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40년 오늘의 문화예술 무용·발레

불모의 시대를 넘어 민족발레의 시대로




임성남 / 국립발레단

혼란기

8·15해방을 맞아 그동안 모든 자유를 빼앗겼던 한국사회의 각 분야는 다시 생기를 찾게 되어 정치·경제·사회와 문화 전반에 있어서도 새로이 민족적인 창조의 기운이 팽배해졌고 무용계 특히 발레계는 그 불모지적인 상황을 벗어나려고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신무용의 거장 조택원을 중심으로 각 계보의 기성 무용가들이 집결하여 무용건설본부를 창설했고, 이 때에 발레계에 있어서도 이미 귀국하여 활동중인 진수방을 비롯해서 역시 조택원의 파트너로 활약한 바 있는 박홍선과 정지수와 조익환(서울여상 재직), 그리고 6·25때 납북 당시 한동인등이 발레계를 재건하는데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46년에는 조택원이 중심이 되어 마침내 <조선무용예술협회>가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일본에서 귀국한 함귀봉은 이론가 문철민과 더불어 YWCA(명동)에서 <조선교육무용 연구소)를 개설하였으며 주로 리드믹을 위주로 하는 독일형 노이네탄츠인 현대무용을 교수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기 함귀봉과 김모인, 박용철 그리고 해방전부터 활동하던 최승희, 장추화, 김미화 등 현대무용계열이 승세를 보였으며 발레는 미미한 존재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땅에 발레를 재건해보려는 의욕만 앞섰고 뚜렷한 지향이나 방법의 제시도 없이 그야말로 혼란기적인 양상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런대로 한동인이 김해송 등 문하생을 키우면서 발레의 무대화 작업에 힘을 기울였는데, 정지수는 이미 그 사상적 추이대로 월북하였고, 그래도 민족의식을 가진 진수방과 한동인이 버텨오고 있다가, 6·25를 당해 한동인발레단은 국립극장에서 <인어공주>를 공연하다가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한동인과 몇몇 문하생은 납북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6·25동란기인 1950년대부터 '53년까지는 발레의 불모시대를 연출했고 조광이 일본으로부터 귀국하면서 우리 발레계는 정통기교의 도입기를 맞이했다.

정통기교 도입기

조광이 일본에서 발레기교의 수업을 하고 귀국한 것이 1954년 5월로 이때부터 우리나라 발레계에는 그런대로 정통기교가 도입되기 시작했다고 볼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진수방이 상해로부터 귀국하면서 올바른 발레의 기교를 소개한 바 있고 또 한동인이 발레의 싹을 티운 것만은 사실이지만, 조광은 전후세대로서 일본으로부터 정통기교를 직도입한 신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무래도 신선한 공기를 가지고 들어온 것만은 사실이다.

조광은 그의 단단한 데뷔를 다지는 듯 1956년 9월에야 차이코프스키의 <현악을 위한 세레나데>를 가지고 시공관 무대에서 첫선을 보여 국내팬들의 박수갈채를 받고 발레관객에게 새로운 경이를 자아냈다. 더더욱 놀란 것은 임성남이 피아노 연구를 위해 도일했다가 일본 발레계의 일인자인 服部智惠子와 自成珪를 만나 정통발레를 수업하고 조광이 첫공연이 끝난 그 이듬해인 1957년에 귀국하여 그야말로 기라성같은 발레 신진으로 등장하는 황수련, 최선희, 오현주, 김자영, 송준영, 김성일 같은 무용수를 배출하면서 <백조의 호수> (5막)과 <목신의 오후>, <장미의 정>, <흑과 백>등 발레팬의 귀에 익은 고전명작들을 선보였던 것이다.

발레는 어디까지나 형식미를 위주로 하는 규격적인 육체언어의 문법을 구사하는 무대예술로, 조광의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경이로 받아들여졌다.

발레는 본래 우리나라에서 발전된 무용은 아니며, 서양민족의 여러 민속무용으로부터 승화된 형태이며, 대체로 1489년에 비롯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어떤 연회에서 요리사들이 식기를 나를때의 기하학적인 움직임으로부터 창출된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동양인의 체구와는 좀 거리가 있으며, 순전히 서양인의 체구에 걸맞게 만들어진 예술로 우리가 수용하고 재창조하기에는 약간의 미의식에 있어서 거리감이 있는게 사실이다.

