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별산대놀이
서연호 / 고려대 교수
놀이의 성립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는 양주별산대놀이라는 탈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탈놀이라고 하면 놀이꾼이 얼굴에 탈을 쓰고 악사들의 음악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대사나 몸짓을 하면서 놀이판에 모인 구경꾼들과 함께 어울려 즐기는 놀이를 일컫는다. 일찍부터 황해도 지방에서는 탈놀이와 같은 뜻으로 탈춤이라는 말을 써 오고 있다. 예컨대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 등이 그러하다. 탈놀이나 탈춤에서 '놀이'나 '춤'의 본래적인 의미는 연행(演行)되는 예능, 즉 현대식 표현으로는 공연예술이라는 넓은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탈놀이는 좁은 의미의 가면극이 아니라 탈을 표현의 도구로 하는 종합적인 연행 예능을 지칭한다.
산대놀이라는 명칭을 씀에는 불구하고 유양리에서는 산대를 찾아볼 수 없고 또 일찍이 산대를 만들어 공연하였다는 기록이나 증언을 확인할 수 없다. 산대는 일명 산붕(山棚)·채붕(綵棚)·鰲山이라 하였으며 나무로 단을 엮어 만든 가설무대인데, 산과 같이 높은 무대라 하여 산대라 불렀던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신라 진흥왕 때 시작된 팔관회에서 산대를 설치한 이후 조선 영·정조 때까지 주로 국가적인 규모의 행사에서 관습으로 이어져 왔다. 민간에서도 산대를 만들어 그 위에서 어떤 공연을 하였다는 증거는 아직 찾을 수 없다. 산대놀이 대신에 야희(野戱)라는 용어를 쓰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민간의 놀이는 야외공간에서 하는 것이 상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양주별산대놀이는 그의 선행 예능이라 할 수 있는 산대놀이와 일말의 관련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명칭일 뿐, 그 놀이가 곧 산대에서 놀았던 본디놀이 그대로의 모습이라 보기는 어렵다.
별산대놀이라는 명칭에서 '別'자가 갖는 뜻에도 주의하게 된다. 별산대는 본산대(本山臺)를 모방하여 별도로 만든 것이기에 그럼 명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조 시대에는 궁중에 산대도감이라는 관청이 있어 산대놀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는데, 그 도감과 관련을 맺고 공연을 해 온 놀이패를 이른바 본산대라 지칭해 오고 있는 것이다. 본산대패에 소속된 놀이꾼들은 팽인(碶人)이라 부르는 천민계급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녹번리·구파발·남대문 밖의 큰고개·애오개·사직골 등지에 살면서 궁중에서 놀이가 있을 때에는 도감의 지휘에 따라 행동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수효가 모두 얼마였는지, 혹은 그들이 아닌 별도의 본산대패가 다른 곳에 존재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런데 본산대패에 소속된 놀이꾼들의 생계는 도감에서 전적으로 해결해 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연이 있을 때만 쌀이나 천 등을 지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계방(契房)이라는 증명서를 내주어 놀이꾼들이 그것을 지니고 각처를 돌아다니며 돈이나 곡식을 거두어 생활하였는데, 증명서에는 봄에는 선인(蟬印)을 가을에는 호인(虎印)을 찍어 주었다고 한다.
국가적으로 산대놀이를 하는 것이 유교적인 통치이념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재정에도 적지 않은 손실을 가져온다는 논란이 진행되던 중, 드디어 영조·정조시대에 이르러 산대를 설치하는 제도가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산대도감과 관련을 맺고 있던 놀이꾼들은 관을 배경으로 하여 생계의 일부라도 도움을 받아왔던 지금까지의 혜택을 상실하게 되었고, 점차 변모해 가는 사회적 여건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사회적인 냉대로 인하여 무척 고된 삶을 누려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애초부터 산대놀이의 담당자는 천인(관노) 예능인들이었고, 그 관중 또한 대부분이 서민계층으로서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놀이가 발전되어 온 것이나, 한편으로는 신라시대 이후 국가적인 규모의 공연을 통해 부단히 중앙과 지역 사이에 영향관계가 성립됨으로써 그 표현의 방식을 개선·세련시켜 왔다고 할 수 있겠다. 본산대패들이 그들의 예능을 굳이 나례도감(儺禮都監)에서 관장하던 나례패들의 예능과 구별지어 우월감을 드러내었던 사실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공의적(公儀的)인 산대놀이의 폐지 이후, 적어도 19세기 말엽까지 서울 주변에 있었던 탈놀이패로는 녹번리산대·구파발산대·애오개산대·노량진산대·퇴계원산대·사직골산대(산대를 일명 딱딱이패라고도 하였음) 등을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본산대패의 주거지와 동일한 지명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지속적인 놀이의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대강이나마 알아볼 수 있고, 그러기에 그들을 여전히 본산대놀이꾼으로 동일시하여 온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 중 특히 구파발산대는 1920년대 말엽까지도 연희본의 채록이 가능할 정도로 그 전승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1) 戱舞臺打令……泰西에 一史家者流 一廛奇談을 演出하얏鏅韡… 萬國의 風瀾을 絃起폁며 群雄의 浪花를 硽砄함을 比에 設譬폁얏기로 吾們은 山寺에 納凉폁다가 山臺都監의 演戱를 偶覽폑이 一套滑稽를 酒後에 叫奇폁노라……
(2) 閒雜遊戱……西江閒雜輩가 阿峴等地에셔 舞童演戱場을 設폁 엿鏅韡 觀光폁鏅 人이 雲集하얏거늘 警務廳에셔 巡檢을 派送폁야 禁琂한즉 傍觀폁든 兵丁이 破興됨을 憤痛히 녁이어 該巡檢을 無數亂打폁야 幾至死境한지라 本廳에셔 其閒雜幾許名을 捉致폁고 該演戱諸具를 收入폁야 火폁엿다더라.
