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별신굿놀이
서연호 / 고려대 교수
놀이의 성립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에는 예로부터 별신굿 놀이라는 탈놀이가 전승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놀이는1928년의 별신굿을 마지막으로 현재에는 체계적인 전승이 끊어진 상태로서, 놀이에서 사용하던 가면의 일부와 옛 놀이마당이 남아 있고, 놀이꾼중의 한 사람이 생존하여 있을 뿐이다. 현재 안동시내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를 결성하고 놀이의 발굴·보급에 나서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연구, 공연 활동이지 체계적인 전승이라고 할 수 없다.
하회의 탈놀이는 여타 지방의 그것에 대하여 몇 가지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어 학계에서 깊은 관심을 모아 왔다. 첫 번째 특징으로 지적되는 것이 굿과 놀이의 총체성이다. 별신굿이 행하여지고 탈놀이가 따로 연행된 것이 아니라 굿의 절차 가운데에 놀이가 포함되어 있어 굿이 곧 탈놀이요, 놀이가 곧 굿을 성립시켰던 것이다. 둘째로는 오랜 전승력을 이어 왔다는 점이다. 다른 지방에 전승되는 탈놀이에 비하여 옛스러운 성격과 모습을 지니고 있어 탈놀이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셋째로는 탈을 만든 기술이나 탈의 조형미가 매우 우수하여 옛 선인들의 문화예술에 관한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넷째로는 다른 지방의 놀이가 대체로 도시적인 환경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한 것인데 반하여 하회의 놀이는 궁벽한 농촌을 토대로 전승되어 왔음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놀이의 내용, 놀이의 방식, 놀이꾼의 신분, 놀이와 관중이라는 측면에서 그 특징이 거론될 수 있다.
놀이의 성립에 대하여는 확실한 기록이나 타당한 정설을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간에 이루어진 현지조사 기록과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놀이의 설립에 관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하회에는 고려 중엽까지 許씨, 고려 말엽까지 安씨, 그리고 조선 초부터는 柳씨가 동족부락을 이루며 살아왔다 한다. 그런데 탈의 제작에 관한 설화에는 다음과 같은 양설이 전한다.
①허도령(名 未詳)은 꿈에 신에게서 가면 제작의 명을 받아 작업장에 외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금색(禁索)을 치고 매일 목욕 재계하여 전심 전력을 경주하여 가면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허도령을 몹시 사모하는 처녀가 있었다. 처녀는 연연한 심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허도령의 얼굴이나 보려고 휘장에 구멍을 뚫고 애인을 엿보았다 . 금단의 일을 저지른 것이다. 입신지경(入神地境)이던 허도령은 그 자리에서 토혈을 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므로 열 두 번째의 이매탈은 미완성인 채 턱없는 탈이 되고 말았다.
②전설에 의하면, 이 동네에는 신라시대부터 한 사람씩 언제나 신명을 이해하는 자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광주 안씨 일족으로서, 그 나타나는 시기는 동제의 말일 신간(神竿)을 堂에 바치고 그 앞 제단에서 무녀들이 神舞를 추는 때였다. 제의에 사용하는 가면 제작자도 역시 그 안씨의 일인으로서, 그는 제작기술이 뛰어났으나 이 가면을 제작할 때에는 턱을 잊고 만들지 않아 신에게 벌을 받고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한다.
(이 가면 제작자의 이름은 안도령이라 하는데 인가가 없는 곳에서 3개월 반여를 걸려 만들었다 한다. 이 가면은 현존하고 있으나 턱이 없다.)
①의 허도령 전설과 허씨 동족부락설을 토대로 한다면 하회탈놀이의 성립 연대는 대체로 고려 중엽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견해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크게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대륙의 舞樂面과 일본 能面의 중간 위치에 서 있는 것이 하회탈이라는 관점에서도 그 제작 연대는 고려 중엽(11∼12세기)으로 볼 수 있으며, 고려 문화의 전반적인 흐름 위에서 볼 때에도 청자기가 성하고 고려인들의 미의식이 극도로 발달했던 11∼12세기 경을 탈의 제작 연대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②의 안도령 전설과 안씨 동족부락설을 토대로 한다면 놀이의 성립 연대는 고려 후엽 혹은 말기(13∼14세기)로도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이러한 전설만으로는 신빙성을 얻을 수 없으나 그에 못지 않게 몇 가지 방증을 찾을 수 있기에 전자에 비하여 後代 성립을 가정하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로 제시할 수 있는 방증 자료는 하회동의 인근에 있는 다른 마을의 별신굿놀이와 상관성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점이다. 