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중기획

한·불 수교 1백주년을 돌아본다




이재형 / 번역문학가·르포라이터



1866년 음력 5월 18일 (양력 7월 7일) 밤, 지금의 충남 아산군 고창면의 한 포구에서 한 척의 배가 어둠을 틈타 소리 없이 바다로 미끄러져 갔다.

배에 탄 사람은 모두 20명으로 대부분은 상투머리를 한 조선인이었지만 단 한 사람만은 삿갓을 깊이 눌러 쓴 서양인이었다. 그가 바로 한·불수교사에 적지 않은 발자취를 남긴 리델 신부.

이 배는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일주일 뒤인 5월 25일 중국 산동 반도의 찌푸에 도착, 리델은 즉시 천진으로 달려가 프랑스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에서 벌어진 천주교 탄압의 실상을 알리고 원조를 요청했다.

이해 정월 대원군 집권하의 조선 하에서는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어 이후 3년 동안에 8천여 명이 학살되었으며 그 중에서 베르누 주교 이하 12명의 프랑스 신부 중 아홉 명은 신도들과 함께 순교했고 리델, 말래, 페롱 등 세 사람은 은신했다.

탄압의 선풍이 불기시작하자 공주 진방이라는 곳에 숨어있던 리델, 페롱 두 신부는 행방이 묘연하던 말래 신부와 연락하여 본국에 이 박해 사실을 알리기로 하고, 가장 젊은 리델 신부가 신도들의 협력으로 몰래 중국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리델의 보고를 받은 로즈는 격분, 즉시 출동하려 했으나 안남에 동란이 일어나 그리로 갔다가 8월 10일 리델과 조선인 3명과 함께 군함 세척으로 조선으로 향했다.

18일 서강에 도착한 로즈는 방비 태세가 의외로 견고한 것을 알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9월 5일 일곱 척의 군함에 해병대 600명을 싣고 다시 나타났다. 이들은 세 척의 작은 군함들을 동원, 갑곶진에 상륙하여 부근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8일 아침 행동을 개시한 프랑스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잠시 교전 끝에 강화부을 점령하고 강화도 내 이르는 곳마다 약탈 방화를 자행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서 결국 10월 3일의 정족산성 전투에서 대패, 10월 11일 약탈한 실록 60권외에 서적 3천 권, 은 4만 7천 프랑, 인장(印章) 등을 싣고 모든 관서에 불을 지른 다음 강화도를 떠났다.

이것이 프랑스가 유럽 국가 가운데 최초로 조선조의 굳게 닫힌 쇄국의 문을 두들겨 일어난 병인양요의 전말이다.

이로부터 20년 후인 1886년 조선과 프랑스는 수호통상조약㬑㬉을 맺음으로써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고 금년으로 어언 1백 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수교 1백 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두 나라는 많은 기념 사업을 이미 벌였거나 계획 중이며 한국사 연구협의회에서는 <한·불수교 백년사>㬒㬉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불 관계에 관한 연구라는 것이 대부분 외교·정치·경제 분야에 치우쳐 있어서, 문화·예술 분야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서는 물론 논문이나 소개적인 성격의 글이 거의 나와 있지 않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하여 두 나라 공식·민간 단체와 도서관을 찾아 다녔지만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얻지 못하였다.



한·불의 문화 교류는 17세기 북경을 교역처로 삼은 서학(西學, 천주교)의 자주적 섭취로서 길이 열렸다.㬓㬉 그 후 2세기 동안 선교사의 입국 없이 독자적으로 흡수된, 세계에 유례 드문 한국의 천주교가 마침내 공인되어, 1831년 북경 교구로부터 분리된 조선교구가 창설되자, 모방, 상땅, 엥베르 등 신부가 비밀리에 입국함으로써 한국 땅을 밟은 최초의 프랑스인이 되었고 최초의 인적 교류를 보게 되었다.

이들 신부들은 신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우선 불어를 가르쳤고 여기서 처음으로 불문학이 소개되었다고 보아진다. 이때 읽혀진 책들은<성모병원>, <성모님의 기적이야기들>, <성인전> 등의 카톨릭 관계 서적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당시의 프랑스 문화의 소개는 카톨릭이 그 결정적 역할을 맡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불어를 익힌 분은 바로 그들 신부들과 접촉한 노(老) 학생 바오로 정하상이며, 그 후 마카오 신학교에 유학했던 김대건 신부가 그 다음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1856년부터 10년간 충북 제천 배론에 천주교 신학교가 개설되었으며, 이는 곧 불어 학습은 물론 이 땅에서 처음으로 한·불의 직접적인 인적, 문화적 교류와 계발의 알찬 보금자리가 되었을 것이다.㬔㬉

이러한 서학 유입은, 문화면으로 볼 때 조선 말기의 도도한 개화 운동으로 표현된 한국 근대화의 큰 흐름 속에 합류되는 한 줄기 상류로서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진다.

