에 작가의식을 불어넣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서울 종로 빌딩에서 이천승 등 회원 14명의 발기에 의해 조직된 협회는 창립 취지문에서

…현대 건축 사조가 국제적으로 일대 전환기에 처해 있는 시점에 서서 한국의 현대 건축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작품의 예술적인 향상과 작가의 권익을 옹호하고 아울러 건축 문화 발전에 기여한다….

라고 뜻을 밝히고 있다.

이 취지문에서 몇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데.

●<현대건축> 언어 사용

●국제적 시야 확대

●전환기 인식

●건축을 작품으로 보는 작가 의식

●건축을 문화의 하나로 규정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1950년대가 저무는 1959년에 시행된 '국회의사당' 설계도안 현상 모집은 건축계에 이뤄진 최초의 "미완성 축제"였다고 볼 수 있다. 17점이 응모한 이 현상에서는 김봉근과 박춘명 등 일본에서 신건축을 배운 새세대가 이 땅에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까지 일제하의 교육을 받았던 건축 제1세대들조차 이 신교육 세대의 등장을 예의주시하고만 있었다.

대학을 중심으로 건축전 활발

4·19와 5·16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는 건축과 국가 정책이 합동으로 궤도를 그리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모든 행위는 관주도에 의해 이뤄져 나갔고 민의 뿌리는 아직도 엷은 상태로였다. <마포아파트> (1961. 10. 16)는 새로운 삶의 한 방법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되어졌다.

긍정과 부정이 극심한 대립을 보이면서 '건축법', '건축사법'이 제정되어 건축의 문화, 예술적 요소까지 법의 테두리에 묶어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면허를 보호하여야 하는가"

"작가 정신을 보호해야 하는가"하는 2중적 부담은 건축사와 건축가의 양립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고야 말았다. 법은 지켜져야 할 것이고 작가는 보호되어야 하는 풀리지 않는 명제는 국민들에게 혼동만 남겨주었던 것이다.

<한국건축가 협회>가 창립 취지문에서 밝힌 "국제적 시야 확대"란 주제는 UIA(국제건축가협회)에 가입함으로 해서 실현되었다.(1963. 10. 10)

이즈음 鄭寅國은 학계를 중심으로 저술 활동, 단체 활동을 하며 활기를 불어넣었다. 또한 金重業도 작품 활동에 전념, 일반 사회에까지 건축가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각 대학(서울대, 한양대, 홍익대 등)을 중심으로 건축전이 비교적 활발했던 것도 이 시기의 한 특징이었다.

또한 신건축 세대들이 동인 모임을 만들어 제1세대에 대한 대체세력(?)으로 기반을 굳혀 나갔다. <木口會> <金友會> 등은 평론, 작품집 발간, 전시회 개최 등을 함으로써-그들 행위의 일부에 불합리한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존속 가치가 컸던 것이었다.

1966년에 '국립박물관' 현상설계 공모는 전통건축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건축계에 최초로 "논쟁의 시작"을 알려 주는 결과도 가져왔다.

전통문제는 건축사의 기록과 정리가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에, 학계 소장층을 중심으로 한국건축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민가, 민가건축에 대한 연구가 그 하나였다.

≪空間≫지의 창간(1966. 11)은 건축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했고 기록부재, 정보부재, 평론부재의 불행을 극복하며 趙英武, 元正洙, 金洹의 등장을 알렸으며 이보다 훨씬 뒤 이것은 ≪꾸밈≫ ≪建築과 環境≫등으로 이어졌다.

광화문 심장부에 세워지게 된 '정부종합청사'의 현상설계는 羅相振을 뽑아놓고도 방황, 외세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중앙청은 일본인이, 정부종합청사는 미국인이 관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대는 분명히 우리의 것으로 바뀌었는데도-.

이어 터진 <부여박물관 건축 양식에 말썽> 이란 신문기사(1967. 8. 19 동아일보)는 한·일간의 감정문제와 전통문제가 함께 섞여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960년대는 한국건축의 여명을 알리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과도건축기는 막을 내리려고 진통하고 있었다.

건축의 질에 대한 관심 높아져

새 시대의 신호는 불행히도 위험스러웠다. 서울 마포의 <와우아파트>가 붕괴되는 있을 수 없는 사실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를 더 당황하게 한 것은 와우산이 도처에 있었던 현실이었다.

'건축 양식 발전의 이원성과 주기성'이 발표되는 시기에 건축계는 다시 악성주기에 빠지는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든 것이 서울 일변도였던 이 시기에(현재도 그렇지만)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1970. 7. 7)은 어떤 기대감을 지방민에게도 주었다. 이른바 지방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선호였다. 서울건축의 지방 건축 지배 상황은 긍정적인 면에서 부정없이 받아들여졌으나, 그들의 자아의식은 더 더욱 뒤떨어져 있었다. 탈각은 더 힘든 것이었다.

