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층문화를 총점검한다
춘향전 72종을 대비 분석한다 - 춘향전은 왜 영원한 고전인가-
설성경 / 문학박사.
Ⅰ. 판소리 춘향가와 소설 춘향전의 역사
춘향전이란 일반적으로 춘향의 이야기를 두루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보다 체계적 입장에서 본다면, 실제의 춘향전은 구체적으로 형상된 여러 양식, 여러 시대의 상이한 개별 작품을 지칭하는 개별적 춘향전과 모든 양식, 모든 시대를 포괄하는 보편적 춘향전으로 구분하여 인식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보편적이며 총체적 작품으로서의 춘향전 군(群)이 지닌 성격을 역사적 전개를 따라 개관해봄으로써 춘향전이 민족의 고전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 배경을 조감해보고자 한다.
춘향전은 숙종 말, 영조 초에 광대들에 의하여 판소리로 불리어진 데서 비롯된다. 이 시기는 임병양란의 후유증도 사라지고, 사회적, 문화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양반사회는 자체의 모순을 드러내고, 서민들은 새로운 세계인식에 의한 독자적 서민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려던 때다.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춘향굿이 모태가 되어 판소리 춘향가로의 창조적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춘향가의 문학적 요소는 남원의 민속 설화를 바탕으로, 민요, 사설시조, 가사, 무가 등의 폭넓은 민속문학과 한시, 사부 등의 상층문예를 포용함으로써, 서민문예와 양반문예의 벽을 허물었다. 동시에, 산문 양식과 시가 양식도 하나의 발전적 통합체로 결합시키고 있음이 특징이다. 이러한 현상은 음악적 요소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문학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와 연희적 요소를 각기 독자적으로 심화 발전시키면서, 이들 세 예술 요소를 하나로 통합하여 더욱 대규모의 통합적 민족예술양식으로 탄생시킴으로써 우리 민족예술사상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결과, 판소리는 창, 사설, 발림이 수준 높은 조화를 이룬 포용적 종합예술로 성립됨으로써 그 생명을 끝낸 양식이 아니다. 이를 시발점으로 하여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하면서, 민족적 성원을 바탕으로 새로운 예술로의 재수용으로 영역을 확장할 터전으로 삼았다.
판소리 춘향가도 18세기에 이미 세련된 민족의 감정과 의식을 개성 있게 형상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지금까지 열려진 작품으로서 무한한 생성을 강력하게 유지하고 있음이 예술적 생명의 뿌리로 작용하고 있다. 이 점이 춘향전의 역사적 변천과 그 시대적 당위성을 살펴봄으로써, 현재의 시각에서 춘향전이 지닌 고전으로서의 참 모습을 되새김질하는 까닭이 된다.
판소리 춘향가에 대한 통시적 이해는, 자료가 소실된 시기가 오래이므로 접근에 난관이 많다. 그러나 단편적이고 간접적 기록으로 보면, 춘향가의 자취를 보이는 가장 오랜 기록은 유진한의 한시로 된 만화본 춘향가이다. 이는 영조 30년에는 이미 춘향가의 문학적 구조가 성숙된 형태를 갖추었음을 확인해 준다. 그후 송만재의 觀優戱 등에서 측면적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초기의 명창들로 추정되는 하은담, 최선달, 우춘대 등의 판소리는 확인할 길이 없다.
초기의 흐름과는 달리, 신재효와 판소리 명창의 유파화 시기에는 모습이 구체화된다.
신재효(1812-84)에 가서는 춘향가 사설의 내용이 온전히 노출된다. 물론 전승 명창들의 소리는 아니지만, 개인의 의도에 의한 의식과 그 굴절화의 방향을 이해하는 데에는 결정적 자료가 된다.
신재효는 남창 춘향가와 동창 춘향가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춘향가로 판의 분화를 하였다. 동창 춘향가는 춘향이 자신의 뜻에 의하여 이도령과 결연하고, 월매 또한 춘향의 배필 정하는 것은 춘향에게 맡기고 있다. 여기에 반하여 남창 춘향가는 월매가 중간에서 매개 역할을 하므로, 춘향과 이도령의 연결은 모녀의 합의에 의하게 된다. 또 동창 춘향가가 도령의 외면적 표현과 내면적 심리의 갈등을 강조함에 반하여, 남창 춘향가는 춘향만의 이어사가 아닌 모든 민중의 구원자로서의 이어사의 기능을 강화한다. 이처럼 남창 춘향가는 동창 춘향가에 비하여, 童子에서 丈夫로, 기녀에서 庶녀로, 개인에서 집단으로 성격이 변이 된다. 이러한 변이는 남성적 윤리와 여성적 윤리, 상층 지식인의 윤리와 하층 서민층의 윤리를 조화시킴에 그 의도가 있다. 이도령이 춘향과의 사랑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결연을 방해하는 요인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가정이나 사회에서의 힘이 요구된다. 이는 이어사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서만이 가능하고, 남성을 통한 여성 윤리의 승리만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동시에 양반의 윤리의식과 서민의 윤리의식의 공존에서 형상되는 사랑의 윤리와 그 실현을 제시하게 된다. 또 이도령도 애정만을 강조하는 순수 애정 일변도의 현실 외면보다는 새로운 질서의 힘을 보유하며, 현실에 적응하면서도 새 질서를 지양하고 사랑의 약속을 버리지 않는 신의에 바탕을 둔 인간으로 나타난다. 이는 결국 이념적 권력자의 윤리로서, 타락한 수령들의 반윤리를 보이는 변부사와 대립되는 새 세대의 발전적 인간상이다. 이는 또 이도령의 부친 이한림이 보여주는, 덕치에만 몰두하여 젊은 자식의 순수한 애정을 외면하는 보수적 세대와도 구별되는 새 세대로, 권력과 신의와 애정을 함께 갖춘 이어사의 윤리적 인간상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 두 인간상의 바탕 위에서 생성되는 서민의식의 사실적 반영과 상층 지식인의 의식을 통한 이념성의 결합은 신재효가 그의 판소리 사설을 통하여 상·하층의 의식을 최대한 융화시키려 함에 있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사설이 당대의 시대상에 어울리는 합리성을 통한 춘향가의 새로운 해석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20세기 초반까지의 명창들의 춘향가 더늠으로 알려진 부분은 <광한루 경치>에는 장자백, <천자뒤풀이>의 김세종, <춘향방 사벽도>의 이석순, <팔도 담배노래>의 김찬업, <사랑가>의 고수관, 송광록, 박만순, 이화중선, <이별가>의 모흥갑, 박유전, 성민주, 유공렬, <신연맞이>의 정정렬, <기생점고>의 진채선, <군노사령 나간다>의 장수철, <망부사>의 이날치, <십장가>의 염계달, 조기홍, <옥중가>의 송흥록, 박만순, 송재현, 유공열, 전상국, 한경석, 허금파, 임방울, <장원급제>의 성창렬, <어사분발>의 송봉업, <만복사 불공>의 황호통, <농부가>의 송만갑, <춘향편지>의 강재만, <옥중 몽유가>의 박만순, <옥중 해몽>의 오끗준, <춘향모 상봉>의 백점택, 김녹주, <어사출또>의 임창학 등이다.