인용된 기록은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초의 사정을 알리는 기사이다. (1)에서의 산대도감연희는 이른바 산대놀이를 지칭하는 것인데, 어지러운 세상사를 산대놀이에 비유할 정도로 놀이에 관한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2)에서는 놀이패의 예능이 정부 당국에 의해 탄압을 받는 광경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아현은 속칭 애오개로서 애오개산대의 본거지인 점으로 미루어, 서강놀이패뿐만 아니라 애오개산대도 이 당시에 어떤 탄압을 받아 소멸돼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해 본다.
양주탈놀이의 성립에 대하여는 애오개(아현)산대를 모방하였다는 설과 사직 골산대 혹은 구파발산대를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설이 전한다.
(1) 경기도 양주군내 별산대라는 것이 있으나 그 연혁은 육·칠 년 전 그때까지 아현의 일단이 순연시에 이를 본받아 시작된 것이며……
(2) 경성 북방으로 15마일의 거리에 있는 양주의 별산대는 이상과 같은 아현산대의 순회 흥행방식을 모방한 것으로서 양자는 전적으로 동일한 계통에 포함된다.
(3) 양주읍에서는 약 백 이삼십 년 전부터 연중행사를 4월 8일, 5월 단오를 기하여 한양 사직골의 딱딱이극을 초청하였으나, 사직골 딱딱이패극은 벌써 타지방과 약속되었기 때문에 양주에서는 놀이를 실패하고 못하게 되므로 불편한 감을 느끼게 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양주에서도 神明이 過한 자들끼리 가면을 만들어 실연한 결과 춤·弄희·才談 등이 한양의 딱딱이패 이상으로 훌륭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모방한 것이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양주에 정착된 것입니다.
(4) 내가 조중순에게서 들은 바로는, 양주에서 구파발 산대패를 초청하여 놀려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게 되자 양주의 본바닥 사람들이 스스로 탈을 만들고 춤을 추어 별산대를 놀게 되었다고 한다.
(5) 양주에서 산대놀이가 시작되기는 약 6, 70년 전 임진왜란 후 양주골에서 전석기란 목사가 임란 당시 진어사 겸 목사로 부임하여 군사와 관민을 위로하기 위하여 한양에서 본산대를 초청한 것이 시초가 되어 매번 행사로 4월 8일, 5월 단오, 팔월 추석, 국경일, 기우제를 기하여 공연을 하였고……
(1)의 자료를 기준으로 하면 19세기 중엽이 놀이의 성립시기가 된다. (3)의 자료로는 19세기 초엽이 성립시기가 된다. (5)의 자료에 의하면 양주에 놀이가 성립되기 이전에 본산대패의 순회공연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위의 자료에서 애오개산대·사직골산대·구파발산대는 각기 지역적인 차이는 있으나, 모두가 이전의 본산대패와 관련이 있는 지역이니 만큼, 결국 양주탈놀이의 성립은 국가적인 산대놀이가 폐지된 이후 19세기 초·중엽에 본산대패 계통의 놀이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주의 탈놀이에 <별산대>라는 특유한 명칭이 붙게 된 근거는 이러한 사정이 게재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놀이의 환경
탈놀이가 전승되고 있는 현재의 유양리에는 184세대에 934명의 인구와 150여의 가옥이 있다. 농사업이 70세대, 양계업이 2세대, 토끼양육업이 3세대, 기타 세대는 공무원이나 잡일을 해서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다. 수도권 그린벨트로 인하여 개발이 제한되어 있는데다가 소득 원이 별로 없어 인근의 주내면 중에서도 빈촌에 속하는 지역이다. 마을의 주민들이 옛날과는 달리, 놀이패의 공연을 위해서 계를 조직하거나 기타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유양리가 옛 양주고을의 본바닥이다. 남으로 한성, 북으로 연천, 동북으로 동두천, 동으로 포천, 서쪽으로 문산 방면으로 통하던 교통의 요새지며 한성 북쪽에 있는 가장 큰 도시로서 목사가 주재하던 고을이었다. 전성시기에는 1천여 호의 기와집이 관아를 중심으로 즐비하였고, 행정과 교통의 중심지였기에 여행자들의 왕래와 상거래가 활발하였다.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양주군청이 의정부로 옮겨지면서(1920년경) 도시의 기능을 잃기 시작한 양주는 6·25전쟁시 한때 공산군들의 병영이었던 관계로 유엔군 측의 심한 폭격을 입게 되었고, 도시 전체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는 극히 적으며 집들은 모두가 새로 지은 건축물들뿐이다. 6·25이후 주내면 면사무소와 경찰지서마저 남방리로 이전하게 되어 현재와 같이 조용한 마을로 변하게 되었다.
