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프로그램

한국의 기층문화를 총점검한다

이중언어구조의 한국인




김병원 / 한양대학교 시청각교육 원장

1. 한국어는 미개한가 ?

한국어가 외국에 소개되는 경우를 보면 한국어는 미개한 언어라는 인상을 분명히 준다. 특히 한국어 학습 교재를 보면 그런 인상을 분명히 주고도 남는다.

미국 국무성에서 1968년에 발행하고 지금까지도 미국 정부의 한국어 교재로 보급하고 있는 BASIC COURSE 1권을 보자. 예컨대 47페이지에는 "-이/가"가 문장의 주어를 나타낸다고 되어 있고, 예문으로,"학교가 있습니다", "저 건물이 대사관입니다", "제가 한국말을 배웁니다", 등이 제시되었다. 한편, 29페이지를 보면, "-은/는"의 쓰임 예로, "저는 학생입니다", "제 이름은 제임스입니다", 등이 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결국, 주어의 어미는 두 가지이다.하나는 "-이/가"이고 또 하나는 "-은/는"이다.

한국 정부에서 써낸 교과서에서도 이런 예는 많다. 미국에 있는 한국계 어린이들을 위해 문교부가 1975년에 만든 <재미 어린이용 국어> 39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본문이 나온다.

·이것이 무엇이어요 ?

먹이어요.

·저것은 무엇이어요 ?

붓이어요.

이 예가 과연 실제 쓰이는 한국어의 보기가 될 수 있는가는 묻지 않기로 하고, 예에 나온 "∼이"와 "∼은"의 설명을 보자.

∼이(Subjective ending)

∼은(Subjective ending used to convey the meaning of 'then that...?')

위의 설명을 보면 "∼이"와 "∼은"의 쓰임은 주어 표시이다. 다만 "∼은"은 "저것은 ?"에만 쓰인다. 과연 그런가?

이런 예들 때문에 한국어가 마치 미개한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더구나, 영어와 한국어를 비교해 보자. 한국어에서는 주어 없는 문장이 얼마든지 있다. 단수와 복수의 표시가 없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영어의 the나 a, an과 같이 완전한 관사 기능을 갖는 표현도 없다. 이 외에는 영어에 비하면 "미개"하다고 오해할 수 있는 면을 한국어에서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외국에서 사는 한국계 2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서, 그 나라 언어를 잘 하고, 동시에 부모의 고향인 한국의 언어도 잘 하게 해 보자는 것이 한국에서의 이중언어 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어가 "미개 언어"라면 과연 한국어를 배워서 두 언어를 다 잘하려는 의욕을 가질 수 있을까 ?

한국어는 미개하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번져가는 가를 짐작하게 해 주는 예를 하나 들겠다. 얼마 전, 국내 어느 일간지에 "우리말이… 논리성이 다소 박약한 일면이 있다는 것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라는 내용의 보고가 있었다. 한국의 어느 교수가 쓴 한국의 역사책을 어느 미국 교수가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국어의 "논리성 박약"이 드러났다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예로 다음 두 예문이 실렸다.

예 1 : 망원경과 대포가 서양에서 들어왔다.

예 2 : 러시아 함대가 쳐들어 왔다.

예 1과 2를 영역하려면 "함대가 몇 개인지 망원경이 몇 개인지, 아니면 최소한 단수인지 복수인지를 밝혀야 하는데, 원저에는 그것이 표현되고 있지 않았던 것"이고 이런 예들을 근거로 한국어의 "미개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 미국인 교수는 이런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한국인 교수를 4년 동안에 60여 차례 만나야 했고, 한국인 교수는 다시 문헌을 찾아 문제점들을 보완하게 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정말 한국어가 미개하다면, 외국에서 외국어를 제1언어로 쓰면서 자라나는 2세들에게 부모의 언어인 한국어를 가르쳐 이중언어 사용자가 되게 하기는 지극히 절망적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미국 같은 경우 한국과의 국세 차이 때문에 한국을 무시하는 예가 비일비재한데, 언어 자체도 무시한다면 한국어를 배우려는 의욕을 일으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외국어 학습 효과를 크게 좌우하는 한 가지 요인은 그 외국어에 대한 태도이다. 한국어를 미개어로 낮추어 보고 있는 2세 어린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한국어는 미개어인가 ?"에 있다.

다음 항에서는 한국인 이민 인구가 그 어는 나라에 보다도 많은 미국의 이중언어 정책 전환을 살펴본 다음, 이중언어 구조를 파헤쳐 보고, 한국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겠다.