판소리 전성기의 이러한 명창들이 서로 자신의 더늠을 개발하여, 경쟁적 열창을 벌임으로써 춘향가의 음악과 사설과 그 연기력은 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이 시기는 송흥록의 창제를 표준으로 삼아 장단의 운행과 템포가 빠르고 비기교적인 동편제와, 박유전의 창제를 표준 삼아 기교와 소리의 수식을 강조한 서편제의 분화가 나타나 춘향가의 소리와 사설의 개성적인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동편제 춘향가는 신재효로부터 이론을 배운 철종대의 김세종에 의하여 계승된다. 이는 김찬업을 거쳐, 정응민에게 이어지고, 그의 제자들인 정권진, 성우향, 조상현, 성창순 등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다.
이 바디의 사설은 첫 대목이 <호남좌도 남원부는 옛날 대방국이었다>로 시작하여 남원 산세를 그리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 다음은<기산영수>, <적성가>로 이어진다.
서편제 춘향가를 계승한 정정렬은 사설과 소리를 새로 짜서 송만갑, 정응민, 김창환제와는 다른 판의 춘향가를 만들었다. 이 춘향가는 첫 대목에서 이도령과 춘향의 내력을 생략하고, 방자 나귀 안장 짓는 내용으로 직접 들어가게 하고, <기산영수>도 생략하고, <적성가>는 내용을 바꾸고 <적적백백>도 생략했다. 이 춘향가는 정교함을 추구하고, 장편화하면서 식민지 시대의 신판답게 이별대목을 강화하였고 비애의 분위기를 심화시켰다. 이 판은 김여란을 통하여 최승희로 계승되고, 또 정정렬 판을 중심으로 하고 송만갑, 김채만의 더늠을 삽입한 김소희 춘향가로 계승되고 있다. 또 정정렬의 신판 춘향가는 다시 김연수에 의하여 부분이 새로 짜여지고 더욱 장편화되어 8시간 이상이 결리는 김연수 판이 나오게 되었고, 이는 오정숙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다. 이 판의 첫 대목은 <영웅 열사와 절대가인 삼겨날제 강산절기를 타고나는듸 군산만학 부형문에 왕소군이 삼겨나고 금강활이 아미수에 설도문군환생이라, 우리나라 호남좌도 남원부는>으로 시작하여, 춘향모의 태몽으로 이어진다.
이와는 달리, 춘향가의 신판을 엮은 이선유의 첫 대목은 <자고로 현승지군에 충신이 있는 법이라. 요순시절에 고요직설이 잇고 은주 때에 이윤 여상이 나쓰니 진실노 홍모우순풍…>이란 내용으로 바뀌었다. 그 다음은 <기산영수>, <적성가>로 이어지는 신판이 오가 전집에 실려 출판되었다.
박헌봉은 이선유의 춘향가와 김창환, 송만갑, 정정렬, 김연수 등의 창본, 빅터, 콜럼비아, 오케 등의 1930년대의 각종 레코드에 취입된 정정렬, 이동백, 임방울, 이화중선, 박녹주, 김소희 등의 창을 참조하여 새 판의 춘향가를 짜서 창악대강에 수록하여 출판하였다. 이 판의 첫 대목은 <절대가인 삼겨날제 강산정기 타서 난다. 송악산이 수려하여 황진이 삼겨 나고 양천초당 절승하여 허난설헌 살았었고 면악산맥 도화동은 심랑자 종출이라, 호남좌도 남원 부는…>으로 되어 있어, 신재효 사설의 중간에 다른 내용을 삽입시키고 있다. 이 판은 아니리를 가사체로 엮었음이 특징이다.
판소리 대본의 출판과는 달리, 1930년대에는 유성기의 새로운 보급으로 S. P판 음반을 통한 판소리 감상이 대 유행을 보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정정렬, 이화중선, 박녹주, 김소희, 임방울이 소리를 하고, 한성준이 북장단을 맡은 빅타판 춘향가전집과 정정렬, 이화중선, 김소희, 임방울 등이 소리를 짠 오케판 춘향가전집이다. 오케판 춘향가전집은 전통적 북장단과 함께 가끔 삼현육각, 가곡, 취타 등을 삽입하여 당시에 유행했던 창극의 효과를 수용한 새로운 모습을 지녔음이 특징이다.
광복 이후에는 국악원의 창악부, 국립국악원, 서울 중앙방송국 전속 조선음악회, 국악단 등을 만들어 전파를 통한 판소리 보급이 강화됨으로써, 이동백, 임방울, 김연수, 김소희, 박귀희 등의 춘향가가 겨레의 가슴을 흐뭇하게 했다.
1950년 국립극장이 개장되고, 1960년 한국국악예술학교가 설립되어, 이 분위기를 타고 본격적 판소리 춘향가의 재흥 시대에 들어갔다. 그 가장 큰 특징은 1969년 5월 박동진의 춘향가 완창을 비롯한 완창 시대의 재현이다. 이는 춘향가 완창의 계기가 되어, 국립창극단을 중심으로 최승희, 성창순, 오정숙, 조상현, 진봉규 등이 완창을 계속 발표하게 되었다. 이러한 완창 공연은 각 소리제를 구분해가며 춘향가의 깊은 맛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며, 동시에 수준 높은 관객을 통한 감상 수준의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전축, 녹음기의 대량보급, 라디오, T. V 방송국을 통한 판소리 보급에 의해 춘향가는 판소리의 중심작품으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
판소리 춘향가는 초기에 이미 소설 춘향전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판소리 자체가 구비적 연희물이므로, 이의 문학적 요소인 사설을 문자로 정착시키면 희곡계 소설이 된다. 그러나 판소리의 소설화에는 판소리 사설의 온전한 정착과 함께, 그 골격을 중심으로 한 판소리계 소설로서의 변이가 정착자의 의도에 따라 굴절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또 소설화된 춘향전도 독자들의 수요에 따라 오랜 시간을 거쳐오는 동안에 필사자, 개작자의 의도에 따라 단독 작품으로서의 이본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 남아있는 춘향전의 필사본, 방각본, 활자본은 72종 이상 학계에 알려져 있다.
