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 미완성의 프로젝트
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역: 정한용 <문학평론가>
1980년의 베니스 비엔날레에는 화가들, 영화제작자들과 함께 건축가들도 참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제1회 건축가 비엔날레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그쳐 버렸다. 나는 베니스에 참가한 사람들이 역행하는 아방가르드를 창출해 냈다고 말하려 한다. 그들은 <현대에 있어서 과거>라는 모티브와 함께 모더니티의 전통(Tradition of modernity)을 희생시킴으로써 새로운 역사주의(New historism)를 등장시키고 말았다. 이에 대하여 <프랑크푸르트 알게 마이네紙> (Franckfurker Allgemeine Zeitung)의 한 비평가는 "현대예술 전체가 과거와 대립함으로써 자양분을 획득하는 것, 즉 일본 없이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ck Lloyd Wright)나, 고대와 지중해 풍의 건축물 없이는 리 코르뷰제(Le Corbusier)가, 싱켈과 베이랜스 없이는 미스 판 디아로이에 등은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하였고, "이러한 사실은 은연 중에 간과되고 있다"는 코멘트를 덧붙이면서 "포스트 모더니즘(현대 이후의 개시를 뜻하는 사조)은 결정적으로 안티 모더니즘 (반현대의 정신)의 자세로서 자신의 모습을 펼쳐 보이고 있다"고 결론 지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단순한 전시회의 성격을 넘어, 시대전체의 동태를 진단하는 중요한 의미를 안고 있다. 이 문제는 모든 지적인 영역에 침투되어 있는 우리 시대의 정서적 경향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계몽주의 이후(Postenlightment)라든가,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든가, 역사 이후(Posthistory)의 이론, 다시 말해 새로운 보수주의(New conservativism)라는 천차만별의 이론을 등장시킨 어떤 종류의 정서적 경향인 것이다. 하지만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와 그가 남긴 행적은 분명 이러한 정서적 경향과 거리가 먼 것임에 틀림없다.
아도르노는 어떠한 주저도 하지 않은 채 모더니티의 정신에 충실했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원래의 모더니티와 단순한 모더니즘을 구별 지우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더니티의 한 특성인 조소작용에 대한 감정적 반응도 음미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이상, 나는 아도르노賞을 수상함에 감사의 뜻을 표명하면서, 한편으로는 오늘날에 있어서 모더니티의 의식 상황을 묻는 것이 반드시 부적절한 것만은 아님을 밝혀 두고자 한다.
과연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듯이 모더니티는 정말로 과거의 유물이 되고 말았을까. 또 지금이야말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이라고 요란스럽게 말해지고 있는,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은 단순한 속임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또 이와 함께 모더니즘이라는 구호 속에는 19세기 중엽 이후의 문화적 모더니티에 대한 갖가지 감정적 노여움이라든가, 아니면 반대로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 의식이 내포되어 있지는 않을까.
고전주의와 현대주의
아도르노와 같이 모더니티의 출발점을 1870년경으로 본다면, 이에 부합되는 모더니티의 형태는 보들레르(Ch. Baudelaire)와 아방가르드예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문화적 모더니티의 개념에는 오래된 前史가 내재해 있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ss)가 구명한 바에 따라서 그 전사를 간단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모던> (modern)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5세기 후반인데, 이때 <모던>이라는 말은 당시의 정신적 지주였던 기독교가 지배하는 현대를 異敎的이거나 로마적 과거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의미하는 내용은 바뀌면서도 <모던>이라는 표현은, 그 다음의 시대가 고전시대라고 하는 과거와 자신과의 관계 의식을 나타내고, 서로 다른 시대가 자기 자신을 <과거의 것>에서부터 <새로운 것>에로의 이행의 결과로서 이해하는 구실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모더니티의 개념을 르네상스로 제한하여 사용하나,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너무 가깝다. 카알대제의 시대와 12세기, 그리고 계몽주의시대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만의 것이란 의미로<모던>을 이해하였다. 즉 유럽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의식은 그것이 고전시대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획득하는 가운데 형성될 즈음이면 언제나 <모던>이라는 자기에 해의 개념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결국 고전고대(Antiquitas)와 저 유명한 신구논쟁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해 17세기 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의고주의적인 시대 취미의 지지자들과 현대주의자들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더욱더 규범적인 것으로서, 이를테면 모방되어야 할 모델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고전 세계의 의고적 작품군이 현대주의자라고 여겼던 후대의 사람들에게 정신에 영향을 주었던 마술은 프랑스 계몽주의에서 나타나는 이상의 추구에 의해서 처음으로 풀어지게 된다. 근대 과학에 고무되어, 인식의 무한한 진보를 믿는 신앙이 등장하는가 하면 특히 인간은 사회적, 도구적으로 하면 특히 인간은 사회적, 도구적으로 점차 이상적인 상태로 진입해 간다는 신앙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그 귀결로써 최후의 모더니티는 고전적인 것에서 낭만적인 것으로 대치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과거를 이상화된 중세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낭만주의는 결과적으로 19세기를 경과하면서 모든 역사적인 유산들을 단절시켜 버리는 매우 급진적인 모더니티의 의식을 낳았다. 그리하여 남은 것이라고는 전통과 대립하는 현대, 아니 역사 전반과 대립하는 현대라고 하는 추상적인 대립관계 뿐이었다.
