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 전수실태 조사 (9)

선소리 산타령




이보형 / 문화재전문위원

머리말

여러 소리꾼들이 늘어서서 소고를 들고치며 메기고 받는 노래를 <선소리 산타령>이라 이르는데 이 성악곡 분야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이런 노래를 서울에서는 <선소리> 또는 <산타령>이라 일컫던 것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선소리 산타령>으로 이르는 것이 굳어지고 있다.

우리 전통음악에서 선소리라는 말은 다음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그 하나는 여러 사람이 소리를 메기고 받을 때 메기는 소리를 먼저 부른다는 뜻으로 <앞소리> 또는 <先소리>라 한다.

다른 하나는 방안에 앉아서 부르는 소리를 坐唱이라 이르고 마당에 서서 부르는 소리를 立唱이라 이르는데 이것을 우리말로 선소리라 한다. 요마적 <경기도 선소리 산타령>을 경기입창이라고 적는 것을 보면 <선소리 산타령>에서 선소리란 말은 입창으로 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산타령이란 山川 경치를 노래하는 <山打令>이란 뜻으로 보인다.

경상도 태백산은 상주 낙동강이 둘러 있고 전라도 지리산의 하동이라 섬진강수로만 둘러 있다.

이 노랫말은 선소리 산타령에도 보이고 육자배기에도 보이고 신재효 판소리 사설에도 보이는데 이 노래들이 하나 같이 산타령이라 이르고 있다.

선소리란 말이 <선소리 산타령>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또 산타령이란 말도 <선소리 산타령>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니 <선소리 산타령>이 어디서 나온 것이냐는 말이 나옴직 하다.

요마적 선소리 산타령을 다룬 글에는 이것이 <社黨牌 소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사당패소리에 대한 음악적 연구가 황무지로 남아 있고 또 선소리 산타령 보유자들이 선소리 산타령과 사당패소리와의 관련에 대하여 이렇다 하고 내놓은 바가 없으므로 선소리 산타령의 음악사적인 연구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점이 많다고 하겠다.

선소리 산타령이 어떤 길을 걸어 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살아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이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이 바뀌어버린 오늘에도 보유자의 말대로 옛날보다 더 다부지게 전승되고 있는 것은 어떤 까닭인가?

조사자는 선소리 산타령 보유자와 이수자와 전수생들이 지난 6월 28일에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국립국악원 주최로 벌린 제61회 무형문화재정기공연 정득만 선소리 산타령 발표회를 전후하여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보유자와 이수자 전수생을 만나서 선소리산타령의 沿革과 그 전수실태를 조사한 것이다.

社黨牌 판염불

사당패라는 놀이패는 없어진지 오래이다. 사당패에서 파생된 男社黨牌가 지금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꼭두각시놀음 보존단체로 남아 있으나 이들이 남사당패의 藝能을 이어받고 있을지라도 기능을 잃어버린지 오래이다.

사당패에 관한 것은 아직도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나 이능화, 송석하, 전신재의 연구로 대충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社長輩라 부르던 非僧非俗의 남녀들이 특이한 服飾을 하고 항간에 나와 북을 울리고 춤을 추고 염불을 하며 시주를 걷던 놀이패가 朝鮮前期에 보이는데 후기에 이르게되면 優婆塞 즉 남자는 居士라 이르고 優婆는 社黨이라 이르게 되었던데서 이 社長之群을 사당패라 이르게 된 것이다.

지금 남사당패들의 놀음을 보면 풍물(農樂), 덧뵈기(假面劇), 꼭두각시놀음(人形劇), 얼음(줄타기), 살판(땅재주), 버나로 구성되어 있으나 사당패는 본디 염불을 메기고 받는 것이었다.

「居士輩念佛之聲而巳」

<推案及鞠案>

이 염불이라는 것이 雜歌之類와 같이 男女和唱하는 가요임은 신재효 흥보가 및 변강쇠타령과 정현석 敎坊歌謠에서 볼 수 있으니 신재효 판소리 사설에 나오는 사당패소리는 놀량사거리·오돌또기·방아타령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현석 교방가요에는 산타령·방아타령·놀량·꽃방아타령과 같은 雜謠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雜謠나 農謠와 같은 향토민요에는 사당패소리들이 더러 전승되는데 이 소리들을 추려보면 사거리·개구리타령·산타령·방아타령 등 10여종이 넘는 것이 있다.

