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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와 휴식의 몽상




이재형 역 / 번역문학가



우리가 추억의 집에서 살려고 하면 현실세계는 단숨에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고향집을, 절대적인 內密性의 집을, 그리고 우리가 내밀성에 눈을 떴던 집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면 큰길가의 집들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고향집은 멀리멀리 사라져 버렸으며, 우리는 이제 고향집에 살지 않고, 우리는, 아아 ! 이제 결코 고향집에 살지 못하리라 확신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고향집은 어떤 추억 이상의 것이 된다. 고향집은 꿈의 집이며, 우리의 몽상의 집이다.

강하지만 환상적인 집들이 주위에서 있었네, - 그리고 그 어느 집도 우리는 낯설다네. 그 모든 것 속에 무슨 현실적인 것이 있었겠는가?

(릴케, 「오르페우스에게 보내는 소네트 Les sonnets à Orphée」, trad. 앙젤로즈).

그렇다. 우리가 잠을 자는 집, 또는 잠을 자면서 충실하게 꿈을 꾸게 될 집에 더 현실적인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나는 파리의 기하학적인 그 입방체 속에서, 시멘트로 된 벌집 구멍 속에서, 밤의 질료에 대해 너무도 적대적인 쇠덧문이 달린 그 방안에서는 꿈을 꾸지 않는다. 좋은 꿈을 꿀 때면 나는 그 곳, 샹파뉴의 집이나 또는 행복의 신비가 응결되어 있는 몇몇 집으로 간다.

모든 과거지사 가운데서 가장 생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마도 집이리라. 삐에르 세게르가 읊은 것처럼, 고향집은 이미 소멸돼버린 모든 목소리들과 함께 "목소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

침묵과 벽이 내게 되돌려 보낸 어떤 이름,

그 이름을 부르며 나 홀로 가는 어떤 집,

내 목소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상한 집,

그리고 바람이 살고 있는.

이처럼 몽상에 잠겨들게 되면 우리는 어떤 이미지 속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말테의 수기」에서 릴케는 정확하게 읊고 있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 속에 있었던 듯 하네." 그리고 시간은 이 추억의 작은 섬을 응고시켜 놓고 채 도처에서 흐른다. 즉 "나는 갑자기 시간이 그 방 밖에 있다고 느꼈다." 이렇게 고정된 몽상 상태란 말하자면 몽상가를 어떤 일정한 곳에 가두어 두는 것이다. 「수기」의 다른 페이지에서 릴께는 꿈과 추억의 渗透에 대해 읊었는데, 그는 그토록 오랫동안이나 방황했으며, 이름 없는 방에서 城에서 탑에서 통나무집에서 삶을 체험했고, 따라서 어떤 이미지 속에서 살고 있다. 즉 "그 이후로 나는 다시는 그런 기묘한 집을 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의 내 추억 속에 깃든 그것은 건물이 아니다. 그런 이상한 집들은 내 내부에서 완전히 녹고 갈라져 버렸다. 여기 방 하나, 저기 방 하나, 그리고 여기엔 그 두 방을 연결시키지 못한 채 내 가슴속에 파편처럼 남아 있는 복도가 있다. 이렇게 해서 방과, 엄숙할 정도로 느릿느릿 내려가던 계단, 나선형으로 올라갔다가 어둠 속에서는 정맥을 흐르는 피처럼 앞으로 나아가던 좁은 새장 같은 계단 등 모든 것들은 내 안에서 흩어지고 만다."

"정맥을 흐르는 피처럼!" 우리가 역동적 상상력을 가진 복도와 미로의 역동성에 관해 보다 전문적으로 연구를 하게 되면 우리는 이 표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이 표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이 표현은 몽상과 추억의 삼투를 증명한다. 이미지는 우리의 내부에 있다. 이미지는 우리의 내부에 "녹아 있고", 우리의 내부에 "갈라져 있음으로써" 전혀 다른 몽상을 낳는다. 왜냐하면 이런 몽상들은 그 어느 곳에도 이르지 않는 복도들, 환상을 "둘러싸는" 방들, 아니면 엄숙하고 거만하게 아래층으로 어떤 친밀성을 찾으러 가야 하는 계단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이 모든 우주는 추상적 테마와 살아 남은 이미지들의 경계선, 은유가 삶의 피를 취했다가 추억의 림프액 속에서 지워지고 마는 그 지대에서 활기를 되찾는다.

이때 몽상가는 가장 먼 옛날의 자기를 확인하려고 채비하는 듯 하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 유폐되어 살며, 그는 어두운 구석, 고리가 된다. 릴케의 시는 이 미스터리를 읊고 있다.

"내 내부에서도 거의 촉지할 수 있는, 램프가 걸려 있는 방 하나가 내 앞에 다가섰네… 난 벌써 구석이 되었지. 허나 덧문은 나의 냄새를 맡고는 닫혀 버렸네. 난 기다렸지. 그때 한 어린애가 울었네. 그 방을 한 바퀴 돌면서 나는 알았네. 어머니들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를. 하지만 나는 또 알았네. 영원히 도움 받을 수 없는 어떤 땅에서 모든 울음이 터져 나오는지" (「내가 없는 내 인생 Ma Vie sans moi」trad. 아르망 로벵)

우리가 온갖 사물들에게 적절한 꿈의 무게를 부여할 줄 알게 되면 몽상을 하며 산다는 것은 추억에 의해 산다는 것 이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몽상의 집은 고향집보다 훨씬, 먼 곳에서 오는 욕구와 일치한다. 만일 고향집이 우리 가슴에 그러한 기본적인 욕구를 심어준다면 그것은 그 고향집이 보호해 대한 소박한 걱정이나, 보존된 최초의 열이나, 보호된 최초의 빛보다 더욱 심오한- 더욱 내밀한 - 무의식적 영감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추억의 집, 고향집은 몽상의 집의 지하실 위에 세워진다. 지하실 안에는 꿈의 뿌리와 애착, 심오함, 잠수가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길을 잃는다." 지하실은 무궁무진함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가 이따끔씩 책 속에서 발견하는 욕망과 이미지 같은 것을 꿈꾼다. 이미 있었던 것 대신에 우리는 있어야 할 것, 우리의 내밀한 몽상을 영원토록 고정시킬 것을 꿈꾼다. 이렇게 해서 카프카는 "포도밭 맞은 편, 큰길가…계곡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조그마한 집을 꿈꾸었다." 이런 집은 "기어서밖에 들어갈 수 없으며 측면에 창이 두 곳 나있는 자그마한 문 하나를 가지고 있으리라, 모든 것은 핸드북에서 나온 것처럼 균형이 잡혀 있다. 하지만 문은 무거운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핸드북에서 나온 것처럼> ! 책에서부터 주석이 달린 꿈까지의 드넓은 영역! 또 문의 목재는 왜 그리 무거웠을까 ? 문은 어떤 감춰진 길을 금지시키는가?

