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40년 오늘의 문화예술 전통·民俗劇

새로운 청년문화로 저변을 확대한 민속극




서연호 / 민속학자·고려대 교수

민간 전승 연극의 통칭이 민속극이다

민간 전승의 연극을 통칭 민속극이라 한다.

한국의 민속극에 관한 체계적인 분류나 총체적인 연구는 그간 간헐적으로 몇몇 학자들에 의해 진척되어 왔으나 아직 만족할 만한 성과에 이르렀다고 하기 어렵다. 성과가 미진한 데에는 일차적으로 학자들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겠으나 보다 간과할 수 없는 요인으로는 객관적인 여건의 불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민속극에 관한 고문헌 자료의 빈곤이다. 과거의 각 시대에 민속극이 과연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다음으로는 현지조사 자료의 부족을 들 수 있다. 1920년대 말기부터 시작된 현지조사는 그나마도 단 몇 사람의 기록을 제외하고는 엉성하여 찾아보기 어렵다. 셋째로는 실제 현지를 찾아가도 체계적이고도 신빙할 만한 증언을 청취·수집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미 민속조사의 적당한 시기를 상실해 버린 지역이 허다하다. 넷째로 최근에서야 일반에게 알려져 그 옛모습의 대강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새 자료들은 비록 편린이나마 지금까지 연구의 결과를 때로는 위태롭게 하므로 연구의 진행을 늦추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 끝으로 민족 분단과 주변정세의 원인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이러한 사정은 풍부한 자료의 밑받침과 정밀한 현지조사를 거쳐서 성취되어야 할 민속극 연구의 총체화를 가로막고 있어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되고 있다.

이 소고에서는 이상과 같은 불리한 여건을 감안하면서 최근까지 존속되고 있는 민속극의 전승과정을 간략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민속극의 분류는 公演者를 중심으로, 公演場所를 중심으로, 公演道具를 중심으로, 公演方式을 중심으로 각각 세분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지금까지 사용해 온 고유한 명칭을 그대로 활용하기로 하고, 또한 쟝르 규정상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고 기술상 고증이 어려운 것은 일단 언급을 보류해 두기로 하겠다.

민속극의 전승과정은 여러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연희자를 중심으로 예능의 계승과정을 살필 수 있고, 연희 내용의 변모과정을 볼 수도 있고, 또한 그 수용층인 민중들의 호응도를 기준으로 논의할 수 있다. 민속극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창작물의 경우도 고찰될 수 있다. 여기서는 현재의 상태를 기준으로 하여 1945년 광복 이후의 전승과정을 몇가지 측면에서 간결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민속극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기 시작

1876년 개항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열강의 각축, 통감부시대, 일제 36년, 광복 이후 이데올로기 대립과 분단, 6·25동란, 어지러웠던 헌정사 등 19세기 후반 이후 오늘에 이르는 민족적 수난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그간 우리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체험은 남달리 특이하고 고통에 찼던 것이며, 또한 그런 만큼 소망적인 삶에 대한 의식도 날로 점증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민중문화의 하나인 민속극의 전승도 이러한 역사적인 갈등과 삶의 의미에서 이해되고 파악될 수 있다.

대체로 18세기 중반 이후에 정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민속극은 당대의 사회상황과 민중들의 의식을 일정하게 반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예능으로서의 표현력과 공연방식을 가다듬으면서 발전·확대되어 오다가 20세기 초엽에 식민지시대를 맞이하면서 차차 그 생명력이 위축당하게 되었다. 일제는 그들의 문화를 한반도에 이식시키려는 의도적인 정책 아래 한민족의 문화를 억압·해체·파괴시켰는데, 그중 민속극은 집단성이 강한 것이었던 만큼 항시 주목과 감시, 금지의 대상이었다.

1920년대 말기 다른 분야에 대한 민속조사 보다는 늦게 민속극에 관한 현지 조사와 연희내용의 채록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그러한 일은 민속극을 연극학적으로 연구해 보려는 의도와는 달리, 파괴·소멸되어 가는 민족문화에 대한 애착과 외세 지배 아래에서나마 전통문화를 보존·수호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애국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일제의 당국자들 역시 식민지통치를 위한 기초자료의 획득을 위해 관권을 이용한 민속조사를 꾸준히 진행하였다. 당시 지식인들 중에는 그러한 통치자료를 위한 관학의 입장에 서서 그들에게 봉사한 순응주의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어쨌든 그때까지만 해도 일부 지방에 묻혀 있었던 민속극의 모습이 이러한 민속조사를 통해서 일에 관한 현지조사는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그리고 전문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몇몇 이름난 종목에 국한하여 그 대강의 전승과정이 소개되는 정도에 머물고 말았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당시의 조사성과가 어떠하건 그것이 그나마도 우리에게는 최초로 민속극의 전승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자료라는 점에 이의가 없다. 엉성하게나마 우리가 그러한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193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전국의 각 지방에는 민속극이 다수 전승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던 것이 30년대 후반기에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최악의 어려운 사태를 당하게 되자 민속극의 공연은 완전히 불가능해졌고, 그 예능의 소유자들도 하나 둘 사라져 갔다.

