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화의 원형으로서의 한국문화
이시야마 아끼라 / 일본국 문까여자대학교 교수·도서관장
K여사님의 일념발기(一念發起)
벌써 이십여 년이나 예전의 일이라, 기억에도 퍽 희미해진 일입니다만, K여사가 처음으로 나의 연구실을 찾아오셨던 것은 아마 1962년의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의복에 관한 디자인의 이론과 역사를 연구하고 싶다고 하여 G선생의 안내로 오셨던 것입니다.
당시 나는 ○대학의 가정학부 피복학과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습니다. 일본도 제2차대전 후 십오 년이 지나, 겨우 전쟁의 피폐에서 벗어나서, 경제도 고도성장기를 향하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도쿄도(都)의 인구도 천만 명을 넘고, 레져·붐이 일고, <여대생망국론>이라고 하는 기묘한 설이 매스컴에 떠들썩하게 오르내리던 시절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일본은 그 무렵 아직 해외여행 따위는 극히 어려웠던 시절이었고, 게다가 K여사님은 자녀분들이랑 가족을 서울에 남겨 두고 오신 유학이어서 우리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일념발기(一念發起), 어지간한 결의를 갖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용기와 열의에는 탄복하여 모자를 벗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단히 근면한 노력가였던 그녀는 1965년 훌륭하게 연구를 끝내고 석사학위를 획득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때의 논문의 테마는 <고구려 시대의 관모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당시는 아직 복식사에 관한 관심 같은 것도 희박하고, 연구도 적었고, 자료 같은 것도 거의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리하여 K여사님은 이제와선 어엿한 동양복식연구원의 원장으로서 한국복식사 연구에 몰두하시고, 여러 가지 귀중한 자료와 성과를 발표하고 계셔서, 한국의 복식연구에선 이젠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노력과 양식에 대하여 나는 마음으로부터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이로운 한국 복식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내가 처음으로 한국분을 가깝게 접하고, 또 한국 문화에 흥미를 갖게 된 것도 K여사님을 계기로 해서 비롯된 것입니다. 필경 그렇게 되니 나 자신이 한국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한글 문자는 지금도 대하기 힘든 상대여서 질색입니다만….
물론, 나는 그때까지도 직접 서로 얘기해 볼 기회 같은 것은 없었지만, 재일 한국인들을 어린 마음에도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우리네들과는 다른 독특한 흰 의상을 입고, 특유의 납작한 신발을 신고 역 팔자걸음으로 유연히 걷는 모습만 어렴풋이 인상에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와후꾸(和服)을 입은 일본부인의 걸음걸이와는 완전히 정반대였던 것이 어린 마음에도 깊은 인상으로 남게된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럭저럭 하는 중에 나는 많은 한국 복식을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아직 전혀 생소한 <한국 복식 쇼>에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쇼라고 하면 거의가 보통 <패션 쇼>가 일반적이었고, 그것도 일본, 미국의 유행복이 주체였고, 드물게는 프랑스의 모델이나 패션쇼도 건너오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습니다. 후에 들은 얘기입니다만 이 한국 복식 쇼도, K여사님이나 세종대학의 S선생님 두 분께서 진력하신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때의 큼직하고 흰 표지의 훌륭한 카달로그는 지금까지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만, 시간을 갖고 천천히 찾아보면 내 서재의 어느 곳에선가 찾을 터인데 이 원고의 마감시간까지 댈 수가 없었습니다.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이 쇼가 열렸던 것은 1964년 전후,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서서 지난날의 모습을 더듬을 수는 없습니다만, 그 무렵 그곳에서 자주 쇼가 열렸던 유서 깊은 아까사까(赤坂) 프린스 호텔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저 아름답고 화려했던 여러 가지 의상이 선명한 색채와 함께 지금도 눈에 아로새겨져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인들의 쪽진 머리와 아름답고 복잡한 머리장식품,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화사한 빨강, 노랑, 초록, 남, 흰빛의 색동 줄무늬의 색채가 특히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이들 상류계급 사람들의 의상은 일반사람들의 흰옷과는 아주 대조적인 점에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 덧붙이면, 이러한 전통의상은 1984년에, 한국판은 1985년에 가서, 일본판으로는 ≪조선왕조한국복식도록≫(경도·임천서점(京都·臨川書店)), 한국판으로는 ≪조선왕조한국복식도감≫ 상하권(운경산업사(芸耕産業社))라는 타이틀의 훌륭하고 멋진 다색인쇄의 호화판으로 간행된 것은 참으로 흔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책에 대하여 나는 어느 잡지의 소개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질·양의 양면으로 말하더라도 당분간은 이만한 책의 간행을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금세기 최대의 한국복식도록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현란한 이씨왕조의 일대시대행열도(一大時代行列宜)의 두루마리그림이며 세계적으로도 유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이리하여 이 책은 역사에 남을 좋은 책이 될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일본 문화의 원형을 보다