커다란 집을 신비롭게 하기 위해 앙리드 레니에 Henri de Régnier는 그냥 "낮은 문을 통해서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라고 썼다. 「벽옥 지팡이 La Canne de Jaspe」p50). 그리고 이 작가는 친절하게도 입장 儀式을 묘사한다. 즉 현관에서부터 "각자가 불이 켜진 램프를 하나씩 받아들었다. 방문객은 혼자서만 공주의 집으로 향했다. 그 긴 여정은 계단과 복도가 교차돼 있어서 복잡해졌다…." 그리고 모든 얘기는 우리가 뒷장에서 공부하게 될 미로의 고전적인 한 이미지를 이용하면서 계속된다…. 또한 그 앞 부분을 읽으면 공주의 응접실은 동굴을 옮겨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유리를 끼운 듯한 칸막이 벽을 통해서 들어온 희미한 빛이 밝혀주는 원형 건물이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고독과 신비의 동굴 속에 있는", "그 계시적인 엘레우시스 사람인" 공주를 볼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휴식의 이미지들이 갖는 동(同) 구조의 체재를 준비하기 위한 몽상의 집과 동굴, 미로의 그러한 삼투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모든 이미지들의 근원에는 단 하나의 몽상의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들판길을 걸어가면서 "초록색 덧문이 달린 집"에서 살고 싶다는 느닷없는 욕망에 사로잡혀보지 않은 사람이 누구였던가? 루쏘 작품의 한 대목은 왜 그렇게 인기가 있고 심리학적으로 사실적인가? 우리의 몽상은 그 대목에 나오는 은둔처를 원하며, 그 은둔처가 작은 골짜기에 고립된 초라하고 조용한 집이기를 바란다. 집에 관한 이러한 몽상은 현실적인 것이 자신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다가도 금새 현실의 자그마한 집과 오래 묵은 환영을 순응시키고 만다. 우리가 몽상의 집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근원적인 환영이다. 헨리 데이비드 쏘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이것을 자주 체험하였다.

그는 <숲Walden>에서 쓴다. "인생의 어떤 시기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장소를 집을 지을 수 있는 풍경으로 간주하는 버릇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일만 이천여 개의 광선 속에서 들판을 골고루 돌아다닐 수 있었다…상상 속에서 나는 모든 농장을 하나하나 사들였다…나는 내가 앉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살수가 있었으며, 따라서 풍경은 내 마음 속으로부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집이란 의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난 집을 짓기 위한 터를 여러 곳 발견하였다. 그래, 난 여기서 살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했다. 그리고 거기서 한시간 동안 여름과 겨울을 살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사라져버린 세월이 겨울이 끝나면 돌아오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지, 봄이 오는 걸 볼 수 있는지 알았다. 장차 이곳에 집을 짓고 살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발 늦었다고 굳게 믿을지도 모른다. 대지를 숲과 목장과 과수원으로 설계하고, 문 앞에는 어떤 아름다운 떡갈나무나 소나무를 세워두어야 하는지, 벼락을 맞은 자그마한 나무를 그곳에 두면 그럴듯하게 보일지를 결정하는데는 오후 한나절로 충분했다. 그리고 나서 한 남자란 자기가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는 사물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모든 것을 황무지 상태로 놔두었다." 우리는 쏘로우에게 있어서 유랑자와 토박이의 변증법을 일깨워 주는 문서를 마지막 줄까지 내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증법은 定住하는 내밀성의 몽상에 운동성을 부여함으로써 오히려 그 심오함을 파괴하지 않는다. 다른 많은 페이지에서 쏘로우는 원초적인 꿈들의 田園風을 이해하였다. 초라한 집은 스페인의 그 어떤 城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인간적 의미를 갖고 있다. 城은 허약하고 초라한 집은 그 뿌리가 깊다.

상상적 집의 현실이 남기는 흔적 가운데 하나는 한 작가가 자신의 어릴 적 집의 추억을 통해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하는 신뢰감이다. 여러 가지 꿈들이 공유하고 있는 감정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정다운 집을 묘사한 조르쥬 뒤아멜(Georges Duhamel)의 글을 처음부터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끝에 나는 구석방을 얻었다…고대 이집트 석실 분묘의 회랑처럼 좁고 어둡고 숨막히는 파리식의 복도들 중의 하나인 그 긴 복도를 따라가니 그 방에 닿을 수 있었다. 뒤로 물러서면 더 이상 갈 데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다르는 그런 구석방이 나는 좋다.”

〈구석방〉의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이 변함 없이 심오한 느낌을 풍긴다해도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다.“창가에서 내가 언뜻 본 것은 그러니까 널따란 웅덩이와 수직으로 선 벽으로 둘러싸이고 바닥이 고르지 않은 넓은 우물이었다. 내 눈에 그것은 라 아슈의 협로로도 보였고, 와디락의 바닥이 보이지 않는 천연 우물로도 보였으며, 소중한 꿈을 꾸는 저녁이면 콜로라도의 계곡이나 아니면 달에 생긴 분화구들 중 하나로도 보였다.” 어떤 원초적 이미지가 여러 가지를 종합하는 힘을 어떻게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저 한 줄로 늘어서 있는 파리 시내의 마당들, 바로 여기에 현실적인 것이 존재한다. 살람보Salammbo의 페이지들과, 달의 山岳에 관한 페이지들을 살아 있게 하는 데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꿈이 이렇게 멀리 멀리까지 여행을 하는 것은 그 뿌리가 튼튼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을 도와준다. 복도의 공포가 일단 사라지고 나면 우리 모두는 또한 〈구석방에서〉 꿈꾸는 것을 좋아하였다.

