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상좌담 : 예술행정과 문화촉매운동에 관하여

예술행정과 문화촉매운동에 관하여




유경환 / 조선일보 논설위원

이강수 / 한양대 교수, 신문방송학

목철수 / MBC·TV 문화부 차장

⹁ 우리 문화의 가장 큰 취약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그 극복방법은 무엇입니까?

유경환 : 우리 문화의 가장 큰 취약점은 너무 時流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그러한 문화창작인 내지 종사자들의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시류라고 말한 것은, 대중매체에 나타나는 시기적인 분위기라고 좁혀 말할 수가 있다. 대중매체의 보급확산이 없었을 때에 오히려 진정한 가치의 문화가 생성되었던 실례를 연역해 본다면, 보다 쉽게 짚어볼 수가 있는 사실이다.

당대의 문화향수자가 내리는 평가는 거의 상대적인 평가이지, 절대적인 것이 될 수가 없다. 그런데 문화창조자 내지 문화종사자들이, 성취동기만 대중매체에서 자극 받는 것이 아니라 반응평가까지 자극 받고자 하는 태도를 지니기 때문에, 성숙될 여유를 못 가지게 된다.

성장이 아니라 성취라는 것을 최정호 교수도 분명히 말했다.

대중매체가 다루는 문화라는 것에는, 문화의 物象化나 허위문화(Spurious Culture)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왜냐하면 대중매체에 종사하는 종사자들이 우선 1차적으로 인지하기 쉽고 또 흥미롭게 다루기도 쉽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의 종사자들은, 대중매체의 성격 때문에 기사보도의 선택에 있어서, 물상화나 허위문화에 우선 순위를 두게되는 경향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대중매체라 할지라도 고급문화를 다루는 지면을 확보하고 있는 대중매체의 종사자들이, 그들의 지면상의 활동무대를 지니게 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주말 문예부록이 붙어 나오는 고급일간지가 생기려면,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한다. 이 기간은, 이런 문예비평까지 향

유하려는 문화향수자 층이 어느 정도 두꺼워질 때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강수 : 1) 오늘날 국제사회에 있어서 한 국가사회의 정당성은 정치적 주권과 함께 문화적 주권이 문제가 된다. 여기에서 문화적 주권이란 그 나라가 독자적인 문화 전통과 문화를 갖고 있느냐와 함께 다른 국가로부터 문화적 종속을 받고 있느냐의 여부에 있다. 현재 우리 나라도 다른 나라의 문화에 종속되었다 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독자적인 우리문화를 중요시하기보다는 서구문화를 중요시하는 문화적 종속현상이 지배적이며, 거기에 더욱 서구 자본주의의 상업주의적 대중문화의 팽배와 그것이 일반 생활문화영역에 까지 깊숙이 침투되어, 오늘날 한국의 중심문화, 보편문화가 되었다. 더욱이 우리사회도 산업자본주의 사회에 돌입하고 있는데 이 사회구조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정신구조로서의 산업문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이에 모순되는 소비적, 향락문화가 지배적인 현상이다.

2) 문화의 다원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정부수립 이후 반공문화가 지배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각 계층에 걸친 문화창조자들과 잠재적 문화창조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화 예술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억제되어 왔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와 유리된 문화와 오락주의적 상업문화만이 가능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각 계층에 의한 그들의 문화예술의 창조가 꽃피울 수가 없었고 따라서 문화적 다원주의가 성숙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화풍토 아래, 문화적 다원주의에 의거한 공동문화 형성은 불가능하였다.

3) 문화란 유물이나 박물관의 물건처럼 진열장에 넣어두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 나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박물관의 진열장에 넣어둠으로서 영구히 보존하려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복고주의적인 전통문화 유지보다는 전통문화예술에 깔려있는 예술적 형태, 표현양식, 일반적 구조를 현대적 감각에서 재창조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문화창조의 문화발전의 길이다.

이상과 같은 제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화 정책적 차원에서 장기적 정책, 중기적 정책, 단기적 정책으로 나누어 고려해야 할 것이다.