그후 전술한 신미양요 때 로즈 제독이 강화사고(江華史庫)를 불지르고 많은 사료를 실어간 것이 프랑스의 파리 국립 도서관과 동양어 학교 등지에 소장됨으로써 한국의 문화도 프랑스에 일부 소개되는 결과가 된다.

이 서적들은 구한말 프랑스의 공사관에 근무했던 모리스 꾸랑에 의해 소개되었는데 그는 훗날 한국 서지 연구로 프랑스 정부의 아카데미상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의 고전적(古典籍)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상하 2권의 불서(佛書)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문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파리 국립 박물관에는 조선 왕조 의궤(儀軌) 297권과 왕가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파리의 동양 박물관인 귀메 박물관에는 신라의 금동관과 마구(馬具), 토기 및 고려청자 10여 점, 조선시대 혜원(惠園)의 풍속도 병풍, 작가 미상의 묵화가 소장되어 있다.

그 외에 세브르 도자기 박물관에 자기 몇 점이, 체루느스키 박물관에 낙랑칠기 4점이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족산성의 전투 후 조선에서 물러간 리델 신부는 최선일, 김여경, 심순녀 등 신도들과 함께 상해, 그리고 만주의 분구에서 <한불사전>, <한국어 문법>의 편찬에 주력하였다. 그는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가 심혈을 기울여온 <한불사전>을 요꼬하마에서 인쇄에 붙여 마침내 출판하였으니 이 책은 지금도 귀중한 문헌으로 남아 있다.㬕㬉

효성여대 불문과 교수이신 조정옥 수녀가 금년 2월 한국 교회사 연구소가 주최한 한·불수교 1백주년 월례간담회에서 발표한 <한국에서의 프랑스 문화의 소개와 교회의 역할>이라는 글을 보면 불문학 소개의 제1기는 1886년 수호통상조약 체결 시부터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까지다.

이 시기에 있어서는 1895년 외국어 학교 관제가 정해짐에 따라, 여기서 교수된 불어가 우리 나라의 학교 불어 교과목의 효시라 하겠다.

이렇게 험난한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트인 한·불 문화 교류의 자주적인 길은 다른 모든 분야의 마찬가지로 일본의 한국 침략으로 다시 막히고 만다.

그러나 이 수난기에 구미로 웅비한 문화지사들이 있으니, 그 중 최초로(1918년) 정식으로 파리 대학에 유학하여 학사 학위를 얻은 분이 김볍린, 정석해, 백성욱 제씨이다.㬖㬉

그 후 1920년대에 손우성, 이헌구 교수가 도일하여 처음으로 불어 불문학을 전공하고, 1924년 해외문학 연구회 창립에 참가하여 번역, 평론 등으로 불문학을 소개하여 우리나라 현대문학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

1900년대에 발표된 장지연의 <애국부인전>은 잔다르크의 일생을 그린 책이다. 중국 문헌에 의해서 전개가 되고 있긴 하지만 이 작품은 시·공간적으로 먼 백년전쟁 당시의 잔다르크의 구국전사를 서술하면서도 강압적인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촉발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불문학 사조는 끊임없이 유입되어 자연주의·낭만주의·상징주의 등이 1920년대 문단을 다채롭게 수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조들은 일본을 통해 수입된 것으로 서양의 것을 서투르게 흉내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실정이다.

1930년대에는 김남천의 <발자크 연구>가 이뤄지기도 했다.

그후 우리는 20여 년 간 거의 질식 상태의 암흑기를 넘겼다. 마침내 8·15해방을 맞아 처음으로 서울대학교에 불어 불문학과가 신설된 후 1968년에 이르기까지 불문학은 부조리·실존주의·행동주의를 거치면서 각 대학과 카톨릭 신문, 성 바오로 출판사 등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 시기는 불문학에 있어서 일종의 모색기였다고 볼 수 있으며 <사상계>등을 통해 중요한 글들이 번역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 후 1968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신소설, 반소설로 얘기는 누보로망이 소개되었으며 비평 부문에서도 이전까지의 실증주의적 방법론을 벗어나 구조주의, 문학사회학, 기호학 등의 다양한 방법론이 도입되면서 불어 불문학의 폭과 깊이가 넓어졌다.

발표 지면도 많이 늘어나서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세계의 문학>, <외국문학>, <예술과 비평>등의 잡지에 불란서의 새로운 이론들이 자주 소개되고 있다.

