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현장

송파산대놀이




서연호 / 고려대 교수

1. 놀이의 환경

서울특별시 강동구 석촌동 호수공원 가운데 서울놀이마당이 있는데 그곳에 사단법인 송파민속보존회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민속보존회라 부르게 된 것은 산대놀이와 답교놀이를 함께 전승하고 있기에 통칭하고자 한 취지라 한다. 현재 송파동은 호수 건너에 있다. 1963년 1월 경기도 광주군의 한 지역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고, 그 이후 다시 몇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에는 인근의 석촌·삼전·가락·문정·장지동 등이 모두 송파로 지칭되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송파동은 이전 송파의 일부에 지나지 않은 셈이다.

송파의 노인들 사이에서는 흔히 구송파와 신송파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는데, 송파탈놀이의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명칭에 얽힌 사회적 변화를 우선 주목하게 된다. 1925년 7월, 이른바 乙丑年 대홍수를 맞게 되었고 당시 浮里島 건너편 나루를 끼고 마을을 이루었던 송파는 삽시간에 물바다를 이루게 되었다. 물길을 48尺이 증수되었으며 273채가 온통 흔적도 없이 유실되었다. 홍수가 지난 뒤의 송파마을은 흰모래언덕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때 총독부 당국에서는 새로운 마을을 만들기로 하고 나루터 동쪽에 있는 야산을 부지로 선정하였다. 그곳은 본래 마을의 공동묘지였는데 묘지를 없애고 주민들의 가옥과 행정사무소 등을 짓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마을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흔히 신송파로 통하였으며, 홍수 이전의 마을을 구송파로 불렀던 것이다. 오늘날 가락동 일대가 신송파의 지역에 해당된다.

송파(구송파)는 옛부터 渡津취락으로 발전해 온 곳이다. 漢陽을 중심으로 볼 때 仁川으로 强化渡, 始興으로 통하는 鷺梁渡, 용인으로 통하는 漢江波(한남동) 등과 함께 송파도는 서울과 경기도 廣州를 잇는 한강 南岸의 큰 나루터였다. 이 밖에 광진·서빙고·삼전도·두모포·동작진·용산강·마포·서강 등지도 한강의 수상 교통상 주요한 나루터마을이었다.

1809년 (純祖 9년)에 편찬된 《萬機要覽》에 의하면 전국 1천 61개의 鄕市 가운데 松坡場이 최대 시장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송파장에서 독과점 판매사건 등 상거래 질서를 문란시키고 있는 각종 사회문제가 대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통면에서나 경기면에서 그만큼 송파장의 위치가 큰 것임을 시사해 주는 자료들이다.

조선시대의 송파는 한강을 오르나리는 水運의 한 거점으로서, 그리고 한양으로 통하는 陸運의 한 거점으로서 큰 향시가 개설되었으며, 언제나 성시를 이루는 강남의 중심지였다. 서울로 공급하는 京畿米, 숯, 장작, 건축재, 소(牛), 곡식, 채소, 어물 등이 이곳을 거쳐갔으며, <임금님께 진상하는 꿀병도 송파를 거친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였다. 5일만에 3일간 장이 섰다. 本場은 하루이나 前日場·後日場해서 3일이 되었다. 당시 牛市場이 몹시 컸으며, 전국에서 모여드는 馬行商人, 배를 타고 다니던 船商人(특히 한강을 중심으로 한 京江상인), 그리고 경기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몰려드는 여행인, 관리 등으로 붐볐다. 실로 巨商·巨富들이 많은 지역이었다.