먼저 안동의 서낭굿을 예로 들면 神疜는 서낭신(城隍神)으로 男神·女신·童신이 있으며 신의 내림이나 이동에는 서낭대(城隍竿)를 사용한다. 굿을 주도해 가는 사람은 마을에서 뽑힌 上堂主·中堂主·下堂主이며 광대들은 풍물을 울리며 서낭대를 앞세우고 마음을 순회하면서 여러 가지 종교적인 기원을 한다. 남신을 모시는 경우에는 서낭대에 베나 종이로 옷을 만들어 입히고, 여신을 모시는 때에는 아름다운 빛깔의 옷을 장식물과 함께 서낭대에 입혀 마치 실제 모습과 같이 보이도록 한다. 하회에서는 假裝을 위해 탈을 쓴다면 안동에서는 복장을 이용해서 신격을 가장하는 셈이 된다. 이 같은 서낭굿에는 무당이 초청되기도 하고 또한 그들 스스로가 참여하여 광대와는 별도로 舞樂을 베풀기도 한다. 이 밖에도 서낭굿의 분위기나 금기사항, 절차 등은 하회와 유사하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안동의 서낭굿놀이와 일련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놀이가 정월 대보름에 놀았던 놋다리밟기다. 서낭굿이 끝나는 보름날밤에 마지막으로 이루어지는 대동놀이가 바로 놋다리 밟기였는데, 이 놀이에는 젊은 여자들이 집단적으로 참여하여 서로 앞의 여자의 허리를 껴안고 등을 구부려 다리 모양을 만든 다음, 그 위로 소녀가 지나가도록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안동에 왔을 때 그곳의 부녀자들이 왕과 함께 온 어린 공주를 위로하기 위하여 이 놀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러한 놀이에서 부녀자들의 등위에 올라 있는 소녀의 존재와 공민왕 때라는 시기에 주목한다. 서낭굿에 등장하는 여신의 신체와 놀이에 나오는 소녀의 존재 사이에는 마치 하회의 각시신과 각시탈이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듯이, 서로 상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대동적인 굿놀이가 성립된 시기야말로 바로 고려 말엽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놀이의 방식이나 놀이에 사용되는 도구(가면)에는 서로 차이가 있으나, 하회탈놀이나 안동의 놋다리밟기놀이가 모두 서낭굿놀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측면에서는 공통성이 있다 하겠다.
다음으로 수동 마을의 서낭굿을 예로 들면 신체는 나라신(국신)으로 남신·여신이 있으며 공민왕 부처의 모습을 나무로 깎아 국신당에 모신다. 전설에 의하면 오래 전에 큰 홍수가 나서 물난리를 겪은 적이 있는데, 그때 벌판 가운데서(지금의 당집 자리)한 신위(위패)가 발견되어 봉안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부락의 수호신으로 하여 3년마다 한 번씩 큰제사(일명 별신굿)을 올리게 되었다 한다. 이 별신굿은 하도 유명한 것이어서 인근의 사람들이 '별신굿을 보지 않으면 죽어서 저승에 갈 수 없다'는 속언이 유행할 정도였다. 이 수호신은 부근의 5개 마을을 모두 지켜주고 있다고 믿었기에 수동외 중동·하동·곡동·회동·단호동에서 각기 祭官과 농악대와 놀이꾼이 참여하였고, 관원행렬·軍舞·가장적인 놀이가 진행되었다. 특히 군사적인 놀이를 통해 여러 가지 종교적인 기원을 표현하였다. 놀이꾼들의 구성은 大將(1인)·通引(2인)·黃手(2인)·旗裨(2인)·戶長(2인)·使令(2인)·都軍奴(2인)·舞童(10인)·舞夫(수십인)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모두 假裝을 하였고 특히 호장은 개가죽으로 만든 가면을 착용하였다. 이 밖에 서낭굿의 분위기나 금기사항·절차 등은 하회와 유사하다.
그런데 이상에서 살핀 안동과 수동의 서낭굿은 하회와 매우 유사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데 특히 굿놀이의 假裝性과 공민왕의 전설은 대동소이하다. 학술적인 조사를 거친 바는 없으나 하회 인근에 있는 병산의 서낭굿놀이(현재는 가면만 일부 남아 있음)도 이와 유사하였으리라 생각된다. 필자가 하회탈놀이의 성립 연대를 고려 후기로 보는 데에는 이런 방증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다. 공민왕의 전설이 주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놀이의 성립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제시할 수 있는 방증 자료는 놀이본에 채록되어 있는 대사의 내용이다.
양반 : 나는 士大夫의 자손인데…
선비 : 뭣이 사대부? 나는 八大夫의 자손일세.
양반 : 팔대부는 또 뭐냐?
선비 : 팔대부는 사대부의 갑절이지.
양반 : 우리 할아버지는 門下侍中이거던.
선비 : 아 문하시중, 그까짓것, 우리 아버지는 門上侍大인데.
양반 : 문상시대, 그것은 또 뭔가.
선비 : 門下보다 門上이 높고 侍中보다 侍大가 더 크다.
이상에서 문하시중은 고려 때 문하성의 최고 관리(종1품)로서, 한때 문하시랑·문하좌시중·문하우시중·시중·수시중 등으로 불리었으나 특히 문종(1061년)이후 다른 명칭으로 쓰여지다가 공민왕(1356년)에 다시 문하시중으로 복구되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탈놀이의 성립 연대도 고려 후기로 볼 수 있겠다.