2. 이중언어 정책의 전환

미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계 미국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부모들의 언어를 배우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부모와 미국 정부 당국도 그들에게 부모의 언어를 가르치지 않으려고 함도 사실이다. 미국의 이중언어 문제는 크다. 어느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1980년 현재 미국 국민 중 약 3천만 명이 영어 이외의 언어를 제1언어로 갖고 있으면서 영어를 제2언어로 배우고 있었다. 그 수가 1990년에는 3천 4백만이 되고, 2000년에는 4천만에 육박할 것이라고 추산되었다. 따라서 그 많은 이중언어 학습자들과 그들의 2세에 대한 언어문화의 문제는 미국의 중요한 정치적·교육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이중언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그 당시 이중언어 문제는 미국의 "교육적 위기"라고 해석되었다. 이 이중언어 문제의 "위기"의식에는 몇 가지 오해가 깔려 있었다. 첫째,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미국 내에서 비대해지면, 하나의 정치 세력을 형성해서 미국을 정치적으로 분열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근거는 언어가 사고방식과 생활문화를 지배한다는데 있었다. 둘째, 영어 이외의 언어를 계속 사용하면서 영어를 배우면 영어를 잘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중언어는 새로운 언어의 미숙을 전제로 한다. 그렇게 되면 전반적인 학습을 통한 교육효과가 낮아져서 국민으로서의 미흡한 교육 결과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의 근거는 인간 두뇌의 언어기능을 단일체제로 보는데 있었다. 결국, 이중언어로 인한 교육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1968년 미국 역사상 최초로 "이중언어 교육법안"이 국회를 통과, "이중언어 교육국"이 생겼다. 또, 미국 연방정부 차원의 "이중언어 교육 자문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이중언어 교육은 어디까지나 영어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이중언어의 해결방안이었다.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이민 온 이들에게 영어를 무상으로 가르치고, 영어를 잘할 수 있을 때까지는 모국어로 수업을 진행해 주는 법적, 교육적, 재정적 조치였다.

구체적으로 "이중언어 교육법"을 보면, 일단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계속 그 어린이의 제1언어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 내용은 구성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영어 사용 능력이 개발되면 즉시 제1언어의 사용을 중단하고 영어만 사용하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은 것이다. 그러다가, 1974년, "이중언어 교육 자문위원회"가 국회와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중언어"란 용어 대신에 "이중언어-이중문화교육"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한마디로 제1언어 보존 정책의 건의였다. 그 의도는 이중언어 정책에서 영어사용 능력을 기르게 하는 일에만 초점을 맞춘 점을 비판, 제1언어도 보존케 해서, 능숙한 이중언어의 구사 능력을 길러주자는 데 있었다. "이중언어"에 "이중문화"를 붙인 것은, 제1언어의 보존이 곧 그 문화의 보존으로 간주되었음을 나타낸다. 복합 문화국가로서의 미국이 세계를 대표하는 합중국이 되려면 세계 온갖 국가에서 문화를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후 1978년에는 이중언어 교육법이 개정되어서 "……영어를 사용할 줄 아는 어린이들도 이중언어 지도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으나, 거기에 해당되는 어린이의 비율이 40퍼센트를 넘을 수 는 없다"고 되었다. 또한, 1979년 대통령의 "외국어와 국제연구 자문위원회"는 이민 온 이들이 영어 이외의 언어 배경을 갖고 있음을 문제점으로 본 것은 잘못이었다고 지적하고, 오히려 그들의 외국어 배경은 미국의 "자산"이라고 규명하였다. 따라서 이민 온 이들이 자기네 언어를 계속 공부하도록 하고 자기들의 문화 배경을 계속 유지하도록 하는 법적 조치를 취해야 옳다는 건의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현재 갖고 있는 언어 자원을 개발하기 위하여 영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를 배경으로 갖고 있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모국어를 공부할 기회를 학교가 부여하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현재까지 밀어 오고 있는 이중언어-이중문화정책이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가는 논외로 치자. 다만, 미국에서 제1언어 능력을 살리려는 정책이 머리를 들게 된 이유가 우리에게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앞서 밝혔듯이, 1974년에 들어서서 "이중언어"에 "이중문화"를 덧붙여서 생각하게 되기 이전까지의 이중언어 정책은 제1언어에서 탈피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고, 두 개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릇된 이유에서였다. 언어가 사고와 문화를 지배하므로 영어 이외의 언어 세계가 정치, 문화적 파벌을 조성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지극히 단순한 오판이었다. 또, 제1언어를 잊게 해야 한다는, 역시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오판에 불과한 이유에서 정해진 정책이었다.

그러나 주로 심리언어학의 연구 결과에 근거를 둔 각계의 보고서들은 첫째, 사고와 문화가 언어를 지배함을 밝혔다. 언어가 사고와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두 언어에 익숙한 사람의 두뇌가 제1언어를 사용할 땐 제1언어 조직 전체를 움직이고, 제2언어를 사용할 땐 제1언어와 관계없이 제2언어 조직 전체를 움직인다. 누구나 두 가지 언어에 능통할 수 있다. 두 가지 언어에 능숙한 이중언어자는 그만큼 노력을 해서 두 언어에 능숙하게 되었고 따라서 두뇌 기능발달도 단일언어자의 경우보다 앞선다. 이런 연구 결과 보고들을 근거로, 미국의 외국어교육학회, 현대언어학회, 응용언어연구소 등이 공동으로 "모국어 보존"정책 수립을 건의했던 것이다. 이점이 우리에게는 교훈이다.

