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40년 오늘의 문화예술 연극·演劇

리얼리즘 연극에서부터 다양한 실험의 무대를 세우기까지




이태주 / 연극평론가·단국대 교수

서 론

광복 40년을 맞이하여 우리 연극이 걸어온 고난과 영광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의도가 된다. 40년간의 연극적 유산을 정리하는 이 작업은 우리 연극이 어디까지 왔느냐하는 문제를 고찰하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 연극의 위상을 측정하는 방법이 두가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서구연극과 한국연극의 상관관계를 따져보는 일이요, 또 하나는 연극 각 분야의 업적을 전통과 창조의 맥락에서 검토해 보는 일이다. 광복이전까지는 서구연극의 수용이 일본을 통한 간접적 수입에 의존했던 것이 60년대의 동인제 극단시기에 이르러 비로서 직접수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리얼리즘 연극, 고전극, 부조리 연극, 전위극 등이 제각기 극단 사정과 개성에 따라 산발적으로 수용되어 공연되었다. 그러나 서구연극이 이 나라에 수용된지 7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의 노력은 그들의 연극을 우리의 전통연극 속에 용해시켜 한국연극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확립하는 의식적 작업에는 늘 미진함이 있었다.

우리 문화예술의 뿌리에 서구연극의 뿌리를 접목시킨 연극전통의 재창조가 아니라 겉핥기식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서구연극의 개념과 방법을 올바르게 도입하지도 못했고, 올바른 우리 연극의 정립에도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 연극이 필요로 하는 것이 서구연극의 형식과 기술과 이념이라고 한다면, 그 형식과 기술과 이념을 잉태시킨 연극이론과 방법의 근원적 탐색이 수반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도입된 단순한 모방이었기 때문에 연극 진로의 방향이 언제나 혼선을 빚어내는 결과가 초래된 것을 우리는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서구연극의 물결이 필연적인 변화의 과정을 밟지 않고 한꺼번에 들이닥쳤기 때문에 고전극서부터 리얼리즘 연극, 부조리 연극, 그리고 전위연극과 해프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파의 서구연극이 우리 연극계에 혼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연극의 현황은 리얼리즘 연극마저도 올바르게 받아들여서 실현시키고 있지 못한 형편이었다. 오도된 리얼리즘연극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리얼리즘연극의 올바른 수입과 정리에서부터 연극을 다시 시작해야 될듯한 자책감에 늘 시달리고 있다.

서구연극과 우리연극의 상관관계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의 연극적 유산을 순수한 원형으로 보존하면서 그 원형을 모태로 하여 서구연극을 우리연극의 나무에 접목시켜 새로운 연극의 창조를 기약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전통연극-가면극, 인형극, 판소리, 창극 등이 갖고 있는 연극적 독자성과 고유성을 우리의 현대연극 속에서 어떻게 계승하여 발전시켜야 하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는 현재까지 연극이론상으로 뚜렷한 개념이 정립되지 못하고 있지만 극작가, 연출가, 연기자들에 의하여 무대위에서 꾸준한 실험이 시도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연극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하여 연극인들이 지나 온 40년간 피나는 노력을 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우수한 희곡작품의 유산은 빈약했고, 연출이론의 확립은 요원했으며 연기술의 혁신도 두드러지게 실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연극기술면에서의 낙후성마저 극복하지 못한 실정에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은 연극교육의 불충실 때문인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연극사학자 유민영교수는 오늘의 연극이 안고 있는 당면과제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 연극사의 흐름을 검토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개화이후 우리나라의 근대극 운동은 크게 두갈래로 전개되어 왔다. 즉 상업주의를 지향하는 신파극과 이에 대항하여 서구의 소극장 운동인 리얼리즘극을 계승한 전통적 신극이라 하겠다. 순수극인 정통신극은 1920년 동경유학생들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펴기 시작하여 土月會, 劇藝術硏究會, 해방 후의 劇協, 新協, 制作劇會, 實驗劇場 그리고 같은 시대의 많은 同人制劇團들로 이어지는 것이고 그들은 이땅에 진정한 민족연극을 수립하자는 목표아래 日政, 좌익과 싸워온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소극장 운동적 성격을 갖고 있는 新劇은 日政의 탄압과 순수예술이기 때문에 부딪치는 재정난으로 전용소극장 하나 못 가졌다."