다른 문화 예술 분야의 교류도 해방이 되면서 다소 숨통이 트이긴 하였지만 그 정도는 미미하였고 그것도 불란서에서 한국으로 일방적으로 수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77년 프랑스에 한국 문화원이 설치되면서 그 흐름이 조금씩 되돌려지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란서에서의 한국 문화 소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61년도에는 프랑스에서 한국미술전이 개최되었으나 관람객이 거의 없었고 다시 1963년도에 체르느스키 박물관에서 1백 52점의 미술품이 전시되었으나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1973년 8월 29일부터 12월 16일까지 한국의 국립국악원은 프랑스에서 공연을 가져 갈채를 받았다.

르몽드 신문은 "아시아·아프리카에서 오는 무용단은 전통문화의 모조품을 갖고 와서 유럽 관중들에게 보여 주는데 한국의 국악 연주단은 이국적인 아름다움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가미된 순수성은 생소한 관중의 호기심을 끄는데 주효했다. 이번 공연은 음악과 무용이 잘 조화되어 있으며 일본과 중국 음악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고 격찬했다.

그후 1977년, 프랑스에 한국문화원이 설치됨으로써 지금까지의 양국간의 일방적인 문화교류가 다소 수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해, 극단 <동랑 레퍼터리>와 <자유>가 프랑스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이오네스코가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978년에는 <누보로망>의 선두주자 격인 로브그리에가 한국 불어불문학회 초청으로 내한하여 <신소설과 신영화>라는 제목으로 YMCA강당에서 강연을 갖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의 프랑스에서의 한국 화가들의 미술 교류를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1950, 60년대만 하여도 한국 화가가 파리에 간다는 것은 힘들고 드문 일이긴 하였지만 이응노, 이성자의 이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성자는 30회 이상의 개인전과 1백 회 이상의 합동전, 체불 30주년 기념전시회를 갖기도 하였다.

또한 <물방울 작가>로 잘 알려진 김창열은 프랑스에서는 <가장 성공한 한국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현대 미술 국제 박람회(FIAC)에 김환기의 작품과 함께 작품이 전시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는 이밖에도 한묵, 김기린, 정상화, 정문규, 손동진, 이항성, 강정완, 이자경, 오천룡, 김인중, 신성희, 김정환, 진유영, 백영수(이상 서양화), 권영우(동양화), 박충흠, 이종혁(조각) 등이 체류했거나 체류 중에 있다.

이들 한국화가 중 초대전을 통해 파리화단에 등장하는 경우는 10명 중 1, 2명에 불과하며 그림값이 싸서 생활이 힘들다고 한다.

프랑스 정부는 신규 건축물 공사비의 1퍼센트를 미술가에게 보조해 주는데 한국 작가 중에서도 이성자, 이항성, 이자경, 오천룡, 강정완, 정보원, 김기린 등이 그 혜택을 받았다.

남관, 박서보, 변종하, 권옥연, 문신 등도 파리에서 이름을 날린 작가들이다.

한·불 양국간의 문화 교류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80년대 들어서로 보여진다. 우선 지금까지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한국 문화 작품의 佛譯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83년도에는 한국문학진흥재단에 의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와 안수길의 <벼> 등이 불역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문학 작품은 영역 일변도에다 국내에서 출판되었으며 대부분 해외에는 홍보용으로 무료 배포되었을 뿐이었다.

불역을 주로 담당한 르브리에(한국명 : 여동찬, 한국외대 교수)씨는 안수길의 <북간도>같은 작품은 같은 소재인 펄벅의 <대지>에 버금가는 작품이며 황순원의<일월>, 이청준의 <매 잡이>도 소재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금년에 파리에 출간된 국내작가 손장순씨(한양대 불문과 교수)의 장편소설<한국인>(Les Coréens)은 한·불 문화 교류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한 작가의 장편소설이 프랑스 출판사를 통해 직접 출간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우리 문학의 본격적인 해외 진출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이 작품의 프랑스 출판은 75년부터 문예진흥원 측에 의해 거론돼 여동찬 교수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현지 출판사 물색기간 1년 및 계약 체결 기간 1년을 거친 지난 84년 10월에 정식 계약을 맺었다.

계약조건을 보면 한국 측에서 출판사(파리의 라 빵세 위니베르셀사)에 출판 보조비 1천20만원을 지원하며 작가는 초판 3천부에 대해 40퍼센트의 인세를, 재판부터는 10퍼센트를 받는 비교적 만족할만한 조건이다.

우리 작가들의 파리 현지 출판은 81년 14명 작가의 단편모음집 <환상을 찾는 여인>이 있었다. 올 5, 6월에는 구상 시집이 한·불수교 1백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현지에서 간행될 예정이다.

한국 작품의 불역 소개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뒤따른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번역자의 수와 질의 문제이다. 대학의 불어불문학과의 커리큘럼에서도 주로 불란서 작품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이 대부분으로 한국어를 불어로 옮기는 과목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앞으로 대학원 차원에서 번역자를 양성하는 일이 시급하다 하겠다.