3. 이중언어 구조의 실상

인간의 사고구조와 문화배경이 언어를 지배한다. 언어가 사고구조와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외국에 있는 한국인 2세에게 한국어만을 가르친다고 해서 한국어가 목표 수준까지 가르쳐질까 ? 설사 한국어 자체는 어는 정도까지 교육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고구조와 문화배경이 한국인의 것과 전혀 다르다면 그 이중언어 교육의 성격이 "이중언어-이중문화" 정신에 부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외국의 한국계인들이 이중언어-이중문화를 갖춘 새시대의 "국제인"이 되기를 바란다. 외국으로 이민을 가서도 한국어만 하고 한국식 사고방식에 한국문화를 지키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새시대의 국제인들 중에 한국을 배경으로 가진 국제인들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언어뿐 아니라 언어와 같이 다니는 사고 방식과 문화도 한국적인 면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언어와 관련한 사고의 차이나 문화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 가령 미국인의 사고와 문화배경이 한국인의 사고와 문화 배경과 전혀 다르다는 것인가 ? 전혀 다를 리는 없다. 그들도, 우리들도 모두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없겠는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서로 다를 것이다.

한국어와 관련된 두 가지 면을 택해서 영어식과 한국어식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들여다보자. 우선, 단어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어서 이어진 말이나 글의 구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단어의 개념은 가장 작은 사고구조로 인정되고, 긴 이야기의 구조는 언어로서 가장 큰 구조에 해당하므로, 그 양자를 택해서 한국식과 영어식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1) 개념조직의 비교

사람의 사고과정은 개념들로 구성된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생각의 최소 단위를 개념, 즉 단어의 의미라고 보자. 개념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뇌 속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개념 하나하나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서로 무관하게 흐트러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이 기억되는 현상이나, 말할 때 관계 있는 개념들이 이어져 나오는 현상 등을 보면, 뇌 속의 개념들 사이에 어떤 관계에 의한 조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비슷한 개념끼리는 동일한 집단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범죄를 이야기할 때, 살인이니 절도니 하는 개념은 쉽게 연상되어 튀어나온다. 그러다가 범죄와 다른 범주의 개념이 거기에 끼어 들기는 힘들다. 만일 범죄가 아닌, 예컨대 과학과 같은 범주의 용어가 끼어 든다면, 우리는 그것을 범죄와 연관시켜서 범죄의 과학적 수사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순수하게 과학 자체를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다. 이는 별로 새삼스러울 것 없는 경험세계의 일이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개념끼리 집단으로 모아서 "범주"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예컨대 살인, 절도, 공갈, 횡령, 폭력 등은 "죄"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화학이니, 생물학이니, 해부학, 지질학, 사회학 등은 "과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동일한 양상들을 갖고 있어서 동일범주에 속해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한 범주 속에 소속 개념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죄의 범주 속에 들어가는 여러 개념들은 그것들 사이에 어떤 조직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무관한 모래알의 흩어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한 범주 속의 개념들 중에는 그 범주 속에서 가장 쉽게 떠오르는 개념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비해 보다 덜 쉽게 떠오르는 개념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죄"라는 생각이 가장 쉽게 대표되는 것은 살인일 수 있다. 아니면 절도일 수도 있다. 공갈일 수도 있다. 여하튼 어느 것인가 그 집단의 가장 대표격이 있을 것이 아닌가 ? 나머지들도 그 집단의 성격이 많은 것도 있고 비교적 적은 것도 있을 것이다. 이런 대표성의 차이를 찾아서 그것을 "개념 조직"이라고 하자.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인의 어휘 개념 조직과 한국인의 어휘 개념 조직은 서로 동일할까 ? 다를까 ? 아니면 동일한 범주도 있고 서로 다른 범주도 있을까 ?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모두 동일하다고 보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반드시 동일하지만은 아닌 것임을 예견할 수 있다. 도대체 그런 개념 조직은 어디서 기인할까 ? 그것은 생활 속에서 겪고 생각한 것들의 반영일 것이다. 만일,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체조하던 경험이 "운동"으로서는 가장 횟수가 많은 것이었고, 생각에서도 체조가 중요하다고 여겨졌다면, "운동" 범주에서 체조가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역도 선수이다. 그렇다면 아마 십중팔구 역도가 그에게는 대표적인 운동일 것이다. 개념조직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의 반영이라면, 미국인의 개념 조직과 한국인의 개념 조직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삶의 겪음과 생각에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삶과 생각에 차이가 없다면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간에 개념 조직에서 이질적인 면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최근 필자가 지도한 한양대학교의 한 석사학위 논문(심재영, 1985)을 위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대학생들과 한국 대학생들에게 동일한 내용의 개념 범주와 개념들을 제시하고, 각 범주에 속하는 개념들의 대표성을 생각대로 표시하되, 가장 대표적인 것은 1에 표시하고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닌 것은 7에 표시하도록 했다. 그 사이에 2, 3, 4, 5, 6의 등급을 두게 했다. 그 실험결과를 여기에 소개한다.

우선 "죄"와 "과학"의 범주에서는 한·미가 동일한 개념조직을 갖고 있었다. 아래의 숫자는 대표성이 가장 강한 1부터 약한 7까지의 대표성 정도의 평균치이다.