이 글에서 언급된 중요한 사실은 민족극 수립이 <일정과 좌익>과의 투쟁 때문에 힘찬 발전을 도모할 수 없었다는 것과 순수연극운동이 전용소극장이 없었던 관계로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연극은 이 두가지 장벽이 크게 허물어져 비약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1974년도부터 문예진흥원이 활발한 연극지원 사업을 벌여 극단에 대한 재정적 후원을 하고 있으며, 문예회관을 비롯한 연극공연 공간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날로 높아져 관객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으며, 극단의 수도 증가되고, 공연의욕도 높아지고 있으며, 극단의 개성이 뚜렷해져서 공연의 다양화와 질적향상이 점차 이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극작가가 배출되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1950년까지 5년동안의 우리나라 연극은 좌우익의 극한적인 대립이 빚어낸 理念劇의 혼란기였다. 47년까지 전반기 2년동안은 좌익극 전성기였으며, 47년부터 50년 초까지는 우익민족계몽극이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좌우익극의 극한적인 대립의 혼란속에서 저질 新派劇과 상업적인 樂劇이 연극계를 석권하는 듯 했으나 劇協, 新靑年, 東方劇場, 藝術舞臺, 女人小劇場 등의 공연활동과 大學劇 활동에 의해 그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1950년 中央國立劇場이 유치진의 <元述郞> 공연으로 개관되었다. 新協과 劇協은 中央國立劇場의 전속단체가 되었다. <원술랑>에 이어 신협의 제2회 공연은 <雷雨> (조우 작 김광주 역 이화삼, 허석 공동연출)였다. 신협은 제3회 공연으로 <靑春의 倫理> (정비석 작·이광래 각색)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극협은 <더러운 손> (싸르뜨르 작)을 연습중이었다. 그러나 이 두 공연은 6·25동란으로 그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국립극단의 단원들은 新協의 이름으로 피난지에서 세익스피어의 <햄릿>, <오셀로>, <맥베스>, 싸르뜨르의 <더러운 손>, 조우의 <雷雨>등을 공연했다. 작가 오상원이 <녹쓴 破片>을 발표하고, 유치진은 <痛哭>과 <나도 人間이 되련다>를 무대에 올렸다.

50년대 후반과 60년대에 朝鮮日報 신춘문예 등용문을 통해 임희재(寄留地, 1955), 차범석(歸鄕, 1956), 홍윤숙(園丁, 1958), 김자림(遺産, 1961), 박현숙(땅위에 서다, 1962) 등이 극작가로 데뷔했다. 서울신문에서는 노경식(철새, 1965)이, 경향신문에서는 천승세(물고, 1964), 오혜령(聖夜, 1965) 등의 극작가들이 등단하고, 現代文學誌를 통해 김상민, 오학영이, 그리고 文學春秋誌를 통해 김의경 등이 극작가로 추천되었다. 國立劇場의 현상제도를 통해 하유상, 이용찬, 이흑열, 천승세 등의 극작가들이 배출되고, 이근삼이 독자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59년 小劇場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圓覺社가 개관되었다. 制作劇會, 圓方角, 八月劇場, 實驗劇場, 同人劇場, 횃불劇場, 新舞臺實驗劇場 등이 1957년 이후 계속 창단되어 활기찬 공연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에는 드라마센터가 개관되었다. 50년대 말과 60년대초에 걸쳐서 창작극 공연은 불붙고 있었다.

