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연극의 획기적 진전

- 제3회 전국지방연극제 총평




유민영 / 연극평론가·단국대 교수

우리나라처럼 땅덩이가 좁은 곳에서 중앙문화니 지방문화니 해서 구별하여 부르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지방문화가 없거나 아니면 보잘것이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러한 문화의 양분법을 찾아 올라가면 결국은 일제의 식민통치기를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말기까지만 해도 지방문화라는 것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왕궁 밖의 사대부 문화나 서민문화가 귀족문화를 압도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따라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지방문화가 한국문화를 버텨줄 만큼 밑받침이 되었다. 그런데 일제가 이 땅을 잠식하면서 고도의 통치수단으로 그네들은 우리 문화의 骨幹이라 할 지역문화를 모조리 부수기 시작했다. 민족혼이 배어 있는 한국 고유문화가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지방문화는 뿌리에서부터 뽑히기 시작했고 결국 枯死당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근자에까지 지방문화가 거의 荒廢의 상태에 방치되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따라서 지방은 외래적인 중앙문화의 변방지대로서 중앙에서 흐르는 폐품문화를 겨우 누릴 뿐이었다. 그동안의 중앙문화란 자생문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굴절된 일본문화와 서구문화가 혼합된 것이다. 이런 유형의 無國籍文化가 지방으로 전파되면서 토착문화와 적잖은 마찰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토착문화의 쇠퇴와 함께 지방까지를 오염시켜 갔다. 이즈음까지 지방도시들에 전문적 공연장 하나 없고 식민지 시대에 일본흥행업자들이 세웠거나 그런 유형의 영화관 정도가 있다는 것이 그 단적인 예라 하겠다.

그렇게 볼 때 전국지방연극제 개최는 문예진흥원이 官주도문화의 주역으로서 여러 가지 진흥책을 쓴 것 중 가장 잘한 일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공연예술은 고급문화로서 그 육성여하에 따라 지방문화, 더 나아가 한국문화 전체가 커다란 전기를 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연극은 공연예술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장르인 것이다. 지방연극제 개최로 인해서 유명무실했던 지방의 극단들이 활기를 찾기 시작했고 신생극단들이 많이 늘어났다. 포항, 광주, 전주 등에는 시립극단까지 생겨났고 한 두 곳에서는 전문극장 설립까지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에는 최근 생긴 대학의 연극과 두 곳(부산·청주)에서 아직 인재를 배출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현재는 비전문인들이 연극을 부업 비슷하게 주도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 점에서 그 만큼이나마 오늘의 지방연극을 궤도위에 올려놓은 지방연극인들의 열정과 능력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오늘의 지방연극이 찬사를 받아 마땅한 것은 사막에서 상록수를 키우고 꽃을 피우려 노력한 데 있다. 전문적인 연극교육도 못 받은 지방연극인들이 타직업에 종사하면서 그것도 공연장부재, 인재부재, 관객부재를 극복하고 그만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연극제를 실시하면서 해마다 발전적 변모로 나타나고 있다. 사실 재작년 부산에서 처음 실시한 때만 하더라도 각 지방의 연극은 우열의 차이가 별로 안 날만큼 낮은 수준의 아마추어였다. 비교적 그 지역 나름으로 간간이 연극활동을 해왔던 지방은 조금 낫고, 급조해서 참여한 지방은 대학극보다도 뒤떨어지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부터 괄목할 만큼 진전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도권 주변에서 두드러지게 진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는 그 지방에 중앙연극계에 근거를 둔 연극인이 있거나 아니면 중앙연극과 교류를 가진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가 있었다. 이점은 중앙연극과 인적인 교류나 또는 어떤 연계를 갖지 못한 지역이 수십년 뒤떨어진 신파극을 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일차년도의 제주도라든가 이차년도의 경주 같은 지역이 그러한 예였다. 그러나 그러한 일종의 연극오지는 점차 줄어 들어갔다. 금년 제 삼차년도에는 그러한 연극계의 벽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었다. 제주 같은 지역이 급신장한 반면 중앙과 인접해 있는 안양에서 금년에는 이상스럽게도 매우 낙후된 연극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특히 어느 지역이 낙후된 작품을 내는 것은 전적으로 희곡에서 비롯되고 그 다음에 연기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작품선택이 전체적인 것을 좌우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중요하다. 지난해에 인천이 대상을 가져간 것도 순전히 신선한 희곡 덕을 본 것이었다. 물론 현대극에서 희곡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리얼리즘극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우리의 연극실정에서 희곡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물론 지방극단들이 좋은 희곡을 몰라서 잘못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신작을 써 줄만한 극작가가 지방에는 거의 없고 중앙작가들의 작품을 얻는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점 또한 지방연극의 한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기왕에 중앙에서 공연했던 희곡을 개작해서 새롭게 해석해냄으로써 주목을 끈 지방이 여럿 눈에 띄기도 했다. 포항, 강원, 제주 등이 그러한 경우였는데 이들은 중앙의 기성 극단들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던 것이다. 이 말은 곧 지방연극이 괄목할 만큼 향상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도 된다고 하겠다. 이에 금년 제3회 지방연극제 출품작들을 하나하나 촌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난 5월 24일 첫 번째 무대에 오른 경기도(안양) 극단 80의 <끝없는 종말>(이상용 작 이종일 연출)은 6·25전쟁을 정면으로 다룬 멜로드라마였다. 남편이 국군장교로 출전한 사이에 아내가 흑인병사에게 겁탈을 당해서 검둥이 여아를 낳아서 비극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발상에서부터 사건전개, 그리고 연출, 연기, 무대장치에 이르기까지 전형적인 통속 素人劇이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30년이 지난 뒤인 오늘에 있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그 정도로 밖에 성찰할 수 없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두 번째 작품인 전북 극단 황토의 <너덜강 돌무덤>(박환용 작 박병도 연출)은 황토색이 강한 작품이었다. 중앙에서 공식적으로 데뷔한 지방작가 박환용이 개화기를 시대배경으로 삼대의 비극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구성에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제가 선명하고 연출에서 재능이 보인 경우였다. 군중장면이라든가 다양한 효과사용 등이 과잉인데다가 여과되지 못한데서 오는 장식이 눈에 거슬렸음에도 가능성은 충분히 나타난 작품이었다. 특히 베틀이라든가 물레 등을 등장시켜서 잃어버린 風情을 되살린 것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극단 황토는 연극에서 중요시되는 축약과 절제를 배워야 될 것 같다.