한 : 살인-절도-폭력-공갈-횡령-방랑

1.0 1.8 2.3 3.0 3.3 6.2

미 : 1.0 1.3 1.4 1.7 1.8 5.3

과학

한 : 화학-생물-해부-지질-사회-역사

1.3 2.0 3.2 3.4 5.1 5.3

미 : 1.0 1.7 1.7 2.6 4.6 5.9

즉, 한국인도 미국인도, 범죄의 대표 예는 살인이고 과학의 대표 예는 화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머지 범죄와 과학에 속하는 개념들의 대표성도 양쪽이 동일한 순위를 보인다. 그런데, 고딕체로 나타낸 수치들은 대표성이 1에서 1.9에 이르기까지 높은 것들이다. 이들을 비교하면, 범죄의 경우 한국인은 살인과 절도를 대표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비해, 미국인들은 살인과 절도뿐 아니라, 폭력, 공갈, 횡령까지도 대표적인 범죄로 생각한다는 데 차이를 보인다. 과학에서도, 한국인은 화학만이 분명하게 대표성을 띠는데 비해, 미국인은 화학, 생물, 해부학까지도 과학의 대표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편, 개념 범주별 대표 예는 동일한데 나머지 예들의 순위가 서로 다른 경우를 보자. "질병"과 "야채"의 경우만을 소개한다.

질병

한 : 암 -감기-홍역-말라리아-류마티즘-근육장애

1.7 2.1 3.1 3.3 3.7 5.1

미 : 암-말라리아-근육장애-홍역-류마티즘-감기

1.2 1.4 1.9 2.8 3.5 4.7

야채

한 : 홍당무-양파-샐러리-피클-파슬리-아스파라거스

1.7 2.1 2.7 3.7 3.7 5.0

미 : 홍당무-아스파라거스-샐러리-양파-파슬리-피클

1.1 1.3 1.7 2.7 3.8 4.4

질병의 대표 예는 한-미 모두 암으로 나타났다. 야채의 대표 예도 역시 한-미 동일하게 홍당무로 나타났다.

그러나, 질병의 경우를 보자. 한국인은 감기를 질병의 두 번째 대표 예로 보는데 비해, 미국인은 감기를 질병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인은 근육장애를 세 번째 대표 예로 든다. 한국인은 말라리아를 중간의 예로 치는데, 미국인은 질병의 두 번째 대표 예로 말라리아를 든다.

야채의 경우에는 그 반대의 현상을 나타낸다. 한국인은 아스파라거스를 야채로 치지 않지만, 미국인은 야채의 대표 예인 홍당무와 거의 동일하게 아스파라거스를 대표적인 것으로 친다. 한편, 한국인은 양파를 야채의 두 번째 대표 예로 치는데, 미국인은 네 번째로 치고, 한국인은 피클을 네 번째 예로 치는데, 미국인은 피클을 야채로 치지 않을 정도이다. 다음에는 한국인과 미국인의 의미 범주 조직이 전혀 다른 경우를 보자.

한 : 독수리-타조-박쥐-병아리-울새-굴뚝새

1.2 3.2 3.7 5.1 5.9 6.0

미 : 울새-독수리-굴뚝새-타조-병아리-박쥐

1.1 1.2 1.4 3.3 3.8 5.8

운동

한 : 체조-미식축구-레슬링-역도-하키-궁도

2.2 2.4 2.6 2.9 3.2 3.9

미 : 미식축구-하키-체조-레슬링-궁도-역도

1.2 1.8 2.6 3.0 3.9 4.7

한국인은 독수리가 새의 대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인은 울새가 새의 대표라고 생각한다, 한국인 중에는 울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한국인 중에는 굴뚝새를 새로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미국인은 굴뚝새를, 울새와 독수리와 함께, 중요한 새의 예로 들고 있다. 한국인의 경우엔 타조와 박쥐가 독수리 다음가는 예인데 비해, 미국인의 경우엔 각각 네 번째와 끝에 오는 예이다. 즉, 타조와 박쥐는 새로 치지 않는 이들이 미국에는 많다고 볼 수 있다.

운동의 대표적 예로 한국인은 체조를 친다. 그리고 하키는 궁도와 함께 운동의 예 중에서 가장 끝에 온다. 그러나 미국인은 미식축구와 하키를 가장 대표적인 운동으로 친다.