요컨대 오늘날의 <모던>이란 끊임없는 혁신을 추구하는 시대정신 속에 생동감 넘치는 객관적 표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던>化된 작품의 특징은 새롭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다음 시대에 있을 양식의 진기함을 통해 다시 극복되어지거나 보잘것없이 보일 것이었다. 실제로 유행에 편승하는 단순한 양식은 곧 시대에 뒤떨어지기 마련이고, 마침내는 구식으로 전략된다. 그러나 참으로 <모던>한 것은 고전적인 것에 숨겨져 있는 어떤 비밀을 간직한다. 확실히 시대를 초월한 예술은 언제나 고전적이라고 불리워 왔던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모던>한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는 힘을 지녔지만, 그 힘은 과거의 권위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었다. 과거의 권위와 도움을 받는 대신 <모던>한 작품은 과거의 것이 지니고 있었던 본원적인 <모더니티>를 탐색함으로써 고전적이게 되었다. 이처럼 오늘날에 생동감이 있는 것이 미래에도 생동감이 있는 것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소모적일지 모르나, 그것은 또한 동시에 생산적이기도 하다. 야우스가 말하듯이, 자신의 고전성을 창출해 내는 것이야말로 모더니티에 다름 아닌 것이다. 사실 우리는 최근에 이와 부합되는 고전적인 모던(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의 예술운동을 지칭함)을 보아왔었다. 아도르노는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을 구별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 이유는 새로운 것에 매력을 느끼는 주체의 心性없이는 모던한 것도 객관적인 작품으로서 結晶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적 모더니티의 심성
미적 모더니티의 정신과 심성이 뚜렷한 색조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보들레르의 작품, 더 구체적으로 말해 E. A. 포우의 영향을 받은 예술이론이었다. 이러한 미적 모더니티의 심성은 다양한 아방가르드 운동 속에서 꽃을 피우고, 다다이스트들의 카페 볼테르(Café Voltaire), 그리고 초현실주의에 들어서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변화된 시간의식(Consciousness of time)을 구심점으로 하는 여러 가지 태도이다. 그러한 새로운 시간의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전위, 즉 아방가르드라는 말에서 발견되는 공간적 메타포이다. 아방가르드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탐험가이고, 음침한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 위험을 터뜨리는 존재이며, 아직 점거되지 않은 미래를 정복하는 사람이다. 그는 또한 이제껏 아무도 가보지 못한 대지에 뛰어들어 진로를 설정하려는 사람이기도 하다.
남보다 한발 앞서 가려는 노력, 아직 확실하지 않은 우발적인 미래에의 예감, 새로운 것에 대한 이와 같은 숭배는 정말로 찬미할 만한 대상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신에 의해 주관적으로, 어떤 설렘으로 가득 찼던 과거를 계속 새롭게 창출해 내는 데서 비롯되었다. 베르그송(Bergson)의 철학 속에도 나타난 이 새로운 시간의식은, 단순히 유동화된 사회라든가, 가속화된 역사라든가, 일상생활의 불연속이라는 시대경험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일시적인 것, 덧없이 사라지는 것, 매우 숨가쁘진 역동감으로 바뀌어진 새로운 가치는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순수하고 청결하며 안정된 현재를 기대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모더니즘은 쉴새없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운동이고, 옥타브오 파스(O. Paz)에 의하면 <참된 현재에의 동경>이며,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뛰어난 모더니즘 시인들이 지닌 비밀의 테마>인 것이다. 모더니티가 역사와 맞서서 추상적인 대립관계를 지키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하여 연속성을 보장하는 유기적인 전통의 계승이라는 구조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과거의 개별적인 시대는 이제 명확한 모습을 잃게 되고, 그 대신에 역사적 기억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역사와 현대와의 밀접한 관계를 통하여 존재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야만적이고 거칠고 원초적인 속에서 인식하는 데카당스한 시대감이 관류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연속성을 떠나보내려는 아나키스틱한 의도를 보는 동시에 그것을 이러한 새로운 미적 의식의 전복적인 힘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모더니티는 전통에 의해 규범화된 기능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규범적인 것에 대한 반란의 경험을 자양분으로 삼는다. 뿐만 아니라 모더니티의 미의식은 도덕적 규준이라든가 실제적 유용성 모두를 중성화하고, 秘儀와 대중적 스켄달의 변증법을 줄기차게 연출해 내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모독행위(Act of profoning)를 할 때 야기되는 공포의 매력을 만끽하면서, 또한 동시에 그러한 모독의 결과가 종국에 시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즈음이면 반드시 그로부터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파괴의 흔적을 나타내는 것이야말로 모더니티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것을 통해 모더니티는 불변적 요인들로 완결되어 있는 상황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폭발은 모더니티의 불변의 특성이다. 전통을 거부하는 에네르기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리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더니티 자체는 다름 아닌 그 자신과 대립하지 않으면 신화가 되고 만다. 이 신화의 초시간성은 파국을 뜻하는 것으로서, 시간적 연속성을 파괴하는 순간이 된다.