송파탈놀이의 전승은 이러한 지역적 환경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탈놀이의 성립에 관해서는 문헌기록이나 신빙할 만한 증언을 찾을 수 없으나 그곳 노인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시장 상인들의 지원과 협조에 의해 놀이가 발전적으로 지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은 탈놀이의 전승되는 다른 지방의 경우와 흡사하며 특히 河市로서 낙동강의 밤마리오광대놀이와는 일치되는 조건이다. 즉 시장기능이 확대되면서 상대적으로 구매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놀이패의 유치, 그에 대한 지원, 서민놀이의 활성화 등이 병행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송파의 탈놀이는 농촌의 경제나 민속을 바탕으로 일어난 자생적인 탈놀이이기보다는 도시화·상업화에 병행된 일종의 흥행주의적 연희라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과 아울러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19세기 말엽까지 존속되었던 서울 주변의 산대놀이패(본산대패를 주도했던 인물들)와의 관련성이다. 구파발산대·녹번리산대·애오개산대·사지골산대와는 물론이고, 송파에서 가까운 노량진산대와 퇴계원산대와의 관계는 긴밀하였을 것으로 추론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송파놀이꾼들의 연령층으로 보아 늦어도 19세기 후반까지는 탈놀이가 성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장 경기와 함께 성황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와 산업구조와 교통수단이 바뀌게 되면서 송파장의 기능은 점점 쇠약해지기 시작하였다. 한강철교가 놓이고 (1900, 7),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1905, 1) 陸運의 거점도 바뀌고 水運도 퇴조를 보이게 되었는데, 게다가 물물교환의 경제에서 점차 공업생산의 단계로 변화함에 따라 종래 향시의 경기는 지역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변화되었다. 송파의 인근인 천호동에 다른 큰 시장이 형성되었고, 동대문밖에 큰 牛市場이 생기자 송파의 경기는 급속히 후퇴하였다. 근근히 옛날의 잔영을 이어가던 송파장은 앞서 지적한 1925년의 대홍수로 인하여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17세 때에 대홍수를 겪은 한유성(1908. 7 ∼)의 회고에 의하면, 구송파시절에 시장경기가 점차 퇴조를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아직은 큰장이 섰으므로, 탈놀이판의 분위기나 규모는 괄목할만 하였다 한다. 정월 대보름, 초파일, 단오, 백중, 추석에 주로 놀았는데, 송파의 놀이꾼들뿐만 아니라 인근의 놀이꾼(주로 퇴계원산대패)들에게 보양(출연초청편지)을 띄워 함께 놀기도 하였다. 대개는 오후는 석촌리까지 돌아오는 길놀이를 벌이고 밤이 되면 장터에 탈 마당을 펼쳤다. 당시 놀이꾼으로는 윤종현. 김도환의 춤이 특히 이름을 드날렸으며, 노장탈이 유독 컸던 것이 인상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가면의 제작자로는 조영완·허성복 등이 유명하였고, 그밖에 박희선·유천식·김동현·배운학·채팔봉 등이 활약하였다.

대홍수 이후 신송파에서는 한두 번 놀이판을 벌였으나 놀이패는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대신 1930년 대 초부터 돌말이 (石村里)에서 탈놀이가 재기되어 태평양전쟁이 나기 전까지 한때 왕성하였다. 구송파시대의 놀이꾼으로는 윤종현이 초청되어 춤의 지도와 놀이의 진행을 자문해 주었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돌말이 마을 가운데 마당에서 놀고, 겨울에는 백사장에 움집(공청이라 불렀다)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놀았다. 남한산성·봉은사 등지에 가서도 놀았다. 움집은 모래바닥을 1m 깊이로 사방 넓게 파고, 주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후 섯가래를 얹는다. 섯가래 위와 주위에 거적을 덮은 후 새끼로 매어 고정시켰다. 겨울에는 실내가 매우 온화하여 놀이판을 벌이기 좋았으며, 크게 지은 경우에는 하나의 출입구를 중심하여 衁자로 노인들의 방과 젊은이들의 방을 따로 만들기도 하였다. 백여 명 이상이 들어가는 규모도 있었다. 돌말이 놀이패에는 김순길·정희성·이범만·엄준근·염태산·심재석·한유성·이정용 등이 활약하였고, 한유성은 탈을 겸하여 만들었다.

신송파시기에 와서 탈놀이가 돌말이 사람들에 의해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 측면과 예능적 측면에서 조건이 유리했던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같은 송파지역이었으면서도 돌말 이는 예부터 돌발이 많은 밭농사지역이었다. 돌말이(석촌리)라는 지명도 지역 환경에서 유래된 것이다. 대홍수의 피해도 별로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농사에 의해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였으므로 세시 풍습으로 탈놀이를 꾸준히 지속시킬 수 있었다.

예능적인 측면에서는 답교놀이의 전승에서 연유된 악사들의 지원을 들 수 있다. 돌말이의 답교놀이는 인근 몽춘리의 그것과 함께 오랜 동안 전승되어 왔는데, 이런 지역적인 분위기로 인하여 주민들의 놀이에 대한 신명도 높았고, 또한 음악적인 예능도 성숙되어 있었다. 이성로(1880 ?∼1965)·김성중(1880?∼1972)은 쌍호적의 명수였으며, 놀이꾼들은 대부분이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중단되었던 돌말이의 탈놀이는 해방 이후에 몇 차례 놀았고, 6.25이후 3∼4년이 지나 다시 몇 차례 놀았다. 그러나 예전과 같은 짜임새나 마당의 분위기는 찾을 수 없었다. 1960년대 초엽, 송파인으로 마포구(대흥동 348번지)에 가서 살던 허호영이 송파산대놀이의 복원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놀이는 1973년 5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기에 이러렀다. 허호영은 구송파 시절에 탈 제작을 하던 허성복의 아들로 젊은 시절에는 탈춤을 추지 않았으나 유식한데다 신명이 뛰어나 돌말이의 엄준근·이범만·한유성 등의 증언과 예능을 토대로, 또한 자신이 양주의 놀이꾼 양한규에게 배운 춤사위를 바탕으로 탈놀이를 복원하였다.