첫째 장기적 정책으로는 교육제도의 개편이다. 입시위주의 인간성이 고려되지 않고, 민주주의적 교육이념이 상실되고, 인문주의적 교육이 전혀 무시되고 있는 현 교육제도를 인문주의, 인간 중심주의의 교육제도 개편 없이는 오늘날 우리의 문화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둘째 각 계층의 문화 창조자들로 하여금 문화 예술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창조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 조성을 들 수 있다. 이 자유로운 문화예술의 표현과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매체를 발행할 수 있는 자유 없이는 다원적 문화주의, 또는 문화적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없다.

셋째, 오늘날 상업주의적 저질적인 대중문화의 송수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 나라 방송국의 전면적 개편이 우선되어야 한다. 문화주의 지향의 방송매체로의 혁명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럼으로써 문화 매개체로서의 방송과 교육제도의 상호보강적인 차원에서 문화국가의 목표는 달성 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외국문화의 선별적인 유입.

다섯째, 문화공간의 확대로 문화소외층 극소화.

여섯째, 서울 중심의 문화공간을 지방에까지 도시중심에서 농촌지방에 까지 참다운 예술, 문화에 대한 의식을 깨우칠 수 있는 실천적 문화운동의 전개가 절실하다. 이 같은 문화운동은 고도의 의식화된 지식인, 문화창조자 그리고 대학생을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전개돼야 한다.

목철수: 문화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 개념 정립이 쉽지 않다. 그건 그렇다 치고 보다 심각한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문화를 생각하는 순서가 너무 '뒷전'이라는 데 있다. 반드시 다른 것을 손꼽은 뒤에야 양념처럼, 아니 양념이라면 다행이지 - 무슨 들러리나 구색처럼 취급한다는 데 있다.

나는 여기에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다고 단언한다. 그럴듯하게 딴 소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우리의 문화는 요모양 요꼴이 돼버린 것이니까. 적어도 오늘의 상황을 벗어나려면 이제 문화가 그 무슨 정치·경제…등속의 들러리가 아니라 당당히 독립된 분야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가령 문화중흥 선언이 나온 지 10년만에 한국 문화와 예술이 얼마나 발달했는가 알아보는 것도 이 토론에 의의를 더할 것으로 본다.

이 10년간(73∼83년)에 외형적인 성장 측면에서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문화를 아끼고 즐긴다는 대목에선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는 점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 사이에 시대는 라디오와 신문의 양자레이스 시대에서 TV의 시대로 탈바꿈됐다. 혹 신문에 더 큰 가치와 애착을 두는 이라면 펄쩍 뛸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저 70년대 초·중반도 신문의 시대는 아니었으니까.

70년대엔 당시 대통령도 라디오 뉴스를 열심히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어느새 70년대 중·후반과 80년 컬러 텔레비전 등장을 계기로, 이 땅은 사고방식과 색채 감각까지 한꺼번에 달라졌다.

문화 현상이 곧바로 매스 미디어 현상이라는 건 아니지만, 시대는 텔레비전으로 완전히 뒤덮이다시피 했다.

또 하나의 고고히 분투하는 잡지들을 보더라도 TV의 서슬에 못 이겨, 그렇게 빨리 변모했다. 읽고 즐기는 페이지보다 보고 버리는 색채 페이지를 늘리면서 이 시대가 어쩔 수 없이 TV 시대임을 他山之石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러면 TV의 압도가 왜 문제인가.

신문과 라디오로부터 얼마간의 庇護(?)와 지원을 얻던 각 장르의 문화는, 이 시대의 강자 TV의 외면을 받고 있다. 이것이 결정적인 문제라고 할 것이다.

TV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 돈, 돈만 이라면 듬뿍 주고 사랑을 살수 있을 텐데, 우리 문화에 돈이 있을 리 없다.

반론이 있을 수 있을까?