춘향전의 이러한 이본들은 정착 및 개작 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고, 플롯상의 차이는 없어도, 구체적 문장을 달리하는 이본들이 많기 때문에 이들의 계통을 세운다는 것은 기준 설정에 어려움이 많다. 또 1930년 이후에 개작, 창작된 춘향전은 작가와 개작, 창작의 시기가 분명히 밝혀져 있고, 이본으로서의 개성도 뚜렷하지만, 그 이전의 신소설 시기까지의 작품은 한 계통 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 작품이 대다수이다. 그러나, 다수의 이본들은 기본 플롯은 동일하고, 行文만 달리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본의 계통 분류는 기준설정에 따라 구체적 모습은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춘향전의 중심적 화소(話素)인 불망기삽화, 신물삽화, 과거시제, 암행어사시를 축으로 하여 그 계통을 잡아보면 크게 세 유형의 이본군(異本群)을 찾아낼 수 있다.
첫째 계통인 남원고사(南原古祠) 계통은 1930년경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계통은 판소리의 사설이 지닌 구성원리를 유지하면서 본격적 소설화가 이루어진 작품군이다.
이 계열의 작품들은 서두가 <쳔하 명산 오악지뭗의 형산이 놉고 놉다. … 당 시절의 졀문 뭗이 경문이 능통하므로 뇽궁의 봉명폁고 셕교상…>과 유사한 행문이거나, 아니면 이런 형태의 긴 허두가 있다. 그 다음에 <이 셰상의 ꏡ오 이상폁고 신통폁고 거록폁고 긔특폁고 쿡려폁고 ꏿ낭폁고 희한한 일이 잇것다. 젼라도 남원부꿁 니등꿁또 도임시의…> 등으로 이어지는 본화가 시작된다.
이러한 남원고사 계통의 첫 이본으로 창작의식이 뚜렷한 작가에 의하여 창작된 소설이다. 이 작가는 고급 문예인 한문학과 대중문예인 국문문학, 구비문학의 폭넓은 지식을 갖춘 인물로 추정된다. 이러한 창작의식은 광대들에 의하여 불려지던 전통 판소리의 사설과 달리, 일관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특히, 서사구조상 대립의 원리가 보다 분명히 드러나 전반부는 기녀의 행동이, 후반에는 열녀의 행동이 각기 주축을 이루어 연결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사랑의 문제도 전반부에서는 높은 단계의 뜨거운 육체적 사랑이던 것이 후반부에서는 높은 단계의 순수한 정신적 사랑으로 변이 되고 발전된다. 이런 방법으로 사랑의 두 가지 속성을 결합한 사랑의 본질을 구체화시키게 된다.
여기에 속하는 초기 필사본으로는 파리의 동양어학교본 남원고사, 동경의 동양문고본 춘향전, 이재수본 춘향전 등이 있다. 이들의 축약본으로 추정되는 경판 35장본 춘향전, 경판 30장본 춘향전, 경판 17장본 춘향전, 경판 16장본 춘향전, 안성판 20장본 춘향전 등이 목판으로 인쇄된 것들이다. 또 20세기에 와서도 1913년 신문관에서 최남선의 개작인 고본춘향전이 나왔고, 1936년에는 신명균의 춘향전, 1943년에는 신태정의 신역춘향전, 1953년에는 신태화의 춘향전이 출판되었는데, 모두 이 계통에 속하는 이본들이다.
이들 중에서 경판 춘향전은 19세기 서울, 경기지역의 독자들에게 대량 보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경판 춘향전 중에서 가장 긴 내용을 지니며, 가장 초기의 판으로 판단되는 35장본 춘향전은 남원고사계의 초기본을 바탕으로 하여 이를 축약한 이본이다. 이는 남원고사, 동양문고본 춘향전, 이재수본의 어느 한 이본 또는 두 이본의 본문들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독자적인 한 이본으로는 남원고사와 가장 가깝지만, 남원고사보다 선행한 원래의 남원고사의 이본을 대본으로 하고 있다. 또 35장본 춘향전과 이재수본의 관계를 보면, 이재수본은 춘향의 옥중에서의 꿈이 서술된 다음에 허봉사의 해몽 장면이 연결되어, 남원고사에서 이행된 플롯을 보인다. 특히 춘향집을 가르치는 대목은 35장본 춘향전이 이재수본과 가장 가깝다. 춘향집 사설의 일부는 남원고사와 동양문고본 춘향전에는 없으나 35장본 춘향전과 이재수본에만 있다. 또 35장본 춘향전은 서울의 이도령 대목 이후에 춘향의 꿈 대목이 있으나, 30장본 춘향전은 춘향의 꿈 이후에 서울의 이도령 대목이 있다. 과거장면에서도 35장본 춘향전은 이도령이 태평과에 급제하나, 30장본 춘향전은 알성과에 급제한다. 이러한 30장본 춘향전은 다시 20장본 춘향전으로 축약되고, 이는 다시 17장본 춘향전, 16장본 춘향전으로까지 축약된다. 이로 인하여, 남원고사계 춘향전은 가장 긴 춘향전인 남원고사와 가장 짧은 춘향전인 16장본 춘향전을 갖고 있는 독특한 계통이 되었다.
두 번째 계통인 별춘향전계 춘향전의 출현은 판소리 사설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계통으로서, 1840년경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계통은 서울의 독자를 중심으로 보급된 친소설적 남원고사와 쌍벽을 이루며, 전라도를 비롯한 지방 독자를 중심으로 보급된 친판소리적 춘향전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다.