양주고을에 탈놀이가 성립되고 지속적인 전통을 이을 수 있었던 환경적 요인은 몇 가지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다. 첫째로는 도시 경제적인 기반을 들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양주는 행정·상업·교통의 중심지로서 인근의 다른 촌락에 비하여 경제적인 여건이 유리하였기에 놀이에 필요한 비용과 놀이패의 생활비 염출이 그런 대로 가능하였다. 이 경우는 같은 시기에 탈놀이를 놀았던 봉산·동래·통영 등의 지방도시와 흡사한 조건이라 하겠다. 놀이꾼들이 놀이만으로 생계비를 충당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정규적인 공연시기를 전후로 하여 적지 않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또한 그러한 지원이 밑받침이 되어 다른 지역으로 순회공연을 나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큰장이 섰던 시장 경기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빈번하게 왕래하였으므로, 놀이는 폭넓은 관객층을 대상으로 하여 비교적 흥청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지속성을 누릴 수 있었다.
둘째로는 옛날 한성 주변에 왕성했던 산대놀이의 영향을 지적할 수 있다. 양주탈놀이의 선행예능이라 할 수 있는 산대놀이는 국가적인 행사에서 공의로서의 역할을 했던 세련된 수준과 우월감과 함께 조선조 후기의 민간의 사회의식을 가장 전형적으로 반영해 주는 양식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관중들의 커다란 호응을 받게 되었다. 앞서 소개한 자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주의 사람들은 일찍부터 그러한 산대놀이를 초빙하여 놀아 왔으므로 놀이 전반에 대한 인식과 동화감이 팽배해 있었다고 보겠다. 따라서 놀이방식이나 놀이판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양주의 놀이판(야외)에서 신명이 좋은 놀이꾼들이 산대놀이를 모방한 새로운 탈놀이를 만들어 공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놀이는 한때 "양주는 춤에 미쳤다"할 정도로 성행하였다 한다.
셋째로는 관아의 악사청(樂師廳)을 기반으로 한 음악적인 지원을 들 수 있다. 놀이에 사용되는 악기는 이른바 삼현육각으로서 피리(2개)·젓대(1개)·해금(1개)·장고(1개)·북(1개) 등으로 편성되며, 반주음악으로는 잦은한닢·영산회상(靈山會相)·염불곡·타령곡·굿거리곡 등이 연주된다. 양주 탈놀이는 이러한 악사편성과 반주음악을 떠나서는 정상적인 공연을 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타악기만으로도 공연이 가능한 오광대탈놀이나 야류탈놀이의 경우와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양주의 놀이꾼들은 주로 관아의 잡역에 종사하던 하층인 (천인)들이었는데, 이러한 역할관계로 하여 목사청에 소속되었던 전문적인 악사들의 음악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음악적인 조화로 인하여 놀이도 전아한 세련미를 창출해낼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로는 놀이가 세시풍습이나 종교적인 의식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점도 요인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양주의 탈놀이는 매년 행사로 음력 3월 3일의 삼짇날, 4월 8일의 초파일(국사당제(國師堂祭)를 지냈다), 5월 5일의 단오(성황당제(城隍堂祭)를 지냈다.), 8월 15일의 추석, 9월 9일의 단풍놀이 등에서 놀았고, 그 이외에는 젊은이들의 봄놀이와 가뭄 때의 기우제에서도 놀았고, 관아에서는 제석(除夕)에 가면을 쓰고 동헌 6방을 돌며 잡귀신을 쫓으며 평안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탈놀이가 세시풍습이나 종교적인 의식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공연물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놀이의 사회적인 기반과 예능적인 인식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고 하겠다. 신앙적인 의식은 이처럼 우주적인 시간과 관련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놀이의 공간, 놀이의 도구인 탈과도 관련을 맺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양주 탈놀이의 놀이판은 사직골(방언으로 새젖골이라 한다)이었는데, 그곳에는 사직당(社稷堂)이 있었고 그 당집 앞의 넓은 마당에서 공연하였으며, 관중들은 당집 주변의 비스듬한 산비탈에서 구경하였다 한다. 토신(土神)이나 곡신(穀神)을 제사지내던 사직골에서 탈놀이가 공연되었음은 한편으로 놀이의 신앙적인 측면을 알게 해 준다. 이러한 경우는 신앙적인 공간과 놀이의 공간에 일치성을 보인 예가 된다. 공간뿐만 아니라 눈끔적이·연잎·신할아비·미얄할미 등의 가면과 상좌과장의 사방치기춤이나 마지막과장의 진오귀굿은 모두 신앙적인 성격과 관련이 깊은 요소들이다.
어떤 사람이 가면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그 집에 병이 전염되자 무당이 말하기를 '가면 때문이다'하였다. 그 말을 듣고 즉시 가면을 들판에 버렸더니 과연 병이 나았다. 수개월이 지난 후 그 가족중의 한 사람이 마침 밭가를 지나다가 전에 버린 가면 위에 피어난 버섯을 잘못 알아보고 따다 삶아 먹었다. 한 송이를 먼저 먹자 갑자기 웃으며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 마치 미치광이 같았지만 모두 우연으로 여기고 그다지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에 먹은 사람도 모두가 웃으며 일어나 앞사람과 같이 춤을 추었다. 춤이 그친 후 물으니 '처음 먹자마자 흥이 저절로 나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이상은 가면과 신앙과 놀이의 관계를 암시해 주는 민담이다. 탈(가면)을 탈(병)을 부를 뿐만 아니라, 탈놀이(가면극)를 통해서 탈(병)을 쫓아낼 수도 있다는 뜻을 넌지시 말해 준다. 앞서 언급한 양주 탈놀이의 신앙적 성격도 이러한 민간 신앙적 의식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러한 의식이 탈이나 탈놀이의 전승에 중요한 명분과 계기를 마련해 왔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섯째로는 오랜 신분제사회 속에서 성숙된 일반 서민들의 상층문화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식은 탈놀이의 발전과 지속성을 가져오게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불교와 유교의 사회적 산물로 나타난 승려문화와 양반문화는 일면 긍정적인 가치로 수용되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측면에서의 부조리와 타락, 서민들에 대한 횡포와 억압은 말 그대로 민중들의 사회의식을 점증시켜 주었다. 특히 이러한 비판적·저항적 사회의식은 도시적 분위기 속에 살았던 상인층과 그곳의 관아 주변에서 양반들의 영향력을 항시 직접으로 받아야 했던 잡역부나 관노들에게서 강하게 성숙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관리들에게 항상 수탈을 당해야 했던 상인들과 인격적인 천대를 받아야 했던 하층인(천인)들로서는 탈놀이와 같은 행위를 통한 의지의 표출·표현이 매우 값진 삶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양주 탈놀이도 이러한 측면에서 예외라 할 수 없다.