물론 아방가르드 예술에 나타나고 있는 시간의식이 언제나 반역사적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규범을 흉내내려는 데서 유래하는 역사 이해의 그릇된 규범성(Normality)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의 반역사상이 두드러질 뿐이다. 이러한 그릇된 규범성을 높이 사는 역사의 이해는 가다머(Hans-Georg Gadaner)의 철학적 해석학에 있어서 조차도 사라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 반해 모더니티와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이전의 규범성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 규범성은 역사주의 학자들에 의해 객관화됨으로써 구축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간이식은 역사주의에 의해 박물관에 갇혀 버린 중성화된 역사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역사주의 이후(Posthistoricist)의 입장에서, 모더니티와 역사의 관계를 구성한다. 벤야민은 프랑스 대혁명의 자기이해(Self-understanding)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마치 패션이 과거의 의상을 인용하듯이, 고대로마를 인용하였다. 패션은 분명하게도 현재 유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후각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그 패션은 어떤 유행이 일어났다 하면 그 추이대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로베스삐에르(Robespierre)에 있어서 고대로마는 지금(Jetztzeit)이 계속 누적되어 이루어진 과거인 만큼, 역사가는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시대가 틀림없이 과거에도 존재했던 한 시대와 마주칠 것)임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메시아적 시간의 파편들이 혼입되어 있는 지금으로서의 현재>의 개념을 기초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적 모더니티를 내포한 이러한 정신은 최근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노화현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60년대에는 다시 한번 그 분위기가 고조되기도 했지만 '70년대를 넘긴 지금으로선, 모디니즘의 정신은 희박해지고 주목을 받을 만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더니티의 신봉자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이미 60년대 중반에 음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1967년의 아방가르드는 1917년에 있었던 아방가르드의 행위와 태도를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은 현대예술의 이념의 종말이다.
그리고 페터 뷔르거(Peter Bürger)의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의 우리는 <아방가르드 이후(Post - Avantgerde)의 예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용어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초현실주의 반향(Rebellion)이 실패했음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으려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패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디니티에 대한 결별을 선언하는 것일까. 아방가르드 이후라는 존재 자체가 보다 일반화된 모더니즘, 다시 말해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좀더 포괄적인 현상으로 이행되기 시작했음을 뜻하는 것일까.
실제로 이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인 다니엘 벨(Daniel Bell)은 미국의 신보수주의(Neo-conservativism)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학자임과 동시에 가장 뛰어난 해석자이다. 다니엘 벨은 그의 저서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The Cultural Contradicti-
ons of Capitalism)에서, 산업이 고도로 발전한 서구사회의 위기는 문화와 사회간의 괴리현상에서 야기된다고 지적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더니즘 문화와 경제 및 행정 시스템간의 유대관계의 필요성이 도외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모더니즘 예술은 일상생활을 이끌어 가는 가치 속으로까지 파고들어, 인간의 생활세계를 모더니즘적 심성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의 원리, 신뢰로운 자기경험(Self-experience)에의 열망, 극단적인 감성에 바탕을 둔 주관주의(Subjectivism) 등이 횡행하게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의 직업생활의 규율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무제한적인 쾌락의 추구는, 모더니즘 문화에 있어 합리적인 삶의 지침을 제공해 주는 도덕적 기반과는 물과 기름의 관계와도 같다고 그는 말한다. 이와 같은 논법으로 다니엘 벨은 프로테스탄스적 윤리의 붕괴라고 하는, 이미 막스 베버(Max Weber)를 고민스럽게 했던 적이 있는 현상의 책임을 대항문화(Adversary culture)에 돌리고 있다. 대항문화의 모더니즘이야말로 경제적, 행정적 조치의 강압 하에서 합리화된 일상생활의 관습과 미덕에 대항하도록 적개심을 일깨우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 방법을 빌어 끝까지 추적해 들어간다면, 우리는 모더니티가 갖고 있는 충격의 명맥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낼 것임을 알게 되며, 또한 자신을 스스로 전위주의자라고 믿는 사람은 그 자신이 죽음의 길에 들어선 이유를 쉽게 깨닫게 될 것이다. 아방가르드가 이제까지도 그 영향력을 계속 주도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더 이상의 창조적인 면모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모디니즘을 양적으로 팽창해 있지만 제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견해를 기만으로 하는 신보수주의자들의 과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자유방임의 종지부를 찍고 규율과 노동윤리를 재건하려는 규범은 어떻게 확립될 수 있을까. 이를 뒤집어 말한다면, 즉 사회복지국가에서 유발되는 평균화현상을 멈추게 하고 그 대신 성과별 개인적 경쟁의 미덕을 다시 회복하려는 규범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에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다니엘 벨이 말하고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종교의 부활(religious revival)이다. 전통의 유산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한 아이덴티티를 제공해 주고, 생존의 안전감을 부여해 준다는 것이다.