위에 간단히 소개한 연구의 결과는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의미의 조직과 미국인이 갖고 있는 의미의 조직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 준다. 이것으로 왜 그런가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죄"의 개념 범주는 인간 공통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고, "과학"은 학문과 교육의 세계에서 보면, 역시 세계 공통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개념 범주의 조직이 한국인의 경우와 미국인의 경우, 서로 동일하게 나타난 점은, 인류-세계의 공통 개념 조직이란 점에서 충분하게 이해가 간다. 거기에 비해, 질병과 야채의 경우, 그들의 대표 예는 동일하지만 나머지 개념들의 대표성은 한-미간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더욱이 새와 운동의 경우에는 대표 예부터 서로 다르고, 나머지 개념들의 대표성 정도도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을 보아서, 지역에 맞는 자연 조건과 관계 있는 경우(질병과 새)와 문화적 배경(야채와 운동)의 경우에는 한국인과 미국인의 의미 조직 또는 생각의 구조가 서로 동일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 영어도 몇 마디하고 한국어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미국식으로 또는 한국식으로 생각도 하고 의미 파악도 한다고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 사람이 영어식, 그리고 한국식 의미 조직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가를 알아야만, 진정 두 언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미국에 있는 한국인 2세에게 한국말만 좀 가르친다고 "한국적"이 되리라는 쉬운 기대는 하지 말자. 그들의 의미 조직과 사고 방식이 한국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적 조치가 요구된다. 여기에서, 누구나 두 가지 이상의 언어 의미조직과 사고 방식을 동시에 갖추고, 각각을 목적에 따라 별도의 조직체로 기능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할 것 같다. 만일 한 사람이 한 가지 의미 조직과 사고 방식만 갖추어 쓸 수 있다면, 미국 시민이 된 한국인 2세에게 한국식 교육을 시도하거나, 한국에 있는 한국인 젊은이들에게 영어식 의미 조직 내지는 사고 방식을 교육하면, 정치적 문화적 "문제"가 생길 것이다.

(2) 이야기 심리조직의 비교

이번에는 단어의 개념 범위보다 훨씬 큰, 이어진 말이나 글의 조직을 통한 의미와 사고 구조를 살펴보자.

사람은 이야기를 즐긴다. 그것이 사실이든 꾸며낸 이야기든, 이야기는 들어도 즐겁고 읽어도 재미있다. 그래서 문학의 중요한 부분이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야기를 통한 즐거움은 이야기를 이해함을 전제로 한다. 이해가 안가는 이야기를 즐길 수는 없다. 모든 이야기는 이해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야기 만드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이들의 이해 가능성을 바탕으로 이야기 구성을 시도한다.

이야기의 이해는 듣는이나 읽는이의 능동적 의미 재구성 과정이다.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이는 그 순간자신이 스스로 이야기의 의미를 머릿속에 구성해 나간다. 듣거나 읽는 말과 글의 의미가 뇌에 의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말과 글은 의미 재구성 매체일 뿐이고, 그 매체를 근거로 사람들은 의미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해 나간다.

의미의 능동적 재구성은 자신의 이야기 "심리조직"에 근거를 둔다. 사람 머리는 전체 방향을 예견하고 구체적인 부분을 이끌어 나가는 심리조직 기능을 갖고 있다. 이 심리조직은 모든 인간의 행동 방향을 잡아 주고 대부분 행동을 이끌어 간다.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듣거나 읽을 때, 사람들은 전체 구조를 예견하면서 부분부분의 의미를 재구성해 나간다.

이야기 심리조직이 이야기의 구성과 일치하면, 내용의 이해가 쉽다. 만일 듣거나 읽는이의 심리조직과 그 이야기의 구조가 서로 다르면, 내용 이해가 어렵거나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되면 그 이야기에 흥미를 잃게 된다.

사람의 이야기 심리조직은 그 나라 말과 글로 흔히 들려주고 읽히는 이야기 구조의 반영이다. 한국인이 한국식 이야기를 많이 듣고 읽으면 한국식 이야기 이해에 알맞은 이야기 심리조직을 갖추게 된다. 미국인은 미국식 이야기를 많이 듣고 읽으면서 자라게 되므로 거기에 알맞은 이야기 심리조직을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 이야기와 미국 이야기의 이야기 구조를 서로 비교 대조해 보면, 양쪽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 심리조직을 서로 비교 대조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될 것이다.

한국인의 이야기 심리조직은 미국인의 이야기 심리조직과 동일할까 ? 서로 다를까 ? 얼른 생각건대 동일할 것 같다. 최근의 이 분야의 연구 결과 하나를 소개하겠다. 이것은 필자가 지도한 한 석사과정 연구결과(박정성, 1985)이다.

한국 어린이들이 흔히 듣고 읽는 이야기 중에서 세 가지를 분석했다. 하나는 "해님과 달님"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혹부리 할아버지와 도깨비", 그리고 또 하나는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다. 이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이런 것들이다. 첫째, 모두 "배경-줄거리-결과"의 순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다. 둘째, 줄거리는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는데, 서로 독립된 것이 아니고, 어느 한쪽이 중심인데 비해 나머지는 거기에 부수되어 있다. 예컨데, 엄마와 남매가 있었다.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는 엄마를 잡아먹었다. 남매도 잡아먹으려고 한다. 남매는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나쁜 호랑이는 죽는다. 이렇게 전개된, 배경-줄거리-결과는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이다. 그런데 거기에 이어서, 남매가 해와 달이 된 이야기가 별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뒤따른다. 앞부분에 비해 뒷부분은 "뒷이야기"일 뿐이다.