놀이패와 놀이꾼
양주 탈놀이를 전승·발전시키는데 당대의 문화적 환경은 놀이의 기본적 조건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기본적 조건과 더불어 놀이를 담당해온 놀이패의 내면적 조건, 즉 패의 조직이나 놀이꾼의 기능, 놀이의 전수체계 역시 중요한 요소로써 작용하여 왔다.
연희자들은 관아의 잡역에 종사하던 하층인들로서 도중(道中)이라는 조합을 조직하고 있었다. 도중은 11인 이상으로서 세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기능이 가장 뛰어난 4인을 영위(領位)로 칭하여 노승(老僧)·소무(少巫)·노옹(老翁)·노양반(老兩班)의 역을 맡았고, 다음을 수석(首席)이라 하여 연엽(蓮葉)(하늘의 정기)·건목(咖目)(땅의 정기) 등 2인이 맡았으며, 다른 5인은 오상(五常)이라 하여 완보(完甫)(승려의 우두머리)와 기타의 역을 맡았다. 그러나 도중의 대표자는 항시 완보의 역을 맡았으므로, 그들의 계급에는 기능을 표준으로 한 내부적인 것과 연령을 기준으로 한 대외적인 것이 양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이 밝혀진 도중이라는 조합은 양주 탈놀이를 전승시켜 온 데에 중요한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적으로는 기능이 우수한 자가 조직의 중심이 되고 외부적으로는 나이 많은 원로가 단체의 대표를 맡아 운영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이중적인 조직체계를 유지하려고 했음은 예능의 기능을 높이고 경영의 합리화와 놀이의 전승을 동시에 추구하려는 의도였을 것이고, 이러한 체계로 인하여 다른 탈놀이에 앞선 월등한 예능의 수준을 최근까지 전승시켜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노장과 소무, 신할아비와 샌님의 역할을 기능이 가장 우수한 놀이꾼에게 맡도록 하였다는 것은 놀이 전체의 구조로 보아 수긍이 간다. 비단 양주의 경우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탈놀이에서는 노장의 파계와 영감·할미의 갈등, 그리고 양반의 타락과 무능이 중심적인 극적 내용을 이루고 있기에 그러한 의미를 충실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응당 그들의 기능이 중시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할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좀더 연극적인 해석을 확대한다면 노장에 대응하는 취발이, 신할아비에 대응하는 미얄할미, 샌님에 대응하는 말뚝이 등이 지니는 역할의 중요성도 아울러 이해된다. 그러나 문제는 <기능>이 강조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탈놀이의 표현방식은 대사(재담)보다는 춤이나 몸짓이 위주가 되기에 각기 맡은 바의 역할을 춤이나 몸짓을 통해 완성시킬 수 있었던 놀이꾼을 그들은 훌륭한 예능인으로 간주하였고, 그중 가장 표현에 능한 4인으로 하여금 세 과장을 이끌어 가도록 연출하였던 셈이다.
양주의 놀이꾼들이 어떤 신분의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문제는 좀더 논의를 필요로 한다. 앞에서 산대놀이의 담당자는 평인이라는 천민이었고, 양주의 탈놀이는 관아의 잡역에 종사하던 하층인 들이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자료들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1) 조선왕조 말엽 이을축(李乙丑) 또는 그 밖의 거사(居士), 한량들에 의하여 기획·재현됨으로써 별산대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 듯싶다.
(2) 인조시대에 공의(公儀)로서는 일시 중단되었으나 실제로는 의연히 (산대가) 공연되고 있었다. 지금부터 2백년 전에 그것이 양주에 전파되어 양주읍내에서는 이속(吏屬) 등이 연면히 전승시켜…
(3) 양주골에서 신명이 과한 자들끼리(주로 관아의 하리배(下吏輩) 즉 아전) 사직골 딱딱이 패를 본떠, 가면 기타를 제작하고 실연한 결과…
(1)에서 거사와 한량은 사당패나 부유한 건달을 지칭하는 개념으로서 산대놀이패와 다소 거리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료 자체가 집필자 자신의 추측에 의한 것이기에 신빙성이 없다. (2)에서의 이속은 관아에 딸린 구실아치들을 총칭하는 것이기에 한계가 애매하다. (3)에서 아전이라고 하면 중인 계층의 관리들이다.