우리가 고향집의 어두운 한 구석을, 더욱 비밀스런 방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 가슴속에 몽상의 집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집은 아주 먼 어린 시절서부터 우리의 관심을 끈다. 먼 옛날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고향집이 없었더라면, 수많은 몽상가들의 가슴에 그토록 깊게 뿌리박힌 오두막집의 의미가 또한 19세기 문학에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초라한 집의 의미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겠는가? 물론 타인들의 가난을 보면서 흡족해 해서도 안되지만 보잘것없는 집의 어떤 생기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 「브르타뉴의 집 Le Foyer Bretagne」이란 글에서 에밀 수브스트르 Emile Souvestre는 나막신 만드는 사람의 오두막집에서 보냈던 밤을 얘기한다. 그것은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오두막이었다. “그들은 가난에 대해 눈꼽만큼도 주눅들어 하지 않는 듯 했으며, 그 집에는 그들을 가난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뭔가가 있는 듯 했다.” 왜냐하면 이 경우 보잘것없는 집이란 최고의 집으로, 분명히 즉각적으로 보호 기능을 하는 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꿈같이 먼 시절에 이르면 마치 우주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집이란 피난처이고, 은신처이고, 중심지이다. 이 경우 상징들은 서로 합쳐진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대도시의 집들이란 대부분 그저 사회적인 상징만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집들은 그 수많은 방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런 역할도 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문과 층수를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런 집에서 꾸는 꿈은 우리를 다른 사람의 부인이나 아니면 어떤 부인의 집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고전심리학은 한 줄로 늘어선 방들 그리고 누구라도 환영하겠다는 듯 복도를 따라서 항상 반쯤 열려져 있는 모든 문들이 나타내는 의미를 밝혀냈다. 이 모든 것은 우주적인 힘을 갖고 있는 집, 완전한 집의 심오한 몽상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몽상적으로 완전한 집이야말로 우리가 아주 다양한 형태의 내밀한 몽상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여기서는 홀로 혹은 두 사람이 혹은 일가족이 살게 되는데 특히 한 사람이 살게 되는데 특히 한 사람이 살게 된다. 그리고 밤에 꾸는 꿈속에는 혼자 사는 집이 꼬박꼬박 등장한다. 그래서, 은밀하게 살도록 유혹하는 모든 것들이 모여드는 집의 원형이 갖는 어느 정도의 힘들은 혼자 살기를 원한다. 모든 몽상가들은 자기 골방으로 되돌아가야 하며, 그들은 진짜 골방 생활을 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그것은 오두막이었을 뿐

하지만 난 거기서 홀로 잠을 잤네.

……

난 거기서 웅크리고 있었지.

……

내 숨소릴 들으며

난 전율했었네.

내 자신의 진짜 취미를 안 곳은

바로 거기였네.

아무 소리없이

난 홀로 거기 있었네.

(쥘르 로맹 Jules Romains, 「오드와 기도 Odes et Prières」, p19.)

그러나 골방이 전부는 아니다. 집이란 종합된 원형이며, 변해버린 원형이다. 그 동굴은 지하실로, 그 허술했던 잠자리는 곳간으로 변했고, 집은 뿌리와 싹잎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라 발키리 La wal-kyrie의 집은 위대한 꿈인 것이다. 이 집이 사람을 끄는 것은 집을 가로지르고 있는 물푸레나무 때문이다. 힘있는 나무는 집의 기둥이다. “물푸레나무줄기는 집의 중심점이다”라고 바그너의 한 번역가는 말했다(1장). 지붕과 벽들은 나뭇가지에 붙어 있으며 나뭇가지가 지나가도록 해준다. 나뭇잎은 지붕 위의 지붕이다. 이런 집이 어찌해서 나무처럼 숲이 있어서 더욱 은밀한 신비처럼, 식물이 사는 계절들을 맞아들이고 집의 중심선에서 樹液이 살랑거리는 것을 느끼며 살지 않겠는가? 또한, 행복의 시간이 지그프리드를 劍쪽으로 부르며 다가오면, 나무 빗장이 달린 문은 봄의 유일한 숙명에 의해 열리리라….

뿌리로서의 지하실과 지붕 위의 보금자리를 가진, 몽상적으로 완전한 집은 인간정신이 가진 수직성 表象들 중의 하나이다. 꿈의 상징학을 연구한 아니아 테이야르 Ania Teillard는, 지붕은 몽상가의 머리와 의식적 기능을, 지하실은 무의식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명백한 보호처인 지붕이 갖는 이성적인 특성과, 곳간이 知的으로 돼 가는 증거들을 우리는 많이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하실은 너무나 명백하게도 무의식의 상징들의 영역이기 때문에 집이 대지에서 솟아오름에 따라 명료한 삶의 몫이 더 커진다는 것은 금새 분명해진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 가슴속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생에 대해 단순한 관점을 갖게 될 경우 〈층수가 있는 집에 산다〉는 것은 곧 붙박이처럼 꼼짝도 못하고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곳간이 없는 집은 욕구를 승화시키기 힘든 집이며, 지하실이 없는 집은 원형이 없는 집이다.