사당패소리를 염불 또는 판염불이라 이르고 三南地方 사당패들이 報念·花草사거리·산타령·개구리타령을 불렀다 하고 無雙新舊雜歌에 나오는 판염불에 眞言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본디 사당패들은 먼저 진언이 담긴 염불가요를 먼저 부르고 뒤에 사거리 산타령 등 俗歌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신재효 흥보가 및 변강쇠타령, 이능화 朝鮮解語花史, 箕山風俗圖帖에 나오는 사당패 판노름 그림을 보면 사당패가 놀던 공연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거사들은 바지, 저고리 차림에 머리를 수건으로 동이고 손에 소고를 들고 늘어서서 발림을 해가며 소리를 받고 사당은 치마 저고리 차림에 맨 머리 또는 아얌을 쓰고 춤을 추고 소리를 메기면서 치마폭에 閉良들이 던져주는 돈을 받는다. 지금은 사당패가 없어졌으니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으나 봉산탈춤, 양주산대놀이 등 가면극에 거사 사당이 노는 것이 단편적으로 나오고 북청사자놀음에도 사당 거사가 놀고 있어 이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산타령패의 연혁

서울 선소리 산타령은 한강·용산·삼개·支湖·西湖 등 五江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한다. 시조 잡가가 四契축 工匠이나 밭쟁이들에 의하여 발달한데 견주어 선소리 산타령이 물가에 사는 오강 장사치들에게서 성행하였다는 것은 좌창과 입창(선소리 산타령)이 서로 다른 근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당패들이 본디 상선이 드나드는 나루를 찾아 놀음을 벌리는 일이 잦았던 것이니 이 오강의 소리꾼들이 사당패들의 놀음을 이어 받은데서 오늘날과 같은 <선소리 산타령>이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 선소리꾼들의 이야기로는 선소리 산타령은 조선 고종년간에 의택이라는 성은 알 수 없고 이름만 전해지는 소리꾼에 의해서 전해졌다 한다. 의택의 소리는 종대라는 소리꾼에게 이어지고 종대의 소리는 申洛澤이에게 전해져 널리 퍼졌다 한다.

선소리 산타령 保有者이었던 이창배는 200년 가까이 되는 옛날에 의택이라는 산타령 명창이 있었고 30년쯤 후배로 종대가 이를 배워 잘 불렀고 역시 50년쯤 후배인 신낙택이 이를 이었다고 말한 바 있으나 寬齊가 고종때 歌舞別監을 지냈던 박춘재에게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의택이는 종대 보다 어린 나이인데도 산타령을 먼저 배워 선배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종대의 후계자로 1840년경 살았던 신낙택이 있었고 신낙택이 1900년경에 뚝섬 살던 이태문과 진고개 월선이를 가르쳤던 바 이태문이 이동운 등 많은 뚝섬 왕십리 산타령꾼들을 길러냈다고 하는 이도 있다.

선소리 산타령 보유자 정득만에 의하면 뚝섬에 이태문, 이동운, 신흥삼 등 산타령꾼들이 있었는데 뚝섬에 살던 부자노인이 흥선대원군과 친한 사이어서 이것이 줄이 닿아서 뚝섬패들이 가끔 궁중에 불려가 소리를 하여 이름이 났고 이동운은 어전에서 소리를 잘해서 상감이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기까지 했다고 한다. 어전에 불리어 가서 소리했다고 이름이 나서 그렇지 실은 과천 산타령꾼이 뚝섬 산타령꾼보다 한수위였다고 한다. 이것은 정득만이 뚝섬 노인들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과천 산타령꾼들이 죄 죽자 과천 산타령 명창 소완준이 서빙고로 이사와 살았는데 지금 역삼동이던 방아다리 한인택 사랑에 놀러 다니며 소리를 했는데 그때 한인택과 김수현이 그에게 소리를 배운 것이라 한다. 서빙고에서 소완준이 노인당에서 소리할 때 정득만을 불러다 산타령을 가르쳤다 한다.

뚝섬 살던 권경춘이 삼개 토장동에 이사와 살았고 또 뚝섬 신흥삼도 만년에 삼개 동막에서 살았는데 동막 살던 김태운이 산타령을 잘했다 한다.

장사훈 저 國樂槪要에 보면 서울 산타령패에는 뚝섬패, 한강패, 쇠봉구패, 용산 삼개패, 동막패, 성북동패, 왕십리패, 청패, 진고개 호조다리패, 배오개 마전다리패, 과천 방아다리패가 있었다 하며 뚝섬 황기운, 이동식, 이동운, 동막 권경춘, 왕십리 하순일, 진고개 호조다리패의 월선이, 김응렬, 김병규, 배오개 마전다리패의 박삼쇠, 과천 방아다리패의 소완준, 한인택이 이름난 산타령꾼이라 했다.