세 번째 무대는 제주 정랑극단의 <배비장전>(김상열 작 강한근 연출)이었는데 이번에 가장 괄목할 정도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 경우였다.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연출이 돋보였는데 그것은 희곡 자체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도 하지만 제주의 전래 굿놀이로 작품을 감싸안은 것은 매우 좋은 착안이었다. 무격이 지나치게 부각된 것과 연기의 과잉표현이 눈에 거슬렸지만 그래도 토속어와 민요 등 잃어가는 민속을 적절히 살려서 전통적 삶을 재현한 것은 매우 좋았다. 네 번째 작품인 경남 극단 입체의 <징소리>(이상용 작 이종일 연출)도 매우 토속성 짙은 작품이었다. 옛날 징 만드는 부자와 계모 사이의 삼각갈등을 묘사한 이 작품은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를 너무 강하게 표출함으로써 오히려 작품이 전혀 승화되어 나타나지 못했던 것이다. 희곡은 이색적 소재에도 불구하고 단막극적 성격을 지녔으며 그것을 장막극으로 늘리자니 반복성만 강할 수밖에 없었다. 연출도 문제가 많았는데 그것은 정제시키지 못함으로써 오버액숀으로 나타났고 추함으로까지 표출되었다. 극단 입체는 연극의 기초를 더 닦아야 될 것 같다. 연극이라는 것이 삶의 표현이므로 그 리듬도 삶의 리듬을 크게 벗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다섯 번째 작품인 충북 청년극장의 <만선>(천승세 작 한기호 연출)은 너무나 범용한 작품이었다. 물론 원작 자체도 진부하지만 그것을 교대로 무대 위에 재현한 연출에서도 창의성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즉 연출이 어떤 시각에서 작품을 해석할 것이냐 하는 기본 방침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어촌의 사회경제가 크게 변화된 시점에서 60년대에 써놓은 어촌 얘기가 대중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은 의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연출가의 시각과 작품해석은 중요한 것이다.

여섯 번째 무대인 부산 처용극장의 <가출기>(윤조병 작 이동재 연출)는 비록 소품이기는 하지만 이번 연극제 작품 중에서 가장 산뜻하게 빠진 것 중의 하나였다.