문화적 모더니티와 사회의 근대화(modernization)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권위를 내세우는 강압적인 신앙의 마술에 걸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다니엘 벨과 같은 분석방법에서 걸러지는 행동기준은 단 하나, 문화적 모더니티의 지적인 수단과의 정신적·정치적 대결만이 남게 될 뿐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요즘 독일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70년대의 지적 풍토인 신보수주의의 사고스타일을 냉정하게 파헤친 바 있는 피터 스테인펠스(Peter Steinfels)의 일문을 인용해 보도록 하자.
그들의 논쟁은, 모든 것을 오로지 야당적인 정신성으로 간주하려는 태도와 그러한 <논리>를 극단적인 정신의 갖가지 형태와 연결 지우려는, 그들의 의지를 표명하는 구호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모더니즘과 니힐리즘을 연결시키고, 사회복지 프로그램과 전매를 국가에 의한 통제와 전체주의로 동일시하며, 국방예산의 비판을 공산주의에 대한 맹종으로 일축할 뿐 아니라, 여권신장 및 동성애의 권리옹호운동을 가정의 파탄으로 직결시킨다. 그리고 평범한 좌익과 테러리즘 또는 반유태주의를 파시즘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스테인펠스는 미국의 상황만을 염두에 두었지만, 이와 똑같은 현상을 독일에서도 나타났다. 이렇듯 반계몽주의적 입장에 선 지식인에 의해 자행된 지식인 규탄은 신보수주의파들 자신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설명되기보다는, 오히려 신보수주의적 원칙 그 자체의 허약한 분석력에 근거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경제와 사회의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다행한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 그것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과정 속에서 귀결된 갖가지 어려운 문제의 책임을 문화적 모더니즘에 전가시킨다. 신보수주의 노선은 그들로서도 환영할 만한 사회적 근대화의 과정과 감퇴된 문화적 발전간의 관계를 뚜렷하게 분간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달라진 노동에 대한 의식수준, 소비관습의 변화와 여가 중심적인 사회구조상의 원인 등을 신보수주의에서는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현상이 이제는 쾌락주의에 빠지고, 사회적 동질성과 복종적인 태도가 결여되어 있으며, 또한 나르시시즘이라 생각되고, 사회적 지위와 능력경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는, 이와 같은 모든 책임의 소재를 모더니즘 문화에서 찾는다.그러나 사실상 모더니즘 문화는 이러한 어려운 문제들의 형성 과정에 극히 간접적이고도 매개된 형태로밖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신보수주의자들의 입장으로는, 이러한 원인을 분석하지 않는 대신에 현재의 모더니티의 프로젝트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지식인들을 규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다니엘 벨은 어느 정도 시민적 諸가치가 침식되어 있는 상황과 대량생산에 기인한 소비만능주의 간의 연관성을 고려하고는 있지만, 이것들에 관한 자기 자신의 논의를 진지하게 개진한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것은 이러한 새로운 방임주의적 태도의 원인을 무엇보다도 가장 보헤미안적인 예술가들의 엘리트적인 반문화(anti-culture)에서 보이는 엇비슷한 생활양식의 만연에서 발견하는데 그치고 있다. 이러한 다니엘 벨의 논의는 일견 당연한 것이긴 해도, 아방가르드 자체가 이미 그의 희생물로 바쳐진 하나의 오해를 變奏하고 있을 뿐이다. 그 오해라는 것은 예술가적 생활을 거드름이나 피우는 반항의 상징으로 상정해 놓고, 그것을 다시 사회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예술 속에 간접적으로 내재해 있는 행복의 약속을 실현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소임이라는 식의 논법인 것이다. 다니엘 벨은 미적 모더니티의 성립기를 상기시키면서 "경제의 문제에 관해서는 진보적이었던 부르죠아지들은 취미라든가 도덕의 문제에 관해서는 보수적이었다" 고 말하였다. 그러나 만약에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보수주의는 그 유효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전의 시민적 심성의 패턴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너무나 單線的인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설사 오늘날 신보수주의에 부합하는 상황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박물관에서 묻혀 지내던 모더니즘문화가 갑자기 그로부터 뛰쳐나와 일상적인 삶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데서 야기되는 이율 배반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다. 이러한 불만은 모더니즘 지식인들의 삶에 어떤 반향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것은 사회적 근대화의 과정에 대항하는 반작용에 유래하는 것으로, 그 뿌리는 좀더 깊숙하게 뻗어 있다. 경제성장과 국가에 의한 조직활동의 강제력이 촉진되는 가운데 사회의 근대화는 자연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 온 생활양식에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더 나아가서는 역사적인 생활세계가 보여온 대화적 내부구조를 침식시키게 된다. 이러한 도시환경과 자연환경의 파괴, 달리 말해 인간다운 공동생활의 터전을 박탈당하는데 대한 불안은 점차 커진다.