1972년 댈리 스톡홀름에서는 첫 UN 인간환경회의가 열려 "Only one earth"를 세계에 타전했다.

발전이란 개념에 대항되는 언어로 뒤돌려졌던 환경보존, 오염에 대한 인식이 이땅에도 싹트기 시작하게 되었다. 불도저식 행정은 저항에 부딪혀 멈칫거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터진 대연각, 대왕코너, 서울 시민회관 등의 대형 화재사고는 고층화, 대규모화가 주는 인간재해를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975년 광복 30주년, 1976년은 개항 100주년을 각각 맞이하는 해로 "성숙된 자세"를 새로이 하자고 다짐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치의 난마현상은 계속되었고 그 분출구로 나타난 건축현상이 사치성, 소비성, 말초성, 그리고 一面性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건축계의 큰 리더 역시 나타나지 않았고 군웅할거 양상에 머물렀다. 건축의 지도자는 떠오르지도 키워주지도 못한 그런 세월이었다. 서구의 건축 영웅들만 들먹이는 것으로 자족해야 했다. 이즈음에서 해외와의 각 분야별 교류는 촉진되었고 국내 건축가의 해외연수 여행도 비교적 활발해졌다.

<건축의 質>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며 대규모 문화시설, 상업건물, 호텔류에 인테리어 디자인의 영역이 확대되어 나갔다. 1979년 한국인테리어디자이너협회(KOSID)의 발족은 건축과 인테리어의 상호 보완성을 강구하며 큰 건축과 작은 건축의 관계를 부정했다. 국제적으로 몰아쳐 온 <post모더니즘> 현상은 여과되지 못하고 패션같이 건축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상업주의적 건축은 이에 깊이 빠져 있었다.

원로 건축가들의 회갑, 고희논문집 등 출판활동 활발

이제 우리는 동시대를 함께 하며 이 현장에 남아 있다.

1980년은 <대한생명63>의 착공과 함께 시작됐다. 그동안의 고층 콤프렉스를 덮기라도 하듯 63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는 서울 여의도 한강에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건축평론가 浜口隆一이 "한국의 현대건축가들"이란 글을 일본의 ≪근대건축≫이란 잡지에 싣고 있다.(1980. 3)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우리는 일본을 탓하고 나무라기만 하는 사이, 그들은 우리를 알기 위해 먼저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건축의 많은 사람들이 渡日유학생이었건만 그렇다할 일본 기행문 하나 남기지 못한 현실은 무엇인가.

1980년 4월 18일, 몇몇 원로 건축가와 장년 건축인들이 은밀히 모여 "한국 건축계의 문제점을 의논하는 모임"을 가졌었던 것은 매우 의미가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히도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채 그만 "없었던 일"로 하고 끝나버렸다. 그러나 경인지구 17개 대학 건축과 학생들에 의한 연합건축전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만은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디자인 포장센터 12. 20∼23)

1980년대에 들어서며 원로건축가들의 회갑, 고희 논문집의 출판이 활발해졌는데 이는 후학들의 건축적 인생행로를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원로들과의 대담기사나 그들의 대학 강단에서의 종강 강연 등도 값진 기록으로 남겨졌다.

연륜을 쌓아온 대학에서는 건축전시회 외에도 작품집, 과학회지 등의 출판을 활발히 해나가 어떤 성장 가능을 암시해 주었다. 또한 <일본건축가 드로잉전> (1981. 7. 1)과 <Walter Gropius작품전> (7. 7∼13) <강석원 작품전> (7. 22∼8. 2)도 건축의 즐거움을 일반 대중에게 알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 우리는 더많은 건축 전시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해 11월에 우리는 동시에 2인의 건축가(이희태, 박학재)를 잃지 않으면 안되었다.

空間社의 ≪한국 건축가 80≫의 발행 <사진 3>은 어려운 현상에서 생존건축가를 선정한다는 불협화음을 극복한 예가 되었다. 이는 ≪신동아≫가 "건축의 11인"을 선정한지 16년만에 이뤄낸 일이라 더 의미있는 일이었다. (1965. 4)

대한 건축학회는 명동시대를 끝내기 위해 독자적으로 건축회관 건립추진 위원회를 발족(12. 22)시켰으며 대한건축사협회도 신축회관을 갖기 위해 현상설계(1983. 5)를 공모했다.

"건축사를 보존하고 재생하는 운동"이 거의 없던 이 시기에 중앙청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재사용키로 한 국무회의 의결(1983. 3. 16)이나 화신백화점의 보존운동<사진4>은 국민들 뿐 아니라 건축가 자신들에게도 새로운 현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지나온 역사의 흔적은 부끄러움이나 자랑스러움으로 어차피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겐 하나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극일, 항일로 상징되는 '독립기념관' 건립문제(1982. 8. 28 독립기념관 건립 준비위원회 발족)도 그러한 차원에서 값진 것이다.

