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40년 오늘의 문화예술 무용·傳統舞踊

신한국무용을 극복하고 전통무용의 기틀을 잡기까지




정병호 / 무용평론가·중앙대 교수

서론

전통무용 40년사를 정리하여 보면 대체적으로 제1기의 무용(1945∼1953), 제2기의 무용(1954∼1969년), 제3기의 무용(1970∼1979년), 제4기의 무용(1980∼1985)으로 구분하여 전통무용의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가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제1기는 大韓民國樹立 초기와 6·25사변 때의 혼란기를 말한 것이고, 제2기는 점차 사회가 안정을 찾게 되었으므로 회복기라 할 수 있으며, 제3기는 문화정책의 영향을 받아 묻혀있던 전통예술이 발굴되고 보존전승케 되는 이른바 문화운동이 일어났으므로 이 시기는 개발기라 할 수 있다. 또한 제4기는 어느정도 전통무용계가 정리되어 나름대로 사회적 기능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 시기는 안정기라 보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러한 시기, 즉 40년사에 나타난 문화정책이나 문화운동, 그리고 공연활동과 학술강연 및 정서 등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분석하여 전통무용 40년의 발자취를 정리해볼까 한다.

제1기의 무용(1945∼1953)

1945년 8월 15일 세계 2차대전의 종식과 일제의 패망으로 국권을 회복한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은 애국가와 농악, 그리고 우리의 노래, 우리의 춤을 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사회는 해방된 감격으로 들뜨고 있었을 뿐 국가적 이념과 목표가 불투명하였으며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극도로 혼란해졌다. 따라서 제1기의 무용은 바르게 발달할 수가 없었다.

제1기인 대한민국수립 초기의 무용과 6·25사변때의 무용은 조택원과 최승희가 창조한 왜정시대의 신한국무용이 이어졌으며, 지성들도 전통적인 우리 춤은 술타령을 할 때 추어진 춤 정도로 생각하는 수가 많았으므로 전통무용은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전통무용은 활동이 저조하였으며 별다른 공식 기록이 없다. 다만 1946년부터 2년간 국악원 주최로 전국농악경연대회가 있었고, 김천흥과 한영숙씨가 국가적 행사와 국악원 행사에서 춤춘 정도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극히 한정된 활동을 주로 국악원에서 하였다 할 수 있다.

제2기의 무용(1954∼1969년)

6·25사변이 휴전되자 무용계도 점차 회복되어 갔다.

1959년과 1963년, 1969년에는 김천흥의 공연이 있었고 한영숙은 1960년과 1966년에 공연을 가졌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오히려 해외공연이 많았는데 이는 정부의 정책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로서 국악원에서는 2차에 걸쳐서 渡日公演한 것을 비롯하여 자유중국과 미국공연 등 주로 雅樂과 呈才舞를 소개하였으며 정부에서 파견한 민속예술단은 1960년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참가와 1963년에는 미국공연을 하였다. 또한 1964년에는 이른바 삼천리가무단의 미국공연, 1965년에는 아리랑가무단의 미국공연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의 춤은 주로 승무, 살풀이춤, 탈춤 등 주로 민속춤이었다.

한편 문화재관리국에서는 1964년 <종묘제례악>을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처음으로 전통무용인 <僧舞>의 기능보유자 김천흥과 봉해용, 등이 인간문화재로 선정되었고, 1967년에는 진주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는 <검무>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이윤왕을 비롯하여 최예분, 이음전, 김순녀, 성계옥등을 검무기능보유자로 선정, 인간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또한 1968년에는 충무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는 북춤인 이른바 <勝戰舞>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됨으로 기능 보유자 이정조, 이기숙, 박복률씨 등의 인간문화재가 탄생한 것이다.

이밖에 1969년에는 名舞者 한영숙씨의 <승무>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제3기의 무용(1970∼1979년)

1970년대 초기, 그러니까 1970년부터 75년까지는 주로 문화공보부에서 행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힘입어 전국 각도에 숨어있는 전통적인 민속예술이 많이 발굴 발표되었으며 국악원에서의 궁중무용 복원사업과 국악협회 무용분과의 활동이 있었으며 1976년부터 전통무용의 발굴과 공연 그리고 학문적인 차원에서 민속예술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1년에는 처용무와 학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1) 1976년도 동향

1976년 2월 전통무용연구회(정병호)가 발족되어 전국 각지에 숨어있는 춤들을 발굴 공개발표회를 자주 갖게 된다. 예로서 첫 발표는 국악협회 공동으로 마련한 경기무속무용이었다. 발표자는 김숙자였으며 종목은 터벌림춤, 올림채춤, 진쇠춤, 도살풀이춤 등이다.