국민들의 감각과 사고와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는 텔레비전도 바보상자라는 닉네임을 여기서도 분명히 제 것으로 한다. 왜 과거처럼, 지난 시절의 매체처럼 문화를 제자리에 두지 않는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이 시대 우리 문화의 취약성을 극복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 우리 현실에 있어서 문화내용물과 예술수용력은 어떤 위치에 와 있습니까 ?

유경환 : 문화내용물과 예술수용력이 일치되는 것을 바라지만, 이것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기대일 뿐이다.

문화내용물과 예술수용력이 서로 접근해서 근사치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로, 도서관의 개념이 바뀌어야 하겠다. 외국의 도서관은 그 크기나 규모에 관계없이 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도서관 게시판에는 문화행사에 대한 고정게시판이 있다.

여기에 모이는 사람들은 문화행사의 정보에 쉽게 노출되는 것만이 아니라, 휴게실이나 간이식당 또는 정원에서 그 내용물에 대한 토론으로 사전지식에 접촉하게 되어 예술수용능력을 키운다.

둘째로, 화재나 응급구호용 전화처럼 국번에 관계없이 외우기 쉬운 전화번호의 문화행사전달 전담번호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예를 들면 9000번), 이런 전화를 담당하는 문화행사정보센터가(거의 관광안내소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 센터를 겸해서 있다) 시청이나 구청 또는 자원봉사실에 마련되어 있다. 여기서 문화 내용물에 대해 간단한 설명도, 들을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다.

셋째로, 모든 문화행사 중 입장권이 필요한 행사는 최소한 6개월 전에 예고 예약 판매를 하는 것이 외국의 상례이다. 이것은 개인생활의 사전계획을 세우는데 큰 몫을 할뿐만 아니라, 관객들이 자기자신과의 약속에 심리적 구속력을 받게 한다. 우리도 점차 예약제를 활용해서 최소한 1개월 전에 문화내용을 충실하게 하고 아울러 수용자도 심리적으로 준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겠다.

넷째로, 외국에는 문화행사만이 허용되는 원통형 문화게시판이 곳곳에 있다. 우리도 이런 것은 배울 필요가 있다. 잡상인들의 상업광고가 문화행사의 광고 위에 덧붙여지는 것은 제도나 시책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우리 실정에서는, 분야에 따라서는 예술수용능력보다 문화내용물의 수준이 높다든지 또는 반대로 분야에 따라서는, 문화내용물이 예술수용력에 미치지 못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우선 공지 통로부터 트여있지 않기 때문에, 접촉→노출→수용(감상)→평가의 기준이 될 준거집단(Reference Group)의 형성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강수 : 문화 내용물과 문화 수용력을 일률적으로 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문화내용물과 문화수용과의 관계는 문화계층적인 차원 H. Gans의 말을 빌린다면 취향공중 (Taste Public)과 취향문화(Taste Culture)와의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전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 나라 문화현상은 대중문화 내지 대중 예술적인 측면이 중심부를 이루고 있고 그것도 오락위주, 여가위주적인 취향문화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것은 문화환경이나, 인문주의적 지적환경이 성숙되지 못한 필연적 귀결이다. 이 같은 문화내용물은 폭증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보다 한 단계 높은 지적, 교양적인 수준의 문화내용에 대해서는 문화수용자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이들 수용자는 대부분 대학생층으로 구성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반사회인은 극히 한정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같은 현상은 책방, 공연장에 가보면 바로 감지할 수 있다. 우리 나라는 교육수준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은 현상이므로 고급문화다. 질적으로 바람직한 문화내용을 수용할 수 있는 잠재성은 충분하나 사회의 지적분위기가 이를 계발하고 양성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위축시키고 있기 때문에 현상적으로는 비관적이다.

목철수 : 앞서 TV의 막강한 힘을 언급한 것처럼 지난 10년여간에 이 땅의 모든 '옛 스타'들은 기진했다. 겨우 맥만 살아있을 뿐이다. '기진맥진'이란 말 가운데 '맥진'만 있는 꼴이다.