이에 따라 신대중주의(neopopulism)라고 불리우는 저항운동은 그러한 불안을 극명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불안감과 저항운동이 발생할 수 있었던 원인은, 행정적 합리성을 발판으로 한 일면적인 근대화가 문화적 전통의 계승과 사회적 통합, 더욱이는 교육 등의 문제의 심부에 위치한 생활영역, 즉 단순한 합리성과는 다른 대화적 합리성에 의거한 생활영역을 침범하는데 따른 것이다. 그런데 신보수주의의 敎條는 분명 이러한 사회적 프로세스에 촛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로서는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할 수 없으므로, 자율적이거나 파괴적인 모더니즘 문화와 그 옹호자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킴으로써, 문제를 다른 차원으로 돌려놓고자 했던 것이다.
확실한 것은 문화적 모더니티 역시 그 자신의 아포리아(aporias)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확히 이러한 아포리야말로 모더니즘 이후의 시대에 형성되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모더니즘 이전에의 회귀를 주장하는가 하면, 모더니즘 그 자체를 급진적으로 부정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당한 비판의 구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아무튼 그 아포리아가 사회적 근대화가 초래한 문제 저편에 위치한 것이든, 아니면 모더니즘 문화의 발전 그 자체 속에서 비롯된 것이든, 거기에는 모더니티의 프로젝트에 관한 의구심이 그 동기로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를 止揚하는 그릇된 시도
초현실주의자들이 예술의 존재 당위성을 문제로 삼았던 것은 현대예술도, 아니 정확히 현대예술이야말로 <전체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행복의 약속을 기약하였기 때문이며,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예술의 존재 당위성을 문제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실러(Schiller)에 있어서는 미적 관조가 이 행복의 약속을 보장해 준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화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신(Letters on the Aestheric Education)은 우리에게 이 행복의 약속이 예술 자체의 피안(beyondart itself)에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적 유토피아의 행렬은 이데올로기 비판의 입장에서 문화의 현실 답보적 성격을 개탄하는 마르쿠제(Herbert Marcuse)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보들레르가 살고 있던 시대에도 이러한 행복의 약속(Promesse de bonheur)은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화해의 유토피아를 逆轉시켜 예술과 사회가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비판적으로 반영하였다. 화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예술은 스스로 생활로부터 분리되는 만큼, 그리고 완전한 자율성으로 빠져드는 만큼, 모든 것을 더욱 더 고통스럽게만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폭발적 에너지로 축적되었다. 결국 이 에너지는 반란의 형태를 취했는데, 겉으로 보기에 그 반란은 자급자족적인 예술의 영역을 뒤집어엎고, 예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리하게 예술과 생활의 화해를 성취하려는 폭력적인 시도였다. 이러한 초현실주의 정신에 대하여 아노르노는 "예술을 거부하면서 예술을 뿌리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고 그 모순점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예술과 생활, 허구와 실천, 가상과 현실을 하나의 場에 평면화시키려는 이러한 모든 시도들, 그리고 오브제 작품과 일상적인 사용도구 간의 차이, 의식적인 작품제작과 자연적인 심정의 갈등간의 차이를 없애고, 모든 규준을 철회하며, 그리고 주관적 체험의 표현과 미적 판단을 동일시하는 시도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은 예술이며 누구라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는 시도들은 그들 자신의 일종의 넌센스에 의한 실험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실험들은 그들이 파괴해 버렸던 고전적 예술의 구조를 좀더 열광적이고도 뚜렷하게 부상시키고 잇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목표로서, 매체의 가상으로서 현상을, 사회를 넘어선 예술작품의 초월성을, 그리고 미적 판단에서 보이는 특수한 인식적 면모와 마찬가지로 예술생산에 집중화되거나 立案되어진 특성 등을 새로운 범주의 정당성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예술을 부정하는 급진적인 시도들은 아이러닉하게도 계몽주의 시대의 미학이 그의 대상영역을 외부로부터 구별지으려고 사용했던 범주의 정당성을 인식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반란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지만, 그것은 부분적으로 두 가지 잘못에 기인한 것이었다. 첫 번째 잘못은, 지나치게 자율적으로만 치달아 온 문화적 영역이라는 容器가 파괴되었을 때, 그 용기에 담긴 내용물도 곧 망실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의미가 박탈되거나 형식이 붕괴되면 아무것도 남지 못한 채, 해방으로 이어지는 의미작용은 마침내 소실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들의 두 번째 잘못은 좀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인식적 차원에서의 의미, 도덕적인 기대, 주관적인 표현과 가치평가는 일상적 의사소통(everyday communication)속에서 상호 긴밀한 연결을 맞지 않으면 안 된다. 생활세계에 있어서 상호이해의 프로세스는 모든 영역에 걸친 문화적 전통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합리화된 일상생활이 문화적 빈곤으로부터 구출되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의 문화적 영역 - 여기서는 예술의 영역을 무리하게 열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전문화된 지식의 집적체<Knowledge complexs> 중의 하나에 접맥시키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은 기껐해야 현상의 일면성과 추상성을 다른 일면성과 추상성으로 바꿔 놓은 데 불과한 것이다.
