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층문화를 총 점검한다
한국양악백년 기제학설에 이의 있다
김종욱 / 단국대학교 부설 공연예술연구소 연구원
Ⅰ. 한국 최초의 양악연주회
얼마 전 경향신문에 소개된 《한국음악100년》이란 시리즈물에서 최초의 양악 연주회시기에 관한 매우 흥미 있는 기사를 읽었다.
기존 《한국양악백년사》(이유선 저)에서 조차도 다루지 않았던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되는 이 기사를 단숨에 읽고, 필자는 그 글을 쓴 사람에게 매우 고마움을 느꼈다. 《한국양악백년사》라 하는 책자 속에 처음으로 다루었던 한국 최초의 양악연주 시기는 언급되고도 남음이 있어야 했을 문제였다. 그러나 走馬看山격으로 냅친 그 책자는 누락과 오류가 이곳저곳에 산재하여 있다.
그 글에서는 한국에서의 첫 양악이 연주되었던 시기를 1909년 12월 16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내 개인의 의견은 1909년보다는 좀더 上廻하여 1907년경부터 양악연주회가 한국내에서 있지 않았던가 한다.
물론 이 글에서 한국에서의 음악연주(양악연주회라도 좋다)는 왕실 내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 피력한 것은 필자 나름대로의 탁견임에는 틀림이 없겠다. 이때의 음악연주회란 것은 고작 서양 군악대의 모습을 그대로 갖춘 조선주차(駐箚) 육군군악대가 궁중 내에서 행사가 있을 경우에 간간이 가졌던 비교적 규모가 보잘것없는 것이었는데 이나마도 시기를 달리하면서 오래 지탱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대체로 이것을 양악연주회라고 간주한다손 치더라도 이것 자체를 일반서민 대중들에게 들려주고 피부적으로 느끼게 했을까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즉, 1907년 4월 27일에 서양인으로 구성된 한 규모가 작은 악단(?)이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고 연주회를 가졌던 것이다.
이 음악회는 규모에 비해 자칭 '대음악회'란 표현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광고문을 냈다.
대음악회, 신문外 법인여관(法人旅館) 에쓰토하우스에서 本月 4월 27일(토요일) 오후 9시에 서양 해금사 머켄스양과 양금사 보나비아 헌트양과 대한재인(大韓才人)이 조력하여 대음악회를 개최하오니 첨군자는 내임완람(來臨玩覽)하시앞. 입장표가는 3원인데 본 여관에서 발매함. (대한매일신보 1907. 4. 27)
이러한 광고가 신문을 통하여 나간 뒤 과연 이 프랑스인 머켄스, 보나비아 헌트양의 대음악 연주회에 얼마만한 관중이 모였을까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성황 여부를 말하기보다는 아마도 이 음악회가 한국에선 첫 번째로 행해진 양악연주회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래서 1909년 12월 16일 개연된 양악연주가 한국에서 첫 번째였다는 얘기는 일치가 될 수도 없거니와 다음의 몇 가지 예로 드는 양악연주회 등이 기왕의 설명보다는 앞서서 연주되었던 사실이 기록상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어서 그것 자체를 부연해서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앞서의 머켄스양 연주회가 끝난지 채 1개월이 되지 못해 서울 장충단에서는 하나의 뜻깊은 음악회가 개최되었다. 그것은 여학교연합 대운동회가 벌어진 가운데에서 군악이 연주되고 각 여학교 학생들의 합창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성대한 음악회는 당시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의 상황을 신문 <만세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여학교연합운동 성황. 여학교연합 대운동회는 기보(旣報)와 여(如)히 작일(5월 2일)에 장충단서 설행하였는데 참회(參會)한 학도는 양규의숙(養閨義塾)이 52인이오, 상동여학교가 58인이오, 진명여학교가 33인이오, 新學院이 35인이오, 능동여학교가 42인이오, 간호원 예비학도가 10인이오, 수원화성여학교가 17인인데…(절차) 광무 11년 5월 25일(토요일) 상오 8시 집회, 9시 개최학생 상견례 창가합주 칙어봉독, 9시 30분 연합취지설 주석 <여자교육의 급무>(학부), 창가 진명여학교, 10시 <외국여학교의 형편> (하부인), 창가 양규의숙, 10시 30분 <단체력의 효력>(최병헌), 창가 상동여학교, 11시 <학도부형의 의무>(노병선), 창가 신학원…
이 기록이 비록 양악연주회의 효시가 되진 못하더라도 눈여겨볼 만한 자료가 될 듯해서 소개해 보았다.
또 하나, 1907년 여자교육회 총재 이옥경 여사가 자체 여자교육회의 자금을 보충하기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하고자 경시청에 청원하였던 바, 인가가 나와 개최됨과 동시에 여간 좋은 반응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음악회에서 太西(서양) 각국의 음악연주회를 열었던 것이다. 이때가 1907년 9월17일 이었다.
이와 같이 1907년도에 3차에 걸쳐 공연된 음악연주회가 각처에서 개연되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이때의 음악(양악)연주회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으레 레퍼토리가 필요로 할 것이겠으나 오늘날 그 규모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못내 서운할 뿐이다.
1909년 10월에는 한국에 와 있는 서양인들이 한국인을 위한 자선연주회를 설행하였던 일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행사는 일찍이 없었던 일로서 이때의 신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었다.