20세기 이전의 필사본은 절대 다수가 이 계통에 속하지만, 그 정착시기를 알 수 없기에 선후 문제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 계통을 대표하는 신학균본 별춘향전의 서두는 <숙종 대왕 즉위 초에 세화연풍하고 국태민안한데 츙신은 만조정이오 열읍에 열려로다. 요지일월 꽅지건곤이라 태평천지 이 아닌가>의 허두가 있고, <이때 서울 삼청동 이한림을…>의 본화가 시작된다. 대부분의 이 계통의 이본들은 서두가 이와 유사하게 시작되고 있다. 그 대표적 이본으로는 방종현본 춘향전 2종, 이고본 춘향전, 김동욱본 춘향전 2종, 김동욱본 별춘향전, 신학균본 별춘향전, 김동욱본 렬여춘향수졀가, 국립도서관본 열녀춘향수졀가, 고담 성춘향가를 비롯한 필사본과 완판 30장본 별춘향전, 완판 33장본 열녀춘향수절가, 완판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가 있다.
방각본 춘향전으로 가장 많이 읽혔던 완판 춘향전은 30장본 별춘향전이 확대되어, 33장본과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로 발전하였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가람 소장의 30장본 별춘향전에는 <광대목도 쉬니쿵쿵쿵쿵>이란 대목이 있어 판소리와의 관련성을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다. 30장본 별춘향전의 확대인 33장본 열녀춘향수절가는 <병오맹하(丙午孟夏)>란 간기가 있으므로, 이는 1846년에 출판된 것으로 보인다. 30장본 별춘향전이 33장본 열녀춘향수절가로의 변이는 확대와 이행에 의한 변이가 많다. 확대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나타나지만, 후반의 내용인 이도령이 서울로 올라간 이후에 더욱 심하게 확대된다. 이행은 중반의 내용인 춘향의 신세 탄식과 암행어사의 출발 대목에서 가장 심하게 나타난다. 즉 30장본 별춘향전은 춘향의 신세자탄 다음에 <경성에서의 이도령>, <암행어사의 발행>, <옥중에서의 춘향>의 순서로 진행되지만, 33장 열녀춘향수절가에서는 <옥중에서의 춘향>, <경성에서의 이도령>, <암행어사의 발행>으로 진행된다. 또 <암행어사의 발행>이란 대목 속에서는 그 하위 장면이 30장본 별춘향전의 경우 <어사의 걸인차림>, <어사의 노정기>, <어사의 역졸분발>로 진행되지만, 33장본 열녀춘향수절가는 <어사의 노정>, <어사의 걸인차림>, <어사의 역졸분발>로 진행된다. 이러한 이행변이는, 판소리 춘향가의 변화에 의한 그 사설의 정착이란 사실을 추정하게 한다.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는 33장본의 발전적 확대본이다.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는 전반적인 성격이 춘향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월매의 기능도 그만큼 강조된다. 즉 33장본에서는 방자가 도령에게 춘향을 설명하는 이야기 중에 월매의 이름이 처음으로 거론되지만,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에서는 월매를 중심으로 한 춘향과 향단 등 춘향집안에 대한 내용이 골격을 이룬다. 이 과정에서는 춘향집안의 내력을 중심으로 한 춘향의 출생, 성장을 확대시키면서 춘향의 신분도 성참판의 서녀(庶女)로 계층적 상승을 이루어 놓았다. 월매는 월매 대로 춘향을 통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하고, 또 그 좌절에서 당하는 인간적 한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러한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가 가장 인기를 얻은 고전 춘향전으로 평가되어 오게 된 이유는 순조, 현종, 고종이란 삼대에 걸친 판소리 전성기에 유명 명창들에 의하여 다듬어진 춘향전 사설을 효과적으로 수용하여 정착시킨 것이 근대판 춘향전으로서의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계통인 옥중화계 춘향전은 개화기의 활자본 춘향전으로서 1910년대 이후의 춘향전에 새 길을 열어 주었다. 이 계통은 별춘향전계의 최후 작품인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를 극복하면서 나타난 최후의 계통본이 되어 서울의 독자를 중심으로 전국으로 보급되어갔다.
판소리 춘향가의 사설본인 명창 박기홍의 춘향전을 바탕으로 신소설 작가인 이해조가 개작하여 대한매일 신보에 연재한 신문연재소설이 옥중화다. 이 판소리 산정으로서의 옥중화가 신문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1912년 보급서관에서 활자본으로 인쇄된 후, 1913년에는 동미서시에서 선한문춘향전, 증수춘향전을 내놓았다. 그후에도 1914년에는 증상연예옥중가인, 연정옥중화, 1915년에는 특별무쌍춘향전, 1916년에는 특정신간 옥중가화, 1917년에는 언문춘향전, 만고열녀 일선문춘향전, 1918년에는 옥중가화, 1920년에는 옥중화춘향전, 1921년에는 언문춘향전, 1922년에는 고대소설 옥중가인, 1925년에는 만고열녀옥중화, 만고열녀춘향전, 절대가인 성춘향전, 절대가인, 1932년에는 만고열녀 도상옥중화, 1935년에는 만고열녀 특별무쌍춘향전, 옥중가인, 1942년에는 국어대역 연정춘향가 등의 계통본이 출판되었다.
이 계통의 대표본
인 이해조의 옥중화의 서두는 <졀韡가인 삼겨날졔 강산졍긔 타셔난韁 져라산하 약하계에 셔시가 종츌폁고 군산만학부형문에 왕소군이 꿷쟝폁고 쌍각산이 슈려폁야 록주가 꿑겻스며…>로 시작하여 <호남좌도 남원부鏅 동으로 지이꿅 셔으로 륢셩강 산수졍신 어리어셔 츈향이가 삼겨 잇다…>로 본화가 진행된다.
이 옥중화 계열의 내용상 특징은 결미에서 월매의 요청으로 암행어사가 변부사를 용서하는 대목을 들 수 있다.