세 번째로 제시될 수 있는 방증 자료는 놀이꾼들을 하회의 현지에서 광대라 불러 왔는데, 광대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라 문헌에 의하면 고려 말엽 이였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옛적에 소광대가 대광대를 따라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배가 없었다. 소광대는 대광대패에게 이르기를 '나는 키가 작아 물이 깊고 얕음을 알 수 없으니 키가 큰 그대들이 먼저 측정함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대광대패는 모두 익사하고 소광대만 남게 되었는데, 지금 우리 나라에는 전영보와 박허중 둘이 소광대다. 그들은 나를 禍網 가운데 두고 안연히 바라보고 앉았으니 앞서의 일과 무엇이 다르랴. 우리말에서는 탈놀이 하는 사람을 광대라 부른다.
이상은 고려의 충숙왕이 일시적으로 왕위를 빼앗겼을 때(1331년)에 한 이야기라 한다. 탈놀이 하는 사람을 광대라 부른다는 기록은 하회탈놀이의 경우와 일치한다. 또한 하회탈놀이에는 白丁의 역할이 들어 있는데, 고려 말기 이후 백정들은 일부가 광대짓을 겸하거나 광대들과 혼인관계를 맺어온 사실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놀이가 성립되던 당시에는 백정의 역할을 백정 자신이 출연하여 직접 공연하였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요건대 광대와 백정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놀이의 성립이 고려 후기임을 추정하게 해 준다. 그러나 앞서 전제한 대로 이상의 세 가지 논거는 어디까지나 방증 자료에 지나지 않으므로 탈놀이의 성립에 관해서는 앞으로 더욱 연구가 진척되어야 할 것이다.
놀이의 환경
하회별신굿놀이의 특징은 종교적 제의인 굿과 민속극인 탈놀이가 총체성 있게 조화되고 있는 것이라 하겠는데, 놀이의 환경을 규명해 보기 위해 일단 祭儀와 놀이를 구분하여 논술해 보기로 하겠다. 앞서 탈놀이의 성립 시기를 고려 후기(말엽)로 추정해 보았거니와 그것은 어디까지나 놀이를 위주로 한 언급이었을 뿐, 제의 자체가 당대에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제의의 연원은 그보다는 훨씬 상회하는 부락 공동체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으며, 다른 측면에서는 타지방에 전승되는 별신굿과도 밀접한 연대성을 지녀왔다는 점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놀이의 환경은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종교적인 전통을 들 수 있다. 하회의 부락굿은 平常祭와 별신굿으로 나누어진다. 평상제는 매년 정월 15일과 4월 8일에 올리는데, 山主가 중심이 되어 마을 대표자들과 함께 서낭당에 제품을 바치고 마을의 평온을 기원한다. 제사가 끝나면 일동이 음복한다. 별신굿은 부정기적으로 행하여 왔는데, 閔산주때에는 지내지 않았고, 다음의 金산주 때에는 갑자년(1924)에 지냈으며, 다음 朴學伊산주 때에는 무진년(1928)에 지냈다. 그 후 閔用伊산주와 金乭伊산주에 이르러서는 별신굿을 하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별신굿을 올리는 이유는 마을 사람들의 희망에 의한 경우와 정신병자를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다.
박학이산주가 말한 바에 의하며, 하회의 성황신은 戊辰生義城五土山金氏인데 15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그곳의 성황신이 되었다. 흔히 무진생성황님이라 부른다. 성황님은 동네 가운데 있는 삼신(옛 풍남면사무소 구내에 있는 큰 느티나무)의 가문에 시집을 왔는데, 삼신은 동네 창설 당시부터 마을의 신으로 군립해 왔으나 새 성황님이 오자 자신의 지위를 며느리 신에게 물려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성황신의 친정은 월애(풍천면 인금동)이고 외가는 갈밭(풍천면 갈전동)이라고도 한다. 1928년 별신굿을 놀 때에는 월애에서 초청을 받아 그곳의 부자였던 심규하의 집에 가서 놀기도 하였다.
이처럼 주신의 지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은 신성한 효험이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겠는데, 이런 이유로 해서 상당(서낭당)의 신이 무진생성황님이 되었고, 하당(삼신당)에는 시어머니신이 격하된 상태에서 머물러 있다 하겠다. 중당(國師堂)의 신체에 대하여는 현재까지 밝혀진 것이 없고 당집만 남아 있을 뿐이다. 주신은 젊은 여신인데다가 삶에 대한 뼈아픈 체험과 한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多産과 豊農과 소망을 풀어 줄 수 있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셈이다.
한편 주신인 성황신의 친정이나 외가가 주변의 마을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좁게는 하회의 주변에 상호 유사한 서낭굿(부락제나 별신굿)이 다수 전승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넓게는 그러한 전승이 뿌리깊은 전통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에 앞서 하회의 주변인 안동과 수동의 서낭굿을 간략히 소개하였거니와, 하회별신굿이 학술적인 조사를 받던 1930년대 후반까지 일반 부락제는 제외하고라도 별신굿이라는 명칭의 서낭굿이 20여 군 지역에서 보고 된 바 있다. 또한 최근까지만도 여러 지역에 별신굿이 전승되고 있음이 보고되었다.