광복 이후의 사정은 어떠한가. 좌우익의 날카로운 대립과 남북으로의 분단, 그리고 뒤이은 전쟁과 그 후유증으로 인하여 민속극은 오랜 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1950년대 후반기부터 현지에서의 공연이 재개되었다. 고향을 상실한 월남민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소수의 동향인들끼리 공연준비를 진행하였다. 살아남은 연희자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기억을 더듬어 탈과 의상이 새로 만들어졌으며, 옛놀이판을 정돈하거나 새로운 놀이판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마을과 인근 주민들은 전후의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물질적인 도움과 마음으로부터의 호응을 보냄으로써, 탈판에서는 새로운 선명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한편 학계에서도 민속극에 관한 새로운 관심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미 선학들이 조사해 놓은 지역에 대한 재조사가 진행되면서 다른 일면에서는 미조사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도 병행되었다.

사회의 일각에서도 뒤늦게나마 전통문화를 보전 계승하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 운동은 민속극의 재건과 더불어 서서히 확대되어 갔다. 1960년대에 와서는 이러한 운동이 하나의 작은 성과를 맺어, 민속극을 포함한 다른 전통문화를 적극 보호·육성하자는 취지에서 무형문화재의 지정이 시작되었고, 연희자들에 대한 제도적인 생계보조도 이루어졌다.

光復 이후 민속극의 전승과정을 역사적인 측면에서 정리해 본다면 再定立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오랜 동안의 침체로 인하여 그동안 다양하게 다층적으로 변해버린 현대인들의 삶의 양상, 삶의 의식과 민속극의 내용은 상당한 괴리감을 느끼게 하고 있음이 사실이나, 그 내부에 스며있는 민중의식의 저력은 오늘에도 여전히 폭넓은 공감력을 획득하고 있음이 또한 현실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잠재력으로 인하여 민속극은 오늘의 민중연극으로서 뜻있는 위치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전수와 원형 보존에 최선을 다해야

민속극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1964년 12월 양주별산대놀이, 꼭두각시놀음, 통영오광대놀이, 고성오광대놀이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강릉관노가면극(1967. 1. 지정), 북청사자놀음(1967. 3), 봉산탈춤(1967. 6), 동래야유(1967. 12), 강령탈춤(1970. 7), 수영야유(1971. 2), 송파산대놀이(1973. 11), 은율탈춤(1978. 2), 하회별신굿놀이(1980. 11), 가산오광대(1980. 11), 발탈(1983. 6) 등이 지정되었다. 연희의 전승과는 별도로 하회탈 및 병산탈은 국보(121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지정된 이외에도 적지 않은 수의 무당굿놀이, 배뱅이굿, 장대장네굿, 병신난봉가놀이(황해도), 병신굿(밀양), 다시래기, 심청가(공옥진), 남사당덧뵈기 등은 민속극으로서 주목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민속극의 전승은 우선 그 연희의 계승자인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광복 이후의 계승자는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에 생존하여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된다. 보유자로 지정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개인의 기능별로 보자면 서로 차이도 심하고 계통적으로 애매한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여기서 개인의 기능을 일일이 문제삼을 수 없다. 넓게 보아 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오늘의 우리에게 민속극의 계승을 그런대로 가능하게 해 준 공로를 일단 인정해야 할 것이다. 보유자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된 사람도 있고 또 기능을 전수받아 새로이 보유자가 된 사람들도 있다. 보유자들 밑에는 이수자, 장학생들도 있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지만, 앞으로도 민속극의 전수는 역시 전문적인 연희자에 의존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후계자들을 키우고 아끼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다. 폭넓은 사회적·제도적 지원을 바탕으로 그 방면을 배우고자 뜻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자유롭고도 효율적인 전수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문제를 삼을 수 있는 것이 연희의 내용, 즉 민속극의 원형 보전에 관한 일이다. 집단성이 강한 민속극은 그때그때 관중들의 참여도와 연희자들의 의지에 따라 가변적인 요소를 갖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원형과 가변성은 언제나 상대적인 관계를 갖고 발전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연극이든 그 연극이 하나의 예술적인 구조를 독립적으로 생명력 있게 이어가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최소한의 정신과 본질마저 잃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러한 정신과 본질을 잠정적으로 원형이라 부를 수 있다.