큰 영화관들이 최근 3, 4년 사이에 문을 닫고 소형 영화관들이 도시 변두리에 많이 생겼다. 현대 오디토리엄(auditorium)인 극장의 의자에 앉아 한편의 공연물을 즐기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특히 지난 10년 사이에 우리 문화생활의 변화를 보면서 '옛 스타'들의 쇠잔과 몰락을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연극 가운데 창작물이건 번역물이건 고작 2, 3백 명이 하루에 동원되면 성공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TV나 신문에 크게 소개된 몇몇 공연을 제외해야겠다.

그 많은 전시장도 상황은 동일하다. 개막 첫날 관계자와 전문가들이 조금 많이 찾아온다. 그 뿐, 그 시끌벅적도 잠깐이다. 이튿날부터는 하루에 고작 수십 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다녀간다. 일류 언론사가 열고 있는 무슨 외국 작품 전시회는 예외로 할 수 있다고 쳐도 대부분의 전시회는 여러 사람에게 작품을 보인다는 점에선 실패한다. 전시회 목적이 다른 데 있다면 차라리 안심이다. 일부 유명 작가들의 경우처럼 작품 대여섯 점 팔아 그 전시회가 적자를 안 본다고 해서 만족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용물에 대해, 그것도 모든 분야에 걸쳐 조감(鳥瞰)한다는 것은 다른 기회로 미루더라도, 수용력은 제로에 가깝다.

역시 문제는 문화를 전파(炩播)하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年前에 제기됐던 바대로 예술을 소개할 전당만 서면 무엇 하느냐는 지적을 음미해야 할 것이다.

⹃ 문화촉매자(박물관, 고궁안내원, 문화예술, 언론관계 종사자 등)들에 대한 교육은 어 떻게 실시되어야 할까요 ?

유경환 : 이것에 대해서는 이중한 위원이 세미나에서 발표한 세부지침에 잘 제기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중언(重言)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사회교육기능이 커져야 하며 사회교육기관의 활동이 다양해져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밝혀진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개념을 학교교육의 범주에서 하루 빨리 확대해야만 한다.

이강수 : 문화창조자는 물론이려니와 문화적 게이트 키퍼(Cultural Gatekeeper)로서의 문화 촉매자들은 전문직(Professional)으로서 자격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전제이다. 전문직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일치된 것은 없으나 대체로 그 직무에 관련된 분야에 대한 일정한 교육경력과 트레이닝을 거침으로써 그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추어야 하며, 자기 직업이 천직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자기보다는 他者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윤리 내지 사회책임의식, 그리고 뚜렷한 문화의식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Cultural Gatekeeper로서의 출판인과 출판 편집인, 잡지 발행인과 편집인, 신문의 문화담당 기자, 방송의 프로듀서들은 한 나라의 문화발전을 위해서 문화창조자에 못지 않은 사명감의 소유자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 문화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 Cultural Gatekeeper들의 크나 큰 약점의 하나가 전문직 직업의식이 결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약점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모순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신문의 경우를 보자. 신문사에 종사하고 있는 문화부기자는 Cultural Gatekeeper로서 어느 분야에 못지 않게 중요한 문화촉매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다른 편집 취재부서의 기자와 마찬가지로, 예술, 문화에 대한 전문지식 또는 이 분야가 전공분야가 아닌 사람을 배치하는 경우가 많고, 사회부기자가 문화부기자가 될 수 있고, 또 문화부기자가 다른 부서의 기자로 전출되는 거와 같은 문화부의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래 가지고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문적인 문예비평이나 문화비평, 또는 문화기자가 나올 수가 없다. 이와 같은 경우는 출판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문화촉매자들의 직업적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그 분야에 관련된 교육이수자를 우선적으로 채용해야 할 뿐 아니라, 이들에 대한 자율적인 트레이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産學협동의 차원에서 문화산업 자체에서 이들 문화촉매자들로 하여금 대학원 레벨에서 일정기간 동안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이니시어티브를 취해야 한다. 그것은 언론연구원과 같은 집단적 교육이수가 아닌 문화산업자체의 자율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목철수 : 우선 촉매(불어: animateur / 영어: animator)라는 용어에 의문이 간다. 촉매 시키겠다는 것이 목적이라면 말부터 생소해서 실패하기 알맞다. 죄송한 지적이지만, 이 말을 처음 보급시키고, 또 몇 번이라도 사용해본 이는 수긍이 갈 것이다.

