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영화로부터 시작된 한국영화의 성장과 변모
김종원 / 영화평론가
시련 속에 성장한 한국영화 40년
한국영화에 있어서 해방 40년이 갖는 특별한 의미는 없다. 있다면 계기가 있을 뿐이다.
86년 아시안 게임과 88서울 올림픽을 치루는 나라로서 광복 반세기를 눈앞에 두고 문화예술계는 과연 어느 수준에 올라 있으며 그 문제점은 무엇인가 지난 자취를 돌아보고 오늘의 좌표를 세워보는 것도 나름대로 뜻이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중간 점검은 省察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할 때가 있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의 열기 속에서 탄생 (義理的 仇鬪)한 한국영화는 4년 뒤 본격적인 극영화(월하의 맹서: 윤백남 감독)시대의 개막과 함께 이른바 내선일체의 강요로 사실상 창조행위를 박탈당한 채 ≪병정들≫ <망루의 결사대>와 같은 일제의 어용영화들이 만들어지는 가운데 조국 광복의 감격을 맞는다.
8·15해방은 일제에 빼앗긴 우리 민족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극적인 회생을 가져왔다.
이렇게 새로 출발한 한국영화는 40년 동안 시련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성장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를 시대적으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이 여섯 갈래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항일영화시대, 곧 광복기의 열림이다. 둘째는 분단의 비극과 전쟁의 수난을 수용한 이른바 반공영화의 부상이며, 셋째는 ≪춘향전≫≪자유부인≫으로 특징되는 50년대, 중반 중흥의 가능성을 보인 제작의 활기와 질적 향상, 넷째는 신상옥, 유현목, 김수용 감독이 주도한 문예영화의 붐과 ≪청춘교실≫≪남자 조정법≫ 따위의 倭色 청춘물 및 표절의 성행 다섯째는 저질 亞流 속에 다양한 오락성을 모색한 70년대의 경향이며, 여섯째는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맹목적인 벗기기 경쟁과 ≪꼬방동네 사람들≫≪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등 현실의 심층에 접근하려는 80년대 초의 흐름이 그것이다.
주류이룬 항일영화 그 카타르시스 - 光復期
일본의 패망으로 독립된 한국영화는 오랫동안 자유의 암흑 속에 눌려 살아 온 국민들에게 속박받는 울분을 터뜨리는 욕구 해소의 무대로서 제공된다. 항일영화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은신했던 영화인들은 한국영화의 재건에 나서 조선영화건설본부와 대한영화협의회를 결성하는 한편 일제의 통제 아래 있던 조선영화주식회사의 기재를 인수하여 기록영화 ≪해방뉴스≫를 제작한다.
이 시기는 로베르토 로젤리니(無防備都市) 등 의욕적인 영화제작가들이 주동이 되어 전후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운동을 전개한 해이기도 했다. 삶의 현장에 접근한 이른바 인간성 회복의 공동인식 아래 출발한 이 운동은 세계 영화계에 큰 자극을 주었지만, 우리나라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우리 전열의 정비가 시급했다.
해방 이듬해에는 영화의 업무가 警務部에서 공보부로 이관되고 극장연합회가 조직되어 앞으로의 영화제작에 대비한다.
이렇게 들뜬 상황 속에서 최인규 감독은 고려영화사를 설립 한 독립투사 전창근의 지하운동을 사실적으로 그린 역작 ≪자유만세≫를 내놓기에 이른다. 지하운동의 본거지인 지하실의 긴박한 분위기, 일제의 굴레에서 풀려난 민중들이 환호하며 뛰어나가는 거리의 시퀀스 등 기교상으로는 소박하나 자유를 찾은 민족적인 공감대와 충만한 연대감으로 통속적인 내용의 결함마저 용해시킨 뜨거운 힘이 있다.
이 작품은 일제 식민지 아래서 자유를 갈구해온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공감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흥행의 성공으로 한국영화의 장래를 밝게 하는 청신호로서 나타난다.
뒤이어 이귀영 감독의 ≪안중근사기≫(46년)를 비롯하여 ≪윤봉길 의사≫(윤봉춘 감독) ≪해방된 내고향≫(전창근 감독·47년) ≪독립전야≫(최인규 감독) ≪민족의 새벽≫(이규환 감독·이상 48년) ≪애국자의 아들≫(윤봉춘 감독·49년) 등 민족의 고난과 항일투쟁, 독립의 성취 등 애국심을 고취한 일련의 광복영화가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정부의 수립과 함께 들뜬 광복의 분위기가 안정되면서 ≪새로운 맹세≫(신경균 감독) ≪牧丹燈記≫(김소동 감독·이상 47년) ≪갈매기≫(이규환 감독·48년) ≪마음의 고향≫(윤용규 감독) ≪波市≫(최인규 감독·이상 49년) 등의 경우처럼 민중의 정서와 생활의 리얼리티, 사랑의 모럴을 추구한 예술성향의 작품들이 선을 보여 주목을 끈다.