별신굿을 진행하는 종교적인 의식절차에서도 전통성을 확인할 수 있다. 산주와 광대의 선발, 서낭대(신간)의 사용, 신맞이와 송신굿,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각종의 굿놀이, 무녀의 초대, 각종의 금기, 마을 사람들의 대동적인 협조와 참여, 인근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 등은 여타 지방의 부락제나 별신굿과 대동소이한 양식을 드러낸다. 이러한 공통성은 하회의 서낭굿이 한국 종교문화의 한 보편적 양상으로서 비교적 근세에까지 특징을 간직해 왔음을 입증해 보인 것이라 하겠다.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로 서낭대의 사용을 살펴보면, 멀게는 「귀신을 섬기기 위해 나라의 각 마을에는 한사람을 두어 천신을 섬기는데 그를 천군이라 한다. 마을에는 별읍이 있는데 그것을 소도라 한다. 거기에 큰 나무를 세우고 위에 방울을 단다.(信鬼神國邑各立一 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懸鈴鼓)라는 마한전의 기록이 하회의 신간과 상통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풍습은 우리의 선인들뿐 아니라 북방민족들에게도 널리 보인다는 보고도 나와 있다. 또 가깝게는 앞서 소개한 안동의 서낭대와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의 서낭대가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神竿에 관한 기록은 도처에 산견되는데, 요컨대 같은 형태의 서낭굿의 전통이 광범위하게 각지에 계승되고 있음을 입증한다 하겠다.
이상에서 언급한 서낭굿의 전통은 우리 종교문화의 한 양상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는데, 하회의 탈놀이는 바로 이러한 전통 가운데서 신을 위한 놀이(神聖假面戱)의 일종으로 성립·발전·전승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는 하회의 자연지리적 여건을 들 수 있다. 하회의 지형은 옛부터 태극형이니 연화부수(蓮花浮水)형이니 다리미형이니 하고 불렀다. 서태백산의 지맥 끝에 화산(271m)이 있고 그 산자락 아래 완만한 구릉으로 된 타원형의 마을이 있는데, 그것이 하회동이다. 마을의 삼면에는 낙동강 물이 돌아 흐르므로 河回라는 지명이 생겼다. 강물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회전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다시 회전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간다. 지형은 이러한 마을의 생김새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육로로 하회를 가자면 화산 중턱에 있는 고갯길을 넘어야 마을에 이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화천(마을 앞의 낙동강)을 배로 건너야 한다. 안동시에서 24Km밖에는 되지 않으나 다소 험준한 고갯길을 넘어야 마을에 이를 수 있기에 차량이나 사람의 왕래는 드물며,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더라도 큰길로 나가자면 8Km정도를 다시 걸어야 하므로 水中部落으로서의 고립성을 현재에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고립성과 천연의 요새성이 탈놀이의 발전과 전승을 가져오게 한 요인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옛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국난·전쟁 중에도 하회 마을만은 외적의 침입이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화산 중턱, 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노송 사이에 남향으로 서낭당(상당)이 있고, 산밑 기슭에 국사당(중당)이 있다. 산기슭에서 인가가 모여 있는 마을까지 사이에는 밭이나 논이 있는데 그 일대가 옛날 허씨·안씨네가 살던 지역이었다고 한다. 서낭당 북서쪽 산비탈에는 1930년대까지 전설적인 인물인 허도령을 제사지내던 석제단이 남아 있었다 한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마을 주민들에게 時勢감각을 다소 둔화시켜 온 것은 사실이나, 그 대신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여유 있는 자세로 매사를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기질을 형성하게 해 주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기질이나 여건이 탈을 정교하게 만들거나 탈놀이를 지속성 있게 이끌어오게 한 요인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하회의 탈이 오늘날까지 그 원형을 그대로 보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조건에 힘입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로는 지역사회와 경제적인 여건을 들 수 있다. 조선조 이후 하회는 풍산 유씨의 동족부락으로 번창하여 왔으며 특히 西崖 柳成龍의 역사적인 업적으로 인하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고장이다. 현재 풍산 유씨의 대종가인 양진당(서애의 형인 겸암 유운룡의 가옥)과 서애의 집인 충효당을 비롯하여 조선조시대에 지은 고가가 백20여 호나 그대로 남아 있으며 옛 담장이나 도로도 비교적 원형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흔히 班村·班鄕이라 불려 왔다. 유씨 집안에서 양반이나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음을 뜻한다.
큰 기와집 사이사이, 혹은 마을 주위의 변두리에 드믄드믄 작은 초가집(30여호)들이 남아 있는데, 그 집의 사람들은 유씨 집안의 일이나 농사를 거들어 주며 살던 농민(상민)이나 하층민(노비)들로서 흔히 他姓氏라 부른다. 하회의 서낭굿이나 탈놀이는 이 타성씨에 의하여 주도되고 계승되어 왔다. 유학의 전통을 이어온 유씨 일족들은 그들이 소위 음사(淫祀)라 일컫는 굿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간접적인 후원은 아끼지 않았다.