혹부리 할아버지와 도깨비 이야기와 호랑이와 곶감이야기에서는 뒷 부분이 중심이야기이다. 앞부분은 뒷부분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혹부리 할아버지가 보물을 얻게 되고, 대신 혹을 떼버린 것은, 주제가 없이 전개된 뒷이야기의 "배경"에 불과하다. 뒷부분에서는 욕심쟁이가 의도를 가지고 줄거리를 형성해 나간다. 결국 보물은 얻지 못하고 혹만 하나 더 얻게 된다. 뒷부분만으로는 독립된 이야기가 될 수 있으나 앞부분이 있으므로 인해서 이야기 전체가 양자 비교의 좋은 조화를 이룬다. 호랑이와 곶감에서도 앞부분은 "배경"이다. 우는 애를 달래려고 "곶감"을 거론하는 엄마의 소리를 우연히 호랑이가 듣는다. 뒷부분에서는 여우가 목적 달성을 위해서 이야기 줄거리를 이끌어 간다. 결국 여우의 거짓 행세가 탄로 나고 여우들은 죽게 된다.

셋째, 이야기에 제시된 또는 암시된 목적과 무관한 사실들의 묘사가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해님과 달님 이야기에서 호랑이가 엄마를 잡아먹고 또 남매도 잡아먹으려는 내용은, 남매의 처지를 동정하게 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호랑이의 잡아먹으려는 의도 실현노력과 가련한 남매의 처지 묘사는 문학적이고 사실적이다. 목적을 실현시키려는 이야기의 줄거리 전개만은 아니다. 해가 되고 달이 되는 부분은 더욱 그렇다. 혹부리 이야기도, 목적의 실현 내부와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는 풍부한 자연적 사실적 묘사가 많다.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에서 우는 아기를 달래려는 엄마의 행동과 호랑이의 배회함을 묘사한 부분들은 모두 비의도적인 자연적 사실적 묘사일 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영어로 되어 있는 이야기의 분석 결과는 놀랄 만큼 큰 차이를 보인다. 이야기 전체를 배경-줄거리-결과로 구성한다는 점은, 한국어 이야기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영어로 되어있는 이야기들은, 예컨대 암탉 이야기나, 소년과 염소, 어린 병아리 이야기 등은 각각 작은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많은 에피소드들은 동일한 패턴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 예컨대, 암탉이 씨앗을 발견한다. 암탉은 고양이와 돼지와 개에게 누가 그 밀씨앗을 심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한결같이 거절해 버린다. 그래서 암탉이 밀씨를 심는다. 밀이 자란다. 베어야 한다. 누가 베겠느냐고 물으나, 모두 거절하여 암탉이 벤다. 누가 털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여전히 모두 거절하여 암탉이 턴다. 그리고 또 누가 빻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모두 거절하여 암탉이 빻는다. 누가 빵을 만들겠냐고 묻는다. 모두 거절하여 암탉이 빵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누가 먹겠느냐고 묻는다. 그랬더니 모두 자기가 먹겠다고 한다. 그러나 암탉은 먹는 일도 자기가 한다. 동일한 주제, "일해야 먹는다"를 놓고, 동일한 패턴으로 에피소드들을 여럿 이어나간다. 동일 패턴 속에서 최종 것은 구조적으로 주제의 의미를 굳힌다. 소년과 염소 이야기도, 어린 병아리 이야기도, 동일 패턴의 각 에피소드가 전개되고, 그 구조적 전개 과정을 추적하게 되면 결국 주제의 의의가 뚜렷해진다. 그리고, 한국어 이야기에서는 자연적이고 사실적인 묘사가 많은 양을 차지한데 비해서, 영어 이야기는 원인과 결과가 패턴 전개의 근거가 된다. 에피소드마다 인과 관계가 드러난다. 전체 줄거리도 인과 관계로 엮어졌다. 목적 없이 행위가 전개되거나 원인이 없었는데 그저 그렇게 되어 버렸다는 식의 "결과"는 없다. 반드시 결과에는 원인이,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

이렇게 구조가 다른 한국 이야기와 미국 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읽으면서 형성된 이야기 심리조직들은 서로 다르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표현에 사용된 언어 형태를 알고 모름과, 내용 이해는 서로 다를 수 있다. 즉, 미국에서 자란 한국계 2세가 한국 이야기를 영어로 듣거나 읽을 때, 과연 어떻게 이해해 나갈까 ? 이해란 표현된 언어를 근거로 능동적인 의미 재구성 과정을 거치는 것인데, 영어 이야기식 심리조직을 근거로 한국어 이야기의 구조적 전개를 예견하면서 따라가고, 또한 기억해서 재구성할 수 있을까 ? 거꾸로 한국어 이야기 심리조직을 근거로 영어식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역시 어려움과 불가능함이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의 이야기 심리조직이 우세하고 열등함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어 세계의 사고와 문화가 영어 세계의 것과는 다르다는데 있다. 이 상이함 때문에, 한국의 것을 좋게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식 사고 방식이나 문화를 열등하고 미개하게 볼 가능성이 있다. 한국적인 것을 가르치고 심어주려는 노력이 외국에 있는 한국인 2세를 대상으로 한 이중언어 교육이라면, 어떤 연구와 방법이 필요할까 ? 이중언어 교육이, 한글이나 가르치고 말 몇 마디에 익숙하게 해주는 것으로 다 되지는 않는다. 한국적인 것 전체의 윤곽부터 바로잡고, 그 속의 일부분으로 한국어의 의미 조직과 사고 방식을, 우리 스스로 바로 이해하기 위한 연구를 선행시키면서 방법을 모색, 계속 연구 개발해 나가야 비로소 이중언어 교육의 실효를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4. 한국어의 새로운 인식

언어는 표현 형식과 의미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형식이 존재하듯 의미도 존재한다. 의미 면에서 한국어와 영어는 서로 다른 점이 많다. 위에서 우리는 단어의 개념들이 서로 얽혀있는 개념 조직에서도, 한국어의 개념 조직과 영어의 개념 조직이 서로 다른 면을 보았다. 또한, 더 큰 단위인 이어진 말과 글의 경우에는 각각의 조직은 크게 다른 면을 갖고 있음을 보았다.