일제 때에는 왕십리 살던 이명길, 이명산, 탁복만, 엄태영, 동막 살던 김태운이 산타령으로 이름을 떨치었고 이창배가 이명길에게 배웠다. 일제말기 이후로 선소리 산타령이 부진한 상태였으나 1968년에 선소리 산타령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고 유개동, 이창배, 정득만, 김순태, 김수현이 보유자로 인정되어 전승의 길이 열렸다. 그 동안에 유개동, 이창배, 김순태, 김수현은 타계하였고 정득만이 생존해 있어 공연과 전수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

선소리 산타령

현행 선소리 산타령은 남자들로 구성된 소리꾼들이 소고치며 소리를 메기고 받고 某甲이는 장고를 어깨에 매고 치며 소리를 이끌어가는 공연방식을 갖는다. 보유자였던 이창배는 선소리 산타령과 사당패 소리와 관련을 부정하였으나 선소리 산타령이 사당패 소리와 관련이 있음은 선소리 산타령 자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선소리 산타령의 놀량, 사거리, 산타령, 개구리타령이 사당패소리에 보이는 점이다.

둘째는 산타령패에도 옛날에는 여자 소리꾼이 보이는 점이다. 선소리 산타령의 始祖로 꼽히는 의택이의 산타령패에는 금옥이가, 종대의 산타령패에는 서강 밀양이가, 신낙태의 산타령패 즉 진고개 호조다리패에는 월선이라는 여자소리꾼이 있었는데 월선이는 신낙태의 아내라는 점이 사당패에서 사당은 거사와 부부간인 것과 같다.

셋째는 산타령꾼도 거사들과 같이 소고를 치고 서서 발림하며 소리한다는 것이다. 지금 선소리 산타령의 모갑이가 장고를 매고 치는 것이 사당패와 다르다고 하겠으나 산타령패에서도 옛날에는 장고를 그냥 세워두고 위에서 북편만을 쳤다 한다.

넷째는 답교놀이에서도 女服을 한 舞童들이 선소리 산타령을 메기었다는 것이다(이충선 대담). 산타령패가 사당패와 같은 점이 있을지라도 오늘날 산타령패는 사당패와 다른 점이 많다. 사당패소리는 여자 소리로 치나 오늘날 선소리 산타령은 가장 남성적인 씩씩한 소리로 꼽히고 있다. 사당패의 판염불은 佛家의 소리가 끼어 있으나 오늘날 선소리 산타령에는 불가소리가 모두 가시고 속요로만 되어 있다. 사당패는 절에 근거를 두고 시주를 걷고자 마을과 장마당을 돌며 소리를 하나 산타령패는 절과 관련이 없이 鄕土 소리꾼들이 스스로 즐기고자 향토축제에 나가 소리를 한다. 산타령패 가운데는 일부가 사당패와 같이 잔치집에 나가 돈을 받고 소리를 하는 유습이 남아 있었으나 돈받고 소리하면 「두냥머리」라 하여 천하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산타령패들은 자기 고장에서 스스로 소리를 익혔다가 정월 보름 답교놀이와 같은 향토축제에 나가 소리하고 즐기는 쪽으로 발전한 것 같다.

답교놀이는 본디 정월 보름에 男女老少 가릴 것 없이 그 지역 큰 다리로 나와 다리를 밟고 건너갔다 건너왔다 하여 액을 막고 福을 불러들이는 놀이이나 여기에 여러 가지 풍악이 딸리고 놀이가 따르는 고장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광통교, 수표교, 살꼬지다리와 같은 큰 다리에서 답교놀이를 세게 하였는데 살꼬지다리와 같은 답교놀이에서는 굿패들이 풍악을 울리고 무동춤을 추고 선소리 산타령도 불렀다 한다. 서울 변두리에서는 다리가 없는 마을에서도 굿패를 조직하여 마을 큰마당에서 정월 보름에 답교놀이를 하였는데 뚝섬패 과천패와 같은 선소리패들이 답교놀음에 나가 소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산타령패들이 소리판을 벌리게 되면 먼저 판소고라하여 小鼓놀음부터 시작했다 한다. 소리꾼들이 늘어서서 덤부리산 장단으로 한바탕 소고를 쳤다 하는데 그 가락을 들어보면 南道 북가락과 같이 내고, 달고, 굴리 맺고 푸는 것이 아니고 <떵--, 떵--, 떵--, 덤부리산, 덤부리산, 둔닷둔>하고 같은 가락을 반복하는 외가락이다. 이 판소고가 외가락으로 싱거워 그러는지 지금 선소리 산타령을 무대에서 공연할 때에는 이것을 생략하고 바로 소리로 들어간다.

판소고가 끝나면 소리로 들어가는데 제대로 소리판을 벌릴 제면 놀량을 먼저 낸다.