탈놀이의 복원과정에는 여러 가지 무리가 많았다. 대사나 춤사위, 놀이의 진행방법 등이 자세히 발굴·고증되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복원 구성하였기에 무리가 따르게 되었다. 부분부분에 따라서는 허호영 개인의 창작적인 요소도 가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파탈놀이가 문화재 지정 이후에도 몇 차례 부분적인 수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 때문이었다. 다른 지방의 경우와 같이, 송파에서도 계승의 전통성에 관한 시비의 여지가 남아 있는 소이는 바로 이러한 요인 때문이다.

2. 놀이패와 놀이꾼

송파산대놀이의 놀이꾼에 대하여는 필자 자신의 현지조사와 이두현·이병옥의 조사자료를 토대로 기술하고자 한다.

윤종현 (1880∼1953)은 시장에서 되쟁이 (혹은 마쟁이라 하는데, 되나 말로 곡식을 되어 주는 직업)나 혹은 나루터에서 임방꾼 (배에 화물을 싣고 푸는 직업)을 하면서 놀이패를 이끌어 가던 사람이었다. 힘이 장사여서 씨름판에서도 주름을 잡았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일찍이 죽고 손주는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였다. 옴중춤의 명수였으나 전과장의 춤을 다 출 수 있는 예능인이어서, 한번 놀이판에 등장하면 장시간 놀이를 이끌어 가곤 하였다. 탈도 만들었다.

김도환 (1889∼1951)은 시장에서 되쟁이와 막일을 하면서 윤종현과 함께 놀이패를 이끌어 갔다. 아들 둘이 송파동에 살고 있으나 춤을 전수 받지 않았다. 그의 특기는 첫상좌와 노장춤이었으나 전 과장을 다 출 수 있는 실력이었다. 장단이 틀리면 춤을 추다 말고 들어와 악사에게 지도를 해 주고 다시 출 정도로 익숙하였다. 탈 제작도 하였다.

조영완 (1865∼1949)은 부인이 시장에서 술장사를 해서 살았는데 그는 가사보다는 놀이패의 뒷바라지에 힘을 기울였다. 왜장녀·소무춤 등을 추었으나 재능이 없어 주로 가면을 만들었다. 대홍수 때에도 가면을 보관해서 피해를 입지 않게 하였다.

허성복 (1880?∼1965)은 송파의 한의원으로 탈을 만들거나 놀이패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박희선 (1887∼1949)은 되쟁이, 돌팔이로 침쟁이 노릇을 하면서 생계를 이었다. 팔목춤을 추었으나 서툴렀다.

유천식 (1877∼1960?)은 엽연초를 썰어서 팔았는데 소무·애사당춤을 잘 추었다. 그의 춤에 반한 과부가 유혹하여 금호동으로 물을 건너갔는데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김동현(1880?∼1955?)은 막노동꾼이었는데 취발이춤과 재담이 능란하였다.

배운학 (1887?∼1920?)은 뱃사공으로 원숭이춤을 잘 추었다.

채팔봉 (1890?∼1930?)은 일본군에게 마초를 말려서 공급하는 일을 하였는데 놀이패에서는 뒷일을 말아 주었다.

이상이 구송파 시절의 놀이꾼들이고, 그들의 뒤를 이는 돌말이 놀이꾼들은 아래와 같다.

김순길 (1895∼1970)은 농부로서 소무와 팔목춤을 잘 추었다.

정희성 (1905∼1965)은 씨앗점을 하면서 농사도 지었는데 소무와 팔목춤을 추었으나 춤이 능란하지 못하였다.

이범만 (1907∼1984)은 삼전리(옛 三田渡)출신인데 대홍수 때 땅을 잃고 돌말이에 이사하여 장사를 하였다. 팔목·노장·신할애비·샌님춤 등을 추었고, 재담을 잘하였다. 73년이후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엄준근 (1892∼1979)은 삼전리 출신으로 농사를 지었다. 옴중·신할애비춤을 잘 추었다. 말년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지 못하였다.

