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 속의 태동기에서 현대 예술의 정착기까지
임응식 / 사진작가
정치적 테두리의 이데올로기 분쟁이 격심
1945년의 8·15해방은 일제에 의해 질식상태에 있던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획기적인 새 전기를 가져왔다. 따라서 사진 또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는 40년간 나름대로의 발전을 해 왔다. 그간의 흐름을 대체로 8·15해방부터 6·25한국전쟁 이전까지, 6·25부터 60년의 5·16 군사혁명까지, 60년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3단계로 구분해서 기술키로 하겠다.
해방 직후의 우리나라 사진계를 돌이켜 보면 사진창작을 한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가선용을 위한 취미도락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으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활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직후부터 경향각지에 사진단체가 생기고 회원전은 물론 공모전, 그리고 개인전이 빈번히 열리고는 있었으나 단체로서의 행동이념도 없었거니와 전국적인 사단형성이 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지도체계도 작화이념도 수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러한 틈을 타서 준동하는 좌익세력에 의해 정치, 사회적인 분파와 대립의식은 사진계 내부에까지 파급되어 창작이념을 떠난, 정치적 테두리의 이데올로기 분쟁이 격심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무렵에 서울에는<조선사진예술연구회> ('45. 9), 대구에는 <경북사진문화연맹> ('45. 10), <대구사우회> ('47. 10)가, 부산에는 <釜山光畵會> ('46. 4), <부산예술사진연구회> ('47. 5)가 창립되어 각기 나름대로의 발표활동을 하고는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친목을 목적으로 모였던 것으로 일제때부터의 타성에서 화조풍월적인 한가로운 작풍에 젖어 있었다.
이러한 때에 좌익세력의 사진단체인 <朝光구락부>가 '社會主義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서울을 위시해서 대구, 부산에까지 침투하게 되었는데 그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그들의 작품활동은 치열한 것으로, 그들 앞에서는 아무런 이론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았던 자유주의 진영의 사진계는 실로 무력 그 자체로서 수수방관 상태였다. 예를 든다면 대구의 경우 <大邱寫友會>의 몇몇 회원이 그들과 뜻을 같이 하게 되어 同會를 좌경화하려는 데까지 이르자 이를 감지한 대다수의 회원들은 견디다 못해 드디어 대거 탈퇴하여 따로이 <大邱寫硏會> ('48. 10)를 가지게까지 이르렀으며 부산의 경우도 <부산예술사진연구회>역시 몇몇 간부가 그들과 손잡고 동회를 좌경화하려고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되어 극심한 혼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48년 8월에 이르러 다행히 정부가 수립되고 이어서 <保導聯盟>이 생기게 되어 그간에 좌경했던 사진인 대다수가 이에 가입하여 신변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나 더러는 잠적해 버렸다.
해방 후 3·4년간의 혼란도 가라앉고 모든 부면에 질서가 잡혀가기 시작했을 때 사진계에서도 정상회복의 기운이 감돌게 된 것은 실로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 그간에 받았던 정신적인 고통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도 전국적인 사단형성이 시급했고, 또 뚜렷한 지도이념의 수립이 요망되어 <釜山寫硏>은 누차에 걸쳐 중앙에 있는 <大韓寫硏>에 그 뜻을 피력했으나 馬耳東風격으로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당시의 각 사진단체의 멤버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 