먼저 모갑이가 <山川草木이 다 茂盛한데 나하에>하고 내드름을 내면 여러 소리꾼들이 <에에에>하고 길게 입타령을 齊唱한다. 내드름은 본디 <山川 草木이 속잎난디>라는 말이었으나 <盛林한데>로 바뀌었고 지금은 茂盛한데로 바꾸어 부른다. 이 대목은 不規則拍子로 되어 있어 장단도 소리에 따라 세마치나 볶는 타령을 섞어 치는데 3박이면 세마치, 4박이면 타령을 치나 붙박아서 치는 것이 아니고 소리가락대로 맞추어 가는 것이다. 선율이 대체로 3분박이기 때문에 소고는 일제히 <덩-더, 덩-더>,하고 붙박아서 치다 맺을 때에는 <덩-더, 덩-더, 덩-덕>하고 맺는다. 소리를 한없이 길게 뽑으며 입타령에 메리스마로 엮어가는데 높은 통성으로 내지르다가 솟구칠 때에는 속목으로 쑤시는 멋이 곁들여진다. 선율이 경쾌한 경토리(京調)로 높이 시원스럽게 지르는 것이 장쾌하기 그지없다.

몇 마루를 입타령으로 넘기면 <이이 이히 에라뒤어>하고 한배가 배나 빨라지며 줄다름쳐 나가고 소리도 차츰 흥겨워진다. <에 말들어봐라 綠楊 벋은 길로 平壤監營 쑥 들어간다>하는 노랫말과 짧은 입타령이 교차되는데 몇 마루를 넘기데도 소리는 齊唱으로 불리워진다. 노랫말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拍도 불규칙하다. 놀량은 다음에 나오는 산타령의 序的 노래의 구실을 한다. 놀량이 끝나면 앞산타령으로 넘어간다. 먼저 모갑이가 느릿하게 <나너니나 노>하고 입타령을 내면 소리꾼이 다 함께 <에헤 에헤>하고 입타령을 질러 낸다. 입타령 한 마루가 끝나면 소리꾼 하나가 나서서 <과천 관악산 염불암은…>하고 한 마루를 메기면 소리꾼이 <에-어디히>하고 입타령으로 받는다. 다음 마루부터는 소리꾼 하나이 <단산봉황이 죽실을 물고…>하고 메기면 여러 소리꾼이 <경상도 태백산은…>하고 받는데 이때부터 받는 소리는 입타령이 아니고 노랫말로 받는다. 앞산타령은 다음에 이어지는 여러 산타령 보다 좀 느리다. 이 대목은 뒤에 나오는 잦은 산타령에 견주어 좀 느리니 긴 산타령이라 하겠는데 긴 산타령이 앞뒤로 두 가지가 있으니 앞에 것을 앞산타령 뒤에 것을 뒷산타령이라 이른다. 흔히 앞산타령은 서울 남쪽, 뒷산타령은 서울 북쪽 산을 노래한 것이라 하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앞산타령 또한 불규칙한 박자로 불규칙한 노랫말에 불규칙한 선율로 되어 장단도 소리에 따라 친다. 소리는 약간씩 빨라지고 고조되어 흥을 돋군다. 높은 소리로 질러 내기 때문에 묵직한 것보다 경쾌하고 시원스럽다고 하겠다.

앞산타령을 대여섯 마루 메기고 받으면 뒷산타령으로 넘어간다. 모갑이가 홀로 <나지나 산이로구나>하고 메기면 여러 소리꾼이 <에 두견아 에>하고 입타령을 받는다. 이어서 소리꾼 하나이 <강원도 금강산에 …>하고 첫머리를 메기면 여러 소리꾼이 <동소문 밖섞 내달아…>하고 받는다. 이렇게 대여섯 마루를 메기고 받는데도 음악성은 앞산타령과 그리 차이가 없다. 이 산타령에 판염불의 염불조가 들린다 하나 이 염불조가 어떤 것인지 또 이것이 사당패의 판염불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뒷산타령 대여섯 마루를 메기고 받으면 자진산타령으로 넘어간다. 뒷산타령에 이어서 같은 빠르기로 소리꾼 하나가 <靑山의 자부松은 너는 어이 누었느냐 풍설을 못 이겨서>까지 부르면 그 다음 <꺾어져서 누었느냐>에서 소리는 갑자기 빨라지고 <바람이 불려는지>하고 여러 소리꾼들이 받아 일제히 기세등등하여 소리를 몰아간다. 이 대목을 자진산타령이라 함은 소리를 이렇게 재게 몰아가기 때문이다. 자진산타령을 일명 <도라지타령>이라 이르는데 이는 옛날에 <도라지 여닫이 병풍 속에 잠든 큰애기 날 살려라>하는 노랫말로 시작한데서 나왔다 한다.

자진산타령은 뒷소리의 길이가 들축날축 하는데 꽤 긴 것도 있어 촘촘히 엮어 부르는 경우도 있다. 자진산타령의 노랫말은 山川경개에 관한 것 보다 故事에 관한 것이 더 많다.