金潤澤 (1904∼1979)은 놀이꾼 조영완의 사위이고, 김동현의 조카(3寸)로서 송파면사무소에서 소사(사환)를 오래 하였다. 나중에는 <면장> 이라는 별칭으로 통하였다. 구성파·신송파시절 놀이패에 끼어들어 역할을 맡은 적은 없으나 춤사위가 곱고 뛰어나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양주탈놀이에는 없는 깨끼춤계통의 거울보기(수장잡이)가 일품이며, 첫상좌·신주부춤도 잘 춘다.

여태산 (1906∼ )은 삼전리 출신으로 농사를 지었다. 팔목을 추었으나 춤이 서툴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지 못하였다.

심재석 (1925∼ )은 돌말이에서 상업을 하였고 소무춤을 추었다. 춤이 서툴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지 못하였다.

허호영 (1914∼ )은 앞서 소개한 대로 놀이의 복원에 일면 공로가 커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기도 하였으나 단체 내에서 물의를 일으켜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작업은 상업이었다.

이상에서 밝혀진 대로 송파탈놀이의 놀이꾼들은 대부분이 시장이나 나루터에서 막일이나 소규모의 가게, 술장사 뱃일 등을 하던 서민층이었고, 1930년대 이후에는 반농반상인이 주축을 이루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신분이나 직업은 탈놀이의 사회적 성격이나 연희 내용을 구성하는데 깊은 함수관계를 지녀왔던 것으로 일단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3. 송파민속보존회

송파탈놀이는 1963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제4회) 참석을 계기로 복원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1973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됨으로써 제도적인 보호를 받기 시작하였고, 1975년 성동구 신당동(248의 19번지)에 전수소를 처음 개설하여 전수활동을 본격화하였다. 예능보유자로서 그 동안 놀이의 전수 발전에 기여해 온 놀이꾼으로는 앞서 지적한 이범만·김윤택·허호영 등이 있었고, 현재는 한유성·이충선·문육지 등이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한유성 (1908∼ )은 현재 송파민속보존회 (사단법인)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돌말이 출신으로 10세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탈제작도 옛 윤종현·김도환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송파강 근처에 있던 광성보통학교를 2년 중퇴한 후, 아버지(한순원 포목상)의 뒤를 이어 장사를 하면서 놀이판을 열심히 따라 다녔다. 취발이·눈끔재기·샌님춤을 잘 춘다. 탈제작 뿐만 아니라 놀이의 전체적인 진행과정과 답교놀이에 대하여 정통한 식견을 지니고 있다.

이충선 (1910∼ )은 몽춘리에 살면서 악사역을 맡아 오다가 예능인으로 지정되었다. 본래 경기도 당굿 무녀와 화랭이 사이에서 출생한 삼남 중 둘째로서 형 일선·동생 달선 형제가 모두 국악사이다. 피리의 명인이나 장고·대금·해금 등 모든 악기에 능통하다.

문육지 (1913∼ )는 구의동에서 출생하여 17세때 신송파로 이사하였다. 부친이 세 번째 결혼하여 낳은 외아들로 반농반사공으로 생활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상여메기는 앞소리를 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60년대 초부터 놀이패에 가담하게 되었고, 허호영과 함께 춤을 익히게 되었다. 무당역을 잘하며 그 밖에 둘째 상좌·노장역 등을 하였다.

예능인으로 지정받지는 못하였으나 악사 이윤성(1918∼ )은 탈놀이의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그는 이충선에게서 피리·대금·호적 등을 전수받은 후계자로서, 고령임에도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문화재 지정 이후 예능을 전수받아 이수자가 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김학석 (1940∼ )은 왜장녀·무당역에서 익숙하며 唱도 잘 부른다.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김성운 (1945∼ )은 악사로서 해금에 익숙하다. 국악인으로 활약한다.

이병옥 (1947∼ )은 첫상좌·취발이·말뚝이역 등에 익숙하다. 대학강사와 무용평론가로 활약한다.

안병인 (1954∼ )은 둘째상좌·신장수·샌님역 등에 익숙하다. 인천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다.

김명하 (1955∼ )는 말뚝이·팔목역 등에 익숙하다. 교사로 재직 중이다.

함완식 (1956∼ )은 옴중·노장역 등에 익숙하다. 공무원이며 탈춤지도 교사를 맡고 있다.

전철규 (1957∼ )는 왜장녀역에 익숙하다. 회사원으로 재직 중이다.

홍명자 (1957∼ )는 소무·상좌역 등에 익숙하다. 회사원으로 재직 중이다.