창작극 공연의 활성화

1965년을 분기점으로 演劇界는 質과 量에 있어서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우선 연극 공연 편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1965년부터 급격하게 증가된 공연편수는 69년까지 상승세를 보이는데 이 현상에서 주목할만한 일은 번역극 공연편수 보다는 창작극 공연편수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창작극 우세현상은 60년대에 이르러 劇界에 데뷔한 20여명의 젊은 극작가들의 출현과 62년에 결성된 國立劇團이 점차 창작극 공연활동을 정착시켜 나간 점, 60년에 창립된 實驗劇場을 위시하여 63년에 民衆劇場과 山河의 창단, 64년에 드라마센터극단의 창립 등 주요극단의 활동이 활발해진 점, 그리고 62년에 國立劇場이 신장개관하고 드라마센터가 신축되어 연극전용극장이 확보된 일등이 창작극 공연을 활성화시킨 원인이 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은 6·25동란 이후 최신 해외연극의 소개가 부진한데다 우리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진단의 필요성과 사회적 현실에 대한 탐구욕이 창작극 우세현상을 낳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64년 세익스피어탄생 400주년 기념공연은 연극관객의 저변확대에 어떤 계기를 주었으며, 같은 해에 시작된 東亞演劇常은 연극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해서 고무적인 일이 되기도 했다.

일반 공연단체가 창작극 우위 공연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大學劇에 있어서는 번역극의 공연편수가 창작극을 압도하고 있었다.

1961년부터 69년 사이 대학극에서 번역극이 258회 공연되고, 창작극이 110회 공연되는 통계를 보면 이 일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를 분석해 볼 때, 대학극의 관객은 대부분 학생층이기 때문에 이들의 요망을 반영하고 있는 현상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들 대학생 관객들은 연극형식면에서나 내용에 있어서 서구연극의 현대성과 예술성에 더욱더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역극에 대한 이들의 편향성은 달리 말하면 우리의 창작극이 이들의 미적감각과 지적욕구를 충족시켜 주지못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당시 우리의 창작극이 대부분 소박한 리얼리즘 연극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서구문화의 영향권내에 있었던 대학연극이 해외연극의 새로움과 그 실험의식에 열광하여 반리얼리즘연극의 어떤 가능성을 모색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60년 12월 원각사가 소실되고, 61년 11월 국립극장이 공보부에 이관되면서 시공관을 그 전용극장으로 사용하였으며, 1965년 유치진회갑기념 공연으로 그의 작품 <春香傳> (이해랑), <별> (이원경), <소> (전학주)가 공연되었으며 1966년 드라마센터에서 신춘문예 당선희곡공연에서 극작가 오재호, 고동율, 전진호, 원갑희 등이 새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60년대 演劇界는 演劇外的으로는 公演法 문제, 演劇觀客의 저변확대, 공연제작비의 영세성과 연극지원 문제, 公演場 부족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었고, 演劇內的으로는 演劇人이 지녀야 하는 演劇觀의 확립문제, 비이념적인 극단들에 의한 무성의한 공연남발에 기인한 연극예술의 획일화 경향, 오도된 리얼리즘 연극으로부터의 탈피와 극복의 문제, 역사의식과 현실의식이 결핍된 창작극 문제, 연극의 직업화와 전문화 문제, 무대기술의 빈곤, 연극교육, 그리고 評壇의 확립등 숱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60년대 말에 이르러 연극계는 이같은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해서 방황과 무기력과 침체 속에서 고뇌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연극이 TV와 영화와 스포츠 등 대중오락의 위협에서부터 그 문화적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활로가 개척되어야 했고, 약진의 轉機가 마련되어야 했다. 演劇이 多樣化되어야 한다는 자각은 演劇人들이 이 時點에서 얻은 귀중한 교훈이었다. 연극이 다양화되기 위해서는 공연형식이 새로워야 하며, 연극이 새로운 표현형식을 探究하기 위해서는 연극의 實驗精神이 高揚될 필요가 있었다. 어제의 연극이 지니고 있는 낡은 것을 거부하고 내일을 지향하는 실험의식의 소산으로서의 무대가 실현되어야 했다. 프로시니움 아치무대로부터 벗어나서 연극공간을 다양화시킴으로써 무대와 관객 사이에 있는 장벽을 깨뜨릴 필요가 있었다. 공연주체로서의 극단을 예술적 이념의 집결체로 개성화시킬 필요가 또한 있었다. 그리고 연출과 연기, 그리고 舞臺技術은 言語中心의 리얼리즘 연극으로부터 시청각적 이미지와 육체표현에 토대를 둔 非言語중심의 추상적 反리얼리즘 연극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다. 전통적인 리얼리즘 연극의 경우에 있어서도 다이알로그 중심의 천편일률적인 단조로움을 깨뜨리고 언어적 표현의 입체성과 연극성을 보다 더 심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토록 허다한 必要性만이 강조되었던 60년대 연극은 70년대의 두드러진 演劇的 變化를 성취하기 위한 모색과 시련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는 70년대에 와서 맹렬히 추구되었던 연극개혁의 의지가 실현되고 추진되는 모태가 되었다.