신분이나 교육상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생존 수단은 주로 농사에 의존하였으므로 풍농이나 다산을 기원하는 마음은 한결 같았다. 양반들이 명분으로는 무속을 천시하면서도 실제로는 마을 전체의 제사를 도와야 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생산의 담당층인 농민이나 천민을 박대하거나 지나치게 구속해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을 잘 아는 양반계층에서는 별신굿 기간 동안이라도 그들의 사기와 활력을 북돋아 주는데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평상제는 규모가 작은 제사였으므로 간단한 제물과 제주를 준비하였고, 제관들도 소수가 참여하였다. 보통 1회에 드는 비용은 45원(1930년 중반의 일본화)정도였고, 동민 전체가 조금씩 나누어 부담하였다. 그러나 별신굿은 많은 비용이 소요되어 주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으므로, 1928년의 행사는 비교적 간단하게 치루어졌다. 종교적 기원과 관례에 따라 주민 모두가 비용을 헌납함은 물론, 그때그때의 놀이나 洞金合宿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거나 또한 별도의 찬조와 곡물·천 등의 헌납이 있었다. 절약을 하였어도 1928년의 행사비는 2천원 (당시의 일본화 기준)을 상회하였다 한다.
이처럼 대표적인 반향이었음에도 풍농을 기원하고 마을을 건재시키려는, 신분을 초월한 공동체 의식과 어려운 생활 가운데서도 제사비용을 정성들여 헌납해준 경제적인 뒷받침에 의해 하회의 별신굿은 그처럼 오랜 전승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로는 다른 지역과의 문화적인 영향관계도 간과할 수 없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향이 탈놀이 중의 주지춤이다. 하회의 주지춤은 여타의 지역에 광범위하게 전승되는 사자춤과 동일한 계통임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아세아지방이나 인도의 사자춤이 티베트나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는데, 한반도의 북방에서 남쪽으로 전파되어 갔음이 분명하고 또한 하회의 주변에도 사자춤(일명 사지춤, 주지춤이라 한다)이 분포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영향관계를 실증할 수 있다. 예컨대 북방의 함경남북도 지방에는 13개 군지역에서 사자놀이의 전승이 보고되었는데, 심지어 회령지방에서는 「주지춤」이라는 용어도 같게 나타난다.
근래에 봉산의 사자탈춤이 소문이 새로 높아졌거니와 그보다 더 주의되어야 할 것이 경주의 주지춤이니 얼마 전까지도 월남과 보문에 각각 주지탈이 있고 동리마다 그것을 부양하기 위한 주지논이 있어서 그 소요경비를 공급하는데, 연말 歲初쯤의 밤중에 양처에서 출발하여 중로에서 만나 밤새도록 교전하여 승부를 내며 歲後에는 동리동리로 돌아다니면서 逐邪延祥의 축원을 함이 그 소임이었습니다.
경주의 월남과 보문동의 주지춤에 관한 기록이거니와, 이 밖에도 경남지방의 탈놀이에 등장하는 사자춤은 주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밤마리오광대의 사자과장·창원오광대의 사자과장·가산오광대의 영노(현지에서는 사자로 인식되고 있다)과장·통영오광대의 사자과장·수영야류의 사자과장 등은 모두 탈놀이를 포함한 민속놀이에서 사자춤의 영향력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해 주는 자료들이다. 이상과 같은 놀이 내용의 공통성에서 비추어 볼 때, 하회탈놀이도 다른 지역으로부터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고, 그러한 영향이 놀이의 형성에 도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놀이패와 놀이꾼
하회탈놀이의 전승이 끊긴 지 벌써 58년이나 되므로 그 공연의 실태를 파악하기란 지난한 문제다. 1930년대 후반(정확한 시기 미상) 송석하는 하회동을 찾아와 옛 광대 여섯명을 모아 탈을 쓰게 하고 그 놀이광경을 16mm 필름으로 촬영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 당시 宋은 유한상의 집에 유숙하였으므로 나이 어렸던 柳는 비로소 탈놀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다. 宋이 촬영한 필름은 현재까지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하회탈에 관한 몇 장의 사진만이 현재 확인될 뿐이다.
현재 안동군 풍산읍 하리2동 253의13번지에는 1928년 별신굿 때 각시역을 했던 이창희(1913년 생, 현73세)가 생존하여 있다. 하회동에서 태어나 17세 때 탈놀이를 하고 22세 때 고향 마을을 떠났으나 하회에는 그의 각시역을 기억하는 노인들이 생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놀이에 관하여 많은 부분을 기억해 내고 있다. 당시 권임준이 각시역을 맡도록 되어 있었으나 斷髮을 한데나 그 아버지 권달선이 부네역을 맡게 되어 가사가 곤란하였으므로 때마침 머리를 땋았던 李가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李는 6남3녀를 슬하에 두고 주로 농사로 생계를 이어왔다 한다.
놀이꾼이나 놀이패에 관한 기술은 이상의 이창희나 유한상의 증언, 그리고 그간에 이루어진 현지 조사기록 등을 참조하여 진척시키고자 한다. 먼저 앞서의 박학이(1936년에 71세)가 산 주가 된 경위를 살펴보면, 갑자년(1924) 11월 17일 밤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부재중이어서 기다리는 동안에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4, 50세 가량의 여신이 나타나 산주가 되어 줄 것을 명하였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함을 들어 사양하였으나 적임자임을 강조하였다. 잠이 깨어 집으로 돌아와 정화수를 떠놓고 생활고와 현 산주가 있음을 예로 들어 다시 사양의 뜻을 기원하였으나, 여신은 현재의 산주가 身病으로 神意를 따를 수 없다 하였다. 그 후 서낭당에 올라 신간을 세우자 그에게 신의 계시가 내려 산주가 되었는데, 前산주는 이런 일이 있은 후 곧 타계하였다.