한국어의 의미 조직은 영어의 의미 조직과 다르다.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열등하거나 미개하다고 봄은 잘못이다. 예컨대, 한국어 이야기 구조에서 앞부분이나 뒷부분이 일정한 패턴 없이, 또는 인과관계 없이, 또는 주제와 관계없이 전개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영어 이야기 구조보다 미개한 것은 아니다. 이야기는 흥미를 전제로 한다. 흥미 있게 하려고 특정 패턴 없이, 예견 못할 우연한 사건을 전개시킨다.

"무관"하다고 하지만 결국 커다란 진리, 즉 선과 악에 대한 하늘의 뜻이 이유가 되어, 전체가 큰 덩어리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이는 마치 성인 세계의 소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어린이 이야기의 성숙한 형태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어 이야기가 열등한 것은 아니다.

한국어 의미 조직의 특성 자체의 확인과 그것의 가치를 새로 인식해야 한다. 이 새로운 발견과 인식이 없이는 한국어를 제2언어로 보급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열등하다면, 열등한 언어가 보급될 수 있을까 ? 당장 생활에 필요한 것도 아니라면, 열등한 것을 누가 배워서 쓰려고 할까 ? "모국어이니까 배우라 ! "고는 하지 말자. 이민간 사람들은 그 나라를 "모국"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어야만 "성공"한다. 한국어는 한국어로서의 독특한 의미 구조와 문화 배경을 갖고 있음이 인식되고, 단순히 제2언어로서, 또 제2의 문화로서, 한국어를 익힐 이유가 있을 때 이중언어 교육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이제는 한국어의 표면 구조에 대해 잠시 새로운 인식을 시도해 보자. 이 글의 서두에서 한국어는 미개한 언어인가 하고 물었다. 표현면에서 에컨대, 주어가 생략된 문장이 많고 두 가지의 "주어 표시"가 구별도 되어 있지 않고, 단·복수의 표시도 하지 않는다는 등, 여러 가지 "비논리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었다. 과연 한국어는 미개 언어인가 ?

한마디로, 한국어도 영어나 기타 어느 언어와도 마찬가지로, 완성된 완전한 인간 언어의 하나이다. 인간 언어는, 어느 언어를 막론하고, 전체의 완성된 조직이 결정하는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서 부분 부분의 형태를 결정한다. 한국어도 그 자체가 완성된 완전한 하나의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 전체를, 통일된 거대한 법칙으로 이해하고, 그 속의 작은 부분을 살펴보면, 한국어는 놀라운 언어이다. 예컨대, 최근에 필자가 연구하여 발표한 작은 논문(이중언어학회지 2호, 1985)내용에 의하면, 또 하나의 "주어" 의미로만 주로 소개되어 오던 -은/는의 용법이 분명하고, 주어의 생략이 하나의 법칙에 의한 것임이 드러났다.

한국어에서는, 이어진 말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법칙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거기에 비하면 영어에서는 문장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법칙이 더 많이 발달되어 있다. 한국어에서는 이어진 말이나 글을 구성하는데 요구되는 법칙이 문장을 형성하는 법칙을 지배하는 예가 많다. 영어에도 그런 면이 있다.

한국어와 영어의 이어진 말이나 글을 비교해 보면, 문장 수준에서 서로 크게 달라 보이던 언어 표현 법칙들이 "동일한 면"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각 완성된 전체 시스템 속에서 작은 것들이 결정되므로, 한국어와 영어를 작은 단위에서 비교하면 서로 다르기만 한 것이다.

이어진 말이나 글을 단위로 그 구성 법칙을 연구하는데 가장 먼저 취급하게 되는 것은, 서로의 의사소통을 위한 주제 표시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이다. 그런데 의사소통에서 주제가 공동으로 확인되지 아니하면, 의사의 교환을 계속할 수 없게 된다.

한국어와 영어에서 어떻게 주제 표시를 하고 있는가를 확인하여 서로 비교하여 보았다. 한국과 미국의 초등학교 5학년들에게 각각 자기네 나라 언어로 동일한 그림을 보고, 지시에 따라 작문을 하게 했다. 그 그림과 지시는 두 가지의 주제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 하나는 소년이고, 또 하나는 로버트였다. 보여준 그림은 한 소년이 승강기 앞에 서서, 문이 열린 승강기 앞에 서 있는 로버트를 보고 놀라거나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소년과 로버트에 대해, 어디서 왔으며, 왜 그런지, 어떻게 될 것인가 등을 물은 다음, 그런 질문에 답을 생각하며, 하나의 이야기를 꾸미라는 지시였다.