민족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일제의 지배에 대한 치욕과 가책을 카타르시스 하려 했던 당시로선 ≪새로운 맹세≫나 ≪갈매기≫와 같은 정서적인 향토물의 등장은 오히려 신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흑산도 로케이션으로 어촌 사람들의 애환을 리얼하게 그린 ≪파시≫의 집념과 인간의 心性을 본능적인 향수의 시각에서 포착한 ≪마음의 고향≫의 리리시즘도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들뜬 시기에 김소동 감독은 한을 남기고 죽은 처녀귀신이 成佛하기 위해 한 남자와 동침하는 괴기물 ≪목단등기≫(49년)를 들고 나옴으로써 관객의 기호에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해방직전까지 ≪神風의 아들들≫≪사랑의 맹세≫(45년) 및 ≪우리들의 전쟁≫≪감격일기≫(45년) 등 어용영화를 만들어 황국 식민화 정책에 앞장 섰던 최인규, 신경균 감독이 1년도 채 못돼 ≪자유만세≫≪새로운 맹세≫의 경우가 말해 주듯이 항일 또는 조국재건의 계몽물들을 지체없이 내놓았다는 사실이다.
열강의 이해로 그어진 38선은 남과 북 사이에 사상적 대립을 심화시킨다. 여수 반란사건, 제주도 4·3폭동사건 등 역사적 분쟁의 소용돌이는 필연적으로 반공연화를 낳는 시대적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형모 감독의 ≪성벽을 뚫고≫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반공영화라는 데에 큰 뜻이 있다. 대학 동기생인 처남, 매부간에 빚어지는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이 주제인 이 작품은 스펙타클한 극의 운영과 카메라 구도가 뛰어나다.
광복기는 기재의 빈약과 시설 미비, 기술 부족으로 당초 기대한 만큼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16밀리 無聲으로 머물고만 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동시녹음 뮤지컬 ≪푸른언덕≫(유동일 감독·49년)과 ≪여성일기≫(홍성기 감독·49년)와 같은 천연색영화가 시도되었다는 것은 장차 기술의 축적을 위해 다행스런 일이었다.
조국의 독립은 그 감격만큼 많은 신인을 배출하는 소득을 가져온다 이른바 이규환, 윤봉춘, 전창근 등으로 대표되는 해방 전 세대와 이에 대비되는 해방세대, 즉 김성민(≪사랑의 교실≫48년), 윤대용(≪검사와 여선생≫48년), 한형모(≪성벽을 뚫고≫48년), 노필(≪안창남 비행사≫49년) 등 감독과 황여희 (≪자유만세≫46년), 김승호(≪해방된 내고향≫47년), 최은희(≪새로운 맹세≫47년), 조미령(≪갈매기≫48년), 주증녀(≪조국의 어머니≫48년), 노경희(≪愁雨≫48년), 최남현(≪돌아온 어머니≫49년), 황정순(≪여성일기≫49년), 이집길·황해(≪성벽을 뚫고≫49년), 윤일봉(≪푸른언덕≫49년), 이향(≪審制者≫49년) 등 연기자가 바로 그들이다.
反共으로 수용한 분단의 비극 - 動亂期
6·25동란은 단순히 한 민족의 분단을 확인하는 서장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린 충격적인 경고였다. 이러한 민족사적인 비극 속에서 최인규, 이명우, 박기채 등 미처 피난가지 못했던 유능한 영화인들이 납북되는 수난을 겪는다.
북의 남침으로 ≪아름다왔던 서울≫(윤봉춘 감독) 한편을 내놓고 南下한 영화인들은 피난지 부산·대구·진해에서 종군한 김학성, 양주남, 심재흥, 배성학 등 촬영기사들과 힘을 모아 16밀리 군사영화를 완성한다.
이해 9월 10일에는 오종식, 오영진, 김소동, 유두연, 이청기, 이진섭 등이 주동이 되어 임시 수도 부산에서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발족하기에 이른다.
≪西部戰線≫(50년·윤봉춘 감독) ≪洛東江≫(51년·전창근) ≪내가 넘은 38선≫(51년·손전 감독) 등이 만들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같이 혼란한 전시에 신인 신상옥은 최은희, 황남을 기용하여 처녀작 ≪惡夜≫(52년)를 내놓아 기대를 모은다. 양부인의 원색적인 생태와 애환을 그린 이 작품(원작·김광주)은 사실적인 수법으로 견고한 화면을 구축한다.