또한 계단은 불멸의 추억을 갖고 있다. 어린 시절의 집에 살려고 돌아온 피에르 로티 Pierre Loti는 쓰고 있다. 「권태의 꽃 Fleurs d'ennui」, Suleima p31). "계단은 이미 어둠에 잠겨 버렸다. 어린 시절 나는 밤만 되면 그 계단이 무서웠다. 죽은 사람들이 내 뒤를 쫓아 올라와서 다리를 잡고 늘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는 미친 듯 두려워서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났던 것이다. 그 공포감은 지금도 내게 생생하다. 얼마나 겁이 났던지 이미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나이 때까지도 그는 그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공포심을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도 정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집을 몽상적으로 파헤치고 어떤 방에 장중한 분위기를 부여하며, 무의식을 심오한 꿈으로 초대하기 위해서는 몇 계단만 오르는 것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에드가 포 Edgar Poe의 꽁트에 나오는 집에서는“서너 계단만 오르락내리락 거리면 찾아낼 수 있었다.”작가는 왜 「윌리암 윌슨 William Wilson」만큼이나 감동적인 한 꽁트에 그런 주석을 달려고 했던 것일까(깜짝 놀랄 새 이야기 Nouvelles Histoires extraordinaires, trad. 보들레르, p28). 이곳은 명료한 사고를 하기에는 너무 하찮은 지형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이렇게 대수롭지 않은 곳을 기억한다. 심오한 꿈은 이런 추억을 통해 은밀하게 쌓이게 된다. 나즈막한 목소리를 가진 유령은 끊임없이 심오한 느낌을 풍기는 집 속에서 태어나 산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에드가 포우는 다른 꽁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꽁트에서도, 그 세 계단이 바로 심오함에 대해 일종의 차이를 갖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갓난애 시절을 보냈던 레포세 城의 지형에 관한 자신의 추억을 말하고 있는 알렉상드르 뒤마는 쓰고 있다(「나의 회고록 Mes Mémoires」, I, p199). “나는 1805년 이후로 이 성을 보지 못했지만(A. 뒤마는 1802년에 태어났다) 계단을 한 개만 내려서면 그 부엌으로 들어갔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나서 부엌의 식탁과 벽난로, 자기 아버지의 소총을 몇 줄로 묘사하고 난 뒤마는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벽난로 저편에는 식당이 있었는데 세 계단만 올라가면 그곳으로 갈 수 있었다. 계단 하나와 계단 세 개, 왕국을 정의하는데는 이걸로 충분하다.” 식당으로 통하는 세 계단을 올라간다.

그러나, 분명히 곳간과 지하실의 상호적인 역동적 삶을 통해 우리가 예민한 감정을 갖게 될 경우 너무나 섬세한 이 인용구는 더욱 감각적으로 될 것이다. 그래서 몽상의 집의 중심축은 정말로 고정돼 버리는 것이다. “나는 열 두살 때 곳간에 틀어박힌 채 세계를 알았고 「인간 희극」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술광에서는 역사를 배웠다” 이제 집의 兩極에서 꾸는 꿈이 어떻게 다른지 보기로 하자.



우선 두려움이란 꽤 차이가 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자기 어머니 옆에 있으며, 중간 부분에서 살고 있다. 어린아이는 똑같은 마음으로 지하실이나 곳간에 가게 될까? 세계는 서로 너무나 다르다. 한쪽에는 어둠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빛이 있다. 한쪽에는 어렴풋한 소리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분명한 소리가 있다. 높은 곳에 사는 유령과 낮은 곳에 사는 유령은 서로 다른 어둠을 갖고 있다. 두 집의 불안은 그 음조조차 다르다. 양쪽 집에서 모두 겁을 내지 않는 어린애를 본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지하실과 곳간에서는 상상 속의 불행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어떤 무의식의 흔적을 남기는 그러한 불행을 탐지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선량한 부모들이 조심스레 공포를 몰아낸 집에서의 평온해진 삶의 이미지들만을 체험하기로 하자.

옛날처럼 촛대를 손에 들고 지하실로 내려가 보자. 들어열개는 마루바닥에 나있는 새까만 구멍이다. 집 아래로는 밤과 냉기가 자리잡고 있다. 꿈속에서 우리는 벽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밤 속에서 얼마나 많이 이런 식으로 내려갈까? 회색빛 거미줄 벽지 밑에도 역시 벽이 있다. 오! 왜 벽들은 번지르르 할까? 왜 옷의 얼룩은 지워지지 않는 걸까? 여자는 지하실에 내려가면 안 된다. 차디찬 포도주를 찾으러 가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다. 모파상이 말한 것처럼 (「몽또리올Mont-Oriol, Ⅲ」) “남자들만이 술창고에 갔었기 때문이다.” 계단은 얼마나 가파르고 삐걱거리며, 층계는 얼마나 미끄러운가! 그때는 돌계단을 단 한번도 씻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 위의 집은 너무도 깨끗하고, 밝고, 환기가 잘 되건만!

그리고 여기 대지가, 검고 습기찬 대지가, 집 밑의 대지가, 집의 대지가 있다. 통들을 괴기 위한 돌 몇 개. 그리고 돌 밑에는 더러운 존재인 쥐며느리가 있어서 -많은 기생동물들 모양- 꼼짝 않고 엎드린 채 살찔 수 있는 수단을 알고 있다! 통 속에다 일 리터를 채우는 그 순간만은 얼마나 많은 꿈과 생각이 찾아 드는지!

대지를 밀어내고 그 검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집에서 생활했다는 그러한 환상적 필요성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삐에르 귀에겡 Pierre Guéguen이 〈새 집을 다지기〉(「브르타뉴 Bretagne」, p44)를 묘사한 그 이상스런 페이지들을 무한한 꿈을 갖고 읽게 된다. “새 집을 짓고 나면 우리는 나막신으로 대지를 밟아 단단하고 편편한 토대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모래와 鑛滓, 그리고 떡갈나무 톱밥과 겨우살이 액으로 만든 신기한 탄력제를 혼합한 다음, 마을 청년들을 불러서 그 반죽을 밟도록 했다.” 또한 모든 페이지들은 바닥을 편편하고 단단하게 만든다는 핑계로 呪術들을 악착같이 땅에 파묻는 춤꾼들의 한결같은 의지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따로 남아 있는 공포에 대해 그리고 다져진 대지 위에 지어지는 이 오막살이 안에 대대로 전해질 공포에 대항해 싸우지 않는가? 카프카 역시 대지 위의 집에서 한겨울을 지냈다. 그것은 방 하나, 부엌 하나, 곳간 하나가 있는 자그마한 집이었다. 그 집은 프라하의 알키미스텐가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썼다 (막스 브로드 인용, 프란츠 카프카, p184). “자기 집을 갖고, 자기 방이나 아파트가 아닌 자기 집의 문을 세계에 대해 갑자기 열어버리고, 자기 거처를 벗어나서 고요한 거리를 덮고 있는 새하얀 눈을 직접 밟아보는 것은 전혀 특별한 감정이다….”