이처럼 그릇된 시도와 그 실패의 사례는 이론적 인식과 도덕의 분야에서도 발견된다. 다만 예술과는 달리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았을 따름이다. 분명 학문도,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이론·법이론도, 예술과 마찬가지로 자율화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실천의 특수한 전문적 형식과 결합되었는데, 이를테면 학문은 과학기술과 연결되었고, 도덕이론과 법이론은 법적으로는 조직화되면서도 그 기반에 있어서는 도덕적 정당성에 의거한 행정관리상의 실천과 연결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양자는, 즉 제도화된 학문은, 또한 법체계 내에서 분열된 도덕적·실천적 논의와 함께 생활실천(everydayday praxis)에서 멀어짐은 물론, 마침내 啓蒙의 시도는 止提의 시도로 逆轉되고 말았다.
청년 헤겔주의(Young Hegelians)이후 철학의 지양에 대한 논급이 있어 왔다. 그리고 마르크스 이후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토의되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지식인들은 사회운동(social movement)과 연계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주위에는 예술을 지양하려는 초현실주의의 시도와 마찬가지로 철학을 지양하려는 시도가 단편적으로 존속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르크스 이후의 철학이 몰고 온 교조주의(dogmatism)와 도덕적 엄격주의(moral rigorism)의 결과를 살펴 볼 때, 예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류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부언하자면, 일상의 생활실천이라는 것은 인식적인 측면, 도덕적·실천적인 측면, 그리고 미적·감정 표현적인 측면이 자연스럽게 연결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생활실천이 사물화(refbication)될 경우, 문화적 영역의 어느 하나만을 강압적으로 개방시켜 모든 것을 그것에 연결 지으려는 사태가 발상하게 된다. 그 사물화의 치료는 불가능하다. 달리 말해서 학문, 도덕, 예술 등에 집적된 지식을 실천이라는 것으로 화해시키거나 실현시키는 것은 이러한 가치영역의 어떤 하나의 비일상적인 생활태도를 모방하는 것과는 다른 것임을 새겨두어야 한다. 예컨대 니체(Nietzsche), 바쿠닌(Bakunin),보들레르 등이 그들의 실제 생활에서 표현하였던 반항적인 힘을 일반화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문화의 여러 가지요소가 그중 하나만을 확대 해석하려는 의도와 연관되어 테러리스틱한 행동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또한 이러한 테러리스틱한 행동은 정치를 심미화(aestheticize)시키거나 도덕적 엄격주의로 탈바꿈하기도, 아니면 원리 원칙의 교조주의에 복종하기도 한다. 이러한 연관은 비록 파악하기 힘든 일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조짐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테러리즘적 이성>의 부산물과 같은 不撓不屈의 계몽주의의 결과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모더니티의 프로젝트를 테러리스트 개인의 의식상태 및 관중의 눈을 무시하는 그들의 행동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근시안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며 대규모로 자행되고 있는 암실에서의, 헌병대와 비밀경찰서 지하실에서의, 수용소와 정신병동에서의 관료적 테러행위가 권력기구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유만 가지고, 그것을 근대국가의 존재근거(raison d'être)로 간주하려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모더니티의 시행으로 빚어진 그릇된 점, 이를테면 모더니티를 부정하려는 터무니없는 프로그램을 자각함으로써, 모더니티와 그 시행 자체가 끝나버린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문화적 모더니티의 아포리아가 지속할 수 있는 방향을 시사하고 있는 한 예로서, 예술수용(reception of art)을 들 수 있을지 모른다.
낭만주의에서부터 예술비평이 발전되어 온 이래, 비평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움직임이 병존하였다. 그리고 양자는 아방가르드의 사조가 출현함과 병행하여 더욱 兩極化되었다. 한쪽의 예술 비평은 예술작품 생산(제작)의 보조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자인하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일반 감상자의 입장에서 작품이해를 돕는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시민사회의 예술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비평의 차이에 따라서 일반관중에게 두 가지 기대를 갖도록 했다. 즉 한편에서는 예술을 감상하는 문외한(layman)은 스스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예술활동에 직접 임하는 사람으로, 그는 자신의 미적 경험을 실생활의 문제와 연결시키려고 했다. 두 번째 수용형식은 아무런 위험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사실은 진보적인 것이었고, 그 진보적인 성격을 지울 수 있었던 까닭은 놀랍게도 그것이 첫 번째 수용형식, 말하자면 전문가와 숙련인들의 태도와 원만하게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예술창조가 무척이나 자율적인 예술의 문제를 전문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리고 갖가지 대중들의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전문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면, 예술창조의 의미 내용은 증발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가와 비평가도 그러한 문제들이, 내가 이전에 말한 바 있는, 문화영역에 있어서의 <내적 논란>(inner logic)라는 마술에 걸려 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모더니티의 峻別, 예술이라는 하나의 차원에의 철저한 집중도 와해될 때가 있다. 그것은 미적 경험이 개인의 생활사(life history)속으로 흡수될 때이며 그리고 미적 경험이 집단적인 생활 형식 속으로 통합될 때이다. 문외한 아니 오히려 일상생활의 전문가들에 의한 이러한 예술의 수용은 예술내부의 발전에 고심하는 직업적인 비평가에 의한 수용과는 다른 것이다.