團體組織…<조선사진예술연구회> 49년에 <대한사진예술연구회로> <大韓寫硏>고쳤다가 '57년에는 <대한사진예술가협회> <大韓寫協>로 개칭 초대회장에 박영진을 두고 이해선, 박필호, 현일영, 이태웅, 이규원, 김중회, 김순수, 김석현, 김정래, 정도선, 이성윤, 이동호, 김조현, 지부원, 임석제, 김제권, 조명원, 나세진, 오인창, 이명동, 김진수, 임인식이였고, 대구의 <경북사진문화연맹>(慶北寫聯)은 최계복을 중심으로 이윤수, 안월산, 장병진, 조상규, 홍사영이었으며, <대구사우회>는 역시 최계복 중심으로 임윤창, 이윤수, 홍사영, 김원영, 최준경, 최상화, 이창수, 김동사, 정갑용, 구왕삼, 장병진, 박삼식이었다. 부산에 있어서의 釜山光畵會는 임응식을 중심으로 김방우, 임인길, 이금철, 고종일, 송량순이었고 부산예술사진연구회(釜山寫硏)은 회장에 임응식을 두고 이금철, 고종일, 송량순, 조상범, 김방우, 조상필, 박완서, 박기동, 김오경, 이병삼, 박삼용, 박인길, 윤현성 등이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지도급 사진가의 모임인 예술사진동인회('49. 11)는 김진래, 박필호, 김광배, 현일영, 이해선, 박응식, 최계복, 박영진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밖에 현일영 중심의 서울인상사진연구회('46. 10) 인천에서는 銀影會('49. 10)가 이경성을 중심으로 최성연, 김득주, 김득수, 김철세, 임영무, 김인수, 노창래 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 公募展…대구의 '건국준비위원회' 주최로 '건국사진공모전' ('45. 11. 26∼30, 대구공회당) 이 있었는데 이의 입상자는 홍사영, 안명산, 구왕삼, 이윤수였고, 자유신문사 주최의 '해방기념전' ('46. 2)에서는 김진수, 이동호, 이명동, 홍용장, 정도선이 수상했으며,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3회에 걸쳐 있었는데 제1회('47. 10)에는 조상범, 허승균, 정도선이, 제2회('48. 10)에는 안명산, 이동모, 임윤창, 장병진, 최창희, 박을수, 제3회('49. 12)에는 정희섭, 최창희, 강윤형, 오인창이 각기 입상하였고, '부산사연' 주최 공모전 제1회 ('48. 12)에는 고종일, 박완서, 조상범이, 제2회('49. 9)에는 박기동, 조상범, 한영철, 박재련이 수상했고 서울인상사진연구회 주최의 '어린이사진공모전'('49. 5)에서는 임윤창, 고종일, 유승억, 최창희, 성두경, 최인집, 신상우, 이건중, 이동모, 조명원, 김갑수 등이 입상했다.
그리고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공모전으로서 서울사진재료상조합과 조선사진문화사 공동 주최의 '전국종합사진전' ('49. 8. 3∼9, 동화백화점)이 있었는데 이에는 <해방 후 기록>, <고적·풍속과 산업·교통>, <학원과 학생>, <포오트레이트>, <꽃과 여인>의 5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의 입상자는 최인집, 이동모, 최경덕, 허승균, 김원영, 김종탁, 정인성, 홍사영, 안명산, 이병삼, 정한섭, 한홍열, 정희섭, 조명원, 이규철, 이계형, 이건중, 김찬영이였고, 이의 심사에는 김정래, 백운선, 최희연, 유일엽, 이규원, 박필호, 이해선, 임응식, 최계복, 현일영, 이동호가 종사했다.
■ 團體展…釜山光畵會 해방1주년기념전 ('46. 8), 大邱寫友會 제1회전('47. 11), '釜山寫硏' 제1회전('47. 1), 제2회전('48. 1) 대구사연회 제1회전('48. 11), 예술사진동인회전('49. 11), 한국신문기자협회 보도사진전('49. 4),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독립기념사진전('49. 8)이 있었다.
■ 個人展…임석제('48. 8), 이효점('49. 6), 김광배('49. 7)의 셋이 있었다.
■ 出版…해방 직후부터 국제보도연맹 (대표 송정훈)에서는 월간 ≪국제보도≫를 45호까지 발간했으며, 연간으로 ≪韓國畵報≫를 10여권 출판했고, 사진전문잡지로는 ≪寫眞文化≫(주간 이동호)가 48년 7월부터 12호까지 나왔다.
■ 寫眞敎育…사진기술 양성을 위해서 한국사진학원(원장 최계복)이 '47년부터 대구에서 개원됐다.
현대적 도약을 위한 기반을 닦다
과거 40년간의 사단을 돌이켜볼 때 해방에서 '50년 초까지는 사진문화의 태동기라고 본다면 50년부터 60년에 이르는 10년간은 격동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면에 있어서 현대적 도약을 위한 기반을 닦은 때였다.