산타령패들이 소리판을 짧게 벌릴 경우에는 자진산타령으로 마치나 길게 벌릴 경우에는 자진산타령 여닐곱 마루를 부르고나서 개구리타령, 도화타령, 방아타령으로 돌린다. 개구리타령이나 도화타령 방아타령은 산타령과 달리 짧은 마루, 즉 短形章節로 되어 있어 오늘날에는 민요로 꼽히고 있다.

개구리타령은 <에->하고 높이 질러 뽑은 뒤에 「개구리타령 하여보자」하고 짧은 앞소리를 하고 <에헤에헤 에헤야 아하 아하 어허야>하고 입타령이 있고 「마무리나 하여보자」하고 뒷소리를 받는다. 앞소리를 소리꾼 하나가 메기고 뒷소리를 여럿이 받는 것이나 그냥 다 함께 내리 부르며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 선율은 경토리(京調)로 되어 있는데 소리를 높이 질러 볶는타령으로 몰아가는 이 소리는 흥겹고 구성지기 그지없다. 이 소리를 개구리타령이라 이르는 것이 「개구리 집을 찾으려면 미나리 강으로 가거라」하는 노랫말에서 나온 것이며 이 소리는 남도 사당패 개구리타령으로 바뀌고 이것이 다시 남도민요 개구리타령이 되었으며 또 이것이 경기민요 경복궁타령, 서도민요 사설난봉가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방아타령은 한배가 긴 긴방아타령과 짧은 자진방아타령으로 나뉜다. 이 소리도 짧은 章節形式에 되어 있고 긴방아타령은 세마치 장단으로, 자진방아타령은 볶는타령 장단으로 되어있다. 양산도는 긴방아타령과 비슷한데 짐작컨대 긴방아타령과 산타령이 어우러져 생긴 소리같다.

서울 선소리 산타령은 일찍이 西道에 전하여져 서도 선소리 산타령이 되었다 하는데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경발림으로 구성된다. 서도 선소리 산타령은 서울 선소리 산타령과 비슷하나 노랫말과 목 넘어가는 것이 약간 다른데, 다르게 되어 있는 노랫말 가운데에는 사당패소리 사설들이 들어 있는 점으로 봐서 서도 선소리 산타령도 생긴지 오래된 것 같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서울 산타령꾼 의택이와 종대가 평양에 가서 소리한 것이 서도소리 명창 허덕선이, 김방울에게 전해져 서도 선소리 산타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서도에서는 그들이 소리하던대로 모갑이는 장고를 치고 소리꾼들은 손수건 들고 춤을 추며 소리하는 것으로 되었는데 서울 선소리 산타령에는 모갑이가 장고를 치는 것은 뒤에 서도 선소리 산타령의 영향이라 한다.

남도 선소리 산타령은 남도 사당패 소리가 바로 소리꾼의 산타령으로 넘어간 것 같고 이 단계에서 신방초가 사당패 판염불을 긴염불과 화초염불로 편곡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을 이어 받아서 장판개, 조진영, 한똑똑, 申馬山浦와 같은 잡가 명창들이 보염, 화초사거리로 판을 짜서 이름을 떨치게 된 것 같다. 이들도 옛날에는 오늘날과 달리 소고를 치면서 소리했다 한다.

보유자와 전수생

선소리 산타령이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에 보유자로 인정받은 이는 김수현(본명 태봉) 유개동, 이창배, 김순태, 정득만 5인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타계하고 오직 정득만이 생존해 있어 공연하는 일과 전수하는 일을 두루 맡고 있다.

김수현, 정득만은 과천 산타령패 소완준에게 배웠고 김순태는 김수현에게 배웠고, 이창배는 왕십리 산타령패 이명길에게 배웠다 한다. 소완준이 누구에게서 소리를 배웠는지 알 길이 없으나 이명길은 뚝섬 산타령패 이태문에게 배웠고 이태문은 신낙택에게 배웠다고 한다. 신낙태은 종대에게서, 종대는 의택이에게서 배운 것으로 알려졌으나 의택이가 산타령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알길이 없다.

의택이는 적어도 150년 이전 사람으로 서울에서 선소리 산타령을 처음 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여자 소리꾼 금옥이와 산타령패를 이루었는데 금옥이는 목이 새되어 上淸으로 유명했다 한다. 그의 소리는 종대에게 이어졌다 한다. 관제가 박춘재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의택이는 종대의 스승이나 나이는 오히려 아래이었다 한다.

종대는 의택에게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으나 나이는 의택이 보다 위라 하며 어느 고장 출신인지 알 수 없으나 서울에서 서강 밀양이라는 여자 소리꾼과 산타령패를 꾸미어 잘했다 한다. 그의 소리는 신낙택에게 이어졌다.