자선연주. 경성에 재류하는 서양 각국 유지신사 제씨가 평양에 맹아학교와 강화군 교회학교에 보조하기 위하여 내월(10월) 7일 오후 7시에 청년회관에서 연주회를 설행한다더라, (대한민보1909. 9. 25)
이 기록으로서 본다면 역시 1909년 12월 16일 YMCA에서 한국 초유의 양악연주회가 개최되었다고 하는 설명에 약 2개월 여를 앞서고 있다.
부연해서 지금까지 설명해온 것을 정리한다면 1909년보다는 1907년 4월 27일의 에스토하우스에서의 소규모적인 음악회의 연주회 상황이 밝혀져야 했을 것이고, 다시 같은 해 9월 18일에 있었던 여자교육회가 베푼 데서 각국 음악연주회가 더 신빙성 있는 양악연주회(규모로나 실재적인 측면으로 본다면)가 아니었던가 보고 싶은 것이다. 그 몇 년 후 YMCA에서 개최된 양악연주회를 한국에서의 양악연주회의 효시로 보기 어려운 까닭은 저반의 설명에서 밝혀진 때문이라고 말하여 두고자 한다.
Ⅱ.《객석》 제2회 예술평론상 양악부문 당선작 <개화기 음악의 사회사:1884∼1945> 에 이의 있다
본고 <개화기 음악의 사회사>는 심사위원의 말대로 달필로 명성을 올리고 있는 호흡이 리드미컬하고 문장의 맥락이 유려한 재능으로 여러 군데 산재해 있는 자료를 섭렵하여 쓴 글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개화기라 설명한 1884년(1884년 선교사 입국과 동시 찬송가의 보급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서 서양악이 한국양악사의 첫 시발점이 될 수는 없다)부터 1945년 광복직전까지 음악사의 자료를 이용하여 250매 정도 글을 썼다. 그러나 자료를 단 한건도 본 논문에 인용하지 않고 있다. 인용했을 자료가 당시의 신문보도·잡지의 기사라 생각되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취급되어 지질 않고 있다.
나는 이하 그의 글 중에서 두드러지게 오류를 범한 몇 항목을 지적 수정하고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1) 에케르트의 육군군악대가 1900년에 출범했다는 것(<객석> 1986. 3. 이하 인용 같음 p. 236) : F. 에케르트가 한국에 온 것은 1901년 2월 19일이고, 그가 이끄는 군악대의 정식 명칭은 육군군악대라 하지 않았고 <조선주차 육군군악대>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혹은 육군 시위군악대란 표현을 쓰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제대로의 정식 명칭은 아니었다.
2)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민영환이 고종에게 군악대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 1900년에 육군시위연대 소속으로 군악대를 창설(p. 237) : 한국에서의 군악대 창설의 시기에 대해선 구구하게 이론이 많다. 게다가 민영환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와 고종에게 복명할 때 군악대 창설을 건의했다는 것은 근거 없다. 민영환의 복명서는 그가 귀국하여 작성한 바도 없었고, 그가 남긴 글 <민충성공유고집>에도 전혀 나타나 있는 곳이 없다. 다만 곡호대(曲號隊)의 창설을 그가 관계하였다는 부분을 자료로써 찾는다면 여러 곳에 보이긴 한다. 이 문제는 조속하게 다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여 이 관계를 해명하는 심층적인 논문이 나와야 될 줄로 안다.
3) 1902년 6월 12일 파고다 공원에서의 군악대 연주 : 연대 착오인 것 같다. 1902년 7월 1일에 <대한제국 애국가>가 공식적으로 제정된 이후 군악대의 연주회가 궁내가 아닌 야외에서 공공연하게 연주된 사실은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군악대는 1907년 8월 1일 정미 7조약으로 해산되고 이들은 새로이 편성된 직제로 흡수되었으며, 이 악대가 파고다 공원 서쪽에 신축된 양옥으로 옮겨온 시기는 1902년 6월 12일이 아니고 1903년 9월이었다. 또한 이 악대가 파고다 공원에서 야외공개연주회를 가진 것은 1902년에서 11년이나 후의 일로서 1913년 9월부터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군악연주를 매주 토·일요일에 가졌던 것이며, 1914년 7월초부터 매주 목요일을 택하여 오후 8시에서 10시까지 연주회를 가졌던 것이다.
또한 이 군악대의 명칭이 한일합방 이후 이왕직양악대란 또 다른 칭호가 생겨났다는 것도 근거 없다.
4) 에케르트의 사망이후 이왕직양악대는 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다(p.237) : 그것도 잘못된 것이다. 앞서 말한바 대로 에케르트는 한국군악대(약칭)가 1905년 정미 7조약과 함께 해체되면서 그는 실제적인 악장으로서의 권위가 실추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휘를 비롯한 제반 주요 업무는 그가 키운 한국인 부악사장격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백우용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왕직양악대가 완전 해체되던 1916년 직후까지는 백우용이 모든 행사를 주관하였다. 에케르트는 후임으로 물러나 이들 양악대의 행사를 지켜보았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왕직양악대가 해체는 됐을망정 백우용이 세상을 떠나던 그 무렵까지 한국 군악대의 명맥은 유지되고 있었다.