곳간에는 기나긴 고독의 시간들이 부루퉁한 얼굴을 해보기도 하고 깊은 명상에도 잠겨보는 변화무쌍한 시간들이 살고 있다. 곳간에서는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이 완전하게 부루퉁해질 수 있다. 곳간에 숨은 어린애는 어머니가 걱정할 걸 알고는 즐거워한다. 이 애가 어디를 갔을까?

곳간에서는 또 끊임없이 책을 읽는데, 이미 너무 지나치게 읽었기 때문에 책을 집어드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다. 곳간에서는 할아버지의 옷과, 숄과 리본으로 변장을 한다. 뭔가가 잔뜩 쌓인 곳간보다 몽상을 하기 좋은 박물관이 어디 있겠는가! 이곳에서는 낡은 물건들이 어린아이의 영혼 속에 평생 달라붙어 있다. 한 번의 몽상이란 가족의 과거를 조상들의 젊은 시절을 부활시켜 준다. 한 시인은 사행시로써 곳간의 어둠을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

곳간의 어떤 구석에서

나는 찾았다네

살아 움직이는

어둠을.

(삐에르 르브르디 Pierre Reverdy 「거의 모든 시간을 Plupart du Temps」, p88)

그리고 곳간은 무미건조한 삶이 시들어가면서 간직되는 삶이 군림하는 곳이다. 여기 손으로 만지면 삐걱거리며 시들어 가는 보리수나무가 있고, 여기 술통을 두른 테에 매달려 있는 포도알들이 그 송이들이 너무도 영롱한 빛을 발하는 눈부신 광택이 있다…. 모든 과일이 열리는 곳간은 열두 달 중에서 가장 불안한 가을의 세계, 시월의 세계이다….

만일 우리가 좁다란 사닥다리나 난간도 없이 벽 사이에 살짝 붙어 있는 계단을 통해 자기 집 곳간에 올라갈 기회가 있다면 몽상가의 영혼 속에는 아름다운 도표가 평생 자리잡고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으리라. 곳간을 통해서 집은 기이한 높이를 갖게 되며, 새나 쥐 등이 사는 집의 공중 생활을 구경하게된다. 곳간에 올라가면 집은 바람을 따라간다(지오노 Giono의 「내 기쁨은 영원히 Que ma Joie demeure」. p31참조). 곳간이란 랑드 지방의 오두막집에 사는 아눈찌오 Annunzio의 꿈과 마찬가지로 “진짜 가벼운 집”이다. “나뭇가지 위의 집은 가볍고, 소리를 내며 재빠르다.”(「죽음에 대한 성찰 Contemplation de la Mort」, trad. p62)

곳간은 또한 변덕스런 우주이다. 저녁의 곳간은 끔찍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알랭 푸르니에 Alain Fournier의 누이는 그 두려움을 적어 놓았다.(「알랭 푸르니에의 이미지들 Images d'Alain Fournier」, p21).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대낮의 고미다락방이다. 앙리는 밤의 고미다락방을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을까? 수많은 존재와 수많은 가벼운 스침과 속삭이는 수많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밤의 죽어버린 빛 아래로 열려있는 형태도 한계도 없는 저 높은 곳 사이로 들어가는 또다른 우주 속에서 그는 어떻게 혼자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방긋이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알랭 푸르니에는 「대장 몬느 Le Grand Meaulnes」 속에서 곳간을 다시 본다(2장, “밤새 우리는 곳간 세 곳의 침묵이 우리 방으로 뚫고 들어와서 우리 주위에 머무르는 걸 느꼈다”).

따라서 높은 곳에 자리잡지 않은 집은 진짜 몽상의 집은 아니다. 땅속의 지하실, 공동 생활을 하는 일층, 잠을 자는 이층, 그리고 지붕 밑의 곳간을 갖춘 그런 집은 깊은 두려움과 땅 높이에서의 공동생활의 단조로움, 승화를 상징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물론 꿈의 완전한 位相을 잡는 데는 상세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며, 또한 이따금씩은 아주 특별한 은신처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벽장과 계단 밑바닥과 오래된 장작곳간은 가두어진 삶의 심리학에 대해 암시적인 개요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지하독방과 은신처라는 정반대되는 두 가지 의미 안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특징짓는 집의 내밀한 삶에 대해 전적으로 의지하게 될 경우 우리는 지하독방 속에서 길러지는 어린이의 분노와 공포들을 한쪽으로 제쳐놓게 된다. 우리는 오직 적극적인 꿈들만을 무수한 이미지들을 가진 충동들처럼 삶을 따라 돌아오게 될 꿈들만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우리는 갇혀 있는 모든 어린아이들이 상상적 삶을 원한다는 사실이 보편적인 법칙이라 생각할 수 있다. 몽상가가 더 작은 오막살이에서 살면 살수록 꿈들은 더욱 커져가는 것이다. 야네뜨 들레땅-타르디프 Yanette Delétang-Tardif는 말한다 (「에드몽 잘루 Edmond Jalou졁」, p34). “꽁꽁 갇혀 사는 존재는 물결을 일으킨다.” 로티는 고독 속에 웅크리고 있는 몽상가의 이런 변증법과 무한을 추구하는 몽상의 물결들을 훌륭하게 표현해 냈다. "아주 어렸을적 나는, 내게는 브라질처럼 보였으며 처녀림의 인상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던 자그마하고 은밀한 구석들을 알고 있었다." (「권태의 꽃」, Suleima, p355) 어린아이에게는 고독의 장소, 모퉁이를 인정함으로써 그의 삶을 심오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스킨 갈은 사람은 부모들의 넓다란 식당에서 자기 〈모퉁이〉에 틀어박힌 채 완전한 몇 시간을 보냈다. 그는 청춘시절의 회상록 속에서 이 얘기를 길게 하고 있다. 결국 유폐된 삶과 개방된 삶은 둘 다 정신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추상적인 형식이 되기 전에 이것은 배경과 무대를 가진 심리학적 현실이 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삶에 있어서는 집과 들판이 필요하다.

대지와 울타리 속과, 그 우주 속에 채워진 시골집과, 그리고 그 몇몇 칸이 우리의 거처로 쓰이며 도시의 鋪道위에만 지어지는 건물 사이의 꿈의 풍부함이라는 차이를 이제 우리는 느끼지 않는가? 통보다는 상자가 더 많이 쌓인, 포석이 깔린 그 방이 자하실을 수가 있는가?