8·15해방 후 5개년이 채 못되어 6·25라는 민족 최대의 비극이 닥쳐왔다. 공산군이 서울을 함락시키고 불과 두달 남짓해서 포항, 대구, 진주를 이어 낙동강을 최종적 방어선으로 해서 그 이북은 완전히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이 빨랐기에 전세는 역전되어 한반도의 최북단까지 진격하게 되었으나 예상치 않았던 중공군의 개입으로 공산군에게 서울이 다시 점령당했으며 서로 밀고 밀리는 반복이 '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거듭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부산이 임시수도로 되고 이를 뒤따라 남하한 대다수의 피난민과 함께 사진가들도 부산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이 무렵에 국방부는 전쟁기록을 위하여 사진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때에 종군한 사진가는 현역으로 있던 임인식을 비롯하여 이명동, 이병삼, 허승균, 이동모, 홍사영, 최계복, 이건중, 임윤창, 김동식, 최원식, 황재복 등인데 이들은 중부 또는 동부전선을 거쳐 국경선에 이르기까지의 각지에서 취재활동을 했으며 임응식은 미국국무성 소속으로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에 약 1개월간 종군하여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서 '京仁戰線報道寫眞展' ('50. 10.15∼31)을 미국공보원과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가두전시를 열어 피난민에게 현지 상황에 대한 초조감을 다소나마 풀어주기도 했다.
■ 團體展 및 團體組織…사진과 회화의 합동체로서의 爀土社(부산)는 2회의 발표전을 가졌는데 그 1회전('50. 1)과 2회전('50. 5)에 출품한 작가를 보면 사진측에서 임응식, 정인성, 조상범, 박완서가 그림측에서는 김봉기, 우신출, 김원갑, 장윤성, 김남배, 전혁림, 임채원, 이준, 서성찬, 박성규, 양달석이었다. 그리고 在釜 사진가들의 배려로 피난온 사진가들과 친선을 위한 '寫眞同人展' ('51. 12. 21∼27, 釜山大都會)을 가졌는데, 출품작가는 서울의 이한종, 조명원, 광주의 이동모, 대구의 임윤창, 조상규, 삼천포의 허종배 그리고 부산의 나칠암, 박완서, 박기동, 이병삼, 이우진, 임응식, 정인성, 조상필, 한영철 등이었다.
그후 1·4후퇴로 서울의 '大韓寫硏'이 부산으로 옮겨오게 되어 '釜山寫硏'은 '大韓寫硏'과 합동전('52. 6. 5∼9, 부산 美花堂)을 갖게 되었는데 '대한사연' 측에서는 김조현, 김한용, 박영진, 신상우, 임석제, 오인창, 이최형, 지부원, 조명원, 허승균, '부산사연' 이병삼, 조상규, 정인성이 출품했다.
이때부터 한국사단 통합의 기운이 무르익게 되어 '대한사연' 측에서는 지부원, 조명원, 임석제가, '부산사연' 측에서는 임응식, 송양순, 이병삼이, 대구의 '경북사연' 측에서는 최계복이 수차 토의한 끝에 가칭 전국사진단체연합회를 조직키로 합의를 보았으며 '경북사연' 측은 한시라도 두 단체의 합의에 따르겠다는 확약을 이미 받았고, '대한사연'의 내부적 의견통일만이 남아 있었으므로 미리 창립전의 제반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중 '대한사연'의 의견통합을 얻지 못하게 되어 연합체구성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합의를 얻지 못한 이유인즉 "비록 우리가 피난 와 있다 할지라도 부산사람들의 의사에 쫓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득이 작가 개인 중심으로 조직할 것을 합의하고 전국의 기성작가 37명이 규합됨에 따라 한국사진작가협회(사협)를 조직하기에 이르렀으며 창립전을 몇일 앞둔 '50년 11월 8일에 회장에 현일영, 부회장에 임응식, 최계복, 총무에 조명원을 각각 선출했다.