또 한 가지 지적할 점은 지금까지 시, 소설에 치중된 번역을 희곡이나 평론, 또는 우리 고전 문학에까지도 확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인상파전, 샤갈전, 로댕전 등 꾸준히 한국에 소개되어온 프랑스 미술품은 올해도 지난 3월 현대미술관에서 <19세기의 화가전>을 가졌다. 여기선 선을 보인 작품들은 니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가들의 미술작품 컬렉션 100점이었다.

프랑스 영화는 70년대까지만 해도 연평균 7, 8편씩 꾸준히 수입되어 그 높은 예술성으로 한국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으나 80년대 들어 점차 감소되는 추세에 있다.

프랑스 영화의 수입가격은 5만 달러 내외이며, 예를 들면 83년에 상영된 프랑스와 트뤼포 감독의 <이웃집 연인>인 미국 영화의 절반도 채 안되었다.

이는 주로 한국 영화 수입업자들이 오락성이 짙은 美영화 쪽에 거래선을 치중시키고 있는 결과이며 이러한 사실로 인한 문화 종속이 우려되고 있는 실정이다.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프랑스 쪽에는 거의 소개가 되지 않았던 한국 영화는 84년 칸 영화제에서 <물레야 물레야>가 비경쟁 부문 우수작으로 선정됨으로써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이두용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뛰어난 컬러 화면처리와 두드러진 여권 신장론적 취향, 미묘한 테크닉에 의한 역사적 주제 부각으로 격찬을 받았다.

연초 내한한 칸 영화제 감독 부문 책임자 피에르 헨리드로와 장 미셀 오세이는 <길소뜸>과 <뽕>, <胎> 등을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올 11월의 낭트 제7회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 파노라마를 벌일 계획인 프랑스 <제3대륙 영화제> 집행위원장 필립 잘라도씨는 왜 이렇게 뛰어난 한국 영화들이 아직도 프랑스에 소개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김기영 감독의 <하녀(下女)>, <화녀(火女)>, <충녀(蟲女)>와 이두용, 유현목, 김수용 감독 등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또 한국 영화는 음향과 편집, 시나리오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아자니 등의 배우가 내한한 적이 있으며 올 6월에는 프랑스 최고의 인기 여배우 소피 마르소가 그녀의 최근 작품인 꼬르노 감독의 <사간느 요새>와 함께 내한할 예정이다.

프랑스 영화는 대부분 불란서 문화원에서 하루 4∼5편씩 상연이 되어 한국 관객의 기호를 충족시켜 주고있는 형편이다.

올해에도 한·불 수교 백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3월, 7편의 불란서 영화가 상영되었다. 이 영화들은 지난해 불란서 전역에서 최고의 흥행을 누린 작품들로서 쎄로 감독의 <광주리 속의 아가와 세 명의 사나이>, 카인느 감독의 <보나파르트여 안녕> 등이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연극도 최근 몇 년 새 교류가 활발해졌다.

극단 <자유>는 <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와 <피의 결혼>으로 84년 당시 세계 연극제와 파리 특별 공연에서 호평을 받았다.

미디 리브르紙는 "한국의 연기자들이 칼카손의 관객들을 열광시켰으며 생명과 죽음의 본질이 극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평가했고, 라 데페슈 뒤 미디紙도 "올해의 어느 공연과는 다른 이 극단의 공연을 관객들은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며 출연자들이 가진 재능의 다양함과 의미 전달 능력의 탁월함이 돋보였다"고 평했다.

프랑스 쪽의 극단이 직접 한국을 방문해서 공연한 적은 그다지 빈번하지 못하며 문학 작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희곡 작품은 상당수 번역되어 공연되었다.

소개된 작가는 이오네스코, 베케트, 쥬네, 아누이 등을 들 수 있는데 작가와 작품의 다양화가 요구되고 있다.

올해에는 그 중에서 베케트의 50, 60, 70, 80 년대 주요 작품 4편을 골라 공연하는 <베케트 페스티벌>이 한국에서 열린 바 있다.

프랑스의 인형극이나 팬터마임 등은 근년 들어 비교적 자주 공연되고 있다. 1980년 이후로 장 뤼크 빵소의 <원숭이 왕>, 장 뽈 위베르의 손가락 인형극, 도미니끄 우다르의 <우스운 환상>, 필립 장티의 인형극, 알랭 루셀의 워크숍이 공연되었다.

한국 연극의 불란서 소개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 바, 보다 본격적인 교류를 위해서는 한국희곡 작품의 불역, 능력 있는 연출가나 연기자, 스텝 등을 불란서 현지에 파견해서 보다 폭넓은 인적 차원의 교류가 요구된다.