이렇게 해서 어떤 상상력의 철학자 역시 〈대지로 돌아감〉이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우리가 이 사회적 문제를 몽상에 잠긴 정신의 차원에서만 고려함으로써 자신의 무능을 변명한다 해도 상관은 없다. 그가 단지 시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꿈과 지하실과 곳간이 있는 〈몽상의 집〉을 소재로 시를 쓰게 하도록 권유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시인들은 우리가 우리의 추억들을 머무르게 하도록, 그리고 현실생활이 잘 뿌리박게 할 가능성을 늘 가지고 있지는 않은 내밀성의 상징들과 조화를 이루며 그 추억들을 집의 무의식 속에 머무르게 하도록 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다.



그 모든 특성들 속에서 그리고 그 모든 배경과 함께 보호받는 의식을 설명하려면 여러 페이지가 필요한 것이다. 명료한 인상은 수없이 많다. 추위와 더위, 태풍, 비에 대해 집은 분명한 보호처이며,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추억 속에 그토록 간단한 주제에 생명을 불어넣을 만한 수많은 변형을 갖고 있다. 모든 인상들을 정돈하고 그 모든 보호 가치들을 분류하고 나면 우리는, 말하자면 집이 반(反) 우주이거나 아니면 반대의 세계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가장 무력한 보호 속에서 내밀한 꿈의 몫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를 들자면 황혼녘이 되면서 밝아져서 밤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집만을 생각하자. 무의식적 가치와 의식적 가치의 경계선에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자마자 우리는, 우리가 집의 몽상 상태가 감지되는 점을 만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보호되는 빛의 가치에 대해 말하는 기록이 있다. “이제 밤은 창유리에 의해 차단되었으며, 이 창유리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시각을 제공해 주는 대신 그 세계를 이상한 방법으로 뒤틀었기 때문에 질서와 부동성, 단단한 대지는 집의 내부에 자리잡은 것 모양 보였다. 반대로 외부에는 반사광뿐이어서 그 속에서는 流體가 된 사물들이 흔들거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또한 버지니아 울프는 등불이 켜진 방이 갖고 있는 섬나라 같은 성질, 즉 어둠의 바다 속에 떠있는 빛의 섬 하나 - 그리고 기억 속의, 망각의 세월 속의 추억 하나에 주의한다. 램프 밑에 모인 존재들은 섬 위, 대지의 구덩이 속에 모인 인간 집단을 형성할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존재들은 〈외부의 유동성〉에 대항해서 서로 단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존재들이, 억압된 어둠에 대항하는, 집의 빛의 힘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더 잘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벽은 瑪瑙로 만들어져 있어서 램프불은 한껏 훤하네….

(쌩 존 페르스 ST·John Perse, 「바람 Vents」, 4.)

자기 소설 중의 하나에서 (「어둠의 무게 Le Poids des Ombres」) 메리 웹은 극도로 간결하게, 즉 자기의 순수한 몽상 상태 속에서 밤의 들판 가운데의 등불이 켜져 있는 집에서 풍기는 그러한 안도감에 대해서 썼다. 등불이 켜진 집, 그것은 몽상에 잠긴 평온함의 등대이다. 등불이 켜진 집은 사라져 버린 어린 아이라는 꽁트의 주요소이다. “자그마한 불빛 하나가 나타난다 - 저기, 아주 멀리, 아주 멀리, 엄지동자의 꽁트 속에서처럼.”(로티, 「권태의 꽃」, 〈몽테네그로에로의 여행〉, p272) 작가가 어떤 꽁트의 이미지들을 사용해서 현실적인 것을 표현한다는 사실도 유의해 두자. 여기서 세세한 것은 그 어느 것도 명확히 밝혀주지 않는다. 이 세세한 것들은 심오한 감정을 풍부하게 해야 한다. 우리들 중 그 누구의 아버지가 어느 겨울날 저녁 가족들 앞에서 「해방된 예루살렘」을 큰 목소리로 읽어준 적이 있었는가? 하지만 우리들 중 그 누구가 끝없는 몽상이 없이 라마르틴의 페이지를 읽을 수 있는가? 우리도 모르는 몽상적 분위기의 진실을 통해서 이 페이지는 몽상적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철학자의 무게로 얘기하자면 무대란 몽상적 선험성을 갖고 있으며 원초적인 꿈을 꾸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젠가 우리의 물질적 상상력이라는 관점으로부터 낮과 밤의 상상적 변증법을 회복할 경우에만 우리는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집이 어두워지는 저녁과 억제된 밤의 의식이 될 때 집의 몽상이 극도로 압축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당분간은 우리에게 충분하다. 이러한 의식은 역설적인 방법으로 - 그러나 너무도 쉽게 설명할 수 있게! - 우리 가슴속의 더욱 심오하고 더욱 은폐된 것을 감동시킨다. 밤이 되면서 우리 가슴속에서는 밤의 삶이 시작된다. 램프는 우리를 엄습하게 될 꿈을 기다리게 하지만 이미 꿈은 우리의 명료한 사고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러면 집은 두 세계의 경계선 위에 있게 된다. 우리가 보호를 해주는 모든 꿈들을 모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래야 우리는 메리 웹의 생각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집이 없는 사람들의 밤이란, 진짜 야생동물,”그러나 폭풍우 속에서 고함을 지르는 동물이 아니라 거대한 동물로서 보편적인 위협처럼 어디에나 존재한다. 만일 우리가 비바람에 대한 집의 투쟁을 정말로 겪었다면 우리는 스트린드베그르 Strindberg와 함께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인페르노 Inferno」, p210). “모든 집이 마치 배(船)모양 벌떡 몸을 일으킨다.” 현대 생활은 이들 이미지들의 맹렬함을 누그러뜨린다. 현대 생활은 집이란 것을 추상적인 평온의 장소로서 받아들이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양상을 띌 수 있는 추상적 평온일 뿐이다. 현대 생활은 딱 하나, 우주적 양상만을 잊고 있다. 우리의 밤은 비인간적인 밤에 대항해서 인간적으로 되어야 한다. 우리의 밤은 보호받아야 한다. 집은 우리를 보호해 준다. 우리는 집의 역사를 쓰지 않고는 무의식의 역사를 쓸 수가 없다.