다음으로 신탁을 받는 과정을 살펴보면, 통상 10년마다 별신굿을 거행하게 되므로 그 전년 12월 보름의 월례제(평당제)를 거행할 때 새해에 대한 신의를 묻게 된다. 통행자 1인과 함께 서낭당에 올라 소반 위에 물그릇을 올려놓고 기원하는데, 그 물그릇이 흔들리면서 산주에게 신탁이 내리게 된다. 만약 별신굿을 거행해야 된다는 뜻이 내리면 산주는 하산 후 마을의 간부나 양반에게 전하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면서 산주의 말에 따라 큰 제사를 준비하게 된다. 산주의 주관아래 신간(서낭대) 만들기, 제물의 준비, 놀이꾼이자 음악반주자 12인의 선정, 주민 대표 3인 선임 등이 이루어진다.
이상과 같은 놀이패(광대패)가 결성되면 그들은 별신굿이 진행되는 15일 동안 洞舍에서 합숙하게 된다. 신간은 동사 앞마당에 신단을 마련하여 모셔 두고 신단에는 제물을 올린다. 동사 마당에는 새끼줄을 치고 적토를 깔아 타인의 출입을 금한다. 마을을 순회 공연하거나 이웃 마을로 공연을 나아갈 때에는 광대 2인이 어깨에 신간을 받쳐들고 놀이패가 함께 움직인다. 놀이꾼들은 항시 몸을 깨끗이 하고 언행을 삼가며 신성한 마음의 자세로 가다듬는다. 1928년의 별신굿에는 박산주 이외에 윤필봉(큰광대 곧 연출역)⼗이창희(각시)⼗최순선(양반)⼗유노인(선비)⼗이씨(중)⼗금씨(할미)⼗권달선(부네)⼗이씨(초랭이)⼗김달이(이매)⼗박수근(주지)⼗권씨(청광대 곧 가면관리자)⼗장씨(임원)⼗염도출과 민운목(무동꾼)등이 놀이패를 구성하였다.
탈놀이의 대사나 춤사위, 놀이방식 등은 옛부터 전승된 것이기는 하나, 그때그때의 현장성과 즉흥성도 많이 가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감독과 지시를 큰광대(윤씨)에게서 받는다. 지명된 배역이 도저히 부적당하다고 생각되면 광대 중에서 배역을 서로 바꿀 수는 있으나 집에 돌아갈 수는 없다. 연습은 큰광대가 시켜 보고, 또 본인 스스로가 알아서 연습한다. 탈놀이 때에 구사되는 재담은 미리 연습하거나 衆智로 짜여진 것이나, 큰광대가 전번의 탈놀이에 참여했던 사람인 만큼 거의 전번의 것을 답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무진년에는 큰광대와 양반광대 및 선비광대들이 '금년에는 꼭 양반댁 대청에서 놀면서 양반의 애를 먹이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양반댁에서 거절하는 통에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선비광대가 대청에 올라가서 양반과 직접 대면하여 수작을 걸고 풍자적인 사설로 골려주기 때문에 유씨들이 그런 짓을 아니하면 초청하겠다는 조건을 걸어, 이로 말미암아 실행하지 못한 것이다.
놀이에는 몇 가지 행동지침이 있었는데, 예컨대「주지걸음 하듯 한다」,「사뿐사뿐 각시걸음」,「능청 맞다 중의 걸음」,「황새걸음 양반걸음」,「황새걸음 선비걸음」,「방정맞다 초랭이걸음」,「비틀비틀 이매걸음」,「맵시 있다 부네 걸음」,「심술궂다 백정걸음」,「엉덩이춤 추는 할미걸음」등이 그러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이러한 행동지침을 근간으로 그때그때 광대의 재능이나 신명에 따라 행동이 연출되어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사에서의 합숙시 접신 상태에 따라 놀이의 내용이나 광대들의 기량이 달라졌다고도 하는데, 이는 아마도 현장적인 신명이나 즉흥적인 창의성을 제의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탈놀이를 할 때의 춤은 경북지방의 특유한 몽두리춤이 주었고 여자역은 오금을 비비는 오금 춤이 주였으며 농악은 세마치가락을 쳤다고 한다. 농악 반주자는 별도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극중역할이 있을 때와 없을 때, 광대들이 서로 교대로 가락을 쳐주었다. 巫는 제사의식이나 성주풀이를 해주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고, 탈놀이에서는 장고로 장단을 쳐주면서 보조적인 역할만을 하였다. 광대들이 탈놀이를 하지 않고 그냥 풍물을 울리며 놀 때에는 평량자에 작고 노란 종이 국화를 많이 단 꽃갓과 흰 종이를 접어 울긋불긋한 종이꽃을 붙여 만든 고깔을 썼다고 한다.