문화를 다루고 전파하는 이들, 그런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을 통칭하는 적당한 단어가 없다면 차라리 과도기적으로 '애니메이터'라고 쓰던지 '촉진자', '프로모터' 등의 몇 가지 말을 올려놓고 골라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 '촉매자'들에게 "내가 <문화촉매자>가 되어도 그 대가가 괜찮은가"하는 의문부터 풀어주는 일이 시급할 것이다. 그런 다음 교육이고 뭐고가 가능한 법이라고 본다.

이들에게 바보같은 텔레비전을, 그 장벽을 헐라고 가르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기존 TV종사자(기자·프로듀서)와 경영층을 재교육하는 길이 빠른가는 자명해진다.

가령 대학 졸업생에게 '촉매자'가 되도록 하려면, 그것은 물리학을 한 청년에게 벽지의사(僻地湢師)가 되라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돈이거나 다른 어떤 것이거나 주어야 한다. 문화를 중개하고 촉진하는 일에 매력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이 거친 사회에서 할 일 찾다가 할 일 없으니까 몰려드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불행이 반복될 것이다.

아직 도시권이라고 해서 문화적 환경이 궤도에 선 것은 아니지만, <문화촉매자>들은 읍·면 지역과 벽지·오지에 있는 우수한 인재들을 선발해 교육했으면 한다.

⹄ 문화촉매운동에 있어서 저널리즘의 역할은?

유경환 : 80년대 들어서 늘어난 문화총량, 아직도 기존 틀(Frame)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저널리즘으로서는, 이것을 제대로 다루기에 벅차다.

늘어난 문화총량과 그리고 이 시대를 동시대인으로 살아가는 저널리스트 사이에는, 양적 팽창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부터 차이가 커지고 있다.

활자매체에 있어서 학예면만을 다루어 온 사고 방식은, 엄청난 양적 확산에 대해서 정확한 조준을 못하고 있을뿐더러, 조준을 한다고 하여도 지면에서 받는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간신문이 8면에서 12면으로 늘었지만 문화면이 는 것은 아니다.

이것까지 광고를 제외하면 하루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지면만을 겨우 활용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올림픽에 임박해서 16면으로 확장된다고 한다면, 올림픽을 치르고 난 뒤에야 문화면으로 증면부분이 활용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외국에서처럼 일요일자의 문예물부록 판이 딸려 나오게 되려면, 상당한 기간과 그리고 신문경영관리자들의 의식변화가 그 동안에 선행조건으로 이뤄져야 할 일이다.

전파매체에 있어서는 아직 전파매체의 문화에 접근태도가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 전파매체가 문화에 대해 활자매체만큼 기여하려면 더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다.

우선 '문화소득'이라고 하는 개념이 정립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일반 노동소득이나 근무소득과 구별되는 문화개념이다. 가치기준적으로 문화소득이 인식되어야, 문화행사에 대한 광고 및 변형광고에 대해 차등광고비 적용제도가 도입될 수 있겠으며 또 문화행사에 대한 보도자의 기사작성 태도를 바라보는 경영관리자의 시각도 달라질 수 있겠다.

비교적 연극은 저널리즘에서(상대적으로) 덜 인색한 대접을 받고 있지만, 다른 분야는 점점 더 인색해지는 대접을 받고 있다. 특히 출판·도서·음악·미술 분야에서 그전만 못한 대접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양적 팽창에 저널리즘의 인식이 상응되게 팽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점진적으로 달라져야할 일이다.