앞에서 양주 탈놀이패의 사회적 신분을 관아의 잡역에 종사하던 하층인(천민)으로 규정한 것은 일본인 학자 秋葉의 조사에 의거한 것인데, 그의 기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거에서 신빙성이 있다. 일찍이 경성제대의 심리학과 학생으로서(1926년 1년생) 같은 대학의 사회학교수였던 秋葉의 통역일을 거들어 주며 양주별산대놀이와 봉산탈춤의 연희본을 직접 채록한바 있는 任晳宰는 두 연희본의 차이점을 통해 놀이담당층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양주의 경우는 비어·속어·문맥상의 무리가 많은데 비하여 봉산은 식자들이 많이 쓰던 한문식 표현이 지루할 정도로 다량 노출되고 있는데, 이러한 언어적인 차이는 봉산이 순수 아전들 중심의 놀이였던데 반해 양주는 다만 아전들의 지원이 있었을 뿐 놀이는 천역부들이 중심이 되어 놀았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하였다.
한편, 秋葉과 같은 시기에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교수로서 양주별산대를 조사한바 있는 高橋亨도 놀이꾼을 '전적으로 무교육한 계급'이라고 함으로써 전기 秋葉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어쨌든 교양이 없는 자들이 지식정도가 낮은 대중을 상대로 공연하는 극이므로 전체적인 내용이 아주 저속하여 도저히 고급스런 유머에는 미치지 못한다. 또한 대사 중에는 근년에 이르러 첨가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있는데 고미(古味)를 상한 곳이 많다. (중략) 이것은 필경 조선의 학자·작가들이 각본이나 소설을 극도로 천시하여 누구도 그것에 손을 대지 않고 전적으로 무교육한 계급에게 맡겨 놓은 결과인 것이다.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조선조의 신분사회가 급격히 무너지게 되면서 놀이꾼들의 신분에도 변화가 생겼다. 양주의 본바닥 사람들이었던 놀이꾼들은 대부분이 농사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였다. 그들은 토지가 별로 없었으므로 자작농이기보다는 소작농으로써, 혹은 머슴이나 품삯일로써 고단한 생활을 하였으며 농한기를 이용한 순회공연을 통해 약간의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같은 놀이패였다 하더라도 생활방식을 달리 한 예외의 인물도 있었다. 趙鍾洵(1929년, 62세)은 탈놀이의 전과장을 출 수 있는 대표적인 놀이꾼이었는데 놀이의 공연이 점차 없어지게 되자 탈을 팔기 위해 전전하였다 한다.
1929년 9월 그가 마지막 탈놀이를 하였을 때 그의 주소지는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리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실로 보아 그는 양주의 관아가 폐쇄되자 그곳을 떠나 서울 근교인 이태원으로 이사하여 어렵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金r 星泰(1894∼1962)는 왜장녀 역을 잘하였던 金盛運과 만신으로 소문났던 무녀 사이에서 태어난 놀이꾼으로 노장과 취발이역을 잘 하였으며, 부친과 李昌裕에게서 배꼽춤을 배워 왜장녀역에서는 관중의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그는 장구통 만한 배를 드러내 놓고 미친 듯이 날뛰며 춤을 추었는데 매우 익살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조선조의 신분사회에서 천인으로 취급되던 사람들이 일제시대를 맞아 소위 출세를 한 경우가 많았던 것처럼, 한 때 그들의 헌병보조원 노릇을 하면서 자신을 과시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후 순사도 하였다. 현재의 기능보유자인 金相容(1926∼ )은 그의 아들이다.
놀이꾼은 아니었으나 가면제작과 후원자로서 金成大 (1907∼1970) 역시 특이로운 존재였다. 3대에 걸친 고리대금업으로 재산을 모은 집안의 3대 독자였던 그는 양주 탈놀이의 후원자로서 가장 뚜렷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일제시대까지 천석지기의 지주였으나 광복 이후 토지개혁으로 많은 땅을 잃었다. 그러나 원수원은 남아 작고 시까지 놀이패를 도와주었다. 1962년 김성봉에게서 배운대로 탈을 만들고, 연희본을 충실하게 채록·정리하여 6·25이후 인멸되어 가던 양주 탈놀이를 복원시키는데 중심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는 자신의 과수원에서 삯일을 하던 유경성에게 가면제작법을 가르쳐 오늘날까지 전통을 잇게 해 주었다.
양주의 놀이패에 소속되었던 놀이꾼으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인물은 아래와 같다. 연대는 그들의 전성시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먼저 19세기 초·중엽의 인물로는 이을축(노장 역, 가면제작)·노형운(소무 역, 상좌 역)·유인혁(취발이 역, 옴중 역)이 알려졌고, 19세기 중·후엽의 인물로는 신복흥(노장 역, 취발이 역, 가면제작)·고영만(노장 역)·박광현(상좌 역, 말뚝이 역)·박래원(?)·김달원(옴중 역)이 알려져 있다. 19세기 후엽부터 20세기 초엽의 인물로는 윤태균(가면제작)·이재한(가면제작)·김성운(왜장녀 역, 가면제작)·김수안(소무 역, 상좌 역)·노익조(샌님 역)·석성훈(옴중 역, 취발이 역)·이창종(왜장녀 역, 목중 역, 샌님 역, 말뚝이 역, 가면제작)·정한규(신할아비 역, 포도부장 역)·권봉국(노장 역)·이규서(취발이 역) 등이 활약하였다.
일제시대 전기에 활약하던 인물로는 조종순(취발이 역, 완보 역)·권진구(상좌 역)·이건식(노장 역)·나순남(소무 역)·함준삼(상좌 역)·김순봉(상좌 역)·이중철(옴중 역) 등이 있고, 후기에 와서는 이학선(노장 역)·박기득(소무 역, 상좌 역)·박묵하(목중 역)·김창치(옴중 역)·이우용(?)·박준섭(취발이 역, 옴중 역)·김성태(노장 역, 취발이 역, 가면제작)·박조근(상좌 역, 소무 역, 애사당 역)·이장손(목중 역, 노장 역)·박동환(목중 역, 노장 역, 취발이 역)·김성대(가면제작) 등이 활약하였다.