음악의 경우도 완전히 일방적인 흐름이었던 것이 최근 백남준, 원용숙, 김홍희 등이 프랑스에서 명성을 떨침으로써 조금씩 상호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여타 국가에 비해서 프랑스의 순수 음악과 전통 음악은 비교적 한국에 덜 소개되어 있는 형편이랄 수 있다.

원용숙은 음악 철학 박사로 80년 초 불란서 정부에서 처음으로 작품요청을 받았다. 이에 따라 그녀는 82년 3월 파리에서 <환무>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환무(丸無)>와 <환무(幻舞)>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9명의 연주자를 위한 곡으로 플롯, 하프, 혼 외에도 북채를 악기화했다. 르몽드 신문은 "현대 음악을 들으면 지루하고 잡담을 듣는 것 같은데 이 작품은 청중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평했다. 그녀는 또한 음악교수 수백 명중에서 선발된 파리 IRCAM(현대 음악 및 음향 연구소)의 연구원이기도 하다.

김홍희는 자신이 출반한 <로스트 오페라>로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 키메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그녀는 독특한 창법으로 크게 인기를 끌어 음반이 1백만 장 이상 팔렸다. 또한 파리 제3TV인 FR 3의 <카당스 3>프로에 순 한복 차림으로 출연, 꼬레(Corée)선풍을 일으켰다.

백남준의 경우는 이미 프랑스 퐁피두센터에서 공연을 가진 것을 비롯하여, 현대음악의 분야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이어서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올 5월에는 퐁피두센터에서 <한국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 행사는 모두 5개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서울 미술관 관장이자 재불 화가인 임세택씨와 부인 강명희씨의 부부전, 두 번 째는 한국의 전통예술품 전시회, 이밖에 종합 예술제로 명창 조상현씨와 고수 김명환씨의 <춘향가> 공연과 대토론회 <사람, 빛나는 정신들>, 오페라마 <비 온 뒤의 한국> 등이다.



양국간 정부 차원의 문화교류는 1968년 7월에 설치된 한·불 혼성 위원회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제1차 회의는 1969년 6월 파리에서 열렸는데 여기서는 문화 예술 교류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가 있었다.

제2차 회의는 71년 5월 서울에서 열렸다. 여기서는 불어 강좌를 위해 1명의 불란서인을 파견하고 예술단의 교류를 강화한다는 내용의 합의가 이뤄졌다.

제3차 회의는 75년 5월 파리에서 열린 바, 불란서에서의 한국어 교육 및 한국에서의 불란서어 교육문제, 그리고 한국에서의 알리앙스 프랑세즈의 지위문제 등이 토의되었다.

제4차 회의는 77년 6월 서울에서 열렸다. 여기서는 양국 박물관의 교류 및 TV사 간의 교류 문제가 토의되었다.

제5차 회의는 79년 11월 파리에서 열렸는데 상업용 필름의 상호 교류 및 미술전시회, 음악 교류의 촉진이 논의되었다.

제6차 회의는 81년 12월 서울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불란서 측이 82년 10월부터 84년 9월에 걸쳐 한국 예술품을 기메 박물관에 대여, 전시코자 하는 한국 측의 제안을 환영하였으며 82년 중 한국에서 불란서 국립교향악단과 <구이뚜브롱> 브라스 4중주단, 가수 세르제 게르발의 공연을 갖기도 하였다.

제7차 회의는 83년 11월 파리서 개최된 바, 여기서는 한·불간 방송 협력 및 도서, 작가 교환이 합의되었고, 또한 한국 미술 5천년 전, 한국 개최 민속예술제 등 제반 문화 행사를 통한 양국간 문화 교류 활성화 방안이 논의되었다.

제8차 회의는 85년 12월 서울에서 열렸다. 여기서는 86년 한·불 수교 100주년 기념 사업의 내용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내용을 보면, 한국 우표 전시회, 한·불 민예품 전시회, 불란서 현대 공예 전시회, 불란서 민속 예술단 방한 공연, 불란서 현악기 전시회, 불란서 인형 전시회, 문화·예술 관계 인사 초청 등이다.



한국에서의 불문학 연구만큼 프랑스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긴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학 연구에 대한 프랑스 사람들의 관심은 19세기 후기로 소급되어 대체로 100년의 역사를 갖는다.

달레의 <한국교회사>(1874)라든가 프랑스 외방 선교회(外邦宣敎會)의 <한·불 사전>(1880) 및 <국어 문법>(1881) 등은 그들의 순수한 학술적 동기에 의해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선교활동의 일환으로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서지>(1894∼6년)라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낸바 있는 무랑은 한·불 사이에 외교 관계가 맺어짐에 따라 주한 프랑스 외교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에 대한 관심을 깊이 가지게 된 데 그 동기가 있다.