1915년대 이왕직양악대의 연주곡목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장 활발/월후사자(일본악곡)/세미우라미스 서곡/춘곡조/극곡(劇曲)조/바다 밖의 흰 돛대(일본악곡)/서곡 뽀루데지방어리/스페인 무도곡/육군암호/일본국가<기미가요> 등. 이 곡목들을 수시로 바꾸어 가며, 때로는 카알 친왕/올페의 소녀/칼맨낭자 원무곡/탄호이저/배우 창가행진곡과 같은 경쾌한 행진곡도 상당히 세련되게 연주를 하곤 했었다.
5) 공립보통학교에서 음악을 정식과목으로 채택한 것은 1906년(p.238) : 그냥 막연하게 연도만 밝혔을 뿐 그 과정이 전혀 소개되어져 있질 못하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1906년 4월 경기도 강화부의 사립보창(普昌)학교의 사범학원생 모집 광고에 보면 학과 중에서 唱歌科가 있었다. 같은 해 9월에 관보로서 반포된 사범 학교령 시행규칙을 보면(사범학교 본과 학과과정 및 매주 교수시간표), 학과목 중에 음악과가 있어 단음창가(單音唱歌)를 교수 받았는데 그 해당 학년은 1학년급이었다. 다음 2, 3학년급은 단음창가와 악기사용법이 병행되어 교수를 받았다.
이와 같이 교육시행령 규칙이 반포되면서 여러 학교에서 학원생을 모집할 경우 그 학년급이 초등과이든 중등과이든 가리지 않고 학과목에 창가과를 편입시키는 것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고등학교령 시행규칙에서 세부적인 각 학과목을 교수하는 요지를 자세하게 밝히고 있는데, 음악과의 경우 '가곡을 唱함을 知得케 하야 미(美)한 흥운(興韻)을 감발하고 심정을 고결(高潔)케 하며 겸하야 덕성함양에 자뢰(資賴)케 함을 요(要)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다음 음악교과서가 발간된 시기가 1910년이란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나 역시 과정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학부에서 정식으로 각 학교에 음악교과서를 인행발간한 시기가 1910년 초라 한다면 개개 학교에서의 음악교과서가 나름대로의 인행 반포된 시기는 1907년이었다. 그것은 1907년 6월 관립사범학교에서 일본인 소출부길(小出富吉)로 하여금 음악교과서를 저술, 발간한 것이 개별적인 교육창가집 발간의 효시라 볼 수 있겠다. (만세보. 1907. 6. 5. 참조)
1910년 1월 19일 학부는 각 사립학교가 누차 훈령한대로 적당치 못한 창가를 폐지하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시되지 아니하므로 학부가 방금 학생들에 게 적당한 창가를 편찬중이라는 기사가 있은 연후에 제1집이 4월경 출간되리라 예고했으나 1개월이 늦은 5월 24일에 음보가 붙은 <보통교육창가집> 제1집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 <보통교육창가집>은 즉시 각 학교로 분배되지 못하고 9월 하순(23일)에 반송된 사정이 있었다. 저간(這間)에 나온 <보통교육창가집>이 제1집만 출간되었는지 제2집, 제3집이 계속 출간되었는 지의 여부는 그에 관한 기사라든지 현품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6) 調陽俱樂部에 대해서 : 조양구락부는 주지하다시피 한국 최초의 정악연구단체임은 널리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 단체가 현 한국정악원(국악원)의 전신이라는 데에서도 한국음악사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양구락부는 1909년 12월 27∼29일 사이에 한석진씨의 발기로 영선군, 이준용을 총재로 추대하고 부총재에 유길준을, 총무 홍긍섭, 교과감독 김종남, 평의원에 조남승, 간사에 현동철, 회계직에 곽한영을 모아 자하동에서 출범하였다.
그런데 조양구락부가 완순군 이재종씨로부터 다소의 희사금을 받은 것 같이 언급하고 있으나, 조양구락부라는 명칭이 건재하고 또한 이 단체가 1년여를 유지해 나가는 동안 어느 외부로부터 원조금 같은 것은 받은 일은 없었다.
또 한편으로 왕가(순종황제)로부터 1천 4백원(실제로는 2천 4백원)을 하사 받고 매월 2백원을 보조받았다는 설명. 즉, 조양구락부가 발족한지 1년을 견뎌내지 못하고 재정 보충을 위한 온갖 신고를 다하던 끝에 이 단체의 어려움을 전 황제 순종이 알고 후작 박영효를 통해 조양구락부의 후원을 위한 1차 접견이 있게 되었다. 조양구락부원은 순종에게서 후원의 약속도 받고 바야흐로 관심이 조양구락부에 미치게 되자 이것을 계기로 조양구락부유지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이 유지회에 희사금이 영선군 이준용으로부터 금화 5백원이 들어왔고 순종으로부터 약속한 희사금이 이해 6월에 들어왔다. 이때는 조양구락부가 이미 조선정악전습소로 명칭을 바꾼 지 1개월이 넘은 때로서 조양구락부가 왕가로부터 악도 장려금을 받은 것이 아니라 조선정악전습소로 신 발족하여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 전후 사실이 뒤바뀌어서는 아니되겠다는 것을 말해둔다. 그리고 하사금액도 1천 1백원이 아닌 2천 4백 원이었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7) <京城樂友會>는 친일음악후원회가 아니다 : 어떤 근거자료로 <경성악우회>를 문화정치를 표방한 일본정부의 친일음악회라고(p.239) 못박아 단정했는가. 자세한 언급과 설명이 전혀 없을뿐더러 과연 <경성악우회>가 다섯 사람의 일본발기인이 주조직을 이룬 친일단체라고 하는 그 자체를 분명히 밝혀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 단체가 그렇다면 친일 음악조직 단체였을까.