1900년대에 갑자기 서구식인 문화가 도입되면서 역시 새 무용형식도 수입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무용은 인간의 신체가 그 수단이 되기 때문에 좀 늦어진 것만은 사실이고, 설혹 20년대 말기에 이른바 신무용이라고 일컬어지는 서양식 무대무용이 소개되기는 했지만 발레가 정식으로 우리나라 무대에서 공개되기는 '30년대이고 그것도 물론 서양인에 의해서였다.

그 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발레를 수업하려는 몇몇이 외국에 나가 연구를 하고 돌아왔다. 진수방, 정지수, 한동인 등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고 그들이 곧 해방후의 우리 발레계를 건설하는데 개척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국제적 기교도입기

1962년 국립극장이 개관되고(명동 소재 시공관자리) 그 다음 해 봄에 전속 국립무용단(지금의 국립무용단과 성격이 달라 한국무용과 발레를 모두 포괄하고 있었음) 공연에서 단장을 맡은 임성남이 <레·실피드>를 무대화했다.

'67년에는 동아일보에서 아세아발레제전을 개최하여 일본의 중진 발레안무가 小牧正英를 초빙<백조의 호수(차이코프스키曲)> 전막을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상연케 되었다.

이때에 임성남이 지그프리트왕자를, 그리고 小牧과 더불어 내한한 일본여성 2명이 오뎃트공주와 흑조를 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공연엔 아직도 발레가 보급되지 않았던 때이므로 전국의 발레무용수가 총동원되었으며 각 대학의 무용과에서 수련하고 있던 학생들도 많이 출연하였다. 더욱이 이화여대의 졸업생과 재학생이 중심이었던 것이다.

연출·안무에 小牧正英, 총기획 김경옥, 미술 하종하 등으로 연일 대성황이었으며 그 예술적 평가도 대단했다.

이 공연의 결과로 임성남은 보너스를 받아 일년간 세계일주 발레수업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진수방이 상해에서 외국여성에게 발레수업을 하고 돌아온 것 외에는 주로 일본에서 수입한 발레가 이제는 세계 여러나라로부터 직수입할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정지수, 한동인은 물론이지만, 해방후에는 조광, 임성남이 역시 일본에서 발레 기교를 도입했는데, 임성남이 미국 등지로 발레수업을 떠남으로써 이번에는 발레의 본고장에서 발레를 연구·연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이때에는 벌써 서울예고를 비롯해서 대학에 무용전공학과가 생겼던 것이다.

여기서 약간 빗나간 얘기가 될른지 모르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는 고등교육기관에 무용과가 생겨 무용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많이 생겼다.

서라벌예대를 시초로 이화여대·세종대학·경희대학·한양대학·중앙대학 그리고 지방에 부산의 몇개 대학, 광주의 조선대학, 청주의 청주사대, 청주대학, 이리의 원광대학, 공주의 공주사대와 서울에서도 서울예전대·숙명여대 등 수많은 대학에 무용과가 생겨 무용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많이 태어났다.

다만 대다수 무용과가 예술대학이나 문과대학에 속해 있지 않고 체육대학 소속이어서 무용과를 졸업해도 무용교사가 아니라 체육교사로 근무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문교부나 해당 공무원들의 무식의 소치로 돌릴 수만은 없는 근본적인 교육제도의 잘못으로 볼 수밖에 없다.

대학의 무용과는 으례히 한국무용전공과 서양무용전공으로 나뉘고, 서양무용전공에 현대무용과 발레로 나뉜다. 그러니까 발레는 전 무용과생의 4분의 1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체구상의 조건으로 한국학생이 발레를 전공한다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다.

국립발레단의 입단 오디숀의 경우 그 많은 무용과 졸업생 중 적재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 그 한 證左이다.

그러면서 이미 1966년에 임성남의 문하인 김범자와 김혜식이 외국의 발레단에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국립발레단에서는 일본인 有馬五郞와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국제적인 안무가 백성규(일본명 島田廣) 이어서 역시 일본인 石田種生등을 초빙하여 안무를 담당케 하였고, 오스트리아의 안무가 마르티니를 초빙하여 국립발레단원들을 훈련시켰고, 또 안무를 맡겨 새로운 테크닉을 도입하였다.