연극공간의 다양화

1969년부터 연극계의 타성적인 침체에 몇가지 변화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1월에 오태석 작 <女王과 奇僧>이 國立劇團에서 공연되고, 6월에 유덕형 연출작품발표회가 드라마센터에서 幕이 올랐으며, 7월에 劇團 星座(대표 권오일)가 창립되고, 小劇場 까페 떼아뜨르가 개관되었다. 12월에는 詩劇同人會가 세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다. 새롭게 일기 시작한 변화를 위한 활기는 70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더 본격화되었다.

리얼리즘 演劇이 주류를 이루었던 연극계에 反演劇, 不條理 演劇, 그리고 反史劇 등의 反리얼리즘 연극이 거론되고, 이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 공연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초 우리 연극에서 발견된 중요한 변화였다.

이오네스꼬, 베켓트, 올비, 핀터, 프릿쉬 등의 작품이 소개되고, 전통적 리얼리즘의 수법에서 벗어난 오태석, 최인훈의 작품이 공연된 것은 演劇理解의 방향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은 곧 연극이 多樣化해지는 조그마한 징조이기도 했으며, 이같은 多樣化현상을 촉진시킨 것은 演劇空間의 확대였다. 연극공간의 다양성은 劇作術, 演出 및 演技術, 그리고 舞臺美術에 충격을 주어 그 변화를 촉진하고 있었다.

1973년 9월 오태석의 작품 <胎>가 안민수 연출로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되었다. <胎> 공연은 <草憤>에서 지적된 戱曲上의 문제점이 타당성있게 해결되어 있어서 오태석 戱曲文學의 앞날을 밝게 해주고 있었다. 演出이 안민수로 바뀌었기 때문에 오태석의 작품은 또다른 舞臺의 빛과 소리를 지닐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 연극의 풍토는 언어와 문학성에 치중된 공연만이 획일화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동안의 연극풍토는 기성연극에 도전하는 실험극의 모험이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에 문제였다. 실험극의 가치는 기성연극의 질서와 가치를 어떠한 방법으로 부정하며 파괴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연극에 있어서 새로움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미학적 근거의 제시에 있는 것이다. 실험극은 따라서 기성연극의 벽을 전제로 한다. 우리 연극에 있어서 그 <벽>은 리얼리즘연극이다. 70년대 초 실험극이 태동할 수 있었던 여건 가운데 한가지는 우리 연극에 있어서도 리얼리즘 연극이 성숙되어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험과 전통의 다원적 활성화