창립전('50.12.12∼18, 부산국제구락부)에 출품한 작가는 서울의 '대한사연' 소속에서 임석제, 지부원, 최창희, 조명원, 허승균, 현일영, 김기순, 김한용이었고 '부산사연' 소속에서는 임응식, 이병삼, 이연광, 이희우, 김용진, 조상필, 나칠암, 박구, 박상문, 박기동, 송훈, 송미구, 정인성이었으며 대구에서 조상규, 전남에서 송진화, 이동모, 오종태, 충남에서 정희섭, 임태준, 성재경, 경남에서 허종배, 최영진, 김성균, 김종태, 권병래, 박석규, 박근식, 박을수, 박효주 등이었다. 제2회전('53.5.26∼31)에는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최초로 정인성, 임응식의 컬러사진 印畵가 참고 작품으로 출품되었다. 제3회전 ('53.11.15∼21)은 서울에 환도해서 서울미국공보원에서 열었으며, 전국의 작품수준의 평준화를 위하여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의 3대도시에 순회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후 제9회전('57.11.4∼15)때부터는 신인발굴을 위해 일반공모전을 함께 가졌는데 이의 입상자는 김중태, 이혜숙, 안종칠, 오봉서, 조정섭, 현창용이었고, 동시에 국제교류전의 하나로 미국사진협회주최 공모작품 74점도 같이 전시했다. 제10회전('58.10.27∼11.2)의 공모부 입상자는 김태한, 김대현, 김범삼, 노영실, 임범택, 이혜숙이었으며 이때부터는 각도에 지부를 두게 되어 명실공히 전국을 대표하는 단체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제11회전('59.12.2∼9)의 공모부의 입상자는 임범택, 현창용, 신석한, 이국성, 박지수, 여광석이었다. 제12회('60.11.25∼12.1)의 공모부 수상자는 김열수, 김진영, 이국성, 이상규, 이동호, 임범택이었다. 그런데 제13회전을 위하여 한참 준비가 무르익을 무렵에 청천벽력같은 일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 정부의 포고령 제5호에 의해 모든 사화단체와 함께 '사협'도 부득이 해산을 했던 것이다. '사협'의 역대회장으로는 현일영('52년 초대), 임응식(2,3,4,5,7,8,9 대), 최창희('57, 6대), 지부원('61, 10대)이었다.
■ '寫協'의 업적…창립 이후의 '사협'의 업적을 살펴보면 12회에 긍한 발표전과 공모전 이외의 당시 사회에서 "사진쟁이"라는 달갑지 않은 칭호를 면하기 위하여 문화인의 총집결체인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일원으로 '사협'을 가입시키는데 굴욕적인 반대의견도 있었으나, 몇몇 화가들의 협조 발언으로 가입하는데 성공했고, 작화이념에 있어서는 당시까지의 회화종속적인 寫風을 배제하고 적극적으로 '生活主義' 리얼리즘을 주창 실현하여 한국사진계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러일으켰으며, 한국사진가의 국제사진행사에의 적극 참여를 꾀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시초는 임응식의 <병아리>가 '52년에 있었던 제1회 '동경국제사진살롱'에 한국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당선하게 되자, 이에 용기를 얻어 불란서, 미국, 이태리, 스페인, 일본, 월남 등의 국제행사에 참여했으며 미국, 일본의 사진콘테스트에도 당선했으며, 미국의 사진연감인 ≪Photography Annual≫, 일본의 ≪세계사진연감≫, 그리고 ≪LIFE≫지에도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한편 국제적 합동전으로서는 '한국가족전'('56.12.17∼22, 임응식, A.S.Heitala 기획편성)이 있었고, '57년에는 미국국무성에 직접 교섭해서 세기적인 대사진전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을 유치하여 경복궁 미술관에서 25일간 전시하였는데 관람자 수가 30만을 넘는 미증유의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사진예술에 대한 인식이 박약했던 일반인은 물론 특히나 문화예술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한편 미술의 전부문이 국가의 비호하에 육성되고 있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빠져있는 사진부 신설을 위해 10년간이나 당국에 건의하여 드디어 '64년에 이르러 이의 실현을 보게끔 하였는데 그간에 있어서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의 대립과 알력 때문에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격으로 항상 부결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韓國美協'내에는 사진부가 있었기에 적극 이를 추진한데 반하여 그 대립관계에 있는 '大韓美協'측에서는 반대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 寫眞의 大學敎育…사진가가 일반으로부터 경시당하는 데는 그 이유가 한마디로 말해서 전문교육기관이 없었던 데에 기인했다. 때마침 부산에 피난와 있던 국립서울대학 미술학부(부장 張勃)에 사진강좌('53.3)를 두게 되어 임응식이 출강했다. 그 다음해에 서울에 환도한 이화여자대학 미술학부(부장 김인승, 강사 임응식)에서도 사진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사진전공('54.3) 과목을 두게 되었는데 사진학사는 물론 석사까지도 배출했다. 그리고 부산대학에서도 정인성이 '54년부터 사진강의를 했고, 서울신문학원(원장 곽복산)에서의 보도사진 강의를 위해서 이명동 등이 출강했다.