신낙택은 1840년경 사람으로 종대에게 선소리 산타령을 배워 아내 월선이 그리고 김병규 김병렬과 더불어 진고개 호조다리패(일명 진곡개 월선이 패)라는 산타령패를 꾸며 이름을 떨치었다 한다. 그의 소리는 이태문과 월선이에게 전해졌다 한다.

이태문 1860년경 사람으로 신낙택에게 선소리 산타령을 배워 1880년경에 황기운, 이동식, 이동운 등 여러 소리꾼을 가르쳐 뚝섬패라는 산타령패를 만들어 궁중에 불리워 다닐 만큼 유명하였다 한다.

소완준은 1870년경에 태어난 이로 과천 살며 선소리 산타령의 뛰어난 명창으로 꼽히었고 과천 선소리패를 이끌고 있다가 그의 장남이 철도일로 용산역에 근무하면서 서빙고로 이사와서 살았으며 그때에 정득만을 가르쳤고 한편 지금 역삼동인 방아다리에 있던 한인택 사랑방에 놀러 다니면서 한인택 김수현 등을 가르쳤다 한다. 장남이 황해도 해주로 전근을 갔기 때문에 그곳으로 이사하였는데 그 뒤 소식이 없었다 한다. 유개동도 소완준의 소리에 뒷소리를 받았다고 한다.

이명길은 1887년에 태어났고 왕십리 살았으며 이태문(?)에게 배웠다. 하순일, 이명산(1885∼1960), 탁복만(1885∼1950), 엄태영(1883∼1951) 등 쟁쟁한 산타령꾼과 함께 이른바 왕십리패를 뱽아 일제말기 선소리 산타령을 주도하였다. 그의 門下에서 이창배가 나왔다. 그는 1966에 작고하였다.

선소리 산타령 보유자이었던 김수현은 본명이 태봉이다. 1898년에 태어났고 서울 서초동 서리풀에서 살았으며 최경식에게 雜歌를 배우고 역삼동 방아다리 한인택 사랑에 다니며 소완준에게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다.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선소리 산타령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으나 1970년대에 작고하였다. 김순태가 그에게 산타령을 배웠다 한다.

보유자이었던 유개동은 1898에 태어났다. 마포에 살았으며 최경식에게 잡가를 배웠고 장계춘에게 歌詞를 배웠다.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선소리 산타령보유자로 인정받았고 유개동민요연구소를 경영하다가 1975년에 작고하였다. 그는 김현규를 전수생으로 길러냈다.

김순태는 1913년에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으며 최경식에게 잡가를 배웠고 김수현에게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다. 1968년에 선소리 산타령의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한양국악학원을 경영하다가 한국국악예술학교민요실기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78년에 작고하였다. 그는 현범수와 윤종평을 길러내었다.

이창배는 1912년에 서울 왕십리에세 출생하였다. 최경식에게 잡가 시조를 배웠고 이명길에게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다. 젊어서 공직에 있었고 국립국악원악사로 재직하였고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열어 많은 제자를 길렀다. 1968년에 선소리 산타령 보유자로 인정받고 문화재연구원을 내었다. 歌謠集成 등 수많은 저서를 냈었다. 1984년에 작고하였다. 그는 박태여, 백영춘 등 수많은 제자를 길러 선소리 산타령 전승에 공이 크다.

보유자 정득만은 정미년 음10월 27일에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52번지에서 태어나 올해 79세가 되었다. 호적으로는 1907년 10월 27일생으로 되어있다. 지금은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4가 진양아파트 2동 908호에 산다. 그는 서빙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5세 때 경기도 광주군 암사동으로 이사했으나 을축년 홍수가 나자 다시 서울로 와서 후암동에서 살았는데 21세쯤 되면서 지금 동자동인 우수재 살던 無名의 소리꾼 문세근에게 1년간 평시조 지름시조 등 時調 몇 수와 遊山歌 赤壁歌 등 잡가 몇 수를 배웠다. 1년쯤 배우자 문세근은 당시 유명한 소리선생이던 최경식을 천거하였다. 22세쯤 되던 해에 당시 공덕동 살던 최경식을 찾아가 다시 여러 가지 시조 잡가를 배웠는데 그 뒤 틈틈히 배우기를 22년간이나 계속했다. 당시 최경식은 43세쯤 되었는데 그는 시골에 땅이 있어 넉넉히 살았고 애오개에서 놋그릇 가는 일을 하며 소리선생을 하던 조기준에게 소리를 배워 조선말기 최고의 명창이며 소리선생이 되었고 그의 문하에서 최정식, 유개동, 김태운, 엄태영 등 33명의 소리 명창이 나왔는데 이들이 장차 서울 장안을 휩쓸게 되었다고 한다. 최경식은 조기준이 하던 대로 일체 소리채나 學채를 받지 않았고 그래서 75세로 작고할 때까지 방송이나 음반취입을 거절했다 한다. 정득만은 21세 때 후숭동에서 조댁경이라는 소리꾼이 부르는 선소리 산타령을 듣고 익히었는데 25세쯤 되자 과천에서 서빙고로 이사와 살던 유명한 선소리 산타령 명창 소완준에게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다 한다.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의 보유자로 인정되었고 남산 밑 남산동에 한국민요연구회라는 학원을 설치하여 후배양성을 해왔다. 그동안 최창남 황용주 등 여러 제자에게 선소리산타령을 가르쳤고 지금은 조교로 인정된 황용주가 열고있는 대한민속예술학원에 선소리 산타령 保有會를 두고 여기에 나가 전수생을 지도하고 同 保存會에서 주최하는 각종 선소리 산타령 공연에 출연하고 있다. 79세 고령이어서 전수생의 지도는 주로 조교 황용주에게 맡기고 있으나 아직도 건강하여 능히 공연에서 산타령을 부를 수 있어 지난 6월 28일에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국립국악원 주최 제61회 무형문화재정기 공연「정득만 선소리 산타령 발표회」에 출연하여 그의 기량이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작고한 보유자와 현 보유자 정득만이 길러낸 이수자는 최창남, 박태여, 황용주, 김현규, 윤종평, 정왕근, 이성희, 백영춘, 김완수, 이영표, 현범수, 박상옥 이렇게 12명에 이르는데 최창남이 보유자 후보로, 황용주가 助敎로 인정되었다.