1953년 휴전의 성립과 함께 단행된 화폐개혁은 극심한 자금난을 가져와 영화제작에 적지 않은 타격을 안겨 준다. 공군 파일러트 이집길의 영웅적인 활약상과 사랑을 담은 ≪出擊命令≫(54년·홍성기 감독)이 인기를 끌고 이향·윤인자에 의해 처음 키스신이 이루어진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이 수도극장(현 스카라)에 개봉돼 히트한 것은 이듬해인 54년이었다.
環都와 함께 다시 정상을 찾기 시작한 영화계는 50년대 중반에 이르러 몇 가지 발전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 조치>(1955년 6월)로 크게 고무된 영화인들은 다양한 소재의 발굴에 나서고 이와 아울러 작품 수준이 향상된다.
이런 변화 속에서 국도극장에 개봉된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55년·조미령·이민 주연)이 10만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중흥의 디딤돌 역할을 한다.
잇달아 우리 민족의 착하고 순박한 낙천성에 포커스를 맞춘 이병일 감독의 시대풍자극 ≪시집가는 날≫(56년), 전창근 감독의 정통사극 ≪端宗哀史≫(56년), 김성민 감독의 ≪망나니 悲史≫(56년), 그리고 극한상황에 몰린 파르티잔의 반목과 휴머니티를 추구한 반공 문제작 ≪피아골≫(55년·김진규·노경희 주연)과 벙어리 처녀의 애틋한 사랑을 담은 ≪백치 아다다≫(57년·나애심 주연)가 이강천 감독에 의해 만들어져 논쟁과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피아골≫은 공비 아지트인 지리산을 무대로 암약하는 파르티잔들의 비인도적인 만행과 여대원을 둘러싸고 벌이는 남자들의 갈등, 그리고 자유를 희구하는 한 파르티잔의 탈주를 리얼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영화는 검열 당시 군부에서조차 반공과 친공성 여부를 놓고 대립된 의견을 나타냄으로써 당초 의도와는 달리 적지 않은 상처를 입게된다.
유현목은 이 시기에 등장한 가장 주목받은 영화 작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출세작 ≪交叉路≫(56년)와 ≪잃어버린 청춘≫(57년)등은 동란 후 사회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한 주제의식과 영상이 돋보였다. 이러한 그의 체취는 뒷날 대표작이 된 ≪誤發彈≫(61년)에 이르러 한창 강렬한 메시지로 발산된다.
≪주검의 상자≫(55년)로 선보인 김기영 감독은 ≪初雪≫(57년) ≪10대의 반항≫(58년) 등을 통해 전쟁에 피해받은 인간들의 모습과 현실적응의 생존본능을 묘파한다.
또 한가지 두드러진 경향은 ≪자유부인≫(55년 한형모 감독), ≪별아 내가슴에≫(58년·홍성기 감독) ≪장마루촌의 이발사≫(59년·최훈 감독)등 히트작들이 말해주듯이 멜러드라머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이 영화들은 자유풍조가 만연시킨 전후 아프레게르적 애정 편력과 가정윤리, 좌절을 딛고 일어선 참전 상이용사의 의지를 담아 사건 중심으로 엮어 나간다.
그런데 50년대의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그 성격이 반공물이거나, 문예물, 또는 멜러드라머를 가릴 것 없이 그 소재가 거의 분단의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 한편 ≪눈나리는 밤≫(57년·하한수 감독) ≪두남매≫(58년) ≪눈물≫(58년) ≪자장가≫(58년) 등 이른바 전옥(全玉)시리즈에 속하는 통속 신파극이 쏟아져 나와 대조를 이룬다.
시네마스코프시대가 열린 것은 50년대 후반이었다. 아리플렉스 대신 미첼 카메라를 동원하여 촬영한 이강천 감독의 ≪생명≫(58년)이 바로 그것이다.