<경성악우회>는 1919년 10월(날짜는 미상) 경성(서울)안에 있는 음악가 세 사람(홍영후, 김영환, 김형준)으로 조직된 음악단체였음을 당시의 신문 <매일신보>는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단체는 음악보급을 목적으로 제1회 대음악연주회를 종로 YMCA 대강당에서 성대하게 개최했다고 하였다. 출연진으로 경성악우회의 주간인 홍영후씨와 김영환·김형준씨 등이 출연하리라 하였다. 그렇다면 이 단체가 친일적인 후광에서 조직되었다 할 때 이 단체의 주간을 맡고 있는 홍영주씨와 기타 김영환·김형준씨는 친일단체의 핵심인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경성악우회가 1920년 이후 <대음악회>를 개최했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대음악회>는 <경성악우회 제1회 음악대연주회>의 약칭으로서 개최시기는 1920년대가 아니라 1919년 12월 13일인 것이므로 막연하게 1920년 이후라는 설명이 옳다고 볼 수 없다.
이 <경성악우회>의 음악대연주회가 YMCA 대강당에서 베풀어졌을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연주된 곡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순서는 바이올린독주, 피아노독주, 성악독창, 오케스트라 관현악합주 등 10수종이라 하였다. 이 요목(要目)만 보아도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가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이 음악회는 본래의 연주회를 끝내고 막간극으로 채플린 연극도 공연하였다. 참 재미있는 구성이었다. 이날 연주회는 오후 7시에 시작하여 9시 30분에 끝났다. 입장권은 청권(靑券)이 1원이고, 홍권(紅券)이 50전이었다.
<경성악우회>가 발족하고 두 번째 공연을 가진 때는 그해(1919년) 12월 29일이었다. 홍영후는 이제 이 공연을 마지막으로 일본으로 正初 유학의 길을 떠나기도 하였다.
이날 연주된 곡목은 경성악대(이왕직양악대의 후신)의 주악을 시작으로 해서 플롯, 하모니카의 독주와 바이올린 합주, 최동준씨의 만돌린 독주, 김인식씨의 독창, 김형준씨와 김원복양의 독창, 홍영후씨의 바이올린 독주 등으로 만당의 열광을 받았다.
친일단체라면 응당 일본인 악사의 출연이 대다수였을 것이고, 또한 경성악우회의 구성 멤버에는 5인은커녕 단 한사람의 일본인도 참가하지 않았다.
Ⅲ. <한국양악연주활동>중에서의 오류 몇몇.
《한국음악사》(예술원, 1985. p. 529)를 보면 해삼위동포연예단의 연주상황을 밝히는 과정에서 출연진의 이름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 있음을 본다. 원래의 출연진은 김동환, 이봉극, 고숙경, 서진선 등인 데에 반해서 이봉극이 이풍극으로 고숙경이 고군숙으로 잘못 소개되고 있으며 이 단체의 정식 명칭은 해삼위동포음악인이 아니라 해삼위동포연예단이었음을 밝혀둔다. 이러한 명칭이 잘못 소개된 곳은 각처에 너무 많이 나타나 있어 그것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으나 단순한 교정상의 잘못에서 온 본의 아닌 오식이라 보고 싶지는 않다.
또한 어떠한 음악회가 개최되는 경우 사정으로 연기되는 경우가 자주 있게 마련이다. 필자는 그러한 상황을 파악 못하고 주최측의 사고도 참조하지 않은 채 연기되기 이전의 상황만으로 연주회의 날짜로 잡은 것이 많다. 그 예로써 1923년 6월 8일에 개최되려고 했었던 만국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기성회 주최의 <서양부인음악회>가 정작 6월 8일에 열리지 못하고 사고로 9일로 연기하여 음악회를 개최한다고 밝힌 사실이 있었다. 필자는 그것을 간파 못하고 연주회 개최 일자상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예의 하나는 이러한 경우가 있다.
'3공연 돌려가면서 목요일에 양악 연주'라 하는 기사를 보면,
경성부는 경성악대를 청하며 3 공원을 돌아가며 음악연주를 갖기로 했는데 해마다 봄·여름·가을의 1, 2 ,3 목요일마다 연주회를 개최하며 시간은 오후 8시∼10시까지이고 매월 첫 목요일은 남산공원에서, 둘째 목요일은 탑동공원, 셋째 목요일은 장충단공원에서 연주회를 갖도록 하였다. 8월 2일 첫 목요일은 남산공원에서 연주. (동아일보 1923. 7. 28)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분리 소개하면 연주장소 및 일정은 다음과 같다.
A) 남산공원 : 8월 2, 12, 23일·9월 2 ,13, 23일.
B) 탑동공원 : 8월 5, 16, 26일·9월 6, 16, 27일.
C) 장충단공원 : 8월 9, 19, 30일·9월 9, 20, 30일. (단 비가 오면 하루씩 연기)
이런 상황을 알지 못하고 《한국음악사》(p. 529)에는 1923년 8월 2일 하루동안에 경성악대의 음악회가 남산공원, 파고다공원, 장충단공원 등 세 곳에서 동시에 개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8월 2일은 남산공원에서만 연주회가 개최된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러한 예로서 또 하나 두드러진 예 하나를 더 들어보겠다.