이수환 (1958∼ )은 노장·옴중역 등에 익숙하다. 회사원으로 재직 중이다.

이현숙 (1954∼ )은 소무역, 윤효경 (1956∼ )은 미얄할미역, 김영숙 (1958∼ )은 소무역에 각각 익숙하다. 이들 세 사람은 일반전수자로서 8년의 교육기간이 지났으므로 이수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여성 인재들이다. 이 밖에 이수자로는 조대진 (1942∼ , 북·장고)·곽태천 (1946∼ , 피리)·김방현 (1951∼ , 대금)·서병무 (1955∼ , 목중) 등이 있으나 현재 놀이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전수생이 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이한복 (1942∼ )은 대금 주자로서 국악인으로 활약 중이다.

최병기 (1953∼ )는 목중·노장역을 맡으며, 회사원으로 재직 중이다.

노명우 (1955∼ )는 취발이역을 맡으며, 회사원으로 재직 중이다.

이경철 (1957∼ )은 샌님역을 맡으며, 회사원으로 재직중이다.

심옥천 (1958∼ )·유명민 (1958∼ )·한창현 (1962∼ ) 등은 목중역을 맡으며, 모두 회사원으로 재직 중이다.

이 밖에 전수생으로는 박승호 (1953∼ , 신할애비)·김대현 (1956 ∼ , 왜장녀) 등이 있으나 놀이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끝으로 일반전수생이 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김문수 (1955∼ )는 신주부역을 맡으며 회사원으로 재직 중이다.

유흥진 (1959∼ )은 목중역을 맡으며 사업을 하고 있다.

이희병 (1962∼ )은 목중역을 맡으며 회사원으로 재직 중이다.

왕숙자 (1962∼ )는 도끼누이역을 맡으며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다.

배성준 (1963∼ )은 목중역을 맡으며 회사원으로 재직 중이다.

전경희 (1963∼ )는 애사당역을 맡는다.

임채현 (1969∼ )은 목중역을 맡으며 회사원으로 재직 중이다.

그 동안 수차에 걸쳐 전수장소를 옮겨다녀야 했던 보존회는 1984년 11월 서울놀이마당에 본거지를 두게 됨으로써 비로소 정착된 활동을 펼 수 있게 되었다. 놀이마당은 7천만 원의 정부보조와 별도의 市費가 합쳐져 만들어진 시설인데 공연장과 사무실, 그리고 지하에 연습실을 갖추고 있다.

현재 시설상의 불편은 연습실이 좁고 전수상 환경이 부적합하다는 점이다. 놀이마당의 모든 시설은 송파산대만이 아닌, 모든 민속놀이 공연을 위한 것이기에 자의대로 사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위 환경이 소란스러워 전수교육에 지장이 많은 편이다. 그러므로 보존회측의 최대 당면 과제의 하나는 야외전수장의 건립에 있다. 회원들이 숙박을 해 가면서 예능을 익히고, 또 신입 회원들에게 안정된 분위기에서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장소와 시설의 모색이 그것이다.

다른 지방의 경우와 같이, 송파에서도 공연상 역할분담의 취약성과 배역 상호간의 부조화, 전수교육상의 비능률화가 지적될 수 있다. 예능 보유자들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 고령화로 인하여 실제 출연이나 전수교육이 거의 불가능한 실정인데, 이러한 측면의 일을 중추적으로 떠맡아야 할 이수자들은 생계비의 위협으로 단체의 일에는 자연 소홀해지게 됨으로써 이러한 문제가 상존하게 되고, 또한 쉽사리 개선이 어렵게 되어 있다. 출연자가 자주 바뀌는 이유도 이러한 데 있다. 교육비가 부족하여 여러 강사에 의한 다각적인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도 이유의 하나이다. 요컨대 회원들이 안정된 토대 위에서 보다 발전적이고 창조적인 공연을 해 나갈 수 있는 대책의 모색과 실천적인 해결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 하겠다.

4. 탈의 제작과 기본춤

지정 당시 탈은 허호영이 재구하여 만들었다. 예능자들의 증언과 자신이 옛날에 보아온 기억을 더듬어 제작하였는데, 배역에도 없었던 초라니·당녀·완보탈이 들어 있는 것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형미가 우수하여 배역간의 식별이 용이하고, 고아·섬세한 멋을 풍겨 주었던 특징도 지니고 있었다.