왕성한 의욕·문예영화의 보람 - 中興期
4·19학생혁명이 몰아온 자유의 물결은 60년대의 한국영화를 풍요롭게 일구는 지렛대로서 나타난다. 검열기구가 민간<영화윤리위원회>으로 이관됨에 따라 확대된 소재의 선택과 표현은 ≪젊은표정≫(이성구 감독) ≪하녀≫(김기영 감독) ≪철조망≫(조긍하) ≪마부≫(강대진 감독) 등 가작들을 내놓기에 이른다. ≪젊은 표정≫은 젊은 날의 회의와 불안, 좌절을 짜임새 있는 흑백 화면에 수용한 밀도 있는 청춘물로서 관심을 끌었다면 ≪하녀≫는 인간의 魔性을 연출자 특유의 새디스틱한 터치로 표출했으며, ≪철조망≫은 동족상잔의 아픔을 기조로 한 상황 인식이 공감을 주었고, ≪마부≫는 평범한 서민의 삶을 긍정적인 눈으로 파악, 흐뭇한 인정담을 제시한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년 뒤에 불어닥친 5·16은 영화에도 적지 않은 제약을 가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61년)이다.
전쟁을 치른 소시민 김진규의 찌든 삶과 소외를 사회비정의 현실로 부각함으로써 피폐한 사회상황 전쟁 후유증을 겪었던 한 시대의 고뇌를 잘 나타낸 이 문제작은 내용이 어둡다는 이유로 상영이 중단되는 사태에 직면한다.
이 일은 얼마 후 ≪7인의 여포로≫(65년·이만희 감독 : 뒤에 ≪女軍≫으로 바뀜)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케 하고 ≪春夢≫(67년·유현목 감독)과 ≪벽 속의 여자≫(69년·박종호 감독)를 외설로 받아들여 불구속, 또는 입건 수사케 하는 전례를 남기게 된다.
하지만 이처럼 어려운 여건 아래서도 ≪사랑방손님과 어머니≫(61년·신상옥 감독), ≪고려장≫(63년·김기영 감독), ≪돌아오지 않는 해병≫(63년·이만희 감독), ≪성난 코스모스≫(63년·이봉래 감독), ≪잉여인간≫(64년·유현목 감독), ≪비무장지대≫(박상호 감독), ≪벙어리 삼룡이≫(65년·신상옥 감독), ≪갯마을≫(65년·김수용 감독), ≪晩秋≫(66년·이만희 감독), ≪안개≫(김수용 감독), ≪장군의 수염≫(68년·이성구 감독), ≪독짓는 늙은이≫(69년·최하원 감독)와 같은 의욕적인 예술정신의 결실이 맺어져 나왔다.
옛것에 대한 재조명으로 한국적인 여인의 숙명을 일깨운 ≪高麗葬≫과는 달리 ≪剩餘人間≫은 겉도는 세 인물을 통해 전후 사회의 일면과 삶의 패러독스를 보여 주었고, ≪非武裝地帶≫는 분단의 상처를 세미 도큐멘터리 수법으로 그려 나갔다.
≪갯마을≫은 인간의 본능과 숙명을 바다를 배경으로 표출하여 한국적인 서정을 얻어냈으며, ≪晩秋≫는 한정된 시간 속에 전개되는 남녀의 이야기를 대사보다 영상에 의존하여 새로운 형식미를 추구했고, ≪장군의 수염≫은 애니메이션까지 동원하여 주인공의 내면적 의식의 흐름을 포착하는데 저력을 보인 역작이었다.
양지에는 의례 그늘이 따르듯이 긍정적인 성과 뒤에는 이를 무색케하는 부정적인 부스럼도 따르게 마련이었다. 그것은 한일 국교와 함께 이 땅의 영화를 오염시킨 왜색 청춘물, 이를테면 ≪가정교사≫(63년) ≪청춘교실≫(63년) ≪푸른 꿈은 빛나리≫(63년)와 같은 번역 각색물과 ≪남자조종법≫(63년·원제:남성사육법) ≪不汗黨≫(63년·원제:用心棒) 따위의 파렴치한 일본 표절영화의 범람이다.
뒷날 5부까지 나오게 할 만큼 흥행감각과 여성심리 묘사가 뛰어난 정소영감독의 삼락애정극 ≪미워도 다시 한번≫(68년)이 불황의 여름극장가를 압도한 것도 60년대의 일이다.
저질 아류 속에 오락성 추구 - 模索期
경제성장에 타격을 준 70년대의 오일 파동은 영화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 않아도 텔레비젼의 공세에 위축됐던 한국영화는 이로 인해 제작비를 절감하는 살빼기의 궁색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체념 상태에서 요행을 바라고 내놓은 것이 ≪염통에 털난 사나이≫(70년)식 넌센스 코미디와 ≪驛前出身 용팔이≫(70년·설태호 감독)류의 소위 용팔이 시리즈, ≪팔도사나이≫≪팔도식모≫≪팔도사위≫(70년)등 일련의 팔도 시리즈, ≪명동가시나이≫(70년)로 시작된 명동 시리즈, 그리고 ≪꼬마신랑≫(70년)와 ≪김두한≫시리즈 (74년∼75년)등 전례없이 무질서한 속된 영화들이 극장가를 어지럽힌다.