현재의 프랑스 한국학을 이루게 한 직접적인 개척자는 1920년대부터 한국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아그노에르(1896∼1978)로부터 시작된다. 본래 일본학자였던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에 여행을 하여 한국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소르본에서 처음으로 이옥과 함께 한국의 언어 및 문화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56년의 일이었는데, 이로써 프랑스의 대학에서 처음으로 한국학과가 창설되어 한국학 연구자들을 길러내게 된 것이다. 아그노에르는 다시 3년 뒤에 소르본에 한국학 연구소를 설치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에는 동양어 학교에 한국어강좌가 개설되었으며 이옥이 그 책임자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에서의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성숙되기 시작하였다.

1969년의 대학 학제 개편에 따라 소르본의 한국학 강좌는 파리 제7대학 동양학부의 한국학과로 독립되어 이옥이 주관하게 되었고, 동양어 학교의 한국어 강좌는 파리 제3대학 부설인 국립 동양언어 문화 연구소로 옮겨지게 되어 앙드레 파브르가 그 책임을 맡게 되었다. 또한 소르본의 한국 연구소는 꼴레즈드 프랑스에 소속되게 되어 이옥이 관장하게 되었다.

현재의 프랑스 한국학은 위와 같은 10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프랑스 한국학의 성장은 프랑스 국립 학술 연구원에서 몇몇 연구원이 활동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도 하였다.

모리스 꾸랑이 펴낸 <한국서지>의 내용을 보면 ① 한국 서지의 출현 ② 한국의 도서 ③ 한국의 문자 ④ 한국의 사상 ⑤ 한국의 서예 ⑥ 한국의 문학 등을 다룬 서론에 이어서, 한국 도서 3,821책을 교회(敎誨), 언어, 유교, 문묵(文墨), 의범(儀範), 사서(史書), 기예, 교문(敎門), 교통의 9가지 부문으로 분류하고, 여기에 서지학적인 해설과 문화사적인 논평을 곁들이고 있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프랑스 아카데미로부터 <스따니슬라 쥘리앙상>을 수여 받았다.

서지학적인 지식에서 출발한 꾸랑의 한국학 연구방법은 역사 정치는 물론이고 문자, 판소리, 음악에까지 확대되었다.㬗㬉

현재의 프랑스 한국학을 심기 위해서 파리 대학에 한국학과를 최초로 개설, 한국에 대한 강의를 했던 사람이 아그노에르였는데 1920년대부터 30년 동안의 프랑스 한국학은 그의 독무대였다.

그의 관심은 역사, 언어, 문자 및 민간 신앙에 있었는데 실증적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

1950년 이전의 프랑스에서의 한국학은 꾸랑과 아그노에르에 의한 모색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별도로 활동했던 이 두 프랑스 학자이 외에 한국학 관계의 논저를 낸 이들이 없는 바는 아니나, 모두 집중적인 연구는 하지는 않았다.

프랑스 사람으로 1950년대 이전에 한국학 관계의 글을 남긴 경우를 추려보면, 요낭의 <1866년의 조선 탐험기>(1868), 한국어를 모르면서 한국인 홍종우의 도움을 받아 춘향전을 번안한 레옹 드 로즈니의 <향기로운 봄>(1892), 샤반스의 <조선 전투>(1894), 홍종우와 슈발리에의 <점성술 안내>(1897), 슈발리에의 <조선의 머리 치장>(1899), 드 라지에리의 <조선>(1898), 부르다레의 <조선의 미신>(1904), 샤반스의 <고구려의 고적>(1908), 샬레의 <조선의 독립과 평화>(1919) 등이 있다.

그 외에 1890년 파리에 왔다가 나중에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는 위에서 말한 책 외에도 춘향전, 심청전을 종합, 번역한 <고목향(枯木香)>(1895)을 냈으며, 서영해의 <조선의 생활에 관해>(1929)와 <거울, 불행의 씨앗>(1934), 윤을수의 <조선의 유교>(1939) 등도 있다.

그리고 바라의 <조선 여행, 1888∼1889>(1892)를 비롯하여, 많은 한국여행기들에 있어서 당시의 한국 사회의 편모를 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의 프랑스 한국학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은 직접, 간접으로 아그노에르와 관련되며, 이들은 대부분 파리 제7대학과 국립 동양언어문화연구소에서 한국어 및 한국학의 강의를 담당하면서 한국학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또 1983년 10월부터 리용 대학에 한국학 강좌가 개설되어 역사학 전공의 이진명씨가 강의를 담당하게 되었다.

파리 제7대학의 한국학과㬘㬉에서는 역사학, 언어학, 문학, 종교학, 문헌학 등의 강의가 있으며, 이 대학에서는 한국학을 주제로 제출, 통과된 박사 논문이 20편이나 된다.

한편 국립 동양언어문화연구소에서 발표되고 있는 논문, 저서들은 프랑스에서의 현재의 한국학을 대변해 주고 있다.