1964년 12월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까지 생존하여 기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은 사람으로는 서정주(취발이 역)·신순봉(소무 역, 상쇠잡이)·고명달(노장 역. 눈끔적이 역)·석거억(목중 역, 피리)·함춘길(장고)·유경성(소무 역, 왜장녀 역, 가면제작)·박교응(상좌 역, 완본 역, 말뚝이 역)·김상용(목중 역, 원숭이 역)·노재영(옴중 역, 취발이 역) 등이 있고, 그후 이병권(상좌 역, 목중 역)·김순희(소무 역, 애사당 역) 등이 추가로 지정 받았다.
탈의 제작
양주의 탈놀이와 탈이 紙上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고 학술적인 조사를 갖게 된 계기는 1929년 9월의 조선박람회에서의 공연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1) 조선박람회는 예정대로 12일부터 개장하였는데 오전 9시에는 경북궁내 근정전에서 총독·총감이하 다수관민 합집하에 조선박람회 개장식이 있었으며 오후 1시부터는 일반에게 공개하였는데…
(2) 조선민간극으로 유명한 <탈>은 시(時)를 일허 거의 전부가 멸종되다십히 되어 감으로 멧해 안 가서는 아조 볼 수도 없게 될 터이다. 현재 이 <탈>에 쓰는 도구를 보존하여 잇는 양주읍내 <탈패>(약 30인)는 박람회장에 여러 번 흥행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 도구 전부를 모다 방매(放賣)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하자 총독부박물관에서는 그 도구 전부를 매수(買收)하는 동시에 이를 활동사진으로 박아서 영구히 보존하야 두기로 작정하고 오는 8일 오전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경북궁내 총독부 박물관 사무소에서 전긔 <탈> 배우 30명을 청하야 촬영할 터이라는데 이로써 조선 고유의 민간극인 <탈>은 활동사진으로 영구히 보존될 터이더라.
(3) 아마 저 재작년 박람회 때에 연출한 것이 조선가면극의 마지막 막일 줄만 안다. 그때 그들 役者들은 몇 십 년 동안 사용하던 가면, 의상, 전부를 팔아버리고 해산하고 말았다.
(4) 경복궁에서 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양주의 산대극패를 초빙해 옛부터 전해오는 그들의 예능을 공연한 적이 있었다. 그들도 그 공연이 대중을 향한 최후의 공연임을 각오하고 공연 후에, 사용하던 가면이나 의상을 팔아 버리는 한편 패거리도 해산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 가면은 지금 경성제국대학 토속연구실에 수장되어 있다.
(1)(2)(3)(4)의 기록을 통해서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탈이 양주의 놀이패가 소장했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2)에 언급된 필름자료는 현재까지 확인된 바 없다. 임철재는 (2)의 기사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하여 필름으로 촬영한 바가 없을 것이라 하였다. 당시 秋葉 교수와 함께 경복궁 자경전 오른쪽 마당에서 놀던 공연을 관람한 적도 있었으나 총독부 박물관에서 영화를 찍었다는 확언은 듣지 못하였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는 나무 탈과 바가지 탈의 두 계통이 전하는데, 나무 탈의 목질은 피나무로서 그 위에 밀가루떡 반죽으로 얼굴의 형체를 만들어 붙인 다음 채색을 한 것이다. 이 탈의 제작자가 이을축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증할 만한 근거는 아직 없다. 탈의 뒷면에 매수자(買收者)가 적은 것으로 보이는<양주군(陽州君) 퇴계원리(退溪院里) 산대도감사용(山臺都監使用) 경복궁조영시(景福宮造營時)>라는 명기가 주목을 끌게 한다. 퇴계원에는 19세기 산대놀이패가 있었기에 그 놀이패가 경복궁을 짓던 19세기 중엽에 궁중에 초빙되어 축사의(逐邪儀)의 일환으로 탈놀이를 하였을 가능성이 짙고, 그 탈은 그때 사용되던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가지 탈은 바가지 위에 밀가루떡 반죽으로 얼굴의 형체를 만들어 붙인 다음 채색을 한 것이다. 신복흥이 만들어 놀던 것인데, 박람회 공연이 끝난 후 나무 탈과 함께 방매되었다. 당시 양주 놀이패를 주도했던 놀이꾼은 조종순이었는데, 그는 이전과 달리 탈놀이가 쇠퇴해 가는 것을 한탄하고 있던 중, 박람회 공연을 계기로 놀이패를 해산해 버리기로 작정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나무 탈과 바가지 탈 각기 한 벌씩을 대학박물관에 팔게 되었던 것이다. 박람회가 개최되기 이전(1927∼8년경)에 성북동 마전장(현재 간송미술관 주변에 있던 잔디밭)에서 양주 놀이패의 공연을 처음 보았던 임철재의 회고에 의하면, 놀이마당에 구경꾼도 별로 없는 데다 놀이의 내용을 알 수 없어 별로 흥미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어쩌면 놀이패들끼리 놀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쇠퇴해가던 놀이마당의 분위기를 일면 알 수 있게 해 준다.
