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Ⅰ 민중예술의 허상과 실상을 분석한다

민족예술의 현실과 장래를 생각한다




곽종원

80년대 이후에 <민중>이란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민중이란 말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백성의 무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일상용어대로 하면, 국민이라 해도 좋고 군중이라 해도 좋고 대중이라 해도 좋고 서민층이라 해도 좋고 또한 순수한 우리말로 <백성들>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왜 근자에 와서 민중이란 두 글자가 붙은 민중예술이나 민중문학이나 민중미술이나 민중연극이나 민중교육이나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고 있는가 ?

그것을 우리는 먼저 생각해봐야 된다. 해방 직후에, 우리는 신문을 읽으면서 기묘한 것을 느낀 적이 있다. 그것은 국민이란 말과 인민이란 말이 같은 말인데도 불구하고, 국민은 우익진영에서만 쓰고, 인민은 좌익진영에서만 썼기 때문이다. 박갑순이가 쓴 글 속에 인민이란 말이 나오면 그녀는 좌익편이고, 박갑돌이의 글 속에 국민이란 말이 나오면 그는 우익진영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해방직후에 좌익들이 쓰는 말은 언필칭 <진보적 민주주의>였다. 민족진영에서는 그저 민주주의이거나, 아니면 자유민주주의였는데 비해 그들은 진보적이란 형용사를 꼭 붙여서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썼다. 그렇다고 우익쪽보다 10년쯤 앞섰다면 진보적이란 말을 써도 무방한데, 그것이 아니라 케케묵은 해방전의 독재주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말로만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쓰고 있더라는 말이다.

1925년경부터 경향파 문학이 싹트기 시작하여, 카프파가 형성되고 그 후 10여 년 동안, 프로문학이 대단한 기세를 올렸다. 프로문학은 프롤레타리아문학, 다시 말하면 노동자, 농민을 위하는 문학이었다. 노동자, 농민이 자본가와 지주계급에게 착취를 당하는 비참상을 폭로함으로써, 빈민층의 권익을 옹호해주려 했던 것이다. 프로문학은 그것이 좌익들의 투쟁운동이었다.

<인민>, <진보적 민주주의>, <프로문학> 등이, 처음에 어느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와서,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한 무리를 이루고, 나가서는 커다란 집단을 형성하면서 공산주의 목적달성을 위한 행동으로 화한다.

레닌은 그가 쓴 <일보 전진 이보 후퇴> 속에서, 선발된 혁명가만이 직업적인 당의 어느 조직에 소속되어야 하고, 기타 당에 소속되지 않고 당 바깥에서 지지하는 노동자들은 광범한 서클에 소속시키되, 이런 서클에 둘러싸인 당의 중앙지도부가 그들을 통제하고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 10명 정도 소수의 직업적 혁명가만이 당원이 되고, 비밀 조직적 전투적인 조직으로 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에 따르면 오늘날 사회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공산당의 지령에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다. 레닌의 투쟁방법의 교본에 따르면, 선발된 극소수의 핵심부의 지령이 수십 겹의 베일을 거쳐서 최하부의 서클에 시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중예술이나 민중문학이나 민중미술이나 민중연극이나 민중교육이, 바로 백 프로 좌경화 운동을 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좌익의 손아귀에 놀아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부정기간행으로 85년 5월에 나온 <민중교육>을 보면,

-문제가 되는 것은 반공교육이라 불리는 군사교육인데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아픔을 주는 것이 우리의 지배 세력을 우방으로 보고 우리 민족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지요…. 아동기에 <때려잡자> 등의 잔인한 표어로써 청소년들의 잔인성을 유발시키고 핵 보유를 오히려 자랑으로 삼아 전쟁문화를 육성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반 토막 올림픽은 우리의 통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으며…. 따라서 반 토막 올림픽을 획책하는 내외의 세력을 자주적인 민족정신에 입각하여 물리쳐야 한다. 그것은 바로 민주화의 작업이다. -

위의 두 토막의 내용을 보면 이것은 완전히 좌경화 된 사람의 발언이라 아니할 도리가 없다.

해방직후 민족문학이 한창 논의될 때 그것을 정의해서, 우리 국토 내에서 사는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말과, 우리글로써, 우리 민족의 전통과 사상과 생활풍습을 순화하여 민족의식을 높이 승화시킨 것이라 추상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현 단계 우리의 민족예술은 민중이란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 공기가 매우 혼탁해 있다. 우리는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생명을 바쳐 싸웠다. 일제시대의 독재와 꼭 같은 공산독재의 굴레를 우리는 다시금 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작품이나 모든 분야의 예술작품들이, 현실고발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면으로 보면 예술은 원래가 현실의 모방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예술 장르의 작가가, 어떤 목적의식을 두고 왜곡되게 현실고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실을 실상보다 과장해서 미화시켜도 안되고, 또 반대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어떤 목적을 두고 의식적으로 나쁘게만 묘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의 민족예술보다 내일의 민족예술은, 우리 민족의 내일의 밝은 희망이 담겨져야 한다. 오늘 우리는 수백 년 동안의 묵은 때를 씻고, 새로운 문화창조를 하려는 찰나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민족은 우리의 전통에 빛나는 문화유산을 모르고 살았고, 우리 국민과 우리 자손들이 얼마나 재질과 재능이 뛰어났는지를 모르고 살아왔다. 그것은 우리의 무지에서보다 외침을 받은 기간 동안, 침략자의 압박이 너무나 지독했기 때문이었다.

한 민족이 흥하고 발전을 하려면 그 시기의 모든 예술이 활기에 차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한 시대의 민족예술이, 선이 굵고 우렁차며 활기가 넘쳐서, 가는 곳마다 노래가 흘러나오고 방방곡곡에 흥겨운 춤이 넘칠 때, 그 민족은 자연히 흥왕하고 발전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민족예술이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루 속히 민중예술의 소리가 가라앉아 사라져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