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소개된 한국시집
글 / 까를르스 무르씨아노 역 / 우형강 <번역 문학가>
1977년, 여러 해 동안 스페인에서 활동해온 민용태는 《한국 시가집: Versos coreanos》 - 카라카스에서 <아르볼 데 푸에고; Arbol de fuego>란 제목으로 출간 - 이란 제목의 시집을 번역, 출간함으로써 한국의 여러 시들을 작은 양이나마 소개한 바 있다. 일본이나 중국에 비한다면- 그 또한 미미하지만- 한국시의 소개가 극히 미미한 상황에서 민용태의 노고 덕택에 50편에 달하는 시와 접하게 되는 기쁨을 맞게 되었다. 그는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즉, 고전시(1세기 - 17세기)와 현대시(한용운<1881-1944>으로부터 시작됨. 18, 19세기의 시들은 소개되지 않음)가 그것이다.
그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한국은 언제나 시인들의 나라였다. 왕부터 신하에 이르기까지 시를 써왔으며, 비록 그 누구도 음절수를 따지진 않았지만(역주; 스페인 시에서는 음절수에 상당한 관심을 둠)그 모두가 시를 통해 그들의 정서를 가꾸어 왔다. 술잔과 붓을 들고 절경을 찾아 나서는 것이야말로 수세기 동안 걸쳐 내려온 한국인의 멋이라 하겠다. 따라서 서정시가 주류를 이루며 잔잔한 우수와 향수 또 사랑의 고통 등이 주된 감정 패턴을 이룬다. 시에는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이 담겨져 있으며 지나친 은유나 상징이 배제된 그대로의 자연이 그려져 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민용태의 언급대로 이러한 요소들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고전시에는 美에 대한 동경, 속세로부터의 도피 -물옆, 바위사이, 내 조그만 초가집 하나를 지었지 -, 연인의 부재와 망각에 대한 애절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연인 생각에 잠 못 들어 하는 이조년,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 황진이 - 님 없는 긴긴 겨울밤 -, - 달빛만 가득 싣고/ 빈 배로…- 돌아오는 월명대군의 시가 그러하다. 또한 한 작자미상 시의 첫 구절 -나비야, 청산가자-은 가르씨아 로르까(Federico Garcia Lorca, 역주 ; 스페인의 유명한 시인이자 극작가)의 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반면에 현대시에 있어서는 서양시의 영향을 볼 수 있으나 그들의 독특한 전통은 잃지 않고 있다. 김현승은 <견고한 고독>에서 -더 이상 벗길 수 없다./대리석 한 조각/아니면 얼굴 하나- , 황금찬은 <간이역>에서 -이 역에 머물렀던 기차들은/어제의 구름이 되고 말았다.-라 쓰고 있다.
민용태는 당시 집필하고 있던 자신의 시집 《이슬라; Isia》중의 <난 섬 하나를 갖고 싶소; Quiero tener una isla>라는 시로 이 시집을 맺고 있다. 이 시집 《한국 시가집》에 대한 논평은 이미 <뽀에시아 이스빠니까;Poesia Hispanica>에 발표된 바 있다. "우리는 이 시인 - 민용태-이 그의 《한국 시가집》을 증보하고 대중화를 위해 계속 그의 사명을 계속하길 갈망하고 있다. 그의 시집은 이미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나 불행히도 아직 많은 서반아어권 독자들에겐 생소한 감이 있다. 쟝 아리스떼기에따(Jean Aristeguieta)가 서문에서 '이 시집은 빛으로 통하는 입구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듯이 이 암흑시대에 그보다 더 바람직한 길이 있겠는가?"
6년후, 우리의 희망은 실현되었다. 다수의 훌륭한 문고판을 낸 아도 나이스(Adonais)는 민용태가 편집, 번역한 《한국 현대 시집; Poesia coreana actual》을 두 권으로 출간하였다. 그는 서둘러 그 詩選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우리는 현재 한국에서 계속 시작활동을 하고 있는 생존 작가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가 《한국 시가집》에서 "전통과 혁신의 조화를 보여준 작가"라고 언급한 서정주가 《한국 현대 시집》에 등장하는 여러 시인들의 향연에 첫 장을 장식하고 있다. 1915년에 출생하여 '실존적 사실주의'로부터 출발한 서정주는 불교사상에 뿌리를 둔 '신비적 조화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 위에 이 시인은 '인간과 자연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는 이상향의 영혼'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시를 말할 때면 자주 자연이 언급된다. 민용태는 그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의 모든 시는 인간의 감성 위에 이식된 자연 그대로 -혹은 그 반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 '시를 쓴다'라는 말이 '달과 바람을 노래한다'라는 말과 같음을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자연은 한국 서정시의 이미지와 은유에 있어서 이미 커다란 비중을 차지해 왔다."