이강수 : 문화촉매 운동에 있어서 매스 미디어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매스 미디어는 문화촉매의 문화광장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 나라 신문역사를 보더라도 신문은 처음부터 민족의식을 개발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문화적 안목을 계발시키려는 목적 하에서 문화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문학분야나 미술, 음악 등 예술분야에서 다같이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신문의 경우 지면관계의 한정성 때문에 고급문화에 대한 광장역할에 미흡한 느낌이다. 가령 고급문화 발전을 위해서도 출판의 경우 본격적인 서평란 하나 갖추지 못하고 있고, 영화, 연극평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소설평, 시평 정도가 고작이고, 어떤 점에서는 문학쪽에 너무 치중되어 있는 느낌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텔레비전이 고급문화의 대중화라고 하는 고급문화의 하향운동에 매우 적절한 미디어로 생각될 수 있다. 특히 텔레비전의 경우는 이른바 고급문화에서부터 민속문화, 그리고 전통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내용을 내 보낼 수 있으며, 그 임팩트는 어떤 매스 미디어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텔레비전은 고급문화의 대중화 또는 대중문화의 고급화를 이룰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미디어이다. 따라서 텔레비전은 오락적 미디어 이상으로 문화적 미디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현상에서 볼 때 이 귀중한 문화적 무기가 오락적 무기, 우리들의 미적 취향과 감각을 오히려 저속화시키고 타락화시키는 현대의 공룡이 되어가고 있다.

목철수 : 문화의 전파와 전달에 있어서 저널리즘의 역할은 귀가 닳도록 들었고 기술해 왔듯이 막대하다. 아니 막대하다 못해 저널리즘에 사활이 걸렸을 만치 절대적이다. 어디 문화뿐인가.

그러나 독자가 적고 시청률이 낮은 미디어보다 TV로 하여금 눈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TV가 문화에 눈을 주더라도 그 시각에 왜곡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할테니 문제는 쉽지 않다.

텔레비전이여 잠을 깨라.

야구 중계를 9회말 투 아웃쯤에서 끝내고, 저 쓰러져가는 단층집의 단막극을 잠깐 보여주면 어떤가. 돈이라면, 그건 다른 프로그램에서 많이 챙겼으니 용서해주면 아니 좋은가.

⹅ 문화촉매운동의 확산과 예술품의 질적 가치가 갖는 함수관계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 합니까 ?

유경환 : 외국에서는 <프로모터>라는 말을 문화행사에서 자주 쓴다. 이것은 프로모션(진작)이라는 뜻에서 나와, 쓰게 된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문화촉매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참뜻과는 달리 자본주의 사회의 상업성과 결부된 흥행업자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은 편이다.

문화예술은 시간과 공간을 얻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문화예술 외적인 조건의 구비를 돕는 조력자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상업주의적 촉매자가 많아지면 문화예술의 질이 문화예술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원심력으로 더 작용하게 되므로 바람직하게만 여길 수는 없다. 그러나 문화를 확산시키는 의미에서의 순수한 촉매자가 본질에서 떠나지 않고 구심력으로만 작용하게 되므로 이런 확산은 바람직하게 여길 수 있다.

때문에 촉매운동을 펴는 촉매자가 문화 추구인이냐 상업이윤 추구인이냐 하는 점, 또 문화 의식인이냐 행사 선전인이냐 하는 점, 또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어느 쪽에다 우선 순위와 가치만족을 두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의 고급문화에 있어서는 이런 문화촉매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거나 했다면 문화창조자 내지 문화종사자 스스로가 맡아 해왔었다.

그러기에 <문화촉매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할뿐더러,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향수자의 수가 늘고 그 수가 어떤 계층을 이룰 만큼 사회구조가 바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순수한 운동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문화적인 욕구 곧 문화적인 가치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기에 수요를 넓혀주는 것으로서 현대사회의 하위체계들은 문화에 대한 배분을 시책으로 삼고자 한다.

이런 시책이 문화향수자의 심미수준과 상관성을 지니게 될 때에는 촉매운동의 확산과 질적 가치가 어떤 함수관계를 얻을 수 있으나, 그러나 상관성을 도외시할 때에는 함수관계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심미수준은 문화의 생활화에 비례하는 대중의 심미의식에 따라 성숙될 뿐이다.