한국사진협회가 창립되다
1961년 12월 17일에 사단법인 한국사진협회(韓國寫協·'77년 4월부터 한국사진작가협회로 개칭)가 정부 비호하에 창립되었으며, 이사장에 정희섭, 부이사장에 김조현, 이해문을 선출했다. 그러나 이의 조직에 앞서 회원구성의 부조리함이 있어 이를 지적하고 순수사진 창작에 전념하는 사진가만의 구성을 요구하면서 종전의 한국사진작가협회(회장 지부원)에서는 몇몇 회원을 제외하고는 전원 이에 불참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불참자들의 거의는 수년간 칩거생활을 하다시피 하고 있던중 '64년에 이르러 사회단체 결사해금을 맞이하게 되어 한국창작사진협회 (創協)를 따로 조직하게 되어 위원장에 임응식, 부위원장에 이형록, 윤응력, 정인성, 조상민을 선출했다. 그 후 이 두 단체는 서로 대립적인 입장에 서게 되어 사단은 완전히 양분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두 단체는 사단적인 움직임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사단발전을 위하여 각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71년에 이르러 '한국사협'의 이사장이 김종양으로 경질되자, 사단의 분위기가 완화되는 동시에 '韓國寫協' 측에서 통합의 뜻을 '創協'측에 제안해 오게 되어 단시일내에 '한국사협'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전의 '한국사협' 주도권 문제로 일부 회원들이 분별없는 분위기로 해서 현재까지도 말없는 대결의식이 밑바닥에 깊숙히 깔려 있는 것이다.
역대 '韓國寫協'의 이사장은 정희섭 ('61∼1,2,3,4,5,6,7 대), 김종양('71, 8대), 김종헌('72, 9대), 임응식('73, 10대), 장원훈('74, 11,12대), 김광덕('77∼13,14대), 이정강('81, 15대), 이명복('84,16대)이다.
■ 國展의 寫眞部…'國展'에의 사진부 설치를 당국에 건의하기 시작한 것은 '52년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창립된 때부터의 일로서 실로 10년만인 '64년 '국전' 제13회 때부터 신설되었다. 그런데 '국전'이 신설됨으로 해서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국전'에 사진부가 추가되면 무질서했던 사단행정도 올바로 될 것은 물론, 사회적 인식과 대우도 달라지리라고 믿었던 터인데 이러한 기대는 시초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국전'의 각 부문의 예를 본다면 어느 부가 설치될 때는 사전에 그 분야의 중진과 중견작가를 구분해서 중진을 초대작가로, 중견작가를 추천작가로 추대 지정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느닷없이 엉뚱하게도 심사위원 5명중에서 3명이 중견층에서 나왔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단의 선후배 관계는 완전히 뒤집어지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선배들의 작품이 후배들에게 심사를 받아야 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또 한가지 시상제도에 있어서 사진부에는 문교부장관상을 상한선으로 정하고, 대통령, 국무총리상, 국회의장상에는 해당시키지 않는다는 굴욕적인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별대우에 항거하면서 위와 같은 부조리한 문제들의 시정을 요구하면서 이해선과 임응식은 각기 개별적인 입장에서 심사위원을 사퇴 불참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는 다행히 시상제도는 시정되었으나 초대, 추천작가 문제는 시정되지 않은 채 해를 거듭해 왔다. 그러니 자연히 원로급 작가는 물론 중견작가들의 대다수가 이의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 국전 사진부는 기성작가 부재의 순전히 신인등용문 구실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던중 '80년대에 이르러서는 '국전'에서 '민전'으로 개편되고 말았다.
■ 團體展…'한국사협'에서는 '62년부터 22회의 회원전과 10회의 공모전을 가졌으며, 대학생 사진공모전은 19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 밖의 대소 단체의 회원전은 연간 250여회가 열리고 있다.
'83년에는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이명동, 이정강, 정범태, 문선호로 구성된 위원회 주최로 '한국현대사진대표작전' ('83.5.16∼25, 국립현대미술관)이 있었는데 이에는 1945년부터 '83년까지의 국내작가 203명의 작품 305점이 전시되었다.
■ 個人展…개인전은 매년 40여회가 열리고 있다. 그중에서는 '8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연례 기획 초대전으로서 임응식을 사진작가로는 최초로 초대회고전을 서관의 8개실 전관을 사용해서 420점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이는 모두 동미술관에 연구 보존키로 되었다.