악성 베토벤 탄생 150주년 기념음악회가 서울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동경음악학교동창회가 주관이 되어 1923년 12월 17일 YMCA 대강당에서 오후 7시부터 개최되었다.
베토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라면 응당 1920년에 개최되었어야 했을 것이나 그해에는 열리지 못하고 4년이 늦은 1923년에 가서야 열렸던 것이다. 그와 같이 늦게 열렸어야 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한국에서 150주년 베토벤 탄생기념 음악회의 행사는 1923년에 있었고 그 이듬해 연악회의 주최로 베토벤 탄생 150주년 추모의 밤이 열렸던 사실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과는 정반대 되는 설명을 《한국음악사》(p. 526)에서 하고 있다. 즉, 1920년 12월 19일 베토벤 탄생 150주년 기념음악회가 한국에서 개최되었다고. 정확한 연대로 쳐서 밝히자면 1923년이 옮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겠으나 실재적으로 한국에서의 공연되었던 시기의 여부를 놓고 규명할 때에는 1920년에는 공연된 사실이 없었음을 안다면 《한국음악사》의 그 기록은 재고의 여지가 없이 틀린다고 지적받아 마땅하다.
이같이 《한국음악사》에는 음악연주회의 시기가 재대로 소개되어 있지 않은 항목이 많다. 1924년 11월 하순 한국에서의 음악연주회를 갖기 위해 내한하였던 악성 짐발리스트의 한국에서의 공연시기도 예고된 날짜에 공연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하루가 연기된 사실이 있어 착오를 일으키고 있다. 짐발리스트가 당초 개연하기로 된 공연일자는 11월 26일 (한국음악사 p. 532에는 11월 25일 개최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잘못이다)로서 그가 타고 오던 船便이 지연된 관계로 26일에 도착하지 못하고 27일 아침에 서울을 도착하였으므로 27일 오후 7시에 음악연주회가 개연된 것이었다.
《한국음악사》가 지금까지 소개한 공연시기의 정확한 사실을 밝히지 못한 많은 오류 가운데에서 정말로 간과할 수 없을 중대한 잘못을 기술하여 놓고 있는 것이 있어 이 항목의 마지막으로 그것만 소개, 시정하고 끝내려 한다.
한국의 명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세계적으로 명성을 한 몸에 받은 영광된 음악가 계정식씨가 전공분야의 음악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가 12년만에 귀국한 시기가 1935년 3월 9일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9일 오후 3시 20분 서울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5월 15일 오후 7시 30분부터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귀국 후 처음으로 귀국공연 바이올린 독주회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한국음악사》(p. 537)를 보면 계정식 귀국 바이올린 독주회가 1934년 10월 하순 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고 기술하여 그의 귀국 시기를 놓고 혼동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1934년 10월이라면 그때까지 계정식씨가 독일에서 학업에 전념하고 있을 때이다. 독일을 떠나 귀국한 시기가 1935년 3월이 분명한데 그가 귀국하기도 전인 1934년 10월에 귀국 독주회를 공회당에서 가졌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좋을까.
그는 독일에서 《조선음악의 역사적 고찰》과 《동양 음악의 基因》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학위를 취득한 뒤에 다시 스위스 하렐대학에서 美學을 전공, 철학박사 학위도 받았었다.
계정식씨가 귀국하기 전인 1933년 1월20일 독일 루쯔뽈시 음악당에서 가진 바이올린 연주회에서 대성황의 열광을 받았는데. 이때 이 공연을 보고 비평한 연주회의 실황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씨의 바이올린 독주회는 대성황리에 개최되었던 바 그렇게 청중의 흥미를 유발한 것은 연주자가 외국인이라는 점에 그러했던 것인가. 아니면 프로그램의 풍부함에 있었던가, 또는 연주자가 일찍부터 부르쯔 시중(市中)의 일반적 인기를 얻고 있었던 관계 때문인지 모르겠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여러 가지 곡목으로 되어진 것이었으니 흥미도 대단하였을 것이고 대체적으로 환희에 가득한 연주회의 밤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연주의 시작부터 헨델의 작품 뿌르크의 유명한 콘서트와 슈트라우스의 소나타 등이 연주되었는데 뿌르크의 콘서트에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없었던 점은 좀 섭섭하였다. 그리고 쉰들러와 쇠테비츠의 아름다운 소곡에 이어서 여러 곡의 조선음악을 들려주었던 것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이러한 조선음악은 서양의 情調가 갖지 못한 풍부한 것으로서 그것이 순수한 조선의 곡조인지 혹은 서양정서를 가미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멜로디도 풍족하고 리듬도 활발하여 많은 자극을 주었다.
계정식씨는 바이올린의 현을 켜는 것이나 손놀림이 자못 숙련되어 있어 따뜻하고, 원만하고 고상한 음조를 좌우할 줄 알고 있다.