탈의 제작
탈놀이에 사용되는 탈과 신령은 동사 2층에 놓아둔 궤 속에 보관되었다. 서낭굿이 열릴 때는 정성스럽게 내어 사용하고 다시 소중하게 모셔 두었다. 신령은 서낭대에 매달아 사용하게 되는데, 그 출처는 하회에서 멀지 않은 안동 권씨의 부락제에서 얻어온 것이라는 설도 전한다. 이는 서낭굿의 보편성이나 전과 경로를 시사해 주는 전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회의 탈을 최초로 조사한 사람은 1930년대 중엽의 송석하이다. 그러나 그 기록이 너무 단순하여 자료적인 가치는 별로 없다. 그 후 미국대사관의 맥타가드가 미국의 지면에 소개한 일이 있으며, 운보 김기창 화백은 탈의 다양한 표정변화를 처음으로 발견, 제기하기도 하였다. 유한상·최상주·예흥해·김양기 등도 현지조사를 겸하여 탈을 소개하였다. 그 후 탈에 관한 연구는 이두현에 의하여 새로운 진척을 보게 되었다. 그는 국보(제121호)로 지정된 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 9개와 주지탈(2개)을 대상으로 實測과 形狀, 木質과 色彩, 機能과 性格別로 분석 고증하였다. 鑑定에는 정태현의 기여도 있었다.
이두현은 우리의 원시가면이 삼국시대 이래 수용된 대륙계 가면의 많은 영향을 받아 하회탈과 같은 예능 가면으로 발전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즉 대륙 전래의 伎樂面·舞樂面·行道面·佛面 등의 刀法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으면서 이루어졌을 것인데, 현존하는 가면중에서 神聖가면의 성격을 한편에 남기면서도 예능가면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는 하회가면이나 屛山가면(국보 제121호)은 심목고비(深目高鼻)의 伎樂面的 骨格과 사실주의적 手法을 바탕으로 하면서, 거기에는 한편 舞樂面이 갖는 양식화된 표현과 左右不相稱의 수법 등이 보인다는 것이다. 하회탈의 9개중 5개와 병산탈(2개)이 이른바 턱이 움직이는 절악(切顎)으로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각시·부네·이매 등은 완연한 한국인의 얼굴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회와 병산탈은 기악면에서 무악면으로 옮겨가는 추이와 다시 일본能面으로 넘어가는 중간적 위치를 보여주는 가면으로서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일본가면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하였다.
최근세까지 전승된 우리의 신성가면으로는 개성덕물산의 倡夫堂(일명, 청계당)에 있는 목광대(首광대라 표기하였으나 木廣大가 아닌가 한다)가 보고된 바 있다. 창부당은 최영 장군을 받드는 장군당(본당)의 곁에 회랑식으로 붙은 측당의 명칭인데, 그곳에는 목광대라 부르는 목조가면 4개가 장군의 하졸화상 6개와 함께 걸려 있다고 한다. 4개의 탈들이 각각 어떠한 신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자세히 밝혀진바 없으나, 창부·광대·청계 등의 용어가 복합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무격(巫覡)들의 歌舞戱에 신명을 기원하고 정신병마를 퇴치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회의 탈은 이같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요소를 계승하면서도 그것이 놀이에 직접 활동되어 왔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하겠다. 즉 예능가면으로 전환되어 가는 중간 과정을 보여 준다.
조각가 최만린은 하회탈의 조형미가 매우 뛰어난 것을 지적하였는데, 9개의 탈이 눈·코·입(턱)·얼굴 생김이 각기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고, 산대계가면과도 다른 차이 (아리안계와 유사성이 있음)를 보일 뿐 아니라, 하회계와 병산계가 또한 다른 점에서 뚜렷한 특징이 드러난다 하였다. 한편 오랜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한 신앙성과 함께 사실적인 구도와 입체성을 살리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는 것이다. 하회까지의 전파경로는 미상이나 몽고계가면의 영향이 느껴진다고 하였다.
하회동의 현장
안동시에서 버스를 타고 하회동을 찾아들면 그 수려한 경관과 고풍스러운 마을의 모습이 예전의 문화를 금시 느끼게 해 준다. 하회에는 신구가 대조를 이루는 두 개의 건물이 서 있다. 하나는 옛 서낭당의 낡은 초가집이요, 다른 하나는 새로 지은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회관이다. 이 두 건물은 이곳 문화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는 셈이다. 즉 서낭당은 남아 있으나 별신굿은 이미 사라졌으며, 전수회관은 새로 지어 놓았으나 그 안에서 탈춤을 가르치고 배우는 놀이꾼의 후예들은 없다는 사실이다.
나무기둥에 토담을 쌓아 막은 벽, 빗물이나 겨우 받을 수 있는 지붕, 그리고 제단도 제격으로 없는 서낭당을 보고 있노라면, 오늘에 남겨진 그 걸작품으로서 하회탈이 아무래도 신비스럽고 기이하게만 느껴진다. 저런 초라한 제단 앞에서 그렇게 훌륭한 가면을 쓰고 놀았다니? 한 눈으로 주민들의 무성의와 무관심, 나아가서는 무지마저 느끼게 해 주는 서낭당의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 완공을 본 전통양식의 기와집인 전수회관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문화재관리국과 안동군청이 국비로 세운 것이라 하는데, 건물자체는 잘 지었으나 위치선정이나 용도문제를 고려한다면 아직은 예산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민들의 말로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1억 5천 정도의 건축비가 든 것으로 알고 있으며, 완공 후 사람들이 사용하거나 별로 가본 일조차 없다고 한다. 화산의 기슭에 지은 이 건물은 마을과 상당한 거리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마을에 빈집이 많으므로, 아직은 그런 건물을 인수 개조 수리하여 사무실겸 연습실로 사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마을에 전수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덩그렇게 큰 회관부터 지어 놓은 것이 어쩐지 납득되지 않는 처사로 여겨진다.