그러는 동안 외국의 발레단들이 내한하여 본바닥의 본격적인 발레의 맛을 보였는데 그 중에서도 마고트·폰테인의 영국 로얄발레와 누리에프의 비엔나발레단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물론 파리예술발레단 등 수많은 외국발레단도 우리 관객에게 발레의 진수를 보여 주었으며 국내의 발레무용수들이 그들의 기교를 섭취하는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한편 국내에서는 주로 이화여대의 홍정희와 세종대의 김정욱이, 그리고 중앙대의 서정자(동아무용콩쿨의 입상자로 1년동안 小牧발레단에서 연수했음) 등 한국발레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 치더라도 역시 우리나라 발레를 도약시킨 것은 1977년도 국립발레단이 상연한 임성남 안무의 차이코프스키곡 <백조의 호수> 전막으로, 이때 국립극장 전속단체중에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것으로 집계되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켜 우리나라에서 발레가 정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백조의 호수>는 세계의 유명발레단의 고정레퍼토리로 매년 상연하는 고전발레 4대명작 중의 하나로 중세의 로만스를 줄거리로 하는 아름답고 그곡 또한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는 걸작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도 한동인을 비롯하여 이인범등, 또한 임성남도 그 백미편이라고 할 수 있는 제2막을 가끔 상연한 바 있으나 '77년도의 <백조의 호수> 전막은 60년대에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아세아발레제전 이후, 그리고 순전히 우리나라 무용가에 의해 안무·연출된 최초의 대작이었던 것이다.

서양무용인 발레를 우리 땅에 정착시키는데 어느 정도 전망이 보여서인지 또는 역시 국적있는 예술로서의 무용을 창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국립발레단에서는 1964년도에 이근현 작 <許道令>을 임성남은 안무하려고 덤벼들었다.

허도령은 하회가면극의 창시에 얽힌 전설로 경북 안동의 하회지방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애절한 사랑을 주제로 한 비극이다.

국립발레단의 이러한 시도, 곧 민족창작 발레의 창조작업은 무척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이것은 서양과 동양의 조화를 기도하는 것으로 그 가운데서 제3의 한국적인 무용을 창출하려는 노력의 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무릇 무용은 예술이며, 예술은 개성의 소산일진대 모든 발레무용수들의 각자 나름대로의 성격과 미의식을 통해 작품 또는 연기가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외래기교의 도입에는 세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는 기동적인 것으로, 우리 무용수가 유럽이나 미국이나 또는 일본으로 진출하여 직접 그곳에서 새로운 기교나 안무기법을 습득하고 돌아와서 한국발레계에 플러스시키는 길과, 그 반대로 한국에 찾아온 외국의 발레단의 한국공연에서 눈으로 익히거나, 또 그들이 시행한 워크숍에서 터득하는 길, 세 번째는 외국의 교사나 안무가에 의해 국내에서 훈련과 지도를 받는 경우라고 할 것이다.

그 방법이야 어떻든 능동적이건 수동적이건 또는 절충식이건간에 우물안에 개구리격이었던 발레무용수가 세계적인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테크닉과 안무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는 것은 국제성에로의 전진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1970년대에 활동한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서구식 발레를 정착시키는데 일조가 되었던 선진·중견 발레 무용인에는 이화여대의 홍정희교수와 세종대학의 김정욱교수, 그리고 국립발레단의 김성일, 김학자, 김운철 등이 있었으며 그들의 활동을 도운 문예진흥원의 창작지원과 대한민국무용제의 개최도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1975년도 진흥원의 창작지원금을 받아 김학자, 김성일이 <발라드>등의 안무를 했고 이운철은 현대발레를 공연했으며, 김명순, 김학자, 김천희 등은 해외연수를 다녀왔다.