1974년 12월 관객들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은 <審判>에 이어 1975년 9월 實驗劇場 小劇場 개관 기념공연으로 幕이 오른 <에쿠우스> (피터 쉐퍼작·김영열 연출)는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 의미, 문명비판적인 요소, 무의식적 인간행동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 생에 있어서의 파괴와 그 초월, 그리고 正常과 非正常의 劇的考察 등이 관객들의 知的이며 感性的인 욕구를 충족시켜 준 무대라 할 수 있다. 이 공연이 우리나라 신극사에서 관객동원의 기록을 깨뜨리는 우렁찬 개가를 올린 요인 가운데서 연극미학적 측면의 이유를 지적하면, 첫째 연출가의 작품해석이 정확했기 때문에 이 희곡작품의 핵심적인 부분이 무대 위에서 소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소한 극적 디테일이 충분한 무대적 표현력을 얻었으며, 둘째, 협소한 무대공간의 난관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연출가는 최소한도로 동작선을 축소하고 압축하면서 그 약점을 최대한의 밀도있는 마임동작으로 카버하였고 스피디한 장면전환이 효과적인 무대미술과 조명으로 잘 처리되었으며, 셋째, 현재와 과거의 시간적 동시성과 상황적 공존성을 표출하는 작업에 있어서 연출은 무대 외면상의 전환과 인물들의 심리적 변화를 자연스럽게 융합시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77년 상반기 공연의 특징은 번역극 공연의 증가, 리바이발 공연의 성행, 저질상업극의 팽창이었다.

상반기의 번역극 일변도 공연과는 대조적으로 하반기에는 대한민국연극제 공연 때문에 창작극 공연이 활기를 띠우고 있었다. 이와 때를 맞춰 연극저널리즘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아연극상이 부활하고 관객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연극열이 불붙기 시작했다. 프라이뷔네, 극단 76, 그리고 유진규와 김성구의 마임공연, 오태석의 <춘풍의 妻>, 김영렬, 윤호진, 채윤일 등의 활동이 뜻깊게 논의된 77년 한해였다.

78년에는 國立劇場의 活路를 위한 제언이 시도되고, 연극제 시행계획에 있어 중요한 몇가지 변화가 있었다. 오랜만에 國立劇團이 탁월한 연출 (李海浪)과 꽉 째인 연기적 앙상블을 통해 아름답고 감동적인 무대를 보여주었다. 토마스 울프작 <천사여 고향을 보라> (미술 김동진)는 국립극단 제85회 공연으로서 리얼리즘연극의 진수를 보여준 무대였다. 벤役의 이호재와 유진役의 태민영은 이공연에서 아름다운 연기의 조화를 보여주었다. 6월, 소극장이 존폐위기에 직면하자 소극장 존속을 위한 범연극인의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세종문화회관이 개관되고, 신연극 7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공연이 진행된 78년 상반기 연극계는 소극장 폐쇄를 앞둔 불안한 연극환경 때문에 눈에 뜨일만한 공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상반기(1월∼6월) 76편의 공연물 가운데서 번역극이 58편이었다. <이수일과 심순애> (가교)의 신파극이 재현되어 공연되고, <리어든孃은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實驗劇場)가 공연되었으며 국립극단은 <물보라> (오태석 작·연출) 공연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명동에 엘칸토 소극장이 개관되었고, 프라이뷔네가 <카스파> (한트케작·고금석 연출)를 공연하고, 에저또는 창단 10주년 기념공연으로 해프닝과 이벤트를 마련하고 있었다. 최인훈은 <봄이 오면 산에 들에> (1977), <둥 둥 낙랑둥> (1978)을 발표하고 있었으며, <요한을 찾습니다>, <쉬쉬쉬잇>, <누구세요>, <카덴짜>, <안개> 등의 역작을 꾸준히 발표해 온 이현화는 英姬演劇常을 수상했다. 이재현은 희곡집 <비목>을 펴냈으며, 김기주, 정진수, 김도훈, 한태숙, 문고헌, 채윤일, 이윤영, 최치림, 이창구, 김효경, 방태수 등 연출가들이 의욕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대형선전과 막대한 제작비와 엄청난 인원, 그리고 일본의 기술진을 도입해서 현대극장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차범석 각색·이진순 연출)를 공연하므로써 연극의 대중화를 실천하고 있었다. 실험극장은 <티타임의 정사> (핀터·심현우연출)를, 민중극장은 <탱고> (므로체크·유재철 연출)를, 각각 무대에 올렸다.