이강수 : 문화촉매 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보다 바람직한 문화내용(고급문화와 같은)을 일반 대중에게 보급하고 확산시키는 이른바 문화의 하향운동과, 둘째는 이른바 질적으로 높지 않은 대중예술을 질적으로 한 차원 높이는 문화의 상향운동이다.

이 두 가지 문화촉매운동은 궁극적으로 문화공간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문화접촉의 기회를 확산시킴으로써 문화로부터 소외된 계층을 해방시켜 주며 그럼으로써 문화를 가진 자와 갖지 않은 자와의 문화적 gap을 줄이는데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염려될 수 있는, 고급문화의 하향운동은 자칫하면 문화예술의 질적인 차원에서 볼 때, 고급예술 창조의 토대가 상실될 위험성이 있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고급 문화예술에 종사하고 문화창조자의 설 땅을 잃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들 문화창조자들에게 국가적 보조책 뿐 아니라, 이들 문화작품들을 교육기관(도서관 등)에서 대량적으로 수용케 하고, 이들 작품(미술, 음악, 연극, 무용 등)들을 지방에까지 전시하거나 발표하게 하는 제도적 문화장치가 이루어진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와 함께 문화의 상향운동은 우리의 문화현상에 있어서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문화상향운동은 방송산업의 구조적 개혁을 통해서, 문화의 광장으로 이용한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미디어 환경을 개조함으로써 사회적, 문화적 환경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문화상향운동은 보다 용이하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문화예술의 질적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문화상향운동과 서구적 대중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점차적인 문화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는 문화창조자를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문화운동은 일정한 공간에서의 폐쇄적이고 정적인 문화운동이 아니라 민중속에 직접 파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문화를 심어주고 전파하는 적극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목철수 : 문화 상품의 질이 좋다고 해서 확산이 잘 되고, 나쁘다고 해서 잘 알려지지 못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고급문화이건 대중문화이건 작품의 질적 가치와 파급 여부는 다른 요인에 좌우된다.

한국의 문화 현실은 좋은 것이나 다소 질이 떨어지는 예술품이거나 모두 수용자 접촉에 실패하는 입장이므로, 좋은 작품이 탄생하기 어렵다. 즉 문화의 보편화를 막는 장애요인이 많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돈을 가진 사람, 돈을 배분하는 이들의 의식이 아직 문화에 와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근년 들어 일부 대기업이 자체적인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조금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한 친구가 시골에 가서 살면서 TV도 잘 보이고 신문도 구독하고 몇 가지 잡지도 신청하니까 문화적 차이가 해소 됐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텔레비전이 잘 나온다고 해서 그가 문화의 혜택을 어느 정도 누린다고 할 수는 없다. 그의 가족들은 서울 잠실의 '놀이마당'이 펼쳐 보이는 '강령탈춤'이나 '송파 산대놀이'를 구경할 기회는 좀처럼 드물다. 또 몇 년 뒤에 서울 영동의 '예술의 전당'이 화려하게 선다고 해도, 장충동 못 가보기나 세종로 직접 못 가보는 것처럼 그에게는 '귀의 떡'(그림의 떡도 물론 아니니까)일 수밖에 없다.

결론을 다시 말해 보면, 문화만 해도 살 수 있고 문화전달(animate)만 해도 처자식 걱정 안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문화 정책과 예술 캠페인의 주안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10년 전에 한국 안에 10권 짜리 백과사전이 나왔을 때나 3년 전 30권 짜리 백과사전이 나왔을 때나 마찬가지로 그 사전이 얼마나 팔렸는가 하는 실례를 들어 말하고 싶다.

때는 TV 시대에서 뉴 미디어 시대로 진입한 만큼, 어떤 의미에서 옛 것인 문화를 보다 널리 향수하게 하려는 데 있어서는 질적 가치보다 효과적인 미디어를 어떻게 선택하느냐 하는 새로운 전략이 요망된다.

문화의 질적 가치가 어느 수준인가는 결국 필요 요건이지, 충분 요건은 아니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