1977년 9월, 허호영이 제작한 탈을 못쓰게 되자 한유성이 구송파·돌말이시절의 탈을 재구하여 만들었고, 그 탈은 최근까지 사용하다가 현재는 보존회사무실에 전시되어 있다. 사용 중인 탈은 한유성이 같은 방식으로 만든 것이다. 그의 탈은 앞서 허호영의 것에 비하여 단순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배역의 성격에 따른 크기나 개성미, 대사 전달상에 다소 문제점을 지니고 있으나 옛스런 맛을 풍기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한유성이 밝힌 탈제작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말린 바가지 표면에 탈 모양을 섬세하게 그린 후, 형태에 맞게 잘라낸다. 칼로 눈구멍이나 입구멍을 파낸다. 소나무의 두꺼운 껍질로 코나 눈썹 모양을 깎아 아교로 붙이고, 입술이나 주름살 모양은 종이(한지)를 꼬아 비벼서 아교로 붙인다. 현재에는 소나무껍질 대신에 종이를 풀어 넣어 주물러 떡과 같이 되면, 눈두덩이나 코 혹은 혹 같은 것을 만들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과정이 끝나면 그 위에 한지를 작게 잘라서 3∼4회 반복하여 풀로 붙인다. 햇볕에 2∼3일 말리면 형태가 완성되는데, 그 표면 위에 색칠을 하게 된다. 물감과 아교를 섞어 끊어서 붓으로 칠한다. 적색·흑색·황색·녹색 등을 쓰고 갈색은 흑색과 적색을 혼합하여 쓴다. 백색은 종이색을 그대로 쓴다. 현재에는 무광페인트를 사용하기도 한다.

탈의 형태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상좌(2개) : 흰바탕 얼굴, 눈썹부분 불거져 나오고 검은 점선으로 그림, 눈가장자리도 검은 점선, 세모코, 붉은 입술, 첫상좌는 붉은 고깔, 둘째상좌는 푸른 고깔을 쓴다. 사실면.

옴중 : 흑갈색 얼굴바탕, 녹색눈썹과 흰눈자위가 위로 치켜 오름, 볼에 불거진 혹, 주먹코, 붉고 두터운 입술, 오방색의 옴이 여러개나 있음. 이마에 굵은 주름, 점병같이 둥글고 납작한 시루밑으로 만든 벙거지를 쓴다. 鬼面.

먹중(4개) : 주황색 얼굴. 흰빛의 처진눈, 삼색선 눈썹, 주먹코, 볼에 반달 혹, 사실면.

눈끔재기 : 진주황색 얼굴, 삼색선 눈썹, 주먹코, 이마에 큰 주름살, 붉고 큰 입술, 눈구멍에 끔적이는 장치가 붙어 있으나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실면.

연닢 : 흰바탕 얼굴, 이마와 귀언저리는 녹색, 눈가장자리는 검은 점선, 점선눈썹, 주먹코, 불고 큰 입술. 사실면.

말뚝이 : 진주황색 얼굴, 초록색 눈썹, 이마에 주름, 흰눈자위, 볼에 혹, 붉은 입술, 패랭이를 쓴다. 사실면.

서방님 : 흰바탕 얼굴, 초록색 눈썹, 삼각코, 붉은 입술, 갓을 쓴다. 사실면.

도련님 : 흰바탕 얼굴, 초록색 눈썹, 삼각코, 붉은 입술, 복건을 쓴다. 사실면.

미얄할미 : 연한 갈색 바탕의 얼굴에 무수히 많은 흰 반점, 삼색 눈썹, 삼각코, 흰눈자위 주위에 검은선, 붉은 입술, 사실면.

신할미 : 회색바탕의 얼굴, 이마와 양볼에 주름살, 점선 눈썹, 흰눈자위 주변에 점선, 삼각코, 붉은 입술, 사실면.

신할애비 : 살색 바탕의 얼굴, 각색선의 주름, 처진 흰눈자위, 토끼털로 만든 눈썹과 수염, 삼각코, 붉은 입술, 사실면.

원숭이 : 붉은 얼굴, 얼굴과 눈 주위에 토끼털이 많다. 사실면.

소무(3개) : 흰바탕의 얼굴, 이마에 가르마, 녹색 눈썹, 삼각코, 눈자위 주변에 점선, 붉은 입술, 이마와 양볼에 연지 곤지 3개, 사실면.

애사당 : 소무와 같음, 흰고깔을 쓴다.

도끼 : 진갈색 얼굴, 흰바탕에 초록색 눈썹, 아래로 처진 흰눈자위, 눈자위 주변에 점선, 주먹코, 붉은 입술, 사실면.

신주부 : 주황빛 얼굴, 이마와 양볼에 주름살, 녹색 사선의 눈썹, 흰눈자위 주위에 검은 선, 삼각코, 붉은 입술, 턱부위에 검은 반점이 많다. 건을 쓴다.