여기서 발표된 논문 중에서 문화, 예술 분야에 관련된 주요 논문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Marie - Franȩoise Labouz, <L'ONL et la Corée>, Paris, 1980.

2) Marc Orange, <Corea, del ainslamiento a ladivisión del pais>, Historia Universal, 1983.

3) Daniel Bouchez, <Les études Coréennes>, Journal asiatiqe, 1973.

4) Maurice Coyaut, <Causatifs et Passif en coréen moderne>, Revue de Corée, 1974.

5) Tchoe Soc Kieu, <La neutralisation et le consonatisme coréen>, La linguistique, 1967.



한국 내에서 불어를 전파시키는 기관은 우선 1964년에 설립된 알리앙스 프랑세즈(원장 : 앙드레 슈미트)를 꼽을 수가 있다.

서울(2곳)을 비롯해서 부산, 대구, 광주, 수원, 대전 등지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곳은 불어를 배우려는 인구가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Mauger, Sans frontière 등 어학 코스와 문학 코스, 상업 불어 코스 등 40여 개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알리앙스 프랑세즈는 앞으로 여러 가지 코스를 더 개설하고 강사진도 더 늘릴 계획을 갖고 있다.

불란서 문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다양하게 한국에 선보이는 기관은 지난 69년에 설립된 불란서 문화원(원장, 베르나르 슈네르브)이다.

어지간한 대학생이라면 최소한 한 번쯤은 들렀을 불문화원은 경북궁 건너편 조용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곳이다.

1층에는 비디오를, 지하실에서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으며 2층의 도서실에서는 각종 잡지와 신문, 단행본을 열람, 대출해 주고 있다.

또한 1층에서는 한국과 불란서 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며 프랑스 영화를 감상하는 씨네 클럽도 운영되고 있어서 프랑스 문화 전파의 선봉장 역할을 해내고 있다.

불란서 문학을 국내에 소개시키고 있는 단체는 한국 불어불문학회이다. 대학교수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매년 한국 불어불문학회지를 발행하면서 불란서문학 수용에 앞장서고 있다.

이밖에도 한·불 문화교류협회, 한·불 문화재단, 한·불 문화 예술협회, 한·불 친선협회 등의 민간단체들이 각 분야별로 한국과 불란서의 문화교류에 나름대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교 이후 100년간의 한·불 교류사를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보았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글이 이렇게 겉만 훑는 식으로 돼버린 것은 우선 필자의 성의 부족에 있고 그 다음으로는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에 있다. 앞으로 관계기관이나 개인의 협조와 공동 작업을 통해 개괄적인 교류사만이라도 쓰여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나라간의 문화 예술 교류가 갖는 문제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우선, 앞에서도 여러 번 지적되었지만 양국간 문화교류의 일방적 편향성이 가장 큰 문제이다.

굳이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이 물질적 유행을 매개로 해서 외국의 문화에 일방적으로 길들여지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자기 개체의 인간성을 상실할 뿐 아니라 국민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외국 문화 숭배자로 전락하기 쉽다.

물론 프랑스 문화가 미국이나 일본이 그것처럼 저속한 소비문화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두 나라의 문화 교류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 중심이 되어 있다.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대학 내에서의 상대방 언어 또는 문학 연구학과의 설치이다. 한국의 경우를 보면 전국의 종합 대학은 물론 단과 대학에까지도 불문학과 또는 불어학과가 거의 대부분 설치돼 있으며 불어를 하는 인구나 불란서 유학생도 무시할 수 없을 숫자인데 비해 프랑스 내에는 겨우 몇 곳의 한국학 연구소만 설치돼 있을 뿐이다.

특히 불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불문학과, 불어학과 학생들은 알게 모르게 자기가 그런 문화적 종속에 감염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을 전제로 하여 한국에서의 불문학 연구도 동양학, 한국학의 방법론을 차츰 도입시킴으로써 우리의 입장에서 본 연구 실적이 나와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정부 차원의 지원이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70년대 파리에 한국 학생관을 설치해도 좋다는 프랑스 정부측의 제의를 이해 못할 이유로 한국 정부가 거절한 일이라든가 정부 장학금이 자연 과학 쪽에만 지원되고 있는 일들은 다시 한 번 재고되어야 마땅하다.

순수 예술 분야의 교류도 치중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재 등의 상호 전시도 활발해져야 한다. 대학이나 일부 민간단체에 의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연극이나 민속공연 등도 좀더 널리 그리고 다채롭게 행해져야겠다. 청소년을 위주로 한 인적 교류도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니다.