이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정교한 기술의 소유자일뿐더러 그 기능이 상당해서 그가 독일에서 연구했다는 그 어떤 두드러진 느낌을 주었다. 이날 연주회의 밤은 실로 청중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준 찬미의 밤이었다. 그리고 환희의 밤이었다. 이제 이러한 바이올린 연주회라면 언제 어디를 막론하고 그의 연주회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청중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1933년 1월 20일자 독일 <루쯔볼>신문에서 발췌-
계정식씨의 귀국 바이올린 독주회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35년 5월 15일 공연되어 대성황을 이룬 것과 함께 국내에서도 이 음악회의 성과를 극찬으로 평하여 계정식씨의 환영은 무르녹았다.
음악평론가 박경호(조선음악가협회 회장)씨가 음악회를 보고 평한 <계정식씨의 제금 독주회를 듣고>를 참고자료로 전재하고 이때의 음악연주회 분위기를 살펴보기로 한다.
금반 계정식씨의 귀국과 연하여 그의 제금 독주회는 실로 조선사람의 자랑이오 조선음악계의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일찍이 계씨의 능력을 몰랐던 바 아니었지만은 당야(當夜)의 그의 연주는 실로 우리 사람에게 경이와 감탄, 그것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사람의 음악적 능력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이에 필자는 부탁에 의하여 당야에 (청중의 1인으로서) 얻은 감상을 몇 마디 써보려고 한다.
우리들은 흔히 음악이나 연극의 연출가들로부터 받은 인상 중에서 제일 강하게 또는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점은 그의 연출을 통하여 나타나는 인격이다. 크라이슬러나 파토레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등 세계적 연주자가 연단에 나타나서 4, 5천명 청중에게 일종의 압도적 위력을 방산(放散)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인격이다. 기술만으로는 크라이슬러나 파토레프스키보다 우월한 자들이 없지 않다. (중략) 그날 저녁에 13년을 내려오면서 고조(高潮)에 창일(漲溢)한 우리 기대에 응하여 제금을 들고서 나타날 때에 활을 들어 힘있는 제1성을 부르짖을 때에 표명되는 그의 고아한 인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느 모로 보든지 신사요, 학자이다. 입신한 기술을 우리가 원하지 않는바 아니나 이런 기술을 가진 신사와 숙녀를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며 음악가로서의 신사와 숙녀를 요구할 뿐 아니라 조선의 일꾼으로서 신사와 숙녀를 갈망하는 것이다.(중략) 그의 연주를 통하여 우리는 그의 예술적 태도를 잘 엿볼 수 있다. 그의 해석은 어디까지나 純美的, 학구적이고 예의 감상적 허식적 표현방법을 볼 수 없다. 이것은 계정식씨가 年來로 체득한 순수한 독일 계통의 예술 사상이요, 수법인 듯하다. (중략) 그의 음악은 부드러운 명주실로 꾀인 금강석 목도리와 같이 순수하고도 찬란하며 高價인 예술품이다. 더구나 아악 취태평지곡(醉太平之曲)을 읊을 때에 특히 D선과 G선의 소리는 일종의 초인간적인 소리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듯하다. 현악기 중에 좋은 소리를 내기에는 계정식씨가 이번에 (조선에서 처음으로) 연주한 비올라가 그 중 어려울 것이다. 바이올린의 광골상연(光滑桑軟)한 소리와 비올론첼로의 난숙 안온한 소리에 비하여 비올라는 애수, 침울에 가까운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그래서 이것이 관현악의 정규 악기로서 인정을 받기도 음악사상에서는 근대의 일이고 독주 악기로는 아직도 시험 중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필자는 계정식씨의 비올라 소나타를 이번에 듣고 나서 비올라의 능률을 전보다 더 인식하게 되었다. (중략) 필자는 멘델스존협주곡의 실연을 이번이 8회인가 9회째 듣는다. 이중에는 세계적 제금가도 있고 상당한 예술가도 있었으나 이번에 계정식씨의 연주와 같이 그렇게 감격한 반응을 받아본 일은 없다. 물론 여러 가지 주관적 심리와 선입감이 동기의 일부분이라 하겠으나 대부분의 그의 주법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반대할 수 없다.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그의 기술을 평할 자격이 내게 없으니 세밀히 말할 수 없거니와 일반 청중에게 주는 감탄, 그것은 그의 기술의 정도 여하를 잘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틀림없을 줄 안다. (조선일보, 1935. 5. 19)
이날 연주회의 피아노 반주는 말쓰베리씨였다.
한국양악 연주활동을 치밀하게 연표로 작성하여 발표해 줌으로써 이 관계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도움의 한편을 제공하려는 생각으로 1천여 매에 가까운 <한국양악주요연구활동사 초(抄) 1910∼1945)를 꾸며 놓은 것이 있다. 나름대로 꾸밀 성질의 연표자료가 아니기에 이 관계자료 모으는 데만 2년여의 시간을 보냈고, 6개월 동안의 카드작성을 진행시켰던 그 보람으로 어디에 내놓아도 떳떳한 <한국양악주요연구활동사>를 정리하여 갖고 있는 것이다.
탈고가 된 뒤에 예술원에서 발간된 《한국음악사》 가운데에 연주활동(양악)과의 대조를 시도해 보았다. 오류는 많고 누락(어떤 것은 연도별 전체가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1900년초 ∼1918년, 1920년, 1921년, 1930년, 1936년도 사항이 모두 누락)되어 있어서 우선 누락부분을 보류하고 중요 연주(1928년∼1937년) 관계만을 발췌, 덧붙이기로 하였다.