Ⅱ. 현대양식으로의 다채로운 실험과 그 성공적 정착
춘향전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서구문화의 수용으로 인해 다양한 예술양식으로 표현되면서 전통의 창조적 계승에 선구적 기능을 감당하고 있다. 그 대표적 예술양식은 크게 나누면 창극, 마당극 계통과 신연극, 극영화, T·V극 계통과 오페라, 뮤지컬 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제 이들 세 계통에 따라, 춘향전의 예술양식의 폭이 확장되는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창극·마당극
춘향전의 창극화 작업은 1903년 최초의 서구식 극장 원각사에서 청국 및 일본의 연극을 본 따, 흰 포장으로 막을 친 무대 앞에서 강용환을 중심으로 초보단계의 창극을 공연한데서 비롯되었다. 이몽룡에 이동백, 춘향에 강소향, 이부사에 김창환, 월매에 허금파, 방자에 강용환, 변부사에 송만갑 등이 배역을 맡아 의상을 갖추고 분장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 고수 한 사람의 북 장단에 맞춰, 판소리식의 발림에다 각기 부채를 갖고 소리를 하는 것이어서 엄격히 말하면 창극으로 옮아가는 실험무대였다. 그러나 1906년 원각사 폐지 후 1907년과 1908년에 김창환과 송만갑이 협률사를 조직하여 지방을 순회 공연함으로써 새로운 출구를 찾았고, 1909년 이후에는 다시 단성사, 협률사, 음악사 등에서 창극을 계속하였다.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의 발족을 계기로 하여, 1935년에는 정정렬, 김용성 편극의 최초의 창극극본이 나오고, 동양극장에서 춘향전이 다시 공연되었다. 이 극본은 김용성의 뜻에 의하여 장면에 따른 막의 연극구분이 있는 본위로 변모됨과 함께, 현대적 감각이 많이 가미되었다. 반주 음악도 거문고, 가야금, 대금피리, 해금, 호적, 꽹과리, 징, 장구, 북 등의 기악반주를 하여 효과음과 반주음의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소리, 대사, 연기, 음악, 무대장치 등을 갖춘 본격적 창극화를 이루게 되었다. 이 이후는 창극좌, 동일창극단, 대동가극단, 화랑창극단 등이 중심이 되어 춘향전을 비롯한 세 작품만을 고정적으로 연출하였다. 그러나 1939년 이후는 신파 연극의 영향을 받아 창극도 신파극 화되는 경향을 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보다 다듬어진 창극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1962년 2월 국립창극단이 창단되어 21명의 단원을 확보함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창단 기념공연으로 창극 춘향전을 박황 각색, 김연수 연출로 6막 11장으로 된 춘향전을 명동 국립극장에서 공연하였다. 성춘향에 김소희, 박봉선, 이몽룡에 장영찬, 김정희, 월매에 박초월, 임유앵 등 당대의 명창을 중심으로 40여명이 출연하였다. 이 극본은 1막 광한루, 2막 부용당, 3막 동헌, 4막 아야 고개(농촌풍경), 5막 춘향의 집, 옥중, 6막 동헌으로 구성되었다.
1970년 9월에 국립창극단 14회 공연으로 춘향전이 공연되었는데, 연출은 박진, 도창에 김연수, 박초월, 이도령에 장영찬, 춘향에 김진진, 월매에 김소희, 이 사또에 강종철, 변학도 홍갑수 등 37명이 등장했고, 국립무용단이 특별 출연하였다. 또 스텝으로는 미술에 김정환, 안무에 김천흥, 조명에 이우영, 효과에 공성원 등이 참여하여 수준 높은 창극으로 올려놓았다. 특히 극본은 창극 사설의 표준화를 위하여 신재효의 남창, 동창을 주축으로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 옥중화, 박녹주, 김연수, 정광수의 창본과 옛 명창의 더늠을 강한영이 정리하고 서항석이 각색하였다. 장면은 서창, 책방, 광한루 등 20장면으로 꾸미고 서창은 <절대가인 삼길적에 강산정기 타서 난다. 저라산 약야계에…>로 시작하여 신재효본으로 짰다. 이 극본을 김연수가 작곡하고, 박진이 연출함으로써 창극정립위원회의 창극정립을 위한 하나의 실험이 되었다.
1971년 9월의 창극단 16회 공연은 창극정립위원회의 편극으로 이진순이 연출하였고, 공연시간과 극본의 온전성을 위하여 전편과 후편을 다른 날로 나누어 공연하였다. 배역에는 이도령에 박후성, 성춘향에 박정선, 월매에 박초월, 변사또에 김연수 등 53명이 출연했다.
극본은 전막이 서창, 책방, 광한루 등 10장이고, 후막이 신관도임, 동헌, 춘향집 등 8장으로 구성되었고, 서창은 <숙종대왕 즉위초에 전라좌도 남원부에 부사로 오신 양반…>으로 시작된다.
1976년에 이어 공연된 1978년 10월의 국립창극단 29회 공연에는 허규에 의하여 개성 있게 구성, 연출되었다. 즉 옥중가에서 이도령 남원 내려오는 대목까지는 박동진의 판소리로, 이도령이 춘향집 찾아오는 대목에서 끝까지는 창극으로 꾸몄다. 배역에는 춘향에 조남희, 이도령에 조상현, 월매에 오정숙, 향단에 신영희 등 32명이 출연하였다. 이것은 판소리는 판소리대로 듣고, 창극은 창극대로 들어 판소리와 창극의 멋을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도록 변화를 준 새로운 연출방법이었다.
1980년 4월 국립창극단 32회 공연인 <대춘향전>은 각색, 연출 이원경, 작창 김소희, 안무 최현, 미술 김동진, 음악 김영동 등 38명의 스텝이 동원되었다. 반주에도 대금, 피리, 해금, 아쟁, 가야금, 장고, 북 등이 10명의 연주자에 의하여 연주되었다. 배역에는 도창에 박동진, 춘향에 김성녀, 이도령에 김동애, 이어사에 조상현, 변학도에 김종엽 등 78명의 대 출연진이 등장했다. 특히 농부 13명, 역졸 10명, 기생 30명 등이 대규모로 등장하였다. 극본은 5막 11장으로 되었다. 서장의 내용은 새로운 부분으로 다음과 같다.
한양에서 전라도 남원으로 가는 길목 어느 농촌에서 마을 농부들이 모심기를 한다. 흥겨운 모심기 노래와 더불어 남녀노소가 어울려서 모를 심고 있다. 그때 허름한 옷차림의 한 과객이 나타난다. 농군들이 잠시 쉬고 있자 지나가던 과객이 농군에게 말을 붙인다. <남원에 성춘향이란 유명한 기생이 있다는데…> 하면서 춘향을 헐뜯자, 농군들이 일제히 달려들며 과객을 때리려한다. 과객은 봉변을 피하여 급히 도망하고, 농군들은 나쁜 놈이라고 소리를 친다.