한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서는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처용무> <승무> <학무>등의 전수장학생 평가발표회가 있었고, 지방에 있는 무용은 현지에서 실시되었다. <晋州劍舞>는 진주문화관에서 <勝戰舞>는 충무시 세병관에서 행하였다.

그리고 이 해에는 처음으로 국립국악원에서 전통무용의 신인무용경연대회를 제도화하였고, 문화공보부 주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는 전라남도의 민속춤 <강강술래>가 大統領賞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진주검무>가 문화공보부장관상을 받은 경사가 있었다.

(2) 1977년도의 동향

제6회 중요무형문화재 전수장학생 예능발표회가 문화재관리국 주관으로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종목은 양주별산대놀이를 비롯하여 북청사자놀음, 봉산탈춤, 강령탈춤, 그리고 송파산대놀이 등 탈춤과 승무, 학무, 처용무 등이다.

새로 발족한 전통무용연구회가 주최한 <이동안 개량춤 발표회>가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있었으며 역시 전통무용연구회 주최 <호남우도농악 발표회>가 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있었다.

이밖에 진도 현지에서의 <강강술래발표회>를 비롯하여 김덕명의 <익산 사찰 학춤발표회>가 YMCA강당에서 실시되었으며 전통무용연구회 주최 <이매방 승무발표회> 대악회 주최 중요무형문화재 (승무 처용무 학무) 무용종목 발표회 그리고 전통무용연구회 주관 임준동 <불교의식 무용공연>이 시민회관별관에서 있었다.

문화공보부 주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는 새로 <영덕탈굿>과 <익산기세배놀이>가 새로 발굴되어 주목을 끌었고 전주대사습대회에 처음으로 명무자를 육성하는 방안으로 전통무용 분야에 장원제도(상금 50만원)를 두기로 하였다. 또한 각 대학에서는 탈춤이 전수되는 등 전통무용의 전승과 공연이 왕성해진 해가 되었다. 또한 공개강좌로는 김천흥 <봉산탈춤에 대하여>, 정병호 <한국무용의 당면과제> <탈춤 춤사위의 예술성과 그 계승문제> <승무의 미학> <우리 춤을 보는 눈>이 발표되었으며 조원경 <미국에서의 한국무용> 등이 있었고 출판은 성경린 <한국의 무용> 김백봉 <봉산탈춤 무보> 장사훈 <한국전통무용연구> 김매자 <한국무용사>등이 나왔다.

(3) 1978년도 동향

이매방 세계전통예술제에 참가. 국악원 주최 전통무용발표회 등이 있었으며 전통무용연구회 주최로 남사당의 <덧뵈기춤 발표회> <진도씻김굿(지전춤) <이용배 허튼춤 발표회> 그리고 <명무전>이라는 호칭을 쓰는 명무자 발표회가 최초로 시도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명무자는 임준동(법고춤), 하보경(북춤과 개량춤), 이매방(승무), 김숙자(도살풀이춤), 이용배(허튼춤), 공옥진(입춤) 등이 출연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전통무용연구회에서는 동해안무속무용발표회를 가졌고 문화재보호협회가 주최한 인간문화재 종합예술제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한영숙의 승무와 김천흥의 처용무가 발표되었다. 또한 시립무용단(문일지)의 전통무용공연(불교의식무, 궁중무, 민속무용 등)과 공간사가 주최한 이동안(태평무) 공옥진(병신춤) 김숙자(도살풀이춤) 장월중선(무고) 이매방(승무) 등이 출연한 <전통무용의 밤>, 교사무용연구회(이종만) 주최 <전통무용발표>, 김매자의 <불교의식무용 공연>, 시립무용단이 행한 <옛춤 발표회> 그리고 공간사 주최의 전통무용의 밤에는 박병천(북춤) 정숙자(지전춤) 이매방(승무) 공옥진(병신춤) 정명숙(태평무) 등이 공연되였다.

문예진흥원에서는 각 지역의 무당춤을 비디오로 촬영 보존기록을 하였고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중요 무형문화재로 보존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해에 나온 서적으로는 성경린의 <전통무용>과 윤석운의 <한국무악고>가 있다.

그런데 1978년도 전통무용계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문화공보부가 계획한 문예진흥, 제2차 5개년 계획에 따른 전통예술의 계승을 위한 방안으로 각급 학교 교육과정의 개편 등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는 것과 정책문제 공개토론회에서 민속극장과 놀이마당이 신설되어야 한다는 것, 마을춤(마당춤) 부활추진방안의 자문회, 그리고 국립국악원이 매달 1회의 전통예술강좌를 갖게 한다는 등 전통무용의 정책수립에 커다란 의의를 갖게 한 일이 있었다.