도끼누이 : 흰바탕의 얼굴, 이마에 가르마, 눈자위 주위에 점선, 눈가장자리에 붉은 반점, 삼각코, 붉은 입술, 큰머리, 사실면.

취발이 : 주황색 얼굴 바탕에 이마에 굵은 주름살, 노란바탕에 녹색선의 눈썹, 처진 흰눈자위, 양볼에 큰혹, 주먹코, 입주둥이가 위로 쳐진 턱, 이마에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사실면과 귀면의 혼합형.

쇠뚝이 : 흑갈색 바탕에 흰눈자위, 눈자위 주위에 검은 점선, 검은 눈썹, 이마에 굵은 주름살, 양볼에 혹, 주먹코, 붉고 두터운 입술, 패랭이를 쓴다. 사실면.

해산어멈 : 소무와 같으나 연지곤지가 없다. 사실면.

노장 : 검은 바탕에 턱에는 흰점이 많음, 이마에 주름살, 흰바탕에 녹색선의 눈썹, 흰눈자위, 양볼에 혹, 주먹코, 붉은 입술, 송낙을 쓴다. 사실면과 귀면의 혼합형.

포도부장 : 흰얼굴 바탕에 양볼에 혹, 머리부분과 코밑 수염·턱 수염부분은 검게 그려져 있음. 눈자위 주위에 검은 점선, 주먹코, 붉은 입술, 갓을 쓴다. 사실면.

왜장녀 : 도끼누이와 같으나 이마에 연지, 큰머리를 쓴다.

무당 : 흰얼굴 바탕에 이마에 가르마와 연지, 녹색 눈썹, 눈 주위에 녹색선, 삼각코, 붉은 입술, 무당갓을 쓴다. 사실면.

샌님 : 살색바탕에 이마와 양볼에 갈색 주름살, 눈자위 주변에 갈색 점선, 삼각코, 붉은 입술에 언챙이, 흰 눈썹, 긴 턱수염, 정자관을 쓴다. 사실면.

신장수 : 진갈색바탕에 위로 치킨 흰 눈자위, 눈자위 주위에 노란선, 이마에 검은 주름살, 노란바탕에 검은 무늬 눈썹, 양볼에 광대뼈 혹, 주먹코, 붉은 입술, 입주위에 검은 선, 패랭이를 쓴다. 사실면과 귀면의 혼합형.

이상의 탈 중에서 소무·애사당·원숭이탈이 가장 작으며 (가로 19cm×세로 22cm), 연닢·눈끔재기·포도부장·노장탈이 가장 큰 탈이다. (24×27) 나머지 탈은 이들의 중간 크기다.

현장적인 상황과 즉흥적인 신명성. 그리고 전승적인 몸짓에 근거해서 놀던 송파탈놀이는 지정 이후 체계적인 전수교육의 필요성이 대두하게 되자 기본 춤사위에 대한 발굴과 정리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러한 일에는 60년대 이후 허호영의 공로가 크며, 그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폭넓은 연구와 후배지도에 앞장을 서 온 70년대 중엽 이후 李炳玉의 업적이 괄목할 만하다.

춤사위는 장단의 유형별로 나누어 염불장단의 거드름춤, 타령장단의 깨끼춤과 걸음걸이춤, 굿거리장단의 허튼춤이 있다. 거드름춤에는 합장재배(첫상좌), 사방배(〃), 용트름(옴중), 부채춤(연닢·눈끔재기), 팔뚝잡이(상좌), 활개펴기(옴중), 활개접기(〃), 장삼치기(〃), 복무(노장), 삼진삼퇴(옴중·노장) 등이 있다. 염불장단에는 6박자의 느린 염불과 잦은 염불인 도도리장단이 있다. 깨끼춤에는 화장무, 반화장, 자진화장, 곱사위, 여다지, 여다지어르기, 긴여다지, 배치기, 여다지배치기, 화장배치기, 어깨메기, 깨끼리, 염풍댕이, 돌단이, 거울보기, 팔뚝잡이, 멍석말이, 덜미잡이, 자라춤, 장단먹기, 궁둥치기, 배춤, 갈기자춤, 몰아치기, 장삼치기, 한삼치기, 맞춤 등이 있다. 걸음걸이춤에는 까치걸음, 양반까지걸음, 취발이까치걸음, 빗사위, 갈지자걸음, 뒷짐걸음, 원숭이재롱춤, 활개걸음, 건드렁, 껑충걸음 등이 있다. 타령 장단에는 느린타령과 잦은 타령이 있는데, 잦은 타령은 보통의 잦은 타령과 박자가 같아도 반주가 바뀌는 잦은 타령이 있다. 굿거리장단의 허튼춤은 등퇴장이나 길놀이 할 때 주로 걷는 춤으로 부수적인 것이다. 양주 탈놀이와 비교하면, 양주는 염불 거드름춤이, 송파에는 타령 깨끼춤 (깨끼춤과 걸음걸이춤)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악기는 3絃 6角으로 피리(2개)·해금·대금·장고·북이 기본으로 장고가 선도역할을 한다.