1930년대 초에 들어와서 양주에서는 다시 탈을 제작하게 되었다. 윤태균·이재한·김성운·이창유 등이 주동이 되어 만들게 되었는데, 이전의 결점인 서해(鼠害)를 극복하기 위하여 바가지 위에 老松皮로 코·눈썹·턱 등을 깎아 붙이고, 삼노끈으로 주름살을 만들어 붙인 다음, 그 위에 한지를 바르고 채색을 입히는 방법이 채택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탈은 6·25때 불에 타 없어질 때까지 놀이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노송피(老松皮)를 이용하는 방법은 현재에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1951년 11월 金成大의 후원으로 金星泰는 옛날의 기억을 더듬어 다시 탈을 만들어 소수의 인원만으로 놀이를 복원하였다. 1962년 3월 김성태가 사망한 이후에는 김성대가 탈을 만들었다. 김성태가 만든 것은 후에 성균관대학 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고, 1970년 4월 김성대가 사망한 이후에는 그의 밑에서 제작법을 익힌 유경성이 현재까지 탈을 만들어 오고 있다. 김성대가 만든 탈의 한 벌은 유경성이 집에 보관하고 있으나 낡아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라 한다.
앞서 양주 탈놀이의 사회적 배경에 대하여 몇 자 언급하였거니와 탈이 지니고 있는 의미나 상징성에 관하여 현지의 놀이꾼들이 술회한 바를 집약시켜 보기로 하겠다. 그들이 밝힌 놀이의 유래설에 의하면 희축요귀(戱逐妖鬼)하고, 주(紂)와 달기(嫣己)의 행세를 했던 신형과 소무를 비판하며, 중국 사신(使臣)의 접대에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산대를 설치하고 놀았던 것이 원인이라 하였다. 요귀를 쫓아내기 위해 놀이를 하였다는 것은 보다 근원적으로 원시신앙과 탈의 관계로 소급될 수 있다. 신돈의 탈선을 비판하기 위함이란 우리의 탈놀이 전반을 주도해 가는 승무나 승놀이에 대해 일단의 증거제시에 속한다. 외사(外使)의 접대비용을 절감한다는 명분은 실상 산대놀이가 천박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유익하게 쓰일 수 있고, 외국인들에게 민족적인 긍지를 드러낼 수 있는 대표적인 예능임을 넌지시 강조해 두기 위한 취지로 해석된다. 세 가지 이유가 모두 탈놀이의 사회적 가치를 정당화시키려는 놀이꾼들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점에서는 공통성이 있다.
탈 중에서 신앙적인 상징성이 가장 강한 것이 연잎과 눈끔적이 가면인데, 그에 대하여는 하늘의 정기·땅의 정기, 천살성(天殺星), 지살성(地殺星), 천강성(天吁星∼北斗星의 별칭)·지살성(地煞星)이라는 개념이 각기 부여되어 있다. 그러나 세 가지 개념이 모두 조종순 이라는 같은 놀이꾼의 구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인 만큼, 개념부여가 가장 잘 이루어진 천강성·지살성으로 통합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연잎의 가면은 천강성이어서 늘 하늘을 쳐다보고 부채로 눈을 가려야 하는데, 만일에 부채를 제키면 잡귀는 놀라 도망하고 사람은 그의 눈살에 맞아 죽게되는 것이다. 눈끔적이가면은 지살성이어서 늘 땅만 내려보고 눈을 감아야 하는데 눈을 끔적거리면 그 눈살에 맞아 세상 모든 것은 죽게 되므로 잡귀까지도 이를 피하려고 도망친다고 한다. 이런 무서운 마력을 가진 두 가면은 부득이한 경우 이외에는 눈살을 비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눈을 부채로 가리거나 소매로 가리운다는 것이다. 연잎가면이 춤을 출 때에는 눈끔적이는 연잎의 주위를 세 바퀴 돌아 주는데 이는 연잎에게 잡귀가 침범할 수 없게 하는 것이라 한다. 연잎, 눈끔적이 두 가면은 놀이패의 거취를 결정하는데 결정권을 갖는다고 한다. 즉 이 놀이의 흥행청탁을 한꺼번에 여러 곳에서 받았고 서로 자기 쪽으로 가자고 다툴 때에는 연잎과 눈끔적이 두 가면을 가져간 곳으로 가면, 다투던 사람들도 할 수 없다고 용인, 양보해 주었다는 것이다.
양주 탈놀이의 가면에 대한 기록이나 조사, 연구는 김재철, 송석하, 임석재, 김성대, 이두현, 고교형, 秋葉隆, 鮎具房之進 등에 의해 이루어졌고, 자료로는 1957년에 채록된 놀이본이 있다.
유양리의 현장
양주 탈놀이의 전승지인 오늘날의 유양리는 그 옛날 전성기의 흔적을 희미하게 남긴 채 적막한 시골 마을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옛날에 사직당이 있던 기단부도 확인하기 어렵고 주변도 지형이 많이 바뀌어 놀이마당이 있었다는 가정을 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1964년 백화암 골짜기에서 쏟아져 내린 큰물이 사직당 주변을 휩쓸면서 황폐한 산기슭으로 변해버렸다 한다. 다만 옛날에 관중들이 앉아 구경을 했던 주변의 비스듬한 산비탈만이 일부가 살아남아 객석의 형태를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사직당이 있었을 당시에는 가면과 의상, 소도구 등을 그 당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놀이 때마다 꺼내어 사용하였다 한다. 길놀이의 출발지도 사직당이었다. 당시 관중들은 대부분이 남자들이었는데 여자들도 때로는 장옷을 걸치고 솔밭사이에 숨어서 놀이를 관람하였다 한다. 그러다가 밤이 깊어지고 음담패설이 나오는 장면에 이르면 여자들만이 집으로 돌아갔다.