전문가의 비평적 취미판단으로 轉化되지 않는 미적 경험은, 수용자의 생활사적인 생활을 천명하는 探照的 역할을 함으로써 실생활의 문제와 연루되지만, 이런 경우 미적 경험이 자아내는 言語像의 존재방식은 이미 미술비평의 그것과는 달라지게 된다. 알브레히트 벨머(Albrecht Wellmer)의 이와 같은 설명은 흥미로운 것이다. 미적 경험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기 위해서 빛에 어떤 해석을 가하는 것처럼 인간의 갖가지 욕구에 해석을 개진하여 가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과 동시에 인간의 인식차원에서의 의미부여의 족재방식과 규법적 기대 속으로까지 헤치고 들어가, 이러한 세 요인의 관계등식도 변화시켜야 한다. 이에 부합하는 실례를 들어보자.
페터 바이스(Peter Weiss)의 작품은 한 남자의 인생과 어려운 상황에 처한 시기의 위대한 작품과의 만남이 얼마나 가치 있게 인생의 지침을 제공해주는 힘을 지니는가를 보여 준다. 바이스의 소설에는 스페인 시민전쟁이 실패함에 따라 고국으로 되돌아 온 주인공이 파리시내를 전전긍긍하다가, 마침내 루브르박물관에서 제리코(Sericault)의 <난파당한 사람들>앞에서 자신의 실제로 체험했던 이러한 만남을 상상적으로 先取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또 바이스가 그의 소설 <저항의 미학>(The Aesthetetics of Resistance) 제1권에서 나타내고 있는 영웅적인 예술 흡수의 과정은 앞의 상황을 변형한데 불과하지만, 거기에는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예술수용의 방향이 어떠한지를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1937년 베를린에는 정치의식이 강하고 지적 욕구가 대단한 젊은 노동자단체가 있었다. 그들은 저녁때만 되면 야간학교에 모여 유럽회화의 일반적인 역사와 사회사를 학습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베를린의 박물관에서 수차례에 걸쳐 보아 왔던 예술작품 속에 배어있는 기성의 교양전통, 현재의 체계 등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그들 자신의 주위에서 수집하거나 긁어모은 石片을 통해 경험을 축적해 나갔다. 그리고 그 이름없는 석편은 그들의 주의깊은 관찰에 힘입어 빛을 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박물관을 엄청나게 많은 작품들을 모아 놓은 거대한 集積場, 아이디어와 기발한 착상의 집합소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것은 문화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일치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수산자로서의 우리들이 이러한 집적물에 다가갈 때, 우리는 처음에는 겁을 먹기도 하고 경건한 마음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우리 자신의 가치평가에 들어맞고, 이러한 개념 전체가 유효한 것이 되려면, 그 집적물은 우리의 생활조건에 대하여, 또 우리의 사고과정에 있어서 곤란을 겪게 하는 점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해 줄 때뿐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생활세계의 시점에서 전문가의 문화를 흡수·획득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희망 없는 초현실주의의 반란이 지향하는 것과 어느 정도 구분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브레히트(Brecht)와, 심지어 아우라(aura)를 잃어버린 예술작품의 수용에 대한 벤야민(Benjamin)의 실험적 사고와도 상당한 부분에 걸쳐 차이가 난다고 생각된다.
이와 유사한 생각은 학문과 도덕의 영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정신과학, 사회과학, 행동과학 등이 행동을 지향했던 이전의 지식의 구조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그것은 명확할 것이다. 또한 보편주의적 윤리가 정의의 문제에 첨예화된 반면, 그 첨예화는 추상화됨으로써 선한 생활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저버리고 있었던 문제와의 관계 속에서 발견하려 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도 역시 자명해 질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전통에는 의지하지만, 그러나 오로지 전통주의에 의해서는 빈곤해질 수밖에 없는 생활실천(everday praxis)과 모더니티 문화를 재접맥시키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새로운 접맥은 지금까지 진행된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의 사회적 근대화 조건의 창출에 의해서만 가능할 따름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해, 그것은 경제적, 행정적 행위 시스템의 자기운동을 제한하려는 듯한 여러 제도가 비로소 생활세계 안에서 창출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3가지 보수주의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야말로 好시절은 아니다. 많든 적든 서방세계 전체는 문화적 모더니즘에 비판을 가하는 추세와 병행하여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과정에 좀더 회의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술과 철학의 부정을 일삼던 그러한 시도의 실패의 자각이 이제는 보수주의적 입장에 적당한 구실을 제공하는 것으로 되고 말았다. 바로 여기에서 반근대주의(antimodernism)를 취하는 <청년보수주의, 전근대주의(Premodernism)를 취하는 노장보수주의>(old conservative),후기모더니즘(Postmodernism)을 취하는 <신보수주의>(neo conservative)등의 3가지 형태가 간략하게 구별되어진다.