현존하는 민속극에서 이상과 같은 원형 보전, 전수의 문제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고 또한 까다로운 일이기도 하다. 필자가 관찰한 바로는 현존하는 민속극의 원형 상태가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상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앞서 지적한 대로 역사적인 원인과 객관적 여건 탓도 물론 있겠지마는, 보다 주목되는 것은 기능보유자들의 자세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닐까 한다.

민속극들이 각기 개별적으로 지니고 있는 원형에 대한 이해나 탐구가 없이, 가령 그 속에 있는 춤이나 재담이나 노래나 공연방식이나 가면 등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애초부터 올바른 접근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기능보유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민속극이 내포하고 있는 연극 정신이나 그러한 정신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의 행위(방법)에 대한 원리의 탐색을 포기한 상태에서,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몸짓을 모방·습득시키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박제화된 교육의 결과가 민속극의 장래를 어떻게 만들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항시 완전한 원형의 보전은 어렵다 할지라도, 현실적인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아쉽게 느껴진다.

세번째로 놀이마다의 보전과 확장이 논의될 수 있다. 민속극을 찾아 지방을 순회하다 보면 곳곳에서 옛 놀이마당의 자취를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은 아직 황폐한 채 묻혀 있거나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다른 시설물이 들어 선 곳도 있다. 마을인구의 증가, 산업구조의 개편, 적지 않은 유지비 등의 이유로 옛 놀이마당의 보전은 실제 어려운 형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속극의 보전은 그 놀이마당의 보전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적인 방안이다. 그리하여 지방별로 공연 때가 되면 그 장소에서 어김없이 공연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방적인 특유의 환경과 마을 분위기 속에서 개성미있는 연극문화가 생명을 이어갈 때 의미를 갖는 것이지, 그런 개성이나 지방색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일부 타의에 의한 공간만의 확장은 민중들의 기반을 잃게 하는 요인이 된다. 지금은 민속극의 놀이마당을 마을 주민들의 참여에 의해 새롭게 보전하고 확장하려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되는 시기다.

민속극의 온당한 해석과 계승으로 새로운 창조를

민속극이 문화재로 지정을 받고 국민들이 어렵게 내는 세금에 의해서 지원금도 받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일이다. 한때는 상민들의 부도덕한 놀이로 천시되거나 일제에 의해서는 불건전, 불순한 집단행위로 억압의 대상이 되었던 민속극이 최근에는 일약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의 꽃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니 그 사회적인 지위의 격상은 실로 놀라운 변화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민속극이 이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된 데에는 관계자들의 고난에 찬 노력이 밑바탕이 되어 준 것은 자명하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그 성과가 전적으로 몇몇 사람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자부하거나, 이제는 사회적인 명성을 얻었으니 되는대로 놀아도 되고 가능한 수입이나 올려 보자는 식의 만용은 절대 금물이다.

민속극이 이처럼 높은 사회적인 인식을 얻은 데에는 1970년대의 사회상황과 젊은 관중들의 폭넓은 참여를 결코 망각할 수 없다. 특히 대학생들의 헌신적인 참여와 확대운동은 민속극의 새로운 정립에 커다란 활력이 되었다. 일부의 연희자들이 자신들의 기능을 내세워 정부나 사회단체의 보조를 받기에 급급하거나 때로 왜곡된 극장공연을 통한 단체유지비의 마련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젊은이들은 정작 민속극의 정신과 전통성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기능을 몸소 익혀, 새로운 청년문화로서 민속극을 문화의 저변에 확대시켜 놓았던 셈이다.

젊은이들의 공연활동이 대폭 확대되어 나가자 한때 민속극이 귀중한 문화유산임을 강조했던 어른들은 지난날 자신들의 주장을 은폐시키고,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나설 정도였다. 그리하여 당시 대학에서 兩班科場 하나를 공연하는데 그 얼마나 주변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는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민속극의 저변확대와 병행에서 1970년대 말기부터는 마당극운동이 일어났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마당극운동은 앞으로 어떻게 성격이 변모할지 쉽사리 예측할 수 없으나 적어도 지금까지의 현상을 보면 분명 민속극 정신의 연장선상에서 논의될 수 있다. 즉 놀이마당이 갖는 현장성, 현실적인 상황, 자유로운 신명, 그리고 집단적인 참여성을 최대로 살리는 연극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 마당극의 이념인데, 이러한 연극이야말로 민속극의 온당한 계승과 새로운 해석으로부터 그 창조의 길이 열리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민속극이 이처럼 새로운 현대극운동의 기반이 되어 준 것은 또한 주목해야 할 일이다.

오늘날 민속극은 현대극과 병존하면서 그 나름의 전승은 물론, 현대극의 창작에 새로운 영양과 방법을 공급해 주고 있다. 민속극을 진정한 의미의 민중연극으로 계승시키고, 살아있는 연극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 모두가 기울여온 노력보다 더욱 치열한, 더욱 대동적인 참여적 싸움과 노력이 요청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