"올림픽"이란 정치, 사회적 그리고 국민적 관심사가 건축적 관심사로 접목된 것은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건물 계획설계 현상공모(1982. 3. 23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로 부터라고 볼수 있다.

이제 1986년에는 아시아 올림픽 경기, 그리고 1988년에는 국제 올림픽 경기를 우리나라에서 갖게 된다. 국립경기장 <사진5> 선수촌, 기자촌, 올림픽공원 등의 첫 경험이 우리에게도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건축적 이벤트들은 세계건축사에 한국건축을 편입시키는 결과를 얻도록 하여야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세계건축사가 남의 나라 것만으로 이뤄진 사실을 한스러워해서는 안될 것이다.

<대한민국건축대전>은 1982년 새로이 탈바꿈되어서 나타났다.(1982. 10. 15) 그동안 국전 건축부분은 불모지의 건축계에서 신인 건축가들을 탄생시켰으며, 국민들에게 건축이 예술의 하나란 것을 인식시켜 주기도 했다. 더 큰 국전의 의의는 젊은 건축학도들에게 도전과 참여의 불꽃을 피우게 한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도심 재개발이란 구호가 나타난 것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양면성을 띠우고 있다. <을지로 2가 구역 재개발사업> (1983. 5. 28)으로부터 시작된 재개발의 깃발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 새로운 개발은 언제나 지나온 과거를 덮게 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재개발 추진세력이 부동산 가치와 용맹성에만 의식을 집중시키지 말고 역사의식과 주민참여의식을 고양하는데 그 뜻을 두어야만 할 것이다.

대중 매체인 일간신문사에서 건축에 관한 집중적인 관심을 갖게된 것은 한국일보의 "문화냐 반문화냐 한국의 건축" (1983. 5)으로 부터이며 경향신문의 "韓國의 名建物" (1984. 10)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건축이 일반대중의 깊은 관심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해주며 건축가가 사회의 영향력있는 작업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된 다는 것을 보여준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서울 목동, 신정동의 신시가지 개발문제는 사회문제화 되었고 정책과정에서 여러 고려사항을 사전에 인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예가 되었다.

정부는 서울 인구집중과 비대화를 순화시키기 위해 중부권, 대전에 대한 관심을 계속 기울이고 있다. 대전의 지역적 중요성이 서울문제 해결의 한 방법으로만 처리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여론도 나타나고 있다. 서울에 동방생명 빌딩, 국제그룹 사옥, 중앙일보 신사옥 등이 들어서며 면모를 바꾸는 것은 국외 건축가들의 한국무대진출의 한 현상이란 점에서 시비가 엇갈리고 있다. 신기술의 이전이란 측면에서는 가치가 높으나 사대주의적 사고라는 면에서는 건축주와 건축가들의 책임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도심의 녹지 문화 공간을 확대키 위한 '파고다공원 개발' '埅서울고교의 시민 휴식공간화 계획', '동숭동 대학로'의 신설 등은 값진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도심의 황폐와 오염으로부터 시민을 되살리는 하나의 방안이 될 것이기 때문에 더 확대되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한강개발 계획'도 이런 면에서 기대되며 인위적인 것을 앞세워 자연을 파괴하지 않도록 유의하여야만 할 것이다.(서울시, 한강수상이용 계획발표 1985. 3. 13) 또한 한강 위에 수없이 가로질러대는 막대기형 다리가 한강의 낭만과 아름다움을 더해주게 되길 우린 기대하게 된다.(올림픽대교 현상 1985. 3. 20)

지금 우리나라의 건축은 새로 태어나는 기점에 서 있다. 이식과 과도건축적 현상은 끝나가고 있다. 이제 한국 속에서 만의 한국 건축일 수는 없다. 이제 세계 속에서의 한국 건축이어야 할 것이다. 해방 40년의 의미도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적 지역주의 건축을 발아시켜야

한반도 전체를 통할하는 한국건축사의 영역에서 우리의 한 부분인 북한건축은 아직도 장막에 가려져 있다.

서울과 평양의 거리는 동경과 뉴욕, 그리고 파리보다도 멀다.

분단과 과도기적 건축 40년은 이제 끝내야 하고 '한국적 지역주의' 건축을 발아시켜야만 될 것이다. 새로운 상황에 맞서는 우리의 위상은 현실을 타고 넘는 것에 두어야 할 것이다. 긍정적인 또 다른 시각으로 볼 때 개항이후 한국 근·현대건축의 족적은 타력에 의한 영향권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민족적 자생력을 키우는 것만이 더 큰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근원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지금도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반이 잘린채로 40년을 기록하고 있다. 이 극복해야 될 문제를 제외하고 40년사를 기록해야 된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1985년은 새로운 건축 40년 혹은 50년을 준비하기 위한 또 다른 기점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跳躍건축기'는 다음에 올 시대의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