서울극평가그룹常은 78년 수상작으로 작품상 <물보라>, 연출상에 김정옥(무엇이 될고 하니), 정진수(카덴짜), 연기상에 장민호(물보라), 김동훈(롤라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 전무송(물보라·시즈위 벤지는 죽었다) 희곡상에 오태석(물보라), 이현화(카덴짜), 무대미술상에 김동진(천사여 고향을 보라)등에 돌아갔다. <물보라>가 작품상으로 결정된 이유는 恨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인간의 원형적인 삶을 무대위에 재현하는데 성공했으며 무속과 바닷가 어촌의 현실적 생활을 교묘히 혼합시켜 제의방식으로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생의 밑바닥에 도사린 불안한 존재의식의 심층을 서정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연출상의 김정옥은 희곡작품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결점을 집단창작 시스템으로 보완해나간 연출가로서의 공로를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객관화된 연극작업

70년대 연극을 고찰할 때 우리는 그 특징이 연극의 量的팽창과 연극의 다양화현상, 그리고 연극의 개혁의식 속에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양적 팽창에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60년대에 비하여 극장, 극단, 관객, 공연횟수 등이 현저하게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다양화현상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공연형식의 폭이 전통적인 연극에서부터 전위연극에 이르기까지 무대가 다양화해졌다는 것이며, 개혁의식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연극의식 또는 이념과 연극방법의 혁신을 끈질기게 주장한 비평의식의 형성을 들 수 있다.

70년대 초 演劇界에서 관심과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오델로> (실험극장), <꽃상여 (국립극단), 쇠뚝이 놀이>, <로미오와 줄리엣> (드라마센터), <유랑극단> (가교), <키브스의 처녀> (산하), <겨울사자들> (산울림), <버찌농장> (예술극장) 등의 공연은 점차적으로 관객층을 넓혀가는 일에 공헌하고 있었지만, 연극의 주류는 리얼리즘 연극의 완성과 극복이라는 과제를 해결하는 일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리얼리즘의 낡은 옷을 벗고 새 연극의 의상을 갈아입고자 하는 탈피의 몸부림은 오태석, 유덕형, 안민수 등이 이끄는 드라마센터 연극에서 볼수 있었다. 한편 전통극의 현대적 수용면에서는 허규와 손진책이 주축이 된 民藝劇場과 오태석의 공연활동 속에서 확인될 수 있었다. 또한 에저또, 창고극장, 그리고 76소극장, 공간사랑 무대 등의 소극장운동에서 우리는 전위연극이 출범하는 불같은 의욕을 목격할 수도 있었다. 까페 떼아뜨르 까페 파리, 실험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속에서도 우리는 전진적인 연극의 자세를 읽을 수 있었다.

영화와 텔레비젼에 식상한 관객들은 연극 속에서 경험의 새로운 뜻과 가치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연극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호흡하며, 연극 속에서 마음대로 아우성치고, 울부짖고, 호소하며, 또한 기원하는 자유에 동참하고, 싶어했다. 70년대 연극은 이같은 관객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도 하고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도 한 고뇌의 시대였다. 어째서 우리 연극은 이같은 관객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은 연극을 하는 쪽이나 연극을 보는 쪽이나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과연 우리들에게 있어서 연극은 무엇이냐 우리들 연극의 방향은 제대로 잡히고 있는가, 신극사의 전통 속에서 무엇을 계승해야 하며, 무엇을 타개해야 하며 내가 하는 연극의 일이 문화의 형성력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은 70년대 연극활동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것이지만, 70년대 연극이 이토록 이념적이며, 의식적인 예술행위에 근거를 두게 된 것은 비평의식의 소산이었다.