청년보수주의(young conservative)는 미적 모더니즘의 근본 경험을 본령으로 삼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現示되어야 대상으로, 구심점 없는 주관성, 인식과 유용한 활동의 제한으로부터 해방된, 그리고 노동과 유효성의 강제로부터도 해방된 경험을 주장하며, 그들은 이를 바탕으로 모더니즘 세계의 외곽지대를 향해 나아간다. 모더니즘적 태도를 취하면서 그들은 화해가 불가능한 반모더니즘을 정당화시킨다.
그들은 자기경험과 정서, 상상력이 갖는 태고적 상태와 원형적 상태를 구가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도구적 이성에 대립하는 것으로 끌어내려면, 그들은 힘에로의 의지(will to power) 혹은 지고(sovereignty)속에서 존재하고, 존재 혹은 시적인 것의 디오니소스적 힘 속에서 존재하는 것을 환기시킴으로만 가능한 마니교 풍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 프랑스에서 이러한 계통은 죠르쥬 바타유(Georges Bataille)를 거쳐 데리다(Jacques Derrida)로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부상된 것은 70년대에 되살아난 니체(Nietzsche)의 정신이다.
노장 보수주의(old conservative)는 문화적 모더니즘에 오염되는 것을 티끌만치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체적 이성의 해체, 과학·도덕·예술의 세분화, 근대적 세계관과 그의 계속적인 형식성 밖에 존재하지 않는 합리성 등을 불신의 눈으로 대하며, 모더니즘 이전(anterior)의 입장에로의 회귀를 염원한다. (막스 베버는 이러한 태도를 일컬어 질료합리성 에의 퇴행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네오 아리스토텔리즘(neo-aristotelianism)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네오 아리스토텔리즘이 생태학의 문제에 골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새로운 우주론적 윤리를 확립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학과는 네오 슈트라우스(Leo Strauss)에서 출발하였지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한스 요나스(Hans Jonas)와 로베르트 슈페만(Robert Spaemann)의 저술들이다.
마지막으로 신보수주의(neo conservative)는 모더니즘을 앞의 두 방향에 비해 좀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신보수주의자들은 근대 과학의 발전에 대하여, 그것이 기술적 진보, 자본주의적 성장, 그리고 기술적 진보, 자본주의적 성장, 그리고 합리적 관리를 추진하는 목적에서 과학 고유의 영역 바깥으로 진출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환영의 뜻을 표시한다. 더욱이 그들은 문화적 모더니즘의 기폭적 내용을 제어하는 정책에 고무되어져 있다. 그들의 테제중의 하나인 학문은 만약 그것을 정확히 꿰뚫어 본다면, 생활세계의 지침으로는 결국 무의미하게 되어 버린 것이며, 또 하나의 테제인 정치는 도덕적·실천적인 정당화의 요구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세 번째 테제로서 예술의 순수한 내재성을 주장하며, 극단적으로 예술에 유토피아적 내용을 담으려는 것마저 반대한다. 그들은 예술이 가상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기 때문에 찾으려 한다. 여기에 속한 사람으로는 초기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중기의 칼 슈미트(Carl Schmitt), 그리고 후기의 고트프리트 벤(Gottfried Benn) 등이 있다. 이처럼 학문, 도덕, 예술을 생활세계에서 분리시켜, 전문가의 관리영역으로 들린다면, 문화적 모더니티 속에 남게 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모더니티의 프로젝트조차도 그나마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우려뿐인 것이다. 이러한 우려를 대신 메우고 있는 것이 전통인데, 신보수주의에 있어서 그 전통은 정당성이나 타당성을 새삼스럽게 떠올릴 필요가 없는 자명한 것으로서 인식되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상의 분류는, 다른 분류와 마찬가지로 단순화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의 지적·정치적 논쟁을 분석하는 데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경계하는 반근대주의(antimodernity)의 사상은 전근대주의(premodernity)와 더욱 밀착화 됨으로써 녹색 그룹, 대안제창자 그룹과 같은 주민운동과 반공해운동으로 점차 일반화되어가고 있다. 그럼에 반해 독일에 있어서의 정당의 의식변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추세를 맞고 있다. 그리고 이런 추세는 근대이후를 주창하는 사람들과 전근대주의자들과의 유대강화를 뜻하는 것이다. 지식인을 비난하고 신보수주의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 관한 한, 어느 정당도 다른 정당에 책임을 미루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프랑크푸프트市가 내게 아도르노의 이름으로 제정한 賞을 수여하게 된 자유주의적 정신에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자 한다. 프랑크푸르트출신의 아도르노는 철학자 그리고 저술가로서, 이 고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지식인의 像을 부각시켰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식인들로서는 본받을 만한 행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