이런 서장이 있은 후, 2장에서부터는 단옷날 광한루에서의 춘향과 이도령의 이야기를 엮어 끝까지 전통 춘향전의 내용을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극본은 열녀 춘향의 주제와 작품 구성의 변화를 위하여 서장의 장면 이행을 실험하였다.
1982년에는 제2회 대한민국국악제의 작품으로 이진순 편극, 연출로 2부 11장의 <춘향전>이 공연되었다. 1부는 도창, 광한루, 춘향집, 사랑가, 이별로, 2부는 변학도 도임, 암행어사, 농부가, 춘향모와 어사상봉, 옥중상봉, 어사출두로 구성되었다. 도창은 <영웅열사와 절대가인 삼겨날제 강산정기를 타고나는듸 군산만학 부형문에 왕소군이 삼겨나고…>로 시작되어, 김연수 창본과 통한다.
배역에서 탈춤 추는 인물 다수와, 쌍검무 춤을 추는 기생이 다수 등장하여 춤의 효과를 돋우고 있음이 이 극본의 특징이 된다.
춘향전의 마당극화는 1984년 10월 극단 통인무대의 <마당놀이 춘향전>이 실험무대에서 공연됨으로 비롯된다. 구성에 강성범, 기획에 임광식이 맡았고, 배역에는 성춘향에 김미영, 이도령에 나한영, 월매에 김수순 등 15명이 등장했다.
극의 구성은 여섯 장면으로, 첫째 마당은 방자가 향단과 재미있게 노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때 월매가 나타나 방자와 수작한다. 둘째 마당은 이도령이 춘향을 찾아가는 대목이고, 셋째 마당은 춘향의 이별 대목이다. 넷째 마당은 신관사또가 부임하여 기생점고를 하는 장면이고, 다섯째 마당은 춘향이 옥에 갇힌 장면이고, 여섯째 마당은 암행어사 출두 장면이다. 이러한 구성을 마당놀이로 꾸며, 놀이꾼과 구경꾼이 한데 어울려 한판의 신명나는 놀이를 펼치는 코믹한 춘향전이다.
1985년 11월에 <마당놀이 방자전>이 춘향전의 본격적 마당극 작품으로 공연되었다. 김지일 극본, 유길촌 기획, 손진책 연출, 박범훈 작곡, 국수호 안무, 민속악회 시나위와 중앙대학교 국악관현악단의 음악으로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극화되었다. 배역에는 배비장전의 방자에 윤문식, 춘향전의 방자에 김종엽, 춘향에 김미옥, 이도령에 김성녀, 향단에 우상미, 변학도에 정현, 월매에 김영자가 맡는 등 31명이 출연했다. 스텝도 22명이며 시나위, 국악관현악단, 민속극회 남사당의 특별출연 등 호화 배역의 대규모로 등장한 춘향전이다.
극의 구성은 12마당으로, 1부는 열음 마당, 방자와 향단이 마당, 사랑을 찾아가는 마당, 이별 마당 등의 6마당이고, 2부는 변학도 도임 마당, 십장가 마당, 어사출행 마당, 옥중 마당, 생일잔치 마당, 어사출두 마당의 6마당이다.
열음 마당은 길놀이로 춘향전 방자와 배비장전의 방자가 만나 방자전의 방자 역을 맡겠다고 싸우며 흥을 돋운다. 방자와 향단이 마당에서는 방자와 향단이가 단옷날 이도령과 춘향을 꼬여내어 서로 만나게 해줄 계략을 짠다. 이러한 사건의 진행 속에 <오늘 오신 손님 반갑소>, <지금은 도둑괭이 신세지만>이란 노래가 불려진다. 이처럼 판소리의 삽입 가요적 기능을 하는 노래가 <즐거운 사랑가>, <뒤풀이>까지 26곡이 된다.
방자전은 전통적 춘향전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강한 의도가 방자와 향단이란 소영웅을 중심으로 형상된 실험적 작품이다.
2. 연극·극영화·TV극
춘향전이 최초로 극화된 것은 1922년 박승희가 16막이란 장편으로 각색하여 토월회에서 공연한 것이다.
1936년에는 유치진이 4막 극으로 된 희곡을 발표하여, 춘향전 극화에 새 이정표를 마련했다. 이 희곡의 1막 1장은 광한루 장면, 2장은 결연 장면, 2막 1장은 이별 장면, 2장은 기생점고 장면, 3막 1장은 농부가 장면, 2장은 퇴락 장면, 3장은 옥중 장면, 4막은 생일 잔치 장면으로 구성되었다. 내용은 <옥중화>, <일설춘향전>을 토대로 서민의 끈기와 저항성에 초점을 두었다.
이 희곡은 극예술연구회에 의하여 공연된 이후 여러 번 무대에 올랐다. 특히, 1965년에는 유치진 회갑기념공연으로 공연되었다. 배역에는 이도령에 전무송, 춘향에 왕고수미가 맡았다. 1984년 10월에는 양정현 연출, 황호연 감독으로 서울예전 동문회 주최로 공연되었다. 배역에는 이도령에 길용우, 윤승원, 성춘향에 윤상미, 월매에 한미숙, 김명희를 비롯한 76명의 배우와 17명의 스텝에 의하여 연출되었다. 이 공연에는 10명이 하는 화관무가 변부사의 생일잔치에 삽입됨으로써 화려한 무대의 효과를 돋구었다.
유치진 희곡의 무대화와는 달리, 1981년 희곡 <살풀이 춘향전>을 창작한 박우춘의 극본 <방자전>을 극단<우리네 땅>이 1985년4월 공간사랑에서 시대 풍자극을 공연함으로써, 춘향전 연극의 새 흐름을 보여주었다. 이 연극은 춘향전을 현대감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수청을 거절한 춘향은 참수형을 당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변학도의 토색질이 심해지자 관찰사가 출두한다. 관찰사는 방자에게 춘향이 여생을 행복하게 마치는 소설로 쓰도록 명한다. 이러한 개작 태도는 전통 춘향전의 반주제화로서 패러디화의 한 전행으로 평가된다.
춘향전이 영화화 된 것은 1922년 일본인 하야까와 감독, 제작, 각본으로 이루어진 한국 최초의 극영화 <춘향전>에서 시작된다. 이도령에 김조성, 춘향에 한용이 주연을 하고 동아문화협회가 제작을 하여, 흥행에 크게 성공한 작품이 되었다.