'무엇인가 변화가, 창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심화된 매도라도 좋고 연극에 대한 외면이 되어도 좋다. 가능하면 기성관념에 대한 파괴라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런 도전의 시도가 있으면 잠자는 연극의식이 잠을 깰 것이고, 사이비가 날개치고 다니는 암흑의 날은 그만큼 밝아질 것이다'라는 評壇의 열망은 <演劇改革의 심포지움>으로 구체화되어 70년대 연극의 의미를 파헤치게 되었다. 그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연극을 통해서 우리들의 존재와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이 촉발되고, 우리들을 휘덮고 있는 짙은 부조리의 암운이 토의되고, 갖가지 숨은 사회악과 인간악이 고발되고, 이 일을 통해 연극은 진실로 문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이 직면했던 70년대의 사회적 현실은 연극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 이상 더 절박할 수 없었고, 괴로울 수 없었다. 그 고뇌와 비극을 연극 속에서 다시 한번 직면해야 되는 까닭은 그 현실과 생활을 예술 속에서 객관화하여 냉철히 거리를 두고 보아야 하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우리는 연극의 이러한 객관화 작업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문화를 지켜나갈 수 있다. 70년대 연극이 거둔 성과는 바로 이 시기의 연극이 이같은 연극 본래의 기능에 민감한 반응을 일으켰다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60년대에 번역극 공연으로 연극지평의 확대를 도모할 수 있었던 연극계가 70년대에 들어와서 최대의 과제로 삼았던 일이 관객의 저변확대와 창작극 진흥이었는데, 이 일은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극의 질적 향상과 연극기술의 개혁면에서는 두드러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는 반성을 우리 연극계는 하지 않을 수 없다. 세련된 리얼리즘 연극의 완성과 리얼리즘 연극으로부터의 탈피, 비언어 연극에 있어서의 육체표현의 미학은 70년대에 이르러 의욕적인 실천이 있긴 했어도 그 과정과 성과는 불투명한 상태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창작극은 양적인 팽창에 비해 드라마트루기의 질적인 향상이 이룩되지 않아 여전히 극작가의 중요과제로 남게 되었다. 전통극의 현대적 수용도 이론과 실제면에서 아직도 실험적 단계를 넘어서지 않고 있었으며, 극장의 시설과 기재면에서의 낙후성도 큰 난관이 되었다. 연극의 국제교류도 시작되는 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무대기술, 연출과 연기술의 발전을 도모해야 되는 연극교육의 문제도 심각한 과제로 남게 되었으며, 현대적 극단체제의 확립과 연극전문화의 길도 요원하기만 했다. 60년대를 모태로 하여 눈부신 활동을 전개한 70년대 연극의 활기찬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은 80년대 연극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70년대 연극의 고통스런 몸부림이 있었던 것이다.

결론

1945년부터 1950년 6·25동란까지의 시대적 특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혼란기였다. 미군정에 의한 타율적 통치력과 민족단합의 실패에서 오는 정신적 혼란, 전시통제적 경제체제 속에서의 인플레이션의 경제적 혼란, 정치단체의 난립과 좌우익간의 갈등과 대립해서 비롯된 사회적 혼란, 외국문화의 영향 아래서 주체의식에 토대를 둔 가치관이 혼돈에 빠졌던 문화적 혼란-이같은 혼란은 1948년 5월 10일 한국사상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동년 7월 20일 초대 대통령을 선출함으로써 정돈에의 모색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우리 연극의 현실인식과 예술의식은 어떠했는가. <저속과 인습의 잡종극>이나 <신파조 연극 또는 예술적 가치를 도외시한 연극> 그리고 <저급한 대중에게 아부하는 조잡한 상업극>이 아니면 좌익의 이념극과 자유진영의 민족극 등이 투쟁하는 무대였기 때문에 올바른 의미에 있어서의 문제극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실이 그 당시 연극의 현실의식과 예술의식의 불확실성을 입증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의 조인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6·25동란으로 빚어진 손실은 人的資源 1백만 여의 비전투원의 死傷과 30억불 이상의 物的손실 외에도 重石佛사건, 국민방위군사건, 5·26정치파동 등의 정치사회적 비극을 낳고 말았다. 이 시기의 우리 연극의 현실인식과 예술의식은 어떠했는가. 연극은 뚜렷한 역사의식에 의한 현실에의 도전의 방편이 되기에는 아직도 미약한 것이었다. 현실의 반영도, 현실에 대한 도전도 미비한 것이었다.