어린이들이 쓴 작품들에는, 결국 소년과 로버트를 뚜렷한 주제로 나타내고 있다. 이 두 개의 주제가 어떻게 등장되고, 이어지고, 사라지는가 ? 그때의 출현형태에서, 공통 법칙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 등이 연구 문제였다.

복잡한 분석 과정을 거쳐서 결과를 얻었다. 이제 그 결과를 비교하여 보자. 우선 한국어 이야기들의 분석 결과부터 보자. 첫째, 한국어에서는 이야기의 주제를 결정적으로 표시하기 전에, 그 주제를 먼저 "주제후보"로 소개하는 예는 80%였다. 즉, 대부분의 경우 소년이면 소년, 로버트면 로버트를 출현시킨 다음 그것이 주제임을 언어 법칙에 따라 표시한다. 처음 그 개념을 주제후보로 소개할 때에는 대개 "-이/가"(75%)의 형식을 취했고 "-을/를"(5%)의 형식을 취할 때도 있다.

일단, 어떤 개념이 주제 후보로 소개된 후, 그것이 주제임을 드러낼 때는 "-은/는"을 쓴다. 간혹 "주제‘은/는"이 생략되는 예도 있다(15%). 그 경우에는, 그에 앞선 주제 후보의 등장이 주제 표시를 겸하고 만것이다. 그 이외에는 언제나 주제 표시는 "-은/는"으로 한다.

주제가 표시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주제를 생략한다. 간혹 주제 개념이 문장에 나타날 때에도 있는데 그땐 "-은/는" 이외의 어미, 예컨대, "-이/가" 등을 동반한다.

그러다가 주제가 바뀌면, 새 주어의 소개-주제 표시-생략 등의 순으로, 새로운 주제에 대한 처리가 전개된다. 이 사실이 드러내는 면은, 첫째, "-은/는"은 주제 표시이다. "-이/가"와 같은 문장의 주어 어미가 아니다. 간혹 "-은/는"이, 주어 자리에서 주제 표시 기능을 발휘할 때도 있을 수 있다. 그때는 "-은/는 "이 주어 역할 겸 주제 표시를 한다. 이것을 모르고, "-은"과 "-이"를 모두 주어 어미로 설명한 다든지, "-은/는"을 대조니 강조니 하는 덜 중요한 기능으로 소개하면, 한국어를 미개어로 오해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 주어의 생략은 주제의 반복을 피하는 언어 경제 원칙에 따른 법칙이다. 따라서, 주어 없는 문장을 이어진 말이나 글에서 떼어내어 논의하여, 한국어를 미개어로 오해하게 만들고 만다.

영어는 어떠한가 ? 영어에서는 주제 후보의 등장 시, 관사 a나 an을 쓴다. 주제 표시는 관사 the가 맡는다(the+명사=75% ; 고유명사=10%). 간혹 대명사가 주제 표시를 대신하기도 하는데(15%), 이 경우에는 그에 앞선 주제 후보 소개가 표시를 겸하고 만 예이다.

주제가 표시되고 나면, 그 주제 개념은 대명사로 나타낸다. 주제 표시의 the‘명사형이 다시 나타나지도 않고, 한국어에서처럼 대명사가 생략되어 버리지도 않는다.

이상으로 우리는, 큰 시스템 속에서 작은 부분의 문법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보았다. 작은 부분만 놓고 보면, 한국어의 "이중주어"나 "무주어 문장" 등은 이해 못할 언어표현 형태인 듯하다. 그러나 더 큰 이어진 말과 글의 구성 법칙, 그리고 기능으로서의 언어 형태를 보면, 그런 것은 모두 통일된 일련의 법칙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한국어는 완전한 언어이다. 다른 법칙들의 경우에도 한국어는 불완전하거나 미개하지 않다. 예컨대, "망원경과 대표가 서양에서 들어왔다." 그 글을 쓰는 순간, 필자는 일반화된 문장 개념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만일 그 필자가 망원경과 대포의 수를 표시하여 구체적인 수준의 진술을 하려면, 복수 표시 "-들"을 썼을 수 있고 "망원경 ⁓대와 대포 ⁓문"이라고 나타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문장 전체 의미가 추상적인 수준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단·복수 개념을 표시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수준인데도 만일 단·복수를 얼버무렸다면, 그것은 그 필자의 언어 표현력의 문제이다. 한국어의 표현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5. 맺는말

높은 수준의 이중언어력을 갖춘 한국인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의 표현 시스템과 동시에 그 두 언어의 서로 다른 의미 조직과 문화 배경을 갖춘 사람들이다. 외국에 있는 한국인 2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면 그 점을 잊지 말자. 한국어의 완성된 면, 영어 세계와의 다른 면에서 독특한 면을 더 연구하자. 이중문화 정책을 쓰는 미국의 지혜를 보라. 한국어가 "모국어"이니 당연히 알아야 된다는 이중언어 교육태도에는 반성할 면이 있다. 그보다도, 하나의 언어를 더함이 유일함을 깨우쳐주고 한국어를 익힘이 유리할 경우, 그것을 바르게 잘 배운 이중언어 구조의 한국인들이 되도록 도와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