(1) 고용길(고용길씨 첼로 독주회 : 1928년 3월 31일 오후 7시 30분)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개최, 피아노 반주 김영환씨.
(2) 소프라노 영정욱자(永井郁子) 독창회 : 일본어로 독창, 1928년 4월 27일 오후 7시 30분,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개최. 대평설자(大平雪子)와 대장용지조(大場勇之助)씨의 찬조출연도 있었다.
(3) 외국인학교 자선가극회 : 경성외국인학교가 자선을 목적으로 1928년 5월 11일과 12일 2일간 정동 모리스홀에서 개최되었다.
(4) 영목(鈴木) 현악트리오 연주 : 경성일보사 주최로 1928년 7월 1일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오후 7시부터 개연되었다.
(5) 국제음악연주회 : 경성음악회 주최로 1928년 12월 14일 오후 7시 30분부터 정동예배당에서 2백여 인의 명류국제음악연주인을 초청, 연주회가 개연되었다.
(6) 모리스홀의 음악의 밤 : 경성주재 외국인음악애호회의 주최로 1929년 1월 25일 7시 30분부터 정동 모리스홀에서 음악의 밤이 개최되었다. 출연진은 한국인, 미국인, 프랑스인, 일본인의 일류 악사들만이 출연하였다.
(7) 일본인 山田? 作 작품발표 연주회 : 매일신보사와 경성일보사의 공동주최, 1929년 4월 13일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흑유수강(黑柳水綱 : 바이올린), 천야학자(淺野鶴子 : 소프라노) 등 찬조출연.
(8) 구라파 명곡연주음악 애호의 밤 : 정동 모리스홀에서 1929년 5월 20일 오후 8시부터 개연. 이태리·프랑스의 명곡만을 선별, 성악과 현악을 합해 모두 11곡이 연주되었다.
(9) 와그넬 소사이어티연주회 : 1929년7월 29일, 30일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10) 하이돈, 콸텟트 대연주회 : 실내악의 거장 하이돈, 콸텟트씨의 실내악 대연주회가 1929년 8월 17일 매일신보사의 주최로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이 악단의 구성을 보면 제1바이올린 지우 맹(芝祐 孟), 제2바이올린 안부계암(安部季巖), 비올라 삼산장곡부(杉山長谷夫), 첼로 다기 영(多基 英) 등으로 편성되어 있다.
(11) 등원의강(藤原義江) 독창회 : 테너 등원의강의 독창회가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오후 6시부터 갖는데 일시는 1929년 11월 14일이다.
(12) JODK 창립 3주년 기념 연주대회 : 양악과 조선악, 일본악을 중심으로 해서 편성된 연주대회가 전파를 통하여 1930년 2월 16일부터 22일까지 연속 7회로 나갔다.
(13) 이화여자전문학교 제4회 졸업연주회 : 이화여전 음악과 주최로 1930년 3월14, 15일에 동교 대강당에서 개최.
(14) 레베부인, 코한스키씨 환영 음악대연주회 : 동경음악학교 교수 레베부인과 코한스키씨의 방한을 계기로 동경음악학교동창회 경성지부의 후원으로 양악성환영연주회가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1930년 4월 12일, 매일신보사 주최.
(15) 영목미좌보(鈴木美佐保)부인 소프라노 독창회 : 한국악단의 자랑인 이종태씨의 부인이기도 한 그녀의 독창회가 매일신보사 주최로 내청각에서 열렸다. 피아노 반주는 스투데니씨, 그밖에 김영환·안성교씨가 찬조 출연하였다. 1930년 7월 19일.
(16) 프랑스 여류 첼리스트 안데르코레만 첼로 독주회 : 1930년 9월13일 오후 8시부터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피아노반주 세·스토우니.
(17) 좌등천야자(左藤千夜子) 독창회 : 1930년 9월 22일 오후 7시 30분부터 장곡천정 경성 공회당에서 16곡을 열창하였다. 촌강낙동(村岡樂童)씨가 피아노 반주.
(18) 제3회 연희전문 추기음악회 : 1930년 10월 10일 오후 8시부터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연희전문관혁악단, 연희전문합창대, 중앙악우회 남녀합창단과 현재명·곽정순·최영순씨 등이 출연하였다. 동아일보사 학예부 후원.
(19) 질·마르섹쓰 피아노 독주회 : 1931년 4월 30일 오후 8시부터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있었다.
(20) 질·마르섹쓰 피아노 독주회 : 1931년 10월 2일 오후 7시 30분 내청각에서 한국에서는 두 번째로 갖는 피아노독주회였다. 프랑스영사관 주최.
(21) 삼포환(三浦環)여사 독창회 : 조선신문사 주최로 1932년 9월 10일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오후 7시부터 개최되었다.
(22)등원의강(藤原義江)씨 독창회 : 1932년 10월 23일 오후7시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그는 3년 전에 이미 한국에서 1차 독창회를 가진 바 있다. 경성일보사 주최.
(23) 크로이처씨 피아노 대 연주회 : 매일신보사, 경성일보사, 서울프레스사 공동주최로 정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1934년 4월 25일 오후 7시 30분.
(24) 짐바리스트씨 바이올린 독주회 : 평양 백선행기념관에서 1935년 6월 26일에 개최되었다.
(25) 르네·마호니니 여사 피아노 독주회 : 1935년 10월 11일 오후 8시 30분 내청각에서 개최되었다.