이밖에 세계적인 외국사진가의 개인전으로서 영국의 빌 브란트(Bill Brandt)전('79.10)과 미국의 안셀 애담스(Ansel Adams)전('84.5) 그리고 불란서의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전('85.4)이 있었다.
■ 중요 공모전…동아일보사(사장 김상만)에서는 '63년부터 「동아사진콘테스트」(주무 이명동)가 시작되어 15회를 개최하였고, 이것이 '79년부터는 동아미술제의 한 부문으로 되어 5회전을 거듭하였고, '한국사협'에서는 '73년부터 공모전을 시작하여 8회를 거듭하였고 '81년부터는 국전으로부터 민전으로 된 대한민국사진전을 5회 거듭했고, 한국방송공사 주최로 '83년부터 한국사진대전을 3회 개최하였다. 그리고 조선일보사(사장 방우영)에서는 '62년부터 조일광고상전(사진부)을 시작하여 22회에 이르렀으며 국제관광공사에서는 '73년부터 관광사진모집전을 13회를 거듭했다. 그리고 '83년부터 시작한 예총 인천지부 주최의 전국제물포사진대전은 현재로서는 대통령상이 시상되는 가장 권위있는 공모전이라 하겠다.
■ 한국 주최 국제사진전…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작된 것은 '63년 예총 경북지부(위원장 유치환, 주무 조상민) 주최의 '한국국제사진살롱'이었고, '66년부터는 동아일보사(사장 김상만, 주무 이명동)에서 '동아국제사진살롱'을 시작하여 22회를 거듭하고 있으며 한국일보사에서도 '한국국제사진살롱'을 '71년부터 3회 개최했고, '80년부터는 '한국사협'에서 같은 이름인 '한국국제사진살롱'을 5회 거듭했다. 그리고 동아일보사와 주한 독일문화원 공동주최로 세계적인 규모의 사진전 '세계의 여성'('75.11.6∼27,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최되었는데, 이는 세계 85개국의 236명의 작품 522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 사진의 대학교육…사진의 대학교육은 이미 '53년부터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에서 시작되고 있었으나 '60년대에 들어서는 홍익대학('61), 덕성여대('64), 서울여대('64), 건국대학('64), 숙명여대('72), 홍익공전('63) 등의 각 미술과에서도 사진강의가 시작되어 위의 8개학교를 임응식이 혼자 겸하여 출강했으며, '64년에 이르러서는 서라벌예술초급대학에 사진과(학장 임동권, 역대과장 김종양, 이재화, 박필호, 임응식)가 생겼으며 이것이 '73년에 중앙문화학원으로 인수되어 '78년까지 존속되었고, '74년부터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에 4년제의 사진학과(학장 김동리, 역대과장 임응식, 유만영, 최익찬, 한정식)가 개설되었으며 '74년부터는 신구전문대학(학장 백철 역대과장 이규호, 육명심, 한정식, 홍순태)에 2년제 사진과가, '81년부터는 서울예술전문대학 사진과(학장 유덕형, 과장 육명심)가, '83년부터는 대구의 계명실업대학에 사진과(과장 장진필)와 경북대학의 사진과(과장 강상규)가, '85년부터는 부산산업대학 사진과(과장 김태한)와 상명여대(학장 곽종원, 과장 백명진)가 생겼다.
■ 출판관계…'66년과 '70년에 조명원에 의해 ≪韓國寫眞年鑑≫이 발간되었고 '71년에는 황성옥에 의해 세 번째의 연감이 나왔으며 '75년부터는 '한국사협'에 의해서 매년 발간되고 있다. 그리고 사진전문잡지로서는 '66년 8월부터 황성옥에 의해 월간 ≪사진≫이 현재 216호까지 나왔고 역시 '66년 8월부터 조명원에 의해 ≪사진예술≫이 28호까지 발간됐으며 '69년 12월부터는 千再成에 의해 ≪카메라예술≫이 12호까지 나왔으며, '75년부터는 이달희에 의해 월간 ≪영상≫이 현재까지 117호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한국사진기자단에서는 '68년부터 매년 ≪報道寫眞年鑑≫을 발행하고 있으며, '83년에는 문선호에 의해 ≪韓國現代寫眞代表作選集·1940∼'83≫이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