한 중년부부의 권태로운 일상성과 꿈을 재치있게 묘사한 이 작품은 가장 연극적이라는 점에서 기교가 돋보였던 작품이다. 그러니까 희곡, 연출, 연기가 균형을 이뤘고 그 중에서도 아내역의 이화진이 돋보였다. 부산의 <가출기>는 지방냄새를 완전히 씻어낸 수작이었다. 일곱째 충남극단 앙상블의 <樂浪人 嘉羅田>(김상열 작 이종국 연출)은 부족국가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陶工 夫子의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여러모로 <징소리>와 유사한 내용이지만 <징소리>보다도 주체의식이 뚜렷한 작품이다. 특히 한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밀도있게 펼친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 작품도 원작에 문제가 있었다. 우리 작가들의 공통적 문제점이라 할 감각과 보편성의 결여 같은 것이 바로 그런 문제점이라 하겠다.

여덟 번째 전남 목포극협의 <불모지>(차범석 작 이재윤 연출)는 60년대에 주목을 받았던 희곡을 다시 무대화한 작품이다. 무대장치는 좋지 못했지만 열연이었고 특히 어머니역의 김연순의 가능성이 크게 부각된 무대였다. 이 작품도 감각적으로 진부한 감을 준 것은 그만큼 시대가 달라진 때문이었다. 그 정도의 생활에서 큰딸의 자살과 큰아들의 강도미수는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아홉 번째 무대인 강원극단 굴레의 <그대의 말일뿐>(김상열 작 이영철 연출)은 매우 세련된 공연이었다. 원작 자체가 은행강도 실화인데다가 오늘의 사회문제를 안고 있어서 설득력이 강했고 또 박진감도 넘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상당한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수십 번의 장면전환으로 사건전개가 산만했고 주인공 이종대의 성격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함으로써 휴먼드라마 아닌 문자 그대로 강도극이 되었다. 강도의 사회심리학과 인간적 고뇌를 제대로 그렸다면 빼어난 작품이 될 뻔했다. 그러나 강원도는 이번 연극제에서 부산, 포항극단과 함께 가장 훌륭한 무대를 창출했다. 열 번째 인천 엘칸토의 <참새와 기관차>(윤조병 작 김기성 연출)는 과거의 출품작들 중에서 가장 뒤떨어진 무대였다. 윤조병의 특색을 보여주는 희곡이므로 원작 자체는 상당한 수준을 유지했지만 연출의 창의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대로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단원들의 고른 연기력 때문이었다. 열한 번째 대구극단 우리무대의 <달아달아 밝은 달아>(최인훈 작 이한섭 연출)는 고전소설 <심청전>을 바탕으로 해서 한국 여인의 정한을 묘사한 작품이다. 우리 고전작품의 경우 실화→설화→작품의 과정을 겪은 예가 적지 않다. 그만큼 현실적인 욕구불만이나 좌절을 환상적으로 성취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심청전이나 춘향전은 그러한 예가 될만한 고전이다. 그러나 <달아달아 밝은 달아>는 그러한 환상을 거부하고 있다. 매우 특이한 각도에서 심청을 재구성했지만 무대는 극히 소인극적이었다.

마지막 작품인 경북 포항 은하극단의 <대지의 딸>(차범석 작 김삼일 연출)은 소도시 연극치고는 너무나 경이적인 것이었다. 현실개선 의지의 계몽작품을 갖고서 그만큼이나 감동적인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은 연출가를 중심으로 한 전단원의 눈물의 결정이 없었던들 불가능했을 것이다. 포항 은하극단은 지방연극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 될 만하다.

사실 예술작품은 급조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평소에 꾸준히 좋은 작품을 만들어가는 지역이 훌륭한 공연을 보여주었고 수상을 목표로 급조한 지방은 역시 미숙했다. 지방연극제 실시로 인해서 지방민들의 연극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방연극이 사는 길은 시립 등 직업극단들이 계속 생겨나야 하고 그에 앞서 전문적 공연장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그런 것을 순차적으로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지방연극들을 고무하는 뒷받침, 즉 후원책부터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리하여 지방연극이 아마추어 아닌 프로연극으로 가도록 유도하고 지방연극제가 서울을 포함한 명실상부 대한민국 연극제전으로 발전되어가야 한다. 현재 서울의 대한민국 연극제는 서울연극제로 가져가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