최창남은 1935년생으로 인천 출신이며 지금 서울 반포동에 산다. 19세 무렵에 서울에서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열었던 이창배에게 시조 긴잡가 경기민요를 배웠고 한 3년쯤 뒤에 이창배와 정득만에게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다. 24세 때부터 인천에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열고 사범으로 있다가 30세 무렵에 서울에 올라와 이창배와 청구고전성악학원을 같이 운영하며 조교로 일했다. 1972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 전수생으로 인정되었고 1976년에 이수자로 인정되었고 1980년에 조교로 인정되었고 1985년에 보유자후보로 인정되었다. 선소리 산타령 공연 때 초기에는 김순태가 모갑이를 했고 김순태가 작고한 뒤에는 이창배가 맡았던 것을 1973년부터 최창남이 모갑이를 맡고 있다. 현재 이창배가 작고한 뒤에 학원을 인수하여 학생들에게 민요를 가르치고 있다.

황용주는 1937년생으로 충남 공주 출신이며 지금 서울 제기동에서 산다. 19세 때 서울에 올라왔고 24세 때 청구고전성악학원에서 이창배에게 시조 가사 긴잡가를 배웠고 26세 때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다. 1972년에 선소리 산타령 전수생으로 인정되었고 1977년에 이수생으로 인정되었다. 1968년부터 대한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여 경영하며 민요사범으로 일해왔으며 1982년에 선소리 산타령 보존회를 동학원에 옮기고 조교로 전수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박태여는 1928년생인데 호적은 1924년생으로 되어 있다. 황해도 황주출신이며 23세 때 서울에 올라왔고 지금 서울 능동에 산다. 43세 때 서울에서 이창배에게 경기민요, 서도민요,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다. 1972년에 전수생이 되었고 1976년에 이수자로 인정되었다. 숭인동에 서울 중앙창우회라는 학원을 내어 손수 경기민요사범으로 일하고 있다.

김현규는 1942년생으로 경기도 고양출신이며 지금 서울 이문동에서 산다. 1959년에 고대식에게 농악을 배웠고 또 고양군 송포면 대화리에 전승되는 향토 민요를 배웠다. 1971년부터 유개동에게 동요, 잡가, 선소리산타령을 배웠다. 1974년에 전수생으로 인정되었고 1980년에 이수생으로 인정되었다. 현재 이은관민요학원의 민요사범으로 일하고 있다.

윤종평은 1945년생으로 경기도 화성출신이며 지금은 서울 봉천동 산다. 26세 때 서울에서 김순태에게 긴잡가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고 27세 때부터 이은관에게 배뱅이굿을 배웠다. 1972년에 전수생으로 인정되었고 1977년에 이수자로 인정되었다. 현재 종로3가에서 윤평화민요학원을 손수 경영하며 민요사범으로 일하고 있다.

정왕근은 1937년생으로 호적은 1940년생으로 되어 있다. 충남 성환 출신으로 지금은 서울 신공덕동에 산다. 29세 때부터 이창배에게 시조 긴잡가 민요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고 1977년에 전수생으로 인정되었고 1982년에 이수자로 인정되었다. 지금 마포에서 경서도민요학원을 내어 민요사범으로 일하고 있다.

백영춘은 1946년생으로 서울 출신이며 지금은 서울 목동에서 살고 있다. 1968년에 이창배에게 민요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고 1971년에 전수생으로 인정되었고 1977년에 이수자로 인정되었다. 지금 화곡동에서 민요학원을 열고 있다고 한다.