(4) 1979년도 동향

국립국악원 주최 <궁중무용발표회>, 전통무용연구회 주최 <필봉마을 농악발표회>가 전북 임실군 강진면 현지에서 있었다.

문예진흥원은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를 창설함으로써 지속사업으로 80년대의 문을 열게 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무용계에 획기적인 계기를 준 것이지만 이로 인하여 전통적인 춤과 신한국무용, 현대한국무용, 그리고 실험적인 한국무용 등이 분화하여 공존하게 된 동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제4기의 무용(1980∼1985년)

(1) 1980년도 동향

국악원 주최 궁중무용복원 발표회, 시립무용단 주최 <한국무용제>에서 궁중무용과 민속무용 공연. 중요무형문화재 마당 종목과 무대종목의 발표 등이 있었다. 그리고 문화재관리국에서는 밀양백중 놀이를 새로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함으로 명무자인 하보경씨가 북춤기능보유자로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2) 1981년도 동향

전통무용연구회 주최 제3세계연극제에 참가한 외국인을 위한 <사랑춤> 공연, 공간사 주최의 <전통무용제>, 국립국악원에서 시도한 呈才舞의 복원 발표회, 국제민속음악학회 주최 세미나에서 문일지 <춘앵전에 대하여>, 정승희 <불교의식을 통해 본 한국무용의 미적 특징>, 김매자 <한국 무속의식 속에 나타난 한국춤의 특징>, 김정녀 <승무의 특성과 미적 가치>,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주최 세미나에서 정병호의 <한국춤의 원초적인 아름다움>등이 발표되었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발행 정병호著 ≪춤사위≫가 나왔다.

(3) 1982년도 동향

시립무용 주최 <옛춤 의상발표회> <김온경춤판> 무속예술보존회(김숙자) 주최 <무속무용 발표회> 엄옥자 <전통무용발표회>, 김명수 <전통무용발표회>, 이미녀의 <전통무용공연>, 한국무용연구회 (김매자)주최 <전통무용 학술발표회>, 중요무형문화재 마당종목과 무대종목발표회 등이 있었다.

(4) 1983년도 동향

1983년은 명무전이 많았던 해이다. 예로서 시립무용단에서 행한 <한국명무전>, 국립극장과 일간스포츠가 주최한 <한국명무전>이 4회나 열렸다. 한편으로 국악원에서는 呈才舞의 재현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었고 한국정신문화원 세미나에서는 김매자의 <궁중무용에 나타난 한국인의 미의식>, 정병호의 <민속무용에 나타난 한국인의 미의식>등이 발표되었다.

(5) 1984년도 동향

이매방 무용생활 50년 공연과 국악원에서 행한 전국국악경연대회와 정재무의 재현 그리고 중요무형문화재 마당종목과 무대종목 등의 공연이 있었다.

(6) 1985년도 동향

국립극장과 일간스포츠 주최 <명무전>이 있었고 <봉산범물이탈춤 발표회>, 국립국악원의 전통무용 공연과 이매방의 전통무용 발표회가 있었으며 열화당에서 발간한 정병호 著 <한국춤>이 나왔다.

맺음말

전통무용 50년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제1기는 광복 후부터 6·25사변까지의 기간이었으므로 이렇다 할 사조나 문화운동으로서의 활동은 없었으며, 제2기는 신무용을 하는 사람들이 전통무용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므로 전통 무용가들은 무용 연구소를 개설하여 생계가 점차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신무용가들의 활동은 한층 활발해져서 1960년 이후부터는 신무용이 절정에 이른다.

제3기인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문화정책에 힘입어 전통무용의 발굴과 개발이 현저하게 나타났으며 제4기인 1980년대부터는 이러한 전통무용이 점차 그 기능면에서 정착되기 시작하여 제대로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통무용 50년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을 보면 우선 전통무용이 오늘날 자리잡기까지는 근본적으로 문화정책에 힘입은 것이나, 실제로 발굴과 개발에 힘쓴 단체는 문화재관리국에서의 문화재 지정과 국립국악원에서의 궁중무용의 재현과 정립, 전통무용연구회에서의 다양한 민속춤의 발굴, 시립무용단의 전통무용 공연, 국립극장과 일간스포츠의 명무자 발표회,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의 비디오 촬영과 지원 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1980년대를 정립기간으로 보는 까닭은 전통무용의 사회적 기능이라 할 수 있는 향토축제로서의 동네춤이 민속의 날을 제정, 공휴일로 선포함으로써 부활할 수 있는 활력이 생겼다는 점과 전통무용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함으로 보존과 전승을 합리적으로 융합시키는 등 전통무용이 민족적 상징기능을 갖게 되는 동시에 오늘의 현대사회에 적응 발전시키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