그런데 불황 속에 히트작이 나온다는 영화계의 속설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별들의 고향≫(74년·이장호 감독)의 흥행성공을 계기로 ≪영자의 전성시대≫(75년·김호선 감독) ≪겨울여자≫(77년·김호선 감독)등이 잇달아 홈런을 날림으로써 저질의 이미지를 남긴 한국영화에 대한 선입감을 씻어 주는데 이바지한다.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호스테스, 창부, 직업여성 등 특별한 여성을 등장시켰다는 것과 성을 노출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개봉관에서만 60만 관객을 동원한 ≪겨울여자≫는 섹스를 남녀가 동등하게 공유하는 개념으로 인식하는 한 여자 장미희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꽃순이를 아시나요≫(79년·정인엽 감독) ≪아침에 퇴근하는 여자≫(79년·박용준 감독), ≪77번 아가씨≫(78년·박수태 감독) 등 호스티스물이 성행한 원인도 이런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밖에도 문여송 감독의 ≪진짜진짜 잊지마≫(76년·임예진·이덕화공연)로 대표되는 진짜시리즈와 ≪고교얄개≫(76년·석래명 감독) ≪소녀의 기도≫(76년·김응천 감독) 등 청소년영화가 성행하는 한편 이소룡의 ≪정무문≫과 성룡의 ≪취권≫의 영향을 받은 국적불명의 누더기 권격영화가 양산되어 더욱 혼란을 가중시킨다.
한마디로 70년대의 한국영화는 방향 없이 표류하는 난파선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火女≫(71년·김기영 감독) ≪石花村≫(72년·정진수 감독) ≪소장수≫(72년·김효천 감독) ≪바보들의 행진≫(75년·하길종 감독) ≪삼포가는 길≫(75년·이만희 감독) ≪避幕≫(79년·이두용 감독) ≪바람 불어 좋은 날≫(79년·이장호 감독) 등 수준작들이 나와 큰 위안을 안겨주었다.
에로티시즘의 표방과 현실에의 접근 - 轉換期
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영화는 예술성과 오락성이 공존하는 기업의 가능성, 철저한 프로의식으로 변모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영화감독들은 대부분이 양쪽을 접목시키는 일에 서툴거나 의식적으로 기피해온 경향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장호와 배창호 등 몇몇 감독에 의해 이미 깨어지고 있다.
80년대(전반)의 한국영화는 크게 두 가지 특징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性愛의 집착과 둘째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다.
≪애마부인≫(82년·정인엽 감독)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83년·김성수 감독) ≪무릎과 무릎사이≫(84년 이장호 감독) 등이 앞의 경우에 해당된다면 ≪도시로 간 처녀≫(80년·김수용 감독) ≪꼬방동네 사람들≫(82년·배창호 감독)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82년·정진수 감독) ≪작은 악마 스물 두 살의 자서전≫(84년·김효천 감독)≪바보선언≫(84년·이장호 감독) ≪고래사냥≫(84년·배창호 감독) ≪깊고 푸른 밤≫(85·배창호 감독) 등은 뒤의 작품에 속할 것이다.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 수확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81년) ≪안개마을≫(82년)을 비롯하여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82년·김호선 감독) ≪물레야 물레야≫(83년·이두용 감독) ≪恣女木≫(84년·정진수 감독) ≪땡볕≫(85년·하명중 감독) ≪장남≫(85년·이두용 감독)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80년대의 한국 영화계가 배창호·안성기 컴비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이루어 놓은 흥행적 기능적 성과는 ≪꼬방동네 사람들≫이후 히트시킨 ≪적도의 꽃≫(83년), ≪고래사냥≫(84년), ≪깊고 푸른 밤≫(85년)으로 증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깊고 푸른 밤≫에서 제시한 배감독의 역량은 한국영화가 그동안 지니지 못했던 오락의 기능과 예술적 완성도를 적절히 조화시켰다는 의미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과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이두용 감독의 ≪물레야 물레야≫ 또한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가작들이다. ≪바보선언≫은 그 실험적 형식미에 ≪만다라≫는 영상표현의 안정과 정확성에 ≪물레야 물레야≫는 한국색을 창출한 오도독스한 匠人의식에서 각기 독특한 개성을 발휘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한국영화 40년을 조명하며 한가지 확인하게 된 것은 영화란 아무리 꾸며진 이야기를 통해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속성을 지닌 특수한 매체라 하더라도 은연중 시대의 상황에 민감히 반응하며 성장해 왔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