현범수는 1936년생이며 경기도 양주 출신이며 지금은 서울 답십리에 산다. 32세 때부터 김순태에게 민요 긴잡가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고 1974년에 전수생으로 인정되었고 1977년에 이수자로 인정되었다. 지금 신설동에서 고려무용민요학원을 열고 민요사범으로 일하고 있다.

이성희는 1942년생으로 경기도 파주 출신이며 지금은 서울 남가좌동에 산다. 1970년부터 서울에서 이창배에게 시조 긴잡가 민요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고 1976년에 전수생으로 인정되었으며 1980년에 이수생으로 인정되었다. 지금은 신촌에서 전통국악연구원을 내고 민요사범으로 일하고 있다.

박상옥은 1947년생인데 호적은 1949년생으로 되어 있다. 경기도 용인 출신이며 지금은 서울 양평동에 산다. 1973년부터 서울에서 이창배에게 시조 긴잡가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고 또 같은 무렵에 정득만에게 시조와 산소리 산타령을 배웠다. 1976년에 전수생으로 인정되었고 1982년에 이수자로 인정되었다. 지금은 동대문 창신동에서 경서도창연구원을 내고 경서민요사범으로 일하는데 농악을 배운 일이 있어 사물놀이공연에도 참가한다고 한다.

이영표는 1945년생으로 서울 출신이며 지금은 종로구 봉익동에 산다. 선소리 산타령 보유자이던 이창배의 장남으로 국악고등학교를 나왔고 1973년부터 이창배에게 선소리 산타령 경기민요를 배웠으며 1977년에 전수생으로 인정되었고 1982년에 이수자로 인정되었다. 지금 인천에 가있다 하나 거처가 분명치 않다.

김완수는 1945년생으로 전라북도 고창출신이며 30세 때부터 서울에서 김순태에게 민요선소리 산타령과 긴잡가를 배웠고 1978년에 이창배에게 경기민요, 선소리 산타령을 배웠다. 1979년에 전수생으로 인정되었고 1984년에 이수생으로 인정되었다. 지금은 우리 국악예술단이란 공연단체의 단원으로 있으면서 공연장에서 사회도 보고 민요도 부른다고 한다.

지금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 전수생으로 인정된 이는 김명수, 이완수, 방영기, 이두영, 김국진 5명이다. 이들은 월, 수, 금 삼일에 오후 5시쯤 종로4가에 있는 선소리 산타령 보존회에 나와서 전수받고 있는데 월요일은 보유자 정득만이 손수 지도하고 나머지 날은 보유자가 고령이어서 조교 황용주가 전수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이창배에게 민요와 선소리를 배웠기 때문에 지금은 배운 것을 다시 닦는 것이라 한다.

소리꾼이 돈을 받고 공연하던지 스스로 즐기기 위하여 향토축제에 나가 공연하던지 어떻든 선소리 산타령이 자라 온 것은 이것이 전승될 수 있는 문화 환경이 유지된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에는 이미 이런 문화환경이 망가져 선소리 산타령은 有料공연이든 혹은 스스로 즐기는 자발적 공연이든 公演契機가 없어진 뒤이었다. 지금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에는 12명의 履修者가 있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선소리를 공연하는 일이 없고 또 스스로 즐기고자 이를 공연하는 일도 없다. 위에서 조사된 대로 이수자 대부분이 개인 민요학원 사범으로 일하고 있다. 뒤집어 말해서 이수자들은 민요학원 사범으로 행세할려면 선소리 산타령의 이수자 및 보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말해서 선소리 산타령은 民謠의 傳承에 힘입어 他意的으로 전승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민요 歌客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선소리 산타령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고 정기적으로 벌어지는 중요무형문화재 정기공연 등 여러 공연에 참가함으로써 선소리의 技倆을 유지하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이수자들의 바램은 언제인지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젊은이에게 선소리 산타령을 가르치는 교수법을 터득해야 할 것이나 선소리 산타령 보존회에 나오는 전수생 밖에는 이것을 배우려는 젊은이가 없다. 왜 젊은이들이 선소리 산타령을 배우려들지 않는가? 쉽게 말해서 배우기 어렵고 재미가 없고 배워 쓸데없어서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락을 익힌 이라면 선소리 산타령이 배우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또 썩 재미있는 음악이라 할 것이며 앞으로 젊은이들이 스스로 나서서 이 소리를 배우도록 하자면 학교 교육에 이런 노래를 가르칠 계기를 만들어 주고 교육받은 젊은이들이 이 노래의 참맛을 알고 부르며 즐기도록하고 또 이들이 이 소리를 즐겨 부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선소리 산타령은 인정받은 전수생들이 배우는 죽어버린 보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