실제로, 인적 없는 들판의 등불이 켜진 집은 수세기 동안 모든 문학에 등장하고 있는 주제이다. 등불이 켜진 집이란 숲을 비추는 별과도 같다. 등불이 켜진 집은 길을 잃어버린 여행자를 인도한다. 일년을 가는 태양은 하늘의 열두 집에서 산다고 말하기를 천문학자들은 좋아하며, 시인들은 등불의 불빛을 내밀한 별빛이라고 끊임없이 노래한다. 이러한 은유는 참으로 서투르기는 하지만 그러한 은유가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러한 은유가 자연스럽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확신시켜 준다.

窓 같은 특이한 주제들은 우리가 집의 주요한 특징들을 이해해야만 그 완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는 우리 집 속에 숨어서 밖을 바라본다. 들판 한 가운데 서 있는 집의 창은 평원으로 먼 하늘로 어떤 의미로 보자면 심오하고 철학적인 외부 세계로 열려 있는 눈이며, 그런 쪽으로 던져진 시선이다. 집은 그 집의 창문 뒤로 - 그리고 창가가 아닌 - 자그마한 창문 뒤로 그리고 곳간의 天窓 뒤로, 그 방의 내밀성이 더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내부와 달라지는 외부의 의미를 꿈꾸는 인간에게 제공한다. 내밀성과 우주의 변증법은 창틀 안에서 세계를 보는 숨겨진 존재의 인상에 의해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D·H 로렌스는 한 친구에게 쓴다(서한집, trad. Ⅰ, p173). “기둥들, 외부와 내부 사이에 난 구멍과도 같은 둥근 창문들, 침묵을 지키는 한 영혼에 딱 어울리는 돌이 박힌 낡은 집, 시간의 흐름 속에 막 파묻히려는 순간 그 둥근 창문을 통해 새벽 중의 새벽이 태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영혼….”

테두리를 두른 이러한 몽상들, 명상이란 것이 몸을 숨긴 명상가의 시선인 이러한 집중된 몽상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 풍경이 어느 정도의 장대함을 갖고 있다면 몽상가는 무한함과 내밀성의 일종의 변증법을 그리고 존재가 확장과 안전을 차례로 발견하는 현실적인 리듬분석을 체험하고 있는 듯하다.

무한한 꿈들의 중심을 단단히 고착시킨다는 예를 듦으로써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연구하게 되는데, 여기서 베르나르뎅 드 쌩 - 피에르 Bernardin de Saint - Pierre는 은신과 휴식의 몽상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인, 속이 빈 나무 밑바닥의 거대한 나무를 꿈꾸고 있다. “자연의 작품들은 이따금씩 여러 종류의 무한함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그 줄기에 空洞이 있고 이끼로 덮여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는 시간 속의 무한함의, 그리고 높은 곳에서의 무한함의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 이 나무는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세기의 기념물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마치 우리가 그 어두운 색깔의 한 가지를 통해서 광활한 원경을 언뜻 보게 될 때처럼 그 나무가 끝없이 펼쳐진 무한함을 거기다 덧붙이게 될 경우 우리의 경외심은 늘어난다. 거기다가 계곡의 깊이나 초원의 높이와 대조를 이루는 울퉁불퉁한 나무 밑둥, 하늘의 쪽빛과 대조를 이루고 어울리는 그 경탄할만한 어스름, 바위처럼 꿈쩍않는 두터운 줄기,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그 장엄한 속삭임이 우리 고통 속에 스며드는 것 같은 위엄 있는 꼭대기를 가진 나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보호 의도를 통해 확신시켜 주는, 우리가 하찮다는 생각을 덧붙이기로 하자. 완전하게 조화를 이룬 나무는 뭔지 모르게 종교적인 숭배심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플린느는, 나무는 신의 첫 신전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텍스트의 한 문장을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문장이 보호받는 동상과 확대되는 몽상의 기원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끼가 덮히고 空洞이 있는 이 나무 줄기는 은신처이며 몽상의 집이다. 이미 사고를 통해서 속이 빈 나무를 본 몽상가는 틈바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는 원초적 이미지에 의해서 내밀성과 안전과 모성적 보호의 인상을 명확하게 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는 나무의 중심에, 집의 중심에 있게 되며, 이 내밀성의 중심으로부터 그는 한 세계의 광대함을 보고 의식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그 멋진 안식처에서 본다 할지라도 높은 곳의 무한함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는 나무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무한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는 속이 빈 나무 줄기 속에 있는 존재의 편협함을 상상했어야 했다. 바로 여기에, 베르나르뎅 드 쌩 - 피에르가 습관적으로 전개하는 대비보다 더 본질적인 대비가 있다. 우리는, 몽상의 집으로서의 협소한 洞穴들의 다양한 상상적 가치들을 여러 번에 걸쳐 주목했다.

그러나 나무 한가운데에서의 몽상은 광대하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잘 보호받고 있으며, 나의 보호자는 전지전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비바람과 죽음에 도전한다. 작가는 완전한 보호를 꿈꾼다. 즉 여기서 나무는 태양을 가리기 위한 그늘의 단순한 저장고도 아니며, 비를 막기 위한 단순한 덮개도 아니다. 효용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인의 진정한 꿈을 가질 수는 없다. 베르나르뎅 드 쌩 - 피에르의 나무는 버지니아 울프의 떡갈나무처럼 우주적인 나무이다. 그의 나무는 우주에 대한 참여를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를 키우는 이미지이다. 꿈꾸는 존재는 자신의 진정한 거처를 발견한다. 속이 빈 나무의 밑바닥에서 空洞이 있는 나무 줄기의 중심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뿌리박힌 거대함의 꿈을 좇았다. 이 몽상의 거처는 우주의 거처이다.

우리는 방금 몽상가가 중심부의 고독에 자신을 의지하는 중심의 몽상을 묘사하였다. 더욱 외향적인 몽상들은 사람을 환영하는 집과 공개된 집의 이미지들을 우리에게 제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타르바 - 베다의 일부 찬가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다의 집은 동서남북에 하나씩 네 개의 문을 갖고 있으며 찬가는 노래한다.

동방으로부터 오두막집의 웅대함을 경배!