5. 놀이본의 채록

송파탈놀이의 놀이본은 구술자를 중심으로 볼 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허호영의 구슬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범만·한유성·문육지·이충선·김윤택 등의 구술에 의한 채록본이다.

허호영의 구술본은 이두현에 의해 최초로 채록되었다. 이 채록본을 기초자료로 하여 문화재 지정이 이루어졌다. 그 후 허호영 자신이 채록본을 만들어 발표한 일도 있었다.

70년대 중엽부터 80년까지 다른 연희자들을 대상으로 한 채록본은 이병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허호영에게서는 재담을, 김윤택에게서는 깨끼춤사위를, 문육지에게서는 소리를, 그리고 한유성에게서는 전체적인 진행방법을 주로 자문 받았다고 한다. 그의 채록본은 세 차례에 걸친 수정본으로 발표되었다.

이두현본은 7과장 9경으로 정리되어 있는 반면에 이병옥본은 옛 놀이꾼들의 구술 그대로 12과장으로 되어 있다. 놀이의 내용이나 방법에 있어서도 다소간의 차이를 드러낸다. 한편, 송파탈놀이와 양주탈놀이는 서울(한양)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지역에 전승되어 온 탈놀이임에도 연행 방식이나 인물의 성격상 차이를 지니고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편의상 송파는 ⱀ으로, 양주는 ⱁ으로 약칭한다)

① 연닢·눈끔재기과장 : ⱀ에는 팔먹중 3인의 등장하는데 ⱁ에는 상좌·옴중·목중이 등장하며 ⱀ에는 연닢·눈끔재기가 양반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ⱁ에는 다만 성스러운 존재로 상징화되어 있을 뿐이다.

② 팔먹중의 곤장놀이과장 : ⱀ에는 원목이 곤장을 들고 나와 다른 먹중들에게 곤장을 때리는데 ⱁ에는 완보가 다른 목중들과 어울려 질탕하게 논다.

③ 샌님·말뚝이과장 : ⱀ에는 말뚝이와 쇠뚝이가 양반의 거처를 돼지우리로 정해 놓으므로써 망신을 시키는데 비해 ⱁ에는 쇠뚝이와 양반 부녀자들의 사통, 말뚝이에게 뇌물을 강요하는 장면을 첨가시킴으로써 인물의 성격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④ 샌님·마얄·포도부장과장 : ⱀ에는 샌님의 본부인인 미얄할미와 첩인 소무가 등장하며 나중에 포도부장까지 등장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반면 ⱁ에는 샌님·소무·포도부장 사이의 삼각갈등으로 진행된다.

⑤ 신할애비·신할미과장 : ⱀ에는 신할애비와 신할미가 등장하는데 비해 ⱁ에는 미얄할미가 등장하고 있다. 즉 ⱀ에는 신할미라는 배역이 하나 더 있는 셈이다.

두가지 채록본의 놀이과장 대조표


이두현 본 (1971)

이병옥 본 (1980)

제1가장

제2과장

제3과장

제4과장



제5과장

제6과장







제7과장

제8과장

제9과장

제10과장

제11과장

제12과장

상좌춤

움중

연닢. 눈끔적이

팔먹중

(제1경)북놀이

(제2경) 곤장놀이

(염불놀이)

(제3경) 침놀이

노장

(제1경)파계승놀이

(2경) 시장수놀이

(제3경)취발이놀이

샌님

(제1경)의막사령놀이

(말뚝이놀이)

(제2경)샌님과 미얄

할미

(제3경)샌님과포도

부장

신할아비와신할미

상좌춤

옴중, 먹중

연닢.눈끔재기

애사당의 복놀이



팔먹중의 곤장놀이


신주부의 침놀이





노장

신장수

취발이

샌님.말뚝이

샌님.미얄.포도부장

신할애비.신할미

이상에서 언급한 요소 이외에도 재담·몸짓·춤사위면에서 다소간의 차이가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 관한 연극적인 해석은 별도의 연구를 요하는 것이기에 이만 줄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