속세로부터 멀어지는 -아르뚜로 아수엘라(Arturo Azuela)가 말했듯이 도시 생활에서 탈피하고픈- 방법으로 전원의 은신처로 향하는 호라티우스(Horace)나 프라이 루이스 데 레온(Fray Luis de Leon, 역주; 스페인의 16세기 서정시인< 은둔생활; Vida retirada>이라는 작품이 유명함)식의 생각은 한국인의 자연 그대로의 생활에 대한 열망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하겠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우주와 자연사이의 충만한 감응을 위한 전원 생활의 동경은 그리도 많은 동양인들이 꿈꿔 왔던 도교적 신비주의에 근간을 이루고 있다." 17세기 이러한 이미지의 대가인 기생 황진이는
靑山은 내뜻이요; 綠水는 님의 정이라
라는 시구를 통해 강물 - 님의 사랑 - 이 흘러간다 할지라도 산의 푸르름은 변하지 않음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한 세기 전 시대의 송순은 지나가는 봄이 꽃을 지게 하는 것을 보고는 - 그럼 난, 어이하랴? - 라 묻고 있다. 이러한 두 예에서 보듯이 자연의 존재는 고요하지만 숭고하며, 동요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한국시의 情景에 그의 음향을 발하고 있다.
그러한 존재 그러한 음향은 서정주의 시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찬란한 새벽 여명에도,
그 이슬과 이마 위에 얹힌 내 시속에도
몇 방울의 피를 향상…
그것은 이 시인이 하늘을 그의 연인의 "고운 눈썹"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매서운 새"가 그것을 눈치챈 것도 알 수 있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역주; <冬天>중에서 인용) 그러나 또한 그 무엇인가가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게 하여 말을 잃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슬픈 나라,
꿈보다 더욱 고요한,
이런 나라를 아십니까?
이런 나라를 아십니까?
사람들은 말이 없고, 차라리 사람들은
간직할 줄밖에 모르지요.
그리고 혹시 먼길 떠날 일이 있는 날
깊이 숨겨둔 장롱에서 꺼내 입고
가겠죠.
이 시집에는 또 하나의 흥미를 끄는 점이 있다. 즉, 서정주가 출생한 1915년부터 민용태 자신이 출생한 1943년 사이에 이 땅에 등장한 시인들의 시만이 소개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시집에 등장하는 31명의 시인들의 시는 대개 각각 4편을 넘지 않는 적은 분량만이 소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정주의 시가 시사하는 바는 그 후의 시인들의 시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시는 서양의 영향이 이 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1894년부터 시작된 것을 잊어서는 안되리라 생각한다. 프랑스를 비롯한 영국, 독일의 영향이 이 뿌리깊은 전통속으로 밀려들어 왔지만 그들의 전통을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전통을 통째로 뽑아버리는 것이요, 그들의 보다 우수한 전통을 잃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외국의 영향은 그 전통속에 스며들어 그것을 수정하는, 한마디로 말해 보다 새롭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민용태는 서문에서 너무 근접한 시대인 까닭에 넓은 조망을 할 수 없는 즉, 나무를 보다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많은 시도를 지양하고 금세기 한국의 시에서 일고 있는 변화에 대한 대강의 윤곽을 설정하고 있다.
그의 그러한 시도와 노력은 높이 평가되며 충분한 찬사를 받아도 마땅하리라 생각된다. 그 시인들을 하나하나 분석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시 세계를 보여줄 시들의 극히 제한된 양만이 소개된 상대에서 그 시도가 과연 효과적일 수 있을까? 그들의 넓은 시세계를 한목에 조망할 수는 없지 않은가? 호세 가르씨아 니에또(José Garcia Nieto)는 이 시집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커다란 예술 작품의 전람회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바로 한 작가의 다양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 '한빛'인 것이다. 이 시들이 풍기고 있는 멋과 음향은 독자들에게 훌륭한 선물이요,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줄 것이다."
박두진의 시를 접하면 희망보다는 절망을 느낄 수 있다. 즉 - 삶은 더더욱 고적해지고/사랑은 더욱 고통이어라 (역주: <道峯>중에서) 와 같은 싯구나, 대상도 없이 - 호오이, 호오이 - 하고 부르는 그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 그밖에 - 따스한 봄빛 무덤에 주검들이 누워 - (역주 ;<墓地 頌 >중에서) 있는 곳에 산새들이 - 삐이, 삐이, 삐오, 삐오 - 하고 우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박남수의 시는 들판에서 귀뚜라미의 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도 박두진과 마찬가지로 종달새나 안개의 요정들이 - 포롱, 포롱, 포롱- (역주; <종달새>중에서) 하거나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 휘뚝 - (역주 ; <손>중에서)하는 등, 의성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시는 보다 처절하고 어둡다. 천사의 깃털 - 대지 위에 내리는 비 - 은 그 옛날 그의 잊혀진 허망한 사랑이 노래했던 상처 입은 새의 깃털로 볼 수 잇다. 《한국 시가집》에 수록된 황금찬의 <간이역> - 이름 모를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결국 구름이 되고 강이 되어 버리는 기차의 얘기가 담긴 - 에 대해 민용태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같은 양상을 보인다'고 평하면서 다른 4편의 작품을 싣고 있다. 그들 중 하나는 무척 간결하며 테마역이 여정을 다루고 있는 <버스 속의 나비 (Una mariposa en el autobús)로, 이 시에서는 냉혹한 시간의 흐름이 목적지도 모르는 채 끌려가고 있는 인간을 태운 고속버스로 상징화된다. 이 이미지는 또다시 하나의 촛불 -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향해 타들어 가는 - 로 그 맥을 이어간다. - 심지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그 여정은 시작된다/종말을 향해 - 이러한 시간에 대한 테마는 구상과 정한모의 시에서 다시 맑은 심상을 그려내고 있다. 김춘수의 시에서는 신비주의에 입각한 직관을, 김윤성에게서는 심오함과 정감사이에 동요하는 警句的 수법을 볼 수 있으며, 이원섭은 <고향; pueblo>에서 추방의 아픔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내 고향을 묻지마라
난 쫓겨났단다.