사직당 놀이마당 이외에도 탈놀이를 놀았던 옛 마당이 여러 곳에 잔존되어 있다. 사직당 동쪽 언덕 너머의 잔솔밭은 비스듬히 경사진 곳인데 군데군데 잔디밭이 있다. 그 잔디밭에서 탈을 놀았다. 옛 목사관 바로 뒷자리에는 어사대를 표시하는 비석이 서 있는데, 그 뒷 솔밭도 옛 놀이마당이다. 산비탈이 둥그렇게 완만한 경사를 이룬 아래쪽에 평평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가 놀이터이고, 놀이터의 양편에 서있는 큰 소나무에 줄을 매고 줄타기도 하였다.
6∼7세 때라 생각된다.(1913∼4년) 우리 골에서 각 명절 때 행사를 하게 되면 구경을 했으나 무엇인지 내용은 모르고 다만 들리는 것, 보이는 것은 삼현청(여기서는 악사석(樂士席)의 의미)에서 악사들이 반주하는 음률소리, 각처에서 사람들이 운집하여 떠드는 소리,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 놀이판 주위에 백포장(白布帳)을 치고 술 파는 소리, 이런 소리가 한데 합하여 천지가 진동을 하였다.
본바닥 사람이었던 김성대의 회고담은 옛 놀이판의 흥청거리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현재의 전수관과 놀이마당이 있는 뒤편에 방선폭포가 흐르고 있는데, 그 폭포 주변은 원형의 산비탈이 둘려 있고 가운데 옛 놀이마당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공지가 일부 남아 있다. 주위의 돌계단에 <관민동락(官民同樂)>, <화대(花臺)>라는 유각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어 마당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전수관 동쪽 언덕의 솔밭, 마을 앞의 밤동산, 승학교 건너의 놀이판 등이 옛 마당이었으며, 현재에도 일부 남아 있는 향교의 안마당은 광복 이후에 놀던 곳이다. 현재 유경성이 사는 집자리가 옛 악사청 자리였다고 한다.
새로 지은 전수관은 대지 580평에 건평이 50평인 콘크리트의 기와집이다. 실내를 마루로 깔아 놀이를 전수시킬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전수관 앞뜰에는 지난해 여름에 완공한 타원형의 노천계단식 놀이판이 있다. 축대 부분은 모두 화강암으로 쌓고 좌석부분과 놀이마당 부분에는 잔디를 깔았다. 놀이마당은 지상 평면보다 몇 계단 낮은 평면이다. 놀이마당의 공사비는 5천만 원이 소요되었는데 전액 국고보조로 이루어 졌으며, 큰길에서 전수관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와 전수관 대지에 포함되었던 일부 사유지는 모두가 자진, 국가에 헌납되어 완성된 시설의 일체는 국가 소유가 되었다. 이 전수관에 사단법인 양주별산대놀이 보존회가 자리하고 있다.
1964년 12월 놀이의 기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은 놀이꾼 중에서 서정주·함춘길·박교응이 이미 작고하였고, 생존한 사람들도 60세가 넘은 경우가 다섯이나 된다. 보유자라고는 하나 건강상 원활한 활동이나 전수교육이 어려운 형편이다. 이제 그들을 통해서는 양주 탈놀이의 저력이나 우아한 묘미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들의 노쇠화와 더불어 놀이 자체의 적막한 계승을 느끼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감회가 아닐 것이다.
다만 몇 사람의 젊은 이수자들을 찾아 만나게 됨으로써 새삼 양주를 찾은 기쁨과 기대를 갖게 하였다. 유한수(39세)는 유경성의 아들로서 가면제작과 목중 역을 할 수 있으며 부친과 고명달에게서 전수 받았고 지금은 토끼 기르기를 하고 있다. 석종관(34세)은 부거억의 아들로서 피리와 취발이 역을 할 수 있으며 부친과 노재영에게서 전수 받았다. 그는 현재 전수장의 조교일을 맡아보며 농사를 짓고 있다. 유한식(34세)은 유경성의 조카로 말뚝이 역을 할 수 있으며 농사를 짓고 있다. 고종원(31세)은 고명달의 아들로서 노장 역, 목중 역을 할 수 있으며 노동을 하고 있다. 김순홍(31세)은 소무 역, 애사당 역을 할 수 있다. 홍상현(27세)은 옴중 역을 할 수 있으며 노재영에게서 전수 받았고 농사를 짓고 있다. 황경희(28세)는 상좌 역, 소무 역을 할 수 있는 대학출신의 이수자로서 현재는 교사로 재직중이다. 김정선(25세)은 김상용의 아들로서 말뚝이 역과 목중 역을 할 수 있으며, 농사를 짓고 있다. 옛 놀이꾼 김성운의 증손으로 4대에 걸쳐 탈놀이를 잇는 셈이 된다. 김승식(29세)은 샌님 역, 목중 역을 할 수 있는 이수자이다. 유경수(26세)는 피리·장고 이외에도 목중 역을 할 수 있다. 이들 이외에도 이수자가 된 사람과 현재 전수를 받고 있는 젊은이들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급변하는 시대와 변모해 가는 세태 속에서 양주 탈놀이의 장래를 예측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후계자들이 속속 성장해 가고 있음은 일면 밝은 미래를 전망하게 해 준다. 이제 우리 시민들과 행정담당자들이 그들을 위해 해야할 과업은 각성된 민주적 의식과 올바른 문화의식에 입각하여 정신적 혹은 경제적 후원을 지속적으로 아낌없이 보내는 일이다. (1986.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