1960년 3월 15일에 시행된 대통령 선거는 자유당에 의한 부정선거로서 4·19학생의거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하여 제2공화국이 탄생하였다.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으로 제3공화국이 탄생되었다. 이 시기의 우리 연극의 현실인식과 예술의식은 어떠했는가. 60년대의 다양한 연극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시기의 연극을 통해서 시대의 眞實을 증언하기 힘들다.

이토록 여러 시기에 걸친 연극은 연극이 문화의 중심에서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이 시기의 연극이 우리의 정치사회적 현실의 암흑을 직시하고 조명하는 준엄한 비평정신의 소산으로서의 연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뼈아픈 현실로부터 무관심하거나 초연해진 그런 연극이었다.

흥행 위주의 상업극은 연극의 생명을 고갈시키고 그 예술성을 파괴한다. 상업극이 한가지 연극형식으로 존립해서 우리나라 연극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일단 그것이 <웰메이드 플레이>로서 탄탄한 기초가 확립되고 리얼리즘 연극으로 세련된 후에 사회적 문제극으로 발전되어, 다시 본격적인 희극과 비극의 세계로까지 심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때 뿐이다.

연극이 개별적인 인물의 성격창조에 실패하고, 사상의 전달을 기피할 때, 또는 인간의 모럴이나 심리적 측면의 문제를 도외시할 때, 우리는 이같은 연극이 멜러드라마가 되는 것을 느끼며, 멜러드라마가 된 연극 속에서도 중요하고 절실한 인간의 문제들이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멜러드라마가 된 연극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연극이다. 그 연극은 인간과 사회와 세계의 위험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위험을 피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외면하면서 순간적인 드릴과 흥미만을 안겨주고 있다. 이같은 드릴과 흥미에는 다른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의미도 없다. 모든 예술작품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재미의 차원에서 그런 연극은 정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 예술의 생명을 유지하려면 일차원적인 오락의 한계를 넘어서 생에 대한 비평이 있어야 하고, 이 세계를 관찰하는 날카로운 눈이 있어야 하며, 위험을 피하지 않고 대결함으로써 생에 대한 태도의 변화와 이해의 증진을 도모해주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 이 일이 가능할 때, 우리는 연극을 통해서 인간적 성장을 기약할 수 있고, 연극을 통해서 사회와 정치의 개선에 이바지하는 예술적 충격과 각성을 안겨줄 수 있다.

40년 동안의 우리 연극에서 매우 착잡하게 그리고 뼈아프게 느껴지며 반성하게 되는 문제가 우리 연극의 현실인식과 예술인식은 시원스럽게 발산하지 못한 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 연극의 비평의식과 역사의식의 부족함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연극의 불성실성의 일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80년대 우리 연극의 앞날은 밝다. 80년대에 들어서서 우리 연극은 우리나라 전통극의 유산을 현대극 속에 융합시켜 우리 정신의 심층을 비춰보고 나아가 우리가 사는 시대의 의미를 캐보려는 노력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린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우리 연극의 독자성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일에 힘써 왔다. 이 시기에 우리는 해외연극의 모방에서 벗어나 민족의 삶과 얼이 담긴 민속 전통극의 형식 속에서 새로운 연극의 돌파구가 열리는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복고적인 뜻에서의 전통극이거나 사극, 혹은 신화나 설화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그 속에 오늘의 의미가 주어지는 현대성이 주장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 것이어야 한다. 극작가 오태석, 최인훈, 노경식, 윤조병, 윤대성, 이강백 등의 일련의 작품들은 전통성과 현대성, 언어중심의 리얼리즘과 시청각 중심의 육체표현의 심볼리즘을 실험적으로 융화시키는 일에 성공하고 있어서 한국적 리얼리즘 연극의 정립을 촉진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들의 극작품을 통해 우리가 사는 시대의 정보와 지식, 인간의 태도와 모럴 그리고 우리들의 현실과 이상이 전달되고 재현되고, 논의되고, 승화되는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들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유능한 연출가와 연기자의 활동을 낙관할 수 있기 때문에 80년대 우리 연극의 앞날은 더욱 더 밝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