꽃 만발한 정원을 더럽힌
멧돼지처럼
한국을 황폐하게 만들었던 전쟁의 흔적은 김종길의 시<뽕말 : Mora>에서 섬세하고 깊게 나타나 있으며 촛불에 대한 상징은 여류 시인 김남조의 長時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그녀는 - 세상의 촛불은 같은 종교를 갖고 있어요 - 에서처럼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시를 보기로 하자.
보라!
꽃을 보라
사랑의 말을 잃고
차라리 두손사이에 사위여간
촛불 하나
위에 언급한 시인들에 - <전화기>와 같은 오늘날의 테마와 옛 전통을 한데 어우러 놓고 있는 - 문덕수의 이름을 포함시킨다면 1930년 이전에 태어난 시인들은 모두 언급하게 된다. 아직 언급 못한 약20명의 작가들 중 <山河 일기 ; Diario de los montesy rios>를 쓴 이 근배를 들고 싶다. <산하일기>는 푸른 종소리 아래 맑고 밝은 미래에 대한 강한 동경을 발하고 있다.
이 땅의 지도를
만지고, 또 만지고
천체에 부서진 얼굴
많은 작품, 특히 "子音Ⅱ(Consonante Ⅱ)"를 통해 그의 독창성을 인정할 수 있는 박제천도 빼놓을 수 없겠다. <子音Ⅱ>에서 그는 실체를 혹은 알아볼 수 없는, 어떤 때는 너무도 선명해 보이는 자신의 자화상을 찾고 있다. 민용태에 의해 1970년대 사회, 정치적 불의에 대한 항거와 고발시를 쓴 작가중 한 사람으로 언급되고 있는 이성부의 시도 관심을 끈다. 그의 <자연 ; Naturaleza>이라는 제목의 시는 이제까지 보아온 한국의 전통적 테마와는 사뭇 그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한줌 흙을 쥐고,
처음인양 바라다본다.
이 땅의 한줌 흙은 말을 잃었다…
참으로 이 대지는 노래하는 시인을 기다리지는 않지만 시인의 노래를 찾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죽은 어머니를 위해 산 이탄의 한줌의 땅에서도 볼 수 있다. - 고통스러운/아홉 평의 땅을 -
민용태는 이 시선의 마지막을 자신의 시로 맺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다른 작가들에 대한 찬사를 등에 업고 경솔하게 자신의 시를 실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풀 ; Hierba>이라는 단 한편의 시만을 싣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공교롭게도 박성룡의 싯구- 풀잎은/참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우리가 "풀잎"이라 부르면 -를 연상케 한다. 이에 반해 민용태는 - 풀은 이름이 없어요/갓 태어난 어린 아이 같지요/풀은 이름이 풀이죠- 라 쓰고 있는데 이는 사뭇 독특하고 혁신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이 《한국 현대 시집》은 지금까지 결코 가까와질 수 없으리라 생각되었던 두 시세계 간의 거리를 좁히는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나는 또 감히 이 시인에게 서반아詩 역시 한국어로 번역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다. 그는 우리 언어(역주 ; 스페인어)를 이해하는 정말 행운을 타고난 시인이며, 반면에 그 어느 서반아인도 한국어를 그렇게 훌륭히 구사하리라 곤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그 사명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는 이미 이 시집뿐만 아니라 나의 시에 대해서도 직접 평론 -그것은 나에게 정말 커다란 놀라움이었다 - 을 하는 등, 지상에 발표된 그의 여러 글 등을 통해 그의 사명을 시작하였다. 아마도 지금 한국 시인들도 그들의 天上의 노래가 세르반테스(역주 : 《돈키호테》의 작가)의 언어로 지금 나의 귀에 들려오듯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을 안다면 내가 느꼈던 똑같은 기쁨과 놀라움을 갖게 되지 않을까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