남방으로부터…경배!

서방으로부터…경배!

북방으로부터…경배!

天底로부터…경배!

天頂으로부터…경배!

모든 곳으로부터 오두막집의 웅대함을 경배!

오두막집은 우주의 중심이다. 우리는 자신이 집주인이 됨으로써 우주를 소유하게 된다.

"천지간의 넓이에 의해 나는 너의 이름으로 여기 이 집을 넘겨받는다. 나는 구별할 수 없는 무한함을 측량할 수 있는 공간을 이용해서 나를 위해 보석으로 만든 무궁무진한 胃를 만들며, 그것에 의해 나는 오두막집을 넘겨받는다….”

이 중앙에는 행복이 집중되어 있다. 하나의 가치를 보호한다는 것은 모든 가치를 보호하는 것이다. 오두막집 찬가는 다시 한번 읊고 있다.

소마神의 창고, 아니 神의 광장, 배우자들의 거실과 의자, 神들의 좌석, 당신은 그 모든 것, 오 여신이여, 오 오두막집이여.



따라서 몽상의 집이란 추억과 꿈속에서 보호의 힘을 갖는 이미지이다. 몽상의 집이란 기억이 그 이미지들을 다시 발견하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집이 아닌 집에서 우리는 살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곳에서 위안의 역학을 되찾기 때문이다. 몽상의 집은 우리를 보호해 주며 따라서 우리를 위안해 준다. 산다는 행위는, 무의식적 가치, 무의식이 잊지 않는 무의식적 가치들로 덮여 있다. 우리는 무의식을 휘묻이 할 수는 있지만 그 뿌리를 뽑을 수는 없다. 소유주의 본능의 거친 만족과 명료한 인상 너머에는 뿌리를 박고자하는 더욱 심오한 꿈이 존재한다. 언제나 대지 위에 추방되어 있는 무국적의 저 영혼들 중의 하나를 고정시켜야 했던 융은, 정신분석학적 목표에서 그 영혼들로 하여금 한 뼘의 밭과 한 그루의 나무, 아니면 정원 한 구석의 자그마한 집 등 뿌리를 박고 살려는 의지에 이미지들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획득하도록 충고했었다. 이 충고는, 무의식의 깊숙한 층, 정확히 얘기하자면 몽상의 집의 원형을 발굴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독자의 주의를 끄는 것은 특히 이 점이다. 그러나, 물론 다른 것들도 집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이미지의 완벽한 연구를 위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미지들의 사회적 특성들을 검토한다면 우리는 앙리 보르도 Henri Bordeaux의 「집 La Maison」 같은 소설을 주의깊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검토해 보면 이미지의 다른 층, 즉 초(超)자아층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집이란 가족의 행복이다. 집은 가족을 보존할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앙리 보르도의 소설은, 집을 위태로운 지경에 빠뜨리는 아버지와 집을 견실하고 밝게 만드는 그 아들간의 세대 갈등 속에서 가족이 연구되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생각하는 의지와 예측하는 의지를 위해 꿈꾸는 의지를 차츰차츰 버려가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의식적으로 되어가는 이미지들의 왕국에 접근해 간다. 우리는 더욱 은밀한 가치들의 연구를 더욱 분명한 의무로 삼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친근한 집의 문학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귀향의 이미지들 속에서 무의식적 가치들을 향한 똑같은 방향을 찾아낼 수 있다. 여행의 개념 자체는, 만일 우리가 그 개념에다가 귀향이라는 보충 개념을 덧붙일 경우 또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쿠르베(Courbet)는 한 여행자의 불안정에 대해 놀라워했다. “그는 동방에 간다. 동방이라고? 그렇다면 그는 고향땅이 없단 말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런 일에 활기를 불어넣는 몽상 상태와 더불어 어머니에게로 돌아간다는 고전 심리분석에 의해 특징 지워졌다. 이러한 설명은 정당하긴 하겠지만 너무 집단적이며, 총괄적인 해석에 너무 빨리 집착하고, 무의식의 심리학을 상세히 밝혀줘야 할 뉘앙스를 너무 많이 소멸시켜 버린다. 어머니의 품의 모든 이미지들을 잘 이해하고 그 이미지들의 자세한 대체품을 검토한다는 것은 흥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집이 그 상징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지하실과 곳간, 부엌, 복도, 장작곳간과 구별되는 모든 상징적인 것들을 확장시킨다면, 우리는 서로 다른 상징들의 자율성을 깨닫게 될 것이며, 또한 집이 그 가치들을 적극적으로 건설하며 무의식적 가치들을 모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무의식 역시 그 선택의 건축학을 가지고 있다.

이미지가 사용된 심리분석은 따라서 표현의 가치뿐만 아니라 표현의 마력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야 한다. 몽상 상태란 유착을 시키는 힘인 동시에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다. 몽상 상태는 움직이고 있는데, 전혀 단순하지만 새로운 이미지들을 찾아내는 시인들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활발하게 움직인다. 위대한 시인이란 무의식적 뉘앙스에 대해 착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밀로즈 詩選의 최근판 서문에서 에드몽 잘루 Edmond Ja-loux는, 놀랄 정도로 명료하게,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것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구분지은 한 시를 인용하고 있다.

나는 말하지, 우리 엄마. 그리고 나는 당신을 생각하네. 오 집이여!

아름다운 사람들의 집은 내 유년기의 어두운 부분이었지.

〈우수 Mélancolie〉

어머니와 집, 이이야말로 같은 싯구 속의 두 원형이다. 두 가지 방향에서 두 가지 이미지들의 대용품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암시한 꿈의 방향을 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두 원형 중에서 가장 큰 것, 모든 원형 중에서 가장 큰 것, 즉 어머니는 다른 모든 원형들의 삶을 소멸시키리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우리를 기원으로 인도하는 道程에는 우선 우리를 우리의 어린 시절로, 현실을 추월하기 위해서 상징을 권하고 이미지를 원하는 꿈꾸는 듯한 우리의 어린 시절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 모성이라는 현실은 내밀성의 모든 이미지들에 의해 즉시 증가되었다. 집의 詩는 이 일을 다시 시작했으며, 내밀성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었고 휴식의 철학을 다시금 안전하게 만들어 준다.