현 전수회관에서 남향으로 바라보는 언덕 너머에 국사당이 서 있다. 초라하다 못해 시골집의 헛간만도 못하다. 神力이 없다고 여겨서 인지 그 누군가 창고로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내부에는 가을걷이를 하고 난 볏짚단이 가득 쌓여 있었다. 당집의 앞에는 누군가 묘를 써 놓았고 주위는 마을 사람들의 놀이터로 변하여 있었다. 자기 문화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린 태도가 역력히 보인다.
화산 중턱의 서낭당에서 산길을 내려가 국사당을 거처 그 옛날 별신굿 패가 지나다니던 동구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토담 사이를 지나 골목을 돌아서면 거기가 옛 동산 자리다. 조선조 초기에 증수된 동사는 50여년 전에 불타 없어지고 집터만 남아 있는데, 큰 건물이어서 쉽사리 불길이 닿을 수 없는데도 재난을 당하여서 주민들은 서낭신의 노여움이라 생각하였다 한다. 겨울에 간질병 환자가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발작하여 발화하였는데 다행히 탈궤는 타지 않았고 그것을 구하러 뛰어든 광대도 무사하여 신의 보호라 여겼다 한다. 화재 후 가면은 산주의 집에서 보관하여 왔다. 이 동사 앞마당이 옛 탈놀이의 마당이 되기도 하였다. 놀이의 전과장을 다 하려면 마당이 넓어야 했기 때문에 동사마당을 제외하면, 서애댁·겸암댁·북촌댁·남촌댁 정도가 조건에 맞았다 한다.
마을의 놀이마당으로는 삼신당 앞뜰도 자주 활동되었다. 당이라야 느티나무 거목뿐이므로 그 나무 아래에 제단을 마련하고 가면을 놓고 제사를 올렸는가 하면, 놀이패들의 탈놀이도 행하여졌다. 삼신당은 위치상으로 보면 마을의 중심으로서 주민들이 모여들어 함께 어울리기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한때는 면사무소 건물이 주위에 있었으나 지금은 공지로 남아 있다. 그 사방에는 유씨네의 대갓집들이 모여 있다.
현재 하회탈놀이의 연구나 전수는 안동시내의 젊은이들이 중심이 된 사단법인 하회별신굿탈놀이 보존회가 맡고 있으며, 안동대학의 민속학과 학생들도 새로이 연구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애초에 안동에 하회가면극 연구회가 창립된 것은 73년 10월이었다. 이창희옹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중요무형문화재(제69호)로 지정을 받게 되었으며(1980. 11), 보존회가 발족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1982. 12)
보존회 회원으로는 이상호(백정)·김춘택(할미)·류동철(양반)·김완배(주지)·임형규(초랭이)·장종규(주지)·황치구(각시)·김오중(이매)·신승룡(선비)·임치남(중)·백용수(부네)·이승태(큰광대)·권순찬(청광대)·김시한(유사)·서영걸·전희연·김석휘·류영기 등이 연희자로 되어 있다. 악사로는 윤주만(메구, 79세)·권오한(징, 64세)·이대봉(메구, 63세)·안병순(북)·권춘연·김광숙·정옥분·강해주·임경희·김영호·민광자·전남희·김화숙·이현숙 등이 소속되어 있다. 앞서 밝힌대로 보존회의 실제적인 활동은 보존이나 전수가 아니라 새로운 발굴이며 창출이 될 수밖에 없으며, 연구가 중심 과제라 하겠다. 이창희옹은 놀이의 과장 자체는 기억하고 있으나, 그 연출이나 춤사위 등은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공연은 체계적인 전승이 될 수 없는 한계가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안동시내에서 현대공예라는 공예품전문업을 경영하고 있는 김완배(38세)는 하회탈을 직접 제작해 내고 있다.(삼산동52)
하회탈은 본래 오리나무로 만든 것이나 근래에는 재료가 귀하여 주로 피나무를 사용하며 개당 재료비는 2천원정도이나 완성되면 3만원에 판매된다고 한다. 흙과 물감을 섞어 안료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위에 광택을 없애기 위해 캇슈를 바른다고 한다. 한 달에 25개 정도를 만들고 있다. 고객으로는 안동인이 30%, 외국인이 30%, 그 밖에 다른 지방에서 40% 정도가 판매되어, 물량은 언제나 공급이 달리는 실정이다.
필자가 안동의 보존회 회원들에게 받은 첫 인상은 진지한 연구활동의 아쉬움이었다. 가능한 대로의 발굴과 성실한 복원을 위해 헌신하기보다는 성급하게 공연을 해 보이려는 태도를 드러내었다. 상업화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문화의 본질을 찾고 새로운 문화로 키우려는 창조적인 정신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울러 지방적인 긍지를 소중하게 키워가는 모든 주민들의 자각과 노력과 참여가 아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