1976년 이후 수년간격으로 있었던 일본인 안무가 有馬五郞에 의한 <호도까기 인형>, 다음 백성규의 <코펠리아>, 오스트리아의 마르티니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어 역시 일본인인 石井牧生의 <신데렐라>와 로이·토바야스가 안무한 <어린이의 유희>등 외국인 안무가들의 안무와 훈련을 통해 특히 우리 국립발레단원들은 새로운 기교와 작풍을 익히고 맛보았다고 할 것인데, 이런 기회가 거듭될수록 우리의 발레계는 풍요를 더해갈 것만은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경우도 국가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경우이고, 다만 요즘에는 민간적인 차원에서도 외국안무가의 초빙이 하나 둘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 대단히 고무적인데, 음악계처럼 초빙지휘자 같은 초빙안무자가 속히 실현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민족발레 확립기

1970년대로부터 시작되어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발레계는 그야말로 국적있는 예술로 정착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최초의 시도인 <허도령> 공연을 비롯해서 그 뒤를 이은 <지귀의 꿈> (1972년 국립발레단 공연)에 이어 강석희曲인 <禮佛>과 <死神의 고백> <배비장>등이 상연되어 민족발레의 확립에 대단히 고무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다만 지난해 (1984년) 4월에 있었던 박만규 극본의 <처용>에 대해서 평론가 김경옥은 두번에 걸쳐 이 작품의 해석에 대하여 논란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정신사에 비쳐진 처용과 박만규작에서의 처용이 상반된다는 견해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마치 이 근래의 <부채춤>이라는 군무가 꽃을 만든다거나 파도를 치게 한다거나 하여 비예술적인 리뷰식으로 꾸몄으면서 마치 우리의 전통처럼 선전되는 논리와 다름없다면서, 만일 민족발레의 창작에 있어서도 그런 식의 오류가 저질러지면 지향에 있어서 하나의 범죄라고 경고하고 있다.

안무가 및 대본작가 등이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발레화할 때 우리의 고유함을 하나도 다치지 않으면서 재창조함에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는 민족발레 창조는 그런대로 한국적인 정서에 입각해서 한국적인 형식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던 만큼 무대위에 올려진 것에 대한 평가는 평론가들의 소관사항일 것이며, 다만 끊임없는 인접예술(국악 등)과의 공동연구 등이 무용가의 소신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역시 지난해에 내한공연을 가진 영국 로열발레단의 <로미오와 쥴리엣>과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우리 발레계에 도움을 주었고 또한 대한민국무용제에 출연하는 <발레 블랑>의 김화례, 서정희, 김명희, 문애경, 정도영 등과 조승미 발레는 홍정희교수와 김정욱교수의 춤과 더불어 우리나라 발레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며 민족발레 확립에 큰 보탬이 되리라 생각된다.

지난 해 11월달에 있었던 한국발레협회의 <한줄기 사랑의 빛>, <로카타>, <인어의 나래>, <성마태의 수난>과 엄영자의 여러 발레작품은 그런 민족발레로의 직접적인 접근작업은 아니었으나 크게 보아 한국발레에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저변확대작업

1970년 말경부터 국립발레단은 발레인구의 지방 확산과 발레의 저변확대를 위해서 지방순연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마산같은 도시에서의 호응도는 서울 못지않게 대단했다.

다만 본격적인 극장이 없는 형편이라 강당같은데서의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호응은 극장공연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것이 단장이면서 인솔자였던 본인의 증언이다.

<백조의 호수> (전막), <호도까기인형> (전막), <지젤> (전막), <공기의 정> (전막), <콧페리아> (전막)등이고 창작발레로는 <지귀의 꿈>, <처용>, <배비장>등을 가지고 지방에 갔는바 역시 서울의 관객을 능가하는 환영이었으니 이런 것으로 보아도 발레의 지방확산과 도시와 지방의 문화평준화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것이다.

<지젤>을 전막공연한 것도 기록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특기해야 할 것은 한국발레협회가 1980년 6월에 창립되었으며 회장에 임성남, 부회장에 김정욱, 홍정희가 선출되었고, 매년 강습회를 가지는 한편, 합동공연과 해외연수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한국발레계를 위해 큰 보탬이 되는 일이었다.

끝으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발레학교의 창립문제이다.

외국의 경우 5, 6세부터 발레의 훈련을 받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중고등학교에서 겨우 시작하는데, 그것은 이미 10여세의 나이에 도달했기 때문에 골격이 굳어져 퍽 난이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발레교육을 위해 양성기관을 가져야만 발레교육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제도가 될 것이다. 이것은 임성남 등 모든 발레무용가가 누누히 주장하고 있으나 아직도 아무런 시책이나 연구가 없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덧붙혀 附記해 둘 것은 국공립발레단의 관계자들의 생계문제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무용수들이 생활에 불안을 느끼면 제대로 작품연습을 할 수 없으니 이것도 정부에서는 고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