1935년에 경성촬영소의 와께지마의 출자로 문예봉, 한일송, 김연실, 노재신을 주연으로 이필우, 이명우 형제가 토키 영화를 제작하여, <춘향전>이 한국 토키 영화의 효시란 영예도 차지하게 되었다.
1955년에 이규환 각본, 감독의<춘향전>은, 도령에 이민, 춘향에 조미령을, 변학도에 이예춘을 주연으로 하여 흑백 35밀리 영화로 동명영화에서 촬영한 것이 10만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사상 최대의 흥행 기록을 올림으로써, 춘향전은 또 하나의 기록을 세우며 영화 중흥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57년에는 김향 감독의 <대춘향전>이 제작되었고, 1960년에는 이경춘 감독의 <탈선춘향전>이 제작되어, 영화 춘향전의 패러디화의 실험작이 되었다. 또 1961년에는 임희재 각본,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최은희, 김진규, 한은진, 허장강을 주연으로 신필림에서 제작되었고, 1963년에는 이동훈 감독의 <한양에 온 성춘향>이 제작되었다.
1968년에는 김수용 감독의 <춘향>이 춘향에 홍세미, 도령에 신성일, 방자에 허장강, 향단에 태현실, 이사또에 최남현, 변사또에 박노식, 허봉사에 서영춘, 낭청에 김희갑, 월매에 주증녀, 운봉에 김승호 등 호화 배역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춘향과 도령의 만남은 많이 축약되고, 사랑가 대목과 공방사설도 없어졌다. 어사의 남행에는 약 300명의 엑스트라가 역졸로 등장하고, 어사의 염문에는 변부사의 포악 내용으로, 사또가 강제로 자기의 선정비를 만들게 하고, 비석을 만드는 석수들이 사또를 비방하다 사령에게 잡혀가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1976년에는 이문운 각본, 박태원 감독으로 춘향에 장미희, 도령에 이덕화가 출연한 <성춘향전>이 우성사에서 제작되었다.
이처럼 춘향전은 새로운 영화 형식의 선구적 실험작으로 주기적 제작이 반복되고, 성공적 흥행으로 이끄는 견인적 작품이 되어 왔다.
1978년 TBC T·V에서 장미희 주연의 단막극으로 춘향전을 방영했다. 또 컬러화 이후 1983년 KBS 2TV에서 주간 드라마로 <춘향>이란 연속 드라마를 제작함으로써 대춘향전의 TV극 시대를 열었다. 박병우 극본, 이윤선 연출로 춘향에 선우은숙, 이도령에는 강석우, 월매에 한혜숙이 맡고, 이순재, 강부자, 선재욱 등 중후하고 신선한 초호화 배역이 대거 등장하여 춘향전의 진면목을 과시하였다.
이 작품은 월매전 속의 춘향전으로서, 월매의 사랑과 한이 바탕이 되고, 이와 병행하여 춘향의 사랑과 한이 겹쳐진다. 춘향이 끝내 자살을 함으로써, 춘향을 사이에 놓고 사랑과 출세의 경쟁을 벌이는 이도령과 변학도는 결국 허탈한 무승부로서의 무상감을 맛보게 된다. 이는 월매의 시각에서, 춘향과 도령의 사랑을 해석한 실험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3. 오페라·뮤지컬
춘향전의 오페라화는 1950년 5월 현제명 작곡, 이서구 대사, 이진순 연출로 5막 6장의 작품이 서울대 음악대학 주최로 국립극장에서 공연됨이 시초다. 이는 한국의 첫 창작 오페라로서, 1958년 7월에는 춘향에 소프라노 장혜경, 도령에 테너 이우근, 사또에 바리톤 오현명 등 19명이 출연하고 서울대 음대합창단의 합창, 공군교향악단의 관현악으로 시공관에서 공연되었다. 그후 1965년 11월에는 다시 고려 오페라단 주최로 서울 시민회관에서 공연되었다.
1966년 10월에는 장일남 작곡의 <춘향전>이 국립 오페라단 주최로 국립극장에서 공연되었다. 1970년 10월에는 다시 서울음대 동창회 주최로 현제명 작곡의 <춘향전>이 1976년 12월에는 서울 오페라단 주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되었다.
1981년 6월에는 김자경 오페라단이 장일남 작곡의 <춘향전>을 공연하였다. 지휘는 장일남, 연출은 이진순이 맡았고, KBS 관현악단이 연주를 했다. 배역으로 춘향에는 소프라노 박순복, 도령에는 테너 안형일, 사또에는 베이스 이인영 등 23명이 맡았고, 합창은 김자경 오페라단 합창단이, 무용은 이화대학교 무용과에서 맡았다. 구성은 4막 5장으로 되었고, 1막은 광한루, 2막은 부용당, 3막은 동헌, 4막의 1장은 옥중, 2장은 동헌으로 되었다. 피날레를 춘향과 도령의 사랑가로 끝맺게 하고, 춘향전의 주제는 사랑에다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의 창작 오페라 공연사에서 볼 때, 8종 16회 공연 중에서 7회가 춘향전이었으므로, 춘향전이 한국창작 오페라의 정상임을 실증하여 준다.
춘향전의 뮤지컬화는 1968년 2월 예그린에서 박만규, 황성일 극본, 김희조 작곡, 임영웅 연출, 김백봉 안무로 시민회관에서 공연한 <대춘향전>에서 비롯된다. 예그린이 국립가무단에 편입된 후, 1974년 5월에 국립가무단이 박만규 극본, 김희조 작곡, 이기하 연출, 최현 안무로 국립극장에서 공연했다.
1984년 11월에는 박만규 극본, 연출에 김희조 작곡, 지휘로, 문일지, 정승희, 채상묵 안무의 <뮤지컬 성춘향>을 서울시립 6개 예술단체와 함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올림픽을 향한 무대로 막을 올렸다.
구성은 14장으로 서장은 눈이 내리는 들녘, 1장은 광한루 일대, 2장은 마을 어귀, 3장은 춘향이네 집, 4장은 마을 어귀, 5장은 만복사 경내, 6장은 춘향이네 집, 7장은 마을 어귀, 8장은 동헌, 9장은 마을 어귀, 10장은 장거리, 11장은 춘향이네 집, 12장은 옥중, 13장은 동헌으로 되어있다.