(26) 만주국인 테너 이등화씨 독창회 : 한국에서의 독창회를 갖기 위해 내한했으나 개연되었는지의 여부는 미상. 그는 5개 국어에 능통하다.
(27) 계정식씨 바이올린 독주회 : 인천음악연구소 주최로 인천공회당에서 열렸다. 1936년 1월 29일.
(28) 정동예배당에서 <오라토리오 엘리아> 대연주회 개최 : 1936년 2월 25일.
(29) 테너 방창덕 독창회 : 미국에서 공부하고 5년만에 귀국하여 모교인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주최로 1936년 3월 7일 오후 7시 30분부터 정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조선중앙일보사 학예부 후원, 김성남 여사의 피아노 반주.
(30) 계정식씨의 현악단연주 : 계정식·박태철·안성교·김인수씨로 조직된 현악4중주단의 제1회 공연이 1936년 4월 24일 오후 8시부터 부민관에서 개최되었다.
(31) 조선음악가협회 제1회 대연주회 : 조선음악가협회의 주최로 창립 제1회 대연주회를 부민관에서 개최하였다. 출연진은 계정식·박경희·박태철·채선엽·감한철·박경호·이승학·이미좌보·김인수·김메리·안성교·안춘자 등이었다. 1936년 5월 15일 오후 8시.
(32) 채규엽 연주회 : 1936년 5월 16일 오후 2시 30분, 7시 30분 2회에 걸쳐 그의 향토방문연주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콜럼비아사 전속가수로서 3년 동안 일본에서 활동을 해왔었다. 채규엽후원회 주최, 콜럼비아레코드사 후원.
(33) 테너 전대홍 독창회 : 조선중앙일보사 평양지국이 주최하고 전대홍후원회가 후원하여 1936년 6월 6일 오후 8시부터 평양 백선행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34) 백고산 바이올린 독주회 : 1936년 8월 1일 오후 8시부터 평양 백선행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35) 김인수 첼로 독주회 : 1936년 8월 21일 오후 8시부터 원산보혜여자관 대강당에서 원산 악우회 주최, 매일신보사 원산지국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36) 김훈 독창회 : 매일신보사 군산지국 주최로 군산 희소관에서 열렸다. 1936년 8월 21일.
(37) 바리톤 김영철 신춘독창회 : 1937년 2월 3일 오후 7시부터 부민관에서 개최되었다. 매일신보사, 경성일보사, 사회봉사단 공동주최. 반주는 경성 필하모니오케스트라. 이 오케스트라의 멤버는 홍난파·이흥열·김준영·청수간삼·훗스·안성교·박태철·윤낙순·이면상·중야수애·최호영·김태연·본관신광·김재호·이승용·이점재·윤기항·이해성·이건호 등으로 되어 있다.
(38) 엘만 바이올린 독주의 밤 : 1937년 2월 23일 오후 7시 30분 부민관에서 미샤·엘만의 바이올린 독주회가 열렸다.
(39) 신춘대연주회 : 京城硏藝社의 주최로 1937년 4월 7일 오후 7시 30분부터 부민관에서 개최되었다. 이승학·최호영·김인수 등 출연.
(40) 현제명 귀국 독창회 : 1년간 미국서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온 그의 귀국기념 독창회가 1937년 5월 14일 부민관에서 오후 8시에 열렸다.
(41) 이인선 독창회 : 미국서 귀국한 이래 처음 갖는 독창회, 1937년 5월 20일 오후 7시 부민관에서 개최, 조선일보사 학예부 주최.
(42) 한국 최초의 오페라 <나비부인> 공연 : 1937년 5월 26일, 27일. 2일간 부민관에서 조선아티스·가이드 음악사 주최로 개연되었다. 히로인은 소프라노 삼포환 여사와 한국의 김영길, 조영은씨 등이 출연하였다.
[참고자료]
1) 이유선 《한국양약 80년사》(중앙대학교 출판국 발행 1968. 7. p348)
2) 이유선 《한국양악 100년사》(중앙대학교 출판국 발행 1976. 8. p394)
3) 이유선 《한국양악 100년사 (증보판)》(음악춘추사 발행 1985. 11. p522)
4) 대한민국 예술원 《한국음악사》(대한민국 예술원 발행 1985. 5. p654) 중에서 pp.479∼ 547. 《현대양악》부문의 〈3. 연주활동(1919∼1945) pp.525∼541〉(이유선 집필)
5) 1910년∼1945년 사이의 일간신문
1) 매일신보 (1910. 9∼1945. 8)
2) 조선신문 (1910. 9∼1940. 7)
3) 조선일보 (1920. 3. 5∼1940. 8. 11)
4) 동아일보 (1920. 4. 1∼1940. 8. 11)
5) 시대일보 (1924. 4. 1∼1926. 4)
6) 중외일보 (1926. 9∼1929. 12)
7) 중앙일보 (1930. 4∼1933. 2)
8) 조선중앙일보 (1933. 3∼1936. 8)
9) 고려시보 (1933. 4∼1940. 6)
10) 민중신문 (1933. 2∼1935. 1)
11) 경성일보 (1910. 9∼1945. 8)
12) 기타 1920∼1940년대 잡지류.
13) 1985년 11월 <경향신문>, <월간지 객석>, <음악동아>, <음악교육>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