<註>--------------------------------------------------------------------------------

1) 한·불 수호통상조규는 1개월 여에 걸친 지루하고도 험난했던 협상의 진통 끝에 1886년 6월 4일 조선의 전권대사 김만식과 데니, 프랑스의 전권대사 코고르당이 기명 조인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5월 30일, 외아문(外衙門) 독변(督辨) 김윤식과 김권의원 콜랭 드 폴랑시가 조약의 비준서를 교환, 한·불 양국이 정식으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한·불 조약은 본문 14관과 부속 통상장정(章程), 세칙, 세칙장정, 선후속조(先後續條)로 구성돼 있는데 그 중 9관을 보면 "…프랑스인은 조선의 말과 글, 법률, 예술 등을 배울 뿐만 아니라 가르치기 위해 조선 국내에 여행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2) 내용을 보면 <한불조약 체결 이전의 양국관계>(최석우), <병인양요 一考>(이원순), <한불 조약 체결과 그 후의 양국 관계>(최석우), <한불인사 교류와 프랑스 고문관의 내한>(홍순호), <청일전쟁을 전후한 프랑스와 한국>(우철구), <러일전쟁과 프랑스의 대한(對韓)정책>(김정환), <정부 수립 이후의 한불관계>(홍순호), <프랑스에서의 한국학 100년>(이옥) 순으로 되어 있다.

3) 프랑스는 이미 1253년 프란치스코 회원 3명으로 하여금 몽고정(蒙古廷)을 방문하게 했는데 이중 한 명인 뤼브뤼크가 남긴 여행기(Itinerarium)에 조선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여기서는 조선을 <Kaule>이라 쓰고 그 위치도 막연히 지적하고 있다.

그후 1688년 다시 프랑스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중 지리학자인 레지스 신부는 <조선왕국의 지리와 역사>를 편찬하고 <조선왕국도>를 작성하였다.

4) 프랑스 선교사들은 당시 조선에서 박대 받던 한글을 깊이 연구하여 다블뤼 신부는 1854년경부터 중·한·불 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했고, 푸르티에 신부는 한·중·나(羅) 사전 편찬 중이었으며, 프티니콜라 신부는 나(羅)·한 사전을 편찬하고 있었다. 이들 사전들은 결국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유실되고 말았다.

또한 다블뤼 주교는 (1862년, 2권의 비망기(備忘記)(조선의 역사, 문화를 다룬 <조선사비망기> 및 조선 천주교회사에 관한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편찬, 파리로 보냄으로써 1874년 달레에 의해 <韓國天主敎會史>로 간행되었다(이 책의 주요 내용은 안응열, 최석우 역주<한국천주교회사>상·하, 분도 출판사간(刊)으로 나와 있음).

5) <한불사전>은 1880년에 (Dictionaire Coréen-Franȩais, Yokohama, 1880), <한국어 문법>은 1881년에 (Grammaire Coréene, Yokohama, 1881) 각각 간행되었다.

이 두 권의 책은 한국어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접근과 19세기 한국어의 자료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불사전>의 音長표기, <한국어 문법>의 음장 기술, 다양한 어휘는 한국어 문법에 대한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6) 1887년 한불조약 비준 이후로 누가 최초의 도불 유학생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890년 2월 11일 민종묵 外務督辨이 주한 프랑스 총영사 꼴렝 드 쁠랑시로부터 접수한 문서를 보면 <법국(法國)대학교에서 유학 중인 15명의 한국 학생 중 강예영(23세)이 병으로 귀국 중 상해에서 2월 15일 청국 선박편으로 인천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통고가 있다.

또한 1892년 7월 12일에 쁠랑시가 민종묵에게 보낸 문서를 보면 "6명의 프랑스로부터 귀국한 한국 유학생에 대한 여행 지시를 의뢰"하고 있다.

따라서 1890년대를 전후로 상당수의 한국 학생들이 도불 유학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7) 꾸랑의 한국학은 거의 무관심 속에 파묻혔다가 최근 다니엘 부세의 노력에 의해 <꾸랑의 한국 연구>(1983)가 발간됨으로써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책에는 ① 한국에서 쓰인 화폐들의 역사적 고찰 ② 한국사의 주요기(期)에 관한 연구 ③ 한국 文字史 ④ 5세기까지의 한국, 일본과의 관계 및 일본문명의 기원에 끼친 영향 ⑤ 한국의 판소리 연구 ⑥ 광개토대왕비 연구 ⑦ 한국학과 일본학 연구 ⑧ 한국 신앙의 역사 ⑨ 1900년 만국박람회의 한국관에 관한 글 ⑩ 한국과 열강들, 노일전쟁을 중심으로 ⑪ 15세기 이후의 한·일 관계 등 11편의 글이 실려 있다.

8) 이 학교의 교수진을 살펴 보면, 역사학에 이옥, 언어학에 최승언, 마르틴스 프로스트, 문학에 다니엘 부세, 종교학에 알렉상드로 귀에모, 문헌학에 마르끄 오랑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