서장은 꽃샘 추위이듯 눈이 내리는 데 장옷을 입은 동네 처녀들이 봄을 그리는 여심을 춤 춘다. 어느덧 눈은 멎고 말끔히 개인다. 일년에 좁쌀 여덟 섬을 받는 방자에게 청춘을 맡길 수 없다며 향단이 앙탈을 한다. 방자는 춘향과 이몽룡의 연분을 맺어주는 중매값으로 논 섬지기를 받을 수 있다고 달랜다. 이때 방자와 향단이 이중창으로 <연분만 맺어주면>의 노래를 부른다.
이 작품은 판소리 춘향가의 구성 원리를 뮤지컬 춘향전으로 되살려 다듬으면서, 화려하고 다채로운 34개의 노래와 춤으로써 대규모화시켜 사랑의 흥겨운 분위기를 형상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Ⅲ. 초시대적 공감을 일으키는 고전으로서의 원리
한국인의 가슴 속에 영원한 고전으로 아로새겨질 수 있게 한 춘향전의 바탕은 주제와 서사구조의 탁월성에 있다.
춘향전의 주제나 서사구조는 개방적이고 생성적인 성격을 본질로 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탄력성을 생명으로 하는 춘향전은 각 시대와 개인의 취향에 따라 그 진화와 재창조를 계속할 수 있는 원초적 힘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현실과 소망, 시와 산문, 상층 언어와 하층 언어, 몰략과 상승, 슬픔과 기쁨, 헤어짐과 만남, 약한 자와 강한 자 등의 다양한 양극적 대립항들을 함께 갖추고 있다. 이들 사이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모든 계층의, 모든 상황의 한국인이 두루 관심을 표할 수 있는 보편적 문학소를 바탕으로 삼을 수 있었다.
또 고급문예가 지닐 수 있는 순수 예술적 요소와 대중문예가 추구하는 통속 예술적 요소를 교묘하게 배합하면서 인간의 본원적 문제의 하나인 사랑의 문제를 중심 주제로 담고 있다. 이 사랑의 긴장된 끈은 계층간의 갈등과 서민의 저항이란 사회성의 의미를 드러내고, 이완된 끈은 젊은이의 순수한 사랑과 애욕과 휴머니티로 연결된다. 이런 원심적 힘과 구심적 힘이 서사구조의 핵심이 되어 몇 개의 겹쳐진 동심원을 만들고 있다.
춘향의 사랑과 이별, 고난과 그 보상이란 밝음과 어둠, 어둠과 밝음의 순환적 교체 속에서 단순한 이야기지만 설화적 윤리성 이상의 짙은 인간적 삶의 본질을 맛보게 한다. 이 본질은 삶의 恨과 그 한스러움에 대한 풀이로서의 신명과 흥겨움으로 승화된다. 춘향의 이별과 기다림만도 서러운데, 죄 없이 옥에 갇혀 육체적 형벌을 당하는 모습은 이를 보는 월매와 향단만의 설움이 아닌 민족의 설움으로 그 의미망을 확장시키며 강력한 공감에의 호소력을 지니게 된다. 시련을 겪음으로서 더욱 성숙되며 숭고한 미를 드러내는 춘향의 아름다움은 곧 전형적 한국인의 미감으로 확장된다. 무한한 기다림과 소망을 향한 끈질긴 의지로서의 견디어내는 힘의 원천은 춘향의 의지만이 아닌 우리 민족의식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민족혼과 연결된다. 재난의 어둠을 어둠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더욱 밝아질 밝음을 향하는 시야야말로 가장 온전한 춘향의 모습이요, 민족의 슬기다. 이러한 정신이 춘향의 구원과 부활을 있게 하고, 한국인의 구원과 부활을 향한 정신적 지표다. 아무리 깊고 긴 어둠과 슬픔도, 그 끈질긴 헤쳐감의 힘 앞에는 굴복하는 춘향전의 주제는 표면으로는 열(烈) 이란 단순한 전통 윤리의 용어로 형상 된다.
사랑과 열이 하나로 통합되는 속에는 화합과 화평의 의미가 생성된다. 춘향과 도령을 젊은이의 사랑이란 끈으로서 연결지음으로써, 반민(班民)의 연계성을 지니게 한다. 기생 춘향과 어사 도령의 간격은 엄청난 사회적 거리의 양극 점에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애정의 거리는 이들을 하나되게 하는 합일점이 된다. 춘향과 도령의 이별이 그들이 지닌 계층간의 거리가 양극 점에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이는 변부사와 기생 춘향의 관계에서 더욱 첨예화된다. 그러나 관의 官으로 표상되는 어사(御使)는 오히려 민의 民으로 표상되는 기생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랑의 복선으로 인하여, 사회적 계층의 분리는 탈계층화에 의한 통합으로 지양되며 왕과 백성의 승인을 받는다. 새로운 서민상과 새로운 양반상의 이 화려한 재결합을 기존 사회의 보수적 관습을 뛰어넘는 탁월한 발상이다. 첨예화된 관민의 대결과 이러한 관민의 의미 있는 화해는 청자들을 발전적 친화감으로 묶는 대동적(大同的) 화해주의와 화평주의를 추구한 판소리의 본질이다.
구성진 가락에 실리는 흥겨움의 멋, 한스럽고도 신명이 날 수 있는 <흥한>의 창조적 만남이 판소리 예술의 정감(情感)이 지닌 멋이며, 춘향전의 멋이다. 기쁨 속에서 슬픔을 만들어 내고, 그 슬픔 속에서 다시 더 짙은 기쁨을 움트게 하는 전체 예술인의 혼이 깃든 슬기와 끈기가 춘향전을 300년 동안 끈질기게 계승하고 실험적 발전을 시켜온 한국인의 끈끈한 정감의 바탕이요 멋이다.
춘향전은 어는 천재적 작가에 의하여 완성된 완결형의 고전이 아니다. 평범한 한국인 모두의 슬기와 지혜의 응집이 영원히 지속되는 속에서 서서히, 그러나 끈질기게 성숙하는 진행형 고전이요, 항시 당시대적 현재의 살아있는 고전이다. 어떤 토속성도, 어떤 화려한 외래성과도 함께 만나 엉키고 어울리면서도 주체성을 지키는 열려진 판의 정신이 춘향정신의 바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