나는 그후 재차에 걸쳐서 서울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처음은 1978년에 자매교의 초청으로, 두 번째는 1982년에 한국섬유산업연합회와 각 대학의 초청으로 <복식과 디자인>에 관한 강연을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 다 3, 4일 정도의 짧은 시간의 체험이었고, 태반은 큰 도시에 국한되었었기 때문에 결코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최초의 체험은 참으로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최근의 서울은 1988년의 올림픽을 겨냥하여, 근대화를 향해 급속한 변모를 이루고 있다는 얘기들을 들었습니다. 더욱 더 도쿄와 별 차이가 없는 도시정경에 가까워지고 있음이 예상되고, 일찍이 과거에 1964년의 도쿄 올림픽에서도 똑 같은 체험을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이전의 서울을 견학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와선 대단히 귀중한 체험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의 방한 시엔, 각계의 인사 여러분과 많은 유학생 제자들이 몰려와 주셨던 것은 기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중에도 현 이화여대의 C선생님, T대학교의 P선생님, F대학교의 Y선생님, 그 외에도 여러분께 대단히 폐가 많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여러분, 그후에도 몸 성히 활약하고 계시는지요 ?"
아무튼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첫 인상은 복식에 국한되지 않고 문화의 모든 부문에서의 한일의 유사성이며, 그곳에는 항상 일본 문화의 원천 내지는 원형에 해당하는 것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서울주변의 산들은 수목이 듬성듬성 있을 뿐인 바위산이고, 그것들이 서울거리에 독특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습니다만, 왕궁이나 사원의 고전 건축물엔 일본의 고대 건축의 원형을 보는 듯했고, 박물관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문화나 공예품 따위에선 더더욱 그런 느낌이 깊었습니다. 또 유교에 뿌리박은 여러 가지 의식이나 예의범절에도 공통된 원형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부인네들이 실내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는 모습 같은 것은 일본에선 헤이안(平安)시대 이후 사라져 없어진 자세입니다만, 고대는 아주 똑 같은 자세가 일반적이었다는 것을 상기했었습니다. 사실, 그보다도 더 우리나라의 아스까(飛鳥), 나라(奈良)시대의 복식은, 특히 한국 부인의 치마저고리에 그 현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에 놀라고 있는 터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증거는, 일본의 내양(奈良)의 정창원(正倉院)에 있는 <조모입녀도병풍(鳥毛立女宜屛風)> 즉, 이른바 <수하미인도(樹下美人圖)>에서 엿볼 수가 있고, 거슬러 올라가서는 1972년 내양(奈良)의 아스까(明日香)촌(村)에서 발견된 고송총(高松塚) 고분벽화의 서쪽 벽 북쪽의 여인군상(女人群像)의 그것과 한국 고구려의 수산리(修山里) 고분에서 볼 수 있는 채상(彩裳)의 부인과의 유형에 의해서도 여지없이 증명됩니다.
온 가족이 모두 한국팬
마지막이 되었습니다만, 나는 항상 TV 방송의 일기예보의 화면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밀접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고, 옛날에는 그 구름의 운행방향과 똑 같이 문화가 이동해왔다는 사실을 요사이 곰곰이 음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일본의 TV에선 화면의 좌단에는 중국대륙이, 그리고 그 우측, 화면의 좌측 위쪽엔 한반도가, 그들 대륙과 한반도를 활처럼 에워싼 모양으로 일본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때 구름은 언제나 좌측의 중국대륙으로부터 한반도나 일본열도를 지나서 태평양으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문화면에서는, 이제까지 항상 일본열도가 일종의 막다른 골목 같은 역할을 하여 각종 문화가 축적되어 와서, 어떤 이는 그것을 <잡종문화>라고도, <복합문화>라고도 부른 것입니다. 어쨌든 과학기술이 한층 더 발전을 보이고, 교통통신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오늘날엔 이들 인접한 여러 나라들은 이미 완전히 이웃마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선, 나보다도 집사람이나 딸애가 훨씬, 장기간에 걸쳐서 수차 귀국을 방문하고 있으며, 훨씬 더 한국 사정에 밝은 전문가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NHK(일본방송협회)에선 작년부터 한국어의 어학방송을 시작하였으므로 한국어를 말할 줄 아는 일본사람 수도 늘어날 것입니다. 딸애는 대학시절 제3외국어가 한국어였으며, 지금도 출근하기 전과 심야의 한국어 방송을 빠뜨리지 않고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끝맺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